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시법, 시의 제목과 시의 첫행 / 박제천
-- [한국시학] 05년 겨울호 계간평
때는 마침 가을, 계간 [한국시학] 가을호의 [100인 신작모음]을 읽기 위해 나는 산행을 하기로 하였다. 분량이 분량인지라 이제껏은 지하철의 출퇴근 시간에 내내 들고다니면서 읽었다. 사람들 이야기소리, 휴대폰소리, 차내 방송 소리와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밀려오는 잠을 뿌리치면서 읽는 시라선지 가슴에 와 닿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귀중한 시편들을 그냥 읽어치우고 만 것은 아닌지 반성이 되어, 이번엔 읽는 장소를 바꾸기로 한 것이다.
산을 오르다보면 도시의 사람마을을 벗어난 상쾌함이 있다. 우선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산에 사는 이들은 사람마을의 말을 쓰지 않는다. 나무는 나무대로, 풀은 풀대로 저들의 말을 주고받지만 바람도 골짜기의 물도 그 말을 다 알아듣는다. 하고싶은 말 중에서도 가장 속내가 깊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어찌 생각하면 시의 언어도 산에 사는 이들의 말이기에 나는 [한국시학]의 그 무수한 시편들을 산에 사는 나무며 풀, 바위며 물, 그곳에 뛰어노는 풀벌레, 그곳을 날아다니는 새들에게 읽어주기로 한 것이다.
섣달 삭풍속
완성못한 한 잎의 시를 꼭 움켜쥐고 있다.
그의 일생이 한 편의 미완성 시로 서 있다
- 김영호 [겨울 미루나무]
잎이 다 떨어진 채 마지막 한 잎만 붙들고 있는 겨울 미루나무를 보여주자, 그 산의 나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미루나무의 [움켜쥠]이 저들에게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것이다. 바람들도,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 단풍잎들도 미루나무와 말을 나누고 싶어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정보가 부족했다. 속내를 털어놓기엔 아쉬울 만큼 내용을 갈무리해 압축시킨 것이어서 좀더 보여달라고 계곡의 물소리들도 발을 굴렀다.
오전 6시 기상, 날씨 청명, 바람없음
아가시 향같은 아침 운동을 하고
찬물 한사발 쭈욱 들이켜는 자유의 맛, 무한한 그 맛에
삶의 진솔한 얼굴이 있어
세월의 책장 한 페이지에 [축복]이란 두 글자를 써보았지요.
발치에서 노오란 들꽃 부부가 콕콕콕 웃으며 내 바지를 잡아당겼어요.
-조행자 [작은 삶]
들꽃 부부만이 아니었다. 나무 위에서 제 노래만 하기에 열심이던 새들도 이 작품을 듣고는 계곡으로 날아가 찬물을 맛보고, 마음껏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다녔다. 그러면서도 둥치가 큰 바위나 우듬지의 나뭇잎들은 [아침운동]보다는 [자유의 맛] [축복]의 자잘한 내용을 듣고들 싶어했다.
이렇게 걸음걸음마다 시 한편씩을 읽으며 산을 오르다보니 산이 곧 시요, 시가 곧 산이었다. 시인들이 자연에서 얻은 것을 자연에 돌려주고, 자연과 형제가 되는 길을 나는 그 산행에서 조금씩 깨우치면서 나의 새로운 시도가 맞아떨어졌다는 생각, 내게도 이런 신통한 생각이 들었다는 게 여간 기쁘지 않았다.
이렇게 뺨을 간질이는 바람에 흔들거리면서, 물소리에 걸음의 장단을 맞추면서 강춘장, 윤종석, 임성숙, 이운룡, 신찬식, 황송문, 장석향, 최진연, 정연덕, 이건선 시인 등, 시력이 오래된 시인들의 심경시들을 읽다본즉 구비를 넘어서 어느새 산길이 가팔라진다. 땀도 나고 다리도 아파온다. 머리는 맑아지는데, 몸은 바윗덩어리처럼 굳어만 갔다.
그때부터였다. 낯선 이름들, 아마도 시력이 짧은 시인에 틀림이 없는 작품들이 나타나면서 나의 산행은 망쳐지기 시작하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품하고, 양치질한다는 초등학교 일기장처럼 그저 그렇고 그런 심상한 이야기들이 줄을 지었다. 내가 읽어야 할 시들은 아직도 무수히 많이 남았는데, 첫줄만 읽어도 머리가 아파왔다. 그 산에 사는 것들도 머리를 도리질했다. 나중에는 소리내 읽지도 못할만큼 입이 아팠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무엇이 잘못되었나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시의 첫행은 시인과 독자가 만나는 최초의 순간이다. 이때의 첫느낌이 상대를 대하는 마음의 고삐가 된다. 그런데 [한국시학]의 상당수 시편들은 대체로 평범한 시행을 사용한다. 눈길을 끌지 못한다. 이들은 신기한 것은 경박하다는 생각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독자에게 호기심을 주지 않는 한, 독자는 더 이상 읽으려 들지 않는다. 시인의 평범한 신변 잡담을 독자가 왜 읽어야 하는가.
