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의 왈츠
밤새 눈부신 집 한 채, 허공에 떠 있다.
베란다 키 큰 고무나무와 천정의 가로지른 턱을 여기저기 의지하고 꽤 큰 집을 지었다. 집주인은 어디 갔을까?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빗자루로 휙 걷어버리려다 그냥 두었다. 어젯밤 앵앵거리며 밤잠을 설치게 하던 모기 놈들 ‘걸려 봐라’ 하면서.
오랫동안 나는 거미를 곤충으로 오해했었다. 개미같이 땅을 기어 다니며 열심히 일하는 곤충이 있고, 허공에 줄이나 치고 먹이를 기다리는 게으른 곤충이 있다고 단정 지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뜬금없이 다가와 물거나, 귀뚜라미같이 마음을 긁거나, 냄새를 피운다든지, 떼 지어 몰려다니지도 않으니 성가실 것도 없다. 음식을 탐내거나 굼실거리며 기어 다니는 애벌레도 없다. 알에서 깨어나면 바로 그 모습이고 가족도 단출하다. 이따금 먼지 같이 힘없이 늘어진 거미줄만 존재감을 드러낼 뿐, 그조차 쓸어내면 되는 거였다. 오래된 집에 사니까 그 정도는 괘념치 않았다.
차 한 잔 따라놓고 베란다로 다시 눈을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집주인이 한쪽에 버티고 있다. 햇살에 반사되어 가느다란 줄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역광으로 형체만 드러난 거미는 무대 위에서 음악을 기다리는 무용수처럼 요동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도 나만큼 무지한지 거미에 대한 오해가 많았다. 아이들조차 싸워야 할 괴물로 생각한 것은, 괴이한 식사법 때문이 아니었을까. 챙챙 줄로 감았다가 소화액을 주입해서 녹인 후, 주스 같이 빨아 먹는다는 것은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이기는 했다. 거미를 사랑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종종 거미를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들기도 했다.
유난히 거미를 시기한 사람들은 과학자들이다. 가볍고 튼튼한 항공기 엔진, 수술복이나 방탄복을 만든다며 거미를 탐구했다. 백만 마리의 거미를 잡아 실을 뽑아치우기도 했다니, 과학이란 이름으로, 섬유 예술이란 이름으로 많은 거미가 희생 제물이 되었다. 날개 없이도 비행한다는 전자기력의 비밀도 폭로되고, 사람 머리카락의 15분의 1이라는 거미줄의 굵기까지도 측량되었다. 게다가 식욕은 놀라운 뉴스거리였다. 1년 동안 거미에게 잡아 먹히는 영국 곤충의 무게가 영국 인구 전체의 무게와 같다나. 학자들의 허풍 같기만 했다.
거미 형상의 보석 브로치나 목걸이는 여인들의 인기를 끌었다. 나는 그보다 거미의 집에 더 매혹되었다. 언젠가 소나무 숲길에서였다. 이른 아침, 바다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자, 숲은 온통 진주 구슬 세상이었다. 방사형 그물에 하얀 이슬방울이 맺혀 그 무게로 레이스같이 너울거리며, 나무와 나무, 잎과 잎 사이를 잇고 있었다. 신화 속 직조의 여신들이 총출동한 듯도 하고, 밤새 아라크네와 아테나의 베 짜기 대결이라도 있었던 듯싶었다. 이미 마법에 걸린 아라크네의 세계일까? 안개를 붙잡아 구슬로 장식한 크고 작은 성채에, 들고 있던 막대기가 테러리스트 같아 슬며시 내려놓았다. 얼굴에 휘감기는 축축함을 걷어내는 대신 그 세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거미에게는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었지만, 끝없이 이어진 숲길은 환상으로 가는 길로 보였다. 거미가 어둠을 묶어 별을 뜨게 한다는 시인의 노래가 몽상이 아니었다. 8개의 다리와 8개의 눈이 영원으로 통한다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상상도 그 숲길에서 나온 것 같았다.
