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아내
by niaw(폭풍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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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사라졌다. 새벽 세 시 오 분 전, 불행의 문이 열리듯 눈이 떠졌다.
스탠드의 스위치를 올리자 낯선 침실의 풍경이 공격적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침실의 모습은 눈에 익은 것이 아니었다.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뇌가 빙빙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아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반지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결혼식 때 내가 아내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던 다이아반지였다.
아내의 반지를 집어들어 유심히 바라보다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문득 이 곳이 서울이 아니라 인천의 어느 해안 별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내가 없어진 것은 아직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내와 난
분명 이 곳에 같이 왔었고, 같이 침실에 들어 왔었다. 창 너머로 빗소리가 들렸다. 가랑비가 오고 있었다.
별장 안을 몇 번씩이나 샅샅이 뒤지고 내리는 비를 아무렇지도 않게
맞으며 정원을 서성거려 봤지만 아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옷가지와 잡다한 짐들은 거의 그대로 있었다. 몸만 사라진 것이다.
한시간 가량 혼자서 법석을 떨다가 아내 찾기를 포기하고 침실로 돌아왔다. 침실 테이블 위에 놓인 빈 데킬라 병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아래에는 와인 병이 두 개 더 있었다. 그것들도 빈 병이었다.
옷장 옆 구석에는 하얀 수첩 같은 게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수표책이었다. 수표책 옆으로 뚜껑이 열린 만년필도 보였다. 둘 다 내 것이었다. 수표책은 반 이상이 찢어져 나가고 없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뭐가 이상한 지는 알 수 없었다. 수표책과 만년필을 양복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시 방안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다른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내의 휴대폰은 꺼진 채로 화장대 위에 놓여 있었고,
그녀의 친정 전화번호는 몰랐다. 혹시 안다고 하더라도 지금 시간에
전화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시 침대에 주저앉을 즈음에 비로소 두통이 느껴졌다. 숙취의 고통이었다. 젖은 몸을 닦을 생각도 않고 머리를 감싸 쥔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뜯어 보아도 두통은 가시지 않았고, 아내가 사라졌을 법한 타당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유는 고사하고
몇 시간동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거의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끝까지 무언가를 기억해내려 애섰지만 철문에 가로막힌 듯한 답답함과 초조함만 증폭될 뿐이었다.
내 생애 가장 길고 암담한 새벽이었다. 초침의 흐름이 그렇게 더디고
성가시게 느껴졌던 적이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비는 그쳤다. 그러나 기억과의 전쟁은 계속 되었다.
날이 새자 나는 끝내 지쳐 버렸다. 그 때까지 겨우 생각해 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술을 마시면 쉽게 필름이 끊어진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젯밤 상당량의 술을 마셔 댔다는 것뿐이었다.
괴로운 고민을 그만두려는 순간 속이 매슥거려왔다. 급히 화장실로
뛰어갔다. 비는 멎고 닫힌 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쳐드는 상쾌한 아침이었지만,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십 여분동안 눈물겨운 토악질을 해
댄 나는 한없이 우울하기만 했다.
누구에게 어떻게 상의를 해야 할 지를 몰랐다. 언뜻 머리를 굴려 보아도 떠오르는 인물 중에서 마땅한 이는 없었다.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데 관리인 정씨가 들어왔다. 그의 얼굴을 보자 문득 진형 선배가 생각났다. 늦더라도 어제 밤에는 꼭 오겠다고 내게 전화를 했었다. 우리 부부에게 요트를 태워 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진형 선배는 자고 있어요?"
"사장님은 아직 안 오셨습니다."
정씨는 커다란 들통에 사료를 퍼 담으며 말했다. 개 사료였다. 별장 건물에서 오십 여 미터 떨어진 농장에는 덩치 큰 개와 칠면조들이 서른
마리 정도 있었다. 진형 선배는 유독 개를 좋아했다. 이곳에 별장을 짓게 된 이유도 따지고 보면 개를 키우기 위해서였다.
"어제 밤에는 분명히 온다고 했었는데…… 다른 연락 같은 거 없었어요?"
"없었습니다."
관리인의 목소리는 왠지 무뚝뚝하게 들렸다. 그가 어제도 저렇게 무뚝뚝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십 전 후로 보이는 정씨는 아주
말수가 적은 타입이 분명했다. 그런 류의 사람과는 한 마디만 이야기를 나눠봐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직업상 수많은 새로운 얼굴들과 대면을 해 왔던지라 관상을 보는 법을 어느 정도 터득했다. 정씨의 작지만 생기 넘치는 눈매와 꽉 다문 야무진 입술에서는 꼼꼼하고 차분한
성격이 비쳤으나 입 주위에 깊게 패인 주름에서는 타인과의 조우를
꺼리는 인상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아쉬운 대로 관리인에게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보려고도 했으나
기회를 놓쳐 버렸다. 망설이는 와중에 정씨는 사료를 가득 채운 들통을 들고 식당을 나가 버렸다.
깨작거리며 밥을 먹고 있는데 요리사 아주머니가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내가 아직도 식당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에 자못 놀란 듯 했다. 그녀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다. 그렇게 라도 해야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 질 것 같았다. 마침내 나는 요리사에게 아내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작고 뚱뚱한 중년의 여인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멀뚱멀뚱 바라만 볼 뿐, 나에게 어떤 작은 도움도 주지를 못했다. 그녀에게 얘기한
것을 즉시 후회했다.
하지만 결국은 모두에게 알려야만 했다. 아내는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더 이상 혼자서 얄궂은 상상들을 하기 싫었다. 일단 선배가 올 때까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선배로부터 지금 오고
있는 중이라는 연락이 왔었다.
아침 식사 후, 오전 내내 별장 안팎을 돌아다니며 아내의 행방을 쫓아
보았지만 허사였다. 나와 아내의 휴대폰을 각각 양쪽 바지 주머니에
넣고 아내로부터 어떤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제의 기억 중에서 아내와 관련 있을 법한 하나가 떠올랐다. 농장 주위를 거닐다가 무심코 해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바위 무덤
근처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꽤 먼 거리였지만 그가 누구인지 나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별장 맞은 편에 위치한 비치모텔 3층에서 머물고 있는 투숙객이었다. 어제 오후에 우리가 이 곳에 도착했을 때 과감히 아내에게 다가온 녀석이었다. 강동규라고 이름을 밝힌 그는 아내의 광팬이라 자처하며 근육질의 팔뚝에 사인을 받아 갔었다. 아내보다는 나이가 어린 녀석이 분명했다. 녀석은 첫인상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처럼 하얀 피부에 곱상하게 생긴 낯짝도
비위에 거슬렸고, 낯짝과는 어울리지 않는 근육질의 몸매도 짜증이
났다. 그러나 나를 정말 열 받게 한 것은 녀석의 악취미였다. 강동규라는 녀석은 훔쳐보기가 취미였다.
