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인가, 쇼인가!
2024. 6. 23. 주일 낮 요 4 : 23-24
23년 전 제가 부목사로 일할 때 케냐로 의사 선교 담당으로 갔었습니다. 케냐에서 가장 무서운 부족이라고 일컫는 마사이족 지역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한 번 오셔서 말씀을 전하셨던 안찬호 선교사님께서 선교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소를 잡아 생피를 마시는 게 그들의 의식이고,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문화도 있었던 마사이 부족이었습니다. 그곳에 열혈단신으로 들어가셔서 복음을 전하셨고, 잘못된 풍습을 다 깨트리고,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믿음의 마을로 만들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맞춰 오기 위해 수 킬로미터를 몇 시간씩 걸어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실 마사이 부족에게는 시계가 거의 없었습니다. 날이 밝고 이때쯤 가면 됐으니 이제 가면 되겠다 하고 걸어서 오시는 겁니다.
주변을 보면 마을이 별로 없어 사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흩어져 있던 곳에서 교회로 오는 데, 여기저기에서 한 무리, 한 무리가 보이면서 교회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피아노 없습니다. 잘 치는 기타는 아니지만 기타를 치는 분이 치면서 음을 잡고 노래를 부르면 앞에서 찬양 인도하는 분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있는 분들 모두 일어나 손뼉 치며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찬양을 얼마나 했을까요? 선교사님이 종을 치며 ‘이제 누가 나와서 기도하시겠습니다’ 하지 않았다면 끝날 줄 모르는 찬양이었습니다. 1시간~1시간 20분 정도의 예배에 길들여 있던 저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언제 끝나나?”라는 생각을 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1시간 이상의 찬양, 기도, 말씀, 그리고 30-40분의 찬양과 축도로 이어지는 예배 시간은 약 2시간 반~3시간 정도였습니다. 한국에서 가신 분들과 마사이 분들과 예배드리는 모습은 천지 차이였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진심으로 드렸습니다. 자신들을 변화시켜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찬양하며 변화된 자신들의 모습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예배는 텔레비전 드라마나 예능처럼 시간에 짜여진 쇼였던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재미없고, 지루하고, 은혜 없다고 느끼는 쇼 말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의 예배가 정말 예배일까요? 아니면 나 자신이 연예인이 되어 하나님께, 그리고 함께 예배드리는 자들에게 보여주는 예배 쇼가 아닐까요? 나 좀 봐달라고, 지금 믿음이 좋다고 자랑하며 보여주는 나를 봐달라고, 예배자 앞에서 광대가 되어 쇼하는 예배자가 아닌가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예배인가? 쇼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사실 이 제목은 제가 좋아하는 A. W. 토저 목사님의 저서인 [예배인가 쇼인가]라는 책 제목을 그대로 따와 설교 제목으로 잡았습니다.
결론적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 자신이 드리고 있는 예배는 예배입니까? 아니면 쇼입니까? 나의 예배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고칠 수 없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응답 없는 예배요, 허무하게 사라지는 생명력 없는 예배가 될 뿐입니다.
현대 예배는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습니다. 때마다 교회 행사를 해야 하고, 젊은이들을 위해 현대 트렌드에 맞는 문화행사를 해야 하고, 어린이들을 위해 많은 교육을 해야 하는 등, 쇼가 지닌 요소를 많이 해야 그들의 흥미를 끌고, 교회로 불러들이고,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고, 부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륜교회 김은호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젊은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문화”라고 강조하면서. 청소년비전학교, 영어영성캠프, 비전아카데미(대중 전문인 예술학교) 등은 이 같은 사역의 핵심이다. 하지만 “문화는 감동을 줄지언정 죽은 자는 살릴 수 없다. 영성이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영성이란 영성 캠프, 부흥회, 수련회 등을 통해 은혜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A. W. 토저 목사님께서 [예배인가 쇼인가]라는 책에 쓰신 대로, ‘성령이 함께하시는 예배’가 영성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흥분합니다. 그게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받았다고 단정을 짓습니다. 성도들은 은혜받았다고 기뻐하고 축하해 줍니다. 성령으로 은혜를 받지 않은 자는 그 뜨거움이 금방 식어버립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은 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언정 뜨거운 믿음이 식지를 않습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입니다. 기도하는 자입니다. 찬양하는 자입니다. 감사하는 자입니다.
