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나스넷 2013-09-14 오전 7:59:01 | |
일본의 망언(妄言)과 우리의 자세
written by. 김영관
미래를 위해 우리 모두가, 남을 탓하기에 앞서 나(우리)만이라도 최선을 다하여 정도(正道)를 가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매진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Ⅰ. 일본의 망언
1. 망언의 원형(原形)
날이 갈수록 더욱 도(度)를 더해, 극심해져 가고 있는 오늘의 일본의 망언은, 1953년 10월 15일 한일회담(韓日會談) 제3차 회담 재산분과위원회(財産分科委員會)에서, 일본 측 수석대표 구보다(久保田貫一郞)가 “일본의 조선 통치는 조선인에게 은혜를 베푼 면도 있었다”, “ 꼭 나쁜 면만 있는 것이 아니고 좋은 면도 있었다”고 폭언을 한데서부터 시작된다. 이 망언으로 제3차 한일회담은 결렬되었는데, 이 발언은 일본인들의 망언의 원형(原形)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공식적으로 표출된 망언은 구보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이미 그 이전에 막말을 한 자가 있다. 전 경성제국대학 교수이었고, 후에 동경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스즈키(鈴木武雄)라는 사람인데, 그는 “일본이 조선인을 노예로서 착취하고, 그 행복을 유린하였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 조선은 자립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지, 일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다”라고, 1948년경에 어느 조사 보고서에서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언행은 일본 보수파의 한국관(韓國觀)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서, 스즈키는 일본인 망언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2. 총리(總理), 대신(大臣) 등 지도자들의 망언
이를 시작으로 일본은, 총리를 비롯한 여러 대신, 지도급 인사들이 앞 다투어 망언 대열에 동참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막말로 쏟아내고 있는 망언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과 유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로, 한일합병은 합법적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대등한 입장에서 무력에 의해서가 아닌, 자유의사에 의해서 체결된 것이며, 조선이 자립할 힘이 없었고, 또한 합병을 원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기에, 합법적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것이다.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명칭)는 일본이 합법적으로 취득한 것이며, 역사적으로 볼 때도 자국의 영토라는 것이다.
셋째로, 종군위안부는 적법하게 운영한 것이며 공창(公娼)이라는 것이다. 일본은 종군위안부의 존재를 부인하면서, 그것은 일종의 공창으로서 합법적으로 운영한 것이고, 그녀들도 도리어 일본에 협조했다고 떠들고 있다.
넷째로, 일본은 조선에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현대화(現代化)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 발전을 위해, 철도 등 각종 기반시설을 건설했고 교육, 산업화에 힘써 조선발전에 기여했기에, 일본통치 36년간은 착취가 아니라 선정을 베푼 기간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망언에 동참한 여러 총리 중, 주요 인사로는, 종전 후의 요시다(吉田 茂), 1963년의 이케다(池田勇人)를 비롯하여, 다나카(田中角榮), 무라야마(村山富一-처음에는, 침략이 아니라는 망언을 했다가, 후일 태도를 바꾸어, 형식적이나마 침략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고이즈미(小泉純一郞), 현 총리 아베(阿部晋三) 등이 있으며, 대신 급으로는 많은 인사들이 동참했는데, 1963년도의 시이나(椎名悅三郞) 외상(外相)을 비롯하여, 후지오(藤尾正行) 문부상(文部相), 에토(江藤 隆美)총무처 장관, 오쿠노(奥野誠亮) 법무상(法務相), 아소(麻生太郎) 전 자민당(自民黨) 정조회장(政調會長-현 부총리), 이시하라(石原慎太郎) 전 동경도지사, 하시모토(橋下 徹) 오사카 시장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그리고 이외에 다케무라(竹村健一), 와타나베(渡部昇一) 등과 같은 평론가를 비롯하여, 많은 지도급 인사들이 이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3. 망언의 뿌리
일본의 망언은, 조선은 열등하고 그들 일본은 우수하다는, 민족적 우월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은, 일본의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에서 허위와 조작으로 역사를 왜곡하는데 일관하고 있다. 정확한 연대조차 알 수 없고 아무 근거 없는, 전설과 같은 허구의 인물 징구황후(神功皇后)를 내세워, 한반도 남부 삼한(三韓)을 정벌했다느니, 미마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한반도 남부에 설치하여 광대한 영역을 다스렸다는 등, 꾸며진 역사를 내세우면서, 자국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데서부터 망언의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은 왜구(倭寇)로서 고려, 조선을 침범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망상(妄想)과 권력욕(權力慾)으로 조선을 공격 초토화하였으며, 한말(韓末)에는 자국의 안전과 동양평화를 앞세워 조선을 점령, 식민지화한 과거사를 자랑삼으면서, 조선을 열등한 국가로 비하(卑下)하고 있다.
