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미 촬영>
<임창미 촬영>
2020년 1월 12일 일요일
보로부두르
새벽 3시에 모닝콜이 울렸다. 얼굴만 씻고 꾸려놓은 가방을 들고 로비로 내려갔다. 짐 가방은 로비 한쪽에 따로 보관했다. 3시 30분경에 버스에 오르며 도시락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컴컴한 길을 버스는 달리고 사람들은 눈을 감고 말없이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보로부두르의 수많은 부조들을 현장에서 보면 미리 보았던 책의 사진들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것 같았다. 여행 오기 전에 존 믹식의 책, <<보로부두르>>에 실린 사진들을 촬영하여 휴대폰에 100여 컷 이상을 저장해왔다. 눈을 감고 있다가 휴대폰을 켜고 보로부두르의 사진들을 한 장씩 눈여겨보다가 피곤하여 다시 눈을 감았다. 5시쯤에 드디어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현장에 가면 밥 먹을 시간도 없고 사진 촬영에 바쁠 것으로 생각되어 아침 대용 도시락을 차에 두고 내리자고 하였지만 아내는 밥과 닭다리튀김이 들은 종이 도시락을 손가방에 넣어 보로부두르에서 먹으려고 하였다. 결국 일행은 도시락을 차에 두고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 불 켜진 레스토랑 마노하라(Manohara)에서 화장실에 다녀왔다. 섣달 열여드레 달빛을 등불 삼아 사위가 컴컴한 보로부두르 경내로 들어갔다. 5분 정도 가로수 사이로 걸어 들어가자 사진에서만 보아왔던 보로부두르의 실루엣이 산처럼 내 시야에 나타났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세계사 교과서에 실린 바로 그 보로부두르가 눈앞에 거대한 거인처럼 서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불자로서 언젠가부터 보로부두르를 한번 가보고 싶은 염원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보로부두르의 새벽 달(2020년 1월 12일)
숲속의 요정 마노하라가 깨어나는 시간에 나무 아래의 컴컴한 길을 걸어 들어갔다. 보로부두르의 북서쪽 잔디가 깔린 마당을 서천에 떠있는 달빛을 받으며 지나서 북쪽 계단을 올랐다. 계단 입구 양쪽에는 마카라 소맷돌이 있고 한 층을 오를 때마다 카라가 눈을 부릅뜨고 지키는 아치꼴 공문을 지났다. 계단 발길을 관유(觀遊) 회장님이 미리 준비해간 손전등으로 비추었다. 마침내 작은 불탑이 있는 원형의 상층부 테라스에 올라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나는 서녘 하늘의 둥근 달이 좋아서 서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작은 탑의 윗부분이 없어서 가슴 위로 드러난 부처님의 얼굴이 푸르스름한 달빛에 드러났다. 초전법륜 수인을 하고 사바세계를 내려다보는 부처님이 좋아 카메라를 클로즈읍하여 촬영하며 주위에서 맴돌자 중앙대탑 밑에 앉은 서양 여자가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하여 기다리다가 비켜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대탑의 틈새에 숨은 귀뚜라미가 울고 새벽어둠 속의 마을에서는 모스크에서 콧소리가 섞인 아잔 소리가 들어올 때부터 들려왔다. 내 귀에는 그것이 새벽 예불성 같았고, 대탑 주위의 절에서 스님이 독경하는 소리로 들렸다.
구름 덮인 동녘 하늘이 점점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해가 구름 위로 오르고 우주의 어둠은 어느덧 스러지고 사위는 희붐하게 밝아왔다. 백운이 허리에 걸린 므라피(Merapi)와 므라바부(Merbabu) 화산이 보로부두르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우뚝 솟아 있다. 서북쪽에는 숨빙(Sumbing) 화산이 멀리 보이고 서남쪽에는 므노레(Menoreh) 석회암 언덕이 가까이서 둘러싸고 있다. 푸르고(Purgo)강이 적시고 인도양으로 흐르는 케두 평원을 굽어본다. 코코넛 숲과 벼가 자라는 논이 녹색 바다를 이루고 그 가운데 점점이 떠 있는 마을에는 몽환적인 안개가 피어올랐다.
