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한국 언론계에서는 전형적인 역피라미드형 서술구조의 스트레이트 기사를 넘어 사실을 이야기에 담은 내러티브 기사에 관한 관심과 시도가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재림신문>도 한국선교 120주년을 맞아 교회의 역사에 담긴 ‘이야기’에 주목하려 합니다. 그 첫 시리즈로 권태건 기자가 제주 성산교회를 찾았습니다.
성산교회는 한국 전쟁 당시 행정은 물론, 교육과 의료 그리고 지역사회 봉사로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도 선교사업을 멈추지 않았던 곳입니다. 지금도 그때 재림교회가 펼친 선행을 기억하는 주민이 생존해 있습니다. 하지만 눈물과 정성으로 지은 ‘피난교회’는 1989년 새 성전 건축을 위해 매각하고, 현재는 식당이 들어서 성업 중입니다.
일부에서는 한국 교회 역사의 자취와 정신이 깃든 ‘성산포 피난교회’를 복원하고, 유적지화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풀어야 할 과제도 만만찮습니다. 과연 ‘피난교회’를 유적지로 만드는 일은 가능할까요? 권태건 기자가 15회 연속 내러티브 리포트로 풀어냅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가장 어두운 시절 밝힌 한국 교회의 횃불
2023년 9월 3일 제주대회 창립총회 현장. 제주대회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의회가 한창이던 순간, 어느 원로교수가 일어나 발언대 앞에 섰다. 제주 성산포 신앙리 마을 출신의 삼육대학교 신학과 오만규 전 교수였다. 모두의 시선이 원로에게 고정되고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성산포 피난교회를 복원해야 합니다.”
장내가 술렁였다. 성산포 피난교회는 제주 성도들조차 너무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이름인 까닭이다. 웅성이던 청중들도 이제 숨을 죽이고 오 교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성산포 피난교회는 제주도뿐만 아니라 한국 재림교회의 역사입니다. 유적지로 만들어 보존해도 시원치 않을 것인데, 현재는 이방인의 손에 넘어가 술집이 됐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입니까. 역사학자로서 3차례 이상 한국연합회 총회에서 발의했음에도 아직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이만한 역사 유적지를 가만 놔두는 것은 한국 재림교회의 손해입니다”
제주도 동쪽 끝 성산포에 위치한 ‘성산포 피난교회’(이하 피난교회)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제주도로 내려온 재림교인과 제주성도들에 의해 세워졌다. 한국 재림교회 전체가 성산포로 옮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현실 속에서 피난교회는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한국 재림교회의 기둥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피난교회의 열매는 무엇보다 성산포 일대에서 얻은 영혼이었다. 그들이 바로 오늘날 제주대회가 존재할 수 있게 만든 밑거름이 되었다.
실제로 하루 전 열린 제주대회 창립총회기념 연합예배에서 97세의 부복수 집사(성산교회)가 전쟁 당시 피난민과 함께 예배드렸던 시절을 회상하며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며 재림을 고대하며 살아가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현장에 함께했던 350여 명의 성도는 눈시울을 붉혔다. 비록 그 기억이 희미해져 가고 있긴 하지만 피난교회는 제주성도들의 영적 고향이며, 가장 어두운 시절을 밝힌 한국 재림교회의 횃불이었다.
2년간의 제주도 피난생활 증거인 이 교회는 피난 온 재림교인들이 흩어져 지냈던 성산포, 신앙리, 고성리, 오조리 등 4개 마을의 중심인 성산면 동남에 위치했다. 서울위생병원교회의 임시진료소가 마련된 성산 서초등학교(현재 동남초등학교)와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전쟁이란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남성들은 돌을 옮기고, 여성들은 치맛자락으로 흙을 날라 지은 교회였다. 오만규 교수는 이렇게 지은 피난교회를 “돌 하나하나에 성도들의 마음이 스며들어있는 교회당”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피난교회의 열매는 예배당이 더이상 수용하기 힘들 정도로 늘어갔고 더 넓은 교회가 필요했다. 그리고 1989년 11월 부복수 집사가 희사한 땅에 피난교회를 매각한 자금으로 새 성전을 지었다. 오조리 마을 입구를 지켜오던 새 교회도 이제는 세월의 흐름에 낡고 허물어져 리모델링을 했다.
벽돌의 붉은 빛이 감돌던 교회의 외벽은 베이지색으로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본당의 바닥도 새로 깔고 장의자도 교체했다. 새 조명으로 환해진 예배당은 언제 어디서 손님이 찾아와도 따스하게 맞을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옷을 갈아입은 교회를 바라보면서도 성도들의 가슴 한편엔 왠지 모를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스며있다. 그런데 이날 오만규 교수의 발언을 통해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확인했다. 다름 아닌 식당으로 변한 피난교회 때문이었다.
한때 찬양과 기도의 향기로 가득했던 교회는 이제 고등어조림 냄새가 그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성산교회 강관규 수석장로는 길을 지나며 손님으로 가득한 건물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리다. ‘그 당시 조금만 더 기도하며 힘을 냈더라면 피난교회를 보존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온다.
1989년 당시 1억 원에 매각했던 피난교회는 이제 몇 배의 가격으로 뛰어올랐다. 더구나 당시 피난교회를 기억하는 성도도 마을주민도 몇 명 남지 않았다. 피난교회의 존재를 증언할 수 있는 이들이 점차 사라져간다. 되찾아야 한다면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다. - 다음 호 계속 -
역사가 된 교회 ... 성산포 ‘피난교회’를 아십니까? (2)
한국전쟁 당시 행정은 물론, 교육과 의료 활동으로 선교를 지속했던 성산포 ‘피난교회’는 이제 한 식당으로 바뀌었다.
관련기사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마승용 목사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번호를 보니 미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7년간 선교사로 브라질에서 생활했지만, 미국에서는 전화를 걸어올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얼굴을 떠올려봐도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벨이 끊기기 전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성산교회 담임하고 계신 목사님이시지요? 저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는 최OO 집사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미국에서 무슨 일로 이렇게 연락을 주셨습니까?”
“다름 아니라, 저희 아버지께서 연로하신데 어릴 적 다니시던 성산포교회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건강 때문에 직접 가보지는 못하시지만 교회가 어떻게 됐는지만이라도 알고 싶어 하셔요”
마승용 목사는 최 집사에게 오래전 오조리 마을 입구에 새 예배당을 지어 이사했노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묵은 교회(옛 교회란 의미, 피난교회) 건물은 남아 있지만, 지금은 식당으로 쓰이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전화를 끊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나 좀처럼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그는 결국 외투를 챙겨 들고 사택을 나섰다.
