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최고의 인문학적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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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도서관도 아니고 노래방이에요.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까지 계속 연습하세요. 시는 질문하는 것이고, 중심을 돌아보는 것이고, 자기를 괴롭히는 거예요. 그러다가 불꽃놀이처럼 한순간 터지는 거예요. 시에 대한 감(感)이 없으면 인생에 대한 감도 없다고 봐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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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때마다 잘 안 되고,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게 이 일이에요. 성공하려 하지 마세요. 본래 이 일은 실패하게 되어 있어요. 그냥 하세요. 다만 쉽게 가려 하거나 개똥철학 하지 마세요. 그건 남들 시켜 조상 제사 지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러면 평생 내 집 마련 못 해요.
-<무한화서>(이성복)
물이 줄기를 따라 높이 올라갈수록 마치 고무줄을 위에서 잡아당기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물기둥은 장력(張力, tension) 하에 놓여 늘어난다. 이와 더불어 높이 올라갈수록 중력(重力, gravity)에 의하며 물을 밑으로 잡아당기는 힘이 더 커진다. 결국, 물기둥은 위에서 잡아당기는 장력과 밑으로 잡아당기는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끊어지며, 끊어진 물기둥은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 물기둥이 끊어지는 높이(세쿼이아의 경우 115m 전후)에서는 물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여 물이 부족하게 되며, 잎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한다.
2004년에 미국 과학자(Koch 박사)가 키가 112m 되는 세쿼이아의 잎을 높이별로 채취하였는데, 높이 올라갈수록 잎이 작아지면서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그는 높이 올라갈수록 잎과 광합성량이 작아지는 정도를 상관관계로 분석하여 나무가 자랄 수 있는 한계를 120~130m라고 Nature 학술잡지에 발표했다.
물기둥이 중력에 반하여 끊어지지 않고 올라갈 수 있는 힘은 가도관(tracheid)처럼 가는 직경을 가진 침엽수가 도관(vessel)처럼 넓은 직경을 가지 활엽수보다 더 크기 때문에 침엽수가 활엽수보다 더 크게 자랄 수 있다. 즉, 지구상에서 키가 가장 큰 나무가 세쿼이아(침엽수)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며, 식물 세포의 구조를 고려할 때 과학적으로 설명된다.
-<문답으로 배우는 조경수 관리지식>(이경준)
[단숨에 쓰는 나의 한마디]
다음 문장을 보면서 생각해 보자.
“성공하려 하지 마세요. 본래 이 일은 실패하게 되어 있어요. 그냥 하세요.”
일단 트집을 잡아 보자. 이성복 시인은 문학과지성사에서 시집을 냈다. 시인으로서 성공했다. 대학교수가 되었다. 직업으로서 성공했다. 형태적으로 성공했다. 내용적으로는 본인만이 알겠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등단 절차가 있다. 숫자적으로 경쟁이 있다. 특히 잘 알려진 문학지에 등단하려면 힘들다. 그러기 위해 그 잡지를 구독하고 책들을 사서 보고 흐름을 주시한다. 그래서 잘 되면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것이 대략 성공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이때 거기에 가려고 수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뭐가 되는 것인가? 거기에 못 간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나아 보이는 것인데 말이다.
그럼 ‘그냥 하세요’에 주목해보자. 나는 매일 시를 쓰고 있다. 그냥 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언젠가 시집을 내고 주목을 받고 싶다. 그러면 돈이 들어올 것이다. 생존 글쓰기다. 성공이 될지 안 될지 모른다. 성공이 있어본 적이 없으니 그냥 한다. 무심히 한다. 마음 깊은 곳에는 이 일로 돈이 왔으면 하면서 말이다.
다른 일도 찾으면 많을 텐데 왜 할까? 다른 일은 힘들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 안 힘든 일이 어디 있겠느냐만, 이 나이에 마땅한 일이 뭐가 있을까? 객관적으로 나의 상태를 체크해보면 그다지 없다.
그래서 최근 숲해설가를 선택했는데, 이것도 만만치 않다. 돈을 떠나서 저 이야기를 하는 게 과연 즐거울까 하는 것이다.
