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5일 부활 제6주일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요한 14,23-29)
The Advocate,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will teach you everything and remind you of all that I told you.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to you.
말씀의 초대
할례를 받지 않은 다른 민족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일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견해에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반대한다. 그리고 이 문제로 분쟁이 일어난 안티오키아에 바오로 사도의 일행을 파견한다(제1독서). 파트모스의 요한은 환시를 통하여 천상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다. 그곳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났고, 어린양이 등불이 되어 비추어 주고 있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수난 전날 제자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지킬 것을 당부하시며, 보호자 성령과 함께 평화를 남기고 가시겠다고 약속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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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성경』의 번역에 한 삶을 오롯이 바치고 꼭 10년 전에 하느님의 품에 안긴 제주교구의 임승필 요셉 신부가 남긴 마지막 강의에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남부군』이라는 책을 보면 빨치산과 정부군 사이의 총격전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서로를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는 들판 한가운데에 강아지 한 마리가 총소리에 놀라 어쩌지도 못한 채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때 강아지 주인으로 보이는 한 꼬마가 그 강아지를 데려가려고 들판 한가운데로 뛰어갔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빨치산과 정부군이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사격을 멈춘 것입니다. 총소리가 진동하던 그 들판에 한동안 침묵이 흐릅니다. 그 꼬마가 강아지를 데리고 들판을 빠져나갈 때까지 말입니다. 무엇이 그들의 총을 멈추게 했습니까? 그것은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힘없고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 그 작은 꼬마둥이였습니다. 오히려 아이 하나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이념을 잠시 포기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평화가 강한 힘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평화는 강한 무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군사력이 가장 강한 미국 시민들이 가장 평화로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총기 사고와 강도 사건 등이 끊이지 않는 미국이 가장 평화로운 나라는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강한 힘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십자가 위에서 패배와 용서, 희생과 낮춤을 통하여 당신의 평화를 남기신 것입니다.
생명과 평화를 잃지 않으려면
-신대원신부-
부활 제6주일이며 생명주일이다. 한국 주교회의는 우리 시대에 만연한 '죽음의 문화'를 단호히 거부하고, 인간 존엄성과 생명의 참된 가치를 일깨우기 위해 1995년 5월 마지막 주일을 생명주일로 반포했다.
그러다가 2011년부터 '생명의 문화'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기 위해 생명주일을 5월 첫 주일로 옮겨 지내도록 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지구촌 곳곳에 죽음의 문화가 잔뜩 도사리고 있고 또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죽음의 문화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생활하시는 주님의 뜻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현상이다. 죽음의 세력은 개발과 경제성장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를 내세워 인간을 둘러싼 환경을 병들어 죽어가게 만들고, 마침내 인간 생명마저 손쉽게 앗아가려는 음모를 끊임없이 꾸미고 있다.
사람으로 오신 주님께서는 생명이신 당신을 향해 죽음의 세력이 어둠 속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 14,23)고 말씀하신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은 생명이신 분의 말씀을 지키고, 그분과 함께 그분 생명 안에서 사는 것이다. 반대로 생명 있는 것들을 무시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이신 분을 사랑하지 않고, 그분께서 마련해주신 부활의 삶을 거부한다. 그런 사람은 죽음의 문화라는 덫에 걸려 결국 죽음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참 생명이신 하느님께서는 생명 없는 우리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창세 2,7). 생명의 숨을 통해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셨다. 또 때가 되자 생명이시면서 죽을 몸으로 오신 분이 당신 몸을 죽음과 맞바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을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의 삶으로 옮겨 놓으셨다.
생명이시며 부활이신 분이 건네주신 부활의 삶은 궁극적으로 '평화'로 나아간다. 생명의 문화는 평화를 지향한다. 평화 없이는 결코 부활의 삶을 살 수도 없고, 희망할 수도 없다. 그러나 평화의 삶은 십자가 없이, 자기 고통 없이, 자기 포기와 비움 없이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이별의 만찬석상에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27)고 하신다. 이제 참 생명이신 분이 그 생명을 간직하도록 평화를 건네주신다. 참 생명을 건네주시는 분은 곧 참 평화의 주님이시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모두 참 생명을 누리고 싶고, 참 평화를 희망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타인 생명을 빼앗고, 평화를 지키려는 일꾼들을 무참히 억누른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참 평화를 짓밟고, 생명을 원하면서도 참 생명을 거부한다.
대신 그들이 만들어놓은 거짓 생명과 거짓 평화를 강요한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면서도 이 나라 심장부 서울에서는 사람을 쫓아내고 대신 그 자리에 꽃을 심어 사람을 꽃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다. 이 얼마나 반생명적, 반평화적 행태인가!
심장부에서도 이러할진대 변두리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겠는가? 참으로 한심스러운 세상이다.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권리를 소중하게 여긴다면서도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열심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사람들마저도 죽음의 문화에 팔짱을 끼고 있다. 이 또한 얼마나 서글픈 세상인가!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요한 14,28).
생명은 거저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거저 일궈지지 않는다. 우리가 생명의 일꾼, 평화의 일꾼이 되지 않으면 결국 죽음의 문화에 의해 생명과 평화를 빼앗기고 말 것이다. 참 생명으로 부활하신 분은 평화의 주님이시다. 부활하신 분을 온 몸으로 무장하지 않고서는 우리 시대의 참 생명과 평화를 온전히 지켜나가기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사도 바오로는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 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3-14)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살리시는 생명의 하느님이시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또 갈라진 모든 것을 일치시키시는 평화의 하느님이시다. 그분에게서만이 참 생명과 평화가 샘솟고, 그분만이 참 생명과 참 평화이시다. 그리고 생명과 평화에 참여하는 사람만이 그분이 마련하신 부활의 삶을 누릴 수 있다.
평화를, 평화를 주소서!
-손희송신부-
천주교회 입교 동기에 대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거센 세파가 몰아치는 인생 여정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잔잔한 호수와 같은 마음의 평화를 갈망하게 됩니다. 마음의 평화는 물론 가정의 평화, 나라의 평화, 온 세상의 평화는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주시는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평화는 재력, 권력, 군사력 등을 키워서 다른 이들을 위협, 제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다른 이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평화를 이루십니다.(에페 2,14 참조) 그분이 주시는 평화는 사랑과 헌신을 바탕으로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초대교회가 어떻게 참된 평화를 이룩하였는지를 알려줍니다. 초대교회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 신자들로 시작되었지만, 왕성한 선교활동 덕분에 많은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는 교회에 큰 기쁨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어려운 문제도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소중히 여기면서 준수해왔던 모세 율법을 둘러싼 갈등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고, 그래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아무런 차별 없이 구원의 상속자가 됩니다.(갈라 3,27-29 참조) 그런데 일부 유대인 출신 신자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모세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 중 몇몇이 안티오키아 교회에 와서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선동하여 물의를 빚습니다. 그 교회의 지도자인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인 끝에 대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모교회로 가서 문의를 합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원로들은 이 문제를 두고 서로 논의를 하였고, 성령의 인도로 지혜로운 결정을 내립니다. 그들은 이방인 출신 신자들이 모세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원칙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유대인 출신의 신자들을 배려하여 이들이 역겨워하는 몇 가지 사항,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 그리고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고 지시합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원칙과 사랑이 조화를 이루어 평화를 되찾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모든 이들을 ‘천상 예루살렘’(제2독서)으로 인도해야 할 사명을 지닙니다. 성령께서는 교회가 이미 세상에서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여주도록 참된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우리가 성령께 응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지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헌신할 때, 그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기심과 완고함 때문에 참된 평화가 자리를 잡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주 자신을 살피면서 주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주님! 평화를, 평화를 주소서.”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박병규신부-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 있게 하시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굳건하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복음에서 유독 ‘사랑’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사랑은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을 하나로 엮어주는 끈과도 같다. 이 사랑의 끈 안에 놓일 수 있는 길을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랑 안에 살아갈 수 있는 길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일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활 동안 수많은 말씀과 행적을 보여주셨다. 그 보여주신 일들이 그분을 사랑하는 자리이고 방법이 된다. 예수님은 당신의 떠남을 이야기하신다.(28절) 그리고 그 자리에 지금 당신을 사랑할 우리의 자리를 마련하고 계신다. 그분이 떠나신 시간에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자리는 어떠한가? 27절에 나타나는 ‘너희’의 자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평화가 있는 ‘너희’의 자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지키는 우리의 자리가 된다. 세상 풍파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자리, 바로 굳건함의 자리가 사랑을 담는 우리의 자리여야 한다. 어떠한 위협이 있어도 예수님의 말씀을 굳건히 지키는 것, 이것이 우리의 평화이고 예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너무 힘들다. 혼자서는 해낼 수가 없다. 평화롭기는커녕 늘 마음 한편에 내려놓고 싶은 고단함이 사랑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일까. 예수께서는 성령을 약속하신다. 성령은 보호자이시고, 가르치시며,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신다. ‘예수의 이름으로’ 오시는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하시고, 그것으로 우리 서로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굳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세상 풍파 속에 있으면서 혼자 해낼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을 위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사랑을 믿음이라는 말마디로 자주 언급하셨다.(1,50; 3,12.15; 4,21.41; 5,24.44.46; 6,29.35.47.64; 7,38; 8,24.45; 9,35; 10,38; 11,25.42; 12,37.44; 13,19; 14,1.11; 16,31; 17,20; 20,27) 예수께 대한 절대적 의탁과 신뢰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곧 믿는 사람이다. 이렇게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굳건히 지켜 나가는 사람이 된다.
