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안사람들/필운동(弼雲洞)
물매 정인량
경복궁은 싫어 이 동네가 좋아, 필운동(弼雲洞)
동네 이름은 ‘필운대’에서 따왔다. 이 동네 배화여학교는 본래 미국 선교사 캠벨이 세웠다. 서울지방경찰청 부근에 있다가 1916년에 지금 위치로 옮겼다. 일대가 인경궁 자리로 추정한다. 임진왜란 뒤 광해군은 경기도 교하로 천도하려했지만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이후 인왕산 아래가 명당이라는 승려의 말을 믿고 인경궁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이복동생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있다는 소문이 나자 그를 누르려 경덕궁(경희궁)을 지었다. 경희궁보다 컸던 인경궁은 결국 완공하지 못하고 세월이 흐르며 사라졌다. 정확한 규모와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인경궁의 남쪽 경계가 경덕궁일 것으로 추정한다.
(출처/중앙일보)
필운동의 동명은 1914년 동명 제정 시 이항복 대감이 살던 필운대(弼雲臺)에서 유래되었다.
조선 태조5년(1396) 한성부를 5부(部) 52방(坊)으로 나눌 때 지금의 필운동은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속한 지역이었다. 영조27년(1751) 9월에 만든 도성의 각 동계(洞契)를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3군문에 분속(分屬)하여 유사시 동민들을 출동, 방어하게 하고자 만든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서부 인달방 분선공내계(分繕工內契), 사직동계, 수성궁내계(壽城宮內契), 내수사계(內需司契)였다.
고종4년(1867)에 간행된 『육전조례』에는 서부 인달방 사직동계, 수성궁내계, 내수사계, 수성궁월변계(壽城宮越邊契) 일원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1895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로 한성부 5부를 5서(署)로 고치고 많은 동(洞), 계(契)를 신설함에따라 서서(西署)인달방 내수사계 도가동(都家洞), 사직동계 사직동, 수성궁계 송목동(松木洞)·도가동·남정현(南征峴), 분선공계(分繕工契) 진정동(塡井洞)·필운대·구동(龜洞)이 지금의 필운동 지역이었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거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면서 경기도의 관할로 격하되었고 이듬해 4월 1일경기도령 제3호로 개편된 경성부 서부 인달방으로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로 경성부 관내 186개의 동(洞), 정(町), 정목(丁目)의 명칭과 구역을 새로 정할 때 서부필운대·구동·진정동(塡井洞)·대구도가동(大口都家洞)·도가동·송목동(松木洞)과 남정현·사직동 일부를 병합하여 필운동이라고 하였다.
같은 해 9월29일 출장소 제도가 실시되면서 서부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이듬해 6월 1일 출장소 제도가 폐지되어 경성부필운동이 되었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와 경기도고시 제32호로 경성부의 동명과 관할구역이 대폭 개편될때 경성부 필운정(弼雲町)으로 바뀌었다.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구(區) 제도가 신설되면서 종로구역소 필운정이 되었다. 광복 후인 1946년10월 1일 서울시헌장과 미군정법령 제106호에 의해 일본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필운동이 되었다.
1955년 4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6호에 의거 행정동제가 실시되면서 필운동은 체부동과 합쳐 매동사무소 관할이 되었다가 1970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에 의거 체부동사무소가 신설되면서 필운동, 내장동, 체부동을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1975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981호에 의거 사직동사무소에 합쳐져 현재에 이른다.
동네 지명 유래
필운동의 동명이 유래된 필운(弼雲)은 서산(西山)을 의미하는 명칭으로 인왕산을 뜻한다. 필운이라는 명칭은 중종32년(1537)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관례대로 중종이 산 이름을 정해줄 것을 요청하여 사신으로 온 공용경(龔用卿)이 인왕산에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산 이름으로 정착하지는 못하고 산 아래 경치 좋은 계곡의 지명이 되었다.
거북골 일명 구동(龜洞)은 필운동 174-2 번지에 있는 바위가 거북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그 주변 마을에 붙여진 이름이다. 남정동은 필운동 277번지와 내자동 147번지 사이에 있는 고개위에 남정문이 있었으므로 남정문재 또는 남정문현(峴)이라 불렀고 그 주위에 있던 마을을 남정동이라 하였다.
도가동(都家洞)은 물건을 만들거나 또는 물건을 받아와서 싸게 파는집인 도가집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생선의 하나인 대구(大口)를 파는 도가집이 있는 동네는 대구도가동이라 하였다.
송목동(松木洞) 일명 소나무골은 소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필운대 옆에 있는 고개 위에는 담의 둘레가 길고 6각형으로 된 집이 있었으므로 육각재(六角재) 혹은 육각현(六角峴)이라 하였고 육각재 위의 집은 담이길다고 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 집이라 불렀으며 이 일대를 장성동(長城洞)이라고 하였다.
진정동(塡井洞)은 글 그대로 메운 우물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필운동은 북쪽은 누상동·누하동, 동쪽은 체부동·내자동, 남쪽과 서쪽으로는 사직동과 접해 있다.
역사의 흔적
이항복(李恒福)집 터, 필운대(弼雲臺)
필운동12번지 현재의 배화여자대학 자리에 있는 필운대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백사(白沙) 이항복의 집터로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9호이다. 이항복이 살던 이 터는 원래 장인인 권율이 살던 곳인데 맏사위인 이항복에게 주고 권율은 근처 행촌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항복은 경치가 뛰어난 이 일대에 살면서 바위벽에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씨를 새겨 놓았는데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이 후 이항복은 지금의 종로구 원남동 로터리 근처인 호동(壺洞)으로 이사하였다.
이항복은 도승지로 있을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 임금을 모시고 의주로 피란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선조33년(1600) 영의정에 올랐고 다음해 호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이 되었다. 광해군10년(1618) 인목대비를 폐위하는데 반대하였다가 관작(官爵)이 삭탈되고 이듬해 1월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는데 그해에 북청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후 관작(官爵)이 회복되었으며 고향인 포천에 모셔졌다.
필운대가 있는 지역에는 각종 꽃과 아름드리나무가 많았고 기암괴석도 어우
러진 곳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살구꽃과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이곳은 도성 내 사람들이 꽃구경 명소로 첫 손 꼽는 곳이었다.
문인들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시를 읊으며 춘흥(春興)을 즐겼던 곳인데 그 시
첩(詩帖)이 필운대풍월(弼雲臺風月)이라고 하여 두고두고 애송되었다. (출처/네이버불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