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57)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낙동강) ④ 양산(梁山)
2020년 11월 10일 (화요일)▶ 백파 출행
이제 양산시 물금에서 출발하여 부산광역시 구포를 경유하여 사상구와 사하구의 낙동강 물길을 따라 내려가서 부산의 낙동강하구둑까지 가는 여정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양산천을 중심으로 한 양산시(梁山市)와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양산과 마주하고 있는 김해시(金海市)를 그냥 지나쳐갈 수는 없다. 양산도 그렇지만 특히 김해는 유서 깊은 가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땅이다. 양산과 김해는 낙동강이 남해로 들어가는 막바지 하류의 양안(兩岸)에 위치한 고대사에서 현대사에 이르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래서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신라와 가야의 옛 땅인 두 지역의 지리적 환경과 문화 등 그 역사적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양 산(梁山)
양산시(梁山市)는 부산광역시의 북쪽에 위치하며, 시의 남동쪽으로 낙동강(洛東江)을 경계로 하여 김해시와 마주보고 있으며 동북쪽으로 울산광역시와 접하고 있다. 영축산(취서산)을 중심으로 산지가 많고 양산천(梁山川) 하류지역을 제외하고는 농경지가 적다. 지금은 양산신도시 개발로 양산천 주위 농지도 거의 아파트나 도시의 건물이 들어섰다. 경부고속도로가 양산천을 따라 남북으로 통과하며, 부산의 배후도시로 전철이 부산 도심과 연결되어 있다.
자연환경
양산시의 진산은 영축산(1,092m)이다. 청도와 울주의 경계에 있는 낙동정맥 가지산에서 남하하는 산줄기가 능동산―간월산―신불산을 경유하여 양산의 북쪽 영축산에 이르는데 소위 ‘영남 알프스’로 알려진 장대한 산군이다. 영축산에서 낙동정맥은 동남쪽으로 산줄기가 이어져 나가고, 영축산(1,092m)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영축지맥은 함박등―시살등(981m)을 경유 염수봉(816m)으로 이어지는데, 그 산줄기는 능걸산(783m)에서 원동의 토곡산(855m)으로 이어직거나 선암산(710m)—오봉산으로 이어져 낙동강에 이르고, 염수봉(816m)에서 매봉산—금오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천태산이나 삼랑진의 구천산―만어산―매봉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가지산에서 내려온 낙동정맥(洛東正脈)은 영축산(1,092m)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져 정족산(700m)―천성산(920m)―군자산(534.9m)―계명산(599.9m)을 경유하여 금정산(800.8m)에서 남쪽으로 백양산―주례―엄광산―구덕산―아미산으로 이어져 낙동강이 남해로 들어가는 몰운대에서 그 맥을 다한다. 약 370㎞에 이른다.
양산시는 영축산을 중심으로 동남쪽의 낙동정맥과, 서쪽의 영축지맥 사이에 있다. 양산시에서 낙동강에 유입되는 주요 하천으로는 양산천, 원동천, 화제천이 있다. 양산천(梁山川)은 양산의 중심을 지나는 하천으로 낙동정맥과 오봉산지맥 사이에 있고, 원동천(院洞川)은 천태산과 토곡산 사이의 산곡에서 흘러내려오고, 화제천(花濟川)은 토곡산과 오봉산 사이에서 흘러내려오는 지천이다.
양산(梁山)의 역사
낙동강—남해와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徐羅伐), 경주를 연결하는 통로에 위치했던 이곳은 일찍이 신라의 세력권에 편입되었으며, 665년(문무왕 5)에 신라는 이곳에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했다.
통일신라시대의 행정구역 개편 때 9주의 하나인 ‘양주(梁州)’를 두고, 1주(州) 1소경 12군(郡) 34현(縣)을 관할하게 했던 중요한 지역이었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에 양주로 개칭했으며, 성종 대에 방어사를 두었다. 1018년(현종 9)에 군으로 고치고, 동평현과 기장현을 영현으로 두었다. 조선시대 군현제 개편에 의해 1413년(태종 13)에 양산군(梁山郡)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하여 1895년에 동래부 양산군, 1896년에 경상남도 양산군이 되었다. — 1995년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장안읍·기장읍·일광면·정관면·철마면 등이 분리되어, 기장군으로 신설되면서 부산광역시에 통합되었다. 1996년에 나머지 양산군 지역이 양산시로 승격했다. — 현재의 양산시는 물금읍(勿禁邑), 동면(東面), 원동면(院洞面), 상북면(上北面), 하북면(下北面), 중앙동(中央洞), 양주동(梁州洞), 삼성동(三城洞), 강서동(江西洞), 서창동(西倉洞), 소주동(召周洞), 평산동(平山洞), 덕계동(德溪洞) 등 1개읍 4개면 8개동이 있다. 시청시청은 경상남도 양산시 중앙로에 있다.
양산천(梁山川)
양산천(梁山川)은 동남쪽의 낙동정맥과 서쪽의 영축산-오봉산 지맥 사이의 산곡에 발원하여 하나로 합류하는 낙동강의 지천이다. 양산천은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의 영축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상북면(上北面)과 산막동(山幕洞)의 경계에서 국가하천으로 바뀌어, 양산시 동면(東面) 가산리(호포)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전장 26km이다. 영축산(통도사)에서 발원하여 양산시의 한 복판을 흐르는 양산천에는 동쪽의 천성산 내원사에서 내려오는 용연천, 서쪽의 염수봉에서 발원한 내각천, 동쪽의 천성산 홍룡사 계곡에서 내려오는 대석천, 서쪽의 어곡리에서 내려오는 유신천, 남서쪽 장군봉 동면에서 내려오는 다방천을 받아들여 낙동강에 흘러든다. — 유산천이 합류하는 유산동(由山洞) 일대에 양산공업단지가 자리 잡고 있고, 하천 주위 물금읍에는 양산신도시가 개발되어 있다.
양산신도시
양산신도시는 남부권 최대의 신도시로 정식명칭은 ‘양산물금 택지개발지구’이다. 1994년 택지개발 예정지구로 지정된 이후 1994년 12월부터 2015년 말까지 진행되는 사업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추진하는 도시 광역화에 따른 생활 행정 실현 및 국토 건설 종합 계획의 구현과 지역 균형 개발의 촉진을 위해 부산권 개발 계획에 포함되는 양산물금 택지개발사업에 의해 조성되는 신시가지로, 부산대학교 양산캠퍼스(부산 의과대학병원)가 조성되었고 부산도시철도 2호선이 연장되어 있다.