묵상(Meditatio) 예수님은 떠나고, 더 이상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볼 수 없다는 것은 허무나 공허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새롭게 시작할 기회가 된다. 예수께서 떠나신 시간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서야 할 시간이고, 예수께서 남기신 말씀과 보여주신 행적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랑할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이 그저 주어진 것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굳이 세상이 아니어도 나 혼자 즐길 수 있는 내면의 수덕생활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는 안타까운 모습일 때도 있다. 세상 풍파에 휘둘리지 않으려 성당 안으로만 파고드는 두려움을 가질 때가 있다. 이런 신앙에는 ‘우리’가 없다. ‘우리’ 대신 예수님을 세상에 내어놓고 우리는 뒷전에서 웅크린 채 머뭇거리고만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나설 때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드러내고, 실천하고, 지켜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분의 평화 안에 머무는 것이다. 용기를 내자.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요한 16,33)
기도(Oratio) 주님, 당신의 말씀대로 당신 구원이, 당신 자애가 저에게 다다르게 하소서.(시편 119,41)
성령의 역할을 본받고 살아야"
-홍승모 신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에게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시는 당부와 약속 말씀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탁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실천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사랑과 실천은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떨어질 수 없는 유대감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 역할을 합니다. 두 번째는 이 결속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성령 파견에 관한 약속입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세 번째는 주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에 늘 함께 한다는 약속의 징표로 평화를 주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우리의 문제는 주님을 깊이 신뢰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역량으로 모든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전적으로 신뢰하기를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내적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한 주님의 현존은 공동체에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평화는 매일 일상생활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징표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 신비에서 내면 평화를 체험합니다. 이 내적 평화는 매일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미워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체험하도록 이끕니다. 주님은 우리 내면에 평화를 불어 넣으시고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모든 공동체는 주님 평화와 현존을 체험하면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믿음 안에서 살아가도록 사명을 부여 받는 것입니다. 성령을 가리키는 '파라클리토'는 보호자, 위로자, 협조자라는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령은 인생에서 하느님의 올바른 길을 찾고 선택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고 위로하며 조언하는 역할을 하기에 그렇습니다. 성령은 신앙 때문에 겪어야 할 어려움과 번민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고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를 지탱하고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의 올바른 방향을 찾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끊이지 않는 성령 사랑의 불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이 주시는 은총에 안주해 그것만을 자신의 위안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부끄러운 평화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외면한 채, 일시적 안정만 바라는 피상적 치료 구실밖에 못합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실천을 동시에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을 '파라클리토'라고 부르는 데는 단지 성령의 역할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을 우리가 본받고 살아야 한다는 사명이 내포돼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듯이, 우리는 또 다른 보호자(요한 14,16)가 돼 아픔과 상처, 수치와 분노, 죄책감 속에 살아가는 형제들에게 진정한 내면 평화를 주는 '파라클리토'의 사랑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2코린 1,3-4). 이런 사랑의 역할은 우리의 능동적인 선한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이런 작은 노력을 갖고 사랑을 부어 줄 대상이 어디 있는지 시선을 자신에게서 형제에게로 돌려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평화를 구하는 기도'에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한 이유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
-손용환신부-
천국을 위하여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요한은 천사의 인도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속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묵시록 21,11.23)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곳이 천국이요, 예수님의 희생으로 등불이 되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곳에 가고 싶습니까? 불행하게도 현대인들은 그런 천국을 원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원하는 천국은 지상낙원입니다. 지금 부유하고, 지금 배부르고, 지금 즐겁고, 지금 칭찬받는 것을 더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 14,23-24)
관심과 간섭의 차이를 아십니까? 관심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알아주는 것이고, 간섭은 자기의 입장에서 알아주는 것입니다. 관심은 배려이지만 간섭은 강요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간섭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관심을 가지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강요하시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계명을 지키도록 배려하시는 것 같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께서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신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분께서 간섭하고 강요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분과 함께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분의 계명이 뭡니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기도와 예배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주일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에 대한 사랑은 나눔과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자선이 제일 중요합니다. 굶주리는 이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주일을 지키고 자선을 베푼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그렇다면 세상이 주는 평화는 무엇입니까? 소유를 통해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갖기 위해 서로가 싸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는 평화는 무엇입니까? 나눔을 통해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베풀기 위해 서로가 희생합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굶주리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아직도 집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직도 돈이 없어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평화로운 세상이 아닙니다. 평화로운 세상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로운 세상은 모두가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리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어야합니다. 부정과 불의와 싸우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분의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면 그분의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재미없고 힘듭니다. 그런데 재미없고 힘든 일을 왜 해야 합니까? 천국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분께서도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분의 고난에 동참합시다. 천국을 위하여. 평화로운 세상을 위하여.
새 하늘을 바라보고, 새 땅을 밟으며…
-박동호신부-
기쁨과 슬픔이 씨줄과 날줄로 만나는 곳, 희망과 번뇌가 산소와 수소처럼 결합되어 있는 곳, 그곳은 우리 자신이며 동시에 세상입니다. 그래서 슬픔에서 기쁨을 기다리는 인내와 용기가, 희망에서 번뇌를 준비하는 지혜와 겸손이 값집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를 묵상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일부입니다. 축제의 들뜬 분위기나 잡히시기 전의 불안하고 두려운 분위기는 읽을 수 없고,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담담합니다. 아버지께 가실 때가 왔음을 아신 예수님이시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편에서 그때가 임박하자 제자들이 산란해질까 봐, 겁을 낼까 봐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하며 다독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그 일”이 닥치자 제자들은 실제로 산란해졌고, 겁을 내며 달아났으며, 무서움에 문을 잠그고 숨어 지내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께 가신” “그 일”이 제자들에게는 그저 끔찍한 ‘십자가 처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그랬던 제자들이 이제 하느님 아버지와 세상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스승 예수님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로 완전히 변했습니다. 물론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라는 그날 저녁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세상과 교회는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화와 “모세의 관습” 같은 인간의 능력으로 쟁취하려는 구원, 곧 세상이 주는 평화가 혼재합니다. 때로는 세상의 평화가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평화를 가리거나 우리를 미혹(迷惑)하기까지 합니다. 절망하고 포기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불의가 위세를 떨칠 때도 있고, 착각하고 속을 만큼 거짓평화가 그럴듯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을 겪으며 인내하면서도(묵시 1,9 참조)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믿고 희망하며 용기를 내야 합니다.
우리의 욕망과 이기심만으로 ‘화려한 도성 예루살렘’을 쌓으려니 불안과 부조리와 불의에 시달리며 고통과 슬픔과 번뇌의 늪에 빠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우외환의 세상 한복판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사도들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과 … 결정하였습니다.” 성령과 함께 결정하고 실천하는 것, 그것이 지금 여기서 새 하늘을 바라보고, 새 땅을 밟는 길입니다. 안팎의 내 처지(處地)와 주변(周邊)과 그리고 더 넓은 세상을 봅시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주님께서 우리를 맞이하십니다. 용기를 내어 한 걸음만 옮깁시다.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주님, 저희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저희를 구원하신 이 큰 사랑의 성사에 언제나 맞갖은 삶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__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임숙희-
시작 기도 하느님 아빠, 아버지. 성령의 이끄심으로 우리 삶이 당신 아드님의 삶에 대한 ‘기억’ 으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독서 당신의 떠나심으로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14, 1. 27) 예수님은 14장에서도 계속 제자들을 격려하며,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른 방식으로 가르칩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23 – 24절)라는 말씀은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주신 사랑의 계명과 관련됩니다. ‘지킨다’ 는 말은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마음의 보호자로 삼고, 실천에 옮긴다는 뜻입니다. 외부의 강요 때문에 해야 할 의무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예수님이 아들로서 아버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지키는 것처럼 (8, 55; 15, 10),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자세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한 것과 똑같은 체험, 곧 하느님이 사랑하는 아버지임을 체험하게 됩니다. (10, 18; 14, 31; 15, 10)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와 하느님 뜻에 맞게 구체적인 상황에서 식별하며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 안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와서 ‘머물고’, 아버지의 사랑에 바탕을 둔 아버지와 제자들의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 1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4, 25 – 26) ‘보호자’ 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어 para,klhtoj는 ‘옆으로 부른다.’ 는 뜻인데,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가리킵니다. (요한 14, 16. 26; 15, 26; 16, 7; 1요한 2, 1) 인생길을 홀로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옆에서, 혼자 지기에 버거운 짐을 함께 들어주고, 죄를 지을 때 중재하며, 나약함과 마음의 고독을 느낄 때 위로해 주고, 헤매고 있을 때 길을 인도하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아들의 이름으로’ 이런 ‘보호자’ 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은 이제 예수님이 떠나시고 성령이 예수님의 다른 자아 (alter ego)로 주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호자’ 가 제자들의 마음 안에서 하는 역할은 ‘가르치는 것’ 과 ‘기억하는 것’ 입니다.
