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 미호천 강변의 추억들)
나는 지금 세종시로 편입되고 없어진 용호리 마을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해 겨울에 외가집이 있는 강촌 마을로 이사를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 용호리 마을에 살던 추억도 많고 강촌 마을에 살던 추억도 많다
내가 살던 강촌 마을은 조치원역에서 가까운 아름다운 미호천 스물두강다리 강가에 위치하고 있다
강촌에서 미호천 제방을 따라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신촌 이라는 마을도 제방 바로 밑에 있다
강촌과 신촌 마을은 주변에 산이 없고 드넓은 동진 들녘 벌판과 미호천 강을 끼고 있으며
강 건너 편에는 조치원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번암리 마을과 오른쪽에는 오송 생명과학단지가 보이고
강촌마을 철길에서 내판 역 쪽을 바라보고 왼쪽은 미꾸지, 노리미, 양골, 방앗간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저 멀리 동진 들판 끝자락에 문주리가 보이는 곳이다
특히 내가 살던 강촌 마을은 경부선 철길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어서
예전에는 한밤중에 석탄 때는 기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면서 지나가면 땅이 흔들리고 시끄러워서
잠을 깨는 부부가 많은 탓에 집집마다 자녀들이 많아졌다는 우스게 소리도 있었다
내가 자라서 성인이 되고 보니 그 말도 일부는 맞는 거 같기도 하다
강촌 마을은 동진들판 끝자락에 미호천과 스물두강다리에 인접해 있고 주변에는 산이 없으며
사방이 기름진 대평야로 펼쳐져 있어서 시야가 확 트인 지역이다
그래서 산이 없다 보니 다른 마을에 비해서는 커다란 밭이 없고 대부분 논농사를 지었고
일부는 하천부지를 밭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밭이 있다고 해도 사과 배 복숭아 포도 같은 과수원과 과일나무는 없었으며
논을 밭으로 만들어서 참외 수박 딸기 토마토 같은 채소 과일 정도만 제배하였고
미호천 하천부지에서도 채소 과일들을 재배하였다
강촌은 산이 없다 보니 땔감이 부족했던 옛날에는
저 멀리 내판을 지나 기차터널이 있는 응암 마을까지 지게를 지고 걸어가서
힘들게 나무를 해오곤 했었다
형님들은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아침에 나서면 거리가 멀어서 보통은 저녁나절에 귀가하였다
나는 강촌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는 용호리 마을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용호리 마을에 살 때는 산과 관련된 추억들이 많은데
강촌으로 이사 온 뒤로는 산과 관련된 추억은 하나도 없다
그 대신 강촌은 넓은 벌판과 아름다운 미호천 강을 끼고 있어서 스물두강다리와 나룻터를 비롯해서
미호천 강변을 둘러싼 주변의 추억들이 많이 남아있다
강촌으로 이사 온 뒤로 나는 유년 시절에 보냈던 용호리 마을과 산으로 다니던 추억들에 대해서
가끔씩 꿈을 꾸기도 했었다
문주리 뒷산과 날개바위 주변, 엉고개 우리 밭으로 가는 산, 사냥골 외딴집 주변의 낮은 산들
하교 길에 상판에서 용호리로 자주 넘어오던 낮은 산들
그리고 사냥골 우리 집 소유의 큰 산,
출동산, 성황당, 노적산, 소징이 뒷동산, 등등 어린 시절 산에서 놀고 지냈던 일들이 진짜인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꿈을 자주 꾸곤 했었다
강촌에는 산이 없어서 그런지
어린 시절에 용호리에서 돌아다니던 산에 대한 꿈은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도 자주 꾸었다
아버지랑 함께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겨울에 논구덩이에서 아버지랑 삽으로 진흙을 떠서 미꾸라지를 잡는 꿈과
사냥골에서 담배농사, 밭에서 뽕잎을 따는 꿈, 참외 수박농사, 밀농사, 고구마를 캐는 꿈들을 자주 꾸었고
사냥골 우리 산과 넓은 밭에서 송아지 등에 올라타고 달리는 꿈도 자주 꾸었다
나는 내가 자라면서도 오매불망 아버지를 잊지 못해서 그런지
아버지와 함께 하던 여러 가지 어린 시절 꿈들을 자주 꾸었다
내가 어린 시절 강촌 마을에는 고향에 남아있는 친구들보다 농사짓는 형님들이 더 많았고
형님들과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더 많아서 친구들과의 추억보다는
형님들과의 추억이 훨씬 더 많이 있다
한 여름철 이 맘 때 밤이 되면 무더위를 식힐 겸 가끔씩 동네 형님들과 횟불을 들고
강가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곤 하였다
형님들은 굵고 긴 철사 줄 끝부분에 헝겊 뭉치를 주먹만큼 크게 만들어 가는 철사로 묶은 다음
석유에 듬뿍 적셔서 휴대용 성냥으로 불을 붙이면
붉은색 불기둥에 검정색 그을음도 함께 날리면서 어두운 밤을 밝게 비춰주곤 했었다
한 사람은 석유통과 바케스를 들고 한 사람은 횟불과 톱을 들고 다른 사람들은 횟불을 들고
물고기를 찾아서 강가로 거닐다 보면 물고기들이 물가 얕은 곳으로 나와서
꼼짝도 안 하고 잠을 자고 있다
그러면 톱날 반대편 톱 등 부분을 내려쳐서 잡아야 하는데 물속이 깊은 곳은 강물이 흐르기 때문에
톱날이 휘어지지 않도록 각도를 잘 맞춰서 내려쳐야 잡을 수 있으며