어디서 닭 울음이 들려온다. 태초의 혼돈에서 깨어나는 풋풋하고 고요한 풍경이 눈 아래 펼쳐졌다. 잃어버린 낙원에 우리가 와 있는 것만 같았다. 산업화의 속도와 불빛과 소음 속에서 영혼이 병들고 번뇌로 들끓던 몸이 어머니의 품속에서 잠든 아기처럼 한없이 평화로워진다.
우주에 가득한 바이로차나불의 지혜와 자비의 빛이 어둠을 물리치고 만상이 점차로 또렷하게 보인다. 나는 다시 일어나 탑 속에 좌정한 부처님의 법열에 찬 얼굴을 뵈러 발걸음을 옮겼다. 카메라를 설치하고 기다리던 서양여자도 없고 훤하게 밝아진 그 자리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와 있었다. 청춘 남녀가 손잡고 앉아 있고 히잡을 쓴 무슬림 여인이 휴대폰을 들고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고요하고 따뜻하고 다정스러운 얼굴의 붓다가 생로병사의 고해(苦海)에서 허덕이는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맞이하며 무언의 설법을 베풀고 있었다.
곁에 있는 최제일 선생님께 부탁하여 우리 부부는 기념사진을 몇 번이고 찍고 나도 최선생님을 촬영해 드렸다. 여인들은 4층 테라스에서 내려가는 아치형 공문 앞에 서서 환희에 찬 얼굴로 서고 관유 회장님은 기쁨에 차서 셔터를 눌렀다. 스물여섯 명 우리 일행은 원형 테라스의 계단에 모여 앉아 짧고도 평화로운 그 시공을 사진 한 장에 담았다.
보로부두르 대탑은 776년 샤이렌드라(Shairendra) 왕조의 비슈누왕 때 시작하고 824년 사마라퉁가 왕 때 완성했다고 한다. 가까이 있는 하천 바닥에서 채취한 100킬로그램 가량의 안산암 200만개를 다듬고 조각하여 113미터 네모꼴 기단에 높이 40미터의 대탑에는 5,000미터에 걸쳐 대형으로 그림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12세기의 앙코르와트, 11-13세기의 바간과 함께 세계 3대 불적에 들어가지만 시기적으로 제일 빠르고 건축이나 미술사적으로도 앙코르와트를 능가한다.
항마촉지인 부동불 (동면)
여원인 보생불 (남면)
선정인 아미타불 (서면)
시무외인 불공성취불(북면)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자카르타) 소장>
보로부두르에는 굽타 후기 사르나트파 스타일인 504존의 등신대(等身大) 불상이 바깥을 향하여 모셔져 있다. 동면에 항마촉지인의 부동불(不動佛, Akshobhya), 남면에 여원인의 보생불(寶生佛, Ramasambhva), 서면에 선정인의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abha), 북면에 시무외인의 불공성취불(不空成就佛, Amoghasiddha)이 각각 92존씩, 5째 방형 테라스에는 설법인의 석가불로 추정되는 64존이 감실에 봉안되어 있다. 대탑의 상단 원형의 세 테라스에 있는 종 모양의 탑 안에는 전법륜인의 비로자나불로 추정되는 72존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인도에서 5,0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자바섬에 불교가 발생한 지 1,300년이 지난 8~9세기에 세운 보로부두르 대탑은 자바문명의 금자탑이다. 신라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조성하고 일본에서 화엄 본찰 도다이지(東大寺)를 세운 시기에 인도네시아에서 인류미술사에 우뚝한 봉우리인 보로부두르 대탑이 조성됐다는 사실을 이번 답사여행에서 알게 된 것만 하여도 나에게는 큰 깨달음이다. 8-9세기에 인도와 스리랑카, 수마트라와 자바, 한중일 3국과 티벹과 베트남을 연결하는 아시아에는 금강승(밀교) 불교문화가 만개하였다.
도대체 보로부두르를 만든 사람들의 문화는 어떠했고, 국가 권력과 경제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번 답사여행에서 내가 풀어야할 화두이다.
