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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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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인방 스크랩 장애와 사람 그리고 행복
코난^^::: 추천 0 조회 182 09.04.17 23: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과학과 의료의 발전으로 인간의 평균 수명이 80세라고 합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80년, 그 과정속에서 사람은 누구나가 한번쯤  고민하는 것이 "나는 왜 태어낳을까?" 그리고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일 것입니다.  그 밑바탕은 결국 자신이 만족하며 사는 삶, 바로 "행복"을 찾기위한 고민과 과정일꺼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인 운동을 통해서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정신적인 지식을 통해서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부를 통해서 성공하기를 꿈꾸지만 어떤 사람은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게 성공하는 삶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사람은 누구나가 행복을 추구할 권리, 바로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많은 우여곡절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장애"입니다. 장애라는 것은 선천적인 경우도 있지만 산업화된 현대의 사회로 인한 후천적인 장애가 90%를 차지하고 있기에 살다보면 언제 어느때 사고로 인해서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도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장애"는 불행입니다. 하지만 불행하다고 해서 "행복을 추구할 권리"마저 없어 질까요? 장애인이 되었다고 해서 평생 불행하게 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장애인도 꿈이 있고, 그 꿈을 위해서 노력하고,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로 "성공"하고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저의 글재주가 부족하지만 장애인의 삶이 행복하면, 여러분의 삶이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니 조금 긴 글이지만 끝까지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강영우(65)박사와 아들 강영진씨

강영우박사, 이분은 중학교 1학년때 축구를 하다가 친구가 찬 공에 눈을 맞아 실명하여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좌절하지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연세대를 졸업하고, 1972년 미국으로 건너가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 석ㆍ박사 학위를 받고 일리노이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1년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에 임명되어 미국 이민 100년 역사상 최고위 공직에 오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더 놀라운 것은 그분의 두 아들이 현 오바마정부인 백악관에서 큰아들 강영진(32)씨는 대통령 입법보좌관으로 작은아들인 강유진(25)씨는 대통령 특별보좌관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 미국 존스홉킨스대 병원 재활의학과 이승복(45)박사

 슈퍼맨 의사로 유명한 이승복박사, 이분은 아버님이 더 나은 삶을 위해 가족이 73년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같습니다. 이민후 우연히 들린 동내 YMCA에서 체조를 배우게 되었고,  17세때에 미국 올림픽 예비선수로 선정되면서 유망한 체조선수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더욱 더 열심히 연습에 매진하던 어느날 회전 연습도중에 회전을 너무 빠르게 하여 바닥에 턱을 부딪치며 경추 6,7번 사이의 신경이 손상되어 전신마비의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1983년18세의 나이, 올림픽의 금메달을 꿈꾸던 체조 유망주에서 한순간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전신마비의 장애는 그를 좌절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받으며 겪어야 했던 좌절과 반항, 그러나 1년후 그는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장애를 받아 들이기를 결심했고, 결심한 순간부터 마음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새로운 도전,  퇴원후 우연히 뉴욕대의 재활병원을 세운 하워드 러스크 박사의 자서전 <돌봐야 할 세상(A World to Care for)>을 읽게 되면서 의사의 꿈을 갖게 되었고 하루 종일 공부에 매달리며 입시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1984년 뉴욕대 입학, 문학전공, 1988년 뉴욕대 졸업, 1991년 콜럼비아대 보건대학원 졸업(공중보건학 석사), 2001년 다트머스 의대 수석 졸업, 2002년 하버드의대 인턴과정 수석 졸업, 2005년 존스홉킨스대 병원 레지던트, 2005년~현재 존스홉킨스대 병원 수석 전문의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 뉴욕시 형사법원 정범진(42)판사와 부인 이수영씨

