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는 몰라도 한국영화는 잘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연히 식당에서 만난 문소리에게 삐뚤삐뚤한 한국어 글씨로 편지를 건넨 마야,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좋아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행인으로 출연했다는 발레리. 이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들에게 한국영화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지난 1월 29일 서울시 방배동 발레리의 집. 발레리와 두 명의 도미니크, 크리스틴, 요코, 애니, 니루까지 일곱 명의 친구들이 모여 있다. 한국영화 얘기만 나왔다 하면 시끄러워진다. 설경구와 <박하사탕>부터 김기덕과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대한 찬반 양론까지 아줌마들의 수다는 끝이 없다. “홍상수 감독은 가장 프랑스영화 같은 스타일로 작품을 만드는 한국 감독인 것 같아. 그 영화 뭐지? 한 사건에 대해 여러 시점으로 다룬 영화. 맞어. <오! 수정>. 그 영화가 대표적이야. 그래서 난 홍상수가 좋아.” “남자들이 한 여자의 처녀성 뺏으려고 아우성거리는 영화가 뭐가 좋다는 거야?” “<박하사탕>은 현재를 먼저 보여 주고 나중에 굉장히 슬픈 옛날 이야기로 돌아가잖아. 저런 구성 방식이 마음에 들어.” 남편을 따라 한국에 온 이들은 지난 2002년 1월, 시간은 많은데 날씨는 춥고 마땅히 할 일도 없어 “매주 모여서 영화나 같이 볼까” 해서 모이게 됐다. 처음에는 유럽영화를 주로 보고 아주 가끔 한국영화를 보던 정도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 모임은 한국영화 감상 모임으로 변질(?)됐다. 이들은 매주 수요일 오전 9시 반, 발레리 집에 모여 이렇게 한국영화를 DVD로 같이 본다. 프랑스, 일본 출신인 이들은 한국말은 몰라도 <살인의 추억>과 <파이란>은 안다.
한국영화 절찬리 상영 중
<살인의 추억>과 <파이란>을 아는 외국인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사상 최대 규모의 한국영화 상영회가 된 ‘열정! 대한민국영화 1954~2004’(이하 '열정! 대한민국')가 열리게 된 것도 실은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외국인들이 발단이 됐다. '열정! 대한민국'을 기획한 전용택 씨는 어느 날 술자리에서 한국영화의 팬인 벨기에 친구로부터 "영어 자막 있는 한국영화를 한꺼번에 보고 싶다"는 말을 듣고 그 필요성에 착안, 이 대규모 영화제를 기획하게 됐다. 그의 친구들은 영어 자막이 삽입된 한국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제가 열리는 기간 동안 여관을 잡아서 영화 보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극성이었다. 실제로 '열정! 대한민국' 영화제를 찾은 관객 중 약 20% 정도가 외국 관객들이었고, 이들은 요즘 한국 관객들도 잘 모르는 김수용 감독의 <안개>,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을 보러 서울 종로의 허리우드극장에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 문화과에서 일하고 있는 프랑시엔느는 “시간이 없어서 주말에 6편을 몰아서 봤다”며 “김수용 감독의 <안개>는 이탈리아 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훌륭하고 놀라운 영화였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영화에 대한 외국인들의 열정은 말하자면 끝도 없다. 영화 산업지 스크린 인터내셔널 한국 통신원이자 한국영화 웹사이트(www.koreanfilm.org)의 운영자인 달시 파킷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처음 한국영화를 알리게 된 계기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고 너무 좋았는데, 얘기할 사람이 없어서”였다. 최신 한국영화를 소개하고 리뷰를 올리는 파킷의 사이트를 통해 뉴스 레터를 받아보는 사람이 무려 3,500명이다. 해외에서 부산영화제가 열리는 기간 동안 휴가를 내어 한국을 찾아오는 열혈 관객도 있다. 지난 28일 서울 소격동에 위치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만난 톰도 그런 관객 중 한 명이었다. 전주에서 대학교 영어 강사로 일하고 있는 톰은 단지(!) <자유만세>와 같은 옛날 한국영화를 보기 위해 영상자료원 30주년 기념 상영회가 열리는 서울에 일부러 올라왔다. 심지어 톰은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사이트인 IMDb.com에 틈틈이 한국영화를 등록하는 일까지 하고 있다. 톰이 IMDb에 등록한 한국영화 편수는 무려 200편. 그가 그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옛날 한국영화를 찾아보려고 IMDb를 검색했는데 없어서”라는 소박한 이유 때문이다. 톰은 지난 크리스마스 때 미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장화, 홍련>과 <살인의 추억> DVD 등 한국영화 몇 편을 가져가서 보여 줬다. 매주 토요일 한국영화 DVD를 틀어주는 서울셀렉션에 찾아오는 외국인들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열성적인 한국영화 팬들이다. 서울셀렉션이 발송하는 각종 한국영화 소식을 받아보는 회원은 무려 4,000명에 육박한다.