물고기가 보여도 물속에 굴절되어서 보이기 때문에 실제 위치와 다른 위치에 있어서
정확하게 조준해서 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때로는 물고기가 드물거나 많이 놓쳐서 적게 잡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날은 한 시간 정도만 돌아다녀도 메기, 잉어, 붕어, 뱀장어, 피라미
심지어 털이 달린 참게를 비롯해서 말조개 재첩조개 강미꾸라지 등등
바케스가 무거울 정도로 아주 많이 잡을 때도 있었다
고기를 아주 많이 잡는 날은
형님들은 아예 강가에서 비늘을 치고 내장을 빼내고 맑은 강물로 깨끗하게 씻은 다음
손질을 끝내고 바케스에 담으면 부피와 무게가 많이 줄어든다
손질한 물고기를 그대로 마을로 가져오면
다시 손질할 필요가 없으니 바로 매운탕 준비가 시작된다
형님 집 마당 구석 화덕 위에 있는 커다란 무쇠 가마솥에 손질해온 물고기를 통째로 몽땅 쏟아 붓는다
그리고 나서 고춧가루 고추장 된장 간장 양파 대파 마늘 땡초 묵은 김치 등을
듬뿍듬뿍 넣고 무도 큼직하게 팍팍 삐져 넣은 다음
들깨 잎도 한주먹 뜯어다가 올리고 물을 잔뜩 붓고 나서
화덕 아궁이에 보리 짚을 넣고 불을 때면 따닥따닥 소리를 내면서 잘도 타오른다
형님들은 매운탕을 빨리 먹고 싶은 마음에 화덕 아궁이가 뜨거운 줄도 모르고
보리 짚을 마구 쑤셔 넣고는 불이 잘 타도록 부지깽이로 연실 뒤적거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커다란 가마솥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하면 매운탕 냄새가 퍼져 나오면서
사람들의 코를 자극한다
그 사이에 우리들은 마당에 커다란 멍석을 펴놓고 둘러앉아서 대기 하고 있다가
멍석 근처 땅바닥에 삽으로 구덩이를 파고는 모깃불을 지핀다
모깃불이 타오를 때 쑥을 한 아름 올려놓으면 불꽃은 꺼지고 쑥 연기가 마당 전체에 하얗게 퍼지면서
모기떼는 사라지고 심지어 사람도 연기냄새를 많이 맡으면 눈물도 나고 재채기도 나온다
이 때 매운탕이 끓어서 푹 익었다 싶으면 여러 개의 커다란 대접에
매운탕 고기와 국물을 푸짐하게 퍼 담아 멍석 위에 분산해서 깔아놓는다
그리고 나서 마당에 모인 사람들은
사기그릇에 막걸리를 각자 한 잔씩 부어놓고 마셔가면서 매운탕을 먹는다
매운탕은 온갖 물고기들과 참게 조개들을 많이 넣고 갖은 양념들을 듬뿍 넣고
가마솥에서 고화력으로 푸욱 고와낸지라 얼마나 깊은 맛이 나는지
매운탕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맛은 기가 막히다
막걸리를 마시고 나서 카~ 하고 손으로 입술을 훔쳐내고 얼큰한 매운탕 국물을 수저로 크게 떠서
호호 불어가면서 뜨거운 줄도 모르고 먹다보면 얼굴에서도 땀이 나오지만
어느새 등 뒤에서도 땀방울이 흘러내려서 옷이 함빡 젖어버린다
넓은 마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밤하늘의 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희미한 등잔불 아래
쑥 연기 냄새를 맡으면서 막걸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끌버끌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매운탕 냄새를 맡고 동네 어르신들이 나오시고 때로는 아줌마들과 아이들도 나온다
마당으로 찾아오신 어른들에게 왕대포와 매운탕을 대접해드리면
어른들도 멍석에 앉아서 얼큰한 매운탕과 술잔이 오가면서 농사이야기로 대화를 나누신다
아줌마들은 매운탕을 푸고 반찬을 날라다주는 일을 거들어주시고 나면 자기들도 손수 떠서 드신다
심지어 조그마한 애들도 달려들어 매운탕을 주면 맵고 뜨거운 것도 모른 채 환장을 하고
너무너무 잘 먹는다
좌우간 가마솥에 한 솥단지를 가득히 끓여도 매운탕이 남아도는 법은 없었다
얼큰한 민물 매운탕은 아무리 많이 끓여내도 언제나 솥단지가 바닥이 났었다
막걸리도 내판 양조장에서 말 통으로 사서 자전거로 싣고 오는데
막걸리 역시 아무리 많아도 언제나 모자랐다
그 당시 스물두강다리 아래 맑고 깨끗한 강물에는 물고기 말고도 재첩 조개와 모래무지가 많았다
물놀이를 하다가 발부리에 돌맹이 같은 것이 걸려서 허리를 숙여서 긴 팔로 건져내서 보면
알밤만한 크기의 대왕 재첩과 일반 재첩도 나오고 말조개 같은 큰 조개도 나오고
발바닥에 무언가 꿈틀거려서 끄집어내보면 살아있는 모래무지였다
미호천 강물에는 재첩이 많아도 이맘 때 우리 동네 어른들은
논에서 농약을 치거나 피사리를 하고 밭에서는 잡초를 제거하는 등 농사일이 바빠서
재첩을 잡으러 강으로 나올만한 시간 여유가 없었다
가을밤에는 하천부지에서 잘 익은 수수 모가지를 잘라다가
새끼줄에 50cm 간격으로 매달아 강물에 담가놓고 한 시간쯤 지난 뒤
물속으로 들어가서 새끼줄을 들어 올리면 수수모가지에 참게가 붙어서 뜯어먹고 있다
참게가 수수를 한 번 물면 잘 놓아주지 않기 때문에 다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떼어내야 했다
참게를 마구 잡아 떼어내다가 팔이나 다리가 한 쪽 떨어져 나가면
시장에 내다 팔 때는 헐값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밤새도록 잡으면 가을 철 어떤 날에는 아주 많을 잡을 때도 있었다
참게를 많이 잡을 때는 금방 죽지 않기 때문에 단지에 물을 붓고 보관하고 있다가
오일 장날이 되면 꺼내서 지푸라기로 열 마리씩 묶어서 지게에 싣고 조치원 장날
나룻배를 타고 미호천 강을 건너가 조치원 장터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특히 키가 큰 외삼춘은 민물 게를 아주 잘 잡는 선수였다
