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관심뉴스는 군 생활을 하면서도 혼자 집에 계시는 할머니를 돌보는 이준호 일병을 소개합니다. 아버지는 가출하시고 어머니는 이혼을 하셔서 할머니를 돌봐드려야 하는데도 군대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면 우리 나라 병역법의 의가사 제대 제도가 잘못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됐든 군생활을 하면서 할머니를 돌보고 그 부대원들도 한마음이 되어 돌봐드리니 정말 군인정신이 살아있는 부대라 생각되어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수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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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휴가때 노동판에 간 ‘이등병 손자’ [조선일보 2007.12.24 00:19:03]
지난달 9일, 입대 후 백일 만에 휴가를 얻어 서울 보광동 집에 온 이준호(21)씨는 눈앞이 캄캄했다. 입대할 때 건강하게 잘 다녀오라고 대문 밖에서 손 흔들던 할머니(김정숙씨·85)가 어둡고 차디찬 방바닥에 홀로 누워 있었다. 할머니는 열이 펄펄 끓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준호씨는 그길로 입대 전 아르바이트했던 일식집으로 달려가 이틀을 일했다. 3일째엔 막노동판으로 향했다. 그렇게 15만원을 벌어 할머니를 병원에 데려갔다. 영양실조와 감기몸살 진단을 내린 의사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되도록 놔뒀냐”고 혀를 찼다. 휴가 마지막 날 밀린 가스비를 내고 남은 돈을 할머니 손에 쥐어준 준호씨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준호씨는 고교 때부터 가장역할을 했다. 엄마는 준호씨가 9살 때 이혼한 뒤 소식이 끊겼고,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3년 전쯤 집을 나갔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패스트푸드점에서 밤 12시까지 청소를 한 뒤 다음날 새벽 4시에 일어나 신문을 돌렸다. 고등학교를 마치고는 일식집에서 하루 12시간씩 음식을 날랐다. 2년 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준호씨는 119의 도움을 받아 인근 병원에서 혼자 상을 치렀다. 그는 “할아버지께 외식 한번 못 시켜드린 게 가슴 아파 그때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얼마 안돼 군에 입대하게 된 준호씨는 홀로 남을 할머니를 위해 몇 달간 한푼도 안 쓰고 모은 300만원을 입대하는 날 건넸다. 그 돈을 소식도 없던 아버지가 찾아와 가져가버리는 바람에 할머니가 난방이 끊긴 방에서 자다 앓아 누운 것이었다.
훈련소에서 훈련 받는 동안에도 그는 할머니 걱정으로 몰래 울다 동기들에게 들켜 놀림을 받기도 했다. 백일휴가를 마친 뒤 ‘나 없는 새 돌아가시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더 심해진 준호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이 소속된 1포병여단 예하 쌍호부대(경기도 파주시) 생활관 분대장을 찾아가 사정을 털어놨다. 본부 행정보급관 박종건 상사는 “궂은 일 도맡아 하고 예의바른 준호에게 그런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에 모두들 놀랐다”고 말했다.
상황이 알려지자 부대 전체가 준호씨를 돕는 데 적극 나섰다. 대대장의 지시로 박 상사와 무선반장은 준호씨 집을 찾아가 할머니를 보살폈고, 아버지 주민등록을 말소해 할머니에게 매월 15만원의 정부보조금이 지급되도록 했다. 동사무소 사회복지사를 만나 할머니를 잘 돌봐달라는 부탁도 했다. 지난 20일에는 부대의 배려로 준호씨가 특별외출을 나와 할머니를 몇 시간이나마 돌볼 수도 있었다.
같은 부대 350명의 장병들이 월급을 쪼개 150만원을 모금해 줬지만, 준호씨가 제대할 때까지 할머니의 월세와 생활비로는 부족했다. 그러다 박 상사가 조선일보·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벌이는 ‘우리이웃―62일간의 행복나눔’ 기사를 보고 사연을 적어 보냈다. 이에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담당 사회복지사와 연계해 20개월간 월세·생활비 등 총 840여만원을 할머니에게 지원하기로 했다.