첫째, 성령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충실하게 전달하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한 제자들의 가르침은 실수와 오류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성령은 ‘기억하게’ 합니다. ‘기억하다’ 라는 말은 단순하게 무엇인가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성령 자신한테서 나오는 독자적 지식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제 제자들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의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가르침을 기억할 것입니다. 성령이 제자들의 마음에서 북돋는 예수님의 삶에 대한 ‘기억’ 은 제자들 생애의 ‘어두운 밤’ 을 지나갈 때, 홀로 깨어 새벽을 기다리게 하는 희망의 원천이 되고,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뿌리가 될 것입니다. 이제 떠나시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마음 안에 영으로 오신다면, 그 영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는 분일 것입니다. (27 – 28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 안에서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성령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하시는 일은 너무나 신비롭기에 인간적 사고로 성령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정의 내릴 수 없습니다. 다만 그 결과로 성령의 현존을 알 수 있는데, ‘평화’ 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평화를 주고 간다.’ 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더 이상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현재 삶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에 의해 유지되고, 미래의 삶도 그렇게 되리라는 보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찰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고’, ‘기억하게’ 하여, 하느님의 딸과 아들인 우리가 유일한 아들인 예수님과 일치하는 삶을 통해,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갑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는 성령이 우리 삶에서 하는 역할을 잘 묘사합니다. (루카 15, 11 – 32)
기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강복하소서. 당신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편 67, 2)
어느 스승이 제자들을 모아놓고는 마당에 커다란 원을 그려놓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어디를 다녀올 테니, 너희는 그 동안 이 원 안에도 있지 말고 또 원 밖에도 있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뒤에 밖으로 나가셨어요.
제자들은 스승의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 안에도, 원 밖에도 있지 말라는 것은 원을 구분 짓는 금위에 모두 서 있으라는 것일까 싶었지만, 그것은 답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발은 원 안에 또 한 발은 원 밖에 집어넣고 있었지만, 이것 역시 답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힘들어하고 있었지요.
잠시 뒤, 스승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할지를 모르는 제자들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신 뒤, 빗자루로 원을 싹 지우는 것입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원 안에 있는 것도 또 원 밖에 있는 것도 아니기 위해서는 원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위에 어렵고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내 자신이 그 주인공일수도 있지요. 그런데 그 힘듦의 원인이 과연 무엇일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그려 놓은 아니면 스스로 그려 놓은 기준이라는 원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었을까요? 즉, 세속적, 물질적 기준에 의해 우리는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준의 원만 지워버리면 쉽게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지만, 우리들은 차마 이것들을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원’이라는 이 기준들은 사랑의 문제에서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그래서 자기만의 고유한 판단 기준인 원을 만들어 사랑을 저울질 하지요.
“네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어. 저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 나한테 아무것도 주지 않는데 사랑하라고? 미쳤냐?”
이 세상의 관점으로 손익을 따지는 모습들, 그것이 바로 내 안에 있는 하나의 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입으로는 많은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진정한 사랑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그 원을 지우는 방법, 그리고 사랑의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기준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힘들어하지요.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신 주님께서는 성령을 약속해주십니다. 이 성령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도록 해줍니다. 이로써 주님 안에서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즉, 내 안의 원을 지우는데 성령께서 큰 도움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성령을 받아 자기 마음 안에 있는 부정적인 원을 말끔하게 지우고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선택도 분명해 집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내 안에 잘못 그려진 원을 지우는 것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원, 이기심과 탐욕의 원, 미움과 다툼의 원, 분열과 의혹의 원, 거짓과 불신의 원 등을 말끔하게 지워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주님을 나의 기준으로 내세워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도스토예프스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권태문 신부-
예전 시카고 대학병원에서 사목상담 실습을 11주간 한 적이 있습니다. 심장병 중환자실과 소아과 병동에 누워 있는 환자들을 매일 방문했습니다. 특히 젊은 심장병 환자들을 볼 때, 제 마음도 아주 무거웠고, 어떻게 위로의 말을 해야 하나 고민됐습니다. 그들의 가족은 당황해하던 저를 보고, 같이 환자의 손을 붙잡아주기만 원했습니다. 그 당시 만났던 한 젊은 중환자의 고백을 기억합니다. “저는 평화 안에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병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욱 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중에 있어도 그다지 두렵지 않습니다.” 예전에 저는 평화를 느끼려면, 삶에 아무 문제가 없어야 하고 모든 문제들이 술술 잘 풀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논리로는, 그 환자의 내적 평화 상태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곧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고통과 두려움, 즉 현실의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것을 극복하게 합니다. 현실의 삶에 주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주님의 평화는 우리가 십자가를 짊어지는 순간부터 바로 시작됩니다. 삶의 고통과 두려움이 없는 것이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바로 주님께서 우리 삶 안에 함께하셔서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힘과 위로, 지혜를 주신다는 강한 확신에서 옵니다. 이번 한주간, 주님의 참 평화 안에서 생활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이 오시기 위해서 그 분은 떠나야 한다
-전삼용신부-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그 가난함과 고단한 봉사로 자신의 몸을 소진시키셨습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오셨을 때는 대장암 말기였습니다. 다시 아프리카 수단으로 돌아가시지는 못하셨지만 그 곳에 가서 봉사하겠다는 의사들도 생겨나고 또 그의 모교에서는 이태석 신부가 선발한 두 명을 의사로 만들어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많은 후원자들이 늘어났고 그렇게 수단에 남겨진 이들은 그분이 남기고 가신 사랑을 다른 모습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고정 후원자가 천 명 이상 늘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모습에서 오늘 복음의 모든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상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시는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1.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2. 성령님이 오시면 내 말을 기억하게 하실 것이다.
3.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4.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하여라.
언뜻 보면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일 수 있지만 다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새로운 계명을 주시면서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을 보내신 분까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의 말을 잘 따른다는 것은 사랑의 증거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혼인하시기 전에 침을 뱉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러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아버지는 그 이후로 침 뱉는 버릇이 말끔히 없어졌다고 합니다. 일단 결혼은 해야 하니까 그런 버릇을 고치는 것이 크게 어렵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은 결혼하고 나서는 바꿀 수 있었던 게 하나도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까요.
이태석 신부님이 남겨놓고 가신 업적 때문에 많은 수단의 사람들이 도움을 받게 될 텐데 당연히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그 분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모든 수단사람들이 그 분 때문에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만든 학교나 병원, 성당 등에 오는 사람이 먼저 도움을 받게 됩니다.
또한 그분으로부터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선발된 두 청년은 신부님의 마음에 꼭 드는 두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분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그 분과 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로부터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그 분의 계명을 따라 그 분과 관계가 있어야합니다. 그 분의 말씀을 더 잘 따르는 사람에게 더 충만한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2.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도움’이 ‘성령님’입니다. 사실 이태석 신부님께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나 자신 출신 의대에서 그렇게 많은 지원을 받게 된 것에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가며 희생한 그 분의 삶에 의해서였습니다.