여름철 강가 하천부지에는 참외 수박 수수 등 과일을 재배하는 농가가 많았다
원두막에는 대낮부터 할아버지들이 모여서 장기를 두면서 지내시는데
밤이 되면 주로 밭주인 할아버지 혼자서 지키고 계신다
어두운 밤이 되면 알몸으로 조용히 참외 수박밭으로 몰래 기어가는데 잘 익은 과일은
과일 옆을 지나갈 때 단내가 푹푹 난다
잘 익은 수박과 참외 몇 개를 서리하면 강가로 가져가서
강물 물가 백사장에 물구덩이를 파서 담가놓고 수영을 하다가 출출해지면 물가로 나와서
수박을 깨뜨려서 먹곤 했는데 시원하고 요기도 되었다
가끔씩 어떤 과일은 안 익어서 오이 맛이 나는 것도 있었다
수박 참외 서리도 친구들 보다는 대부분 선배 형들이랑 가끔씩 했었다
가을밤에는 땅콩 밭에 몰래 들어가 땅콩을 서리하기도 했다
모래땅이라서 땅콩 농사가 너무 잘 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한 포기만 뽑아도
혼자서 실컷 먹을 정도로 땅콩이 많이 달려 나온 적도 있었다
모래땅이라서 땅콩 잎과 줄기를 포기 째 양손으로 꽉 잡고 잡아당기면 비교적 잘 뽑혀 나왔다
땅콩은 그냥 먹으면 비린내가 나서 콩띠와 밀띠처럼 불에 구어서 까먹으면 고소한 맛이 난다
그 무렵 붉은 색으로 잘 익은 수수 모가지만 잘라다가 땅콩과 함께 구워먹어도 맛이 있었다
가을에는 무 밭에서 무가 진한 초록색을 띠면서 땅위로 솟아오른 무를 발견하면
아무 밭이나 들어가서 발로 걷어차거나 손으로 잡아 당겨서 뽑아다가는
미호천 제방에 앉아서 엄지손톱으로 무를 돌려가면서 껍질을 벗겨내고
초록색 부분을 한 입 베어 먹으면 단맛도 나고 약간 매운맛도 났었다
이렇게 해서 무 2~3개를 먹고 나면 배도 부르고 입안에서 꺼억꺼억 소리와 함께 트림이 났었다
무 하니까 생각나는데 겨울에는 남의 집 마당이나 텃밭에 묻어놓은 땅 구덩이에서
짚단으로 만든 마개를 빼내고 그 안 안에 들어 있는 무와 배추뿌리를 서리해서
깎아 먹은 적도 있었다
겨울 하니 또 생각나는 것은 남의 집 토끼와 친구 집 닭을 서리 해다가
얼큰한 매운탕을 만들어서 막걸리랑 먹은 적도 있었다
어린 시절 그 당시는
아이들이 참외 서리를 하다가 발각되어도 혼내주거나 그냥 봐주기도 했지만
아마도 지금은 서리하다 걸리면 시골인심도 옛날 같지 않아서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다
이보다 훨씬 더 어린 시절 용호리 소징이 마을에 살 때는
우리 집 바로 앞에 커다란 목화밭이 있었다
초여름이 가까워지면 목화밭 고랑으로 몰래 기어들어가서 목화 잎사귀와 목화 꽃 사이에 몸을 숨기고
쪼그리고 앉아서 목화 다래를 많이 서리해서 허기진 배를 가득 채웠다
목화 다래는 씹을 때 부드럽고 단맛도 나면서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여름철 목화밭에 피어난 붉은색과 하얀색 목화 꽃은 크고 정말 예쁘고 아름다웠다
나의 유년 시절은 간식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이라
옥수수 대를 낫으로 잘라서 집으로 가져와 마루에서 껍질을 벗겨내고 옥수수 대를 씹어 먹으면
옥수수 대에서 단맛도 나고 즙이 많이 나와서 갈증도 해소되는 좋은 간식거리였다
어떨 때는 보리밭에 들어가 까만색을 띤 깜부기도 먹은 적도 있었다
잘 익은 밀밭에 들어가서 밀을 훌터다가 양손으로 비벼서 껍질을 벗겨내고 오래도록 씹으면
밀 껍질은 사라지고 밀 알맹이는 찰기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껌 대용으로 씹었다
진짜 껌은 사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아주 귀해서 어쩌다 한 번씩 진짜 껌을 씹고 나면
버리지 않고 잠을 자기 전에 벽에다 붙여 놓고 다음날 아침에 또 씹으려고 찾아보면
동생이 먼저 일어나 벽에 붙어있는 껌을 떼어내서 씹고 있었다
그때는 누에를 집집마다 키우던 시절이라 주변에 뽕나무 밭이 많아서
남의 집 뽕나무 밭에 들어가서 오디도 많이 따먹었다
오디를 먹고 나면 입술이 짙은 자주색으로 물들었고 하얀 메리야스에도 오디 물이 튀기기도 했다
뽕나무 가지에는 수염이 양쪽으로 길게 달린 하늘소라는 곤충이 많이 살고 있어서
하늘소를 잡아서 집으로 가져와 마루에서 장난치며 놀기도 하였다
용호리 뒷동산에는 참나무가 많았다
참나무에는 커다랗고 검정색을 띤 사슴벌레들이 살고 있어서 잡아다가
마루에 앉아서 사슴벌레끼리 황소싸움을 시키기도 했었다
사슴벌레는 양쪽으로 엄청 큰 집게가 달려있어서 잘못 건드리면 손을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서 다루어야 했다
길 다란 소꼬리 털을 구해다가 올가미를 만들어서 오동나무에 앉아있는 매미를 잡았고
잠자리가 마당에 많이 날라 다니는 날은 가는 실에 보리밥 알을 묶어서 빙빙 돌리면
잠자리가 덤벼들어서 보리밥 알과 함께 돌고 있을 때 순간적으로 낚아채서 잡곤 했다
사냥골 우리가 소유한 커다란 산에는
산딸기가 많아서 자주 따먹고 잔대도 많아서 많이 캐먹었다
키가 작은 개암나무도 많아서 가을에는 개암을 많이 따다가 저장해놓고 망치로 두드려서 깨 먹었다
산에는 넓은 나뭇잎에 쐐기벌레가 많아서 한 번 쏘이면 피부가 벌겋게 부어올랐고
작은 벌에게 쏘이거나 풀독이 올라도 피부가 가렵고 부어올랐다
어릴 때는 아무데서나 소변을 보다가 독이 오르면 고추가 뚱뚱 부어오르기도 하였다
어른들 말씀으로는 길가에서 소변을 볼 때 지렁이에게 쏘이면 부어오른다고 하셨다
마당 끝에 있는 변소에 가보면 지독한 냄새와 구덕이도 많고
똥파리 떼가 빙글빙글 돌고 있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 집 뒷간 출입문은 가마니 거적을 매달아 두어서 들어갈 때만 들어 올리면