교회 리모델링이 한창이라 각종 공사 장비로 좁아진 계단을 빠져나왔다. 작업 준비를 하고 있는 인부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마 목사 왼편으로 모습을 드러낸 성산일출봉의 자태가 웅장했다. 동남초등학교를 지나 골목길로 접어드니 지역 맛집으로 유명한 식당과 관광호텔이 일행을 맞이했다. 마 목사의 시선은 그 사이에 위치한 어느 음식점으로 향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오래된 석조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따로 알아보지 않아도 마 목사는 이 건물이 언제 지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1951년이었다. 누가 지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피난 온 재림교인들이었다. 지금은 ‘부촌식당’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지만, 바로 여기가 성산포 피난교회였다.
마 목사가 성산교회를 담임한 지 5년째다. 강관규 장로, 한공숙 장로는 물론 최고령의 부복수 집사로부터 피난교회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다. 혹시라도 근처를 지날 일이 있으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피난교회를 바라보고는 했다. 현재 피난교회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식당 주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성산교회 교인들과도 가깝게 지내는 동네 주민이기도 하다.
교회로 돌아온 마 목사는 얼른 씻고 다시 책을 펼쳤다. 행복한 삶에 관한 내용이었다. 최근 들어 매일 아침 조금씩 읽고 있다. 하지만 지금 마 목사의 마음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답답한 마음에 책을 덮고 방문을 가기로 했다. 방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교회에 출석하는 고령의 어르신들 안부를 확인하는 것에 가까웠다. 오조리 마을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부복수 집사의 집이었다.
“집사님, 어디 불편한 데 없으세요?”
마 목사가 묻자 부 집사는 현관의 처마를 가리켰다. 콘크리트가 부서져 있었다. 자칫하면 떨어지는 콘크리트 조각에 부 집사가 크게 다칠 수도 있어 보였다. 마 목사는 그 자리에서 처마를 수리하는 방안을 알아봤다. 그렇게 안부를 확인하고 마 목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묵은 교회에 갔다 왔어요”
그러자 부 집사가 말했다.
“목사님, 묵은 교회를 하루빨리 되찾아야 할 텐데 큰일입니다.”
마 목사는 부 집사를 마을회관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묵은 교회를 되찾아야 한다는 부 집사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마 목사는 오랫동안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 그 자체라고 생각해왔다. 성도들만 있다면 건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멀리 미국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성산포항에 잠시 차를 세웠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옷깃을 타고 들어왔다. 1951년 1월이었으니 꼭 이맘때쯤이다. 이 항구로 LST(Landing Ship Tank)라 부르는 철갑수송선이 도착했다. 그 배에서 약 1000명의 재림교인이 내렸다. 모두 피난민이었다. 성산포항에서 바람을 맞으니 그날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했다.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길, 부촌식당을 지났다. 문득 주변에 관광호텔과 신식 건물이 들어서는 중에 피난교회만이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묵은 교회를 하루빨리 되찾아야한다”던 부 집사의 말을 떠올렸다. 새삼 여태까지 하나님께서 피난교회를 보존하고 계셨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았다. - 다음 호에 계속 -
역사가 된 교회 ... 성산포 ‘피난교회’를 아십니까? (3)
어둠이 내려앉은 성산항. 1951년 1월 18일, 이곳으로 약 1000명의 재림성도가 전쟁을 피해 내려왔다.
관련기사
비계가 설치된 까닭일까. 아니면 옷을 갈아입는 중이기 때문일까. 성산교회(담임목사 마승용)는 지난해 5월 제주신설대회 설립 현장심사 취재 때와는 인상이 크게 달랐다. 당시에는 현장심사단의 이야기를 듣고 사진촬영을 하느라 교회를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없었다. 당시, 성산교회는 심사를 위한 방문지 가운데 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성산교회가 주인공이다. 이곳 성도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며, 교회가 위치한 지역주민들의 기억을 더듬어 가야 한다.
제주시 성산읍 오조리 입구에 자리잡은 성산교회는 시골 교회의 전형과도 같았다. 아름드리나무와 어우러진 모습이 고즈넉했다. 이 자리에서만 30년 넘게 마을을 지켜왔다. 사실 성산교회가 성산포 지역을 영적으로 돌봐온 시간은 70년이 훌쩍 넘어간다. 1951년 1월 전쟁을 피해 재림성도들이 성산포, 신앙리, 고성리, 오조리 등 4곳 마을에 자리 잡으며 주민들을 돌보기 시작한 까닭이다.
교회 가는 길에는 고성5일장이 위치해 있다. 날짜의 끝자리가 4일과 9일인 날 장을 연다. 하지만 사람이 찾지 않은 지 이미 오래다. 컴컴하고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5일장이 설 정도면 과거에는 이 마을에 사람이 꽤 많이 살았다는 이야기일 터. 실제로 1989년만 해도 성산포 피난교회도 성도들이 너무 많아 새 교회를 지을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현재 오조리 입구에 서 있는 성산교회는 바로 그때 피난교회를 매각한 금액과 부지를 헌납한 부복수 집사의 헌신으로 마련했다.
마승용 목사를 따라 3층에 위치한 사택으로 올라갔다. 한 편에 마련된 작은 방이 앞으로 열흘간 취재하며 머무를 ‘베이스캠프’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을 풀고, 삼육대 신학과 오만규 전 교수가 쓴 <재림교회 100년사>를 펼쳤다. 책이 워낙 크고 무거운 탓에 ‘성산포 피난생활’에 해당하는 부분만 복사해 가져왔다. 제주에 오기 전부터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현장에서 펼친 까닭일까. 한 자 한 자가 새롭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100년사에 기록된 부복수 집사와 한공숙 장로(이하 성산교회)를 만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겠다. 이 마을 토박이로서 피난교회를 직접 경험하고 기억하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재림교인은 아니지만, 당시의 교회를 기억하는 주민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기자는 외지인인 탓에 마을의 사정은 전혀 알지 못했다. 고민을 알아챈 것일까. 마승용 목사는 강관규 수석장로(성산교회)를 소개했다.