양산 춘추공원
양산 시내 북서쪽 양산천변에 춘추공원(春秋公園)이 자리하고 있다. 춘추공원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공간이면서 양산 출신 선열들이나 호국 영령들을 모신 유서 깊은 공원이다. 양산시 교동에 있는 근린공원으로 호국의 정신과 애향의 정신을 고취하고 시민들의 휴식 공간 및 화합의 장소로 활용할 수 있는 도시지역권 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하여 2003년 3월부터 시작하여 2010년에 완료되었다.
춘추공원 지역은 옛날부터 촌락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었으며 애향 단체인 춘추계가 공원 이름을 춘추원으로 고쳐 부르고 ‘삼조의열비(三朝義烈碑)’를 모셔와 세우는 한편, 입구에 ‘삼조의열단(三朝義烈壇)’, ‘삼조의열(三朝義烈)·만년춘추(萬年春秋)’란 석각 기둥을 세운 양산의 정신적 명소이다. 삼조(三朝)는 신라·고려·조선의 세 왕조를 말한다. 그리고 춘추공원에는 구한말 항일운동지사 우산 윤현진 선생의 비석과 동상이 모셔져 있고, 그리고 김서현(金舒玄) 장군비, 임진왜란 의병장 안근의 비석과 이원수의 「고향의 봄」노래비가 세워졌다.
양산 춘추공원 현충탑(顯忠塔)
그리고 충렬사(忠烈祠)와 삼조의열비
양산 춘추공원 충렬사(忠烈祠) 구내 내삼문 아래에 양산 출신으로 나라를 위해 목숩을 다한 ‘삼조의열비’가 세워져 있다. ‘삼조의열(三朝義烈)’이란 신라시대의 박제상(朴堤上), 고려시대의 김원현(金元鉉), 조선시대의 조영규(趙英圭)를 말한다. 박제상은 왜국에 가서 왕자를 구하다가 순국한 신라의 충신이요, 김원현은 고려 때 양산방어사로 양산을 방어했고, 조영규(趙英圭)는 임진왜란 때 양산군수로 양산을 방어하다 순국을 했다. 본래 이 비석들은 춘추공원 내의 숲속에 있었으나 2012년 충렬사를 신축하여 옮겨온 것이다. 춘추공원 내에는 거대한 현충탑(顯忠塔)이 세워져 있다.
현충탑(顯忠塔)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충의와 위훈을 기리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그 장렬한 뜻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의 번영과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신라시대 삽량주간(歃良州干) 박제상(朴堤上)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박제상은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제5대 파사이사금의 5대 손이며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 아버지는 파진찬(波珍飡) 물품(勿品)으로 되어 있으나, 이러한 그의 세계(世系)는 거의 신빙성이 없다.
신라는 백제 세력을 견제할 필요에 의해 402년(실성왕 1) 내물왕의 셋째아들인 미사흔(未斯欣)을 왜에, 412년에는 내물왕의 둘째아들인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파견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왜와 고구려는 이들 왕자를 인질로 감금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내물왕의 큰아들 눌지왕은 즉위 후 두 동생을 고구려와 왜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군신을 불러 협의하였다. 그 결과 수주촌간(水酒村干) 벌보말(伐寶靺), 일리촌간(一利村干) 구리내(仇里迺), 이이촌간(利伊村干) 파로(波老) 등 세 사람이 모두 박제상이 그러한 역할을 맡을 역량이 있는 적절한 인물이라고 천거하였다.
당시 박제상은 양산(梁山) 지방의 토호 세력으로서 삽량주간(歃良州干, 양산지방의 촌장)이라는 직책에 있었다. 그는 418년(눌지왕 2) 왕명을 받들어 먼저 고구려에 가서 장수왕을 언변으로 회유해 복호(卜好)를 구출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귀국한 즉시 왜에 인질로 가 있는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해 부인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떠났다.
그는 왜에 이르러 마치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해 온 것처럼 속였다. 마침 백제 사신이 와서 고구려와 신라가 모의해 왜를 침입하려 한다고 거짓으로 꾸며 말하였다. 이에 왜가 병을 파견해 미사흔과 박제상을 향도(嚮導, 길을 인도하는 사람)로 삼아 신라를 침략하고자 하였다. — 왜의 침략 세력이 신라를 치러 오는 도중에 박제상은 강구려(康仇麗)와 협력해 왜병을 속여 미사흔(未斯欣)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그 자신은 붙잡혀 왜 왕 앞에 끌려갔다.
왜 왕은 그를 신하로 삼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으로 회유했으나, 박제상은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결코 왜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해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유형에 처해져 불에 태워지는 참형을 받아 죽었다.
이러한 사실이 신라에 알려지자 눌지왕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했으며,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박제상의 아내는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다 그대로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望夫石) 설화의 주인공이다. ― [네이버 지식백과] 박제상 [朴堤上]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참조
고려시대 양주방어사 김원현(金元鉉)
고려시대 충렬왕 때 왜구가 자주 침입하여 백성을 괴롭히므로 조정에서는 방어사(防禦史)를 두어 이를 막았으나 충렬왕 말년에 왜구가 함선 수백 척에 분승하여 낙동강을 통해 침입하므로 양산방어사 김원현(金元鉉)이 나가 격퇴했다. 김원현은 왜구를 격멸하고 많은 포로와 선박을 포획하는 공을 세웠다. 김원현(金元鉉)은 『고려사(高麗史)』에 1044년(정종 10) 진사 을과에 합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에 양산군수인 이만도(李晩燾)가 찬한 비명에 의하면, 문종 때 양주방어사(梁州防禦史)에 임명되었을 때 왜적이 군선 190여 척을 이끌고 삼차강(三叉江, 낙동강)에서 양산(梁州, 梁山)으로 진격하자, 김원현은 전투복을 갖추고 힘써 싸워 많은 적을 참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신라시대 김서현(金舒玄) 장군의 후손이다.