지금 수단 사람들이 받게 되는 도움은 그 분의 삶과 죽음 덕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지만 그 분께서 아버지께 마음에 드는 삶을 사시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전해주실 성령님을 받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님을 받았다는 표징은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항상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주시고 또 그렇게 살도록 힘도 주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를 무시하고 스스로 살려다보면 걱정도 생기고 두려움도 생기고 또 그런 것들이 잘 되어 나가던 것까지 망쳐놓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를 ‘평화’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남겨놓고 간다고 하시는데 평화는 바로 성령님의 열매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느끼고 있는 사람은 성령님이 계신 것이고 걱정, 불안, 긴장, 두려움 등의 평화를 깨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 성령님으로 자신을 채우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남겨놓고 가신 것은 당신이 이 세상에서 하시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육체뿐만이 아니라 교육 사업까지 하셔서 그들의 정신까지도 살려주셨습니다. 그 일은 앞으로 후원자들과 봉사자들이 생겨나 계속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 분이 혼자 하실 때보다 그 분의 죽음으로 더 많은 도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 분이 남겨놓으신 평화를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 가장 큰 평화가 바로 ‘성체’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4. 우리는 개인적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님이 처음으로 오심을 느끼게 됩니다. 세례를 받을 때 걱정스러웠고 두려웠던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십시오. 제 출신 본당의 어떤 신자는 이름표를 꽂을 때 핀이 살이 꽂혀 있었는데도 그래야 하는지 알고 세례시간 동안 그렇게 있었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그 때 내려오시는 성령의 힘은 모든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 평화와 기쁨입니다. 사도들도 두려움에 떨고 있다가 성령님이 내려오시자 문을 박차고 나가 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로 가지 않으시면 성령님이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요한 16,17).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성령님은 두 분 사이에서 오고가는 사랑입니다. 두 분이 멀리 떨어져 계시면 그 사랑의 빈도도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성령님이 줄어드시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사랑이지만 약해진다는 뜻입니다. 탁구도 서로 멀리 떨어져서 치면 공이 오고가는 시간도 길어지고 빈도도 약해집니다. 금을 생각해 봅시다. 금을 잡아 늘이면 한 없이 늘어납니다. 금은 점도가 좋아서 거의 끊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은 금으로 서로 이어져 계십니다. 사실 성경에서 금도 성령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어쨌건 예수님은 이 세상까지 내려오시는 것도 모자라서 저승까지 내려가서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을 데려와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세상에 내려오시는 것을 시작으로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가장 멀리 떨어져 계셨을 때가 바로 성삼일 동안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괴로워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셨고 십자가에서 “주님, 주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한탄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왜 모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며 돌변했을까요?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 간에 너무 멀리 떨어져 계셨기 때문에 성령님의 힘도 매우 약해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는 힘은 성령님에게서 오는데 성령님의 힘이 매우 약해져버렸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머리가 어둡게 되어버려 온전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시기 직전까지 예수님은 저승에 내려가 계셨고 이때는 성령님의 힘이 가장 약해져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 때문에 가장 고통을 당해야 하셨던 분은 성모님입니다. 성령님을 충만히 받고 아드님을 잉태하셨던 성모님은 예수님과 함께 사랑을 잃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시고 나서는 당신을 붙잡으려는 막달레나에게 당신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하니 붙잡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성령님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내릴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교회가 공식적으로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도 만약 이 세상에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지금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 신부의 자신을 소진하는 사랑을 보았고 이제는 그 분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라도 거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돈을 내기도 하고 봉사 지원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신부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두 명의 수단 청년들이 거저로 의사가 되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신이 돌아가시는 일이 잘 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보고 당신이 아버지께 올라가는 것을 기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올라가셔야 충만한 성령님을 세상에 보내주실 수 있고 우리들의 자리를 마련해 놓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상의 성인은 당신의 50년간의 오상의 고통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은총을 전해 주었습니다. 누구나가 그리스도의 모범으로 그렇게 자신을 죽일 줄 안다면 자신은 세상에서 죽을지라도 많은 은총을 세상에 전해주는 중재자가 되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을 위해서 살고 죽는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남을 위한 죽음은 많은 열매를 남깁니다. 남도 살리고 자신도 살립니다. 자신을 위한 삶은 남도 죽이고 자기도 죽이는 비참한 죽음입니다.
성령님께 배웁시다.
-김기현신부-
예화 하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왕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장차 왕위를 계승하여 통치할 후계자였습니다. 하지만 적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자가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자를 납치하여 시골 오지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왕자를 노예처럼 부려먹고 괴롭힙니다. 그렇게 살아간 왕자는 자신의 원래 신분도 모른 채, 노예처럼 생각하고 노예처럼 말하고 노예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왕은 아들을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0년이 넘게 찾아 헤맨 끝에, 시골 오지에서
아들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적대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아들을 왕궁에 데려와 큰 잔치를 벌입니다.
그렇게 왕자는 왕궁에서 살아가게 되는데, 왕궁에서 맞이하는 모든 상황들이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하인들이 밥을
가져다주고, 씻을 물을 가져다주는 것이 어색했고, 들판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산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어색했습니다. 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언가 시키고 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말로 인사하고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 너무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왕이 되는 교육을 받아가면서 왕궁 생활에 조금씩 적응하여 갔고, 옛 사고방식을 버리고 왕의 사고방식이 무엇인지 배우고 익히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은혜’ 참조)
이처럼 왕자는 ‘왕궁생활’과 ‘왕이 되는 교육’을 통해서, 노예의 삶과 사고방식을 버리고 왕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를 체험해야 합니다. 또 하느님의 자녀로서 받게 되는 생명의 풍요로움도 함께 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도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 교육을 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노예의 사고방식과 결정방식, 그리고 삶의 방식을 뿌리 채 뽑아 버릴 수 있습니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다운 생활을 하며 자유로운 삶,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겁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
-김찬선신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잘 새겨들어야 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면 당신의 말을 지킬 것인데, 그러면 당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고 당신과 아버지께서 함께 우리에게 오시어 함께 우리와 사실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런 다음 성령께 대해서도 한 말씀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가르치시고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이 말씀들을 모두 엮어보면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은 삼위일체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이 사랑해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어제 어버이날을 지냈는데 부모가 서로 사랑하며 부모가 같이 사랑해주는 사랑을 받으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인지 부모의 사랑을 다 받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일찍 아버지를 여읜 저는 다른 누구보다도 깊이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건강한 것만으로도 효도를 하는 것이듯 부모는 살아 계셔주는 것만으로도 자녀에게 사랑을 하시는 것인데 그 부모가 서로 너무도 사랑하여 사랑의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그 사랑으로 가르쳐 준다면 이보다 자녀에게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고 이보다 더 나은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희랍 신화를 보면 신들이 인간을 사이에 놓고 다투는데 우리의 하느님은 삼위일체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삼위일체의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는 자식 사랑을 놓고도 싸우고 경쟁하며 독점하려고도 하고 서로 상대의 잘못을 얘기하며 자식을 자기편으로 만들려 합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부부는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랑을 자식에게 이해시키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사랑을 자식에게 일깨웁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자식이 아버지를 사랑하게 하고 아버지는 자식이 어머니를 사랑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의 사랑은 삼위일체로 우리를 사랑하고 삼위일체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이신 성령께서 바로 우리에게 그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아주 절묘합니다.
먼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사랑이신 성령을 보내시는데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십니다. 이름으로 보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제가 누구에게 선물을 보낼 때 제 이름으로 보내지 않고 제가 사랑하는 친구의 이름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또는 제가 결혼을 앞두고 부모에게 선물을 드릴 때 제 이름으로 선물을 드리지 않고 제가 사랑하는 여자 친구의 이름으로 선물을 드립니다.
어제 저는 어버이날 축하로 카네이션을 한우리 젊은이들로부터 여럿 받았는데 그중에 어떤 것은 누가 진짜 보냈는지 제가 압니다. 한우리 젊은이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한우리 젊은이들이 사랑을 받게 하려는 깊은 사랑이지요.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도 성자와 성령 안에 당신 사랑을 숨기십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사랑을 하고 성령으로 사랑을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우리의 사랑을 가르치시고 성령으로 당신 아들의 계명을 실천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가르치시고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기도해주시는 스승
-김동하 신부-
배움은 어릴 적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이어집니다. 성인이 되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평생토록 계속합니다. 마침도 이룸도 없는 배움이지만 거듭하여 이르고자 하는 목표는 섬기고 봉사하는 인간입니다(마르 10,45 참조).?? 배움에서 섬김과 봉사라는 거룩한 열매를 내기 위해서는 스승이 큰 몫을 차지합니다. 말로는 일러주고 행동으로는 실천하며 마음으로는 밀어주는 스승이어야 합니다. 죽는 법을 가르쳐서 사는 법을 깨닫게 하는 스승이어야야 합니다. 몸소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늘 함께하면서 기도해주는 스승이어야 합니다. 완성이시고 마침이시면서도 자그만 몸으로 오신 분. 그분께서는 섬김과 봉사라는 배움의 열매를 말과 행동과 마음을 합하여 손수 맺어주신 스승이십니다.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려고 죽음을 걸으신 스승이십니다. 미처 깨닫지 못한 삶의 의미는 당신의 보호자이시며 분신이신 분까지 보내셔서 뚜렷이 밝혀주시고자 하십니다. 기쁨으로 가득 찬 섬김과 봉사의 삶으로 이끌기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해주십니다.