준호씨는 예전에는 남의 도움 받는 것이 싫어 학교 선생님이 용돈을 챙겨줘도 받지 않았지만,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제가 어려울 때 받은 사랑을 나중에 더 어려운 이들에게 보답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현재 부대에서는 의가사제대(依家事除隊) 등 준호씨를 위한 조치를 강구 중이지만, 준호씨는 되도록 만기 제대를 할 생각이다. “병역의무는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언제 제대를 하든 남보다 몇 배 더 열심히 군생활을 할 거예요.” 준호씨는 “일식요리를 밑바닥부터 착실히 배워 요리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우리이웃―62일간의 행복나눔’은 12월 1일부터 1월 31일까지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총 4억5000만원을 지원한다. 문의 (02)6262-3162. 후원계좌 국민은행 432101-01-268333(예금주 사회복지공동모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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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화폐속의 인물 모택동( 중국 ) 출생
마오쩌둥(毛澤東) 1893. 12. 26 ∼1976. 9. 9 베이징.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8세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3세까지 《논어》와 《사서(四書)》 공부하여 1909년 둥산[東山]고등소학에 들어갔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하였다가 1912년 제대한 뒤 제1중학에 입학하였으며,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이나 외국유학을 하지 못한 그는 이 학교에서, 영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봉건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 양창지[楊昌濟]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재학 중인 1917년, 거의가 제1사범학교 학생들로 구성되고 후난성 혁명 지식인들의 본영이 된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였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한 뒤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였고, 양창지의 소개로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李大釗]의 조교로 일하면서 방청하였으며 철학회와 신문학연구회(新文學硏究會)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학생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고 1919년 5 ·4운동 발발 후 후난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湘江評論]》을 펴냈으나 곧 폐쇄당하고 베이징으로 도망쳤으며 1920년 상하이[上海]에서 천두슈[陳獨秀]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와 1924년까지 창사 제1사범학교의 부속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語文) 교사가 되었다.
1924년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고 1931년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의 중화 소비에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 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 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맺었다.
1968년 10월, 1959년부터 국가주석으로 있던 류샤오?劉少奇]를 실각시켰다.
1969년 마오쩌둥-린뱌오[林彪]체제가 확립되는 듯하였으나, 1971년 9월 린뱌오는 반(反)마오쩌둥운동에 실패하여 죽었다.
1970년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대중반란이라고도 할 천안문사건(天安門事件)이 일어나 위대한 영웅 ·독재자 마오쩌둥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전생애를 살펴볼 때,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외세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한 중국민들의 굴욕감을 씻어주며,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그의 목표는 칭송할 만한 것이었으나, 2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가 중국최고의 영도자로 간주되고 아직도 영웅으로 추대 되고 있는 이유는 그의 사상과 행동의 일치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한국전쟁당시 인민군에 참가한 모택동의 아들(모안영)이 한국전에서 전사를 했다.
그의 며느리가 최소한 시체라도 찾아와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모택동은 한국전에서 전사한 우리의 동지가 몇 명인데 내 아들의 시체만 찾아온단 말인가? 라는 일언지하에 며느리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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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퀴리부부, 라듐 발견
퀴리부인의 폴란드 화폐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가 1898년 7월에 우라늄의 330배나 되는 방사능을 가진 새로운 물질 ‘폴로늄’을 발견한데 이어 12월 26일에도 새로운 방사성 원소 ‘라듐’을 발견함으로써 인류는 희망과 절망의 시대를 동시에 열었다.
