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점] 붉은 꽃
대학으로 돌아가는 도오루와 함께 나쓰에도 삿포로로 떠났다. 결혼할 때까지 삿포로에서 자란 나쓰에가 오랜만에 삿포로에 가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카기는 개업한 후로는,
“임산부들은 왜 하필이면 의사가 쉬고 싶어할 때만 골라서 아이를 낳는지 몰라.”
하고 한탄할 정도로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분주했기 때문에 아사히가와에는 발길을 뚝 끊어 버렸다. 따라서 나쓰에가 다카기를 방문한다는 것도 삿포로에 가기 위한 좋은 피예거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은 나쓰에는 기타하라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나스에는 기타하라가 자신에게 보여준 친절 때문에 아름다움과 젊음에 대해 자신을 되찾게 되었다. 지금 나쓰에는 다시금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안 계시니 얼마나 가엾은지 몰라.”
나쓰에는 이렇게 말하고 기타하라의 잠옷과 양말까지 챙겨서 삿포로를 향해 떠났다. 그 날 중으로 돌아오겠다던 나쓰에는 밤 여덟 시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요즘은 일찍 돌아오던 게이조도 웬일인지 오늘은 아직도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18헥타르도 더 되는 거대한 숲의 적막감이 그 옆에 있는 쓰지구치 집에까지 파급되었는지 집안은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마저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일까. 그처럼 명랑하던 요코도 게이조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누르는 것도 어쩐지 불안했다. 텔레비전에 나온 인물이 슬그머니 화면에서 빠져 나올 것만 같아싿.
야무져 보이는 요코도 여고 1년생인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읽고 있던 카뮈의 <페스트>에 간신히 열중하기 시작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요코?”
나쓰에의 목소리였다.
“혼자 집 보느라고 애쓰는구나. 아버진 들어오셨니?”
들뜬 목소리였다.
“아, 엄마! 아버진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그래? 그럼 내일 밤에 돌아간다고 전해 줘. 지금 다카기 씨 댁에 있어.”
“여보세요, 요코?”
느닷없이 도오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를 통해 들으니 게이조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오빠도 같이 있어?”
“응.”
도오루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듯,
“.......잘 있어.”
하고 불쑥 말했다. 이어서 다카기의 커다란 목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요코, 많이 컸니? 마냥 글래머가 되어야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 요코가 아직도 초등학생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다음에는 요코도 삿포로에 한번 오려무나. 아저씨는 날마다 어린아이를 이 세상에 맞아들이느라 바빠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단다. 뭐 갖고 싶은 건 없니? 아저씨도 이젠 약간 부자가 되었거든. 참, 아버진 아직 안 돌아오셨니?”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 놓더니 갑자기 다카기는 목소리를 낮췃다.
“곧 나타날 거야. 암, 좋은 사람이 나타나고말고 요코가 부럽구나!”
“싫어요, 아저씨, 그런 말씀.”
요코의 말에 다카기는 크게 웃었다.
다카기의 수다스러운 전화가 끊기자 집안이 더욱 고요해졌다. 게이조는 열 시가 지나서야 돌아왔다.
“요코 혼자서 집을 보았니? 쓸쓸했겠구나.”
게이조가 욕의로 바꿔 입으면서 말했다.
“혹시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서 빨리 오려고 했는데 그만 이렇게 늦었구나.”
게이조는 피곤한 얼굴이었다.
“저녁 식사는요?”
“글쎄 말이다. 별로 생각이 없어. 우유가 있으면 비스킷이나 먹어 볼까?”
“비스킷요?”
“응, 그런게 좋아.”
게이조는 한동안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더니 이렇게 말했다.
“실은 말이야, 환자가 자살했어. 그래서 집에 전화할 시간도 없었던 거야.”
“어머, 자살요? 심각한 병에 걸렸나봐요.”
“아냐, 내일 퇴원할 예정이었던 환자야. 의사 노릇을 한 지 20년 가까이 되지만 퇴원을 앞두고 자살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게이조는 비스킷을 입에 넣었다.
“어머, 병이 다 나았는데 자살하다니......”
정말 그랬다.
환자는 스물여덟 살의 청년이었다. 병은 가벼운 폐결핵으로 공동도 없었다. 은행원으로 복직도 결정되어 있었다. 부모님도 다 계시고 3형제 중 둘째로,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이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환경이었다.
그는 1미터 67센티미터의 키에 약간 마른 편이었으나 연약한 인상은 주지 않았다. 요양하는 태도도 지극히 얌전했고, 병세가 가벼운 환자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무단 외박이나 술을 마시는 일도 물론 없었다.
