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67신]병산서원, 하회마을, 도산서원, 이육사문학관(2)
친구야, 모처럼 쓰는 편지는 안동의 어떤 ‘오래된 마을’ 이야기로 이어진다.
오래 전부터 가보고자 벼르던 하회河回마을이 그곳이다.
나는 그 이름보다 순우리말 이름인 ‘물돌이동’이 훨씬 더 살갑게 다가온다.
물론 사진이나 글을 통해 제법 알고 있는 곳이지만, 역시 백문 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임을 이번에도 느꼈다.
혹자는 상업화되어 옛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나, 시간만 있으면 한나절은 꼬박 그곳에 있었으면 할 정도로 좋기만 했다.
몇 백년을 거뜬히 견뎠다는 ‘섶다리’가 지난해 호우로 사라져 부용대를 가려면 우회를 해야 한다.
겸암선생이 비보책裨補策으로 1만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던가,
만송정萬松亭숲을 걷지 못한 것이, 특히 송뢰松籟 바람소리를 좋아하는 나는 못내 아쉬웠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여왕의 방문으로 크게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탤런트 유시원의 안내를 받으며 ‘작천고택’의 마루를 올라가느라 신발을 벗는 바람에 ‘국가기밀’인 종아리를 보였다던가.
여왕은 고택 안방에서 73세 생일상을 받았다.
2019년 아들인 앤드루왕자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20년 전 하회마을과 그곳에서 받은 생일상을 깊이 기억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제 쓴 편지에서 빠트렸다만, 병산서원을 2005년과 2009년 미국의 조지부시 부자父子 대통령이 다녀가기도 했다는 거다.
역사가 짧은 나라의 대통령은 그곳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여왕이나 대통령 방문을 강추한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쩌면 조선 500년을 통과한 대한민국이 ‘아주 오래된 미래의 나라’라며 '꼭 방문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전국에 집성촌集姓村이 수도 없겠지만,
풍산류씨豐山柳氏 집성촌인 물돌이동만큼 유래와 영향력이 큰 마을은 별로 없을 듯하다.
풍수風水로만 듣던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그 위의 ‘S자’코스 마을. 어쩌면 이런 곳에 터를 잡았을까?
그들의 지혜에 혀를 내둘렀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자리잡은 삼신당 신목神木인 600살 느티나무의 위용은
둘레가 5m여서 놀라는 것이 아니라 선조들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놀란 것이다. 앞산의 꽃뫼花山 덕분일까?
대대로 유명한 인물들이 즐비하고, 오늘날까지도 줄줄이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놀랍다.
겸암과 서애 형제의 우애와 그들이 남긴 수많은 스토리 역시 하나도 흘릴 것이 없다.
옥연정사(서애가 징비록을 짓던 곳)와 빈연정사(겸암이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 충효당(忠孝堂. 서애의 종택),
그 아버지의 ‘입암고택立巖故宅’. 이 마을 출신이라던가, 유시민 등이 '알쓸신잡'를 촬영했다는 '화경댁(북촌댁)' 등등등등.
자세한 이야기야 실제로 같이 답사하며 간단한 설명을 곁들여야 할 일이기에 줄인다.
그때는 여유를 갖고 ‘하회별신굿탈놀이’도 같이 보자구나.
병산서원, 하회마을, 도산서원 답사기로는 내가 읽은 것 중에 으뜸인 것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편(1170179쪽)>이다.
어쩜 그렇게 머리 속에 쏙쏙 들어오도록, 맛깔스럽게 스토리를 전개해가는지
그는 ‘문화유산 해설가’로 타고난 사람임에 틀림없다.
글이 통째로 맛있다. 이제는 "눈이 안보이고 아파서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하지 말고 꼭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다.
지식知識과 교양敎養이 팍팍 늘어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다.
그가 한 말이 늘 머리에 남는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그전과 사뭇 다르다”
어찌 그러하지 않겠는가.
이제 도산서원 근처(4km)에 있는 ‘이육사문학관’이야기이다.
아무리 시詩를 몰라도 들어보았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하는 <청포도靑葡萄>와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우는 소리 들렸으랴’로 시작하는 <광야曠野>라는 시로 유명한 이육사(李陸史, 1904~1944). 그는 나이 마흔에 일제의 잔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광복을 1년 앞두고
북경감옥에서 아깝고 분통터지게 순국殉國한 불굴의 항일독립운동의 시인이었다.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쓴 시인(심훈)도 있는데,
시인 ‘말당(서정주)’은 친일시를 남발하고도 전두환의 미소가 부처님보다 더 인자하다는 망발까지 부리며 장수를 했다.
춘원(이광수)은 또 어땠는가? 반민특위에 끌려가면서도 영혼없이 ‘붓을 꺾으며’라는 속보이는 시를 남겼다.
차라리 육당(최남선)처럼 죽을 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이육사의 짧은 인생은 ‘강철로 된 무지개’처럼 단단했다.
40년 동안 17번의 투옥, 꼿꼿한 선비집안의 후예답게 무너지지 않고, 더욱 더 조국을 사랑했다.
어머니를 비롯한 그의 6형제 모두 한마음이었다. 이제 고향마을 근처에서 영면하고 있는 것일까.
6형제가 어머니 회갑때 바친 글을 모아 만든 8폭병풍을 보고 놀랐다.
6형제의 우의友誼를 기리는 복원한 생가의 편액이 ‘육우당六友堂’이다.
그들의 그런 효심孝心이 있었기에 ‘행동하는 시인(그는 중국에서 조선혁명군사간부학교도 수료했다)’의 나라사랑愛國이 있었으리라.
해방된 나라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이라야 고작 대통령 표창, 건국포장, 문화훈장, 건국훈장 애국장이지만,
어디 이런 것을 연연할 것인가.
시라 해야 모두 40편. 1946년 동생 원조가 <육사시집>을 처음 펴내 형의 항일 애국정신과 한글사랑의 시를 알려,
오늘날 그 이름 석 자 빛나는 이육사가 된 것이다.
윤동주의 유고시집이 그랬듯이. 문학관에서 <편복蝙蝠(박쥐)>이라는 유일한 육필시肉筆詩 원고를 보며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되더라. 문학관 관장이 시인의 유일한 혈육 이옥비(80)씨이다.
박물관 입구, 보도블록 틈새에 피어난 민들레 한 송이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시인의 외모로는 연약한 지식인처럼 보이지만, 엄혹한 일제강점기 탄압 속에서도 백절불굴百折不屈의 뜨거운 마음이 전달되었기 때문일까.
보고 싶은 ‘까칠한’ 친구야. 두 편의 편지를 다 읽었다면 참으로 용한 일일 터. 터. 흐흐.
너와 또 몇몇의 친구들과 안동 2박3일 여행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마음이 답답한 날이 계속 되거든, 늘 그랬듯 아무 때나 훌쩍 내려오라. 잘 지내길 빌며 줄인다.
4월 21일
임실 구경재에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