아내와 이층 침실에서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할 무렵 나는 창문으로 강동규를 볼 수 있었다. 녀석은 비치모텔의 3층 창가에서 망원경으로 우리를 훔쳐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내를 훔쳐보고 있었다.
이미 술을 두 어 잔 마신 후라 쉽게 감정이 격해졌다. 나는 당장 달려가 녀석의 희멀건 낯짝을 갈겨버리고 싶었지만 아내가 극구 만류하는
바람에 참았다. 모텔 3층을 향해 최대한 험상궂게 눈알을 부라리며 커튼을 쳤었다. 내가 자신을 발견했음을 충분히 눈치챘을 건데도 녀석은 계속 망원경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성화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대담하고 뻔뻔스런 행동이었다. 무대포 같은 그의
모습에 화도 나고 어이도 없었지만 조금 섬뜩함을 느꼈던 것도 같다.
"이것 봐! 자네 이리 좀 와봐."
바위 무덤 쪽으로 걸어가며 목소리에 무게를 실어 외쳤다. 먹물처럼
검고 커다란 녀석의 눈을 보자 새삼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라 속이 끓어올랐다. 강동규는 나의 성화같은 외침에도 아랑곳 않고 마네킹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 단추가 목까지 꽉 채워져 있어 튀어나온 가슴 근육이 더욱 돋보였다.
"자네 거기서 지금 뭘 하고 있나?"
내가 다가갈 때까지 강동규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의
하얀 얼굴은 여전히 몸과 따로 놀고 있었다. 어쩐지 급하게 사람으로
위장한 사이보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날 훔쳐보고 있었나?"
"훔쳐 본 게 아니라 그냥 보고 있었던 겁니다."
"뭐야? 이 새끼가…… 왜 보고 있었던 거야?"
"제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잠깐 할말을 잃고 주춤거렸으나 이내 위협적으로 쏘아붙였다.
"이 자식아 너, 어제 밤에도 우리 방을 훔쳐 봤었잖아! 그 때도 그냥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에 보고 있었던 거야? 너 관음증 환자야?"
"관음증이 뭡니까?"
"너처럼 남의 모습을 몰래 훔쳐보는 게 바로 관음증이야! 그건 정신병의 일종이야, 임마! 알겠어?"
"네, 그렇군요."
강동규는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으로 담담히 대답했다. 다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나는 학생에게 조롱 당한 선생처럼 혼자서 씩씩거리고만
있었다.
녀석의 표정은 줄곧 석고상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 한번도 녀석의 눈꺼풀이 닫히지 않았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녀석에게서 적의가 느껴지는 듯 했다. 녀석이 정말로 싸이코
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황당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힘겹게 쥐어 짜내는 웃음이었다. 전혀 웃고 싶지가 않았다. 내 발걸음은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이마와 겨드랑이에서 진땀이 배어 났다. 샤워실을 피로 물들이던 안소니 퍼킨스의 모습이 느닷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적개심과 분노는 돌연 공포로 바뀌고 있었다.
열 한 시가 막 지나갈 무렵 진형 선배가 코란도를 몰고 별장에 나타났다. 선배는 꽤 지친 표정이었으나 나를 보더니 활짝 웃어 주었다. 그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그렇게 반가워 보인 적이 없었다.
"야, 잘 쉬었냐? 이사장내 식구들이랑 회식이 길어졌어. 술도 많이 됐고, 피곤하기도 해서 말야, 어제 밤에는 도저히 못 오겠더라구."
"선배, 벤츠는 어쩌고 코란도야?"
진형 선배는 말도 마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비소에 맡겼는데, 부품이 없다고 일주일이나 기다리라는 거야. 요즘 이 똥차 타고 다니느라 짜증나 죽겠다. 넌 어때? 여기 괜찮지?"
진형 선배는 금방 싱글거리며 자신의 별장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나의 고등학교 선배이자,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직업상의 선배이기도 했다. 그는 서른 네 살의 젊은 나이에 벤츠를 몰고 다녔으며,
국내 최대 음반 제작사인 PJ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기도 했다.
"멍멍이들은 다 잘 있나 모르겠네. 주말에는 항상 여기서 쉬지. 내 쉼터 중에서 여기가 제일 편한 곳이라니까."
진형 선배는 환희로운 흥분에 들떠 있었다.
"점심 아직 안 먹었지? 참, 지아씨는……?"
선배는 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내를 찾았다.
아내의 얘기를 꺼내자 선배의 얼굴에서 환희의 장막이 순식간에 걷혀졌다.
아내가 사라진 침실로 선배를 데리고 갔다. 그 곳에서 어제 오후, 우리
부부가 여기에 도착했을 때부터 아내가 사라진 새벽까지의 일을 내가
아는 대로 선배에게 말해 주었다. 선배는 얘기를 쭉 듣고는 의심스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어제 밤, 술에 취한 후부터의 기억은 전혀 나지 않는단 말이지?"
"예. 박선배도 알잖아요. 나 술 취하면 바로 필름 끊어져 버린다는 거……"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수긍을 했다.
"반지를 빼 놓은 건 뭘 의미하는 걸까요?"
"글세…… 일반적으로 그건……"
선배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럴 리 없다는 듯 강하게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마음이 심하게 동요되고 있었다.
"선배, 어쩌면 좋죠?"
"강호야, 필름이 끊긴 시점이 대충 언제쯤인지는 기억이 나냐?"
진형 선배는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러니까…… 와인 두 병을 다 비우고, 데킬라를 마시기 시작했던 무렵부터 기억이 안 나니까…… 대충 열 시쯤 되었던 것 같아요."
"열 시라…… 혹시 그 전에 지아씨랑 싸움 같은 거 하지 않았었냐?"
"안 했어요."
"술 먹는 도중에도……?"
"그럼요."
