*이 자료는 영남일보 김봉규 기자가 쓴 것으로 아직 기사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참고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운문구곡
운문구곡은 소요당 박하담이 청도군 운문면과 금천면에 걸쳐 흐르는 운문천 일대에 설정해 경영한 구곡이다.
<박하담은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응천(應千), 호는 소요당(逍遙堂). 증조할아버지는 함양 군수를 지낸 박융, 할아버지는 소고공 박건이며, 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박승원(朴承元)이고, 어머니는 경절공 하숙부(河叔溥)의 딸 진주 하씨(晉州河氏)이다.
박하담(朴河淡)[1479∼1560]은 1516년(중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뒤 여러 번 대과에 실패하자 청도의 운문산 아래 눌연(訥淵) 위에 정자를 짓고 소요당이라 명명하고 풍류로써 여생을 보냈다. 조정에서 박하담의 학행을 듣고 감역·봉사·사평 등의 직임을 주어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기묘사화로 낙향한 김대유와 교분이 두터워 함께 청도 지역에 사창(社倉)을 설치하였으며, 조광조 일파가 처형되자 그의 문집을 불태워 버렸다. 82세로 죽은 뒤 청도 칠엽산에 묻혔다.
조식·성수침 등과 교유하였으며, 저서로는 『소요당일고』 5권이 있다.
묘소는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칠엽산에 있으며, 묘재인 칠엽재(七葉齋)가 있다.>
소요당일고‘(逍遙堂逸稿)에 ’중종 31년(1536년) 선생의 나이 58세에 ‘운문구곡가’를 지으시다. 무이도가에 차운하니 소요하는 취미를 읊은 시이다.‘
박하담은 1536년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운문구곡가를 지은 것이다. 그는 우문천 일대에 운문구곡을 설정하고 소요 산책하며 구곡원림을 경영했다.
그의 삶이 어떠했기에 구곡을 운문천에 설정하고 은거하며 삶을 살았을까
명문 집안에 태어난 박하담. 선조는 고려시대부터 벼슬에 나아가 높은 관직에 올랐으며 포은 정몽주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여 가학으로 이어갔다 조부 때 밀양에서 청도로 옮긴 이후 청도의 대표적 사족으로 자리잡게 된다.
연산군은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세조를 겨냥한 대역무도의 행동으로 보고 김종직을 剖棺참시하고 그의 제자 김일손이 그 글을 실록에 기재했다 하여 극형에 처했다. 그리고 정여창 김굉필 등 문인 30여명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당시 20세이던 박하담은 김일손 죽음을 애도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제나라 역사에 다투어 쓴 것은 사관의 곧음이고(齊簡爭書惟史直)/ 공자는 꺼림을 빌려서 때에 따라 권도를 하였네(魯田假諱達時權 / 어지러운 한나라 세상에 초연히 재앙을 면하니(瞻烏漢世超然免/나는 신도반이 또한 족히 현명하다 말하리라(我屠謂蟠亦足賢)
그는 사화를 통해 사관의 곧음과 공자의 權道를 생각했다.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을 기록하는 사관이 있어서 제나라 역사는 사실이 기록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正道로 대처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권도 즉 로 임하여 사람이 희생되는 일을 막았다. 그런데 무오사화에서 사림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역사 기록에 정도로만 대처하다 보니 김종직은 부관참시당하고 김일손을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박하담은 신도반이 黨禍에 초연하여 재앙을 면한 것을 현명하다 했다. 중국 후한 말의 학자이며 은자였던 신도반을 黨錮의 화를 피해 산으로 들어가 살면서 대장군 하진, 동탁 등의 초빙을 물리치고 절조를 지키며 생을 마친 인물이다.
이런 생각으로 박하담은 벼슬길에 나아가는데 뜻을 주지 않고 은거하는 삶을 택했다.