게이조는 나쓰에가 돌아오지 않으면 요코가 혼자서 집을 봐야 하니 가엾은 생각이 들어 일찍 퇴근하려고 했다. 막 가운을 벗으려고 하는데 구내 저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응급 환자가 아니면 왕진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수화기를 들었더니 결핵 병동의 간호부장 오치 가즈에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장님이시죠? 2호실의 마사키 씨가 방금 옥상에서 뛰어내려......”
“뭐요? 마사키라면 마사키 지로 말이오?”
“네, 마시키 지로 씨요.”
“내일 퇴원하기로 한 마사키? 틀림없소?”
“틀림없어요.”
게이조는 막 벗으려던 흰 가운을 다시 걸치고 원장실을 뛰쳐나왔다. 환자는 즉사했다.
게이조는 마사키의 죽음에 대해 짚히는 데가 없지는 않았다. 마사키는 병이 차차 나아감에 따라 말수가 적어졌다.
복직이 결정되고 퇴원할 날이 잡혔는데도 어쩐지 시큰둥한 얼굴로 멍하니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좋아하는 간호사라도 생겨서 퇴원하는 것이 섭섭해서 그러는 건 아닐까 하고 게이조는 마사키를 원장실로 불렀다. 1주일 전의 일이었다. 만일 마사키에게 좋아하는 여성이 있다면 1년 후쯤에는 결혼해도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원장실에 들어 온 마사키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군. 어디 아픈가?”
“아픈 데는 없습니다.”
“그런데 침울해 보이는걸.”
“시시합니다. 모든 게.”
“왜? 실연이라도 당했나?”
게이조의 말에 마사키는 히죽 웃엇다. 싸늘한 웃음이었다. 게이조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썰렁해졌다.
“실연이라도 당했다면 차라리 좋겠습니다. 저는 제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병은 완전히 나았겠다, 직장에도 돌아갈 수 있겠다, 이제부터가 아닌가?”
“아닙니다. 선생님. 병들어 있을 때는 치료해야겠다는 목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병을 완전히 치료한 지금에 와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군요.”
마사키는 절망적인 눈빛을 나타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니, 일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일이라구요? 선생님, 그게 대체 뭡니까? 저는 6년동안 주판알을 퉁기고 돈만 세면서 열심히 일해 왔어요. 하지만 그런 일은 기계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요새 울적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제가 병들어 2년 동안 직장을 쉬어도 은행은 조금도 지장을 받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동안 지점이 둘씩이나 늘어 더욱 번창하고 있어요. 제가 쉬든 일하든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요. 그러니까 저의 존재 가치는 제로예요. 그런 제가 직장에 돌아간들 무슨 기쁨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게이조는 그때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하며 그냥 웃어 넘겼다. 그 마사키가 오늘 자살한 것이다. 누구에게라고 딱히 대상을 지정하지 않은 유서에는,
‘결국 인간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사키 지로를 꼭 필요로 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는데 어물쩍 살아간다는 것은 치욕이다.’ 라고 씌어 있었다.
요코는 게이조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 사람 역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거야. 만일 그 사람을 누군가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과연 죽으려고 했을까?’
요코는 그 사람의 죽음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난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이조는 소파에 누우면서 말했다.
“아버지는 마사키 군의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줄 수 없었다고 생각했어. 마사키 군은 영혼의 병을 앓고 있었어. 난 육체의 병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마음의 병에는 무관심했어.”
게이조는 씁쓸한 표정으로 요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설마 마사키 군의 마음의 병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기침에는 기침약을, 결핵에는 마이신을 쓰는 것처럼 딱 들어맞는 처방은 해주지 못했을 것 같구나.”
게이조는 요코가 자기 얘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요코에게 신경을 쓰기에는 게이조 자신이 마사키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이 너무 컸던 것이다.
게이조는 지금 자기는 대체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의사라른 직업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있는 것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신이 의사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어려움을 겪을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지금 갑자기 죽거나 병원이 폐쇄되더라도 환자들은 다른 병원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병을 고친다는 일에 게이조는 커다란 기쁨과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게이조가 아니면 고칠 수 없는 병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어느새 게이조 자신도 허망한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그것은 병을 완전히 고친 마사키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줄 수 없었던 데서 온 절망감이기도 했다.
자기 생각 속에 빠져 있던 게이조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요코의 빛나는 눈이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다보고 있었다.
“아버지, 저도 마사키 씨라는 분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허, 그래?”
