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양진씨 전기축보(1709) 손록계대. -아래- 임신보(1992) 손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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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기축보 계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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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致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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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휘 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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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子
휘 福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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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子
휘 福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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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휘 五紀
→... |
5子
휘 五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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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子
휘 五瑞 |
3子
휘 五紀
출계出繼
휘福期后 |
2子
휘 五行 |
1子
휘 五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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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子
휘 汝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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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子
휘 汝義 |
3子
휘 汝貞 |
2子
휘 汝亨 |
1子
휘 汝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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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휘 汝說 |
2子
휘 수
3子
휘 희영 |
1子
휘 欽 |
3子
휘 繼一 |
2子
휘 興一 |
1子
휘 克一
여평군
파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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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휘 誠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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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보
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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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世
휘 致常
별좌공
파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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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휘 誨
문과급제
참고자료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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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子
휘 福期
生 계유
(1453)년
卒 경자(148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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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子
휘 福壽
生 庚戌(1430)年
卒 己酉(148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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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휘 五紀
생부
(生父):
휘 福壽
生 癸亥
(1503)년
卒 丙辰
(1556)년 |
5子
휘 五德 |
4子
휘 五瑞 |
3子
휘 五紀
출계出繼
휘福期后 |
2子
휘 五行 |
1子
휘 五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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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子
휘 汝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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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子
휘 汝義 |
3子
휘 汝貞
生 신해
(1551)년
訂-癸巳(1533)년생
*참고자료 2) |
2子
휘 汝亨 |
1子
휘 汝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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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휘 汝說 |
2子
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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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子
휘 欽 |
3子
휘 繼一 |
2子
휘 興一
*참고
자료 3) |
1子
휘 克一
여평군
파조
生1584년
卒16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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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8년 9월 녹권하사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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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子 弘一
2子 휘 鈺
3子 휘 鍵 |
1子 휘 銑
2子 휘 鐵
3子 휘 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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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휘 誠一 |
제임스 진
해송(海松) 陳玉洙
여양진씨 보감편(1999년발간) 15세 휘 극일 여평군 행장을 고찰한바, 조선 제16대 인조 6년(1628) 9월에 決策
정난소무공신3등(靖亂昭武功臣)三等으로 여평군(驪平君)에 封해지고 녹권을 하사받았다. "라고 적고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양진씨의 최초족보인 전기축보가 만들어지기 81년전 입니다.
매호공계의 사조기록(증조:휘 福期, 조:휘 五紀, 부:휘 汝義)은 어디에서 나온것일까요?
전 기축보(1709) 발간당시 만들어진 계대가 ,"1628년의 녹권에 기록되었다면 녹권의 공신력을 의심하게됩니다.
◎ 참고자료 1) 여양진씨 매호/전서/별좌공파 11세 진회(陳誨)문과급제기록.
NO. 016. 세종(世宗) 08年(1426) 丙午式年榜 34人
(武科 李宗蕃 등 28人) 올해 4월 11일(甲戌)에 전시(殿試)가 있었으며,시험은 책문(策文)이었다.
이 날짜 CWS 기사를 보면,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서 회시(會試)에 입격(入格)한 유생(儒生) 남수문(南秀文) 등에게 책문(策問)"하였다. 그 책문에,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지혜로서도 반드시 급무(急務)부터 먼저 한다는 것은 맹자(孟子)의 격언이니, 정치를 말하면서 급무를 먼저 하지 않는다면 모두 구차스러울 뿐이다. 지금 우리 국가는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께서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아 비로소 큰 기업(基業)을 마련하였으며, 태종 공정대왕(恭定大王)께서는 신공(神功)과 성덕이 전고(前古)에 뛰어나, 중국을 섬기기를 예(禮)로써 하므로, 중국의 황제가 그 지성을 가상히 여기고, 이웃 나라와 사귀는 데에도 도리가 있으므로, 왜국(倭國)이 와서 복종하여 조정과 민간이 승평(昇平)하며, 백성이 편안하고 물질이 풍성하게 된 것이 40년이 되었다.