전승비가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망실되어 지금은 증거가 남아 있지 않다. 조선 후기에 삼조(三朝)에 양산을 빛낸 인물로 신라 때 박제상, 고려 때 김원현, 조선 때 조영규를 각각 선정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고려사』등의 자료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아 김원현을 평가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만도가 찬한 비명에 “빛나는 양산의 들녘이여! 물목에 건너가면 서전의 피적에 공을 걸어두었네. 양주방어사 김 공은 우리나라 역사서에 외침을 막은 공으로 길이 기록되리라.”라는 글귀가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김원현 [金元鉉]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참조
조선시대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조영규(趙英圭, 1535~1592)는 전라도 장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기상과 완력이 뛰어났다. 본관은 직산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힘이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천성이 어질고 담대하였으며, 판단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힘이 특별히 세고 몸이 날래어 1544년(명종 9) 무과(武科)에 합격하였다. 제주판관을 거쳐서 무장군수와 영암군수 등을 역임하였는데, 어질고 청백한 다스림으로 인해 가는 곳마다 많은 칭송을 받았다.
조영규(趙英圭)가 양산군수로 재임 중이던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의 선봉이 동래성을 공격하자 경상우병사 이각(李珏)은 군사를 버리고 도망쳤으나,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는 오히려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찾아가 생사를 같이하기로 기약하였다.
당시 노모(老母)가 조영규의 근무지인 양산 지역에 있었으므로, 다시 양산으로 돌아와 노모와 작별하고 동래성으로 돌아갔다. 이미 왜군이 동래성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단기(單騎)로 돌진하여 적진을 통과, 동래성 내로 들어가 왜군과 끝까지 싸웠다. 동래성이 왜군에 함락되자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는데, 조영규의 당시 나이는 58세였다.
1669년(현종 10) 송준길(宋浚吉)의 상계로 조영규의 효행과 충절이 알려져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송공단에 있는 조영규의 순난비(殉難碑)가 있다. 동래의 안락서원(安樂書院), 양산의 충렬사(忠烈祠), 장성의 모암서원(慕巖書院)에 배향되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조영규 [趙英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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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대양주 도독 김서현 장군 기적비
金舒玄將軍紀蹟碑―김유신 3대 이야기
양산 춘추공원에 김서현 장군을 기념하여 그 사적을 기록한 기적비(紀蹟碑)가 있다. ― 김서현(金舒玄) 장군은 가락국(駕洛國) 시조 김수로왕의 후예이다. 시조 수로왕이 후한 건무18년(서기42)에 가락국을 세우고, 9세손 구형왕(仇衡王) 12년, 곧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이르러, 왕비 계화(桂花) 및 세 왕자 세종(世宗), 무력(武力), 무덕(武德)과 함께 신라로 들어가니, 법흥왕은 상등의 직위를 수여하고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했으며, 뒤에 무력은 벼슬하여 각간(角干, 1등관)에 이르렀다.
진흥왕14년(553) 7월에 신라가 백제의 동북방 변읍을 빼앗아 신주(新州, 廣州)를 설치하여, 무력(武力)은 당시 아찬(阿湌, 6등관)으로써 군주(軍主)가 되셨고, 15년(554)에 백제 성왕(聖王)이 관산성(管山城, 沃川)을 쳐들어오므로, 군주인 각간(1등관) 우덕(于德)과 이찬(2등관) 탐지(耽知)등이 역습하여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던 것을, 무력께서 신주의 군사로 달려와 백제왕을 죽이고, 좌평(1품관) 4인과 병졸 25,600인을 무찔렀으니, 바로 무력은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조부이며 김서현은 부친이다.
김서현(金舒玄)은 진흥왕 25년 갑신(564)에 태어나서 이미 장성하매, 왕의 아우 숙흘종(肅訖宗)의 따님을 맞이하시니, 이가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아들 둘을 낳았으니 유신(庾信)과 흠순(欽純)이요, 딸 둘은 보희(寶姬)와 문희(文姬)인데, 문희는 김춘추의 아내 곧 태종무열왕비가 되었다.
김유신(金庾信)은 진평왕 17년(595년) 김서현(金舒玄) 장군이 만노군(萬弩郡,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 태수로 있을 때,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15세 되던 609년(진평왕 31년)에 화랑이 되었고, 그후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선덕여왕 때 상장군(上將軍), 무열왕 7년(660년)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당군(唐軍)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668년)하고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되었으며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다시 찾아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여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김유신 장군이 문무왕 8년 무진년(668)에 이미 평양을 격파하고 남한주(廣州)로 돌아오신 왕은 여러 신하에게 말씀하기를 『옛날 백제 성왕이 고리산성[沃川 관산성]에서 우리나라를 치려고 함에 유신(庾信)의 조부 각간 무력 (武力)이 이를 역습하여 그 왕과 재상 4인을 무찔러 그 야망을 꺾었고, 또한 유신의 부친 서현(舒玄)은 양주(梁州) 총관(摠管)이 되자 여러 번 백제와 싸움하여 그 예리한 칼날을 좌절시켜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했으므로, 변방 백성은 농상(農桑)의 직업에 편안하였고, 군신(君臣)은 밤낮의 근심이 없게 하더니, 지금 유신(庾信)은 조부와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아 사직의 신하가 되어서는 출장입상(出將入相)으로 공적이 거룩하다. 만약 공의 한 가문에 의뢰하지 않았더라면 국가의 흥망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김서현(金舒玄) 장군이 대양주(梁山)에 재직할 때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행해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복종하였다. 지금 양산 신기리(新基里)는 신라 도독부(都督府)의 옛터이다. 영정각이 있으니, 오른편에는 대도독 김서현의 상(大都督金舒玄之像)이라 하고 왼편에는 소판부인 만명부인의 상(蘇判夫人萬明之像)이라고 하였다. 비록 어느 시대에 창설했는지 모르기는 하거니와 그 양주의 백성에게 복록을 누리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양주(梁州)를 편안하게 다스리니 백성은 농상(農桑)을 즐기었다. 위엄이 이웃 나라에 떨쳤으니 적병은 국경에서 멀리 갔도다. 3국은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기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아들 유신을 탄생하온 바, 영특한 무인의 자질이었다. 고구려 백제를 정복하여 신라에 병합한 것이었다. ☜ 이상은 「新羅大梁州都督金舒玄將軍紀蹟碑」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한문 비문을 번역하여 다듬어 정리한 것이다.
우산(右山) 윤현진(尹顯振) 의사(義士)
춘추공원 내에 독립지사 윤현진 의사의 기념비와 흉상이 있다. 윤현진(尹顯振, 1892.9.16~1921.9.17)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 출신으로, 1914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대학 재학 중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고, 1916년 귀국하여 백산 안희제(安熙濟), 서상일(徐相日) 등과 함께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양산에 의춘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노력하였다.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동지들과 함께 공동소비조합(共同消費組合)을 설립, 자금 1만 2천원을 모금, 마련하고 동지들과 부산에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경영하였다.