영화 속에서 한국을 본다
지난 2002년부터 서울셀렉션을 운영하기 시작한 김형근 대표는 "최근 한국영화에 대한 열기가 상당하다는 걸 느낀다"고 말한다. 특히 외국인들은 요즘 들어 부쩍 뒤늦게 DVD가 아니라 극장 개봉 시기에 영화를 보고 한국 친구들과 한국영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추세다. 김대표는 극장 시네코아의 임상백 사장을 찾아가 개봉 영화에 영어 자막을 넣을 수 있을까 의논했고, 마침 시네코아가 외국인이 많이 오가는 종로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특성상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임상백 사장은 당장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사와 배급사가 오케이를 내리기까지 난항을 겪긴 했지만, 시네코아는 <실미도>를 여섯 차례 영어 자막으로 틀었고 <태극기 휘날리며>는 개봉일로부터 이틀 뒤인 2월 8일부터 1주일간 시범적으로 한 관에서 영어 자막을 삽입해 상영할 계획이다. 해외 시장을 노리고 있는 <태극기 휘날리며>는 시네코아뿐만 아니라 주공공이, 명동의 CGV, 메가박스 코엑스 등에서도 영어 자막으로 상영하게 됐다.
임상백 사장은 “외국인들의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점점 늘어나는 건 사실”이라며 “<실미도> 마지막 상영 때는 외국 관객이 30명 정도까지 찾아왔다”고 만족해 했다. 물론 국내 관객들의 반발도 존재했다. <실미도> 상영시 몇몇 한국관객들은 영어 자막 있는 한국영화를 왜 봐야 하냐며 환불을 요구했고, 시네코아 웹사이트에서 영어 자막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었을 때 일부 네티즌들은 '사대주의적 발상'이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임상백 사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관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영어 자막 상영을 지속적으로 시도할 계획이다. 주한 외국인 관객들을 하나의 특수 관객군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주인공들이 소주 마시고 구토한다"고 말하던 외국인들이 대체 왜 한국영화에 열광하게 된 걸까?
“재미있어요.” 한국영화를 왜 좋아하게 됐는가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겠냐만은, 알고 보니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처음 그들이 한국영화를 접하게 된 계기는 영화가 한국 문화를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달시 파켓에게 메일을 보내온 한 외국인은 “도대체 한국영화에 나오는 그 초록색 병이 뭡니까?”라고 물어오면서 ‘그 초록색 병’에 담긴 소주를 마셔 보고 싶어 했다. 일본인 요코는 <씨받이>에 대해 "외국인이 보기에 한국은 닫혀 있는 사회라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영화 속에서 역사의 치부이기도 한 '씨받이'라는 관습을 용감하게 드러내서 놀랐다"며 영화를 통해 배우는 문화가 생각보다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들은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서 한국의 분단 상황을 지각하고, <선택>을 통해서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토론하고, <살인의 추억>을 보고 80년대의 시대 분위기를 느낀다. 한국영화로 한국을 공부하는 그룹 중에는 재미 교포들이 상당수 있다. 한국에 온 지 1년 반 정도 된 재미 교포 조용훈 씨는 “가끔씩 <동갑내기 과외하기>나 <넘버 3>에 나오는 한자 성어 등 구체적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답답할 때도 있지만 한국영화를 최근 들어 많이 챙겨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영어를 가르치는 외국인 강사들의 경우 영화를 모르면 학생들과 대화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영어완전정복> 같은 영화가 한국 문화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며, 최근 들어 실존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가 많아지는 시점에서 한국영화는 한국을 공부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수단이 됐다.
