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편의 소설 모두에서 드러나는 진정한 감정이란 남자들끼리의 유대감이다. 깊은 형제애, 즉 현실에서는 덧없지만 정신적으로 영원한 동지애는 모든 곳에서 나타났다.
참호 속의 증오
군인들이 결국 사해동포주의를 위해 국가에 충성을 다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주의자들의 희망은 서부전선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바로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서로에 대한 증오가 커졌고, 전장에 끌려 나온 병사로서 똑같은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은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포로에 대한 태도 변화만큼 전선에서 형성된 강렬한 적의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없다. 서부 전선에서 양쪽의 많은 이들이 항복하지 않았는데 “포로를 생포하지 마라”라는 문화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이는 소모전에서 자연히 생겨난 폭력 사이클의 일부였다.
이러한 태도가 인종적으로 양측이 거의 다를 게 없던 서부전선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다는 사실은 총력적이라는 야만적인 상황에서 증오가 얼마나 쉽게 커질 수 있는지 입증해 준다. 인종적 차이가 더 확연했던 지역의 경우, 거리낌 없이 폭력을 자행할 가능성은 훨씬 컸다.
항복
동부전선의 전쟁
서유럽의 경우 인종이 아니라 전략상의 이해관계가 존재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동유럽에서는 전쟁으로 다인종 제국과 다인종 사회 집단으로 구성된 구체제가 해체되고 말았다.
발트 해에서 발칸 반도까지, 거듭된 진격과 후퇴로 많은 민간인이 우발적이거나 계획된 폭력에 여러 차례 희생되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동유럽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폭력이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다. 동유럽 전투 지역에서는 점령군이든 아니든 소수 민족 집단을 공격했다.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였던 1917년과 1918년의 혼란기에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독립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갈리치아의 다양한 인종 집단들 사이에선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동부전선에서는 중유럽과 동유럽 제국들이 겪은 죽음의 고통이 전투원과 민간인 간의 오래된 경계를 녹여 버렸다. 이런 전쟁은 멈추기보다 시작하기가 훨씬 쉬운 것으로 드러났다.
5 민족의 무덤
붉은 역병
러시아 혁명은 전쟁의 끝이 아니라 단지 변형된 전쟁이었다. 독일이 서부전선에서 패하자 동부전선의 전쟁은 참혹한 내전으로 변질되었다.
1918년, 전염병이 두 차례나 세계를 휩쓸었다.
러시아 내전
군사인민위원직을 맡은 트로츠키에겐 두 가지 이점이 있었다.
서부전선의 전투는 볼셰비키에겐 적절한 시기에 끝났다. 특히 외국열강이 국내의 좌파 반란을 진압해야 할 상황에 처하면서 타국에 간섭할 명분이 사라졌다.
1918년 11월 이후 내전 양상은 볼셰비키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920년 1월이 되면서 사실상 전쟁이 끝났음이 분명해졌다. 1920년 여름이 되자 혁명을 서쪽으로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을 얻은 레닌은 붉은군대를 바르샤바로 진군할 것을 명령했고, 헝가리와 체코, 루마니아까지 소련화할 필요성을 밝혔다. 비스툴라 강가에서 폴란드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볼셰비키 전염병의 확산을 막았다.
이 시기의 테러는 볼셰비키 통치의 기본축이었다.
동지들이여! 클라크의 반란은 가차 없이 진압되어야 한다. (중략) 본보기를 만들어야 한다. 1) 탐욕에 빠진 사람들을 100명 넘게 효수하라.(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교수형에 처하라는 얘기다.) 2) 그들의 이름을 발표하라. 3) 그들로부터 식량을 모두 빼앗아라.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주변 사람들이 보고 떨고 울부짖도록 해야 한다. 남의 고혈을 빨아먹는 클라크를 계속 죽어야 한다. 추신: 거친 사람들을 찾아보라. (1918년 8월 11일, 레닌이 펜자에 있는 볼셰비키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 중)
새 정권의 진정한 특징을 보여 주는 오싹한 모습은 최초로 강제수용소를 세운 데서 나타났다.