“강 장로님께서도 피난교회를 기억하고 계시고요. 무엇보다 오조리 이장을 맡고 계셔서 마을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마을주민을 취재하려면 강 장로님의 안내가 필요할 겁니다”
다소 막막해서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던 기자에게 천군만마 같은 소식이었다. 그 길로 강 장로에게 전화를 걸어 어떤 분들을 만나야 할지 조언을 구했고, 흔쾌히 돕기로 했다. 하나님께서 만나야 할 이들을 미리 준비해주신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권 기자님, 저랑 잠깐 바람 쐬러 다녀오실래요?”
마 목사가 방문을 두드렸다. 그는 이미 외투를 챙겨 입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피난교회를 보고 오려던 참이었다. 기자도 점퍼를 입고 따라 나섰다. 차에 올라타고 고성5일장과 읍내를 지나 오조리를 가로질렀다. 내일 해가 밝으면 구석구석을 누벼야 할 터였다. 마을을 빠져나왔다. 마 목사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어디로 향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바로 피난교회였다. 교회가 가까워지자 마 목사는 차의 속력을 줄였다. 관목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성도들의 마음이 스며들어 있는” 석조건물의 처마가 보였다. 마 목사는 다시 속력을 높여 어디론가 향했다. 이번에는 목적지를 알 수 없었다.
이윽고 차가 멈춰 섰다. 바다 내음이 한결 짙게 다가왔다. 바로 ‘성산항’이었다. 1951년 1월 18일 이곳으로 약 1000명의 재림성도가 전쟁을 피해 내려왔다. 부두에 묶인 배들은 고요했다. 대부분 차량과 사람들을 싣고 우도와 성산항을 왕복하는 여객선이었다. 하지만 기자의 눈에는 오래전 성도들을 싣고 이곳에 상륙한 ‘LST’(Landing Ship Tank) 수송선처럼 보였다. 비록 지금은 5일장도 서지 않고 주민보다는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성산이지만, 1951년 1월의 이곳은 재림교회의 떠오르는 ‘블루오션’이었다. - 다음에 계속 -
아가리배에서 내린 천사들 ... 서울위생병원 제주분원
제주 사람들은 서울위생병원 의료진을 “아가리배’에서 내린 천사”라고 불렀다.
관련기사
“생각해보니 ‘아가리배’에서 내린 그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온 천사였어요!”
‘아가리배’는 1951년 1월 당시 재림성도와 피난민들을 싣고 온 LST(Landing Ship Tank) 수송선을 부르는 제주도민들의 말이다. 뱃머리 문 열리는 모습이 마치 아가리(입)를 벌리는 것처럼 보여 붙인 이름이다.
아가리배가 수송선을 가리킨다면 그 배에서 내린 천사들은 다른 아닌 재림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기자는 김태자 어르신(83, 성산읍 고성리)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아가리배에서 내린 그 사람들이 바로 그 다음날부터 동국민학교(현 성산초등학교) 교실 한 칸에 진료소를 차리고 주민들을 진료하기 시작한 거예요. 분명히 그 사람들도 전쟁을 피해 여기까지 왔을 텐데 그렇게 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요. 그러니까 그 모습이 천사처럼 보인 거죠”
삼육대 신학과 오만규 전 교수는 <한국 재림교회 100년사>에서 당시 진료소를 ‘서울위생병원(현 삼육서울병원) 제주분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김태자 어르신은 자신을 비롯해 성산 지역주민 중 그때까지 현대적인 병원 진료나 예방주사를 접종해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서울위생병원 제주분원을 통해 처음 접했다는 증언이다. 이전에는 그저 배가 아프면 숯가루 탄 물을 마시는 등 민간요법에 기댔을 뿐이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김태자 어르신은 “외국인을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외국인 간호사가 DDT를 놔줬지요”라고 기억을 더듬었다.
차에 올라가 다음 인터뷰이를 찾아가는 길, 다시 오만규 전 교수의 책을 꺼내 기록을 살폈다. 류제한 박사의 부인인 류은혜(Grace Rue) 여사 역시 간호사였으니, 어쩌면 류 여사를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기록을 들춰보니 당시 간호원장인 리보순(Robson)씨 역시 외국인이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외국인이었던 그들이 전쟁 발발 후에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제주까지 내려와 의료봉사를 하는 모습이 당시 김태자 어르신의 눈에는 한없이 신기하고 고마웠을 것이다. 당시 외국인선교사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나라에서 봉사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장면이다.
현춘홍 어르신(88, 성산읍 오조리)이 기억하는 당시 재림성도의 모습은 한층 더 드라마틱했다. 그는 “안식일교인들이 성산을 살렸다”고 표현했다. 당시는 콜레라 같은 괴질만 걸려도 생명이 위독한 때였다. 만일 맹장이라도 터지면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던 것이 보통이었다.
그랬던 성산에 서울위생병원 제주분원이 문을 열고 약을 처방하기 시작했다. 더이상 괴질이 주민들의 목숨을 앗아가지 못했다. 개복 수술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주민들에게 맹장수술을 펼쳤다. 예전 같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병에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소식이 입에서 입을 타고 퍼지자 멀리 모슬포에서도 진료를 받기 위해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많게는 하루 350명이 진료를 받았으며, 장날에는 그 수가 600명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현춘홍 어르신은 당시의 진료소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리고 성산포 피난교회가 세워지기 전까지 함께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성산 일출봉의 풀밭에 앉아 찬미하고 말씀 듣던 그 시간을 참으로 행복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물론 마을의 어른들은 현충홍 어르신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제사를 지내지 않고 미신을 멀리하는 교회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조상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예의 없는 일로 풀이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교회에는 6개월밖에 출석하지 못했고, 피난교회 예배당에서는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도 어깨에 돌덩이를 이던 남자 교인들과 치마폭에 모래를 담아 나르던 여자 교인들의 모습은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를 회상하던 어르신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입을 뗐다.
“육군사관학교를 다니기 위해 뭍으로 나갔어요. 꽤나 시간이 흐르고 나이도 좀 먹은 다음이었죠. 하루는 서울 청량리를 지나는데, 너무 익숙한 이름을 보게 된 거예요. 바로 ‘위생병원’이었어요. 난 그때까지 어렸을 때 봤던 위생병원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거든요. 정말 우연이었어요. 위생병원이란 이름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아가리배에서 내린 천사들이 펼친 봉사가 그들에게 어떤 감동을 줬는지 기자로서는 추측할 수조차 없었다. 다만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그 순간에도 현춘홍 어르신의 마지막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의 이야기를 들으러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이야기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잖아요”
그날 저녁 강관규 장로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인터뷰하기로 약속한 어르신께서 응급실에 입원하셨고, 경과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다음에 계속 -
전란 중에 꽃핀 ‘피난교회’의 사랑과 봉사
서울위생병원 제주분원의 치료와 친절에 제주 주민들의 마음은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관련기사
자리돔은 이름에 ‘돔’이 들어가지만, 참돔이나 돌돔처럼 고급 어종은 아니다. 제주 바다에서 흔히 잡히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생선이다. 비싼 녀석들이 육지로 팔려갈 때도 자리돔은 제주도민의 밥상에 흔히 올랐다. 어려운 시절에 주린 배를 채워주던 자리돔은 이제 물회나 젓갈로 만들어 도민은 물론 관광객도 즐겨 찾는 별미가 됐다.