나는 선대의 큰 공적을 계승하게 되어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선대에 누가 될까봐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감히 편안하지 못하였고, 이 나라가 장구(長久)하게 다스려지고 오래도록 편안할 도리에 이르기를 기대했는데, 함길도 경원(慶源)의 일만은 의논할 만한 것이 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공험진(公險鎭) 이남은 나라의 옛날 봉강(封疆)이니, 마땅히 군민(軍民)을 두어서 강역(疆域)을 지켜야 될 것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경원군은 삼면(三面)에서 적의 공격을 받게 되고 인민이 적으므로 적군을 방어하기가 어려우며, 그 토지가 좁아서 백성들이 많이 살수 없으니, 마땅히 경원의 수비를 폐지하여 경성(鏡城)으로 옮겨야 될 것이라.'고 하며, 어떤 이는 '경원에 군사를 둔 것은 태종의 성헌(成憲)이므로 변경하여 고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세 가지 설(說)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이익이 되고, 어느 것이 손해가 되는가. 려연(閭延),강계(江界) 등의 땅은 야인(野人)의 국경에 가까우므로, 야인들이 왕래하면서 양식을 청구하지 않는 달이 거의 없으니, 장차 저들이 청구하는 대로 들어 준다면 관청에 저장된 곡식이 없게 될 것이니, 그들의 한정 없는 욕심에 응할 수 없다. 하지만 저들이 만약 하고자 한 바를 이루지 못한다면 반드시 원한(怨恨)을 품을 것이니,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위엄으로 두렵게 하고 은혜로 생각하게 하여, 변방의 백성이 그전대로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하겠는가? 이것이 오늘날의 급무이므로 관인이 듣고자 하는 바이다. 자대부(子大夫)들은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다스리는 대체(大體)를 알고 있을 것이니, 당세(當世)의 할 일에 대하여 강론함에 익숙할 줄 안다. 각기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고, 그밖에 시정(時政)의 잘 되고 잘 못된 점과 민생의 기쁜 일과 근심되는 일도 또한 각기 진술하되, 숨김이 없도록 하여 내가 직언을 구하는 뜻에 보답하라,"라는 현실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번 식년시(式年試) 인원이 34人으로 된 것은, 이미 1423년 계묘식년방 32人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세종 5년의 식년시 문과에서 전시에 참여하지 못하고 탈락했던 김시석(金視石)이란 사람이 이번에 전시를 거쳐 급제(及第)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의 생원시(生員試)는 2월 21일(乙酉)에 실시하여 신석견(辛石堅) 등 100인을 뽑았다. |
고유번호(固有番號) |
성명(姓名) |
본관(本貫) |
거주지(居住地) |
부명(父名)-아버지 |
00464 |
황보량(黃甫良) |
영천(永川) |
ㅇㅇ |
황보규(黃甫規)? |
00465 |
조전(趙篆) |
ㅇㅇ |
ㅇㅇ |
ㅇㅇㅇ |
00466 |
양계원(楊繼元) |
청주(淸州) |
ㅇㅇ |
양배(楊培) |
00467 |
고승안(高承顔) |
제주(濟州) |
묘:면천(沔川) |
고득종(高得宗) |
00468 |
남수문(南秀文) |
고성(固城) |
ㅇㅇ |
남금(南琴) |
00469 |
함한(咸漢) |
강릉(江陵) |
강릉(江陵) |
함화(咸華) |
00470 |
오신지(吳愼之) |
ㅇㅇ |
강릉(江陵) |
오효상(吳孝常) |
00471 |
진회(陳誨) |
여양(驪陽) |
횡성(橫城) |
진치상(陳致常) |
00472 |
김효기(金孝起) |
김해(金海) |
ㅇㅇ |
ㅇㅇㅇ |
00473 |
신석견(辛石堅) |
영산(靈山) |
ㅇㅇ |
신인손(辛引孫) |
00474 |
김맹헌(金孟獻) |
안동(安東) |
경기도, 광주(廣州) |
김명리(金命理) |
00475 |
조장(趙璋) |
횡성(橫城) |
ㅇㅇ |
조온보(趙溫寶) |
00476 |
양억(楊億) |
청주(淸州) |
ㅇㅇ |
양진(楊震) |
00477 |
박여(朴旅) |
춘천(春川) |
ㅇㅇ |
박광선(朴光先) |
00478 |
배강(裵 (木+工) |
흥해(興海) |
안동(安東) |
배상지(裵尙志) |
00479 |
김신민(金新民) |
경주(慶州) |
경(京):한양(漢陽)-서울 |
김중성(金仲誠) |
00480 |
김문효(金文孝) |
ㅇㅇ |
ㅇㅇ |
ㅇㅇㅇ |
00481 |
심수(沈粹) |
ㅇㅇ |
ㅇㅇ |
심의생(沈宜生) |
00482 |
손하(孫何) |
일직(一直) |
안동(安東) |
손인(孫인) |
00483 |
정창손(鄭昌孫) |
동래(東萊) |
묘:경기도 광주(廣州) |
정흠지(鄭欽之) |
00484 |
유의손(柳義孫) |
전주(全州) |
경(京)-서울 |
유빈(柳濱) |
00485 |
박경손(朴慶孫) |
ㅇㅇ |
ㅇㅇ |
박부(복)항(朴復恒) |
00486 |
황서(黃瑞) |
ㅇㅇ |
ㅇㅇ |
ㅇㅇㅇ |
00487 |
권형(權衡) |
안동(安東) |
김해(金海) |
권태저(權台邸) |
00488 |
우효강(禹孝剛) |
단양(丹陽) |
경(京)-서울 |
우양수(禹良壽) |
00489 |
김시석(金視石) |
ㅇㅇ |
ㅇㅇ |
김흥세(金興世) |
00490 |
장아(張莪) |
단양(丹陽) |
죽산(竹山) |
장환(張歡) |
00491 |
윤미견(尹彌堅) |
무송(茂松) |
경(京)-서울 |
윤충보(尹忠輔) |
00492 |
허후(許 (言+羽) |
하양(河陽) |
경(京)-서울 |
허조(許稠) |
00493 |
안자립(安自立) |
충주(忠州) |
ㅇㅇ |
안홍조(安弘祚) |
00494 |
최자연(崔自淵) |
양천(陽川) |
ㅇㅇ |
최승윤(崔承潤) |
00495 |
전윤승(田允升) |
ㅇㅇ |
ㅇㅇ |
ㅇㅇ |
00496 |
민원(閔瑗) |
여흥(驪興) |
서흥(瑞興)? |
민수정(閔守貞) |
00497 |
임중(任重) |
ㅇㅇ |
ㅇㅇ |
ㅇㅇ |
집필자/해송. 조선시대 문과백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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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2)
<< 진여정(陳汝貞) / 明宗 13 式年 進士 >>
[시험년도] 명종(明宗) 13 (1558) 식년(式年) 진사(進士)
[합격등위] 3등 0080
[본인성명] 진여정(陳汝貞)
[본인 자字] 정숙(正叔)
[본인생년] 계사(癸巳) 1533
[본인본관] 나주(羅州) 진(陳)
[본인거주] 나주(羅州)
[본인구존] 자시하(慈侍下)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진우평(陳友平)
[부친관직] /전훈도(前訓導)
[안항(형)] 진여원(陳汝元), 진여형(陳汝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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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 나주진씨 연혁 ▼
본관 연혁
성씨의 역사
분적종 및 분파
인구분포
본관 연혁
나주(羅州)는 전라남도 나주시(羅州市) 지역으로 백제 때 발라군(發羅郡)으로 불리었고, 뒤에 죽군성(竹軍城)으로 바뀌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이곳에 대방주(帶方州)를 설치하였으며, 686년(신라 신문왕 6)에는 통의군(通義郡)으로, 757년(경덕왕 16) 이후로는 금산군(錦山郡) 또는 금성군(錦城郡)으로 부르며 무주(武州: 光州)의 관할로 두었고, 회진현(會津縣)·여황현(艅艎縣)·철야현(鐵冶縣) 등이 부속으로 영입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나주로 지명이 바뀌었고, 983년(성종 2)에 나주목이 설치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가 되었다. 1018년(현종 9) 다시 나주목으로 고쳐 5개의 속군(무안·담양·곡성·낙안·남평)과 11개의 속현(철야·반남·안노·복룡·원율·여황·창평·장산·회진·진원·화순)을 거느렸다. 1310년(충선왕 2)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승격하였다.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주로 목(牧), 부(府)로서 전남지역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로서 나주군 등을 관할하였고,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하여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고, 금성시는 1985년 나주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나주시로 개편되었다.