 현재 뉴욕시 형사법원에서 판사로 일하고 있는 정범진판사, 이분의 가족도 72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조지 워싱턴대 법과 대학원 2학년때인 1991년 기말고사를 마치고 부모님이 계시는 댈러스로 가던 중 교통사고로 전신마비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이후 병원에서 힘든 재활치료를 받고 퇴원하여 다시 법과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사법시험에 합격, 1992년부터 브루클린 검찰청에서 검사로 근무하게 되었고, 2000년에 최연소 부장검사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5년, 6개월간 이루어진 인사청문회, 시장 임명 동의, 변호사협회 청문회, 공청회 등의 절차를 거쳐 300여명의 후보 가운데 3명을 뽑는 뉴욕시 판사로 최종 확정돼어 형사법원 영구직 판사가 되었습니다.그리고 2004년 9월에는 국내 텔레비전 토크쇼 출연을 계기로 알게 된 발레리나 출신 벤처기업 경영자인 이수영 전 이젠 사장과 결혼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강영우박사의 사연은 1994년 MBC 창사특집극 "눈먼 새의 노래"로 알려졌고, 이승복박사와 정범진판사는 KBS 인간극장으로 국내에 알려져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국내 언론사에는 장애인에게 용기와 희망의 상징으로 기사화 되었습니다.  글을 쓰는 저도 이승복박사와 정범진판사처럼 사고로 인해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누구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기사를 보았습니다.

 

중증의 장애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 일하는 모습은 누가봐도 대단하며 존경의 대상이 되고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사에서 처럼 장애인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해준다는 말이 저에게는 좌절감이 드는 건 왜 일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분들이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이 아니라 어렸을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이기 때문입니다. 엄연히 따지면 미국인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그분들이 중증의 장애인이 되었어도 성공하고 존경받을 수 있는 이유, 그것은 미국의 법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는 ADA법때문입니다. ADA법은 우리나라로 치면 장애인복지법과 마찬가지입니다. ADA법에는 장애로 인해 모든 분야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명시되어 있으며 차별을 받았을 경우 법으로 인해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도록 강력히 재제합니다. 그리고 취업에 있어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능력이 동등하면 약자인 장애인을 우선적으로 채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두번째는 미국 병원의 재활시스템입니다. 정범진판사가 다시 법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 육체적인 재활치료뿐만 아니라 다시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사회복귀 재활까지 병행합니다. 정법진판사는 전신마비장애인이 되었을 때 좌절로 인해 다시는 사회에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담당의사가 당신처럼 사고로 전신마비의 장애인이 된 사람이 다른 주에서 검사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그 길로 그는 그분을 만나고 용기를 얻어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지금의 판사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이승복박사 또한 병원에 입원해 있을때 교육프로그램으로 병원에서 지원해 주는 교사가 있어 재활치료를 받으며 공부까지 하게 되었고, 퇴원후 바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세번째는 중증장애인을 위한 자립생활지원제도입니다. 중증장애인 자립생활지원제도는 혼자서는 사회활동을 할 수 없는 장애인에게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제도 입니다.  예로 정범진판사가 병원에서 퇴원해 대학에서 공부하고 검사에 임용되어 출퇴근을 할때 정부에서 활동보조인을 지원해줍니다. 활동보조인도 몇가지 분야로 나눠서 지원되며 아침에 침대에서 일으켜 주고 씻겨 주고 옷 입혀 주어 출근을 도와주는 사람, 출퇴근 길에 차량을 지원해주는 사람, 직장에서는 업무를 지원해 주는 근로보조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시 건강상태를 체크해주는 간호사까지 신청만하면 바로 지원이 됩니다. 또한 자신이 일하는 곳에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이 되어있지 않거나 불편해 건물 관리인에게 말하면 그 즉시 편의시설을 만들어 주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제도로 인해 전신마비라는  중증의 장애인도 사회로 나와 혼자서도 살 수 있으며 자신의 능력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차별받지 않고, 사회 여러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단지 미국이 돈이 많아서 일까요? 아닙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장애인의 90%는 선천적이 아닌 사회의 발달과정에서 생기는 사고로 인해 후천적인 장애가 다수를 차지합니다. (미국의 장애인은 인구의 대략 10%를 차지함.) 이렇듯 후천적인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장애를 입기에 미국사람들의 의식은 자신도 살아가면서 언제든지 사고로 인해 장애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장애인에게 지원되는 제도는 결국 자신이 장애인이 되었을 때 받는 혜택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도의 지원이 무엇을 근거로 할까요?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 그 권리를 위해 사회적 환경의 편의시설과 제도를 지원해 줌으로서 비장애인과 동등한 선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동등한 조건을 만들어 주어도 사회로 나와 성공(?)하기위해서는 비장애인보다 두세배의 노력이 더 필요합니다.    