그들 망언의 저의(底意)는, 일본의 우월감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또 한국을 비하하는 심정에서, 그리고 일본의 행위는 언제나 정당하다는 자만심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일본 국수주의자들에 의한 황국사관(皇國史觀), 자국우월주의(自國優越主義), 이웃 멸시풍조는 더욱 심화되어 갔는데, 아라이(新井白石), 사토(佐藤信淵), 요시다(吉田松陰), 후쿠자와(福澤諭吉), 호소이(細井 肇) 등이 주된 존왕(尊王) 사상을 앞세운 국학자들이다.
Ⅱ. 역사적인 일본의 침략근성
1. 면면히 이어오는 침략과 신의 없는 일본
일본은 고대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웃과의 선린 우호(善隣友好)에는 관심 없이 침략행위로 일관했다. 고대에는 삼한을 정벌했다고 자랑하고, 중세(16세기)에는 명분 없는 전쟁으로 조선을 초토화시켰으며, 근대(19~20세기)에는 광란의 군국주의자들에 의한 조선 병탄, 중국 침략, 태평양 전쟁 도발로 이어져, 이웃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도, 이를 인정하지도, 사과도 하지 않고 도리어 망언만 되풀이 하고 있다.
일본은 겉으로는, 무사도(武士道)를 앞세우며, 의(義)와 성실(誠實), 그리고 인(仁)과 예의(禮儀)를 중시하고, 사무라이(武士)정신으로 뭉친 신(神)의 나라라고 자찬하면서도, 내심(內心)은, 이웃을 멸시하고 시기하며, 무사도 정신과는 거리가 먼, 정반대의, 기만과 무법의 칼(刀)을 휘두르는 폭력자가 되어, 이웃 한국을 억압하고 끝내는 탈취했다. 조선의 독립과 안전보장을 앞세우며 다가온, 겉 다르고 속 다른 일본의 행태를 살펴보면, 그들의 신의 없는 이중성이 여실히 노정(露呈)된다.
그 첫 번째 시작은, 1876년 2월 2일 체결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에서부터이다. 일본은 “조선국은 자주국(自主國)이며 일본과 더불어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고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이어지는 각종 조약, 의정서(議定書), 선전포고문 등에서, 조선의 “자주독립”과 “안정”을 수없이 약속하였지만, 그들은 이웃을 저버리고 자국만의 이익을 위해, 끝내는 배신하고, 1910년 8월 22일 맺은 한일합병 조약으로 조선을 강탈한 의리와 신의 없는 추악한 일본으로 변신했다.
2.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일본인
일본사람들을 흔히들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는 국민이라고 평(評)해지고 있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이야기이며,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은, 과거에 그들이 저지른 역사적 사실을 돌아보고, 오늘의 일본의 행태를 볼 때 수긍이 가는 이야기다. 특히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아직도 그 아픈 상처를 치유 받고 있지 못한 우리로서는 더할 나위도 없다.
