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자전거 이야기 - 파우스토 코피 진정한 캄피오니시모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4. 22. 1:39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재미있는 자전거 이야기
파우스토 코피
진정한 캄피오니시모
파우스토 코피는 진정한 캄피오니시모였다.
이탈리아 사이클의 상징
파우스토 코피(Fausto Coppi)는 이탈리아의 사이클을 상징하는 선수다.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의 사이클은 그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진정한 캄피오니시모(Campionissimo)였다. 캄피오니시모는 이탈리아어로 '최고의 챔피언'이란 뜻이다. 코피는 사이클 선수로는 명성을 얻었지만 그의 생애에는 비극적인 일들이 많았다. 그는 전쟁 포로가 되기도 했으며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부상에 시달렸다. 또 애인과의 연애 스캔들로 이탈리아에서 배척을 당한 채 불과 마흔 살의 나이에 말라리아로 짧은 생을 마쳤다.
코피는 1919년 이탈리아 북부 리구리아 지방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농사일을 도와주기를 바랐지만 파우스토는 열세 살 때 집을 떠났다. 그는 어느 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저는 더 이상 이런 곡괭이질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소시지를 만드는 도축업자의 가게에서 자전거로 물건을 배달하는 일을 했다. 1933년 코피는 유명한 마사지사였던 비아조 카바나(Biagio Cavanna)를 만났다. 그는 시각장애인이었는데 알프레도 빈다와 같은 이탈리아 사이클 선수들의 마사지를 담당하기도 했다. 카바나는 코피에게 말했다.
"앞으로 3개월 동안은 경기를 하지 말게."
"그렇지만 저는 경기를 해야 합니다. 경기는 저의 생계 수단입니다."
코피가 대답했다.
"자네는 몸을 더 강하게 만들어야 하네. 매일 고기를 먹게."
코피는 카바나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조언에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그해 시즌의 남은 경기를 포기하고 다음 시즌을 준비했다. 그는 1939년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그를 발굴한 사람은 지노 바탈리였다. 당시 지노 바탈리는 이탈리아 최고의 선수였다. 그는 자신이 속한 레냐노(Legnano) 팀에 코피를 받아들였다.
바탈리는 코피의 첫인상이 아스파라거스처럼 깡마르고 아주 허약해 보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생은 곧 스승을 능가했다. 그는 1940년 팀 리더인 바탈리의 보조선수로 지로 디탈리아에 참가했다. 그런데 코피는 바탈리보다 45분이나 앞선 기록으로 우승을 했다. 바탈리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전쟁으로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챔피언의 경력은 중단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토르토나에 있는 38보병연대에서 군복무를 했다. 전쟁 중에 코피는 1942년 두 번의 공습경보가 울리는 가운데 밀라노에서 한 시간 기록을 경신했다. 그는 1943년까지 최전방에 있었고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연합국의 포로가 됐다.
바탈리 파와 코피 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이탈리아는 전쟁 전의 두 슈퍼스타를 다시 보기 위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두 거인이 대결한 것은 사이클 시즌의 개막전인 1946년의 밀란-산레모 대회였다. 첫 번째 오르막에서 코피가 앞서갔다. 바탈리를 포함한 다른 선수들은 결승선이 너무 멀었기 때문에 추격하는 것을 망설였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 코피는 혼자서 멋진 기량을 선보이며 모든 선수들을 앞질러버렸다. 그다음에 열린 지로 디탈리아에서는 바탈리가 근소한 차이로 코피를 이기며 그에게 멋지게 복수했다.
두 사람은 팀 동료였지만 경기에서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전후 이탈리아 국민의 절반은 성실하고 신앙심이 깊은 바탈리를 응원했고 나머지 절반은 영화배우 못지않은 멋진 외모의 코피를 응원했다. 사이클 팬들은 누가 더 뛰어난 선수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다.
1947년 지로에서 연출됐던 장면은 두 사람의 경쟁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경찰이 손에 곤봉을 들고 한쪽은 바탈리를 위해 다른 한쪽은 코피를 위해 두 개 부대로 나누어 서 있었다. 밀려드는 군중들 때문에 바리케이드가 부서지고 경찰의 방어에도 불구하고 두 스타가 머문 호텔이 팬들로 둘러싸였다.
코피의 전성기는 1949년이었다. 그는 이해 처음으로 투르에 출전했다. 1948년 우승자인 지노 바탈리는 우승을 지켜야 했다. 두 사람은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코피는 이미 지로 디탈리아에서 세 번 우승했고 처음으로 투르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코피는 서른 살, 바탈리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이미 바탈리는 '늙은 바탈리'로 불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피레네에서는 거의 같이 달렸다. 그러나 알프스로 접어들자 상황이 달라졌다. 250km에 이르는 오르막 구간이 시작됐다. 마들렝과 이조아드, 몽주네브르, 세스트리에르를 올라가야 했다. 대부분의 도로는 비포장이었고 비가 쉴 새 없이 내렸다. 그러나 코피는 여전히 젊었고 힘이 있었다. 그가 마들렝 중간을 오르고 있을 때에는 아무도 그를 따라잡지 못했다. 바탈리도 마찬가지였다.