“제주도에 왔으면 이곳 토속음식을 한 번 먹어봐야지 않겠어요?”
이렇게 말하며 한공숙 장로(성산교회)는 기자의 손을 이끌고 바닷가 근처 어느 식당으로 향했다. 멀리까지 취재 온 기자에게 밥 한 끼 대접하는 자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자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성산포 피난생활과 피난교회에 관한 것이기에 어쩌면 한 장로는 자리돔이란 물고기를 통해 그 시절의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꺼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식당 안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제주도에 미신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한 장로가 물었다. 대충 아무 숫자나 둘러댈 수도 있겠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 좁은 제주도에 미신만 1만8000가지가 넘는답니다. 그러니 그 시절에 교회에 다닌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어요?”
제주에 그렇게 많은 미신이 있었다고? 말문이 막혔다. 미신은 본래 어렵고 불안한 환경에서 싹을 틔우기 마련. 기댈 곳이 없으니 미신에 기대는 것이다. 그만큼 당시 제주도민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증거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사람들이 마음에 안정을 얻기 위해 만든 미신이 반대로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기도 한다. 성산포 피난생활 시절 복음을 받아들인 재림성도들의 삶이 딱 그랬다. 예컨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조상들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람이자, 상놈 중의 상놈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실제로 가족을 비롯해 주위 사람들의 핍박에 교회에 다니다 떠나간 사람이 몇인지 헤아리기 어렵다.
그럼에도 서울위생병원(현 삼육서울병원) 제주분원의 정성스러운 치료와 직원들의 친절에 지역주민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미군의 상륙작전용 함정인 LST(Landing Ship Tank)를 타고 피난 온 의료진은 제주에 발을 디딘 지 일주일 만인 1월 26일, 성산서국민학교(현 동남초등학교)의 한 교실을 터 진료를 시작했다. 직접 오지 못하는 환자를 위해서는 가방을 챙겨 방문하기도 했다. 이렇게 왕진을 경험한 이들 상당수가 교회에 나왔다. 한 장로가 교회에 출석하게 된 계기 역시 어느 성도의 친절 덕분이었다.
“옆집에 한옥선 씨라고 위생병원 직원이 자녀들을 데리고 피난 와 있었어요. 그런데 이분이 저를 처음에 보자마자 ‘공숙이는 나랑 성씨도 같으니 내 아들 하자’고 하시는 거예요. 서울 사람이 제주도 시골 소년에게 그렇게 말하니 내가 반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한 장로는 갑자기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는 베드로전서 1장 19절 말씀을 외웠다. 처음 교회에 출석한 1951년 2월 셋째 안식일의 장년교과 기억절이었다. 그 자리에서 암송하는 한 장로를 향해 “우리 교회에 든든한 일꾼이 왔다”며 환영하는 성도들의 말대로 그는 성산교회의 든든한 기둥으로 성장했다.
아흔을 맞은 올해도 그는 교회 선교회장을 맡아 헌신하고 있다. 1934년생인 한 장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제주 4·3사건을 모두 경험했다. 워낙 혼란스러운 시대상 때문에 제대로 교육을 받는 것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전쟁이 발발하고 한 장로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51년 3월 11일부터 삼육중학교 피난학교가 성산포 해변가 바위 밑에서 수업을 시작한 것이다. 공부하기 위해 성산포 해변과 집을 오가며 한 장로는 피난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하루도 빠짐없이 지켜봤다. 그리고 피난교회는 아직까지도 한 장로의 가슴 속에 믿음의 주춧돌로 든든하게 자리잡고 있다.
전란 중에도 의료와 교육으로 선교의 깃발을 꽂았던 재림교회는 1951년 2월 11일부터 3월 3일까지 약 3주 동안 수양회를 겸한 대전도회를 개최했다. 성산포 통조림공장에서 열린 이 집회는 역사상 제주에서 열린 최초의 공중집회였다. 전국에 내린 비상계엄령과 뿌리 깊은 미신사상으로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5~6명의 구도자를 얻었다.
이때부터 성도들은 교회건축의 뜻을 품었다. 이후 4월에는 고성리 2741-7번지(현재 동류암로 33번지)에 예배당 신축을 위한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5월에는 돌을 이고 지고 나르며 건물을 쌓았다. 그리고 드디어 그해 12월 9일, 42평의 돌로 쌓은 성전을 주께 드리는 감격적인 헌당예배를 가졌다. 그것이 지금은 식당으로 쓰이고 있는 피난교회다.
자리돔물회를 먹으며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듣던 기자는 내친김에 자리돔젓도 맛을 보기로 했다. 오랜 기간 곰삭은 젓갈의 맛은 똑 쏘면서도 시원했다. 묘한 맛에 약간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런 기자의 모습을 보고 한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삭으면 발효가 돼서 젓갈이 되는데, 타의로 삭으면 그냥 부패해 버리는 수가 있어요”
그 말을 들은 기자의 뇌리에 성산포 피난교회가 스쳐 지났다. 지금 피난교회는 발효되는 것이 아니라 썩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당시에는 몰랐던 ‘피난교회’의 의미
이제는 식당으로 변한 피난교회를 바라보는 성도들의 눈빛에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관련기사
“오조리는 적어도 이 근방에서는 옛 제주도의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한 마을입니다”
오조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강관규 장로(성산교회)의 말이다. 이곳 토박이인 까닭일까. 강 장로는 기자와 함께 마을을 가로질러 가며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저기 아기자기한 카페가 원래는 이 마을 000 씨 집이었어요”
“이 골목길을 쭉 따라가면 해변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이런저런 설화가 전해져요”
보통의 가이드에게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의 안내에 따라 제주 전통의 돌담길을 따라가자 눈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부복수 집사의 집이었다. 지난해 9월 제주대회 창립총회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98세의 고령에도 매일 성경을 읽고 암송한다. 피난교회의 기억도 여태 명징하고 또렷하게 품고 있다. 무엇보다 성산교회의 역사 곳곳에 부 집사의 손때가 오롯이 묻어 있다. 피난교회를 취재하는 데 그를 빼놓을 수 없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어 찾아오셨습니까?”