일본인의 특성(이중성)을 잘 지적한 미국인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여사(「국화와 칼」저자)의 말을 인용하면, “일본인은 최고도로 싸움을 좋아하는가 하면 동시에 얌전하며,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며,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고, 용감하면서도 겁쟁이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르게 될 때는 범죄의 유혹에 지고 만다”라고 했는데, 일본인의 이중적 특성을 정곡으로 찌른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루(J. Grew) 전 주일대사는, “개인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말할 수 없이 친절하나, 집단적으로는, 다른 국가에 적대감과 불신이 팽배한 나라에 산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느낌이 든다”라고 말했는데, 일본인의 이중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역사의 현장에서 본 일본인의 이중성을 보면, 먼저 메이지(明治) 시대 최대의 사상가이며 교육자였다던 후쿠자와(福澤諭吉)는, 김옥균 등 조선의 개화파들을 지원하여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하는 행동을 하다가, 내외의 정세가 급변해가자 태도를 돌변하여, 조선을 배척하는 탈아론(脫亞論)을 발표하고, 아시아와의 연대를 끊고자 했는데, 조선의 개화파들은 그에게 배신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자국의 이익에 보탬이 되지 않으면 신의 없이 저버리는 일본인들이다.
또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시에는 김옥균 등 개화파들이, 일본 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郎)의 지원 약속을 믿고 거사를 했으나, 그들은 청군의 개입으로 세가 불리하게 되자, 지원갔던 일본군을 철수시키고, 인천 경유, 일본으로 도피했다. 일본의 지원 약속을 믿고 거사했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역적으로 몰렸고, 개화당의 신정부는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일본 공사의 배신행위로 거사는 실패하고 역적의 신세가 된 것이다.
또한, 1890년대 초 일본과 한국을 방문한바 있는 영국 하원의원 조지 커즌(George N. Curzon)은 일본인들이 자국에서는 예의범절을 지키면서, 조선에서는 깡패 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하고, 그들이 개국 초기 서양이 강요한 불평등 조약을 비난하면서도, 1876년 조선과 조약을 맺을 때(강화도조약), 똑같은 수법(강요에 의한 불평등 조약 체결)을 원용(援用) 했음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은 일본인의 이중성을 잘 보여주는 역사의 한 장면에 불과하며, 그들은 많은 배신행위로 우리를 괴롭혔다.
Ⅲ. 우리의 자화상(自畵像)
1. 우리를 돌아보자
일본이 작심하고 망언을 쏟아내고 한국을 비하(卑下)하고자 하는 데는, 우리의 취약점을 빌미삼아, 이를 최대한 자국에 유리하게 활용코자 하는, 그들의 비열함에서 연유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지난 쓰라리고 아팠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과 내일에 대비하여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도 못한 부분이 있어, 우리의 약점으로 작용하여, 일본인들에게 역(逆)이용당하는 면이 없지 않다.
한 예로, 부끄러운 우리의 지도자상의 한 단면을 살펴보자. 구(舊) 일본 육군 정규코스를 이수한 엘리트 장교로서, 대본영 육군참모, 만주관동군 참모 등 요직을 역임하고, 전후(戰後)에는 각종 공사(公私) 기관에서 책임자로도 활약한 바 있는 세지마 류죠(瀨島龍三)의 회상록(回想錄) 「이쿠상가(幾山河)」에 따르면, 우리로서는 외면하고 싶은 장면들이 나온다. 그의 저서에 의하면, 우리의 어느 대통령은, 그와 10~15회 청와대 관저나 기타 장소에서 만나 정치, 경제, 시국문제를 상의도 하고, 퇴임 후의 처신 문제도 조언을 구했으며, 자필의 사례(謝禮)서신도 받았다고 했다.