가마니 거적이 저절로 내려와서 요즘말로 반자동식 출입문 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집은 대 소변을 구분해서 따로 사용하였다
소변은 재를 모아두는 헛간에 커다란 옹기통이 별도로 있어서 서서 볼일을 보았고
대변은 뒷간이 따로 있어서 반자동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양쪽 발판에 앉아서
일을 보는데 발판에 발을 올릴 때는 조심해야 했다
스물두강다리 아래 유리처럼 맑고 푸른 강물 위에는
나룻배가 종일 오가며 수많은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나룻터에는 매일매일 이른 아침과 저녁나절에는 교복을 입고 조치원으로 오가는 학생들로 붐볐다
여름 철 더위를 식히러 나와서 물놀이를 하다가 저녁나절이 되면
하얀 교복에 회색바지를 입은 중. 고생 형님들과
하얀 교복에 검정 치마를 입은 여중. 여고생 누나들이 책가방을 들고 배안에 서서
사공이 노를 젓는 대로 천천히 강을 건너는 모습들이 너무 멋있게 보였으며
출렁이는 물속에도 그 모습이 비쳐서 눈앞이 아롱거렸다
조치원 오일 장날에는 수많은 장꾼들이 나루터에 몰려들어 나룻배를 타고 장을 보러 다녔다
특히 오일 장날에는 나룻배 안에 장꾼들은 물론 황소도 있었고 토끼와 닭 같은 짐승도 있었다
장꾼들 옷차림은 대부분 흰색이라서 배가 가득차면 배가 온통 하얀색으로 물속을 비치며
수영하는 우리들 곁으로 지나가곤 했었다
할아버지들은 무더운 여름에도 하얀색 얇은 긴팔 삼베옷을 입으시고 머리에는 검정색 상투와 갓을 쓰시고
쌈지에서 부스러기 담배를 꺼내서 긴 곰방대에 쑤셔 넣고 성냥불로 불을 붙이고는
하얀 연기를 내뿜으셨다
무더운 여름철이면 수영하는 아이들과 물장구치며 노는 아이들로 넘쳐나서
시끌벅적 떠들썩하였고
어른들은 얼기미를 물속에 넣고 모래를 긁어서 재첩을 건져 올리거나 모래무지를 잡았고
투망을 던져서 물고기를 잡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짝이는 금빛 모래 속에 온몸을 파묻고 찜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강변 버드나무 아래에서는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 위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강 태공처럼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스물두강다리 아래 그늘 막에는 지게에 먹을 것들을 잔뜩 지고 천렵을 나오신 어른들이
가마솥단지를 걸어놓고 진국을 우려내어 동동주와 막걸리를 마시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거나 흥겨운 노래를 불렀다
우리들은 가끔씩 천렵꾼들이 철수할 무렵에 먹고 남은 진국을 얻어먹고 수영으로 지친 기력을
회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호천 강물에서 수영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천부지 참외밭 옆길을 지나다보면
잘 익은 수박과 참외에서 단내가 푹푹 나서 뱃속에서는 꼬르륵 꼬르륵 굉음을 내면서
먹을 것 좀 달라고 아우성이다
가던 길을 멈추고 노랗게 익은 참외를 쳐다보고 있으면 원두막에서 장기를 두고 있던
할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면서 우리를 쳐다보고 계신다
우리는 머쓱해서 그냥 참외만 쳐다보고 지나쳤다
어떤 날은 재첩과 모래무지를 여러 마리 잡아서 검정색 고무신발에 넣고 손에 들고서
맨발로 걸어서 돌아온 적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모래 속에서 탄피를 여러 개씩 주어서 가져올 때도 있었는데
우리들은 탄피가 많아서 그늘진 마당에서 탄피 따먹기 놀이도 했었다
내가 어릴 때는 스물두강다리 아래 모래 속에서 탄피가 자주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스물두강다리는 전투가 심하게 벌어졌던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외삼춘은 탄피를 이용해서 목걸이를 만들어서 목에 걸고 다니기도 하였다
어떤 날은 강에서 수영하고 노는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면서 어두워지더니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지나가면서 빗물을 퍼 붓는다
잠시 후에 소나기가 멈추고 먹구름이 지나가면서 하늘이 밝아오자
저 멀리 신촌 마을 쪽 먼 하늘에는 커다랗고 선명한 오색무지개가 떠올라 장관을 이루기도 했었다
내가 더 어린 시절 용호리 살 때는 소나기가 내리고 비가 그친 다음 사냥골 우리 산에 가보면
산골짜기 꼭대기에서 미꾸라지가 꿈틀 거리고 있었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소나기가 그치고 나면 우리 집 마당에도 미꾸라지가 있었다
또 장마나 소나기가 그친 뒤에 우리 산에 가보면 죽은 오리나무에서 보라빛 버섯이
엄청 많이 자라고 있어서 버섯을 따다가 된장국을 끓이면 고기보다 더 맛 있었다
내가 조치원으로 중학교를 다닐 때 여름철 장마로 홍수가 나서 강물이 크게 불어나면
사공은 나룻배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기 때문에 배를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런 날은 내판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가거나 스물두강다리를 건너가야 했다