피난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부 집사는 아가리배가 성산항에 들어온 날부터 시작해 교회당을 짓던 일, 그 와중에도 전도회를 가졌던 일 등 성산포 피난생활을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강 장로는 간혹 기자가 알아듣기 힘든 제주 방언이 등장하면 그 말을 풀어 설명해 주며 이해를 도왔다.
옛날이야기처럼 쏟아지는 부 집사의 말을 뒤로하고 기자는 꼭 듣고 싶었던 어느 지점의 사연을 캐물었다.
“그런데, 피난교회를 팔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부 집사와 강 장로 모두 잠시 말을 아꼈다. 먼저 입을 뗀 사람은 강 장로였다.
“그때가 1989년이었습니다. 예배드릴 장소가 비좁으니 교회를 크게 다시 지어야 했죠. 하지만 성도들에게 돈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호남합회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합회를 찾아갈 때 집사님도 함께 가셨지요?”
“그때는 내가 같이 가지 않았어요. 이후에도 몇 번 합회를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저는 없었어요”
강 장로의 설명에 따르면, 성산교회를 짓는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피난교회를 매각하는 쪽으로 합회의 지도를 받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최고의 금액에 피난교회를 팔기로 했다. 이를 결정한 이후에도 적절한 금액을 제시하는 사람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어떤 이는 5000만 원을, 어떤 이는 6000만 원을, 많게는 8000만 원까지 제시하는 이도 있었지만 충분치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인근 마을 주민이며, 피난교회 성도들과도 교류가 잦은 강 모 씨를 만나게 됐다. 최근 부동산을 알아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그래서 피난교회의 매매가로 1억 원을 제시했다. 그런데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던 그가 선뜻 거액에 매입하기로 한 것이다. 성도들도 모두 긍정적이었다. 그 뒤로 새 교회를 짓는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성산교회가 오조마을 입구(오조리 1031-7)에 위치하게 된 것은 부 집사가 847m²(231평)의 대지를 희사한 덕이다. 평생을 홀로 신앙하며 올곧게 살아온 부 집사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성산교회를 짓는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강 장로의 말에 부 집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1억 원에 피난교회를 매입한 강 씨는 교회를 개조해 현재까지도 식당으로 운영하고 있다. 혹자는 “역사적인 교회가 이방인의 손에 넘어가 식당이 됐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피난교회의 역사를 깨달은 성도들은 이후에도 교회를 되찾을 방법을 다방면으로 알아봤다. 하지만 그사이 피난교회의 공시지가는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껑충 뛰어올랐다. 더구나 한때 교회 앞을 지나는 도로계획이 추진된 적이 있어 보상을 기대하는 심리 때문에 매매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 돼버렸다. 도로계획은 사실상 죽은 계획이 됐음에도, 보상심리는 사그라들지 않은 모양이다.
“기자님, 우리 이야기 듣느라고 배가 많이 고플 터인데, 국수 한 그릇 하러 갑시다”
한평생을 교회를 위해 사람들을 위해 베풀며 살아온 부 집사다운 말씀이었다. 보행보조기에 의지했지만 걷는 속도는 오히려 기자보다도 빨랐다. 공교롭게도 국수집은 피난교회처럼 돌을 쌓아 올려 만든 석조건물이었다. 아마도 오래전에는 창고로 쓰인 듯했다. 석조건물을 보니 부 집사는 피난교회가 생각나는 모양이다. 자신의 국수를 한젓가락 크게 떠서 기자의 그릇에 올려주며 물었다.
“묵은 교회(피난교회)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렇다저렇다 말씀드리기 힘들었다. 부 집사를 댁에 모셔드리고 강 장로와 헤어지자, 기자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긴 통화음 끝에 전화가 연결됐다.
“김재호 목사님, 성산포 피난교회 유적지화에 대해 여쭙고 싶은 내용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성산 피난교회는 과연 ‘유적지’가 될 수 있을까
성산 피난교회가 유적지로 지정되려면 과연 조건을 갖췄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게 중요했다.
관련기사
김재호 목사에게 성산포 피난교회를 유적지로 지정하는 방법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그는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오조마을 길목에 선 기자는 그 자리에 서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이야기를 쉴새 없이 받아 적었다.
전 호남합회장 김재호 목사를 만난 것은 지난해 11월 초 호남합회 도농나눔축제 현장에서였다. 김 목사는 성산포 피난교회를 되찾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피난교회의 ‘유적지화’를 제안하기도 했다.
일제의 핍박에 항거해 집단을 이루며 숭고한 신앙을 지켰던 한반도 유일의 집단 신앙공동체인 적목리 유적지가 가평군 향토문화재(제13호)로 지정된 것처럼 말이다.
행사가 진행되는 호남삼육중고 운동장 구령대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김 목사는 아직도 되찾지 못하고 있는 피난교회의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여러 차례 드러냈다. 무엇보다 비용적인 측면이 부담되는 상황이라면 피난교회를 유적지화 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만일 피난교회가 유적지로 지정된다면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보존 등에 필요한 경비를 보조할 수 있”으며 “사적 지정과 더불어 사적 지정 구역 외 일정 지역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할 수 있게 된다. 정부의 도움을 받아 피난교회를 보존할 수도 있으며, 관련해 발생하는 비용도 지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만만치는 않다.
“유적지로 지정받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료를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물론 지자체에서 조사관들이 파견되겠지만 우리 쪽에서도 충분한 자료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제출해야 하는 자료도 무척 많을 겁니다. 따라서 유적지 등록에 필요한 절차를 비롯해 어떤 사료를 준비해야 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하며 응원하겠습니다”
지난 며칠간 부복수 집사, 한공숙 장로, 강관규 장로(이상 성산교회) 등 성도들은 물론 오조마을에서 피난교회를 기억하는 어르신들을 만나 피난생활 당시 피난교회의 도움과 역할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교회를 매각하게 된 상황에 대해서도 파악했다. 그 과정에서 피난교회가 가진 역사적 의미가 분명해질수록 ‘과연 피난교회를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함께 커져갔다. 그리고 결국 유적지화가 피난교회를 회복하는 또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따라서 앞으로의 취재 방향도 분명해졌다.