"했는데 기억을 못하고 있는 거 아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제 일을 처음부터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아내와 나는 결혼 일주년 기념으로 이 곳 별장을 찾았었다. 어제 점심이
지난 무렵에 우리는 이 곳에 도착을 했었고, 저녁까지 별장 주위와 해변가를 즐겁게 돌아다녔었다. 저녁에는 정원에서 고기를 구워 먹기로
했었지만 비가 오는 바람에 식당에서 칠면조 요리를 먹었다. 그리고
여덟 시쯤에 와인 두 병을 들고 침실로 왔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주로 지아가 어린 시절의 얘기를 했었고, 나는 조용히 들어주었던 것 같다. 그 때까지 우리는 분명 즐거웠었다. 한 번도 인상을 구긴 적이 없었고, 목청을 높인 적도 없었다. 와인 두 병이 모두 비자, 지아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데킬라 한 병을 더
가져 왔고, 그것을 반쯤 마셨던 것 같다. 취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때 나는 너무 기쁘고 황홀했다. 아내의 하얀 목덜미를 바라보며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꿈만 같았다. 아내의 아름다운 얼굴, 하얀 목덜미…… 행복했었다. 눈물이 나도록…… 눈물이…… 나도록……
"선배…… 내가 울었던 것 같아."
선배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아마 너무 기뻐서 그랬던
것 같아. 너무 기쁘면 때로 눈물이 나고 그르잖아?"
"너만 울었었니?"
아내도 울었던 것 같다. 아니다. 아내는 눈물이 없는 여자였다. 결혼
후 일년동안 나는 아내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전에도 없었다.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일등을 하여도, 십대 가수상을 받아도 아내는 눈물대신 환한 웃음을 보이곤 했었다. 아내는 결코 울지 않는 여자였다. 어제 누군가가 울었다면 그건 분명 나였다. 나 혼자가 분명했다.
"그런 것 같아. 선배도 알다시피 지아는 안 울잖아?"
진형 선배는 아무 말이 없었다. 선배는 내 말을 듣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오전 내내 내 미간에 머물러 있던 주름이 선배에게 옮겨가 있었다. 지아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아는 원래 PJ에서 키워낸 거물급 가수였다. 열 여덟의 어린 나이에
데뷔하여 줄곧 정상의 자리를 지켜오던 지아는 PJ와 5년간의 계약이
끝나고 곧장 내가 대표로 있는 강호기획사로 오게 되었다. 원래부터
지아의 팬이었던 내가 그녀에게 파격적인 조건들을 내걸어 최고의 대우를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국내 최고의
음반사를 떠나 이류 기획사로 올 수 있게 된 데에는 진형 선배의 공이
컸다. 지아와 나를 본격적으로 연결시켜 준 사람이 진형 선배였다. 내가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진형 선배가 지아를 강력히 설득했던 것이다.
지아가 우리 기획사로 온 후부터 나의 적극적인 구애 공세는 시작되었고 8개월 후, 그녀는 마지막 앨범 활동을 모두 접고 나의 청혼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일 년간 우리는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아왔었다.
"너 지아랑 살면서 지금까지 싸웠던 적 한 번도 없었냐?"
"없었어."
선배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따가운 시선이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물론…… 가벼운 말다툼 정도야 있었지. 그냥 평범한, 아니 누구나 한
번쯤은 다 하는 그렇고 그런 사소한 말다툼 있잖아? 하지만 지아가 도망갈 만큼 크게 싸웠던 적은 없었어."
"도망이라……"
선배는 담배 하나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어쩐지 그 동작이 탐정 같았다. 나는 도망이라는 말을 내 뱉었다는 것에 대해 뒤늦게 놀랐다. 어째서 그런 말이 튀어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막연히 화가 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여 진형 선배에게 대들 듯이 물었다.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도망이 아니면, 선배는 뭐라고 생각해요? 예? 지아가 담배연기처럼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 겁니까? 어떻게 된 거냐구요?"
그 때 노크소리와 함께 정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이사장님 전화가 왔습니다."
"예, 알겠어요."
선배는 잠시 후에 다시 얘기하자고 하며 급히 방을 나갔다.
다시금 묵직한 적막이 어깨를 짓눌러왔다. 도대체 아내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고개를 돌리자 강동규의 희멀건 낯짝이 보였다.
"저 자식을 그냥……"
녀석은 3층 베란다에 나와 서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망원경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녀석은 망원경을 아래로 향했다가 이 곳 저 곳을 살핀 후에 마치 이제야 나를 발견한 듯 다시 나를
향해 렌즈를 고정시켰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가 별안간
나직이 탄성을 지르며 방을 나갔다.
강동규의 모텔 방은 상당히 깔끔하고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음식 냄새 같은 것도 전혀 나지 않았으며, 바닥은 먼지하나 없이 반짝거렸다.
"봤었죠. 그림자만……"
녀석은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지아의 사인을 자랑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와이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올려져 있었다.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붙잡은 것 같은 들뜬 마음이 앞서 있었다. 녀석의 관음증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할 때가 아니었다.
"봤단 말이지?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나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기해봐. 아내가 어디로 갔는지…… 어? 지아가 어디로 갔는지 말해
보라고!"
"역시 지아씨가 사라진 거로군."
강동규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울컥하고 격한 감정이 치솟았다. 나는
녀석의 멱살을 붙잡았다.
"이 새끼야, 묻고 있잖아! 대답해. 아내가 어디로 갔어? 여기 죽치고
앉아 밤새도록 망원경으로 훔쳐봤으니 잘 알 거 아냐?"
"틀렸습니다."
강동규는 억센 힘으로 나의 팔을 뿌리쳤다. 나는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바닥에 반쯤 주저앉았다.
"전 아무리 재미난 것이 있어도 열 두 시가 되면 꼭 잠을 잡니다. 그 시간이 되면 모든 것을 접어 두는 거죠. 이 십 년이 넘게 그렇게 해 왔습니다. 전 밤새도록 훔쳐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아씨가 어디로 갔는지도 보지 못했습니다."
강동규는 풀어 해쳐진 와이셔츠 단추를 다시 단정하게 채웠다.
"그림자만 봤다고 했죠? 그림자로만 봤습니다. 두 분이 싸우고 있는
모습을 요. 그림자만 보였지만 싸우고 있는 게 분명했습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녀석의 빨간 입술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고개를 숙여 내 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당신이 지아씨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목을 잡아 흔들었고, 뭔가를 마구 집어 던졌죠. 미친 듯이 방안을 휘젓고 다니더군요."