소박한 열정이 새로운 동력
그들의 호기심과 관심이 열정으로 이어지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업그레이드된 한국영화의 완성도가 뒷받침이 됐다. 최근 한국영화들은 기존에 알고 있던 정보를 뛰어넘을 만큼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 줬다는 게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외국인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재미 교포 조용훈 씨는 “<올드보이>를 보고 흥분된 감정을 느꼈다”면서 “영화 역사적으로 한국영화가 중요해지고 세계에서 인정할 만한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섰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2년 전 미국에 있을 때만 해도 주위에 한국영화에 대해 아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는데, 요즘 나보다 더 많이 한국영화를 알고 물어오는 외국인 친구들이 늘어났다"고도 덧붙였다. 달시 파켓 또한 “최근 한국영화에는 강한 에너지가 있다”면서 “예전에 홍콩영화 하면 무조건 액션영화라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최근 한국영화는 장르가 다양해지면서 그만큼 관객층이 넓어진 것 같다”고 분석했다. 발레리는 “한국영화를 보면서 만족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었다. 영화는 가끔 훌륭하지 않을지 몰라도 훌륭하지 않은 한국 배우는 보지 못했다”며 최근 한국영화에 대거 등장한 배우들이 한국영화 인기 바람의 또 다른 요인이라고 말했다. 톰을 비롯한 몇몇 외국인들은 한국영화 속에 나타난 인간 심리와 감정의 표현에 주목했다. 할리우드영화와 달리 한국영화는 세밀한 인간의 심리와 반응에 귀 기울이기 때문에 좀 더 극에 몰입하기 쉽고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8월의 크리스마스> <박하사탕> <파이란> <살인의 추억> <질투는 나의 힘> 등이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영화로 자주 거론되는 것은 모두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외국인들의 한국영화를 향한 열정은 소박한 이유에서 시작됐지만 어느새 한국영화 발전과 홍보에 도움을 주는 새로운 동력이 되어가고 있다. 달시 파켓은 최근 자신의 웹사이트를 통해서 세계 각지에서 한국영화 관련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원 봉사자들을 모으는 중이다. 서울셀렉션 김형근 대표에 따르면, 한국에 거주한 외국인들은 고국에 돌아가서도 끊임없이 한국영화에 대해 문의하는 메일을 보내 오면서 주위에 한국영화를 추천한다고 한다. 그가 운영하는 DVD숍에서는 1년 반 사이에 <공동경비구역 JSA> 타이틀이 300개 이상 팔렸다. 모두 외국인들이 고국에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보여 주거나 선물용으로 구입한 것이 대부분이다. 전용택 씨는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물어물어 찾아가서 한국영화를 보고 오는 외국인 친구들과 얘기할 때면, 때론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한국영화와 문화에 낯설었던 이방인들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 한국영화를 전파하는 문화 사신들이 되어가고 있다.
얼마전에 매가박스에서 '혈의누'를 볼때도 외국인 한명이 제 옆쪽에 앉길래...자막도 없고..더군다나 대사도 옛날 구어체인데..어떻게 영화를 볼지...궁금했었어요...그 외국인 처음엔 웃는 얼굴로 앉았었는데...영화 끝나자마자 화난듯이 표정이 굳어져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휑하니 나가더군요...-_-;;
첫댓글 엔터를 아끼지 마세요 ㅠ
ㅋㅋㅋ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자막을 넣어서 저런식으로 꾸준하게 외국인들에게 보여주는것이 많은 효과를 낳을것 같네요. 한국관객의 불편을 최소화 하도록 확실한 공지로 양해를 구하고 시간도 조절해야겠네요.
에휴.... 겨우 읽었다....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공지글로 추천합니다.
아 좋은글 감사합니다,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기 힘들다"ㅎㅎㅎ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좋은 글이네요..^^
아예 외국인 상영관을 따로 두는 건 차별대우일까?
얼마전에 매가박스에서 '혈의누'를 볼때도 외국인 한명이 제 옆쪽에 앉길래...자막도 없고..더군다나 대사도 옛날 구어체인데..어떻게 영화를 볼지...궁금했었어요...그 외국인 처음엔 웃는 얼굴로 앉았었는데...영화 끝나자마자 화난듯이 표정이 굳어져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휑하니 나가더군요...-_-;;
'혈의누'는 저도 상당히 불쾌한 영화였는데(각자 취향이니 태클은 사양입니다. 물론 좋은 분도 있겠으나 저는 별로라는 얘기니깐요)......기분 꿀꿀하더군요......
이글 작년쯤 인터넷 매체(한겨레?)에서 본글인데 이제 올라왔군요 발레리는 “한국영화를 보면서 만족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었다. 영화는 가끔 훌륭하지 않을지 몰라도 훌륭하지 않은 한국 배우는 보지 못했다” 멋진 말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