피난교회의 유적지화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피난교회가 유적지로 지정될 가능성이 있는지, 다시 말해 유적지로 지정될 수 있는 조건을 갖췄는지가 중요했다. 먼저 재림교회 내에는 ‘적목리 신앙유적지’라는 귀중한 선례가 있었다.
1999년 12월 31일 ‘경기도 가평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적목리 신앙유적지는 일제강점기의 생활상을 담고 있다. 시기적으로 6·25전쟁 이전이기 때문에 성산포 피난교회에 비해 더 오래된 유적이다. 관계 법령을 살펴보면 생성된 지 적어도 50년은 지나야 할 필요가 있다. 피난교회가 세워진 때는 1951년이므로 무난하게 첫 관문은 통과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전부 기자의 판단으로 등록여부를 심사할 위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었다.
김재호 목사의 조언에 따라 피난교회가 행정적으로 소속돼 있는 서귀포시청의 담당 주무관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실제적이고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서귀포시청 조직도를 찾았다. 문화예술과를 클릭하고 각 주무관의 책임업무를 살폈다. 스크롤을 내리며 해당 사안을 살피던 중 한 주무관이 △지역문화유산 기초조사 추진 △향토유산 지정 확대 추진을 맡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통화 중이었다.
이후 3차례 더 전화를 걸었으나 여전히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내친김에 그냥 바로 찾아갈까 하고 시계를 보니 오후 4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성산에서 서귀포시청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아무리 빨리 가도 퇴근하는 주무관을 붙잡아 세우게 될 공산이 컸다. 몇 번 더 전화를 해 보고 다음 날 찾아가 보는 것으로 마음을 먹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서너번 통화를 시도했을 즈음 드디어 전화가 연결됐다. 하지만 담당자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옆자리의 직원이 당겨받은 것이었다.
사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냐고 물었다. 상대는 “쪽지를 남겨 두고 연락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이미 오후 6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결국 회신을 포기하고, 다음날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웠지만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주무관을 만나 어떤 질문을 던질지 머릿속에 떠올려 봤다. 만약 “피난교회는 유적지로 등록되기 부적합합니다”라는 대답을 들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기까지 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아침, 마승용 목사(성산교회)에게 서귀포시청에 가서 담당 주무관을 만나보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자동차 열쇠를 챙기더니 시청까지 태워다주겠다며 함께 길을 나섰다. 서귀포에 볼 일이 있다고는 했지만, 취재를 도와주려는 것임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청사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래로는 태양빛을 받은 서귀포 바다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밀려 왔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하며 하얀 포말과 함께 일렁이는 파도가 기자의 떨리는 마음 같았다. 이제부터는 내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한편으로는 어떤 대답을 들을지 알 수 없어 뒤척였던 지난밤과 달리 오히려 덤덤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숨을 깊게 한번 들이켜고, 문화예술과의 문을 두드렸다.
제주 피난교회 문제를 세계유산본부에서?
서울위생병원 제주도분원에서 진료받은 환자는 장날이면 1000명에 이르기도 했다.
관련기사
문화와 예술을 다룬다고 해서 특별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아니었다. 여느 시청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기자는 서귀포시청 문화예술과를 찾았다.
사무실을 한 번 둘러보기도 전에 한 주무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출입문과 가장 가까운 자리 그리고 앳된 얼굴로 미뤄볼 때, 아마 누가 오더라도 제일 먼저 인사를 하는 직원일 듯 싶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문화재나 유적지 지정과 관련해서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담당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는 아직 일이 익숙지 않은지 옆자리의 선배에게 다가가 조언을 구했다.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이야기했기에 대화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잠시 후 주무관은 현재 담당자가 자리를 비웠는데, 곧 돌아올 것이라며 연락처를 남겨 달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마치 조직의 큰 잘못을 대표해 사죄하는 것처럼.
명함을 건네고, 근처에 있겠다고 했다. 그리고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와 복도 끝에 있는 음료자판기로 향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자판기 옆에는 으레 앉을 곳이 마련돼 있기 때문이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뽑아 들고, <한국 재림교회 선교 100년사> 중 ‘제주 성산포 피난생활’ 부분을 펼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복사본을 서류철에서 꺼냈다. 서울위생병원 제주도분원에서 진료받은 환자의 수가 장날에는 1000명에 이르렀다는 내용을 읽으며, 아침에 지나쳐 온 텅 빈 고성 5일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자 역시 강원도 산골이 고향이기에 5일장은 익숙한 풍경이다.
하지만 고향인 삼척시 도계 5일장은 읍사무소와 우체국이 있는 길에서 펼쳐지기에 평소에도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이 적잖은 편이다. 하지만 고성 5일장은 넓은 땅에 지붕까지 올려 장터를 만들었기에 비어있다는 느낌이 훨씬 진하게 다가왔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질 즈음 휴대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셨네요? 저희가 무슨 도움이라도 좀 드릴 수 있어야 할 텐데요…”
과장 직함의 담당 주무관은 기자의 명함을 받아들고 한동안 뚫어지게 쳐다봤다. 지역 신문사도 아니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내려올 정도면 뭔가 골치 아픈 질문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성산포 피난교회에 관한 설명을 들은 그는 이제 나에게 질문했다.
“지어진 지 적어도 50년 이상 된 것은 확실하지요? 그렇다면 이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부 기관이나 그에 준하는 기관에서 발행한 문서를 찾으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증명한다 해도 여러 관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관련 법령에는 말입니다…”
이미 예상은 했던 터였다. 쉬운 일이었다면 지금처럼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두꺼운 자료집에서 눈을 들더니 아련하게 기자를 바라봤다. 아마도 쉬운 길은 아닐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본래 하나님의 길은 좁고 험한 것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에 수첩을 덮고 일어나는 기자를 향해 주무관이 말했다.
“저기 그런데…”
이른바 ‘문고리 대화’였다. 상담자가 상담을 마무리하고 방을 나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는 시점에 내담자가 이야기를 추가로 꺼내 놓는 경우가 있다. 이때 이뤄지는 대화를 흔히 문고리 대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때 가장 중요한 내용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역할이 바뀌었다. 내담자는 분명히 나였다. 아쉬운 사람도 나라는 의미다. 그런데 오히려 상담자가 문고리 대화를 하려는 것이다. 머릿속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피난교회가 우리와 다음 세대의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성산 피난교회가 현재의 우리와 다음 세대의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보존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집사님, 성산포 다녀오셨어요? 그 기사 엄청 자세하게 읽었어요. 제가 피난교회 출신이거든요”
전혀 알지 못했다. J 집사님과 매 안식일은 물론 화요일과 금요일 반갑게 인사하면서도 그가 제주도, 그것도 피난교회 출신이란 것을. 그리고 <재림신문>의 기사를 한 자 한 자 정독하는 열혈 독자라는 점도.