"거짓말 마! 이 자식……"
다시 녀석의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머리가 오른쪽으로 홱 돌아가는
느낌이 들며 정신이 멍해졌다. 통증은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얼굴의 왼쪽이 냉각이라도 된 것처럼 얼얼할 뿐이었다. 강동규는 내 목을 움켜쥐고는 다시 한 번 주먹을 들었다. 폭발할 듯한 적의가 녀석의 눈 속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검은 광선이 발사될 것만 같아 가슴이 조마조마 해 졌다. 녀석은 주먹을 날리는 대신 나를 힘껏 밀어 버렸다.
"당신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야!"
강동규는 옷 매무시를 바로 한 다음 더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베란다로 돌아갔다. 나는 녀석의 조그마한 뒤통수를 바라보며 격하게 차 오르는 숨을 몰아쉬었다.
강동규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우리가 싸웠단 말인가……
정말로 지아를 때렸단 말인가……
나는 비치 모텔을 나온 즉시 정씨를 찾았다. 정씨의 방은 별장 일층에
있었다. 우리가 정말로 싸웠다면 그도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정씨는 일 층 거실에 있었고, 마침 진형 선배와 요리사 아주머니도 같이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어젯밤에 우리가 싸웠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나는 여전히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관리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참 쳐다봤다.
"아니오."
관리인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나는 다그치듯 이어서 물었다.
"정말이죠? 우린 안 싸웠죠?"
"그건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층에서 쿵쿵거리는 소리는 들렸죠. 싸운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맥빠진 모습으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싸우긴 싸운 모양이다."
진형 선배가 말했다. 나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진형 선배를 바라보았다. 선배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정씨 아저씨가 어제 밤 지아씨를 봤다고 했어. 자정이 넘은 시간에 말야."
선배는 관리인을 슬쩍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하려고 거실에 나왔다가 지아씨가 정원을 가로질러 진입로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셨다는군."
나는 놀란 눈으로 관리인을 쳐다봤다. 관리인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혼자였습니까?"
나는 관리인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관리인은 시큰둥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진형 선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혼자였습니다."
"혹시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선배가 점잖은 목소리로 물었다. 관리인은 잠깐 허공으로 시선을 꽂았다가 대답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걸음걸이에 힘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빈손 이었나요?"
"작은 핸드백을 하나 들고 있었습니다."
"이것 봐요. 내 아내가 확실했습니까? 제대로 본 거예요?"
나는 갑자기 끼여들며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관리인은 짜증나는 눈초리로 나를 노려봤다.
"뒷모습만 봤습니다만 이십대 정도의 젊은 여자가 분명했습니다. 어제 밤 이 별장에서 이십대의 젊은 여자는 당신 부인뿐이었죠."
"모텔에서 투숙하는 여자일 수 도 있지 않아요?"
"모텔 투숙객이 별장 정원을 서성인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이 곳 정원부터 농장까지는 모두 사장님의 개인 소유지니까요."
"그런 거 모르는 사람은 얼마든지 올 수 있죠. 그 여자 머리모양이 어땠나요? 색깔은요?"
관리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더욱 열을 올렸다.
"왜 지아가 도망갔다고 생각하죠? 왜 지아가 나를 떠납니까?"
내 얄팍한 이성은 이미 바닥이 나 있었다. 나는 엉뚱한 방향으로 불꽃을 튀기고 있었던 것이다. 관리인은 나와 더 상종하기 싫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진형 선배를 쳐다봤다. 선배는 내 어깨를 잡으며 나무라듯 말했다.
"강호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정씨 아저씨가 지아씨의 모습을 모를 리가 없잖아? 어제 오후부터 너희 부부에게 별장 안팎을 소개시켜
준 사람이 누구니? 게다가 정황 상으로 볼 때 지아씨가 유력하잖아.
왜 쓸데없는 흥분을 하고 그래?"
나는 울부짖듯이 외쳤다.
"정황은 무슨 정황? 지아는 도망간 게 아니란 말야!"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선배의 무서운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이 곳에 온 후 처음으로
선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타오르는 듯한 감정을 애써 죽였다.
정씨는 내가 씩씩거리는 모습을 시니컬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일어섰다.
"사장님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농장에 가봐야 하거든요."
"네, 그러세요.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선배가 온화한 미소를 띄며 관리인을 바라보았다.
관리인이 거실을 나가자 요리사도 점심 준비를 하겠다며 일어섰다.
"선배…… 난 정말 기억이 안나…… 내가 지아와 싸웠다는 것도, 지아를 때렸다는 것도……"
"때렸다고……?"
선배는 내 말에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의아한 듯이 캐물었다.
"기억이 안 난다면서 때린 것은 어떻게 알지?"
나는 뭐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강동규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선배도 더 묻지 않았다.
거실에는 두터운 침묵이 깔렸다. 나는 쥐어뜯듯 머리칼을 감싸쥐며
고개를 숙였다. 미칠 것만 같았다. 이렇게 더러운 기분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가는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온갖 괴상망측한 벌레들이 스멀거리며 전신을 기어다니는 기분이었다. 알 수 없는 수많은 나약한
감정들이 내 안에서 한꺼번에 충돌하여 폭발을 일으키고 그 파편들이
다시 제각각 새로운 감정들이 되어 예의 충돌을 반복하고 있는 듯 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거짓처럼 보였고, 나 자신 또한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듯이 길게 한 숨을 내쉬며 선배를 바라봤다.
"선배, 경찰에 신고해야겠어!"
그러나 선배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강호야, 좀 더 신중해져라."
선배의 말이 맞았다. 나는 좀 더 신중해 질 필요가 있었다. 경찰이 이
일을 알게되면 먼저 박선배가 곤란해 졌다. 이 곳은 그의 별장인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그의 안식처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들의 입장이었다. 나와 박선배, 그리고 지아는 모두 공인이었다. 지아는 비록 은퇴는 했으나 아직 네티즌
사이에서 간간이 화제의 인물로 거론이 되기도 했으며, 나와 선배는
수 십 명의 가수와 연예인이 소속되어 있는 기획사의 대표들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각종 매체에서 온갖 잡음 설을 퍼뜨리며 들쑤셔 놓기
일쑤였다. 이번 일을 경찰에 알린다는 것은 언론에 고깃덩어리를 던져 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선배의 말처럼 이성을 갖고 좀 더 신중하고 침착하고 기다려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다.