성씨의 역사
나주진씨(羅州陳氏) 시조▶ 진온(陳溫)은 여양진씨(驪陽陳氏) 시조 진총후(陳寵厚)의 증손으로 고려 강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예빈경(禮賓卿), 지공주사(知公州事), 지나주사《知羅州事-訂▶나주목사(羅州牧使)》를 역임하였다. 후손들 중 일부가 여양진씨에서 분적하여 그를 시조로 하고 나주(羅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분적종 및 분파
고려시대에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진영약계(陳英略系) 호장(戶長) 진의(陳懿)를 시조로 전하는 문헌도 있으나 후손을 고증할 수 없다. 나주진씨는 여양진씨(驪陽陳氏)에서 분적했다가 1967년 여양(驪陽)으로 합보(合譜)되었다.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나주진씨는 1,217가구 총 4,020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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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양진씨 예빈/전한공파 15世 훈도(訓導)진우평(陳友平)선계도(先系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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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온
(陳溫)
(上系)
예빈경
파조 |
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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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子 진신
(陳信)
강릉진씨
江陵陳氏
관조(貫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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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子 진취
(陳就)
나주진씨
羅州陳氏
관조(貫祖) |
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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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영찬(英贊)中系파조 |
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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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子 휘 인각
(麟角)
정자공파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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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子휘 용각(龍角)
贈 병조판서 |
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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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子 휘 장(莊)
진사공파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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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子 휘 수(遂)
전한공파조 |
2子 휘 준(遵)
참의공파조 |
1子 휘 선(選)
목사공파조 |
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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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휘 숭원(崇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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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
5子 휘 가신
(可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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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子 휘 가의
(可義) |
3子 휘 가인
(可仁) |
2子 휘 가제
(可悌) |
1子 휘 가효
(可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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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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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휘 세호
(世豪) |
子 휘 세전
(世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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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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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휘 응수
(應秀) |
子 휘 훈(訓)
생원3등급제 훈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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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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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휘 대영
(大榮) |
子 휘 덕수
(德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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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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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子 휘 덕신(德新) |
1子 휘 효신
(孝臣) |
子 휘 순흠
(舜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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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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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휘
우평
(友平)
훈도(訓導) |
子 휘
이평
(以平) |
子 휘
후평
(後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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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3)
<< 진흥일(陳興一) / 光海 05 增廣 進士 >>
[시험년도] 광해(光海) 05 (1613) 증광(增廣) 진사(進士)
[합격등위] 3등 0048
[본인성명] 진흥일(陳興一)
[본인 자] 경중(敬中)
[본인생년] 계사(癸巳) 1593
[본인본관] 횡성(橫城) 진(陳)
[본인거주] 횡성(橫城)
[본인구존] 구경하(具慶下)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진여의(陳汝義)
[부친품계] 어모장군(禦侮將軍)
[안항 (형)] 진기일(陳起一)
진여정/진흥일 두분의 진사급제기록을 살펴보면 본관이 다르다.