 

오바마가 흑인이라는 편견을 깨고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을 때 전 세계 사람들은 그 순간을 감동하고, 희망을 보았다고 합니다. 미국 사회에서 장애인의 역활도 그러합니다. 동등한 조건을 만들어 준다고 하지만 인종과 장애를 넘어 노력하고 또 노력하여 차관보에 오른 강영우박사, 그리고 정범진판사와 이승복박사, 이분들 또한 오바마대통령처럼 미국 사회에서 의지의 미국인, 존경받는 미국인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비장애인들에게 "저렇게 중증의 장애인도 노력하며 열심히 살고 있구나!" 라는 자연스러운 의식에 힘들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의 모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중증장애인의 삶은 어떠할까요? 우선 한국에서 전신마비장애로 활동하고 계시는 몇분을 소개합니다. 

 

▲ 하버드대 행정대학원 졸업 당시 이일세(47)대표

  현재 열린세상운동본부 대표로 있는 이일세씨, 이분은 1994년 스키를 타다가 사고로 인해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고, 1992년 전신마비장애로 미국으로 유학 하버드대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하버드대 입학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는 데 그 당시 입학자 중에 전동휠체어를 타고 하버드대에 입학한 사람이 이일세씨 혼자였습니다. 그러다보니 편의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수업을 받기위해 이동을 할때 계단이나 큰 문때문에 어려운 점이 있었는데 하버드대 측에서 한국에서 유학 온 이일세씨 한사람을 위해서 큰 문은 자동문으로 계단이나 책상은 편의시설로 교체하여 공부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지원해 주었고, 그 일화는 한국의 언론에도 소개되었습니다.

 

 ▲ 김종배(48)재활공학 박사

현재 국립재활원 재활연구소 재활보조기술연구과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종배박사, 이분은 20년전 카이스트 대학원 석사과정 마지막 과정을 남겨두고 사고로 경추 5번을 다쳐 전신마비의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80년대 중반 인 그당시에는 아무런 복지 지원이 없기에 다시 공부를 하기에 엄두가 나지 않아 꼬박 5년을 집에 누워서 생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5년뒤인 90년대 초에 컴퓨터를 사고, 2년뒤에는 전동휠체어를 구입하면서 컴퓨터를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전동휠체어를 타고 세상속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컴퓨터와 전동휠체어는 김종배박사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고, 그렇게 재활공학의 중요성을 알게 되면서 2001년 미국 피츠버그대학교에 유학을 가서 재활공학을 공부해 박사과정을 마치고, 피츠버그대학교 재활공학센터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을 하다가 2년전 귀국하여 서울 수유리에 있는 국립재활원 재활연구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이상묵(48)교수  

 "한국판 스티븐 호킹"으로 알려진 이상묵교수, 이분은 2006년 연구조사를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방문했다가 자동차 전복 사고로 경추 4번이 손상되어 목 이하로는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의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전신마비중에서도 중증의 장애인이 된 이상묵교수, 그런데 이분은 미국병원에서 퇴원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서울대 강단에 복직하여 강의를 하게 되었고, 그 소식은 많은 언론에 소개 되었습니다. 이상묵교수는 자신이 이렇게 중증의 장애인이 되었어도, 다시 강단에 설 수 있었던 계기가 "미국에서 치료를 받은 덕분에 음성인식 프로그램이나 특수 마우스 등 장애인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재활공학 장비들을 직접 볼 수 있어 행운이었다"고 말했습니다.


 

▲ 이상묵교수님이 사용하고 있는 재활공학 보조기기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전신마비의 중증 장애를 입었더라도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이일세선생님, 김종배박사, 이상묵교수, 이분들의 공통점은 전동휠체어를타고 미국에 유학을 다녀 왔거나, 미국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국내에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분들이 한국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니 미국에서 살고 있는 강영우박사, 이승복박사, 정범진판사가 한국에서 다쳐 한국에서 살고 있다면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2008년 10월, 강원도 춘천시에 살고 있는 지체장애 1급인 이 모(여·26)씨는 춘천에 위치한 한림대학교에서 역사학 전공을 하여 학부 4년, 석사과정 2년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그는 박사과정 입학 면접이라는 문턱에서 좌절을 경험해야 했다. 이 씨는 4.5점 만점 중 학부과정 4.07, 석사과정 4.44점으로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그러나 이 씨는 박사과정 입학을 위한 면접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에 학교 면접위원 측은 "박사학위 청구논문을 작성하려면 새로운 자료 발굴을 본인이 찾아다녀야 하는데 이 씨의 경우 그것이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데 의견이 모아져 불합격으로 판정했다"고 탈락 이유를 설명했다."  -참조 "에이블뉴스"-