3.1운동 때 미국인 선교사를 통하여 독립운동 자금 30만원을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내고,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단신으로 중국으로 탈출, 이시영, 이동녕, 김구, 노백린, 여운형, 신익희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조직에 참여 초대 재무부 차장과 재무위원장, 내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에는 「독립신문」사를 확장하고 도산 안창호와 같이 주금 모집의 발기인이 되었으며, 1921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기성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등 구국투쟁에 헌신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을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1959년 양산군민의 성금으로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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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천 구름다리
양산의 춘추공원 앞에서 동쪽의 양산종합체육관 남쪽으로 통하는 양산천 위에 구름다리가 있다. 2010년 6월에 개통하였는데 영대교 북쪽에 있는 국내 유일의 복합교 방식으로 세워졌다. 두 마리의 새가 서로 마주 보며 물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또 야간에는 조명을 밝혀 아름다운 양산천에 백조 두 마리가 노니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양산의 명소이다.
그리고 양산천 천변에는 자연생태공원과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일대에서는 수달이나 천연기념물 제327호인 원앙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양산천이 발원하는 영축산(취서산)에는 통도사가 있고, 동쪽에는 천성산(千聖山, 812m)에 내원사(內院寺)가 있다.
양산시의 3대 사찰
양산은 영축산을 기축으로 하여, 영축산의 동남쪽에 천성산 줄기가 이어져 나가고 서쪽에는 천태산 줄기가 낙동강 강안까지 뻗어 나간다. 이 삼산의 줄기는 양산과 다른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를 이룬다. 그 장대한 산록에 천 년 고찰(古剎)이 있다.
* [통도사] ▶ 영축산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은 국보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선덕여왕 재위 중인 646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해인사, 송광사와 함께 삼보사찰로 꼽히는 큰 절이다. 통도사는 자장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사리와 가사를 봉안하여 불보 사찰이라 불린다, 2018년 6월 30일 기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내원사]▶ 천성산(원적산) 깊은 산곡에 있는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 년 고찰이다. 계곡이 아름답다.
* [신흥사]▶ 양산시 원동면 영포리 268에 있다. 대웅전은 보물 제11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축조연대가 정확하지는 않으나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건축구조로 보아 고려말의 건축물로 추정되는데 특히 내부의 벽화가 우수하다. 건물의 좌우 측면벽의 내외부와 전후 포벽의 내외부에는 불상, 신장상, 꽃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대부분 17세기 중엽에 그려진 것이며, 일부는 18세기에 다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팔작지붕의 익공식 집으로 정면, 측면 2칸의 나무로 된 기와집이다.
양산 8경
양산시의 대부분이 산지여서 양산 8경도 산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축산 통도사, 천성산, 내원사계곡, 홍룡 폭포, 배내골, 천태산, 오봉산 임경대, 대운산 탑골휴양림이다. 청정 자연과 유서 깊은 고찰이 주를 이룬다. 불교의 성지가 주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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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축산(靈鷲山) *
경관 장엄한 낙동정맥 영남알프스 산군의 하나
영축산(靈鷲山)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방기리와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과 원동면에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가지산도립공원’ 구역 내에 있는 해발 1,059m인 영축산은 경관이 수려하여 영남알프스라 불리며 일명 취서산(鷲栖山)이기도 하다. 이 산은 가지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줄기가 능동산에 이르러 두 줄기로 갈라진다. 남서진하는 줄기는 밀양의 천황산에서 제약산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 내려와 배내고개를 건너서 남진하는 줄기는 간월산, 신불산을 경유하여 영축산에 이른다. 특히 영축산의 첫머리와 연결된 광활한 능선은 억새밭의 천국을 이루고 있다. 산 아래 뻗어있는 계곡은 통도사 주변 암자와 연결되어 있다.
영축산은 석가모니가 화엄경(華嚴經)을 설법한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에 있던 산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자 표기는 '영축산(靈鷲山)'과 '취서산(鷲栖山)' 두 가지로 표기되지만 이에 대한 한글 표기는 영축산·영취산·축서산·취서산 등으로 혼동을 불러 일으켰다. 이 같은 현상은 한자 '취 또는 축(鷲)' 자에 대한 한글 표기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일반 옥편에서는 '독수리 취'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축'으로 발음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리고 '취 또는 축' 자가 원래 '축'으로 표기되었다는 근거는 1463년(세조 9)에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법화경언해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산 이름 혼동의 원인은 불교에서 유래된 '축(鷲)' 자를 일반인들이 접하기 쉬운 한자사전의 표기 '취'로 읽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해 2001년 1월 9일 양산시 지명위원회에서 영축산으로 확정되었다.
* 양산 통도사(通度寺) *
화엄경과 관련 있는 영축산의 명칭 유래
통도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 가운데 하나인 불보(佛寶)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다.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양산 통도사는 불보(佛寶)사찰이요, 합천 해인사는 법보(法寶)사찰이며, 순천 송광사는 승보(僧寶)사찰로 일컬어진다.
통도사(通度寺)는 646년(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 산이름을 영축산(靈鷲山)이라 한 것은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모양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나, 그 옛 이름은 축서산(鷲棲山)이다. 절 이름을 통도사(通度寺)라 한 까닭은 ①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득도(得度)한다는 뜻, ②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③ 산의 형세가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 등이 있다.
자장율사(慈藏律師)가 643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진신사리(眞身舍利)’와 ‘가사(袈裟)’, 그리고 ‘대장경’ 400여 함(函)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창건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사찰로 부각되었다. 특히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와 가사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있는 청량산에 들어가서 날마다 기도를 하는데 어느 날 문수보살이 나타나 그에게 석가여래가 입었던 가사와 석가여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주며 신라로 돌아가 사리탑을 짓고 절을 세우라 하였다.
자장율사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일부를 모시고 와서 통도사 자리에 사리를 넣은 탑을 세운 다음 절을 짓고 통도사라고 이름 지었다. 통도사에서는 석가의 사리를 모시게 된 만큼 따로 부처의 형상을 모시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통도사에서 신앙의 정수가 되는 것은 사리탑과 사리탑이 있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이다. 계단(戒壇)이란 불가에서 지켜야 할 계율을 일러주는 곳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율사는 통도사에 머물면서 보름마다 한 번씩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계율을 강의하였는데, 그에게 계율을 받기 위해 전국의 스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금강계단은 겹으로 된 연화대 위에 받쳐진 종 모양의 사리탑을 한가운데에 두고 그 아래에 이루어진 돌층계를 이르는데, 층계의 왼쪽 끝에는 석등이, 오른쪽 끝에는 돌 향로가 놓여 있다. 이와 같은 계단은 김제시 금산면에 있는 금산사와 휴전선 북쪽인 경기도 장단군에 있는 불일사 터에도 남아 있다.