또 다른 대통령은, 후보시절부터 조언을 구했으며, 일본 유명 여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를 일본말로 회식장에서 여러 곡을 부른데 놀랐다고 했다. 그리고 이전부터 테이프를 들어와 연습을 했고. 그녀를 초대하고 싶었다고도 했다 한다. 이뿐만 아니다. 그는 종합상사(綜合商社) 설립육성이 급선무임을 한국에 제시하여 성공시켰고, 또 일본 육사 출신으로, 유능한 한국 지도자가 많은데, 대부분 나의 후배들이라며 총리, 장관, 고위군 관계자들을 거명(擧名)하기도 하면서 득의양양(得意揚揚)했다.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의 단결할 줄 모르는 분파, 파당적 행위는 부정적 이미지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데, 특히 정치, 영토 등 외교, 안보 분야에서는 일치단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런데, 지난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의 영토주장에 항의하는 뜻으로 독도를 방문했는데, 일부에서 왜 지금 방문인가, 시기가 적절치 않다는 등 이의를 제기한 것이라던가(거국 단결하여 우리의 의지를 보였어야 하는데),
2013년 4월 26일 국회 본회의에서, “일본 각료 등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및 침략전쟁 부인 망언 규탄 결의안”이 의결정족수 미달로(의결정족수 151명인데 참석 부진) 채택 못하고, 후일로 연기된 문제(전원 참석에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우리의 굳은 의지를 과시했어야 하는데) 등은, 우리의 취약한 뒷모습만 노출시켜, 그들이 우리를 비하하고 자만심을 갖게 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2. 식자들의 무분별한 언행
기회 있을 때마다 지적했지만, 독립군, 광복군이 과대평가되었다거나, 독립군은 소규모 테러단체 수준이라고 폄훼(貶毁)한 엘리트 정치 지망생이 있는가 하면, 일본에 합병된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고, 일본 유수잡지에 기고한 교수도 있고, 또 조선을 강탈하는데 앞장섰던, 이토(伊藤博文), 이노우에(井上 馨) 등 문하생(門下生)을 배출하고, 본인도 조선침략을 주창(主唱)한 요시다(吉田松陰)를 배워야 할 지도자상(指導者像)으로 찬양한 교수도 있다.
그리고, 지난 이야기지만, 우리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복원하여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수탈과 억압의 상징이었고, 총 본산이었던 구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코자 하였는데, 일부 지도급 인사들의 반대에 봉착한 과거도 갖고 있다. 이 청사는, 일본인들에게는 추억과 자긍심을 심어주는 그들의 교육의 장이 될지언정, 우리에게는 치욕과 패배감을 안겨주는, 역효과의 장이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오늘의 서울관광명소로 부활한 경복궁의 모습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씁쓸한 회상이다.
이와 같은 정황들을 본, 일본인들의 생각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와 더불어, 일부 문인들의 행태는 우리의 낯을 뜨겁게 하고 있다. 어느 평론가라고 자처하는 젊은이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말, “독도는 일본 땅이다. 일본과 관련해서 한국이 억지를 부리고 있는 사안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본해(日本海)를 동해(東海)라고 주장하고, 다케시마(竹島)를 한국 땅이라 주장하는 것이다”라는 폭언을 하였는데, 조국을 판 그의 저서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로 30만부나 팔려 인기 있었다니 친일파가 따로 없다. 또 어느 여류 문인은, 바다 건너 일본에서 고국을 향해 “한국은 반일교육(反日敎育)이 철저해서 폐해가 많다”, “총독부 통치는 평화로웠다”느니 망발하고, 일제의 식민지배와 전쟁까지 옹호, 찬양하면서 일본에 아첨하고 그들의 환심을 사고 있기도 하다.
그밖에, 우리의 부끄러운 뒷모습으로 비칠, 일제 잔재 청산의 실패는, 일본인들이 우리를 격하시(格下視)하는데 한 몫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라를 잃는 과정에서, 혹은 36년간의 일제 통치시기에, 그들에게 빌붙어 나라를 팔거나, 적극 협조하여 우리에게 큰 피해를 입힌 자, 기타 일제 잔재를 우리는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여, 그 후유증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실정이다.
