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문 찬양의 문
시편 100:1~5
하나님의 은혜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11월 가족예배이다. 오늘은 연중 두 차례 있는 감사절기이며, 추수감사주일로 지킨다. 하나님의 달력은 다음 주일로 교회력 끝 주일이고, 새로 경건한 1년 사이클을 다시 시작한다. 교회력의 절정에 감사절이 있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지난 주일에 군포지방 찬양제가 열렸다. 아주 즐거웠다는 반응이다. 여러분의 참여에 감사드린다. 우리 교회가 찬양제를 리드하는 교회들 중 하나가 된 듯해 흐믓하였다. 포도원교회 중창단이 부른 ‘행복’(하니)이란 노래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 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 선물/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오’
감사의 마음이 가득 담겨있다. 자족하는 심정이 마음을 채운다. 탈무드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가장 똑똑한가? 모든 경우 무엇인가 배울 줄 아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다. 누가 가장 굳센 사람인가? 자기 자신을 누를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힘 있는 사람이다. 누가 가장 풍족한 사람인가? 늘 감사하며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인생을 잘 살려면 아주 중요한 팁이 있다. 젊은이들은 명심해라. 감사표현을 잘 하는 일이다. 해외여행을 나가서도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은 감사의 인사이다.
‘땡큐, 아리가또, 씨에씨에, 깜언, 당케 쇤, 사스 유카리스토, 스파씨바, 그라시아스, 오브리가도...’
감사는 어려서부터 배운 삶의 첫 번째 지혜이다. 감사인사인 그라시아스(스페인)는 ‘은혜를 입었습니다’란 뜻이고 오브리가두(포르투갈)는 ‘빚을 졌습니다’란 뜻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사랑의 빚진 자 의식이다. 이런 빚진 마음 때문에 그 사랑의 빚을 갚으려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의 빚을 갚으려고 하면 세상이 얼마나 따듯해질까? 만약 사랑의 빚은커녕, 서로 빚 독촉만 하게 된다면 인간관계는 참 각박해 질 것이다.
감사는 하나님과 이어주는 언어이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언어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다. 감사는 과분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사는 법을 일깨워 준다.
1)
시편 100편은 대표적인 감사 찬양이다. 이 노래는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불렀던 노래이다. 전반부(1-3)는 예배자가 성전 문 앞에서, 후반부(4-5)는 찬양대가 성전 구역 안에서 불렀을 것이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1-2).
시편 100편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시작한다. 감사는 하나님께 환호성을 지르며 나아가는 일이다. 기쁨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감사의 문이요, 찬양의 문이다.
성경에서 감사제는 하나님과 백성 간에 이루어지는 은총과 고마움의 어울림이었다. 삶의 원동력이고, 인생의 근거이며, 생의 자랑이었다. 그래서 감사예배인 화목제를 보면 그 제물의 일부를 제사에 참석한 회중이 성전 뜰에서 먹는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서 제물을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사람들, 즉 하나님의 식탁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친교가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환호성을 지를 일이 얼마나 되는가? 나이가 들수록 어색해진다. 마음이 상했거나, 약간이라도 실망감이 있거나, 남의 눈치를 보면 환호성을 지르지 못한다. 여러분은 환호성을 지를 대상이 있는가? 행여 인생이 밋밋하여 그럴 마음의 여유도, 그런 놀라움도 없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시편은 하나님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라고 한다. 사람에게도 거북하고, 쑥스러운 그런 환호성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정의, 진실, 은혜, 자비, 온갖 좋은 것으로 만나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은 내게 누구신가?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는 우리를 지으신 자는 하나님이시지,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다시 그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 근본과 기원을 모르는 인생은 길을 잃게 마련이다. 그들은 범죄하고, 타락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또 하나는 하나님은 우리를 기르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다. 그 보기를 든 것이 양떼인데, 양은 목자에게 의존하는 존재이다. 목자의 도움과 인도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
이렇듯 사람은 감사의 문과 찬양의 문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기쁨으로 하나님께 내 존재를 보여드리는 일이다. 내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최선의 삶을 다시 다짐하는 기회이다.
2)
구약 시대에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반드시 제물을 준비하였다. 희생제물이다. 율법에는 백성의 지도자는 지도자대로, 가난한 백성은 백성대로 자기 소유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였다. 자기 경제형편에 맞게 규정하여,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고 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4).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나아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제물이 아닌, 마음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의 욕망 때문이다.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도로우는 “너의 마음 속으로 얻는 것이 너의 진정한 소유물이다”라고 하였다. 손에 들고 나오는 것보다, 마음에 무엇으로 차 있느냐가 중요하다. 거룩한 것으로 차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허기진 탐욕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도 있다. 욕망의 실현으로 감사를 드리기는 어렵다.
사람마다 만족하는 범위가 다르다. 그것은 욕망의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방글라데시나 부탄과 같은 가난한 나라가 손꼽힌 적이 있다. 행복은 물질의 크기와 상관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이 방글라데시를 방문하여 농촌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동네 여자들이 장관에게 물었다.
“소가 몇 마리나 되냐?”
“한 마리도 없다.”
“그럼 자녀는 몇이나 되냐?”
“딸 하나다.”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안타까워하였다. 그러면서 딱하다는 표정으로 서로 말하였다.
“저런, 힐러리는 소도 없고, 애도 하나뿐이란다. 참 안됐다. 무슨 재미로 사냐.”