라듐은 ‘광선(光線)’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폴로늄은 마리 퀴리의 조국인 폴란드에서 땄다. 두 사람은 이 업적으로 1903년에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프랑스 학술원이 노벨상 후보를 추천할 때 마리 퀴리는 제외하고 남편만 추천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지면서 폴란드 여성이자 유태인이었던 그를 차별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다. 1911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데 이어 이들 부부의 딸도 1935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함으로써 퀴리 가(家)는 한 집안에서 노벨상을 3개나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마리 퀴리는 강한 방사선을 내는 동위원소들에 오랫동안 노출되면서 얻은 백혈병으로 1934년 숨졌지만, 사후 그에겐 또 다른 영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후 61년만인 1995년에 파리의 팡테옹 국립묘지에 묻힌 것이다. 장 자크 루소,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등 프랑스를 빛낸 60여명의 유해가 안치돼 있는 곳, 나폴레옹이나 드골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이곳에 마리 퀴리가 영면하게 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모든 저명인사 중에서 명성 때문에 부패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라며 퀴리를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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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년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출생
1670년 유형원, 반계수록 지음
1716년 영국 시인 토마스 그레이 태어남
["저녁종은 사라지는 하루를 슬퍼하며 울린다." "모두의 마음에 들 친구는 없다."1504년 원각사 폐함 ]
1771년 프랑스 철학자 엘베시위스 사망
1799년 나폴레옹, 쿠데타로 통령정부 수립
1893년 모택동 출생
1898년 퀴리부부, 라듐 발견
1900년 엔리코 카루소 성악가,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의 로돌프를 불러 밀라노 스칼라좌에 데뷔
1904년 쿠바 소설가 겸 민속 음악학자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출생
1916년 인도 국민회의파와 인도 이슬람교도연맹 공동전선 결성
1932년 중국 칸수 대지진으로 7만명 사망
1934년 일본 최초의 직업야구단 ‘대일본동경야구구락부’(요미우리 자이언츠 전신) 탄생
1941년 미국-영국-중국 군사동맹 체결
1945년 국군준비대회 개최
1948년 소련, 북한에서 철수 완료
1949년 아인슈타인 통일자장의 원리 발표
1950년 맥아더 원수, 중공군의 한국전개입에 관한 성명 발표
1957년 뉴델리에서 제2회 아시아-아프리카(亞阿)회의 개최
1961년 아랍연맹, 예멘과의 연방 해체
1962년 워커힐 준공
1962년 제5차 개헌안(대통령중심제-단원제) 공포
1969년 제3한강교 개통
1972년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사망
1974년 동아일보 광고해약사태 시작
1980년 입법회의, 언론기본법 대통령선거법 의결
1983년 일본 나카소네 2차내각 발족
1983년 한일경협 2차년도 규모 495억엔으로 합의
1989년 루마니아 구국위원회, 일리에스쿠를 대통령에 선출
1990년 대법원, 이름에 쓸 수 있는 한자를 2,731자로 제한하는 개정호적법 시행규칙을 확정
1994년 가양대교 착공
1994년 옐친, 체첸 공격 중지 명령
1996년 신한국당 노동관계법-안기부법 변칙 개정
1999년 스포츠용품 회사 나이키 설립자 빌 보워먼 사망
2004년 동남아시아 대지진
2005년 현대자동차의 5인승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투싼이 국산차 모델 중 올해 국내외에서 가장 많이 팔림.
2006년 올해의 영어 어휘에 'sustainable(지속가능)' 선정
첫댓글 이준호이병의 효심에 박수를 보냅니다.부대원들도 보기 좋습니다.
효심이 가득한 이등병 손자 이준호씨가 참 대견하네요. 눈물이 핑 돕니다. 이념을 떠나 대국을 이끌어 온 모택동이 출생. 20세기 최고의 성악가 카루소가 세계 3대 극장 밀라노의 스칼라좌에 데뷔합니다.
할머니를 위한 아름다운 마음이 있는 이준호님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모택동이 출생한 날이군요. 오늘의 소사 잘 읽었습니다.
이등병 이준호님께 감사 드리고 군부대장병님들께도 감사 드리고 조선일보사회공동복지모금후원회에도 감사 드립니다. 이준호님의 지극정성이 아버지께도 닿길 바랍니다. 1969년 제3한강교도 개통 되었군요. 혜은이의 제3한강교 노래가 생각 납니다. *^^*좋은 정보 감사 드립니다. 늘 건강 하시기 바랍니다. ~
이준호 이등병님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엄청난 역사를 느낄수 있는 내용이 보입니다... 야구경기에서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한수 위라고 하지만 전통에 비해 우리나라의 실력이나 기본기가 떨어지는것 같지는 않습니다... 야구월드컵이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