렉시오 디바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
어느 해인가 8일 피정을 시작하면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묵상하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게 됩니다. 먼 길을 걸어오시느라 지치고 배고픈 한낮, 제자들은 모두 시내로 먹을 것을 사러 가고 예수님 혼자서 우물가에 앉아 계셨지요. 이때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지요. 여인은 유다인이 자기에게 말을 걸고 더구나 물까지 달라고 하여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부정하다고 여겨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의 대화가 오고 갑니다. 시작은 마치 동문서답식 대화 같았는데 차츰차츰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동화됩니다. 마침내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 그분이 그리스도일지 모른다고 전했습니다(요한 4,142). 피정 마지막 무렵의 주제는 요한복음 21장,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부분이었습니다. 바닥이 환히 비치는 맑고 투명한 갈릴래아 호수. 물결이 햇살에 반짝이며 호숫가에 부드럽게 밀려왔다 밀려갔으며 두 사람이 해변을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이었고 그 옆에 있던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저 자신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앞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게 물을 줄 수 있겠니?" 나는 선뜻 "예, 주님!"이라고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옥빛이 도는 맑은 물결을 쳐다보면서 머뭇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베드로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왜 "물을 줄 수 있느냐고 물으셨을까?"라는 의문은 갖지 않았습니다.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물을 길으러 왔던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둔 채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생명수를 마셨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예수께 물을 떠 드렸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내게 물을 청하셨습니다. "이제 물을 줄 수 있는가?"라는 표현에서 그동안 무척 기다려 오셨다는 것과 강요하지 않는 정중함을 느꼈습니다. 비록 대답도 못하고 물도 드리지 못했지만 지금도 자꾸 떠오르는 성가가 있습니다. "날 먼저 사랑하신 주는 사랑받기 원이시라 / 내 가슴이 숨 쉬는 만큼 주님 사랑하리이다. 주님 사랑하리이다."(가톨릭성가 332번 2절)
"진짜?" 하고 묻듯이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라고 하십니다. 도취하여 노래하는데 마치 찬물을 끼얹는 듯이 말입니다. 사실 말과 노래로는 사랑한다고 할 수 있지만 사랑의 증거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표시는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느냐로 드러납니다. 내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을 행할 물동이도 두레박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지요. 마더 데레사가 하느님을 사랑하였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습니다. 이유는 그분이 사람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며 돌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과 당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마더 데레사의 일을 보면 예수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느님을 참 많이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이 이룬 일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란 질문에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일이나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단지 거기 존재하는 겸손이지요. 그 일의 가치는 그 일을 고무시키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정신에서 온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없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종교와 종파를 초월하여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죽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의 양으로 판단받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쏟았던 사랑의 무게로 판단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자기 희생으로부터, 곧 아픔을 느낄 정도의 큰 희생에서 흘러나옵니다." 이는 마태오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을 상기시켜 줍니다.
㰡’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㰡“(14,`23)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다 마더 데레사처럼 살 수는 없겠지요. 각자가 받은 소명대로 살 것입니다. 㰡’이제 내게 물을 줄 수 있겠니?㰡“라고 청하신다면 아직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이제 어떻게 물을 드려야 하는지를 조금씩 깨달아 갑니다.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작심삼일이라, 번번이 좌절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그것이 내 의지대로 잘 안 된다는 것, 내 안에 그런 에너지와 사랑이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릇이 쓰이기 위해 비워져 있어야 하듯이 먼저 단단히 주먹 쥔 손을 펼치는 것, 하느님께 승복하고 그분의 어린이가 되는 것, 하느님께 인정받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것, 희생하고 사랑해야만 하느님의 자녀 자격이 있다는 무의식적인 강박관념에서 해방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거기서부터 샘솟는 사랑을 받고 있음에 대한 안도감, 자유로움, 그리고 그 아래서 새록새록 떠오르는 감사의 마음,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흘러나옴을 느낍니다. 작심하지 않아도 내 안에서 자연스러이 흘러나오는 것이기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마태 6,`3 참조).
억압과 자유와 평화 -배광하 신부-
어느 스님께서 가톨릭 교회의 방대한 법전을 보고 놀라며, 법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신자들이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고, 교회가 자꾸 신자들을 옭아매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셨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라의 법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가장 이상적인 국가는 법 없이도 사는 나라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영악스러워져 자꾸만 법망을 피해가며 악을 저지르니 그것을 보완하는 또 다른 법들이 만들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도 그 같은 모습은 자주 발견 됩니다. 그들이 단순한 율법을 지키지 않고 미꾸라지 같이 피해가며 악을 저지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또 다른 율법이 만들어지고 법 조항은 늘어만 가게 되어 힘없는 백성을 억압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부터 신앙에 입문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율법의 얽매임이었습니다. 특별히 할례의 문제는 새로운 신앙에 들어서려는 이들에게 많은 두려움과 망설임을 안겨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그 많은 억압적인 율법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싸우셨던 예수님의 정신을 그토록 빨리 잊어버리고 초대 교회는 또다시 백성을 율법에 옭아매려고 하였습니다.
그 같은 거짓 율법에 당당히 맞섰던 바오로 사도는 드디어 초대 공의회인 예루살렘 사도 회의를 이끌어 냅니다. 특별히 이방인들이 신앙에 입문할 때 가장 큰 공포의 걸림돌이었던 할례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사도 15, 28)
그런데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된 교회는 바리사이보다 더 지독한 율법주의화 되어 하느님 백성을 억압하게 됩니다. 구약의 강압적인 율법주의보다 더 큰 공포의 율법 교회로 변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득권을 얻은 다음, 신앙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수 많은 백성을 억압하고 죽인 것이 부인할 수 없는 교회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당신의 이 지상 파견의 목적이 자유와 해방이라고 선포하셨는데, 교회가 그것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 18~19)
이제 신약의 자유와 해방을 크신 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인간을 억압하는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를 지킬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살아갈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자유와 평화
신앙인들은 외부의 압력에 맞서 용감히 싸워야 하지만 우리들 스스로 참된 자유를 살지 못하고 얽매여 있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반성해 봐야 합니다.
세상 모든 물질적인 것, 권력, 명예, 재물, 지식, 가족, 인간적인 사랑의 얽매임에서 과감히 해방되어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이 진정한 자유 참 평화를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 27)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맛보았다면, 이제는 내 자신이 옭아매고 있는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도 평화와 자유를 맛볼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아 늘 송구스러움과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이웃과 가족을 용서해 그들이 두 손 활짝 펴고 자유와 평화를 맛볼 수 있게 하는 일, 내 집에 세 들어 사는 가족의 경제적인 어려움에 빚을 탕감해 주어 기쁨의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해 주는 일, 어려운 고민에 억눌려 있는 이들을 사랑의 관심으로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해 주어 자유와 평화를 얻게 해주는 일 등.
내 주변을 사랑으로 둘러보면, 바로 나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주게 될 일들이 실로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에 눈뜨게 됩니다. 그것이 부활을 사는 것이며, 부활을 사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일 것입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그렇게 살라고 예수님께서는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 23)
우리가 진정 자유와 평화를 세상 속에서 만들며 살때, 분명 우리는 영원한 평화의 도성,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어린양의 등불(묵시 21, 23 참조)이 찬연히 빛나는 부활의 집으로 말입니다.
사랑한다면 그분 말씀 따라
-이기양신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두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지는 못해도 미워하지는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임을 자처하면서도 미운 사람이 생겨나면 몇 배로 보복하려 하고, 또 커진 미움으로 삶이 온통 흔들리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욕망을 따른 어두움의 감정을 털어내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제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아주 사이가 나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가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험담을 늘어놓기에 바빴으며, 동네에 나가면 서로의 흉을 보느라고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참다못한 며느리가 어느 도사를 찾아가 울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도사님, 이러다가는 제가 죽겠습니다. 우리 시어머니를 빨리 돌아가시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미움으로 가득 차 독기가 서린 며느리를 유심히 쳐다보던 도사는 "내가 방법 하나를 알려줄 터인즉 그대로만 하면 당신 시어머니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오. 시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오?"
방법이 있다는 소리에 며느리는 좋아라하며 얼른 대답했습니다.
"인절미를 참 좋아하시지요."
"그렇다면 인절미를 아주 정성껏 준비해서 딱 100일 동안 대접해 드리시오. 그런데 대접해 드릴 때는 반드시 웃는 낯으로 상냥하게 해야 하고 어깨와 등도 함께 주물러 드려야 하오. 이렇게 하면 100일 후에 시어머니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오."
묘책을 받은 며느리는 신바람이 나서 집으로 돌아와 바로 맛있는 인절미를 만들어 시어머니께 갔습니다.
"어머니, 인절미가 맛있게 되었네요. 한 번 잡수어 보세요."
시어머니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합니다. 며느리는 화가 치밀 대로 치밀었지만 꾹 참고 시어머니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합니다.
"아니, 무슨 일이냐, 네가?"
깜짝 놀란 시어머니는 어깨를 며느리에게 맡긴 채로 고개를 외면하고 도대체 며느리가 무슨 술수를 꾸미는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여러 날이 흘렀습니다. 시어머니는 동네에 나가면 며느리를 칭찬하게 되고 칭찬을 하다 보니 전에는 몰랐던 며느리의 장점이 점점 눈에 띄는 것이었습니다.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시어머니가 자기를 칭찬한다는 동네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점차로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기특했고 며느리는 그런 시어머니가 고맙고 정겨워졌습니다.