깊은 밤, 거미는 또 집을 짓는 중이다. 화분에 물 주던 남편이 걷어버렸는지, 새로운 집을 짓고 있다. 벌써 방사형 대들보는 완성되었고, 중간중간 커다란 칸을 친 시침질도 끝났다. 거미는 나의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가운데부터 빙빙 나선형으로 촘촘히 돌고 있다. 코바늘 레이스를 뜨듯, 뒷다리로 꽁무니의 실을 콕 찍어 방사형 줄에 끌어다 붙이고 재빨리 옮겨간다. 몸 안에 음악이 들었는지 움직임이 3박자이다. 쇼팽의 왈츠에 따라 나도 춤을 춘다. 여러 개 다리는 서로 부딪치지도 않고 옮겨가거나 이어 붙이거나, 일정하게 칸을 조정하기도 한다. 잠시 쉬는 것 같더니 세로 칸이 넓어지자 거미는 ㄷ자 돌기를 하며 칸을 열심히 채워갔다. 집 짓는 광경을 집중해서 끝까지 본 것은 처음이었다. 박자를 맞추어 거실 바닥을 돌며 바라보다가 문득 진지하고 엄숙해졌다.
집 짓는다는 걸 낭만적으로 생각했었다. 새로운 집을 계획하던 아버지가 각자에게 방을 준다고 했다. 나는 커다란 창이 있는 방을 주문했다. 동쪽에 있던 조그만 창으로는 달이 뜨는 것을 잠시밖에 볼 수 없어 아쉬웠었다. 창문이 크든 작든, 집이 크든 작든, 집을 짓는다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결혼 후, 여러 번 이사해야 아파트를 가질 수 있다며, 수도 없이 이사하던 서울의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의 집들이 삶을 위한 터전이 아니라, 더 소유하기 위한 수단이 된 걸 알려고 하지 않았다. 집이란 아궁이와 꽃밭과 울타리와 장독간의 따뜻한 추억이 있어야 한다고, 집의 심리적 가치에 몰두했다. 세상에 대하여 바보스러웠지만, 더 가치 있는 일과 세상을 함께 소유하기는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건축재료는 전 재산인 자기의 몸이다. 거미는 몸의 진액을 짜내 허공에 집을 짓고, 거기에서 먹이를 구하고 알을 낳고 새끼를 업어 키운다. 아파트 숲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다. 이 시골까지 여기저기 높다랗게 치솟은 아파트들, 사람들도 온몸의 진액을 짜서 아파트에 들어온다. 그 속에서 금쪽같은 아이를 업어 키우며 서릿발 등등한 직장으로 출근하고, 곤한 몸을 누이며 일상을 살아낸다. 거미집이 미풍에도 움직이는 섬세한 집이면서 태풍에도 살아남는 것처럼, 사람의 집도 그렇다. 아무리 좁은 아파트여도, 셋집이어도 갓난아기의 속 눈썹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며, 거센 삶의 요동에도 집을 포기하지 않는다. 많은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는 게 집이지만, 돈만으로는 살 수 없는 진정한 집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닷가 숲길에서 보았던 것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 같은 집이 사람들 저마다의 마음속에 살고 있다.
“너는 평생 몇 채의 집을 짓니?”
삼십 년 넘게 같은 집에 사는 내가, 매번 새로 집을 짓는 거미의 고된 노역을 어찌 알겠는가. 집을 짓다가 피곤하다며 내일로 미루는 적도 없는 거미는, 집을 짓는다기보다 삶을 짓는 것이리라. 소파에 앉아 생각의 집만 무수히 지었다가 반둥건둥 허물 일이 아니다. 벌떡 일어났다. 전화를 걸 일이다. 쓰러져 가는 집의 무게에 허우적거리는 그녀에게 찰밥이라도 쪄서 찾아가야겠다. 거미가 실을 뽑아 구멍 난 집을 수리하듯, 끊어진 마음을 이을 수 있도록, 꺼져가는 심지를 돋우도록 곁을 지켜줘야겠다. 작은 새도 높은 나무 위에 집을 짓고, 푸른 바닷속의 모시조개도 집을 가지고, 모래 속에 개미도 집을 지키지 않는가. 저마다 보이는, 보이지 않는 삶의 소중한 공간을 지켜야 한다.
한쪽 귀퉁이에 무엇인가 걸려서 줄이 잠시 움직였다. 희끄무레한 것이, 어젯밤 그 모기일까? 거미는 모른 체 한가운데 움츠리고 꼼짝달싹도 하지 않는다.
“너는 너의 집, 나는 나의 집, 우주의 한 귀퉁이씩 단단히 부여잡고 생명을 살리는 집을 짓자.”
아차! 거미는 귀가 없다지. 세상의 소리는 듣지도 않는다지. 오로지 집 한 채, 그게 안테나라지. 방충망을 열어놓는다.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는 게 보통 일인가. 거미의 세상에서 엄숙한 생의 왈츠를 본 밤, 비가 오려는지 바람이 더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