“네 저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어요. 사실은 어떤 사람도 저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일 텐데 그런 실감이 잘 나지 않아요. 누가 진심으로 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해 준다면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마사키 씨라는 분도 누구에게 진정한 사랑을 받고 있었더라면 죽지 않았을 거예요.”
요코는 자기 말에 그만 얼굴을 붉혔다. 사랑이라는 낯간지러운 말 때문이었다. 요코는 처음으로 남 앞에서 사랑이란 말을 입밖에 냈던 것이다.
요코의 말에 게이조는 가슴이 뜨끔했다.
“누가 진심으로 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해준다면......”
이라는 말에서 게이조는 사랑에 굶주려 있는 요코의 고독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나도 나쓰에도 요코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하루 속히 결혼할 나이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이 집을 더나 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게이조는 요코가 가엾어서 견딜 수 없었다.
“아니, 벌써 열한 시구나. 그만 자거라.”
게이조는 태연스레 이렇게 말하면서 내일은 요코를 데리고 어디 드라이브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뜰에서 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아이누족들의 묘지란다. 아사히가와에 살고 있는 이상 한번쯤은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언덕 위에 차를 세우고 잠시 내려간 곳은 온통 소나무 숲 같았다.
화산에서 뿜어 나온 재투성이의 길을 걷다 보니 게이조와 요코의 구두는 금세 더러워졌다.
“어머나!”
묘지 안에 발을 들여놓은 요코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묘지라고는 하지만 일본 사람들처럼 ‘누구누구의 묘’라고 경계를 지어 놓은 것이 아니라 회화나무로 만든 묘표가 엄숙하면서도 쓸쓸하게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죽은 자들이 잠들어 있는 조용한 느낌을 주었다. 이 안에서는 죽어서까지 빈부의 차가 분명한 일본 사람들의 무덤처럼 화려한 묘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머, 정말 좋은 묘지예요.”
요코는 게이조를 쳐다보았다.
“요즘에는 이곳에도 돌무덤이 들어오게 됐지만 말이다. 보기에 좋잖니? 이 세상의 부귀나 지위와 완전히 인연을 끊은 겸손한 데가 느껴져서.”
“정말 그래요, 아버지. 이 절구공이 모양과 뾰족한 종이칼 같은 모양은 어떻게 달라요?”
요코는 조그마한 절구공이형 묘표 앞에 멈춰 섰다.
’테키시란‘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 이건 여자 묘야. 뾰족한 건 남자 묘이고. 이 나무는 백년이 지났는데도 썩지 않는 모양이야.”
클로버가 사방에 돋아나 있고 한 되들이 술병 하나가 묘지 앞에 뒹굴고 있었다. 찢어진 신문지 위에 썩은 사과가 하나 놓여 있고 그 옆에 조밥인 듯한 밥덩이가 놓여 있었다.
“본래 아이누족은 일단 죽은 사람을 매장하면 그 무덤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는구나. 그러나 지금은 일본 사람들의 성묘하는 풍습이 그들에게도 퍼졌는지 몰라.”
게이조는 정다운 눈빛으로 요코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뒤를 따라와 봐. 여기는 토장(土葬(이라고 해서 무덤을 그리 길게 파지는 않은 모양이야. 학생들까지도 아이누들이 부장(副葬)으로 파묻은 장식용 칼과 구슬 등을 고고학 공부에 참고 자료로 하려고 마구 파헤친다는 거야.”
“어머, 너무해요.”
요코는 서글픈 듯이 이렇게 외쳤다.
“전 말이에요, 아버지. 지금 여기 묻혀 있는 아이누의 일생은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모두들 결코 행복하지 못했을 거예요. 틀림없이 아이누라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일본 사람들에게 참을 수 없는 수모와 천대를 받았을 게 아녜요. 그런데 또 죽어서까지 이런 모욕을 당하다니 정말 너무 잔인해요.”
요코의 말에 게이조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메이지 28년 생’이라고 씌어 있는 묘표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도 한 많은 일생을 보내고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곳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메이지 38년에는 1만 평이던 아이누족들의 묘지가 지금은 9백 50평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가엾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이맘때 마사키는 아직 살아 있었다.’
게이조는 문득 마사키의 죽은 얼굴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
죽은 마사키는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금세 신음 소리라도 낼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고통 속에서 신음할 것처럼 보였다.
9월의 태양 아래 아사히가와 거리는 푸르스름하게 흐려 보였다. 게이조와 요코는 나란히 묘지 아래 펼쳐진 거리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은 해결일까?’