이제 100일이 하루 남은 99일째 되는 날에 며느리는 고민이 되어 도사를 찾아갔습니다.
"도사님, 정말 인절미를 하루만 더 드시면 우리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게 되나요?"
"확실히 돌아가시지요."
"아이고, 도사님. 우리 어머니를 살릴 방법은 없겠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며느리는 도사를 붙들고 사정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도사가 말했습니다.
"인절미를 하루만 더 먹게 되면 미운 시어머니는 죽고 새로 사랑스러운 시어머니가 태어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칭찬에 반색하며 기분 좋아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은 남에 대한 칭찬에는 인색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데는 별 생각 없이 쉽게 행하는 경우가 많지요. 더 큰 사랑을 받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본인은 작은 사랑조차 나눌 줄을 모릅니다.
예수님의 큰 사랑을 입고 사는 신자들은 받은 사랑을 나눠야 할 의무가 있고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할 때 화해의 기적이 일어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 말씀을 지키고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뛰어넘는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임을 행동으로 드러내 보이는 한 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것
-김지영신부-
유다인 지혜의 저서인 ‘탈무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느님이 최초의 여자를 만들 때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 만드셨다고 적혀 있다. 로마 황제가 한 랍비의 집을 방문하여 ‘하느님은 도둑이다. 어째서 남자가 잠들어 있을 때 허락도 없이 뼈를 떼어 갔는가?’라고 말했다. 이 때 옆에 있던 랍비의 딸이 말참견을 하였다. ‘황제의 부하 중 한 사람을 좀 빌려 주십시오. 좀 어려운 문제가 생겨 조사시켰으면 하는데요’ 라고 했다. 황제는 ‘그건 어렵지 않지만 어려운 문제는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딸은 ‘실은 어젯밤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와 금고를 훔쳐 갔는데 그 대신 도둑은 금그릇을 놓고 가버렸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조사하여 연유를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라고 대답했다. 황제는 ‘그것 참 부러운 일이로군. 그런 도둑이라면 내 집도 털어 갔으면 좋겠구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랍비의 딸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그 일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일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갈비뼈 한 대를 훔쳐가셨지만 그 대신 이 세상에 여자를 남겨 놓으셨으니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 계신 곳으로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남겨 줄 것을 약속하십니다. 즉, 십자가상 죽음의 길로 떠나게 되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평화를 선물로 내려 주십니다. 평화는 전쟁이 멈춘 상태와 같은 평화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처하시는 예수님 바로 자신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권력과 부귀를 통한 평화가 아니라 이웃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행위를 통해 누리게 되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결국,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예수님 바로 자신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남기신 평화는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평화인 것입니다.
또한 나약하고 겁 많은 제자들을 이 세상에 남겨 두고 가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결코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협조자 곧,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늘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제자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으며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온갖 박해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오늘의 제1독서(사도 15,28)에서 전해 주고 있는 것처럼 성령을 통해 초대 교회의 분열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서 늘 주님이 남겨 주신 평화를 인사하고 나눕니다. 형식적인 평화의 인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가정과 이웃 안에서 용서의 마음과 진실이 담긴 ‘평화’를 전해 줄 수 있는 사랑의 사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
-조욱현신부-
오늘도 지난 주일의 천상 예루살렘의 이야기(묵시 21,1-5)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천상 예루살렘은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21,2 참조). 찬란히 빛나는 열두 대문 위에 씌어진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12절)- 이것은 모든 민족들이 그 도성을 건설하는데 참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과 그 성벽을 받치고 있는 열두 개의 주춧돌 위에 새겨진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14절)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옛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 사이의 사상적 연속성이 있음을 뜻한다.
제2독서: 묵시 21,10-14.22-23: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 그러나 “나는 그 도성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바로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22절). 천상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세속도시’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성스러움과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깊이 들어와 계시어 그들과 하나를 이루고 계심을 뜻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과 인간들이 일치를 이루는 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이미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정화에서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19-21)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어린양이 새 예루살렘의 성전’이라는 사실은 구원된 모든 사람이 ‘이미 하느님의 성전’이며 또한 만물이 하느님께 대하여 새로운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의 공통 사제직이 의미를 나타낸다. 우리 모두가 예배를 드리며 거룩하게 삶으로써 이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또한 천상 예루살렘은 성전이 필요 없듯이 빛이 필요 없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주며 어린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기 때문이다(23절). ‘세상의 빛’(요한 8,12)이신 예수께서는 당신 빛으로 선택된 이들을 감싸시며 그들은 그분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된다(2고린 3,18). 그렇게 되면 구원된 자들은 자신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이 드러나 보이는 삶이 될 것이다.
복음: 요한 14,23-29: 성령은 모든 것을 되새기게 하여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이루고 있는 오늘의 교회 역시 되어야하는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에서 우리 모두가 ‘종말론적 교회’를 예견할 수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바라고 계시다. 신앙의 종말론적 차원은 어떠한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일어나도록 강력히 밀고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습은 어떻게 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하느님의 성전, 거처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들려주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14,23-24).
그러므로 하느님의 거처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하느님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삶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천상 예루살렘으로 기어오르지 않으면 결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갈라지고, 그리하여 참된 목적지를 찾고 있는 사람들의 갈망을 대신하지 못함으로써 진정한 구원을 전해주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우리의 탓이다. 이제 또한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23절). 즉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1요한 4,8.16 참조). 사랑함으로써 그분을 체험할 수 있고 그분과 같이 사랑을 나눌 수 있다. 그러기에 교회는 하느님과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모든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가 될 때에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모든 것’(1고린 2,12 참조)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리라는 것을 예수께서 약속하신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거니와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주실 것이다”(25-26절). 즉 성령은 모든 선물의 ‘완성’과 같은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보다 철저하게 들어가게 하신다. 반복적인 되새김만이 아니라 ‘깊이 있게’ 함으로써 구원적 체험을 항상 새롭게 하는 창조적 역할을 한다. 시대는 변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주님을 온전히 기억하기에 충실해야 한다. 계속적인 ‘새로움’ 속에서의 ‘충실성’, 이것이 성령께서 교회 안에 끊임없이 이루어주시는 기적이다. 이 성령의 활동은 언제나 확고한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게 된다.
제1독서: 사도 15,1-2.22-29: 성령과 우리의 결정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제1독서에서도 나타난다. 초기 교회에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문제에서 성령께서 주인공으로 개입하시면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사랑의 ‘충실성’과 ‘새로움’의 지침이 제시된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선교사명(마르 16,15)에 충실할 수 있는 융통성을 발휘하라고 하신다. “다음 몇 가지 긴요한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 성령과 우리의 결정입니다. 여러분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지 말고 피나 목 졸라 죽인 짐승도 먹지 마시오. 그리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마시오. 여러분이 이런 몇 가지만 삼가면 다 잘 될 것입니다”(28-29절).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상 예루살렘의 표지가 될 수 있도록 항상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 하에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성령께서 비추어주시고 굳게 일치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김정현 신부-
2002년 3월 25일 일요일 고(故) 정주영 회장의 영결식이 서울 중앙 병원에서 있었습니다. 영결식이 거행되던 중 생전에 그분이 남긴 말들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 장면들 중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은,
한 기자가 “몇 세까지 살고 싶으십니까?”라고 묻자, 고(故) 정주영 회장이 웃으면서 “백오십세까지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생(生)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주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면서 저는 몇 년 전 소 떼를 이끌고 북한을 방문하던 고(故) 정주영 회장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 때 저는 지팡이를 짚고 주변 사람의 부축을 받아가며 걸어가는 정주영 회장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하루하루 가는 것이 아까울까? 그 많은 재산과 권력을 뒤로한 채,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이 빠르고 아쉬울까’하는 생각을 한 기억이 납니다. 물론 당시나, 또 돌아가시기 전이나 고(故) 정주영 회장의 심경이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백오십세 까지만 살았으면…”이라고 대답하신 것으로 보아 모든 것이 아쉬웠을 것입니다.