아내가 사라진 지 이틀째의 오후였다. 나는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선배의 별장에서 며칠간 더 머물기로 했었다. 하릴없이 소파에 길게 누워 있는 내게 관리인 정씨가 다가왔다.
"경찰이 와 있습니다. 나가 보시죠."
나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경찰이라구요?"
정씨의 다음 말은 나를 더욱 경악으로 빠뜨렸다.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정씨는 아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지아의 시신 말이다.
by niaw(폭풍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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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의 시신은 별장으로 향하는 도로변의 낭떠러지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별장에서 일 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도로변이었는데, 그 곳은 도로가 심하게 굽어지는 지점이었고 그 아래는 바윗돌 투성이의 바다였다.
어제 저녁 무렵에 비치 모텔에서 나오려는 차와 들어가려는 차가 문제의 지점에서 쌍방 과실로 접촉 사고를 일으킨 것이다. 두 운전자는
적당히 합의를 보고 헤어졌으나 비치 모텔로 들어가려던 차가 그만
멈춰 버리고 말았다. 도로변에서 보험회사 차량을 기다리던 운전자는
무심코 바다를 내려다 봤다가 바위 위에 반쯤 걸쳐져 있는 지아의 시신을 보게 된 것이었다.
곧바로 경찰이 출동되었고, 시신의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여 신원 확인이 쉽게 되었다. 국내 가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시신이 지아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별장에는 패트롤카 한 대가 정차되어 있었고, 두 명의 제복 경찰과 한
명의 사복 형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복 형사는 놀랍게도 정원
한 쪽에서 강동규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들을
유심히 살피려는데 나를 발견한 형사가 짐짓 정색을 하고 강동규를
돌려보냈다. 그는 다가오며 신분증을 보였다.
"서까지 가 주시겠습니까?"
지저분하게 기른 턱수염이 눈에 띄는 비대한 몸집의 형사였다.
"서울로 가는 겁니까?"
진형 선배가 나서며 물었다. 형사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선배의 위아래를 빠르게 훑어본 후, 나를 쳐다봤다.
"인천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진형 선배가 난색을 띄며 형사에게 무슨 말을 해댔으나 형사는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 잘 좀 봐 달라는 얘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먹혀들지 않는 듯 했다. 나는 순순히 패트롤카에 몸을 실었다.
형사는 차에 타기 전에 진형 선배를 노려봤다.
"박진형씨도 준비하고 계십시오. 조만 간에 연락을 드릴 겁니다."
선배는 난감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별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차가 출발하려 할 때, 무심코 뒤를 돌아다보니 모텔 쪽으로 향하던 강동규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아의 죽음은 이미 조간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상태였다. 경찰과 언론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타살여부에 관한 것이었다. 일단 신문에는 자살로 발표가 되었지만 타살 의혹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언급이
있었다.
나는 먼저 시신을 확인해야만 했다. 과연 지아가 분명했다. 지아의 이마에는 검붉은 상처가 나 있었고, 옆구리와 어깨에도 시커먼 멍이 들어 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시신은 곧 검시소로 보내져 정밀 조사가 이루어 질 거라고 했다.
약 세 시간 가량 습기가 가득한 취조실에서 턱수염 난 형사의 심문을
받았다. 내가 그에게 한 말은 박선배에게 했던 말들뿐이었다. 그 외에는 도무지 할 얘기가 없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사뭇 달랐고 나는 쉽게
공포감을 느꼈다. 필름이 끊어져서 약 다섯 시간 동안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부분에서 형사는 마구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그는
단단히 화가 난 모습이었다. 형사는 나를 아내의 살해범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몰고 가려는 것인 지도 몰랐다.
그는 진형 선배에 대해서도 꼼꼼히 물어왔다. 나는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내가 말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말해 주었다. 강동규와 관리인 정씨가 보았던 것까지 다 얘기했었다.
아내의 핸드백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사건 발생지점을 중심으로
수색작업이 진행중이라고 했다. 그것이 발견되면 보다 명확한 증거가
나올 것이라고 형사는 말했다. 나는 무엇에 대한 증거를 말하는 건지
묻지 않았다.
세 시간이 지나자 나의 개인 변호사가 왔고, 나는 즉시 경찰서를 나갈
수 있었다. 형사는 증거가 잡히는 대로 영장을 발부할 것이니 당분간
별장에 머물러 있으라며 협박 조로 말했다. 왠지 형사의 모습이 강동규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호사는 형사의 말에 신경쓸 것
없다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다시 돌아온 별장은 의외로 조용했다. 경찰 조사와 기자들의 취재로
상당히 분주한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요리사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불과 삼 십 분전까지 경찰과 기자들로 아수라장이었다는
것이다. 관리인과 요리사를 비롯하여 비치 모텔의 직원과 투숙객 일부까지도 경찰의 심문을 받은 모양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경찰들이
철수를 하며 기자들을 모두 쫓아냈다고 했다.
변호사는 집으로 돌아가길 권유했지만 나는 별장에 더 머물기로 했다.
진형 선배의 코란도는 보이지 않았다. 서울로 간 모양이었다. 선배에게 전화를 해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도 지금 기자들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을 게 뻔했다.
침실은 도둑이 지나간 방안처럼 어수선했다. 하지만 없어진 물건은
없는 듯 했다.
침대에 누워 아내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자살이던 타살이던 그녀가 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설사 내가
술에 취해서 그녀를 죽여놓고 시체를 바다 속에 유기한 것이라고 해도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어제 밤 우리는 어떤 이유로 싸움을 했던 것일까? 아내는 왜 반지를 빼 놓았던 것일까?
별안간 창문으로 비치 모텔의 3층이 눈에 들어왔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강동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 속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낮에 강동규와 형사는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던 것일까?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소스라쳐 놀라 눈을 떴다. 괴로운 사념 속에서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백강호씨? 나요."
턱수염이 난 형사의 목소리였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용건을 물었다.
형사의 목소리에서는 알 수 없는 흥분과 여유가 느껴졌다.
"지금 이쪽으로 와 주실 수 있소?"
시계를 보니 한 시 삼 십 분이었다.
"이것 보십시오. 지금이 몇 신데……"
"아, 그렇다면……"
형사는 예상했던 대답이라는 듯이 내 말을 잘랐다.
"내가 그쪽으로 갈 테니 좀 만나 주시겠소?"
"무슨 일입니까?"
"지아씨가 왜 죽었는지를 알아냈거든요."
"뭐라구요?"