혁명은 평화와 빵,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 이루어졌지만, 결국 내전과 굶주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독재와 점차 강력해지는 정치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차르 제국 내에 거주하던 비러시아계 민족들은 처음엔 민족의 봄이 왔다며 혁명을 반겼다. 처음에 볼셰비키는 러시아로부터 완전 분리를 통한 모든 민족의 자결권을 선언하며 시류에 따랐다. 대략 100개의 서로 다른 민족 집단이 볼셰비키 정권의 인정을 받았고, 주민 수와 집결 정도에 따라 공화국을 설립하거나 행정 구역을 나눌 수 있었다. 비러시아계 민족들은 자기 언어로 공부하면서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볼셰비키 정권과 동일시하도록 장려하는 러시아화 정책의 실무를 맡은 스탈린은 민족 문제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있다고 보았다. 민족 충돌은 제국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볼셰비키의 유대인 정책의 목표는 그들을 정치적으로 볼셰비키화하고 사회적으로 소비에트화 하도록 재교육하는 것이었다. 민족 자치권은 중앙집권화된 일당 독재 내에서만 의미가 있었다.
지도 다시 그리기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의 구상 중에 가장 급진적인 것은 민족 자결 원칙을 기초로 유럽 지도를 다시 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족자결의 원칙을 적용하는 일은 두 가지 이유로 결코 쉽지 않았다.
유럽 전역에서는 민족 국가라는 이상과 다민족 사회라는 현실이 충돌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오래된 왕조 제국의 느슨한 구조에 의해 다양성이 조정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가 버렸다. 평화적으로 정치 조직이 성장하려면, 신생 민족 국가에 소수 민족 집단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다수 집단이 해당 민족 국가와 국가 자산의 유일한 소유자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신생 정부는 그들을 차별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5개국(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헝가리 ?)에서만 대략 2400만 명이 자신들을 소수 민족 집단으로 간주하는 국가에서 살고 있었다.
새로운 전후 질서에서 두 집단이 특히 취약함을 느꼈다.
전후 문제의 처리 과정에서 가장 많은 것을 잃은 두 소수 집단이 힘을 합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위험에 빠진 독일인은 공통의 역경 속에서 힘을 합치기보다 더 위험에 빠진 유대인에 등을 돌렸다.
제국의 역경
서유럽 열강들은 세브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 영토의 넓은 지역을 분할하였다.
그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제국주의를 기초로 한 변화였다. 그런데 이 모든 행동에는 중동 지역을 전통적인 제국주의적 질서의 수동적인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실제로 중동부 유럽에서 격변을 일으키던 민족주의적 열망과 인종 갈등이 흑해 해협 반대편에서도 작용하고 있었고, 세브르 조약은 몇 달 만에 사문화되고 말았다.
중동부 유럽 유대인처럼, 아르메니아인도 공격받기 쉬운 민족이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소수 집단이었을 뿐 아니라 상업 종사자가 상당히 많아서 상대적으로 부유했다. 1915년부터 1918년까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가해진 잔혹한 군사 행동은 질적으로 달랐다. 희생자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에 최초의 계획적인 대량 학살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은 제국에서 민족 국가로 탈바꿈하려는 다민족 정치 체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격변을 보여 주는 무서운 실례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에게 해에서 북해 사이에 위치한 국가들의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연이은 인종 갈등의 시작일 뿐이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폰토스의 그리스인 대량 학살, 스미르나 약탈이 자행된 뒤 합의하에 실행된 그리스와 투르크 주민 ‘교환’은 알레포 대주교의 경고가 사실이었음을 소름 끼칠 정도로 명료히 입증해 주었다. 그는 다민족 제국이 민족 국가로 변할 때, 대량 학살만이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보통 사람들의 가장 저열한 본능이 근대적인 통일에 앞서 일종의 부족 간 유혈 사태로 표출되는 듯 했다. 확실히 당시 일어난 사건들에서는 경제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민족의 무덤
독일 재건은 중부 유럽의 정치 세력, 즉 평화 조약 조인자들이 만들어 낸 신생 국가들과 그 안의 소수 민족 집단에 어떤 의미였을까? 만약 오스만 제국에서 터키 공화국으로의 탈바꿈이 민족 학살과 대량 추방의 결과라면, 어떻게 해야 중동부 유럽에 형성된 조각보 같은 여러 민족 국가에서 유사한 사태를 방지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유대계 독일작가 알프레드 되블린(Alfred Doblin)은 명료하게 설명했다. “오늘날의 국가는 민족의 무덤이다.”
첫댓글 오~~~!
시각자료 훌륭훌륭 멋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