일들을 통해 원망과 불평과 하나님과 멀어질 조건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길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김은호 목사님이 얘기한 영성이요, A. W. 토저 목사님이 말씀하는 ‘성령을 받는 자’의 예배요,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김은호 목사님은 이어서 말합니다. “영성이 빠져 있는 집회는 예배가 아니라 유흥”이라고 강하게 질타했습니다. “복음이 제외된 흥겨움은 귀신 들린 장난으로 끝날 수 있다. 주님을 향한 마음이 아닌 단순히 흥겨운 것일 뿐”이라며 껍데기뿐인 열린 예배는 단호히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단순히 예배를 바꾼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예배자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20주년 감사 기념 예배를 지난주에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었으면, 성도들의 뜨거운 예배와 기도가 아니었으면 드릴 수 없는 시간이요, 예배였습니다.
20주년을 준비하면서 누구를 초청할까? 그래야 자리가 빛날까? 하면서, “내 주변 인물들은 이 정도야!” 하는 마음으로 초청자를 추렸습니다. 제게 물어봅니다. “누구 누구 오는데?” 그러면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누구 누구 오셔”라고 말입니다. 그럼 물어본 분들은 “그래?!”하며 놀라는 것입니다.
그때 제 입에서 나오는 교만의 언어는 “나 이런 사람이야!”였습니다. 쇼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마음에 회개가 나왔습니다. 20년을 인도하시고, 예배드리게 하신 분이 초청자들의 이름이 주는 무게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던 것임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제 마음과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회개가 터져 나왔던 겁니다. 그때부터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매일 같이 기도했던 겁니다. 이 회개를 터뜨린 계기가 된 말씀이 지난주에 전했던 ‘솔로몬처럼 되지 말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예배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심판’이었습니다. ‘저주’였습니다. 무서웠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회개’의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20주년 예배가 하나님 없는 ‘쇼’가 될 뻔했던 것을, 성령께서 감동을 주셔서 ‘예배’가 되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드리는 성령이 역사하는 예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는 어떤 예배였는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예배는 모든 게 내 기준과 판단에 맞춰집니다. 거기에 안 맞으면 은혜롭다, 재미있다 등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맞지 않으면 재미없고 지루해, 은혜가 없다고 합니다. 은혜가 있고 없고를 내가 판단합니다. 이건 쇼를 보는 자들의 일반적 표현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하나님께 모든 기준이 맞춰져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모든 시간이 감사로 여깁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이 감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어 애굽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현대의 예배는 이처럼 쇼가 가미된 퍼포먼스 예배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보여줄 게 많아야 하고, 현대 최신식 장비를 많이 써야 하고, 듣기에 감미로워야 합니다. 모든 걸 동원 해서 쇼를 해야 모두가 즐거워합니다.
조금은 투박하고 옛스러워도 거기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함이 담겨 있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잃어버린 예배를 되찾아야 합니다. 다른 것에 빠져 있던 잘못된 내 예배를 되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출 20:3절 “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십계명 중 제3계명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배의 대상이 내가 아닙니다. 내가 될 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내가 즐거워야 한다는 쇼를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 건 방송국 스튜디오에 가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온전한 예배를 받으시는 거룩한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예배에 내 진심을 모두 담아야 합니다.
시간을 즐기러 온 것이 아닙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내 모든 걸 드려야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요 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 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 라”
성도들은 하나님을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점은 참된 예배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순종함으로 시행되어진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영’과 ‘진리’라고 했는데, ‘진리’는 ‘정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직하지 않는 예배자는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예배자인 것 같이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는 마음이 떠난 입술로만 드리는 헛된 예배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3. 예배를 돕는 것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에는 예배에 하나님 대신 다른 것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예배에 은혜를 끼친다고 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조명, 비싼 엠프,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한 프로젝트, 화려한 강단, 십자가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멀티비전 등등.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 현혹되어 예배의 은혜를 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나오는 기독교, 사도시대의 기독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기독교는 순수하고 단순했습니다. 신앙은 능력이었고,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통로였습니다.
그 예배는 사랑이 넘쳤습니다. 그들에게는 생활의 순수성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배, 사랑, 신앙이 있었고, 그들의 도덕적 삶은 순수했고, 그들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 중심의 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시대가 변하고, 삶의 질이 바뀌고, 더 좋은 것들이 나오면서 그것을 해야만 더 좋은 예배, 더 귀한 은혜를 끼칠 수 있다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잘 전달하는 것이라면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예배는 구경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신 자리에 참여하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그것이 참 예배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교회의 심장은 하나님께 집중하여 드려지는 것에 뜨겁게 박동해야 합니다. 멈추면 안 됩니다. 엘리야가 850명의 우상 지도자들과 싸워 이겼던 뜨거운 예배가 필요합니다. 보여주기 위한 쇼가 가미된 예배가 아니라, 예배를 예배답게 드려져야 합니다.
지금 어떤 마음으로 앉아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정신과 마음은 지금 어디에 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이제는 구분해서 예배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시대의 흐름과 타협하지 말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리는 수정교회와 성도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삽니다.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 나라가 살아야 하나님께서 더욱 함께 하십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