‘하늘을 위로 하고 못을 아래로 하여 여기에서 소요하고, 고금을 포섭하여 여기에서 소요하여 자적의 즐거움을 깃들이니 마침내 집을 이름하여 소요라고 하였다. 나의 소요는 구름에 날고 하늘에 노닒이 아니라 스스로 즐거운 곳에서 자재하는 것이다. 산을 마주하고 물에 임하여 태극의 형상을 징험하고 꽃과 풀을 품평하여 조물주의 뜻을 생각하고, 올려 보고 굽어 보면 왼쪽으로보고 오른쪽으로 보니 아침의 햇빛과 저녁의 어둠이 기후를 달리하고 봄의 화장과 가을의 장식이 형태를 변화시켜 온갖 형상을 제공하면서도 무진장하다.’ 소요당일고 중 소요당기
소요당은 은거하는 자연에서 그 안에 내재하는 이치를 궁구하고 깨닫고 관조하는 소요의 삶을 살고자 했다. 그 소요의 공간으로 운문을 택했다. 그는 雲門賦에서 ‘곤륜산의 한 가지 갈라져/접역鰈域의 산들을 두르네/ 嶠南에 道州가 있어/방박旁礡을 맺으며 꿈틀하네/산들이 고을 동쪽 모이니/ 가장 아름다운 곳 운문이네’라고 읊었다.
소요당은 청도의 산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 운문에 은거하면서 ‘운문구곡가’도 지었다.
하늘이 문을 열어 땅이 신령을 기르니 天闢雲門地류靈/ 그가운데 산수가 자연스레 맑아라 箇中山水自然淸/ 지팡이 나막신으로 소요하며 진경을 찾으니 逍遙笻리尋眞境/ 무이의 굽이굽이에 노래하여 화답하네 歌和武夷曲曲聲 <소요당집>
박하담은 서시에서 운문구곡을 거슬러 소요하며 주자의 무이도가에 화답하는구곡가를 읊는다.
일곡이라 맑은 물에 일엽선 띄우니 一 曲淸流一葉船/ 원두에 약야천이 있는 줄을 알겠네 源頭知有若耶川/ 옛 나루 거슬러 올라서 망연히 서니 遡洄古渡茫然立/ 바위는 구름 끝에 솟고 새는 안개 속에 우네 巖出雲端鳥叫烟
1곡시다. 박하담은 일곡의 지점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仙巖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암은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선암서원 앞 하천변에 서 있는 바위다.
후학들이 박하담을 기려 건립한 선암서원은 박하담과 삼족당 김대유를 기리고 있다.는 선암서원(선암서당 편액)은
약야천은 운문사 옆을 흐르는 하천이다. 운문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약야천으로 모여 흐르고 이물은 다시 선암 앞으로 흘러간다. 원두는 하천의 근원이 도의
박하담은 구곡을 거슬러 올라가며 도의 경지에 나아가고자 한다.
이곡이라 가운데 석고봉을 여니 二曲中開石鼓峯/ 완연히 사랑하고 즐기는 모습이네 宛如雲樂舞昭容/ 이곳에 이르러 기생 생각 없으니 吾人到此心無妓/ 꿈밖의 양대로 가는 길 몇 겹인가 夢外陽臺路幾重
이곡은 석고봉이다. 운문댐 입구 대천 삼거리에서 운문사 가는 길을 따라 1.5키로 정도 가서 운문호를 바라보면 호수 가운데 우뚝 솟은 봉우리가 보인가. 이것이 석고봉이다. 석고봉 주위의 물길 모습은 수몰되어버렸다.
석고봉에서 당시에는 남녀가 사랑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양대는 고사에서 유래된 용어로 남녀가 정을 나누는 장소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곡에서 여색의 유혹을 극복하고 구곡을 향해 나아감을 노래하고 있다.
박하담은 ‘운문부’에서 운문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 얼굴을 한 옥녀산을 유람하는 사람들이 만나면 더 이상 유람을 하지 않고 머물며 마음을 그르친다고 지적하며 경계하고 있다.
삼곡이라 빗긴 언덕 우선 모양이고 三曲橫坡等藕船/ 신선이 물외에 노니니 하루가 일 년이네 仙遊物外晝如年/ 간장 창자 사이 다섯 근심 지금 다 씻으니 腸間五累今消盡/밝고 밝은 마음 내 가장 사랑하네 寶鑑明明我最憐
삼곡 횡파는 석고봉 맞은편에서 6키로 정도 위에 위치한다. 박하담의 표현대로 우선, 즉 연 모양의 배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연 모양의 배가 운문천을 따라 내려가는 듯한 이 언덕에서 박하담은 신선처럼 물외에 노닐었다. 여기서 근심을 다 씻고 밝은 마음을 회복하고 그 마음으로 살고자 했다.