여러분은 무슨 재미로 사는가? 모두 자녀들 낳고, 애들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그 재미로 한 평생을 보낸다. 경쟁사회에서 남들과 비교하고, 따지다 보면 성공적인 자식농사를 지은 것 같지 않지만, 감사의 관점에서 보면 화목한 가정은 언제나 대성공이다. 그 존재감만으로 행복이다.
최근 UN 행복보고서에서 국민행복지수 1위 나라는 어디일까? 덴마크이다. 이 나라에서는 웰빙이란 단어를 ‘휘게’(hygge)라고 부른다. 안락하고 여유 있는 느낌, 편안함과 아늑함이 바로 ‘휘게’이다.
덴마크 사람들은 행복한 삶 곧 ‘휘게 라이프’를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나와 남을 연결하는 공감의 능력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그래서 행복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덴마크 행복연구소가 정리한 ‘휘게 십계명’을 보자. 여기에는 ‘평등- 나 혼자 말고 여럿이 함께 하자’, ‘현재에 충실- 스마트 폰을 끄고 앞사람을 보자’, ‘조화- 세상에 경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보금자리- 가정은 평화롭고 안전한 곳이다’등이다. 그리고 ‘감사- 오늘이 인생 최고의 날이다’가 있다.
시편 100편은 종교개혁자 존 낙스와 윌리엄 케티가 찬송가로 만들어 불렀다. 이 노래는 ‘옛날의 시 100번째 노래’(The Old Hundredth)라는 제목으로 불려져, 사랑받아온 대표적인 시편이다. 그 핵심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당시 개혁자들의 신앙은 박해를 받았다. 윌리암 케티는 박해를 받아 1556년 제네바로 피난하였고, 메이플라워호를 탄 청교도 역시 박해를 피해 1620년 신대륙으로 피난하였다.
감사의 정신을 깨달은 그들은 처음에는 피난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세상은 자신을 실망시킬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은 것이다. 윌리암 케티는 스코틀랜드 청교회를 개척한 인물이고, 미국 프리머스에 정착한 필그림파더스는 오늘의 미국을 개척한 주인공이다. 그들이 하나님은 어질고, 자비롭고, 정의와 사랑이 가득한 분으로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임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편 100편은 우리 찬송가 1장이다. 감사 찬양은 모든 찬양의 1번지와 같다. 찬송은 비록 우리의 삶이 슬픔과 괴로움 속에 있어도,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환호성을 회복하라고 한다. 우리가 예배하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나를 진정한 개척자의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5).
이 감사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기르시듯이, 우리도 내 삶을 새롭게 하고, 자유롭게 하며,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두 번 생각하면 인생은 아름답고, 살만하다. 의미있는 후회는 실패일망정 아름답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환호성을 올릴 만하다. 이것이 감사의 정신이다.
3)
성경에서 감사는 늘 역사적이다. 내 경우 늘 하루분의 일용할 메모를 한다. 기록만이 남는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된 경험이다. 그 중 감사를 기록하고, 잘한 일을 기록하고, 깨달음을 기록한다. 365일 매일 기록하다보니 늘 감사와 잘할 일과 깨달을 일을 염두에 두고 산다. 이런 발견이 있었다.
‘감사는 기록할수록 늘어나고, 불평은 기록할수록 감소된다’는 원리이다. 이를 감사체증의 법칙과 불평체감의 법칙이라고 한다. 내가 만든 법칙이다.
오늘 우리가 감사절에 먹는 밥은 어느 농부에게 선물로 받은 햅쌀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일수록 밥 한 그릇에 담겨있는 영적의미를 느끼게 마련이다. 먹거리 만드는 사람은 농부든, 주부든, 먹는 당사자든 그 과정은 참 특별하다. 그래서 밥 속에 담긴 고마움을 느낀다. 그런 고마움을 아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 봄 여름 가을 겨울/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삼켜버리면/ 어느새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거여”(이현주, ‘밥 먹는 자식에게’) .
종종 신문을 읽다가 울 때가 생긴다. 별 일도 아닌 것이 슬프다. 며칠 전에 여자프로골퍼 안송이 님이 프로골퍼가 된 지 10년 만에, 무려 237개 대회 만에 첫 우승(‘ADT 캡스챔피언십’)을 했다고 한다. 딸은 아버지를 안고 울었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 나 어떻게 해~. 30살에 첫 우승을 하다니.”
골프는 나하고 전혀 무관한 일이다. 그런데 남의 인생 이야기가 다 무관한 것은 아니다. 한 번은 가까이 있는 식구들 눈치 못 채도록 속으로 우느라고 혼이 났다. 어느 사람의 인터뷰 기사였는데, 사람 사는 모습이 너무 신산해서, 그렇지만 그 삶이 너무 소중해서 참 슬프고 또 재미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야지, 그런 마음을 먹는다. 엘리 위젤은 <밤>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야기를 좋아하셔서 사람을 만들었다.” 감사는 내 인생에서 아름다운 사건과 이야기와 감동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니 감사의 문, 찬양의 문으로 들어가자.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품고, 기록에 남기고, 감사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듯이, 언젠가 우리의 삶을 추수하시고, 그 인생을 당신의 나라로 거두어들이실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오늘 ‘가족 톨레레게’에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언제나 감사와 환호성으로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다시 그리로 돌아갈 것이다." 죽음을 품고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