첫행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제목이다. 이 글을 쓰다가 문득 목차를 다시 들여다본즉, 놀랍게도 많은 시인들이 아주 평범한 제목을 사용하고 있었다. 모든 예술작품이 그러하지만 특히 시 장르의 경우는 분량이 짧기 때문에 제목이 30% 이상의 역할을 한다. 멋진 제목, 호기심이 가는 제목, 놀라운 제목이 달린 작품은 그 내용 역시 기대감을 채워준다.
그러나 [한국시학]의 시제목들은 대체로 누구나 아는 평범한 오브제나 지명, 관념어, 보통명사 등을 쓰고 있다. 예컨대 [무상] [업보] [기도]나 [우물가] [눈사람] [단풍] [밤] [기다림] [보리밥] [휴대폰]과 같은 단수의 단어들이 가득 채운 목차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이런 제목들이 효과를 보는 경우는 세련된 제목들 사이에 하나 둘 정도 섞여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처럼 모두들 [평범한 제목이지만 읽기만 하면 특별한 내용이 있다는 식]으로 단순한 제목이 나열될 경우에는 독자가 목차를 보는 것조차 괴롭게 만들기 쉽다.
중진들의 경우는 시집의 균형을 잡기 위해 이런 제목을 의도적으로 몇 개쯤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연치가 짧은 신인들의 경우에는 이런 제목으로는 독자와 만나는 첫순간부터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이 자리를 빌어 신진시인들에게 고언을 드리자면, 귀중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그 옷차림조차 신경을 쓰지 않는 무심함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강우식 시인과 함께 저술한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서 시의 첫행을 효과적으로 제시한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좋은 시인들이 그 첫머리를 특징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개발한 테크닉 중 세 가지 방법을 인용해둔다.
1) 시간을 나타낼 경우 특정한 시간대가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2) 시간과 공간이 첫 행에서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경우는 훨씬 효과적이다. 이러한 표현법은 그만큼 압축되고 간결한 어휘의 구사가 요구되지만 표현상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3) 시의 첫행을 하나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① 이쯤에서 그만 下直하고 싶다―박목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유치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김춘수
문장의 주어가 1인칭 즉 ‘나’로 되어 있거나 생략된 예들이다. 박목월과 유치환의 경우는 하직과 죽음이라는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박목월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관조하는 듯한 겸양에 찬 어법을, 유치환은 의지적인 어법을 사용함으로써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춘수는 나와 짐승을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② 풀이 눕는다―김수영
관이 내렸다―박목월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장만영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황동규
소 한 마리를 잡기로 하였다―송정란
②의 예는 하나의 문장으로 첫행이 이루어졌으되, 그 주어가 명사어로 된 예들이다. 김수영의 예는 그 주어가 사물이고, 장만영과 황동규는 그 주어를 인간으로 하고 있는 점이 조금 다르다. 그러나 김수영의 ‘풀’은 민족 또는 민중을 상징하고 박목월의 ‘관’도 한 인간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송정란은 소를 통해 시를 상징화하고 있다. 장만영은 ‘길손’이라는 불특정한 주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황동규는 ‘전봉준’이라는 역사상의 인물을 주어로 등장시키고 있다. 최근의 시에 가까울수록 특정한 시간·장소·인물이 시에 등장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대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의 독자적인 개성이 요구됨에 따라 보다 사적인 소재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러한 테크닉은 시력이 오랜 시인들이 사용할 때 그 효과를 보는 방식이다. 신진시인들에게는 우선은 그냥 [연못]이 아니라 [거울 연못]과 같은 식으로 복합어를 사용하여 제목의 단순함을 벗어나는 시도를 해보라고 권하겠다. [한국시학]의 목차에서 예거한다면 [허무, 혹은 새에 관한 떨림] [달과 산성] [나귀 귀가 반짝이다] [상사화 속에는 성 한 채 들어 있다] [붉은 눈밭] [가을 백일홍] [그대는 산에 가면 산이 되는가] [떡갈나무 그리고 상수리나무와 함께] 등이 그나마 묘를 얻은 제목들이라 할 수 있다.
계간 시평에서 뜬금없이 작시법의 용례를 인용한 것은 그동안 [한국시학]의 시작품들을 통독한 결과, 이렇듯 습관적으로, 감정적으로 신변잡기들을 시로 발표하는 신진시인들에게 다소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지만 평자가 작시법을 강의한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랜만에 이름을 선보인 중진시인들의 작품을 거론하지 못해 애석하지만, 신진시인들의 문제가 보다 화급한 사안이라 생각했기에 글의 방향을 돌린 것이다.
모처럼 가을을 맞아 시와 함께 산행의 정취를 흠뻑 즐기고 싶다는 나의 소망은 결국 이렇게 쓸쓸한 발길에 지워지고 말았다
- <박제천시인방산재. http://cafe.daum.net/jechunpark/4usY/5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