평소에도 교회 로비에 비치된 <재림신문>을 가져다 읽는 모습을 본 적은 있었지만, 기자는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이기에 관심을 가지는 정도로만 ‘가벼이’ 생각했다. 그런데 피난교회 출신이라니! 이런 인연이 있을까. 어쩌면 기자가 피난교회 취재를 다녀오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쭉 모른 채 지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피난교회는 되찾을 수 있는 거예요? 저한테만 살짝 스포일러 해 주세요. 어디 가서 절대 말 안 할게요”
기사를 꼼꼼히 읽는 마음이 너무도 고마워 미리 귀띔해드릴까 싶었지만, 드라마도 ‘본방 사수’가 제일 재밌는 것이라며 기사로 기다려 주십사 당부드렸다. 사실은 취재 내용을 옮기는 과정에서 아직 마음속에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기에 그리 말씀드린 것이다. J 집사는 다소 아쉬움이 묻은 얼굴로 피난교회 기사 보러 교회에 더 빨리 와야겠다라며 “잘 부탁한다”라고 인사했다.
한번은 몸이 으슬으슬해 감기약을 먹고 선잠에 빠져 있을 때였다. 갑자기 휴대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직업이 기자인지라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기자의 기사에 대해 문의하는 전화일 수도, 제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C 장로라고 밝힌 상대방은 피난교회 기사를 흥미롭게 읽고 있다며, 피난교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싶어 전화했다고 했다. 소파에 누워 있다 일어나 허리를 펴고 앉았다. 탁자에 놓여 있는 메모지에 그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휴대폰의 열기가 오르는 것 이상으로 C 장로의 목소리가 뜨거워졌다.
“내 이야기가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궁금한 것이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이 번호로 전화를 주십시오. 내가 식사라도 대접하면서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데…”라는 말씀으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이뿐 아니다. 수많은 독자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피난교회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리고 모두 한 마음으로 피난교회를 되찾는데 힘이 되고 싶다고 했다. 피난교회와 인연 맺는 시간의 길이는 크게 상관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피난교회라는 공간과 그 안에 함께 했던 사람과 그 위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결코 잊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즈(Gabriel Garcia Marquez)라는 소설가가 있다. 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 사조의 선봉에 선 그는 기자 출신으로 198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런데 상을 받은 얼마 후, 그의 대표작 <백 년의 고독>(Cien años de soledad)과 관련해 신기한 편지를 받았다.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난 나는 평생 동안 숨기고 살아왔는데, 노벨문학상을 받은 훌륭한 작품에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난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한 이후 처음으로 돼지꼬리를 당당하게 밝히게 됐다며 감사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르케즈는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수십 통 받았다고 전해진다. 글이 가진 놀라운 힘을 보여주는 일화로 출판계에서 유명한 이야기다.
기자가 피난교회에 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해 제주대회 창립총회 현장에서다. 삼육대 신학과 오만규 전 교수가 경영위원회에서 “이제라도 피난교회를 되찾아야 한다”며 문제를 제기한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에는 기자가 직접 제주도까지 찾아와 취재를 할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취재한 내용을 <선교 120주년 기념: 권태건의 내러티브 리포트>라는 제목으로 연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르케즈가 쓴 이야기가 마술처럼 작용해 돼지꼬리를 갖고 태어난 이들이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처럼, 피난교회가 단지 그때를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한국 재림교회 성도들의 의식 속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일도 피난교회의 추억을 되새기는 것에 그친다면 피난교회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1943년 10월 28일,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하원의 재건축을 논하는 회의에서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우리는 건축물을 짓지만, 그 이후로 그것은 우리를 짓습니다”라는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말은 오늘날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는 말로 정리돼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기자는 피난교회를 되찾아야 할 명분을 찾을 수 있었다. 한국 근대사의 가장 어두운 순간을 오히려 제주도 복음화의 기회로 삼으셨던 하나님, 그리고 전쟁의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켜온 우리의 선배 신앙인들의 땀과 눈물이 스며든 곳이 바로 피난교회이며, 이 공간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신앙을 전수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장 계획을 세우고, 사전 취재를 진행하던 당시부터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피난교회 유적지화’ 였다. 그리고 현장 취재를 통해 문화재 등록에 관해 알게 됐고 그 후로 ‘피난교회 문화재 등록’이라고 명명해 왔다. 문화재 등록을 목적으로 삼은 이유는 다름 아닌 경제적 비용 때문이었다.
피난교회가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다면 지자체의 도움을 받아 보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서귀포시청과 세계유산본부 등 관계 기관을 찾아가 취재한 결과 비용을 전혀 들이지 않고 피난교회를 보존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현재 피난교회 건물 소유주가 교인이 아니라는 점도 이를 더욱 요원하게 하는 이유였다. 오히려 주무관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그 이후 절차는 수월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우리가 나서야만 하는 것이다.
피난교회를 기념관으로 보존하려 했으나 도시 계획상 철거가 불가피하다며 계획을 취소했던 것이 1989년이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변에 새 건물이 들어설 때도 피난교회는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며 버텨왔다. 하나님의 개입하심 외에는 설명할 방도가 없다.
이제는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할 때다. 우리의 결정만 있다면 피난교회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1951년 성도들은 그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피난교회를 지었다. 이제 피난교회가 우리와 다음 세대의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보존하는데 더욱 뚜렷한 결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저희(시청 문화예술과)가 문화재 지정과 관련된 업무도 맡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기자님이 말씀하신 일들이 진행되려면 여기가 아니라 제주도 세계유산본부에 가셔야 합니다. 사실상 그쪽이 실무를 총괄하거든요”
‘사실상 실무를 총괄한다’는 말이 퍼뜩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에 불어오던 시원한 바람이 장마철 공기처럼 눅눅해진 느낌이었다. 세계유산본부는 유엔(UN) 산하 기관이다. 담당 주무관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은 자연유산뿐 아니라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일도 담당하기 때문에 성산포 피난교회의 유적지화 가능성을 타진해보기에 적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에도 여전히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혹시라도 업무를 다른 기관에 떠넘기려는 시도라면 어떡하지?’ 하는 의구심이 불현듯 스쳤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처음에 명함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이미 그때 선을 그어버린 건 아닐까. 청사에서 나와 언덕길을 따라 내려갔다. 시청에서의 일이 마치면 마승용 목사(성산포교회)와 신서귀포교회(담임목사 김기대)에서 만나기로 했다. 걸어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마 목사 역시 김 목사와의 업무를 마치고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환한 미소와 함께 내게 물었다.