마사키의 자살도 그가 말하는 ‘개인의 존재 가치는 이 세상에서 무(無)와 같다’는 생각에 대한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개인의 인격이나 가치는 무시된다.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분야는 계속 좁아질 뿐이다.
‘죽음은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제기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특히 자살은 그렇다.’
게이조는 묘표에 앉아 있는 빨간 잠자리를 바라보았다. 잠자리는 얇은 날개를 햇살에 반짝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문제를 제기해 보아도 주위 사람들이나 사회는 거기에 성실하게 대답해주는 경우가 거의 없을 것이다.’
게이조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너무도 냉정하고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요코!”
요코는 아사히가와 거리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이 거리의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눠 줄 수 있는 게 딱 한 가지 있어. 뭔지 알겠니?”
“햇빛?”
“햇빛이 닿지 않는 곳에 사는 사람도 있어.”
“그럼 하루의 길이? 누구에게나 하루는 스물네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아요.”
“하기야 그렇지. 아버지는 지금 이런 생각을 했단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건강한 사람이나 병자나 죽음만은 틀림없이 공평하게 나누어 받고 있다고 말이야.”
“정말 그렇군요. 저도 결국엔 죽겠네요. 언젠가는 말이에요. 하지만 전 지금 거리를 바라보면서 저 많은 지붕 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무슨 일인가하고 있으니 무척 끈덕지다고 생각했어요.”
요코는 죽음보다는 일하면서 살아가는 데 더 큰 관심이 있을 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게이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태양 아래 펼쳐진 아사히가와 거리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껴야 할 나이인 요코가 일하는 에너지에 더욱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게이조를 불안하게 했다. 요코가 취업반에 들어 있다고 알려 준 다쓰코의 말을 생각해 냈다.
‘요코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눈치 채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몇백 미터 앞에는 일본인들의 묘지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어쨌든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이다. 두 번 다시 되풀이해 살 수 없는 것이다.’
게이조는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되돌아보니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인간은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나에게는 사회적 지위도, 어느 정도의 재산도, 그리고 아름다운 아내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반드시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게이조는 발치에 피어 있는 조그마한 붉은 꽃을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있었다.
게이조는 다쓰코가 요코를 데려가고 싶어한다는 말을 나쓰에에게 할까말까 망설였다. 그 얘기를 다쓰코가 나쓰에에게 직접 말하지 않은 것은 게이조가 판단하여 나;쓰에에게 말하게 하려는 심산에서였을 것 같았다.
“다쓰코 씨가 요코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하더군.”
하고 게이조는 가볍게 말을 꺼낼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나쓰에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다.
“어머나, 다쓰코가 그런 중대한 얘기를 우리 두 사람이 있는 데서 하지 않고 당신한테만 얘기했다니 정말 너무해요.”
하고 분개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왜 그런 말을 불쑥 꺼냈을까요? 설마 당신이 부탁한 거 아니에요? 제가 그 애를 키우는 방법이 당신 마음에 안 들어요?”
하고 말할 것 같기도 했다.
“당신은 요코를 그렇게 행복하게 해주고 싶으세요? 그렇게 그 애가 귀여우세요?”
하고 걸고넘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게이조가 그 말을 입밖에 내지 못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혹시 나쓰에가 다쓰코의 말대로 요코를 주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게이조는 집에 들어와서 요코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생각만 해도 쓸쓸했다. 서재에 있는 펜 접시가 늘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는 것도 요코의 덕택이었다. 그것 하나만 보더라도 게이조는 딸의 상냥함을 느낄 수 있었다.
2,3년 전부터 아침마다 세면장에 가면 금방 요코가 뒤따라와서 칫솔에 치약을 묻혀 주곤 했다. 그것은 아내인 나쓰에한테서는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따뜻한 정이었다. 게이조는 때때로 요코의 남편이 될 남자는 아침마다 이렇게 정겨운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했다. 병원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을 때도 요코의 밝은 미소를 대하면 게이조는 다소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도오루만 한평생 여동생으로 대해 준다면 요코를 아무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게이조는 문득 생각해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말이었다.
‘주제넘게 그 말을 내 일생의 과제로 삼으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 말 자체까지도 깡그리 잊은 채 지금의 나는 요코가 사이시의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일조차 드물다. 도오루의 일만 걱정되지 않으면 아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게이조는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말을 떠올리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의 요코에 대한 이 같은 애정은 시간이 갖다 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은 내 인격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주어진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은 참된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게이조는 요코를 남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다쓰코의 말을 나쓰에에게 전해야지 생각하면서도 어물어물하는 동안에 어느새 또 한 해가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