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향교에서 함평군민회관까지 거리는 40km가 채 안 되지만 대부분 편도 1차로 길인지라 앞서가는 차 한 대가 길을 막고 있으면 거북이걸음이 불가피하다. 하여 꽤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이번 전남 서남부답사에서 꼭 보고 싶었던 문화재 가운데 하나가 함평읍내에 있는 해보리석불입상이었다. 석불은 함평군민(복지)회관 밖에 서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별 망설임 없이 회관 근처에 차를 세운다. 하지만 석불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함평군문화원에 전화를 걸어 운 좋게 사무국장님과 통화가 되었고, 인근에 있는 절집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석불이 서 있던 자리는 새로 바른 시멘트 자국만 선연했다.
회관 옆에는 긴 돌이 하나 놓여 있는데 함평읍 내교리 광교마을에 놓여 있던 것으로 넓다리, 즉 광교(廣橋)라고 부른다고 한다. 전언에 따르면 수원부사를 지낸 이결이 1600년대 초반 나주에서 이 돌을 가져와 다리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후 땅에 묻힌 것으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해보리석불입상이 옮겨간 곳은 읍내에서 대덕리로 빠지는 북쪽으로 난 길의 언덕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관음사라는 절집이다. 주소는 함평군 함평읍 함평리 2번지(새주소: 전남 함평군 함평읍 남일길 128-33). 절집은 아직 민가형 건물 중심이고, 새로 조성한 석불, 석탑 등이 산재한다.
불상은 윗단 새로 지은 보호각 안에 있었다. 아쉽게도 이제 더 이상 밝은 햇살 아래 이 불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보호, 신앙 등 여러 면에서 이곳으로 옮긴 것이 더 나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호각의 칸살이 높고 촘촘한 편이어서 더욱 불만스럽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71호 함평해보리석불입상(咸平海保里石佛立像)은 원래 함평군 해보면 해보리 산 61번지에 있었다고 한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갖춘 서 있는 석불로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이 솟아 있고, 알맞게 살찐 계란형의 얼굴은 온화한 모습이다. 눈·코·입이 뚜렷하여 사실적으로 보이며, 목에는 1줄의 선이 명확하게 새겨져 있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쳐져 있고, 몇 개의 선으로 표현된 옷 주름은 평면적이며 도식화되었다. 손모양은 두 팔을 구부려 가슴 앞에서 ㅅ자 모양으로 두 손을 잡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화순 운주사 석불군에서 보이는 양식으로 주목된다.
연꽃으로 장식한 대좌는 특이하게 불상의 신체부분과는 따로 양 발을 대좌에 새겨놓았다. 이 같은 기법은 통일신라시대 8∼9세기경 경주 남산탑의 석불에서도 보인다. 머리 뒤에는 2줄의 둥근 띠를 두른 머리광배가 있고 그 주위에는 불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도식적인 옷 주름이라든지 직선으로 뻗은 몸체의 모습 등에서는 고려시대 양식이 나타나며, 만들어진 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단다.
뒤에 어렵사리 찾기는 했지만 사라진 해보리석불의 행방을 알지 못해 그 길가에 있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50호 함평이재혁가옥(咸平李載爀家屋)을 먼저 들렀다. 이 집은 정성을 들여 잘 지어진 집으로 근대적 성격을 띤 주거건축이다. 현재 안채는 없어지고 외부공간인 정원과 더불어 사랑채와 문간채만 남아 있다.
상량문에 의한 사랑채의 건립 연대는 1917년으로 확인되었다. 외부재료를 근대적 재료인 유리창으로 마감한 것이 흠이지만, 전통 한옥이 근대화 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 단계의 가옥으로서 학술적인 가치가 있고, “ㄱ”자형 사랑채 건립은 이 지역에서 매우 보기 드문 예이다. 그리고 백범 김구선생 은거(1898년경)와 관련한 장소로서의 의미도 있는 곳이다.
은근히 기대가 컸던 군유사지부도(君遊寺址浮屠 함평군 함평읍 함평리 357= 함평읍 남일길 83-6)는 이재혁가옥 안에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재혁가옥 문간채를 오른쪽에 두고 직진하면 나오는 집의 마당에 자리하고 있다. 역시 함평문화원 사무국장님과의 통화에서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되었다. 고마움을 표한다.
이 부도는 원래 군유산 군유사지에 있었던 것인데 6·25 때 절이 폐사되면서 산 주인인 이동절씨 집 정원으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이 부도는 기단부.탑신, 옥개석, 상륜부가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조각 수법도 수준급이다. 맨 밑의 기단부를 보면 2단의 방형 지대석을 4개의 장대석으로 짜 맞추고 그 위로 1석의 하대석을 안치하였다.