나는 돈이 없어서 기차는 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스물두강다리를 건너 다녔다
스물두강다리 양쪽에는 파수꾼 아저씨가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스물두강다리를 건너가기 위해서 기차철교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파수꾼 아저씨가 시계도 보고 조치원역으로 연락도 해보고
괜찮은 시간대라고 여겨지면 건너가라고 했다
처음에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기차철교를 건널 수 없었지만
바로 아래를 보지 말고 2~3미터 앞을 내려다보고 천천이 병장목을 밟고 걸어가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시나브로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빠르게 건널 수가 있었다
그 뒤로 장마철에 홍수가 나면 쭈뼛대거나 망설임 없이 두려워하지 않고 바로 스물두강다리를
건너다닐 수 있었다
긴 장마로 홍수가 나던 어느 날인가 여름철에는 선배네 형님 부엌 나무 칸에서
오래 묶은 대형 구렁이가 발견되었다
할아버지들은 큰 구렁이는 이무기가 될 거라면서 함부로 내쫓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
구렁이를 강제로 내쫓거나 죽이면
그 집에 큰 재앙이 온다면서 스스로 나가게 그냥 두라고 신신 당부하셨다
내가 봐도 구렁이는 엄청 크고 굵었는데 부엌 나무 칸 짚단 속에서 또아리를 틀고 가만히 있었다
강촌마을에는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전기가 안 들어와서 밤에는 많이 어두웠다
그 당시 날씨가 더우면 마을사람들은 철길 위로 올라가서 여름밤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철길위로 올라가면 마을보다 지대가 높아서 시야가 확 트이고 미호천에서 강바람이 불어와
시원하였으며 아주 멀리까지 막힘없이 볼 수 있었다
밤중에 철길로 올라가면 시원하기도 하고
저 멀리 조치원역 철제 탑 꼭대기에서 비추는 불빛이 밝게 빛나고 밤하늘엔 수많이 별들이
엄청나게 많이 보였다
철길 둑 밑 경사진 곳에는 수많은 개망초 꽃들이 하얗게 피어나서 바람에 흔들리면
희미한 어둠 속에서 천사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비가 그친 뒤 밤중에 철길로 올라가면 논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요란하게 들렸다
어떤 날은 반딧불이 철길 위까지 밝은 빛을 반짝이며 날아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밤하늘의 북두칠성과 오리온 별자리 위치가 크게 바뀔 때까지 밤이 늦도록
철길 위에서 더위를 식히고 놀다가 새벽녘에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은 철길로 올라오지 않으시고 넓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옆에는 모깃불을 피워놓고 커다란 부채를 연실 흔들면서 이야기를 나누셨다
나이어린 아이들은 할머니 무릎에 누워서 얇은 삼베 이불을 덮고
할머니가 저어주는 부채바람과 이야기 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자고 있었다
마당 한 가운데 멍석으로 모여든 아줌마들은 대부분 부채를 천천히 저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삶은 감자를 굵은 소금에 찍어서 드시고 고구마 줄거리로 만든 김치 국물을 마시거나
삶은 옥수수를 드시고 계셨다
이야기 중에는 바깥양반이 지난밤에 술에 취해서 돌아오다가 저수지 근처에서 도깨비한테 홀려서
밤새도록 제자리에서 헛바퀴를 돌면서 고생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동네 형님들은 여름철 밤마다 철길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옛날 노래를 많이 불렀다
기차가 올 때는 내판 쪽에서 출발 전에 미리 기적소리가 울리거나 조치원 쪽에서 기적소리가
밤하늘에 메아리를 쳐서 기차가 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철로 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위험하지는 않았다
기차가 오면 미리 철길 옆으로 피해 있다가 기차가 느린 속도로 덜커덩 거리면서 지나가면
바람이 일어나서 매우 시원했다
그 당시 밤중에는 기차가 아주 드물게 어쩌다 한번 씩 다닌 것 같았다
아주 드문 경우인데 어떤 날 밤에는 군 입영 열차가 지나가다가
일부러 강촌 마을에 임시로 정차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우리 마을 사람들은 너도나도 바케스나 양동이에 시원한 우물물을 길어다가
열차 창문으로 빡빡머리 청년들에게 물을 한 바가지씩 건네주면서
군대 잘 다녀오라고 말을 건네주었다
입영 열차 안에서는 시원한 물을 얻어먹은 청년들이 먹던 빵이나 과자를
우리에게 던져주는 경우도 있었고
피우던 담배나 먹고 남은 껌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군입대자들이 열차 안에서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빵이나 껌은 평소에는 먹어볼 수 없는 귀한 것들 이었다