 

"2007년 10월 15일 국가인권위원회 7층 인권상담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에서 해직된 안태성 교수는 "한국사회에서는 장애를 가진 교수도 장애로 인한 차별에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며 첫 마디를 꺼냈다. 안태성 교수는 자신을 태어날 때부터 청각장애로 인해 잘 듣지 못해 말도 어눌하게 됐다고 소개하지만 않았더라면 장애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다. 안태성 교수는 한쪽 귀는 아예 들리지 않고 한쪽 귀는 보청기를 끼고 들을 수 있는 청각장애 4급이다. 그런데 청강문화산업대는 안태성 교수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교수 재계약 기간을 넘겨 교수 임용에서 결국 탈락시키고 말았다."  -참조 "에이블뉴스"-

  

  

 이렇듯 한국에서는 아직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우수한 성적에도 장애라는 이유하나로 탈락시키고, 능력이 인정되어 교수자리에 올라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고 탈락시키는 사회, 그러면서도 인권위의 조직이 할 일도 없는데 인원이 많다며 축소시키는 정부,

 

이런 현실속에서 그분들이 한국에서 살았다면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는 강영우박사는 어느 도시의 안마사로, 이승복박사와 정범진판사는 집에 누워서 tv를 보거나 인터넷을 하며 웹써핑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활동하시고 계시는 분들 또한 열심히 활동하고 있지만 어려운점이 많습니다. 이상묵교수님을 예로 그분이 서울대에서 교수로 활동하기 위해 쓰는 보조기기는 전동휠체어와 전동휠체어에 부착된 각종 보조기기, 그리고 이동을 위한 차량과 차량에 부착된 전동휠체어리프트등의 각종 보조기기들을 구입하려면 대략 1억원 가까이 들며, 현재 정부에서 활동보조인을 지원해주고 있지만 월 100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으로 추가비용은 자부담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전동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편의시설의 부족으로 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상묵교수님은 "그나마 미국에서 다쳐 미국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덕분에 다양한 재활 보조공학기기를 알게 되었고, 그로인해 다시 강단에 설 수 있어서 행복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그 말에 공감합니다. 어쩔 수 없는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다하더라도 장애로 인해 평생을 집 밖에도 나오지 못하고 누워서 산다면 어떤 심정일지 여러분도 알겁니다.

 

그런의미에서 장애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의 변화와 제도적 지원입니다. 앞서 보셨듯이 육체적 장애가 아무리 심해도 교육을 받거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육체적인 장애가 아니라 사회적인 환경의 장애로 인해서 교육을 받고 싶어도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매년 4월20일은 장애인의 날입니다. 장애인의 날이 되면 정부와 지자체는 장애인을 위한 각종 행사를 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장애를 극복하고 열심히 산다고 "장애극복상"을 수여합니다. "어려운 환경"을 알면서도 장애를 스스로 극복했다며 주는 상, 그리고 365일중 단 하루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라며 자원봉사와 함께 나들이를 시키는 날이 바로 한국식 장애인의 날입니다.

 

저는 반대로 장애인의 날이 장애인을 위한 날이 아니라 장애가 없는 비장애인들이 365일 중에 단 하루 장애인이 되어보는 장애체험의 날로 장애인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이 왜 필요한지를 직접 체험해 보며 느낄 수 있는 날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만일을 위해서 보험을 듭니다. 편의시설 또한 마찬가지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이 만일의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을때 다시 사회로 나와서 편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보험과 같습니다. 또 다른 예로 자동문을 개발한 이유가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 문을 열고 닫기가 어려운 것을 보고 편의를 위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장애가 있던 없던 누구나가 편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편의시설과 보조기기는 자동문과 마찬가지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누구의 도움도 받지않고 여러분과 동등하게 사회활동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장애인들이 열심히 노력하여 존경을 받느냐 아니면 평생을 노력해도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되느냐는 육체적인 장애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회적인 환경의 장애가 더 문제라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동등한 조건속에서 장애인도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 대한민국의 장애인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이것 하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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