부처의 형상을 모시지 않는다고 해서 대웅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금강계단을 등지고 선 대웅전(大雄殿)에서 불단 자리를 보고 예배를 한다. 우리나라 불교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통도사 역시 다른 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처음에 지었던 건물들은 대다수가 사라지고 조선시대에 새로 세웠다.
1961년 대웅전 공사를 벌일 때 발견된 서까래의 글에 따르면, 이 건물도 조선 인조 때인 1645년에 다시 지어졌다. 용마루를 한자의 ‘고무래 정(丁)’ 자 모양으로 지은 대웅전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건물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두드러져 보물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그 밖에도 통도사를 이루는 크고 작은 건물 서른다섯채 중 조선 말기에 지어진 전각들은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 기록은 통도사의 사격(寺格)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이 절을 창건한 자장율사는 계단(戒壇)을 쌓고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맞아 득도시켰다. 이에 통도사는 신라 불교의 계율 근본도량(根本道場)이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대찰이 아니고 후에 금강계단이라고 불려진 계단을 중심으로 몇몇 법당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 뒤 고려 초에는 사세가 더욱 확장되어 절을 중심으로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둘 만큼 대규모로 증축되었다. 특히 현존하는 중요 석조물이 고려 초기 선종대에 조성되었으므로, 가람의 정비는 이때 중점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중요한 석조 조형으로는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삼층석탑(三層石塔), 배례석(拜禮石), 봉발탑(奉鉢塔), 그리고 국장생석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속하는 유물이고 그 밖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건립되었다.
통도사가 간직한 수많은 문화재
양산의 유물·유적으로는 시내에는 국가지정문화재(국보 1, 보물 24, 사적 6, 민속자료 1, 천연기념물 1),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70, 기념물 8, 민속자료 1, 무형문화재 2), 문화재자료 28점이 있다. 대부분이 통도사가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이다.
문화재만 놓고 보면 통도사는 양산을 압도한다. 양산시 전체 문화재가 219개인데 63.5% 139개가 통도사에 있다. 하북면 백록리 718-1번지 35번 국도에 붙어 있는 국장생석표는 통도사가 옛적부터 어마어마했음을 일러준다. 국장생석표는 고려 1085년 나라 명령으로 통도사 둘레에 세운 12개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통도사 경내에는 통도사 대웅전(通度寺大雄殿, 보물 제144호), 통도사은입사동제향로(通度寺銀入絲銅製香爐, 보물 제334호), 통도사봉발탑(通度寺奉鉢塔, 보물 제471호), 문수사리보살 최상승무생계경(文殊師利菩薩最上乘無生戒經, 보물 제738호),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46(紺紙金泥大方廣佛華嚴經周本券四十六, 보물 제757호), 통도사영산전팔상도(通度寺靈山殿八相圖, 보물 제1041호), 통도사대광명전삼신불도(通度寺大光明殿三身佛圖, 보물 제1042호) 등의 국가지정문화재가 있다.
그리고 통도사 3층석탑(通度寺三層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호), 통도사석등(通度寺石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 통도사대광명전(通度寺大光明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 금니법화경(金泥法華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7호), 통도사경판(通度寺經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0호), 청동은입사향완(靑銅銀入絲香埦,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 청동은입사정병(靑銅銀入絲淨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 ·청동여래입상청동사리탑(靑銅如來立像靑銅舍利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4호), 동종(銅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9호), 만세루(萬歲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극락전(極樂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 명부전(冥府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약사전(藥師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7호) 등 많은 도지정문화재가 있다.
통도사 ‘무풍한송(舞風寒松) 길’
법보사찰인 경남 양산 통도사는 주위에 빼어난 승경 8곳을 정했는데, 그중 1경이 ‘무풍한송(舞風寒松)’이다. 무풍한송은 무풍교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운치 있는 소나무 숲길을 말한다. 바람이 춤춘다는 무풍교(舞風橋)에서 역대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부도원 입구 선자(扇子) 바위 (또는 부채바위)까지 1.5km 오솔길이다. 가지를 늘어뜨린 소나무가 마치 바람에 춤추는 듯하다는 통도사 솔숲은 일제강점기 소나무 공출로 모두 잘릴 위기에 처했다. 그때 경봉 스님과 노스님들은 ‘그러면 산 위에서부터 베자’며 제안했다. 산 위 나무를 먼저 베던 중 광복이 돼 통도사의 천년 솔숲은 살아남게 되었다.
바람은 통도사를 품고 있는 영축산 정상에서 시작돼 무풍한송길 옆을 오누이처럼 흘러내리는 통도천을 따라 줄곧 불어 내린다. 속세의 때를 벗겨내라는 바람인지, 속세의 잡사에 시달리는 내 마음을 닮은 바람인지 분간하기는 쉽지 않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려 춤추는 듯한 모습이다. 이리저리 굽고 뒤틀렸지만 푸른 자태를 지닌 채 수백 년 의연하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옛말이 실감 나도록 곧고 웅장한 나무는 발견하기 어려우며, 허리를 낮추고 머리를 숙인 나무들이 고단한 시대를 살아온 삶의 자취를 그대로 담은 듯하다. 수량이 풍부하고 맑은 통도천, 영취산 자락의 숲과 바위가 춤추는 소나무들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빚어내고 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갈 무렵, 전국의 좋은 소나무들은 죄다 일본 사람들이 베어갔다. 통도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때 구하와 경봉 스님이 지혜를 냈다.
— “어차피 베어갈 거면 통도사 저 안쪽에서부터 베어가라.”