코피는 산악구간과 타임트라이얼에서 이겼고 종합 성적에서 바탈리를 11분 차이로 앞섰다. 그는 더 큰 차이로 이길 수 있었지만 바탈리를 존중해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코피는 바탈리의 생일날 그가 구간 우승을 차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됐다. 이미 누가 가장 뛰어난 선수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위는 코피, 2위는 바탈리였다.
코피는 투르 드 프랑스에서 두 번 우승했고 지로 디탈리아에서 다섯 번 우승했다. 1949년과 1952년에는 한 해에 두 대회를 모두 우승했다. 지금도 해마다 지로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코피에게 헌정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세계도로사이클 챔피언이었으며 한 시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 외에도 파리-루베, 밀란-산레모 대회에서 수많은 승리를 기록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세 명의 선수에 들어간다. 만약 2차 세계대전으로 그의 경력이 중단되지 않았다면 그는 에디 메르크스에 필적하는 업적을 달성했을지도 모른다.
현대 사이클링의 시작
당시의 사이클 선수는 대부분 농촌이나 공장 노동자 가정 출신이었다. 사이클은 이들이 고단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다. 코피도 가난한 농촌 출신이었지만 그는 상류층 출신처럼 보였다. 그는 승리했을 때는 겸손하고 패배했을 때에도 결코 품위를 잃지 않았다. 그는 키가 크고 원통형의 가슴과 긴 다리를 갖고 있었다. 외형은 보통 사람과 특별히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심장과 폐는 사이클에 아주 적합했다. 그는 힘이 전혀 들지 않는 것처럼 우아하고 자연스럽게 자전거를 탔다.
그는 사이클링에 과학을 도입해 이 스포츠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는 카바나의 영향으로 식이요법을 지켰고 적당한 수면과 청결한 생활을 했다. 당시 선수들은 안장 때문에 생기는 부스럼으로 대회 기간에 고생을 했다. 그러나 코피 이후 의사가 선수들을 계속 따라다니고 선수들이 매일 청결한 옷을 갈아입으면서 이런 병을 막을 수 있었다. 코피는 넘어졌을 때 찰과상과 부상을 입는 것을 막기 위해 처음으로 장갑을 사용했다. 코피는 이런 노력으로 사이클의 대중적인 이미지를 바꿔놓았다.
파우스토 코피(왼쪽)와 지노 바탈리(오른쪽)
그는 스타 선수를 위해 일하는 도메스티크들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도메스티크들이 오직 보조 선수의 위치에 머물렀던 과거와 달리 코피는 그들을 동료의 지위로 끌어올렸다. 그는 도메스티크가 앞으로 치고 나가서 적을 지치게 하는 전략을 처음으로 구사했다. 이런 전략은 사이클의 전략과 전술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는 자전거의 모든 것을 개선하기 위해 제조업자들과 신발 끈, 옷, 타이어 같은 것에 대해서도 협의했다. 그는 자전거에 대한 깊은 관심과 헌신으로 사이클 발전에 크게 기여 했다.
흰옷을 입은 여인
1953년 루가노에서 열린 세계도로사이클선수권대회에서 코피가 우승했을 때 한 장의 사진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사진에는 코피가 레인보우 저지를 수상하기 위해 시상대에 오르는 순간 하얀 코트를 입은 매력적인 여성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처음으로 캄피오니시모와 그의 연인 사이가 언론에 공개된 것이다.
이 여성은 줄리아 오키니(Giulia Occhini)였는데 이탈리아의 한 신문은 그녀를 가리켜 '흰옷을 입은 여인(Damma Bianca)'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두 사람은 다 기혼자였다. 코피는 그의 아내 브루나로부터 사랑과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불타는 듯한 눈을 가진 나폴리 여인에게서 그 사랑을 발견했다. 코피는 이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아내와 헤어졌다.
파우스토와 그의 애인의 연애 스캔들은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인 이탈리아를 뒤흔들었다. 이탈리아에서 이혼은 불법이었으며 줄리아 오키니는 코피의 아들을 낳기 위해 외국으로 가야 했다. 두 사람은 가톨릭교회와 사회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코피의 팬들은 그가 이 여인 때문에 예전처럼 잘 달리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1956년 코피와 그의 애인
파우스토 코피와 그의 애인의 연애사건은 이탈리아를 뒤흔들었다.
코피는 사회의 배척을 받으면서 은둔적인 경향을 갖게 됐다. 사이클을 떠나면서 그의 삶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코피는 1959년 라파엘 제미니아니, 자크 앙크틸과 함께 서부 아프리카의 어퍼 볼타(Upper Volta)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열이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말라리아에 걸렸는데 그 병은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의사는 그의 병을 너무 늦게 진단했다. 그는 1960년 1월 마흔 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쳤다. 리구리아에 있는 그의 집에는 수천 명의 팬들이 몰려들어 코피를 애도했다. 그의 집은 코피를 추모하는 기념관이 됐다.
연관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