진여정-나주진씨,/진흥일 횡성진씨! 숙질간의 본관이 다른이유를 살펴 보고자 한다.
여양진씨(참고자료:전기축보,임신보)손록 사적과 계대표를 고찰한바 " 진여정 교수관공이 철원교수관으로 부임한후,
강원도 횡성군에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근거>진여정(陳汝貞)-卒:1607년, 묘:강원도 횡성군 횡성면(횡성읍?)입암리
금화몽정 상 장등 간좌 쌍분 배위:왼쪽, 비와 상석이 있음. 金花夢亭上長嶝 艮坐 雙墳 부左有碑床石)근거>진여의(陳汝義)-卒:1618년, 묘:강원도 횡성군 횡성군 횡성읍 뒤 천교운암정 뒤 자좌 (邑後川橋雲岩亭後子坐)
검토결과>중부(仲父)진여정 교수관공이 1607년 졸하면서 횡성에 장지를 마련하며 후손이 횡성에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카인 진흥일(陳興一)이 6년후(1613)에 "진사시에 응시할때 거주지인 횡성을 관향으로 기록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씨족원류,씨족통보등, 여러 사적을 고찰한바 "여타성씨들도 이시기에 거주지를 본관으로 하여 분파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우리 여양진문(驪陽陳門)도 본관이 130여개로 분류된 사실이 '씨족통보"등에서도 확인이 된다.
여양진문의 여러 일가들이 종중에서 전하는 선조유래에 대하여, "구전과 사적을 토대로 궁금증을 풀어가보자.
여평군공파의 3대 종중에 전남, 장성 유탕문중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보학에 밝고 종중역사를 잘알고 계신분도, 당신의 계보가 예빈경파로 알고있지만 전기축보에서 부터
계대가 어긋나 있어, 지금에와서 바로 잡는다는것이 어렵고 고통스럽다 "하셨다.
증언:고창종친회 총무 > 진종상-여평군공파.
전한공 파조의 묘가 장성 유탕문중에서 가까운 거리에 실재로 있고, 당신도 제사에 한번 참례를 하였는데 처가쪽(외손손)에서
제사를 받들도 있었는데 부끄러워 몸둘바를 몰랐으며, 향촉대를 냈더니... 돌아오는길 여비까지 주어 지금도 미안해 하고 있다.
증언>고창종친회 회장>진병우 예빈/전한공파 회장.
전한공파 후손들은 병우회장이 살아계실때, "묘소를 확인하여 다시 잃어 버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전한공의 증손녀 사위가 함양(咸陽) 박천손(朴千孫)인데 여양진씨 족보기록에는 없다.
이분들의 선계의 입향지도 나주이며, 8세 전한공의 벼슬 홍문관 전한(典翰)을 정확히 기록하고있다.
또다른 이유?
1) 전기축보를 살펴보면 진여형, 진여정, 진여의 세분 형제분들이 당시 다른 할머니에서 후사를 보았음을 알 수 있고,
후손들 사이에서 종중(장성 유탕문중?)의 적서(嫡庶) 차별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을 것이라 추측이 된다.
이런 이유들이 전기축보 발간당시, 예빈/전한공파를 떠나, "매호공계로 입보한 동기가 되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2) 예빈/陳遂 전한공의 장형(長兄)-목사공파 종손손 문중이 장성 오동(梧桐)문중이다. 장성 유탕문중과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
공신록권에는 매호공파라고 나와있던디... 방목에만 의존하지 말고 더욱 깊은 연구자료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