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 이후 일본군은 남해안의 왜성에서 웅거하며 더 이상의 진격은 포기했다. 공격자의 입장에서 진격을 거부한 채 있는 다는 건 사실상 전쟁을 포기한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나지 않은 건 전쟁을 시작한 당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살아있었기 대문이다. 하지만 1598년인 무술년으로 접어들면서 도요토미의 생명이 얼마 안지 않았음은 조명일 삼국 모두에서 기정사실화 되고 있었다.
1598년 2월에는 도요토미가 죽었다는 첩보가 죽었다는 첩보가 조정에 도착한다. 그러나 선조는 도요토미가 정말 죽었다면 적들은 이를 숨기려할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보아 이는 적들의 계책일 것으로 판단한다. 인간성은 더럽지만 머리는 좋은 임금이라 그런지 도요토미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은 정확하였다. 이 때의 정보는 5공 시절에 있었던 김일성 사망설 같이 넘어갔겠지만, 이런 소문이 도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도요토미는 이미 병들어 서서히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도요토미는 그해 여름 넘기지 못 하고 죽고 만다. 한국인에게는 금수강산을 짓밟은 불구대천의 원수이지만 일본인에게는 전국시대 통일의 영웅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도요토미의 사망날짜는 8월 18일이다. 하지만 강항의 <간양록>에는 도요토미가 7월에 죽었다는 말이 있다. 또한 8월 5일자의 <선조실록>에도 도요토미가 이미 죽었다는 포로의 증언을 말하고 있는 의병장 임환의 보고가 첨부된 전라병사 이광악의 장계가 실려 있다. 이외에도 입부 이순신이 도요토미가 7월초에 죽었다는 보고를 하는 등 조선군은 여기저기서 귀환포로 등을 통해 도요토미 사망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다. 물론 도요토미가 병석에 누우면서 생긴 유언비어일 수도 있지만 도요토미의 죽음이 상당기간 비밀에 부쳐졌을 가능성도 높다. 그 뒤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의 포스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노리는 일본 영주들의 권력다툼이 있고 종전 후 세키가하라 전투라는 내전으로 이어지지만, 이는 여기서 자세히 논할 문제는 아니기에 넘어간다.
도요토미의 죽음은 곧 극비리에 일본군에 아려짐과 함께 철수명령도 내려진다. 하지만 조명연합군도 동토미의 죽음을 인지하고, 이런 가운데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계획한다. 그것은 1차 울산성 전투 직후 경리 양호가 입안한 사로병진이었다. 이 작전은 조선의 지형적 조건 상 군사들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은 성공하기 어려우므로 군사들을 나누어 각 지역을 책임지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본래는 육군을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으로 나누고 수군은 각 육군에 배속하는 형태였으나 1차 울산성 전투로 수군의 지원 필요성을 느끼면서 수군을 수로군으로 독립시켜서 사로군을 이루었다.
각군의 대장은 모두 명나라 장수가 맡아서 동로군의 대장은 마귀, 중로군은 이여송의 동생 이여매, 서로군은 유정이 맡았으며 수로군 대장은 진린이었다. 이 중 중로군 대장은 이여송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이여매를 형을 대신하게 되고, 동일원이 이여매를 대신하여 중로군의 대장이 된다. 이 사로군이 각지의 일본군에게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사로병진이다.
사로의 대장 중 진린이 가장 먼저 내려가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합류한 것에 이어서 8월 18일에는 육군의 대장들이 한양을 출발한다. 마귀의 동로군은 경상좌병사 김응서와 함께 9월 중순 가토 기요마사가 있는 울산의 도산성을 포위한다. 9월 하순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지만, 울산성의 가토군은 동로군의 유인작전에도 넘어가지 않고 성곽에 의지하며 수성전을 계속한다. 일본군이 해안가에 축조한 왜성은 종전 후 조선 조정에서도 그 양식을 본받아 축성을 하자 할 정도로 견고하고 수성에 효율적이기에 함락은 쉽지 않았다. 여기에 부산에서 일본 구원군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마귀는 동로군을 이끌고 경주로 철수하였다. 1차 울산성 전투가 가토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붙인 것과는 다르게 2차 울산성 전투는 이렇게 맥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다.
