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에든 전성기와 황금기는 있다. 비단 일국의 나라 뿐 아니라 어느 사회 그 누구에게도 황금기는 있다. 문물 교류가 활발하고 번창한 문화가 날로 진보하여 꿈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그러한 황금기를 말한다. 나에게도 그런 황금기가 있었다. 1987년, 당시는 젊은 영화감독 배창호가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란 영화로 이름을 날리던 때 인데 나 역시도 그해 겨울은 무척 따뜻했다. 분야는 틀리지만 그와 다를 바 없는 감독으로써 흡사 다양한 인생 역정 대여섯을 일거에 촬영한 황금의 무대가 바로 그때였다.
나는 그해 핵연료를 우리 손으로 제조 하겠다 하여 설립한 회사에( 지금의 한국원전연료) 발탁이 되어 그 공사 감독을 맡았었다. 독일 회사가 기술을 전수하여 도입을 하는 것이라 독일 친구가 슈퍼바이저로 상근을 하였으며 그를 상대로 일일 회의를 하고 장비설치를 하는 것이 나의 주된 역무였는데 갓 서른을 넘긴 주제에 지금 생각해도 나는 꽤 영화로운 감독이었다. 우선에 감독이면서 내가 주연이었던 ‘ 태극기 휘날리고’ 란 무대는 당대의 아주 멋진 연출이었었다. 그 연출을 제대로 알자면 그 본색은 어디까지나 애국심의 발로였다는 것을 알고 접해야 한다.
하루 벌이가 당시 돈으로 25만 원이었던 독일친구는 처음 왔을 때는 꽤 의기양양 했는데 갈수록 과묵해졌다. 낙후한 한국으로 잘못 오인한 그가 정밀도 1/100을 논하는 기술을 보고 놀랐기 때문이다. 당초 약정과는 달리 돌아갈 시간이 머지않다 싶으니 기술제공 속도를 늦추는 그였다. 작업자를 두 개조나 편성한 마당에 꽁수를 둔다고 물러설 것은 아니었지만 키대를 그가 쥐고 선 이상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그의 느릿느릿한 행보는 계속됐다. 그때 떠오른 것이 007영화였다. 첩보 물에 미인계만한 미끼는 없다. 당시 야들야들한 여인이 나오는 사롱이나 카페가 생각같이 그렇게 비싼 편은 아니었다.
역시 그는 어느 날 부터는 유들유들해졌으며 또 언제 가는가 하며 내 눈치 보기가 바빴다. 남은 일 반을 줄이고 대신 남은 반중에 반은 같이 놀러 다니기로 우리는 그렇게 적당히 타협을 보았다. 그로 벌어들인 수입은 꽤 짭짤한 것이었는데 그러니까 그 외화를 벌어들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일등공신은 당시 유성에 있는 예성이란 술집의 어느 아가씨다. 장비 설치 전담반에는 작업반장 김씨 라는 이가 있었는데 바로 그가 ‘ 태극기 휘날리고 2 내지 완결 편’을 연출한 바로 그 주인공이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초등학교를 중퇴한 그가 영문으로 된 도면이나 사양서를 읽고 장비를 설치한다는 것은 무리라 싶었는데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기우였다.
또 한 번은 실내 폭이 좁아 무거운 장비를 집어넣기가 어려운 상황이 생겼었다. 그때 그는 창문을 열더니 바깥 전나무에 체인을 걸고 그 장비를 아무것도 아닌 양 쏙 집어넣었다. 그쯤의 기상천외한 기량이니 독일친구들이 놀라지 않을까. 시대의 황금기에는 그러기에 그 시대를 빛내 줄 황금 손을 갖은 장인이 꼭 존재 한다. 그런 그는 면허도 없이 황야의 무법자 마냥 종횡무진 지게차를 몰았으며 나는 그때 태극기 휘날리며 달리는 지게차의 어엿한 조수였었다. 영화로운 이야기에 어찌 또 애정이 끼지 않겠는가.