영축산 중턱에서부터 먼저 베어가라고 한 것이다. 산문 입구 소나무는 산 위쪽의 소나무를 다 베어 가고 난 뒤에 베어가라고 한 것이다. 냇물이 산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수구(水口)의 소나무는 기운을 저장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수구에 위치한 나무를 ‘수구막이’라고 한다. 수구를 막아 주는 나무. 수구를 통해서 빠져나가는 절의 기운을 막아 주는 역할이 바로 이 소나무들이기 때문이다. 옛날 절 아랫마을에서도 수구막이 소나무는 절대로 베지 못하도록 했다. 마을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통도사 산문 입구의 소나무는 이렇게 살아남았다. 무풍한송의 풍류는 큰스님의 지혜 덕에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게 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고 대부분의 가르침을 편 곳도 마을 근처의 숲이었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다비식에 쓰인 것은 전단나무였으며 그 말씀 또한 나무에 새겨 후세에 전해졌다. 통도사의 또 다른 이름은 영축총림이다. 총림은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한다. 원래 뜻은 많은 승려와 속인들이 화합해 함께 배우기 위해 모인 것을 나무가 우거진 수풀에 비유한 것이다. 불교는 뼛속까지 숲의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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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정맥 천성산(千聖山) *
천성산(千聖山)은 양산시 중앙부를 남북으로 뻗은 낙동정맥 정족산(鼎足山) 줄기에 해당하는 데, 이 산줄기에 따라 양산시가 동·서로 갈린다. 동쪽으로 회야강(回夜江)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해발 920.2m인 천성산은 가지산도립공원 구역 내에 있다. 예로부터 깊은 계곡과 폭포가 많고 또한 경치가 빼어나 금강산의 축소판이라고 불리었다. 이전에는 제1봉(920.17m)을 원효산(元曉山)으로 제2봉(852.2m, 비로봉)을 천성산(千聖山)으로 칭했다. 그러나 양산시에서 이 2개 산 이름을 통합하여 천성산으로 변경하고, 기존의 원효산을 천성산 주봉(제1봉), 천성산을 제2봉으로 삼았다.
천성산의 유래(由來)는 원효대사가 일천 명 대중을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89암자를 건립하고 화엄경을 설법하여 천명 대중을 모두 득도하게 한 곳이므로 그 이름을 천성산(千聖山, 천명의 성인이 나온 산)이라 전해진다. 원효산은 원효대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동쪽으로는 양산시 웅상읍, 서쪽으로는 양산시 상북면에 접해 있으며 산 아래 서북쪽에 내원사가 위치해 있다. 또한 천성산에는 화엄늪과 밀밭늪이 있다. 이곳은 희귀한 꽃과 식물(끈끈이 주걱)등 곤충들의 생태가 아직 잘 보존되어 있어 생태계의 보고를 이루고 있다. 또한,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꽃이 만산홍을 이루고, 가을이면 긴 억새가 온 산을 뒤덮어 환상의 등산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그리고 이곳 정상은 한반도에서 동해의 일출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여, 전국에서도 해돋이 광경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천성산 내원사(內院寺)
양산시 하북면 천성산(千聖山) 기슭에 있다. 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경부고속도로를 가운데 두고 통도사가 있는 취서산(영축산)과 마주보고 있어, 영축산(취서산)을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의 산, 천성산을 내원사를 창건한 원효대사의 산이라고도 한다.
* [내원사 창건 설화] ▶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전하여 지는데 당시 동래 척판암(拓板庵)에 주석하시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당나라 종남산 운제사(終南山 雲際寺)에 수도하던 천 명 대중이 뒷산이 무너져 위급한 사고를 당할 것을 미리 아시고 "해동원효 척판구중(海東元曉 拓板救衆)"이라고 판자에 써서 운제사 상공에 날아다니게 했다. 대중이 공중에 뜬 판자를 보고 놀라 일주문 밖으로 나온 순간에 산사태가 나서 절은 무너져 버리고 대중은 모두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 후, 구출된 천 명의 대중은 도(道)를 구하여 원효대사를 찾아왔으므로 원효는 그들을 데리고 머물 곳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중방리(지금의 용연리)를 지날 적에 원적산(圓寂山) 산신령이 마중 나와 "이 산에 천 명이 득도할 곳이니 청컨데 이곳으로 들어와 머무소서" 하니 원효는 산신령이 인도하는 바를 따라 지금의 산령각 입구 까지 온 즉 원적산 산신령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산령각을 짓게 되어서 유독 내원사 산령각은 큰절에서 5리 밖에 떨어져 있게 되었다. 원효대사가 왼쪽 계곡을 따라 들어와서 대둔사(大屯寺)를 창건하고 상, 중, 하 내원암과 아울러 89개의 암자를 창건하시어 천 명의 대중을 머물러 수도케 하였다.
그리고 대중을 산의 상봉에 모이게 하여 "화엄경"을 강설하였으므로 지금도 그곳을 화엄벌이라 하며, 988명이 이 산에서 득도하였고 나머지 12인중 8명은 팔공산(八公山)에서, 4명은 사불산(四佛山)으로 가서 도를 깨달았다하여 이후로 원적산(圓寂山)을 천성산(千聖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창건 후 고려시대의 사적은 전하는 바가 없다.
내원사는 조선 시대에 여러 번 중건되었으며, 대한제국 시기인 1898년에 유성(有性)이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한 뒤 절 이름을 내원사로 개칭하고 동국제일선원이라고 부르면서 선불교 사찰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경허(鏡虛)의 제자인 혜월이 머물며 운봉, 향곡 등 선불교의 맥을 잇는 승려를 배출했으나, 1950년 6 25사변이 발발하자 산중에 남아있던 공비들의 방화로 사원이 전소되니 내원사는 또 다시 빈터만 남는 비운을 맞았다.
1955년 9월 비구니 정수옥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서 비구니들을 위한 선원을 짓기로 서원을 세웠다. 1957년 2월 18일에 전후의 어려움 가운데에 중창불사를 시작하였고 1959년 3월 29일에 선방인 선해일륜(禪海一輪)을 낙성하고 동국제일선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수덕사 견성암에 이어 남방에서도 비구니(比丘尼)스님들이 참선수행토록 그 기틀을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절 일원은 경상남도기념물 제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성산 원효터널 공사를 둘러싸고 도룡뇽 생태계 보호를 요구하며 장기간 단식을 하여 유명해진 지율 스님은 내원사의 산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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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내골
영남알프스 깊은 산곡의 청정계곡, 밀양강 지천 단장천 상류
배내골은 신불산~영축산의 남쪽 알프스와 밀양의 천황산~재약산을 잇는 서쪽 알프스 사이의 이십 리에 뻗친 청정한 계곡이다. 영남알프스는 산이 높고 골이 깊어 그 웅장한 산세만큼이나 많은 비경을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철구소계곡→) 배내골이다. 울주군 상북면과 양산시 원동면에 걸쳐있는 배내골은 영남 알프스의 고봉들이 감싸고 있으며 산자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맑은 계류들이 모여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곳이다. 맑은 개울 옆으로 야생 배나무가 많이 자란다 하여 배내골[梨川里]이라 한다. 이곳은 영남알프스군(群)에서 가장 오지로 꼽히는 양산시 원동면 대리, 선리, 장선리를 일컫지만 그보다는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에서 시작된다 하겠다. 배내골 상류는 울주군이고 하류는 양산시인 것이다.