동일원의 중로군은 경상우도 지역으로 진출하여 사천 등지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사천성의 일본군을 지휘하는 무장은 시마즈 요시히로였다. 어느 드라마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보다 딸리는 무장에 한낱 도자기 도둑으로 비쳐지지만, 실제 역사의 시마즈는 전국시대의 이름난 무장으로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자신이 가담한 서군이 도쿠가와의 동군에 의해 패배에 직면하자, 도쿠가와군의 본진을 정면으로 가르면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간 ‘시마즈의 후퇴’를 감행한 맹장이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야 조선에 침입한 장수이며 그 후예들이 메이지 유신 후 정한론을 주장한다는 걸 생각하면 원수로 분류되겠지만, 그 능력까지 폄하할 이유는 없다.
동일원의 중로군은 초반에는 승전보를 올리며 진격하였다. 성주와 고령을 거쳐서 9월 18일에는 진주로 진격하였고, 20일에는 남강을 넘어서 일본 진영을 점령하였다. 9월 28일에는 조선의 정기룡을 선봉으로 삼아 시마즈군이 주둔한 사천성을 포위하였다.
시마즈는 적들의 병력 규모가 큰 것을 보고 자신의 휘하 병력들을 사천 신선으로 후퇴시켰다. 여기서 동일원은 작은 승리에 취하여 시미즈군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지만, 이는 시마즈의 유인에 넘어간 결과였다. 결국 중로군은 시마즈군은 반격에 큰 피해를 입고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중로군의 피해는 일본 기록은 3만8천여 명, 명나라 기록은 3~4천명, <선조실록>에 나온 기록은 7~8천명이다. 사천성 전투로 시마즈 요시히로는 무장으로서의 위엄을 떨쳤지만, 명나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체면도 구기고 말았다. 하긴 몇 년 후 적진의 본대를 가로지르고 ‘후퇴’할 인물이 그 못 싸우기로 이름난 명나라 군대에게 패할 리야 있겠는가?
유정의 서로군은 순천 예교성의 고니시군을 치기 위하여 9월 중순 전주에서 군대를 정비하고 남하하였다. 서로군에는 2만의 명군과 6천의 도원수 권율 휘하 조선군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동로군, 중로군과 다른 점은 조명연합함대로 구성된 수로군이 예교성 앞바다에 있는 유도에 주둔하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전쟁 기간 중 최초이자 최후인 조명 연합 수륙합동 작전이 실시되는 것이었다.
조명연합함대가 유도에 이른 것은 9월 20일, 유정의 서로군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점은 어느 드라마에서는 조선 수군의 지휘권을 유정에게 주려고 하자 이순신의 수군이 반발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는데, 실상은 그 반대였다. 이순신이 진린 때문에 작전을 못 한다고 하니 조정에서는 유정에게 지휘권을 주는 것이 수군을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하고 시행하려 했으나, 진린 측이 눈치 채면서 무산된 것이다. 물론 싸울 생각이 없는 건 유정도 마찬가지라서 결국 제대로 싸울 의지와 능력이 있는 고위지휘관은 이순신 뿐이었다.
유정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강화회담을 미끼로 하여 고니시 유키나카를 유인하여 생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명나라 중군을 유정으로, 도원수 군관으로 권율로 구미서 군사 수백을 거느리게 하고 적군도 안면을 아고 있는 전라도 순찰사 황신은 가짜를 꾸미지 않고 고니시를 맞이하게 하였다. 그리고 비둘기 20마리를 숨겨두었다가 고니시가 막사로 들어오면 날려 보내면, 이를 신호로 적을 공격하고 고니시를 생포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고니시는 멀리서 군사의 형세가 강해보임을 보고 의심을 하여 쉽게 접근하지를 않았고, 잠시 후 비둘기가 날아가고 명나라 군대가 실수로 포를 쏘니 고니시가 함정을 눈치 채고 달아나면서 이 계획은 실패하였다. 유정은 곧 서로군을 움직여 적들을 추적하였으나 고니시는 잡지 못 하고 미처 성에 들어가지 못한 적 병사들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거둔 구급이 98개였으며, 명군의 피해도 많았다. 이렇게 하면서 육지에서 중로군이 순천 예교성을 포위하자 바다의 수군도 움직여서 바다에서 성을 봉쇄하였다. 수군은 검은 베로 돛을 만들고 여러 가지 모양의 깃발을 그 사이사이에 세워두니 매우 웅장해 보였다.