한국여성에게 빠져버린 독일 친구들 여럿 때문 나중에는 그들 부인들이 대거 입성을 하여 아파트를 하나씩 얻어주어야만 했는데 그것은 그렇게 이례적인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이고 사랑은 그렇게 국경을 넘으니 말이다. 그 보다는 사랑이 넘쳐나 문제가 된다는 것이 나에겐 극히 이례적이었다. 당시 공사업체의 기계담당 과장은 자격증 열을 갖은 아주 유능한 과장이었는데 그와는 회식이란 것을 한 번도 하지 못했었다. 열심인 사람들하고 어울리지를 않는 것이 조금은 섭섭하다 할 그즈음 그 이유를 자연 알게 되었다. 늘 추측하게 되는 건강상의 문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이유가 참으로 의외였다.
그의 집은 서울인데 현장인 대전까지 매일 출퇴근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하루도 거르지 않는 참 대단한 효심이구나 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의부증이 심한 아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의 그였다. 저녁이 되면 부랴부랴 도살장에 끌려가는 뭣 마냥 서울로 가는 그로 부터 나 역시도 아주 색다른 경험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곤 했다. 그런 그와는 딱 한 번인가 저녁을 하고 바로 8시쯤 헤어졌는데 그 날 새벽 그의 아내로부터 남편을 찾아내라는 호령을 크게 들어야만 했다. 그쯤에선 또 그녀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였다.
그날 그는 말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러하듯 닮지 않은 삶을 접해보는 교류 또한 황금기엔 아주 중요한 사료가 되며 의식의 틀에 큰 보탬이 된다. 기실 황금기에는 불같은 의욕이 넘쳐나 사건사고도 늘 있는 법이다. 그 해 우린 작업 중 기어코 불을 내고 말았다. 용접봉이 튀어 장비에 옮겨 붙었는데 어쩔 수 없이 그것으로 미인계도 별 소용없이 나는 다시 슈퍼바이저에게 공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금기에는 전무후무한 그야말로 전설같은 이야기가 꼭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장비설치반 조공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반반한 얼굴에 지긋하여 그 나이 조공이라는 것이 믿기지않았는데 그는 늘 웃는 얼굴로 일밖에는 몰랐다. 막일을 하는 사람들도 다 연계가 되어 있어 서로들 잘 아는 처지들인데 그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것은 그가 대우에서 나온 당시로선 최고가인 로얄 사롱이란 차를 끌고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근무처 소장이 유일하게 그 차를 타고 다녔었고 나는 아예 차도 없던 시절이다. 먹고살자고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 도비인생에서 그것은 아주 극히 이례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돈 있는 행세를 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더욱 그가 의아하였다. 그런 그는 일이 마무리가 거의 다 될 쯤 술 한 잔을 하자며 나를 청하는 것이었다.
내심 잘되었다 하며 그와 만났다. 그는 대전시내로 나가자는 것이었다. 굳이 대전 시내 한복판 그것도 당시로선 제일 번화한 소청1번가까지 행차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대단한 술자리였기에 나로선 큰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가 책임을 진다고는 하지만 작업자에게 신세를 질수는 없는 것이어서 조바심까지 이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마 그런 일은 황금기에서나 맛보는 것이지 다른 시대엔 어림도 없는 일 일 것이다. 나와 그가 건물에 들어서자 일렬로 늘어선 종업원들이 일시에 외쳤다. “ 회장님 나오십니까.”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그는 그곳의 주인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영화에서 본 것마냥 조폭들이 분부를 기다리며 조아리는 그 표정을 상상이라도 한 번 해보시라. 늘 대하던 부드러운 그가 조폭 두목이라는 것이 상상이 안가고 그래서 그 내막은 여전히 미궁이고 그래서 또한 그의 말을 전적으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가 막일 일터에 나오는 것은 그의 손 때문이란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어쩌면 노름을 해서 그렇게 돈을 많이 모은 것인지도 모를 것이다. 타짜란 영화를 보니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그는 노름을 다시는 하지 않기 위해 새벽 5시에 나와 8시에 집에 들어가는 고단한 막노동을 사서 했다는 것인데.. 지금도 여전히 꿈같은 영화 같은 이야기다.
이후 나는 그를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다사다난한 이력을 첨부하며 다 지은 공장을 그 회사 운영책임자인 k부장이란 사람에게 넘겼는데 그는 직원 뺨을 후려갈길 정도로 무도한 인물이었다. 그로 책이 잡힐까봐 키를 넘기는 순간까지 나는 꽤 긴장했었지만 어쨌거나 황금기의 나의 역사는 꽤 화려했다. 문물 교류가 활발하여 남들 십년은 걸려야 알 세상의 맛을 단 1년 만에 알차게 터득하였으며 영화로운 감독으로서 영화감독으로 당시 데뷔해도 손색이 없다 해두었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황금기가 있으면 그 어느 시대나 그 누구이든 쇠퇴기는 있게 마련이다. 나 역시도 그 때의 화사한 시기가 끝이 나자 바로 시들기 시작하였다.