자신의 재산으로 ‘시간’을 살 수만 있다면 자신의 전 재산을 주고라도 ‘시간’을 사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한 번 쯤 가져보는 소망일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인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평화를 주기는 주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는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소망들 중 하나는 평화일 것입니다. 평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를 늘 갈망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평화를 주고 간다. 그런데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백오십세’ 아니 불로장생을 위해 몸에 좋은 것이라면 장소 불문하고 찾아 나서고,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자녀들에게 몸에 좋은 보약, 좋은 학원, 고액의 과외는 시키지만, 학원 때문에 첫영성체를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시키지 못하는 부모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는 자녀들에게 현세적인 작으마한 행복은 줄수 있을지 모르지만(그것도 장담할 수 없지만)영원한 생명은 결코 자녀들에게 물려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이제 우리는 주님께서만 주시는 평화를 얻어 누리기 위해 우리의 눈을 주님께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남겨주신 그 평화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한 주간 되시길 빕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
-윤정환 신부-
오늘 제1독서는 첫 번째 사도 공의회인 예루살렘 공의회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오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이방인의 도시에 복음을 전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그러자 일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조상대대로 해왔던 할례의 전통을 이방인들에게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직도 유다인의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그들은 이방인들을 한 형제라 부르며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할례라는 의식을 거쳐 유다인으로 귀속됨을 드러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오로와 야고보 사도는 그 유다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을 할례의 율법으로 규정할 수 없음을 역설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상기시키며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실천하는 이는 누구나 새롭게 태어난 하느님의 백성임을 설명합니다. 결국 사도들은 이 공의회를 통해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의 한 분파가 아님을 깨우쳐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나 유다인에게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그 출신보다 더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자렛 출신이라고 천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 시대나 오늘날이나 겉모양으로 사람을 저울질하는 풍토는 여전한 모양입니다. 신분이나 자격을 정하고 그것이 깨어지면 마치 사회가 혼란스러워져 평화가 깨어질 거라고 말합니다. 울타리를 만들고 경계를 그어 자신들의 것을 지키기에 급급합니다. 종교가 다르다느니, 지역이 다르다느니 해서 내 편, 네 편을 만듭니다.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은 할례를 통해 보이지 않는 장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을 거룩한 사람들로 만들어 주리라는 헛된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스스로 만든 장벽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담이 높아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렇게 두렵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는 다릅니다. 담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는 것이며, 경계를 긋는 것이 아니라 지우는 평화입니다. 땅에 쌓은 재물은 지키려고 안간힘을 써야 하지만 하늘에 쌓은 재물은 도둑맞을 걱정도 잃어버릴 염려도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혼까지도 책임지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성령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라는 새로움을 발생시켰습니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초기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명상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초기 신앙인들은 부활하여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분의 말씀 따라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신앙인 안에는 예수님과 하느님의 일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의 말씀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뜻을 실천한다고 주장하셨기에 초기교회는 하느님이 그분 안에 살아 계셨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가 읽어내는 것은 우리가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하느님의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정녕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처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알려주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어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 초기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회상하고 그것을 배워 자기들의 삶 안에 실천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 안에 예수님은 부활하여 살아 계시고, 그들이 기억해내어서 실천하는 예수님의 일은 성령이 그들 안에 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초기 교회는 하느님이 동기가 되어 인간 안에 또 인류 안에 일어나는 변화와 삶의 새로움을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초기교회는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것도 성령이 하신 새로운 일이었고,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신 것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신 새로운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교회가 발족한 것도 성령강림과 더불어 일어난 새로움이었습니다.
성령은 인간 안에 또 인류역사 안에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라는 새로움을 발생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사회가 외면하던 병자들을 예수님은 고쳐주어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병고(病苦)는 죄에 대한 대가라고 믿던 유대교사회였습니다. 반신불수와 나병환자를 포함한 모든 장애인은 자기 죄 값을 치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절망하던 그들을 고쳐주면서 하느님은 인간을 단죄하고 벌주지 않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교 사회에서는 가난도 죄의 결과이고 하느님이 주신 벌이기에 감수해야 하는 불행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런 일들은 유대교 사회에서는 새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하느님의 새로운 역사가 인류 안에 시작하였습니다. 초기 교회는 그 새로움들 안에 성령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얽매여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새로움이었습니다. 통치자의 땅에 사는 사람은 통치자의 법을 지켜야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땅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살도록 초대하는 지침이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의 자유를 빼앗아 노예와 같이 맹종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지침이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이런 인식도 새로움이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유대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 하나를 회중 앞에 세워 놓고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악한 일을 해야 합니까? 목숨을 구해야 합니까, 죽여야 합니까?”(마르 3,4). 회당의 회중은 침묵만 지킵니다. 유대교는 안식일에 모든 노동을 금했습니다. 병을 낫게 하는 일도 노동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날이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을 하지 않고 하느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선한 일,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날입니다. 새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고 비난한 유대교 기득권자들은 가난한 이, 병든 이들을 위해 수고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버린 이들이라 그들도 버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죄인이라 부르고, 간음한 여인을 율법의 이름으로 돌로 칩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만든 법과 제도와 그들의 권위가 우선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것을 지키기 위해 인간을 희생시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희생당하셨습니다. 오늘도 자기 권위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교회법으로 사람을 단죄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믿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 대죄니 조당이니 말할 때,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인지, 아니면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인지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다고 깨달은 제자들은 그분이 보여주신 새로움을 실천합니다. 초기 교회는 이 새로움 안에 성령이 살아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율법과 제도로 경직된 유대교를 떠나 자비하신 하느님이 살아 숨 쉬시는 유연한 성령의 교회가 발족하였습니다. 법과 제도는 그 시대에 필요하여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시대가 달라지면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이 살아 계시게 그런 것은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느님은 죽음을 넘어 예수님에게 부활의 미래를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미래를 향한 우리의 신뢰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이십니다. 새로움을 거부하는 것은 희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역사 안에 우리를 새롭게 가르치고, 예수님의 일을 새로운 방식으로 기억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새로움을 깨닫게 하고, 그것을 시대에 따라 새롭게 표현하고, 새롭게 실천하게 하는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성령은 과거의 법과 제도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이 하는 일에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법과 제도에 얽매인 사람들은 인간이 만든 그런 것을 절대적이라 강요합니다. 인간이 만든 것을 절대화하면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숨결은 사람을 살리십니다. 성령은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의 섬김이 실천으로 기억되는 곳에 살아 계십니다.
내가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가?
-심흥보신부-
언젠가 그런 묵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산다. 나 혼자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좋아하는가? 아니면 혼자 살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주고받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자면 삶이 아주 피곤하고 힘들 것이다. 그리고 자주 고통스러울 것이다.
우리 삶에서 겪게 되는 갖가지 사건들 앞에서 거듭 긴장과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며 삶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내가 만나고 싶고 좋아서 함께하고 싶어진다면 내 삶은 기쁘지 않겠는가?
우선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나에게 잘해주고 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진정 사심 없이 나에게 삶의 길을 제시해주고 열어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가? 아니 내 마음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찾다보면 다른 사람들이 내 마음을 오히려 내 욕심으로 취급하고 나를 피할지도 모른다. 내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찾듯이 다른 사람들도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찾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위해 희생해주기를 바란다면 세상은 오히려 각박해지기만 할 것이다. 좋은 사람을 찾고자하는 마음과 뜻은 고귀할지언정 그 현실이 다른 이에게 희생과 부담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위해 희생해줄 사람을 찾기보다는 내가 남에게 희생하는 편이 내겐 더 쉬운 일일 수도 있다. 내가 남에게 잘해 준다고 그 사람도 나에게 잘 해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내가 사심 없이 남에게 잘해주면 적어도 나는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만일 그 사람이 나의 좋은 점을 반기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2)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스스로 자신을 바치셨기에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희생하라고 요구하며 또 그렇게 희생하면 감사하기는커녕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게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하고 만다. 그래서 점점 더 힘들어지기만 하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자기가 더 예수님의 말씀을 살려고 하기보다, 그 말씀을 더욱 더 남에게 지키도록 요구하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기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희망을 안겨주는 말씀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에게 죄책감과 좌절을 안겨 줘 힘겹게 살게 만들 위험마저도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겸손 되이 실현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혼의 양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또 다른 죄악만 생겨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요한 14, 23) 사심 없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당에 나오는 사람은 기쁨을 얻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본인이나 남에게 부담과 분란만을 안겨줄 뿐이다.
우리가 성당에 나오는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삶의 위안과 희망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23)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 12, 24)
우리는 나 너 할 것 없이 누구를 예수님의 말씀에 빗대어 판단하고 평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키고 그렇게 지켜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어야 할 것이다.
겉으로 어떤 직책을 얻고 남이 보기에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남의 눈치를 보아가며 신앙생활을 해야한다면 얼마나 불안하고 힘겨운 삶인가.
그 어느 누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고,
자기가 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 중에 되새기고 힘을 얻어서
자신의 일상에서 실현하는 사람은
주님과 주님의 아버지와 함께 하는 영광 속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14, 27)
사랑이라는 평화
-강길웅신부-
초기 그리스도 교회가 하나의 종교로서 출발하는 데에는 몇 가지 큰 장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희랍의 발달된 거센 문화였으며, 둘째는 로마라는 강력한 이방인 세력이었고, 셋째는 율법을 고집하는 유다이즘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율법을 고집하는 유다교 계통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이 율법에서 오느냐? 아니면 믿음에서 오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회의를 소집했고 거기서 결정한 사항은, 새롭게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이들에겐 율법의 멍에를 더 이상 지우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교의 한 매듭이 정립이 되며 말썽이 많던 요지를 해결해 버립니다. 구원이 율법에서 사랑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결정을 하면서 '성령의 결정'이라고 선언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공의회며 사도들의 후계인 주교들의 결정은 '성령의 결정'으로서 오늘날까지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2독서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보여 줍니다. 그 도성에는 아름다운 치장이 있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성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성전은 아버지 하느님과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천상의 성전은 아버지 하느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이분을 영접하면 성전에 들어간 것이며 이분을 믿으면 성전을 이미 찾은 것입니다. 그러니 결론은 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면 이미 성전은 우리 안에 건설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율법으로만 구원될 수 없듯이, 우리도 세례만 받았다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세례에 의해서 하느님의 나라는 활짝 개방이 되었지만, 우리가 직접 올라가지 않으면 그분의 나라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층계도 없고 사다리도 없는데 어떻게 올라가느냐?