다음날인 21일에는 중로군은 목책을 설치하고 해자를 파려했으나 적이 막아 싸워서 성에 접근하지는 못 했다. 일본군은 성위에 포루를 설치하면서 짤막한 목채를 같이 두어 그 안에 허수아비를 세우면서 발포하여 중로군의 접근을 막았다. 수군은 아침부터 진격하여 활과 포를 쏘며 하루 종일 싸웠지만 물이 얕아서 적군을 추적할 수는 없었다. 한번은 적군 경쾌선이 정찰을 위해 접근하자 이를 바로 추격, 적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갔다. 배와 배에 있던 물건들은 진린에게 바쳐졌다. 이날 밤, 유정은 횃불을 들고 공격할 듯 진격하다가 불을 끄고 다시 진으로 돌아오는 폼만 잡고 싸우지는 않는 행위를 지속하였다. 적은 여기에 연달아 포를 쏘아 불이 성 밖으로 번졌다가 한참 후에 꺼졌다.
다음날 수군이 다시 진격하여 예교성을 공격하니, 일본군은 죽기를 각오하면서 물 가운데로 나아가 수군을 포위하였으나, 수군은 많은 수급을 거두고 조수에 맞추어 물러났다. 그러나 이 날의 전투에서는 유격 계금이 왼쪽 어깨에 총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명군 11명이 전사하였다. 조선군도 옥포만호와 지세포만호가 부상을 당하였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음날인 23일, 진린은 명군의 전사와 부상에 화를 내면서 천만호 및 홍주대장과 한산대장을 각각 곤장 7대를, 금갑도, 제포, 회령포만호에게 15대씩을 때렸다. 아마도 전날의 전투에서 계금이 탄 배가 위기에 처해졌던 게 아닌 가 추측된다. 진린의 이런 행동은 명군의 l해에 대한 분풀이 외에도 유정에게 수군 지휘권이 넘기려는 논의도 있은 점을 감안한 지휘권 확립도 목적을 둔 게 아닌 가 추측된다.
그 후 며칠간은 유정이 공성무기를 준비한다며 전투를 중지하였기에, 수군도 유도에서 대기한다. 계절은 늦가을로 접어들면서 강한 바람이 불었기에 며칠간 배를 움직이기도 힘든 날씨도 이어졌지만, 수군은 묵묵히 다음 전투를 대비하였다.
10월 1일, 유정은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여 다음날 전투를 재개하기로 하였다. <난중일기>에 이 날 새벽 진린이 유정에게로 가서 잠깐 얘기하고 왔다는 걸로 보아 진린과도 협의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인 10월 2일, 육지에서는 유정이 동틀 무렵부터 중로군을 지휘하여 진격하였고, 수군 역시 병력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육지의 중로군의 공격은 그다지 신통치가 않았다. 적 성안에 진입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일본군의 공격으로 전사하거나 성안으로 끌려가는 명라나 군사들이 속출하고, 방위를 해야 할 군사들이 밤에 자지를 못해서 졸다가 습격을 받기도 하니 이날 죽은 명군이 8백 명이었다. 수군은 진격하여 적극적인 공격을 감행, 많은 적을 죽였지만 사도첨사 황세득과 이청일 등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제포만호 주의수와 사량만호 김성옥, 해남현감 유형, 진도군수 선의문, 강진현감 송상보 등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3일에는 유정이 진린에게 비밀서신을 보내어 조수를 틈타 수력협공을 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래서 초저녁에 출동한 수군은 조수를 타고 적군의 수채에 육박하여 포탄이 고니시의 막사까지 맞추자, 일본군은 당황하여 동쪽으로 몰리니 서쪽은 자연히 비게 되었다. 그러나 육지의 서로군은 별다른 공격을 취하지 않아 성을 함락시키지 못 하였다.
그러는 동안 해안 가까이 접근한 명 수군은 곧 바닷물이 빠지면서 갯벌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군이 이 배들을 공격하여 불을 지르니, 사선 19척과 호선 20여척이 불타게 되었다. 명나라 수군들은 꼼짝도 못 하고 적군을 상관(上官)이라 부르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육지에까지 들렸다. 조선 지형에 어두운 명 수군의 실책으로 이들이 위기에 빠진 것이지만, 이 상황에서 이순신은 명군만 피해를 입으면 나중에 문제가 될 것을 생각하여 조선 판옥선도 7척을 일부러 갯벌에 갇히게 한다. 판옥선은 배가 높고 견고하고 활과 포를 쏘며 대항하니 적군이 접근하지를 못하였다. 판옥선이 성벽 같은 역할을 한 셈이었으니 그 덕분에 조선 판옥선은 무사히 다음 조수를 타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음날인 4일, 수군은 분노한 진린은 수군을 다시 출동시킨다. 그러나 육지에서의 서로군의 공격이 없어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다. 이에 진린은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한 서로군에 대하여 분노해 육지에 올라 유정의 막사에 가서 손으로 유정의 수자기(帥字旗)를 찢으면서, “마음속 심사가 좋지 못하다.”고 책망하고, 곧 사유를 갖추어서 급히 군문에 알리니 유정은 얼굴빛이 흙빛과 같이 되어 가슴을 치고 통곡하면서, “장관 중에 능한 사람이 없는데 내가 홀로 어찌하겠소.” 라며 변명하였다. 아마도 진린도 적군보다도 더 도움 안 되는 아군의 행태에 분노했을 테니, 이순신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는 않았을까? 이리하여 두 명나라 장수들은 깊은 불화에 빠지게 된다.