부강하거나 철옹성같이 두텁다고 해서 단지 그것만으로 황금기라고 할 수는 없다. 모름지기 황금기란 대하는 서로가 모두 바라는 이상향처럼 꽃과 은총이 만발해야 한다. 당시의 김 반장은 황금기가 끝이 나자 얼마 안가서 우울증을 앓다 자살을 했으며 의처증에 시달렸다는 그 과장은 아내와 결국 이혼하고 어디 산골로 들어갔다. k부장이란 사람은 민주화가 되고 노조란 것이 활성화 되면서 탄핵 소추 1호 대상자로 선정 되어 한때 공장에 그 이름이 나부끼더니 결국 그곳을 떠났으며 노름꾼 아저씨는 큰 노름으로 잡혀들어 갔다는 소릴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도 같다.
그렇게 우리 한 시절의 황금기는 그 초창기 설렘과는 무관하게 빛 바랜 어둠속으로 푸드득 지고 말았다. 원래 황금기는 그렇게 순식간 사라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세상 무삼타 하는 말이 일국의 나라 흥망성쇠만을 두고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역모에 출중했던 그들과 나의 그해 겨울은 무척 따스하였으며 지금 국내 유일한 그 공장의 빛나는 영광으로 거룩하기까지 하다. 그로 이룬 한 시절의 황금기는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내 가슴속에서 몇 편의 영화로 또 그렇게 소담하게 남아 있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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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시대란 그리스 사람이 인류의 역사를 금, 은, 청동, 철의 네 시대로 나눈 가운데서 첫째의 시대를 이르는 말이다. 그리스 시대 헤시오도스는 크로노스가 우주를 지배하던 태초에 아무런 걱정도 고통도 몰랐고 늙지도 않았고 죽음을 잠드는 것처럼 생각하여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땅은 돌보지 않아도 스스로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주었기에 모든 것을 평화롭게 나누었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던 황금의 족속이 살던 황금의 시대가 있었다고 했다.
황금시대의 모습은 인간의 이상향의 모습이다. 황금시대의 인류가 살았던 그곳이 '유토피아'이고, '에덴동산'이며, '무릉도원'인 것이다. 자연의 은총만으로 살아갈 수 있었고, 평등했으며 행복했던 이른바 사회의 진보가 최고조에 이르러 행복과 평화가 가득 찬 시대를 말한다. 인류 최고의 황금기간은 어느 때였을까. 누구는 광대한 영토를 갖고 찬란한 문화와 문명을 꽃 피웠던 바빌로니아 제국의 시대를 최고로 꼽는다. B.C.3000년 말기 그 황금시대의 수고인 거대한 바빌론은 (당시 도시의 한 변 길이가 21킬로미터로 총 둘레가 85킬로미터를 차지)메소포타미아를 통일시켰을 뿐 아니라 융성한 부국 함무라비 통치기간을 이루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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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젊음 하나로 버텨가며 철야작업을 밥먹듯이 하면서도 보람과 성취감을 만끽하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군요...황금기란 젊은 시절 바로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요?
책을 오늘 부쳤는데 힌고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이름을 몰라서 그냥 바람새 친구로 해두었습니다. 전에 한 번 통화한기억이 있기는 한데 가물가물해서.. 저는 지금도 젊은 시절인데 황금기는 아니고 춘공기같습니다.
조박사님의 황금시대가 너무 멋졌는데 결과가 끝에는 별로여서 참 안타깝습니다. 저도 일을 해보면 제가 진두 지휘해서 한건 해오면 여러명을 먹여살립니다. 그 끝에는 결국 다같이 그때 잘벌어먹고 살았는전설이 뒤에 흘러나오는것으로 만족하면서 살아가지요.. 그런데 정작 총대를 메고 진두 지휘를 했던 사람은 결국 잊혀지기위해 존재하는것같아요.. 조박사님 글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추억은 항상 아름다움으로 자리하지요 언제 또 그 황금기가 도래하길 기원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