‘배내골’는 마을을 일컫기도 하지만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내를 이르기도 한다. 물의 흐름[水系]은 낙동강 수계인 밀양강의 지천인 단장천에 속한다. 다시 말하면 낙동정맥 능동산과 간월산 사이의 안부 울주군 배내재 아래에서 발원한 배내는 남으로 흘러 양산시 원동면 대리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흘러 밀양댐에 유입한다. 그후 단정천으로 흐르다가 재약산 표충사 계곡에 흘러내려온 서전천과 합류하여 밀양강에 유입되는 것이다.
이렇게 깊고 긴 골짜기로 형성된 배내골은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려 있어 전후좌우를 둘러봐도 보이는 건 높다란 산뿐이어서 하늘도 고개를 한참 추켜올려야 보일 정도다. 동쪽에는 간월산, 신불산, 산서산, 염수봉이 남북으로 뻗어있고 서쪽에는 천황산, 재약산, 수미봉의 줄기가 항로봉까지 이어지면서 골짜기 양쪽으로 1,000m가 넘는 고봉준령이 에워싸듯 솟아있다. 또 남쪽에는 금오산 줄기에서 배내고개를 넘게 되고, 북으로는 능동산과 간월산 사이의 배내고개를 넘는 오지마을로 알려진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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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의 천성산(千聖山) 산행
나는 1918년 10월 21일 새재사랑산악회 대원들과 천성산을 산행한 바 있다. 당시의 산행기의 일부를 통하여 양산 8경의 하나인 천성산과 화엄벌의 억새꽃 장관을 펼쳐보이고자 한다.
양산시 상부면 대석리 ▶ 홍룡사 주차장(11:40)에서 시작하여, 홍룡사[홍룡폭포]→ <오름길>→ 능선→ 화엄벌 억새밭→ 천성산[원효봉, 922m]→ 원효암→ 편백나무 숲→ 원효암 계곡→ 주차장으로 원점 회귀하였다.
이전에는 제1봉(920.17m)을 원효산(元曉山)으로, 제2봉(859m, 비로봉)을 천성산(千聖山)으로 칭했다. 그러나 양산시에서 이 2개 산이름을 통합하여 천성산으로 변경하고, 기존의 원효산을 천성산 주봉(제1봉), 기존의 천성산을 제2봉으로 삼았다. 일반적으로 천성산 제1봉(원효봉) 등산은 양산시 상북면 대석천 홍룡사계곡을 통하여 정상으로 올라가고, 제2봉은 하북면 내원사계곡이나 성불암계곡을 통하여 정상에 오른다. 영축산(1,092m)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이 정족산(700m)―공룡능선(집북재)를 지나 천성산 제2봉(859m)을 경유하여 천성산 제1봉(920m, 원효봉)으로 이어져 오는 것이다. 바로 낙동정맥 종주코스이다.
오늘은 천성산 주봉(원효봉)을 오르기 위해 홍룡사 계곡을 산행 기점으로 삼았다. 천성산 홍룡사(虹龍寺)는 문무왕 때(661∼681)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였다. 원효가 당나라의 승려 1천 명에게 천성산에서 《화엄경(華嚴經)》을 설법할 때 낙수사(落水寺)라는 이름으로 창홍룡사건하였는데, 당시 승려들이 이 절 옆에 있는 폭포(홍룡폭포)에서 몸을 씻고 원효의 설법을 들었다. 산의 이름은 본래 원적산(圓寂山)이었으나, 1천 명이 모두 득도하여 성인(聖人)이 되었다 하여 천성산(千聖山)이 되었다. 원효는 산내에 89암자를 지어 1천 명의 대중을 가르쳤으며, 당시 각 암자에 흩어져 있는 대중을 모으기 위해 큰 북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 북을 매달아 두었던 집북재, 그리고 《화엄경》을 설법하던 화엄벌은 있다. 화엄벌은 오늘 우리가 올라가는 천성산의 명소이다.
홍룡사(虹龍寺)는 양산천 지류인 대석천 상류에 있다. ‘홍룡폭포(紅龍瀑布)’는 양산 8경 중의 하나이다. 폭포 옆에 옥당(玉堂)이 있고 반야교(般若橋)를 건너서 경내로 들어서니 장중한 ‘大雄殿’(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마당 건너편에 있는 범종각은 대숲에 싸여 있으며 대웅전 옆 깊숙하게 올라간 산록에 ‘無說殿’(무설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천수관음상(千手觀音像)을 모셔놓은 관음전이다. 천수관음(千手觀音)은 천 개의 손과 천 개 얼굴을 지니고 있는 관세음보살로 중생의 아픔을 그 손길로 구제하시므로 그 영험함이 남다르다고 한다. 오직 지극한 마음으로 관음보살에 의지할 뿐, 말이 필요 없는 곳이라 하여 '무설전'이라고 했다. 그래서 홍룡사는 ‘관음성지’로 알려져 있다. ‘無說殿’ 현판의 글씨가 고졸한 예서(隸書)로 쓰여져 있어, 일반인들은 그 연유를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다.
오후 2시. 산의 능선은 그대로 광활한 평원(平原)이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억새밭 고원(高原), ‘화엄벌’이다. 사방이 확 트인 가을 천성산의 풍치가 한 눈에 안겨 들어왔다. 멀리 아득하게 올려 보이는 정상까지 광활한 억새밭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 천성산의 산행 포인트, 바로 그 화엄벌 억새평원이다. 완만한 평지의 능선을 따라 억새밭 오솔길이 이어진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청람빛 하늘, 끝없이 펼쳐진 고원의 억새밭, 그 자연이 안겨준 무한 자유(自由), 모든 것이 열려 있는 공간 속에서 답답한 인간의 가슴이 시원하게 열리고, 의식의 경계가 없어지는 느낌이다. 갈색의 평원 위에는 오직 파아란 하늘이 팽팽하게 드리워져 있을 뿐, 있는 그대로 무위자연이다. ‘화엄벌’이라고 명명하는 이곳은 우주 대자연과 마주하는 순수 공간이다.