수군의 공격은 예교성을 위협하였지만 서로군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 상황에서 6일에는 권율이 이순신에게 유정이 달아나려 한다는 편지를 보낸다. 과연 다음날인 7일 서로군은 유정의 명령에 의해 군량과 병장기도 내버려 둔 채 퇴각한다. 군량을 불태우라는 지시가 있기는 했지만 미처 타지 못한 것은 고스란히 일본군에게 넘어가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렇게 하여 7년간의 전쟁 중 처음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수륙협공 작전은 육군의 무성의로 별 효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수군은 해안에서 싸우느라 육지의 포와 조총사거리에 노출되면서도 적군을 크게 위협해가면서 용감히 싸웠지만, 서로군이 대응을 하지 않으니 계사년부터 소강기에 있은 다른 해전들처럼 바닷가에서 위협을 하는 정도 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수군이 포기를 한 건 아니었다. 고니시군은 영원히 순천 예교성에 살 게 아니라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육지로 가는 것은 무리이고 반드시 해로를 이용해야 했다. 그러나 바다에는 조명연합함대가 버티고 있으니, 서로군은 물러갔지만 고니시는 결코 전투에서 이겼다고 말할 처지가 못 되었다. 바다를 사이에 둔 고니시군과 수군의 대치상황은 결국 이순신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첫댓글 제가 어디서 본것에는 도요토미가 죽으니깐 가신들이 시신에 소금을 뿌려서 방부 처리했는데 그 시체가 썩으면서 냄새가 나는 바람에 도요토미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고 합니다.
을파소님 질문이있습니다...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사도첨사 황세득이 진린을 구하려다..전사하지 않습니까??..그것이 사실입니까??...그리고 황세득이 전사하고 나서 경상우수사 이순신이 통제사 이순신에게 " 장군의 형님께서 전사하셔서 애통하시겠습니다 " 이러는데...황첨사가 실제로 통제사의 사촌형내지 친척뻘인가요
황세득은 진린 구하기 전에 죽었다고 합니다.(것도 조총에 맞아서) 고로 드라마는 KIN.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왜곡한 사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광양현감 어영담 같은경우 진중무과시험날 돌아가신것으로 아는데 드라마에선 그분이 무과를 감독까지 하시더군요, 또한 노량해전에서 와키자카 장군이 수치심에 할복한다고 했는데.. 그는 나중에 일본에서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이 전쟁할때도 참전하죠
글에도 황세득은 명군이 갯벌에 갇히기 전날에 탄환에 맞아죽었다고 나와있습니다. 황세득은 이순신의 아내의 언니의 남편, 즉 손윗동서입니다. 겁쟁이는 맹장로 만들고 정작 용감한 사람은 겁쟁이로 만드는 드라마는 믿을 거 하나도 없습니다.
정확하십니다 얼라이언스님 ^^;
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불멸의 이순신의 문제점은 사람들이 잘못된 역사를 그렇게 받아 들일수도 있다는것입니다. 그런데 원작이 김탁환님의 불멸이라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불멸에서 원균을 조선의 창이라는 맹장으로 표현한 점에서 꼭 이순신의 작가들말 나무랄수는 없는일 같습니다. 안위의 일도 그렇구요.
연재 끝나기전에 김탁환이고 드라마 피디 작가고 모두 강하게 비판할 부분이 있을겁니다. 드라마 작가'만' 나무라는 게 아니라 드라마 작가'도'나무라는 게 제 입장입니다. 더군다나 원작과는 사실상 결별한 지금의 드라마이기에 작가의 공부부족과 무성의는 더 비난 받을 만합니다.
'불멸의 딱 하나 좋은 점!' 어려운 한문으로 쓰여진 상소문들을 구해다 한글로 읽게 쉽게 고쳐 주었다.(대부분 상소문에 한문이 섞여 있어 한문에 쥐약인 본인에겐 매우 다행이라는-_-;;;;... 소설이니깐 그런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