이웃 일본은, 자신들의 원천적인 죄과로 인한, 한국인의 이러한 여러 아픔들에 대하여, 반성과 사과는 고사하고, 도리어 우리를 비웃고 비하하는 비열한 태도로, 우리에게 다가 오고 있는 형국(形局)임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Ⅳ. 우리의 자세
1. 일본인이 보는 한국
일본인들의 망언과 면면히 이어오는 역사적인 침략근성을 돌아보았는데, 그들의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속 좁은 심성과 공격적이고 침략적인 근성은, 앞으로도 이어질 개연성(蓋然性)이 크다고 본다. 그들은 그 근성을 견지(堅持)하면서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어갈 것이다. 한 예를 들면, 일본의 산케이(産經) 신문 서울 지국장을 지냈고, 한국에 20여년 주재하면서, 한국을 바라보며 비판한 글을 많이 발표한 중진 언론인 구로다(黑田勝弘)가, 장기간의 주재(駐在)로 우리나라를 제대로 보면서, 역지사지(易地思之)적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사시안(斜視眼)적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데서도, 그들의 한국멸시와 자국 우월의 본심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삐뚤어진 한국관을 보자. 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계속적인 문제 제기는 일본 규탄의 쾌감 때문이고, 일본 때리기의 최대카드로 활용하고 있다”거나 “러시아나 중국은 6‧25 전쟁 시 개입했고, 몽골은 고려를 침범했는데도 이들 나라들은 한국에 사죄하고 있지 않다”고도 하고, “한국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일본에게 사죄와 반성을 요구하는 통과의례(通過儀禮)로서 반일을 부르짖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망언으로 이어지고 있는, 침략 부인과 독도, 위안부, 교과서 문제 등은 외면한 채, 우리의 항의를 “일본 때리기”, “반일”로 몰아가고 있으며, 진정한 사과도 않으면서 몇 번씩 사과하여야 하는가, 라고도 항변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의 정당한 사과요구를 반일로 몰아가면서 “반일은 한국 사람들의 겡키노모도(元氣の素)-기력의 원천”이라고 까지 폭언왜곡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속마음과 진심은 이런 것들이다.
2. 우리의 자세
일본인들이 우리를 보는 본심과, 그들의 역사적으로 이어지는 호전적인 침략근성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모습-자화상(自畵像)을 돌아보았는데, 망언의 일차적(一次的)인 책임은 물론 일본에게 있지만, 우리의 문제점도 부정할 수 없다. 일본만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의 자세도 되돌아 보면서 오늘과 내일에 대비하여야 할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나라를 잃은 원근인 에서 미래를 찾아야 한다. 어제 없는 오늘 없고 오늘 없는 내일 또한 없다. 지정학적으로 4대강국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로서는, 안으로는 실력(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서)을 양성하고, 밖으로는 국제사회 일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도록 노력하여 국격(國格)을 높인다면, 일본은 감히 우리를 비하하고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언행은 엄두도 못 낼 것이고, 우리의 나라 위상도 크게 향상될 것이다.
근래 언론에 보도된 영국 BBC방송이, 일부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평판도(國家評判度)조사에 의하면, 일본은 세계에서 넷째로 인기가 있는 나라였고, 한국은 17개국 중 열 번째와 열두 번째를 왔다 갔다 한다는 통계를 본 바 있는데, 국력을 나타내는 절대적인 기준치는 아니더라도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내실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하고, 동북아시아의 중심국가로서의 자긍심을 갖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통계에서도 우리를—우리뿐만 아니라 과거 침략했던 아시아 여러 나라를 경시하고 비하하는 태도를 견지할 것이다. 근래 일본에서 있었던 성노예(위안부) 발언에 대하여 미국을 위시한 국제사회에서 문제가 야기되자, 오사카(大阪)시장 하시모토(橋下 徹)는 미국에 대해서는, 그의 발언에 대하여 사과하면서, 당사국인 우리나라에 대하여서는 일언반구 말이 없다. 아니, 도리어 더욱 기세등등하게 나오고 있는 것도, 이런데서 연유되는 면도 없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나라 잃은, 쓰라리고 아팠던 지난 역사에서의 교훈을 기반삼아, 우리의 할 일을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일치단결하여 국력을 강화하면서, 예의 없고 이중적이며 신의 없는 일본을 이웃하고 있다는 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위해 우리 모두가, 남을 탓하기에 앞서 나(우리)만이라도 최선을 다하여 정도(正道)를 가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매진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생각한다.(konas) 출처: 광복군 제9호
김 영 관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첫댓글 역사학 전공도 아닌 뉴라이트 역사교과서 집필진 매국노들은 이글을 읽고 말같지 않은 식민지근대화론은 일본 우익들 앞에서 씨부리고 호형호제하면서 지내라.
김구 선생이나 안중근의사를 테러리스트로 본다고 하던곳 말이죠?
그 이야기듣고 할말을 잃었던 기억이나네요.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