나는 벌떡 일어났다. 내가 놀라는 모습을 상상이라도 하고 있는 듯 형사는 잠깐 말이 없었다. 서너 템포 뜸을 들인 후에 형사는 삼 십분 안에 도착할 거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정확히 삼 십 삼 분 후에 정원에서 자동차소리가 났다. 창 밖을 내다보니 소리 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형사는 내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대뜸 입을 열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있었다.
"수표책 좀 봅시다."
"예?"
"백강호씨가 가지고 다니는 수표책 말입니다."
나는 비밀을 들켜버린 어린애처럼 얼굴을 붉히며 놀랬다. 형사는 가면을 쓰고 있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수표책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옷장 문을 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사는 대답대신 뒤에 감추고 있던 물건을 침대 위에 던져 놓았다. 아내의 핸드백이었다.
"제 부하들이 찾아냈죠."
형사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에 든 수표책을 빼앗았다. 나는 멍하니 형사가 하는 행동들을 바라만 봤다. 형사는 수표책을 슬쩍 훑어보더니
'틀림없군' 이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수표책이 왜 이렇게 얇아 졌는지 궁금했겠지?"
형사는 핸드백을 열면서 말했다.
"이 가방이 사건을 푸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해 주었소. 지아씨가 왜 당신을 떠났는지 이 가방이 말해주더군요."
형사는 핸드백 안에서 구겨진 종이조각들을 꺼냈다. 그것은 수표들이었다. 내 수표책에서 찢겨져 나온 게 분명했다. 수표는 어림잡아도 스무 장 정도는 되어 보였다.
"당신이 쓴 거 맞죠? 확인해 봐요."
수표들을 한 장 한 장 확인하면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금액란에
터무니없는 액수들이 기재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그 곳에는 이상한 글귀들이 마구 휘갈겨 져 있었다.
금액 오 백 억 원 돈에 환장한 년 앞으로...
금액 십 팔 억 원 십팔십팔십팔십팔 나쁜 년, 나쁜 년...
금액 900,000,000,000 원 이 대단한 가수에게...!
금액 3,000,000,000,000,000,000 원 늙은 창녀에게 지급바람!
금액 원 다음엔 누구한테 갈거니?
나는 두려워졌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술만 달싹거려
질뿐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형사는 열린 옷장 앞에 서서 관찰하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아귀에는 어느 샌가 내 만년필이 쥐어져 있었다.
"이제 기억 나십니까? 아내가 사라진 날 밤의 일들이……?"
"몰라요. 모르겠어요. 난 아무 것도……"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수표를 보는 순간부터 기억은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봇물이 터지듯 한꺼번에 밀려와 뇌리를 때렸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기억하고 싶지가 않았다.
"당신 부인 지아씨가 왜 당신이 선물한 반지를 빼놓고 떠났는지는 아시겠습니까?"
나는 계속 힘없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의미 없는 고갯짓이었다. 별안간 시체보관소에 누워 있던 지아의 차가운 시신이 떠올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아씨 같은 유명한 연예인과 같이 산 기분이 어땠습니까?"
형사는 창가로 다가가며 물었다.
"당신은 지아씨가 어떤 여자이기를 바랬나요?"
나는 찡그린 얼굴로 형사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강호기획사를 차린 지 오 년이 넘은 걸로 알고 있는데…… 설마 지아씨의 과거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결혼을 했던 건 아니지요?"
"지아의 과거 따윈 나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었어요! 이건……"
나는 울부짖듯 외치며 아직도 손에 쥐고 있던 수표조각들을 힘껏 구겼다. 파르르 주먹이 떨렸다.
"이건 술 때문이오. 술에 취해서 잠깐 정신이 나갔던 거라구요! 술에
취하면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나는 매서운 기세로 대들었다. 형사는 슬쩍 나를 돌아보더니 딱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참 어리석은 사람이오."
형사는 조금 감상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것들이 있죠.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들…… 이를테면 별은 멀리서 볼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오. 가까이 가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죠. 공기도 없고, 황폐하고, 흉측한 모습이죠. 산도 그렇죠. 아름답고 유명한 산일수록 사람들의 발길이 무성하고 그만큼 더러워져 있어요…… 그런 것들이 주위에 많이 있죠.
다가갈수록 아름다움은 반감되고, 때로는 실망과 상처만을 안게 되는, 그런 것들. 물론……"
형사가 의미 심장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런 것들도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사랑할 수도 있죠.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멀리서 보던 가까이서 보던 항상 아름답기만 할 것이오. 이제 그 날 밤 당신이 했던 말들이 진심이었는지 그저
취언에 불과했는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지아씨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진심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답도 나올 겁니다.
어떤 답이 나오던 그 이후의 책임은 당신 몫입니다."
형사의 말은 끝내 나를 눈물짓게 했다. 한 줄기씩 흐르던 눈물은 어느
순간 갑자기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형사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내
감정이 정리되기를 기다려 주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흐느꼈다.
지아의 뺨을 때린 기억이 났다. 하도 작아서 쓰다듬을 곳도 없을 것 같았던 그 뺨을 우악스럽게 때렸다. 아내는 눈물을 흘렸었다. 아내가 우는 모습을 처음 봤다. 한 번도 운 적이 없던 여자를 내가 처음으로 울린 것이다. 수표쪽지들을 집어던진 기억도 났다. 그녀에게 내뱉었던
온갖 저주스럽고 치사한 말들도 부분 부분 기억이 났다.
인기를 얻기 위해서 그 동안 온갖 짓들을 다했지? 누구한테 잘 보여야
네가 뜰 수 있는지, 누구한테 몸을 받쳐야 더 큰 이익이 돌아올지 머리를 굴려가면서. 어린 나이에 아버지 같은 녀석들과 놀아났어. 넌 창녀야. 아주 비싼 창녀에 불과해…… 그런데 왜 나한테 온 거지? 나한테서 바라는 건 뭐야? 이제 폐기처분 할 때가 다 되어서 다른 놈들은 거들떠보지 않나 보군. 그렇지. 너 같은 늙은 창녀는 이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지. 그래서…… 별 볼일은 없지만 나 같은 놈이라도 하나 물어서 말년에 돈이나 왕창 뜯어보려던 수작이었어? 돈이 다 떨어지면 나
같은 건 가차없이 버리겠지?…… 치가 떨리는군. 원하는 게 돈이라면
다 줄 테니까 꺼져 버려! 얼마를 원해? 일 억? 십 억? 백 억? 다 줄 테니까 꺼져!