하대석은 4면의 각 면에 우주와 중앙에 탱주 2주를 얕게 모각하고 상면은 2단각형 괴임을 하여 상층의 앙련, 복련 중석을 받치고 있다. 복련은 16엽으로 원형이며 상층 앙련도 원형 16엽인데 현재는 뒤집혀 있는 상태이다. 그 위에 다시 1매의 원형 판석을 삽입, 위층의 탑신을 받게 했다. 탑신은 8각인데 각 면에 당호나 문호형의 장식이 보이지 않으며 옥개석은 8각으로 윗층은 기왓골 없는 내림마루가 뚜렷하고 처마는 투박하다. 조성 연대는 고려 하대로 추정된다.
인근에 있는 보광사선원(普光寺 함평군 함평읍 함평리 289)도 잠깐 들렀다. 원래 보광사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절터가 아니고, 1942년경 모진택이란 분이 개인 별장으로 지은 것인데 사찰로 개조하여 운행해오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異說이 있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통사찰정보에 따르면 보광사는 함평읍 함평리 대사동에 속하는데 대사동(大寺洞)은 옛날에는 한절골이라고 불렸던 곳이라고 하며, 백제시대부터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보광사에는 유형문화재 제172호 함평보광사범종(咸平普光寺梵鐘)이 소장되어 있다. 원래는 무안 원갑사의 종이었으나 폐사되자, 함평의 용천사를 거쳐 한국 전쟁의 혼란을 피해 1967년 현 위치에 옮겨진 것이라 한다.[문화재청의 설명문인데 다른 설도 있다. 문화유적총람에 의하면 ‘원래 구산사에 소장되었던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고 하며, 전통사찰정보에 따르면 ‘무안 원갑사에 소장되었던 것으로 구전되고 있으나 동 사찰이 폐찰되면서 함평 용천사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종은 6.25 전란을 피해 학다리에 있는 개인의 절로 옮겨졌다가 1967년 현재의 보광사로 옮겨왔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종은 건물 밖에 있는 종각에 걸려 있다.
형태를 보면,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는 2마리의 용이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고, 용의 다리와 종을 연결하여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 몸통 윗부분은 2줄의 띠를 두르고 그 안에 8자의 범자를 새겼다. 그 아래에는 사각형의 유곽이 있고, 안에 돌출된 9개의 유두가 배치되어 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보살입상을 양각하였다. 몸통 아래쪽에는 넓은 두 줄의 도드라진 선을 두르고 그 사이에 글이 있어, 이 종이 영조 43년(1767)에 만든 것임을 말해준다.
머리부분에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나,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와 아래쪽의 띠무늬을 생략하여 간략하게 하였다. 18세기에 조성되는 범종의 높이가 1m를 넘지 못하는 경향에 비추어 보면, 이 종은 그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종의 높이는 146cm, 입지름은 83.8cm다.
이 절집에는 삼존불도 있다고 한다. 문화유적총람은 삼존불의 조성 연대는 모두 절이 창건된 연대로 추정하고 있다. 삼존불 가운데 하나인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한국의 사찰문화재에서는 이 절집 극락보전에 있는 높이 63cm의 목조 보살좌상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밖에서 보기에 중층이지만 실제로는 안이 트여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극락보전의 문은 열려 있었지만 실내가 어두웠고, 남은 시간도 많지 않은데 이 보살상을 찍기 위해 노력을 하기 어려워 그냥 돌아서고 말았다.
[인용설명문 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적총람, 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첫댓글 구석구석을 찾아 다니시며 보여주어 감사합니다
석불입상의 마주한 두팔이 가냘퍼 보입니다
그래 보입니다. 완벽한 표현을 하는 일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군유사지 부도는 갈 때마다 놓칩니다 ㅎㅎ
그러셨군요. 가끔은 그런 옛님도 있습니다. 리스트업 해서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현장에서 깜빡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단부가 특이하고도 재미있게 만들어졌네요....
군산은 꼭 일주하고 싶은 곳....^^
원래의 모습일지는 알 수 없어 보입니다. 세월, 이동... 변화가 있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직접 보지 않아서 자신할 수는 없으나, 함평 해보리 석불 입상의 법의는 우견편단보다는 통견으로 보아야 할 듯싶습니다. 석불 입상인 경우 대부분 통견이며, 우견편단인 예는 매우 드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석불입상 옷주름은 대개 통견이군요. 직접 보고, 사진 보고, 글을 봐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기억하지 못하니 스스로가 답답합니다^^ 문화재청 자료 옮긴 것인데 사진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