입영 열차는 임시열차로 열차 안에는 모두가 군에 입대하는 청년들로만 가득 찼는데
어떤 때는 아주 오랫동안 마을 앞에서 머물러 있다가 출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 찾아와서 밤에도 열대야가 계속되자 사람들은 밤이 깊도록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루는 어린 시절에 잠이 안 와서 동네 형들이랑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반딧불을 잡아서
대낮에 밀집으로 엮어서 만든 여치 집에 집어넣고 다니는데
어느 집 마루에서는 아줌마와 여자 아이들이 모여서 봉선화 꽃과 잎을 뜯어다가 백반을 섞은 다음
절구통에 넣고 찧어서 통째로 손톱에 올려놓고는 풀잎으로 감싸고 실로 묶어서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이고 있었다
늦은 밤이 되자 동네 우물가에는 여자들끼리만 모여서
등목도 하고 물을 퍼부으며 떠들고 야단법석 이었다
우리는 나뭇잎이 빽빽하게 우거진 향나무 울타리 밑에 몸을 숨기고
조용히 앉아서 나무 틈사이로 여자들이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전기가 안 들어오던 시절이라
별빛이 있어도 희미한 형체만 보일 뿐 목욕하는 여자들이 누군지는 알아볼 수 없었고
펌프로 퍼 올린 물을 뒤집어 쓸 때마다 차가워서 몸부림치는 소리만 들렸다
지하에서 퍼 올린 물이라 차가운 물을 바가지로 퍼 담아서 머리에 부으면
너무 차갑다고 팔딱팔딱 뛰면서 고함을 질러대는데
조용히 쳐다보고만 있어도 그 모습들이 너무너무 재미 있었다
남자들은 날씨가 더우면 대낮에도 웃통을 벗고 샴에서 등목을 했는데
여자들은 늦은 밤에만 우물가에 여럿이 함께 모여 호들갑을 떨면서 목욕을 했었다
폭염이 아주 심한 날 외할머니는 대낮에도 더위를 참지 못하고 부엌 안에다 물을 길어다 놓고
부엌문을 잠가버리고 혼자서 목욕을 하셨다
한 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가끔씩 아이스케키 장수가 와서 소리를 지르며 동네 골목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
우리는 돈이 없어서 아이스케키를 사먹는다는 것은 언감생신으로 일찌감치 포기하고
아이스케키 장사 아저씨 뒷 꽁무니만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구경만 하였다
그러다가 동네 형이 멀쩡한 대나무 우산을 주고 앙꼬아이스케키 하나를 사면
우리는 침을 흘리면서 그 형이 먹는 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씨 착한 형은 한 번씩만 빨아먹으라고 아이스케키를 우리들 입에다 대어준다
그러면 우리는 돌아가면서 한 번씩 빨아먹는데 그 맛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맛이다
나는 요즘도 그와 비슷한 비비빅 아이스케키라는 것을 사다가 냉동실에 가득 채워놓고
어린 시절 추억을 떠 올리면서 천천히 맛을 음미하고 있다
나는 그 당시 돈이 없어서 아이스케키는 사먹지 못했지만
시원한 우물물을 아주 맛있게 먹은 적은 있었다
우리 동창생 안종선네 집에는 박하농사를 많이 지어서 박하기름을 짜는 설비가 있었다
나는 종선이 친구 사랑방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깊은 우물물 속에서 두레박으로 퍼 올린 시원한 물을 큰 대접에 담고 사카린 2~3개를 넣고
박하기름 한 두 방울을 떨어뜨린 다음 저어서 마시면 시원하고 상쾌한 맛이 온몸 뼛속까지
파고드는 것처럼 개운했다
단맛과 박하향이 나는 시원한 우물물은 그 당시 최고의 음료수였다
연동초등학교 정문 가게에서도 비닐봉지에 담겨진 오렌지색 단물을 팔고 있었는데
돈이 없어서 구경만 하고 한 번도 사먹은 적은 없었다
용호리 살 때 여름에는 땀을 많이 흘려서 어지러운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엄마는 조그만 오자미 자루에 소금을 담아서 주시고는
들고 다니면서 땀을 많이 흘리면 오자미에서 소금을 꺼내먹고 우물물을 마시라고 하셨다
나는 마을을 빠져나와 고추잠자리를 잡으러 돌아다니다가 땀을 많이 흘릴 때는
오자미에서 소금을 꺼내서 입에 넣고 옹달샘에 엎드려서 물을 먹곤 했다
산모퉁이 옹달샘은 아주 작은 웅덩이지만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물로 맑고 시원해서 물맛은 최고였다
내가 살던 강촌에 무더운 여름밤이 되면 주변에 논과 밭에 풀이 많아서 모기가 엄청 많았다
종선이 친구처럼 부잣집은 그 당시에도 모기장이 있었다
마루에 모기장을 설치하고 그 안에서 잠을 자는 종선네 식구들이 무척 부러웠다
그 당시에도 모기약은 있었다
소주병 같은 곳에 모기약 원액이 들어있었는데 빨대를 대고 입으로 불면
모기약이 안개처럼 품어져 나와서 방안과 비름박 벽에 뿌려놓고 문을 닫고 마당으로 나오곤 했다
초저녁에 입으로 불어서 방안에 뿌려놓고 밖으로 나와 있다가 잘 때쯤 되어서 방안으로 들어가면
아직도 모기약 냄새가 진동했고 모기는 많이 죽어 있었다
소주병 같은 모기약이 있어서 그나마 많은 모기를 없애고 잘 수 있었다
동네 어른들은 마을 하수구 물속에 모기 유충이 보이면 석유를 부은 다음 유막이 형성하여
유충이 숨을 쉬지 못하게 해서 제거하셨다
미호천 하천부지는 미꾸지 마을 근처부터 시작해서 강촌을 지나 신촌 마을까지
광활한 지역으로 아주 넓게 퍼져 이어졌는데
기름지고 비옥한 땅 하천부지에는 참외 수박 고추 땅콩 수수는 물론이고
길이가 길쭉한 단무지용 무와 배추 등등 모든 농작물들이 풍성하게 잘 자라서