어느 순간 눈물은 멈춰 버렸다. 나는 생각했다. 지아에 대한 나의 진심에 대해서.
지금까지 난 지아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취중에 내가 지껄였던 말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두 진심이었던 것 같다. 둘 다가
모두 진심일 수는 없었다. 둘 중 하나는 분명 거짓이다. 그렇다면 형사의 말처럼 나는 지아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것인가.
나는 젖은 눈으로 형사를 바라보았다. 형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결국 내가 죽인 거군요. 지아는 나 때문에 죽은 것이군요. 난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상처만 주었군요."
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네. 지아의 죽음에 대한 내 책임을 인정하겠습니다."
형사는 내 감정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음을 알고는 본래의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질 책임은 형사상의 것이 아닙니다. 그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죠."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형사를 쳐다봤다. 형사는 내 옆에 놓인 지아의 핸드백을 흘끔 쳐다보며 말했다.
"아까 그 가방이 지아씨가 왜 당신을 떠났는지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고 했었죠? 그 가방은 그것 말고 다른 것도 말해 주었습니다."
형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가방은 지아씨의 죽음이 자살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자살을 할 생각이었다면 왜 가방 같은 것을 가지고
나갔을까요? 신발까지 벗고 옥상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도 있는데, 왜
굳이 가방을 가지고 나갔을까요? 그 가방 안을 살펴보십시오. 돈이 꽤
들어 있는 지갑과, 간단한 화장도구, 열쇠꾸러미 등이 있습니다. 자살할 사람이 지니고 있을 만한 물건들이 아니죠."
과연 핸드백 안에는 그러한 물건들이 있었다. 형사는 계속 말했다.
"더구나 그 가방은 시신과 함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가 추락했던 장소에서 약 십 여 미터 떨어진 도로변의 우거진 풀숲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형사가 다가오며 핸드백의 손잡이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 핏자국이 묻어 있더군요. 혈액감식결과가 나오면 확실해지겠지만 일단 부인의 핏자국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뭘 의미하는 거죠? 지아씨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이미 피를
흘렸다는 겁니다."
나는 놀란 눈으로 핸드백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손잡이 아래 부분에
핏자국이 얼룩처럼 검게 배어있었다.
"가방을 가지고 자살할 생각이었다면 시신과 가방이 같은 장소에 있었어야 합니다. 더구나 가방 안에는 지저분한 글씨들이 적혀 있는 수표조각까지 들어 있었으니 자살하려고 했다면 분명 가방과 함께 떨어졌겠죠. 만일 자신은 죽되, 가방이 사후에 발견되기를 바랬다면 사람들의 눈에 보다 잘 뜨이는 장소에 두었을 것이고, 숨기려고 했다면 어설프게 풀숲 속에다가 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형사는 열띤 어조로 계속 말했다.
"지아씨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또 하나의 증거는 그녀의 몸에 난 상처자국입니다. 그녀는 기도(氣道)에 과다한 물이 들어가 질식사되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익사죠. 그런데 익사되기 전에 몸에 몇 군데의 상처자국을 내었는데 왼쪽 이마와 옆구리, 양쪽 어깨와 뒤통수에 찰과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팔뚝과 목 뒤쪽에 긁힌 자국도 있었죠.
검시결과 이마와 옆구리, 어깨와 뒤통수에 난 상처와 오른쪽 팔뚝과
뒷목에 난 상처의 발생시간이 틀린 것으로 나왔습니다. 팔뚝과 뒷목의 상처는 나머지 상처들보다 적어도 십 분 정도 늦게 생긴 거라고 합니다. 게다가 이것들은 사후에 생긴 상처로 판명되었습니다. 즉 지아씨는 물에 빠지기 전에 이미 이마와 옆구리, 어깨와 뒤통수가 다치는
중상을 입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정말 타살이라는 겁니까?"
"타살임은 분명합니다."
형사가 확신하듯 결론을 내렸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물었다.
"혹시, 누가…… 누가 죽였는지도 아시나요?"
형사는 팔짱을 끼고서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심장이 두근거려왔다.
그의 입이 열리는 것이 두려워졌다. 지금까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은 모두 내가 감당해 내기에 너무 벅찬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은 다시 열렸다.
"백강호씨, 아내는 장신구나 보석 같은 것을 좋아했었죠?"
다소 엉뚱한 질문이라 나는 잠깐 멍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아는 몸치장하는 것을 좋아했다. 6년간 스타 연예인으로 활동을 해
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보석이나 장신구 같은 것을 수시로
사달라고 했으며, 세 개의 커다란 보석 상자 속에다가 그것들을 모두
보관해 두고 있었다.
"그래요. 좋아했었죠. 외출할 때면 항상 그런 것들로 몸치장을 하느라
시간을 지체하곤 했어요."
형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이틀 전 이 곳으로 왔을 때, 지아씨는 반지 말고 다른 장신구도 하고
있었겠군요?"
"예?"
"기억해 보세요. 반지 말고 지아씨가 하고 있던 장신구를……"
나는 다시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얼른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반지 말고 다른 거라면…… 귀걸이? 아니다. 지아는 귀를 뚫는 것은 싫어하기 때문에 귀걸이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귀걸이가 아니라면 목걸이……?
"목걸이를 하고 있었지요?"
형사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타이밍을 맞추어서 물었다. 나는 수긍하며 대답했다.
"맞아요. 목걸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지아씨의 행동에 의문이 생기는군요. 당신과 싸운 후에 반지는
빼 놓고 갔으면서 왜 목걸이는 빼 놓지 않았을까요?"
"그…… 그건……"
말문이 막혔다. 나는 아내의 목걸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기억해 내려 애섰다. 그러나 그 모양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백강호씨가 지아씨와 싸움을 하게 된 계기와도 관계가 깊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예? 무슨……?"
순간 머리 속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눈앞에 아내의 목걸이가 보였다. 파란 루비가 박힌 가느다란 금목걸이였다. 아내의 하얀 목덜미가 떠올랐다. 아내의 아름답고 긴 목에 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데킬라를 마시면서 나는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미쳐 버렸다. 아내의 목을 움켜쥐며 눈물을 흘렸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술이 아니었다. 저 목걸이가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건 당신이 사 준 목걸이가 아니죠?"