“시청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서귀포 앞바다의 윤슬은 유난히 반짝이고,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다.
“네. 그게 말이죠...”
[인터뷰] 삼육대 신학과 오만규 전 교수 ... “피난교회는 한국 교회 사적지”
오만규 교수는 “피난교회는 제주를 넘어 한국 재림교회의 사적지”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9월 3일 제주대회 창립총회 현장. 새로운 조직체의 출범과 함께 상호 발전을 위한 다양한 의견이 오가는 경영위원회 시간이었다. 삼육대 신학과 오만규 전 교수가 마이크를 잡고 일어섰다. 그는 “성산포 피난교회를 복원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6회에 걸쳐 피난교회를 주제로 진행한 <내러티브 리포트>를 쓰게 된 시발점이었다. 그리고 연재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다시 그를 찾아가 피난교회의 의미와 옛 교회를 이제라도 되찾아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5월 7일 신학관 4층, 오 교수는 기자를 엘렌화잇연구소 한쪽 구석에 놓인 소파로 안내했다. 의자에 몸을 깊이 묻은 그는 기자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피난교회를 직접 본 소감을 물었다. 그래서 제주에서 있었던 일을 간추려 이야기했다. 현장에서 만났던 많은 이들에게 취재의 취지와 과정을 여러 번 설명했다. 시간이 지나며 새로 발견한 정보를 추가했다. 아마 오 교수에게 전달하는 이 이야기가 그 최종 버전이었을지 모른다.
“참 다행입니다. 내가 노구를 이끌고 제주까지 가서 절차를 알아보고 자료를 모으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권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피난교회를 문화재로 등록하는 조건이나 절차에는 크게 문제가 없는 것이군요?”
실무를 맡은 주무관이 피난교회가 문화재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등록신청을 하면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오 교수의 입꼬리가 하늘을 향했다. 하지만 문화재 등록신청은 건물의 소유주만 할 수 있다고 하자, 어느 정도 예상했다면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피난교회를 되찾는 일에 한국 교회가 나서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제주의 자그만 교회를 되찾는 일에 왜 한국 재림교회가 나서야 할까요? 그건 다름 아닌 피난교회는 제주를 넘어 한국 재림교회 전체의 사적지이기 때문입니다!”
1951년 당시 성산포에 내린 재림성도는 1000여 명이었다. 그중에는 연합회 본부, 삼육초중등학교, 위생병원, 시조사 등 한국 재림교회의 여러 기관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국 재림교회 전체가 성산포로 옮겨진 것이다. 그렇기에 피난 온 성도들에 의해 세워진 피난교회는 단지 제주만의 사적지가 아니라 한국 재림교회의 사적지라는 게 오만규 교수의 주장이다.
“구약의 가장 큰 역사 두 줄기가 무엇입니까. 바로 출애굽과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역사입니다. 다시 말하면 ‘피난 행렬’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재림교회의 가장 큰 역사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교회 해산과 6·25전쟁 시기의 제주 성산포 피난생활입니다. 피난교회는 이처럼 큰 역사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로 지어진 것입니다. 사실상 한국 재림교회 성도 전체의 손으로 쌓아 올린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피난교회를 지금처럼 이방인의 손에 넘어간 채로 방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피난교회를 한국 재림교회사에서 우뚝 솟은 기념비적 건물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그렇기에 더 늦기 전에 피난교회를 되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국연합회 총회 경영위원회에서만 5차례 안건으로 제시했지만, 피난교회는 여전히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는 “연합회 차원에서 처리해야 할 급한 일들이 있는 것은 알지만,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보존하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누가 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했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 오 교수는 갑자기 기자에게 퀴즈를 냈다. “당시에 재림교회 피난민들이 동초등학교(현 성산초등학교)와 성산수산고등학교에 몸을 맡겼고, 위생병원이 성산 서초등학교(현 동남초등학교)에서 제주분원을 개원했습니다. 그럼 학생들은 어디에서 공부했을까요?”
취재하면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재림교회의 행적을 중심으로 추적하느라 현지 학생들의 움직임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기자의 생각이 길어지자 오 교수는 “그들이 다 어디에 갔겠어요. 마을회관에서 오밀조밀 모여 공부했습니다”라며 자문자답했다. 이제 그는 역사학자이기 전에 제주 성산포 신양리 주민으로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많은 경우 재림교회가 성산포 주민들에게 끼친 감화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주민들도 희생했습니다. 자신의 방 한 칸을 내어주고 피난생활을 돕지 않았습니까. 이방인이라 할 수 있을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은 조명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 교수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피난생활이 마치고 재림성도들이 육지로 돌아온 후 동고동락했던 주민들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거나 안부를 물었던 성도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피난생활 동안 뿌려진 씨앗이 스스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었지만, 그 과정에서 피난 왔던 성도들의 개입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오 교수는 “성산포가 얼마나 큰 선교지였습니까. 하지만 피난생활이 끝난 후 대부분 성산포를 잊어버린 것 같았습니다”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전쟁 후 류제한 박사가 제주를 위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제주의 영혼들을 위해 교회가 없는 서귀포를 개척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우리의 시각이었다는 것이 오 교수의 지적이다. 서귀포에 교회를 세우는 일은 훌륭하지만, 전쟁 중에 피난 온 재림성도와 함께 생활했던 성산포 주민들은 결코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피난교회를 복원하는 일은 당시 한마음으로 전쟁을 견뎌온 재림성도와 지역주민의 연결고리로 작용할 것이며, 그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서 자리매김할 것이기에 더더욱 복원계획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 교수는 이를 위해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관심을 보내주고 함께 기도해 줄 것을 당부했다. 무엇보다 교회 지도자들이 수없이 바쁘고 급한 일이 있음에도 우리의 역사를 보존하고 성찰하는 일에 의식을 갖고 나서주기를 간청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함께 기도하는 오만규 교수의 목소리는 지난해 9월 제주대회 창립총회에서처럼 떨리고 있었다. 한국 재림교회의 사적지인 피난교회가 문화재로 인정받아 보존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