사곡이라 시내를 둘러서 사면이 바위이니 四曲環溪四面巖/ 아름다운 꽃과 기이한 풀 드리웠네 요花異草影毿毿/ 천문동 골짜기에 기절처가 많이 있어 天門洞壑多奇絶/ 돌기운 구름에 닿고 달은 못에 비치네 石氣摩雲月印潭
사곡 천문동을 읊고 있다. 천문동은 횡파 입구에서 운문가 방향으로 3키로 정도 올라가면 신원교가 나오는데, 신원교 근처의 물굽이가 이곳이다. 사곡 아래에서 이 운문천과 신원천이 만나 운문댐으로 흘러든다.
오곡이라 산이 높고 땅은 더욱 깊으니 五曲山高地愈深 연하가 곳곳에 평평한 숲을 덮고 있네 煙霞多處 애平林/ 분향하고 묵묵히 앉아서 주역 읽으니 焚香黙坐看周易/ 내원암이 맑고 서늘해 심성을 기르네 內院淸凉養性心
5곡 내원암 입구이다. 사곡에서 운문사 쪽으로 2.5키로 올라가면 운문사 가는 길과 내원암 가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을 만난다. 이곳에서 운문천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한 굽이가 나온다. 이 굽이가 오곡이다. 고요하고 청정한 곳에서 주역을 읽으며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심성을 기른다는 것.
육곡이라 숲의 문이 돌물굽이 마주하니 六 曲林扃對石灣/ 잔나비 울고 꽃 피어도 상관하지 않네 猿啼花笑不相關/ 생생하는 사물 이치 천지에 보노라니 生生物理觀天地/ 유인으로 노에 의지해 한가롭게 하네 能使遊人倚櫂閑
6곡 석만이다. 석만은 운문사와 사리암 중간쯤 되는 지점이다. 시내가 온통 돌로 이루어져 있어 그렇게 명명한 모양이다. 여기서 그는 잔나비가 울고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며 한가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칠곡이라 백탄으로 내려가니 칠곡登臨下白灘/ 우뚝 솟은 사찰 수풀 건너에 보이네 笤효梵宇隔林間/ 구름 헤친 큰 손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披雲巨手今安在/ 가을달 맑은 정신 수면 위에 차갑네 秋月精神水面寒
칠곡은 백탄이다. 운문면 신원리. 육곡 석만에서 길을 따라 1키로 정도 올라가면 사리암 입구에 도착한다. 이곳 근처의 시내가 백탄이다. 이곳의 운문천은 하얀 모래, 흰 돌이 바닥에 깔려 흰 여울(백탄)을 이루고 있다. 칠곡에서 산길을 따라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가면 사리암이 나온다
칠곡에서 가을 달과 같은 맑은 정신을 노래하고 있다.
팔곡이라 운림이 합했다 다시 열리니 八曲雲林合復開/ 도인봉 아래 작은 시내 돌아 흐르네 道人峯下小溪洄/ 이 한가한 가경 아는 사람 드물어 此閑佳境人知少/ 늙은이 읊조리며 돌아오네 ???翁伴詠來
팔곡 도인봉은 칠곡에서 조금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산봉우리(639)이다. 봉우리 부분에 큰 바위가 비스듬히 드리워 있는데, 멀리서 보면 도인이 앉아 수련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신라 때 한 스님이 이곳에서 수련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박하담은 팔곡에서 절경을 찾는 일반인들은 모르나 자신은 이곳에서 한가한 가경, 즉 도의 극처에 가까움을 알고
구곡이라 산이 다하고 물 맑아서 九 曲山窮水瑩然/ 물고기 발발하게 평천에서 뛰노네 遊鱗 潑潑躍平川/ 고깃배는 이 날도 도원을 찾지만 漁舟此日桃源覓/ 달리 운문에 한 동천 있다네 別有雲門一洞天
구곡은 평천이다. 팔곡에서 산길 따라 1.5키로 정도 가면 운문산이 끝나는 지점에 이른다. 이 굽이에 이르면 계곡이 환하게 열리면서 확 트인 공간이 나타난다. 멀리 가지산이 보이고 가까이는 운문산 끝자락이 보인다. 주자의 무이구곡의 구곡을 떠올리게 한다.
박하담은 별천지인 무릉도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이 바로 별천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