나는 대답을 못했다.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가 이내 그것은 파르르 떨리며 풀렸다. 뒷목이 뻐근해 졌다. 손바닥을 들어 목덜미를 감쌌다.
"지아씨의 몸에 난 상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녀가 죽기 전에 생겼던 상처들의 위치를 살펴보면 어떤 상황이 떠오르지 않나요?
왼쪽 이마와 옆구리, 그리고 어깨와 뒤통수에 난 상처라……"
형사는 내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차에 친 상처가 그렇죠? 지아씨는 바다에 빠지기 전에 누군가의 차에
치었던 겁니다."
"뭐라구요? 도대체 누구 차에……?"
형사는 손에 쥔 목걸이를 흔들어 보였다.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흔들리는 루비를 바라보았다.
"이 목걸이를 발견하는 순간, 범인의 윤곽이 떠오르더군요. 하지만 그
때는 확신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귀납적인 방법으로 추리를 해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사는 문득 창문으로 비치 모텔을 올려다보았다.
"강동규라고 아시죠? 여름방학 내내 저기서 묶고 있는데…… 제 동생입니다. 체육 대를 다니고 있고, 지아씨의 열렬한 팬이죠."
나는 나에게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퍼부어 대던 검은 눈동자에
하얀 피부를 지닌 근육질의 젊은이를 떠올렸다. 역시 그 녀석과 형사는 닮은 구석이 있었다.
"내가 이 별장의 주인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니 동규는 의외로 많은
것을 알고 있더군요. 그 애의 말에 의하면 박진형씨는 항상 벤츠를 타고 다닌다던데, 맞습니까?"
나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당신과 이곳 관리인 그리고 요리사의 증언에 의하면 이틀 전,
그러니까 당신 아내가 사라진 다음 날 점심에 별장 주인이 이 곳에 도착했을 때는 벤츠가 아닌 코란도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렇죠?"
나는 다시 힘없이 수긍했다.
"그는 원래 당신 부부가 이곳으로 온 첫날에 오기로 했다가 자매음반사와 회식을 하느라 다음 날 오게 된 거라고 했습니다. 그와 회식을 같이 했다던 이사장이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해 보았더니, 회식도중 박사장은 인천의 별장에 가봐야 한다며 먼저 나갔다고 하더군요. 시간은 열 시쯤이었고 벤츠를 타고 갔다고 했습니다."
나는 다시 흥분되기 시작했다. 온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왔다.
"그날 밤 그 시각에, 지아씨가 누군가의 차에 치었다면 과연 누구의 차였을까요? 전 한사람밖에 떠오르지 않는군요. 예, 박진형씨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는 그 날 밤, 벤츠를 타고 이 곳 별장으로 왔던 것이죠.
하지만 그도 취해 있었습니다. 취중에 아마 속도까지 높였겠죠. 그러다가 문제의 그 코너에서 사고를 일으키고 만 겁니다. 별장에서 내려오고 있던 지아씨를 보지 못한 것이죠."
가슴이 뜨끔해졌다. 형사는 빠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박진형씨는 당황했겠죠.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친 데다가 그 사람은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세상이 다 아는 여가수였으니까요. 그는 우왕좌왕 하다가 끝내 사건을 은폐시키기로 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지아씨의 시신을 그대로 낭떠러지 아래로 던져 버린 것이죠. 박진형은 지아씨에게 핸드백이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죠. 그 날은 마침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핏자국은 금방 사라져 버렸고, 급정거로 인한 바퀴자국 마저 희미해 져 버렸죠. 사건현장은 금방 은폐되어버렸죠. 박진형씨는 급히 왔던 길을 도로 내려갔고, 다음 날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코란도를 타고 당신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벤츠는
당연히 정비소에 맡겼겠죠. 그는 이 곳에 와서 여러 가지 상황들을 파악하게 되고, 지아씨의 죽음을 백강호씨에 의한 자살이나 혹은 타살로 위장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어제 오후에 취조실에서 당신을
심문 할 때만 해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 했었으니까요."
형사는 잠깐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 핸드백 말입니다. 아주 기특하게도 사건을 해결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지아씨가 벤츠와 충돌하는 순간 그녀의 피를
머금고서 십 여 미터를 날아가 풀숲에 꽂혔습니다. 도로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별꽃 덩굴이었는데 다행히 그 안에 제대로 틀어박혀서 빗물을 피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핏자국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던 거죠. 그리고 이 목걸이…… 이 목걸이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모든 추리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 목걸이는 결국 꼭꼭 숨어 버리려고 했던 살인자를 단숨에 용의선상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사는 한 걸음
다가왔다.
"지아씨는 차에 치인 후에 곧바로 죽은 게 아닙니다. 그녀는 그 때 아직 의식이 있었죠. 그리고 살인자의 얼굴을 보게 된 겁니다. 그가 누구인지도 알았겠죠. 그녀는 살인자의 손에 의해 물에 빠지면서도 무언가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녀는 어떤 식으로 범인을 알려야 할 지를 알고 있었던 겁니다. 살인자와 관련된 물건이 자신의 몸에 있었기 때문이죠. 만일 이 목걸이가 그냥 그녀의 목에 걸려
있었다면 조사 과정에서 무심코 지나쳤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아씨의 목에 걸려 있지 않았죠."
형사는 내 옆에 목걸이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목걸이는 지아씨의 식도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기력을 쇠진한 복서처럼 힘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할 말을 잃고 목걸이만 쳐다봤다.
형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물에 빠져 의식을 잃어가던 지아씨가 죽기 직전에 그 목걸이를 삼키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범인을 알려야겠다는 생각?…… 그런 생각은 왜 하게 되었을까요? 자신이 죽고 난 후에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형사는 침대에 어질러 져 있는 수표들을 모두 핸드백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목걸이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범행과정에 대한 것들은 여러 가지 증거를 바탕으로 한 나의 추리에
불과합니다. 확실한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박진형씨와 자세한 얘기를 해 봐야 되겠죠. 좀 쉬도록 하시오. 내일 일찍 연락을 하지요."
형사가 나가고 나서도 나는 한참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꿈을
꾸는 듯 멍한 상태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뇌가 빙빙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창 밖으로 비치 모텔 3층이 보였으나 불은 꺼져 있었다. 강동규는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아내의 반지를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놓고 보니 마치 시간이 48시간 전으로 돌아가 있는 듯 했다. 시계를 보니 세 시였다. 나는
침실 불을 끄고 조용히 별장을 빠져 나왔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