어제 오전과 오후 도심 숲해설을 들었다. 우리는 지금 느티나무 그늘보다 스타벅스 같은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고, 우리는 지금 장수목을 보며 긴 생명력을 경외하는 게 아니라 나무들에서 추출한 약의 효능에 더 관심을 표명하고 있고, 우리는 지금 자연 생장하는 나무보다 맛있는 열매가 풍부히 열리는 과실수와 눈이 즐거운 관상수 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무와 숲의 본질 운운은 감동적일까?
내가 늘 껴안고 있는 단어는 ‘모순’이다. 이것이 최고의 인문학적 발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다가 ‘스토리텔링 진화론’을 읽는데, 대략 이런 구절이 나왔다.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인데, 인간은 그 자연을 인위적으로 바꾸고 있다. 그래서 모순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무릎을 탁 쳤다. 숲을 보호하고 나무를 사랑하고 자연을 가꾸자는 말은 들으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의 엄연한 현실은 무엇인가? 열대우림은 파괴되고 있고, 도시의 나무는 낯선 기후에 적응해 애써 스스로 자라야 하고, 원예와 교배를 통해 이리저리 섞여야 하고, 우리 몸 어디에 좋다면 그냥 작살나고 등등 그럴듯한 관념과 동떨어진 현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출발부터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이 모순의 간극을 줄이려는 사람도 있고, 그러한 모순을 인지하면서도 모순의 간극을 늘리는 사람도 있다. 좀더 들어가면 이 부분에서 모순의 간극을 줄이려는 사람이 다른 부분에서는 첨예한 모순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할 것이다. 내가 그렇다는 것이다. 아니 나는 모순을 줄이려 무슨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모순임을 알면서 모순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모순을 깊이 느끼는 자. 그럼 말할 것이다. 알면 고쳐야 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쉽게 고쳐지면 이 지구는 그렇게 뜨겁지 않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앎의 나무>라는 책이 다시 떠오른다. 산 정상에 잉크 한 방울 떨어뜨리면 자연 형성된 산세를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는 게 진화이고, 그 안에서 역시 이리저리 흘러가는 게 사람이라는 것 말이다. 참으로 어려운 삶이다. 힘든 삶이다. 죽을 맛이다.
나무 필사의 문장을 보자.
“지구상에서 키가 가장 큰 나무가 세쿼이아(침엽수)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며, 식물 세포의 구조를 고려할 때 과학적으로 설명된다.”
우리 삶도 신체 구조를 고려해 과학적으로 설명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이 부분이 어느 정도는 타당하다.
어제 온 종일 깁스를 하고 돌아다녔다. 짜증은 귀가길에서 시작되었다. 창경궁을 나와 혜화역으로 다시 걸어가는 것보다 안국역으로 가서 전철을 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안국역 방향이 공사로 인도가 막혀 있었다. 어디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 것보다 그냥 짜증이 밀려왔다. 일단 종로로 나갔다. 종로3가역에서 전철을 기다렸다. 이곳에서 자주 타는데, 단 한 번도 곧바로 전철을 탄 기억이 없다. 덥고 비좁고. 겨우 타서 운 좋게 얼마 뒤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에 아이가 앉았다. 종알거리며 몸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깁스한 팔이 계속 흔들렸다. 화정에서 내려 마트에 들렸다. 무알콜맥주를 고르고는 콜라도 샀다. 큰 거를 샀다. 가방에 들어가지 않아 손에 들었다. 무거웠다. 치킨집에 들러 양념치킨을 샀다. 한 손으로 처리하려니 버거웠다. 내 신체적 구조에 화가 심하게 나다 보니 서글픈 웃음이 나왔다. 욕도 나왔다. 집에 들어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10층 문이 열렸다. 내리려고 한 발짝 떼는데 안에 있는 애가 닫힘 버튼을 누르는 것 같다. 얼른 움직였다. 현관 번호키를 누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팔 깁스 하나가 기존의 일상과 다른 감정들을 극대화시켰다. 이런저런 일로 삶이 흐르다가 결국 물리화학적으로 소멸하는 삶, 과학적 설명은 정말 가능할까? 어찌 보면 식물의 생리를 과학적으로 설명했다는 것도 우리 생각의 일부분일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못하니까 우리보다 덜 복잡해 보이는 식물에 우리의 염원을 담아본 것은 아닐까? 왜 우리는 본능적 생각 이외에 자꾸 질문을 만들어낼까? 죽을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