그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는 제일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천상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바로 그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계명을 잘 지킬 것이며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인생과, 사랑하는 가정 안에는 아버지와 예수님이 찾아가시어 거기에 머무십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이 거기 머무르시면 평화는 저절로 피어나게 됩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주님이 거기 계시면 천국의 평화가 그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먹고 잘산다 해도 주님이 거기 계시지 않으면 평화는 없게 됩니다.
저도 성격적으로 화를 자주 냅니다. 급한 성질 때문에 제 자신을 절제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제가 사랑을 거스르면 바로 그 순간부터 마음은 지옥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를 떠나시기 때문에 평화는 깨지고 썩은 오물만이 저를 괴롭힐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 고집에 있지 않습니다.
시어머니를 미워하는 어떤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시어머니의 심성이 고약한 면도 있었지만 그러나 며느리의 근본적인 자세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믿는 집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거기 계시지 않기 때문에 가정이 지옥이요 사는 게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며느리가 시장에 다녀오다가 교통사고를 만나 중태에 빠집니다. 이때 시어머니가 빠른 수혈을 해 줘서 며느리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사건 때문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사랑에 큰 감명을 받았고 시어머니 또한 며느리의 아픔을 통해서 다시 태어났던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평화를 만날 수 없으며 사랑하지 않고는 성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를 만나는 최고의 길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것은 멀리 있는 사랑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있고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합시다. 이것이 주님의 가장 큰 계명입니다. 이것이 또 평화를 얻는 최고의 길입니다.
두 부류의 삶
-강영구신부-
오늘은 부활 제6 주일입니다. 방금 우리가 복음을 통하여 들은 예수의 말씀은 참으로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원(身元) 혹은 정체(正體), 영어로는 Identity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즉 그리스도교인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며, 어떤 능력으로 살며, 무엇을 누리면서 사는가 하는 점을 명쾌하게 밝히는 말씀입니다. 이 땅 위에 살지만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교인들의 삶의 지표를 밝혀 주신 대목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두 부류의 사람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세속의 원리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두 부류가 겉모습으로는 서로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지만, 삶의 질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예수를 사랑하기에 예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즉 예수의 말씀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이미 지난 주일에도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만,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이웃을 섬기는 것, 누구에게 자신이 바라고 싶은 것을 자기 자신이 먼저 해주는 것, 그리고 사심 없이 용서하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려면 독단과 독선을 버려야 하고 자기 중심적인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언제나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이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이 그리스도교인들의 참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이 스승이신 예수를 닳는 모습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스승이신 예수의 말씀을 따르는 생활을 하기에 바보스럽고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들이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키우고 계시지만, 부모인 여러분의 말을 잘 듣는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
성령 곧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을 받고, 그 가르침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 하느님의 사랑받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하여서, 하느님의 영의 인도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그 어리석음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 그들 가운데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의 가르침을 되새겨 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늘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의 삶의 원칙은 적자 생존의 원칙, 약육강식의 원칙입니다. 자신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머리 숙여 조아리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은 무자비하게 짓밟고, 언제나 자기 중심적이며, 항상 손해보다는 득을 보아야하며, 당한 일은 언제나 복수하여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영악하고 꾀스럽고 약삭빠릅니까? 이러해야만 이 악한 세대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실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세상은 더욱 살벌해지고 다 함께 죽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짐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짐승이기를 거부하면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 스승이신 예수의 말씀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원칙을 따르면서 약삭빠르게 사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세상은 참으로 살벌한 세상, 난장판 세상이 될 것입니다.
한편, 이 세상의 원칙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이 아니라,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어둠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싸우고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원수 갚고자 하며, 이웃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우선 보기에 그들이 힘있어 보이고, 득세하여 잘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혼란과 멸망이 그들의 운명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세 번째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에서도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를 알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은 주님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이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평화입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누리는 평화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이며, 그 무엇으로도 깰 수 없는 확고한 평화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바탕으로 한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어머니를 믿고 신뢰하는 어린 아기는 어머니 품에서 아무런 두려움도 걱정도 없이 평화롭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 안에서 그 무엇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과의 근본적인 삶의 차이입니다.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들은 내일을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고, 내일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입니다. 더구나 내일 우리가 살아 있을지 죽어 있을지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지나간 과거를 염려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며, 비록 어제의 시간이 죄로 얼룩진 시간이라 하더라도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평화를 누리며 오늘에 성실한 사람들, 지금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죽음은 이미 주님이신 예수의 부활로 극복된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과거에 죽고, 주님 안에서 새 삶을 누리는 신앙인들은 그래서 언제나 평화롭습니다. 신앙인은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먹이시고 길가의 하찮은 꽃들도 화려하게 입히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실한 삶을 통하여 그 모든 것들이 해결되리라 믿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누리는 평화는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신앙인들은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꿋꿋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매사가 불안하고 두렵기만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안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라지고야 말 돈과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향락 안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강구합니다. 돈과 재물을 쌓음으로써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고, 권력과 명예를 얻음으로써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힘과 무력으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불안해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과 재물과 권력과 힘을 바탕으로 한 세상의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거짓 평화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거짓 평화에 매달려서 그 평화를 잃게 될까 불안해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잘 음미해 보면, 신앙인인 우리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겉모습으로 보기에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는 않지만, 삶의 질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을 믿기에 공짜로 주어진 은총이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쟁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늘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고 은총 속에 머물도록 합시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평화를 누리는 나날의 삶이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안에 하느님께서 사신다는 것은...
-박상대신부-
우리가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1차 고별사를 13-14장으로 한정할 때, 고별사 전체를 주도하는 가르침은 ①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새계명 선포, ② 아들의 자기계시적 정체성과 아버지와의 일치성 공개, ③ 성령의 약속과 오시는 성령의 정체성 공개로 요약된다. 이 세 가지 주제는 순서대로 다루어지거나 독자적인 단락 안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고별사 전체를 오가는 흐름을 주도한다. 2차 고별사(15-17장)에서는 이 주제들이 더욱 심화된다. 오늘 복음은 1차 고별사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된다. 오늘 복음으로 봉독되지는 않지만 14장의 마지막 두 구절을 들어보자. "너희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세상의 권력자가 가까이 오고 있다. 그가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 자, 일어나 가자."(14,30-31) 어떤가? 이만하면 예수님의 고별사가 얼마나 다급한 분위기 속에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는 고별사가 좀 길긴 하지만 예수님 공생활의 요약이며, 유언(遺言)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고별사가 위에서 언급한 주제들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주요 주제들이 다루어지는 가운데 덤으로 주어지는 것들도 많다. 그 중에 하나를 언급한다면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이 그렇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23절) 제자들에게 사랑의 새계명을 내려주신 예수께서는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을 당신께 대한 사랑으로 간주하신다. 이 말씀은 이미 앞서간 21절에서도 언급되었다. 새계명을 지킴으로써 아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될 것은 당연한 이치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하고 사랑 받는 그 사람에게 와서 함께 산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이 예수님이셨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파견임무를 완성하시고 이제 오셨던 곳으로 가려하신다. 물론 쓰라린 고통과 죽음이 남았다. 그분의 파견임무는 인간과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여 그 본래의 품위를 돌려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영 가시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다시 돌아오실 것이며, 그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사람들 곁에 사시려는 것이다. 물론 영적(靈的)으로 말이다.
오늘날 물적(物的)인 것을 더 좋아하는 인간들에게 하느님께서 영적(靈的)으로 함께 사신다함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사신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장 깊은 곳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계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요,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여기서 부활은 시작된다. 우리의 생명이 죽음의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바로 그곳에서 부활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체험에 큰 믿음이 필요하거나 대단한 수행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사랑함으로써 일어나는 그런 일에 순응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사랑은 지속적인 모험이며 늘 좋은 놀라움을 준비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사랑은 때때로 문제들을 해결하기보다는 그냥 둔다. 사랑의 호흡은 길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여정(旅程)이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여정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아니, 다 알 필요는 없다. 하느님께서 사람과 함께, 사람 안에 영적으로 함께 사신다함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왜 하느님께서 사람 안에 살려 하시는가에 대한 물음과 같다.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그 사람의 변화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아들 예수를 통하여 다시 가져온 인간 본래의 품위를 따라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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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