주변에 사는 농민들에게는 큰 수확의 기쁨을 안겨주는 풍요로운 땅 축복의 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미호천 강물 속에는 메기 잉어 붕어 모래무지 강미꾸라지 재첩조개 말조개 참게 새우 등등
수많은 물고기들이 매운탕 애호가들과 낚시꾼에게 기쁨을 주었고
겨울에는 수많은 철새들이 날라들어 물고기를 실컷 먹고 쉬었다가 기력을 보충하고 돌아 갈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로운 강 은혜로운 강 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스물두강다리 아래 소리 없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에 오가던 나룻배와
오일 장날 배를 타려고 몰려든 수많은 장꾼들도 사라진지 오래 되었고
하얀 교복을 입고 통학하던 수많은 중.고생들도 나루터에서는 볼 수가 없다
물놀이로 넘쳐나던 아이들과 천렵을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던 자리에는 모두들 떠나가고
이제 남은 것은 인적 없는 적막감과 고요함 뿐이다
온갖 곡식과 채소들이 풍성하게 넘쳐나 사람과 짐승과 새들은 물론
온갖 생명체들을 살찌우게 해주었던 기름진 땅 미호천 하천부지
그 하천부지를 나라에서 강제로 회수하여 군사훈련지역으로 변경 된 이후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자
농민들은 하천에 있던 수많은 농경지를 잃어버렸고
지금은 하천부지 주변이 잡초만 무성한 채 허접하고 쓸모없는 불모지가 되어버렸다
가끔씩 하천부지 잡초 안에서 살고 있는 고라니가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
강촌마을 안쪽까지 들어와서 사람들이 애써서 힘들게 가꾸면서 키운 채소밭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농작물까지 큰 피해를 준다고 한다
최근 들어서 언젠가 스물 두강다리 건너편 농어촌공사 양수장 앞을 지나다가
차에서 내려 어린 시절 추억이 서려있던 곳들을 둘러보았다
스물두다리 아래 맑은 물속에서 수영하며 재첩과 모래무지를 잡던 장소이자
나루터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는 물막이 벽을 만들어서 강물은 고여 있었고
물고기 이동이 어렵게 된 구조여서 생태계가 파괴되지 않을까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게다가 강 상류에는 물을 많이 사용하는 제지공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강물은 오염되어서 탁하고 흐린 색을 띠고 있었으며
물막이 벽에서 고인 물이 낙하하는 지점에는 하얀 물거품이 일어나고 있었다
예전에 흔했던 물고기와 재첩은 사라진지 오래된 것 같고
설령 이곳에서 물고기를 잡는다 해도 오염되어서 먹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물가로 가보지는 않았지만 만약에 가까이 가서 본다면 악취도 날 것만 같아보였다
만대불변하고 영영무궁할 것만 같았던 아름다운 미호천 강변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 수많은 아이들이 몰려들어 물장구치며 소리 지르고 떠들며 놀던
스물두강다리 아래 맑은 미호천 강변^^
이제는
맑고 푸른 강물 위에 나룻배를 띄워놓고 노를 젓던 사공의 모습도 사라져 버렸고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찼던 젊은 날의 청춘도 사랑도 강물 따라 세월 따라 흘러가버렸고
지금은 모두가 지나가버린 아득히 먼 아름다운 옛 추억이 되어버렸다
미호천이 오염되기 전 내가 어린 시절에 만약에 유능한 음악가였더라면
독일의 요한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곡보다 더 아름다운
“미호천 푸른 강물”이라는 곡을 만들었을 텐데 아쉽다
문득 유럽 쪽에 위치한 아름다운 강들이 떠오른다
독일의 도나우강, 프랑스 세느강, 영국 템즈강,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강들이 그것들이다
그래도 나는 어린 시절부터 늘 보고 함께 했던 맑은 미호천 강이 가장 친숙한 느낌이 든다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가버린 날들의 연속이지만 세월이 더 많이 흘러가도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다시 태어나도 그 옛날 아름답던 미호천 강변의 추억은 그리움만 더 할 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자라면서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슬픔도 삶의 고통도 모든 것들과 함께 했던 스물두강다리
찌든 가난으로 학교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위축된 마음 그리고
상처받고 괴로워서 고통스럽게 퍼덕이며 공중을 떠돌고 있는 내 마음에
마음의 평안과 안식처를 가져다 준 미호천 강가의 붉은 저녁노을
모든 것들이 부족했던 삶 때문에 엄마 걱정 동생들 걱정으로 마음을 짓누르고 가슴이 답답할 때면
미호천 제방에 홀로 앉아 말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거나
서쪽 하늘에 떠있던 하얀 구름이 저녁노을에 소리 없이 붉게 물들었다가 해가 서서히 기울면서
땅거미가 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슬픈 내 마음도 위로가 되었던 곳이다