능선 길의 아래쪽에 늪이 있다. 이름하여 <화엄늪 습지보호구역>이다. ‘화엄늪’은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천여 명의 승려에게 <화엄경(華嚴經)>을 설법했다는 유래가 있는 ‘화엄벌’에 형성된 산지습지로서 자연환경 변천의 귀중한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이탄층(泥炭層, 늪에 살던 식물들로 만들어진 흑갈색의 퇴적물)이 형성되어 있고, 앵초, 물매화, 잠자리난, 희제비난, 끈끈이주걱, 이삭귀개 등 다양한 습지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다.
— [천성산 도룡뇽 사건] —
KTX 천성산 터널공사를 5년이나 지연시킨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KTX 경부고속철도 금정산–천성산 구간(26.3km)을 터널로 공사를 시작할 때 문제가 된 현장이었다. 천성산 자연습지와 관련한 ‘천성산 도룡용 사건’은 ‘경부고속철도 금정산–천성산 관통하는 터널 공사’에 대한 환경단체와 불교계의 반대로 시작한 일련의 갈등과 격렬한 대치 상황을 야기한 사건이었다. 천성산 밑으로 고속철도 터널을 뚫게 되면 천성산 ‘화엄늪’과 ‘무제치늪’ 습지에 물이 빠져 나가 많은 희귀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천혜의 습지가 사라져버린다고 하여 환경단체와 불교계가 이곳에 사는 ‘도룡뇽’을 원고로 하여 소송을 낸 사건이었다. 공사를 시작한 2002년부터 공사는 중단되었고 막대한 재정손실을 가져왔다. 우여곡절 끝에 2007년 11월에 터널이 완성되었고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었다.
특히 당시, 이곳 천성산 내원사에 수도하는 지율스님(본명 조경숙)이 공사장 앞 포클레인 앞에서 20차례 이상 좌선을 하면서 공사를 막은 이야기, 천성산 터널 공사 방해로 인해 6조원의 재정 손실을 초래했다는 기사에 대해 ‘허위기사’라고 소송을 한 일련의 사건 등이 그것이었다. 경부고속철도가 개통한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지율스님이나 환경단체가 우려한 문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2018.10.27. 조선일보 A5전면>에 천성산 화엄습지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지율이 ‘말라붙는다’며 단식한 천성산 습지, 살아 숨쉰다.” 제하에 ‘습지에 도룡뇽도 흔히 찾아볼 수 있고, 곳곳에 물웅덩이, 습지식물의 천국’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여기, 치열한 갈등 끝에 완공된 천성산 ‘원효터널’에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 KTX가 지나고 있다.
* [인간의 본연지성] *
사람도 하나의 억새가 되는 무위자연의 경지
사람이 순수한 자연의 품에 안길 때, 사람도 또한 순수한 본연지성으로 돌아간다. 억새밭에 들어가 포즈를 잡는 대원들의 표정이 그렇게 순수할 수가 없다. 나이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소년이 되고 소녀가 되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지극히 행복해 보인다. 일상의 생활에 골몰하며 늘 전전긍긍 손익을 헤아리며 갈등하고 사는, 불안한 실존의 그늘은 어디에도 없다. 그냥 스스로 하나의 억새가 되어 그 억새밭에 서 있는 것이다. 일부러 지어서 나오는 표정이 아니다. 그냥 스스로 그렇게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를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했다.
산(山)은 늘 이렇게 우리의 가슴에 안겨들고 우리는 그렇게 산이 되고 자연이 된다. 사람이 산에 들면 산이 되고, 생명감이 넘치는 산은 늘 우리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다. 사람이 살다가 죽는 것을 보통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바로 그것이다. 한 세상 살고 나서 죽는 것은 영원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자연의 일부이니 자연은 생명의 본향이다 그래서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요 별개가 아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생사불이(生死不二)’라고 했다. 장자(莊子)는 마누라의 죽음을 앞에 두고 대야를 두드리며 즐겁게 노래했다. 이승의 고통을 벗고 생명의 본향인 자연으로 돌라간 아내를 축하하며 노래를 부른 것이다. 아, 그 도저한 경지가 바로 물아일체(物我一體)이며 생사불이(生死不二)가 아니겠는가. 장자(莊子), 구만리 장공(長空)을 날아가는 대붕(大鵬)의 사유(思惟), 필부(匹夫)에게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경지가 아닐 수 없다.
* [원효계곡으로 내려가는 하산 길] *
고운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산록의 길
해발 922m의 천성산 정상에 오른 뒤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가을 오후의 밝은 햇살을 받으며 완만한 내리막길의 도로를 따라 내려온다. 0.8km, 몇 굽이 도로를 따라 내려와 원효암에 이르렀다. 오후 3시 20분, 우리는 원효암 경내로 들기 전의 이정표에서 포장도로 길이 아닌 산길로 내려왔다. 우리가 하산 길로 잡은 원효암계곡으로 내려가는 산길이다. 가파르게 내려오는 산길, 산록의 무성한 활엽수들이 가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간간이 보이는 붉은 단풍이 곱다. 산길은 산록의 옆구리를 따라 이어지다가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 되었다. 그리고 하늘을 찌르는 편백나무 숲이 울창한 원효암계곡이다. 올라간 만큼 고도를 낮추어가는 것이다.
오늘은 멀리 양산의 천성산을 다녀왔다. 광활하게 펼쳐진 천성산 화엄벌 억새밭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맑은 하늘에서 눈부신 햇살이 내리는 가을날, 천성산의 광활한 억새밭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고 하늘의 뜻을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먼 데까지 오느라 미명(未明)의 새벽에 출행한 여정이었지만, 고원의 억새밭에서 누린 행복감은 그 여정의 수고로움을 값하고도 남았다. 영남알프스로 불리는 가지산 도립공원, 천성산 정상에서 하늘을 마주하며 하늘이 내린 은혜로운 시간에 감사했다. 그리고 하산 길의 편백나무 숲길, 몸과 마음을 가뿐하게 하는 발걸음이었다. 대자연의 맑은 기운이 온 몸에 충만한 느낌이다. …♣ <계 속>
첫댓글 하이고머니나!
아예 책 한 권을 쓰셨네 그려
이제 마지막 구간을 들어섰는데,
다 끝나면,
우리 한 잔 하세
그래요!
낙동강이 그냥 1300리가 아니군요!
이 여정이 이렇게 잘 이루어진 것도
모두가
기 대감
진 여사
연 부인
그리고 이 대장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니 ㅡ
그저 감사하고 감사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