내가 어린 시절
‘프란다스의 개‘의 주인공 네로처럼 가난과 슬픔으로 실의에 빠져있을 때
어머니의 포근함처럼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준 미호천 푸른 강물
내가 사춘기 시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성격이 비루해져 있을 때도
스물 두강다리 아래 금빛 백사장 주변들은 나를 안아주며 오아시스처럼 그늘도 되어주었고
목마른 나에게 생수를 공급해 주는 친구이자 다정한 연인이 되어주기도 했다
내가 자라는 매 순간마다 견딜 수 없는 위기가 찾아와서
나의 모든 희망이 타버리고 녹아내린 양초처럼 꺼져갈 때도
새로운 심지가 되어 불씨를 다시 살아나게 해준 것도
미호천 강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다
모진 비바람과 된서리가 내리는 자리마다 마음이 차갑고 아파와도
저기 흘러가는 푸른 강물은 알알이 맺힌 고운 진주알처럼 아롱지며 따사로운 마음으로
나를 위로해주었다
내 마음에 늘 허전함과 공허함으로 텅빈 빈자리를 가득히 채워준 나룻배와 노를 젓는 사공의 노래
내가 어린 시절부터 청년이 되어 직장을 갖기 전까지 나는 1933년 대공황 극단의 시대처럼
온통 삶의 무게로 찌부러지고 얼룩진 고통의 울타리 안에서 몸부림 칠 때도
저기 흘러가는 강물은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고 위로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눈꽃 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고 꽃을 피우는 복수초처럼 혹한기와 같은 처참한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날 수 있었으며
길모퉁이에 내팽겨져 사람들과 짐승들의 발부리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면서도
죽지 않고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새싹을 틔우며 꿋꿋하게 자라나는 질경이와도 같이...
돌부리에 부딪히고 넘어지고 쓰러져도 포기하지 않고 오뚜기처럼 우뚝 일어설 수 있게 해준 것도
바로 미호천 강가 주변에 있는 것들 이었다
내 가슴속엔 늘 삶의 무게로 짓눌려 고통스럽고 어두울지라도
마음의 꽃밭에는 늘 꽃씨를 뿌려놓고
생존본능에 충실하며 강한 생명력을 싹틔우려고 온갖 시련과 인고의 나날들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도 미호천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나의 어린 시절 성장기는 아버지를 잃고 나서 아름답고 평화로운 시절은 없었다
우선 가난이라는 총알이 씨도 때도 없이 소나기처럼 날라 들어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와도 같은 삶 그 자체였다
나는 젊은 날의 사랑과 낭만도 모르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초지일철 깡으로 버티고 살았다
내 마음은 어린 나이에 상처받고 짓밟히고 갈기갈기 찢겨져 피투성이로 얼룩져 있을 때도
저 강물은 언제나 내 곁에서 말없이 내 마음을 치유해주고 나를 지켜주었다
나는 신경이 예민하던 고교시절에 좌절하고 실의에 빠져 고독하고 외로울 때는
늘 이곳 미호천 제방에 홀로 앉아 강 건너 석양에 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나와 처지와 똑같은 천상병 시인의 시를 음미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곤 했었다
천상병 시인은 모든 환경과 조건들이 나와 너무나 닮은 점이 많아서 그의 시를 접할 때마다
동병상련과 연민의 정을 느낄 때가 많았다
미호천 강변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가 나와 함께해 준 내 삶의 친구들이자 동반자이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나를 버티게 해준 소중한 인연들 이었다
나룻배는 단순하게 강물을 오가는 배가 아니라 나에게는 청운의 부푼 꿈을 가득 싣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주는 마음의 등불이기도 했다
목마른 내 영혼에 맑은 생수로 가득 채워주며 은혜로운 강물이 되어 준 고마운 미호천
푸른 하늘 저 멀리 흰 구름은 둥실둥실 떠나가고
출렁이는 강물 위에 붉은 빛 진주 같은 너울로 아롱지다가 태양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고요함이 찾아오는 미호천 강가에 서서 나는 지나간 옛일들을 회상해본다
그 시절 옛일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옛 향기가 아직도 그대로 풍겨 나오는 것만 같다
지나간 추억들은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아름답게 그려주는 색연필과 같다
지금도 내 마음 속에는 어린 시절에 푸르고 아름답던 미호천 강물이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
글쓴이 강 용규
첫댓글 임준수 사무총장님
부족한 글이지만 제 글을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다른 친구님들 소식도 많이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