불교가 1세기에 실크로드를 따라 무역상과 승려들에 의하여 중국으로 전래하였지만 인도와 중국을 잇는 바닷길은 400년경부터 열리기 시작하였다. 법현(法顯, 342-423 존 믹식/334-420 김규현, 바이두(百度))은 실크로드를 걸어 인도로 가서 귀국은 스리랑카에서 무역선을 타고 414년에 자바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중국의 산둥반도로 돌아갔다. 동남아, 인도와의 해상무역에 경험이 많던 인도네시아 선원들의 도움으로 바닷길은 개척되었다. 670년에 티벳의 명장 가르친링이 서역 4진의 엔지, 쿠차, 호탄, 카슈가르 등 서역 18주를 점령하여 실크로드를 장악하였다. 같은 해 청해호반의 대비천(大菲川) 전투에서 15만 당군은 패배하고 설인귀는 포로로 잡혔다. 678년 백제 유민 흑치상지 장군도 참전한 청해호반 전투에서 이경현(李敬玄)이 이끄는 18만 명의 당군은 패배하였다.(김규현, 티베트역사산책, 정신세계사, 2003) 실크로드가 유목민족 티벳에게 점령되고 당에서 인도로 가는 해로는 더욱 중요해졌다.
동아시아 구법승의 항해는 7-8세기에 성행하였고, 이 시기 자바와 수마트라는 국제 불교학의 중심지였다. 구법승 의정(義淨, 635-713)은 671년 겨울에 중국에서 출발해 남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의 항구에 도착하여 6개월을 머물며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 왕이 제공하는 배를 타고 인도에 도착하여 15년 동안 경전을 배우고 수집했다. 그는 686년에 스리비자야로 돌아와 5년 이상을 머물렀다. 의정은 당시 스리비자야에는 대규모의 승려 집단이 있었고, 불교철학과 수행의 수준은 매우 높다고 하였다. 신도들은 본생담을 큰 소리로 낭독하고 단식 수행 기간에는 나가나 다른 정령에게도 공양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인도로 가기 전에 그곳에서 산스크리트어를 익혔다. 그는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서 60여명의 구법승 행적을 기록하였다. 이 책에는 이름을 모르는 신라승려 2명이 수마트라섬의 서쪽 항구인 파로사국(婆魯師國, Balus)에 도착하여 병을 얻어 입적했으며, 수마트라, 자바와 연결됐던 스리랑카에서 고구려의 현유(玄遊) 스님이 스승인 중국인 승려 승철(僧哲)을 따라 사자국(師子國, 스리랑카)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그곳에 머문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 쓰촨과 베트남 통킹(Tonkin)의 승려들은 인도에서 온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러 자바와 수마트라로 갔다고 의정은 기록했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마우리아제국이 붕괴하고 인도는 다시 굽타왕조로 통일되고 힌두교를 지배 이념으로 삼았으며 인도의 고전 고대 문화가 꽃피었다. 인도의 주류 종교 사상인 힌두교에 대응하여 나란다 대학을 중심으로 힌두교 문화를 흡수한 밀교 문화가 나타났다.
굽타 시대를 고비로 불교 교단은 부처와 존자들의 판테온을 형성하기 시작하고 예배 의례를 공인했다. 불교의 독자적인 의궤도 정비되고 주술 관념도 발전했다. <<대일경>>은 7세기 중엽에, <<금강정경>>은 7-8세기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장이 날란다대학에서 공부할 때와 달리 수십 년 뒤 7세기 중엽에 의정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밀교의 일대 센터가 되어 있었다. 8세기 중엽부터 동인도를 지배한 팔라 왕조는 밀교를 비호하여 대승불교는 거의 밀교화되었다. 깨달음을 위한 수행법과 함께 현세 이익을 중시하는 주술적 기도가 성행하게 되었다. 왕조의 불교 보호와 호국 기도는 결합되었다. 고팔라왕이 세운 오단타푸리 사원, 다르마팔라왕이 세운 비크라마실라 사원, 데바팔라왕이 세운 소마푸리 사원은 벵갈에서 비하르 주에 걸쳐 존재했던 불교 센터로서 밀교의 수행과 연구가 이후 전성기를 맞았다. 순수 밀교와 탄트라 밀교가 동남아시아로 진출했고, 보로부두르도 기존에 정착된 불교가 밀교의 영향을 받아서 이룩된 특이한 발전의 자취이다.(中村 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김영사, 1990.)
남인도 칸치푸람에서 태어난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 670-741)는 나란다대학에서 고대 자바에서 중요시 여긴 대일여래경과 금강정경을 연구하고 교정했다. 717년에 금강지는 수마트라를 거쳐 자바에 왔다. 718년에 친척들과 무역 때문에 와 있던 14살의 스리랑카 승려 불공(不空, Amoghavajra)를 만나 제자로 삼았다. 두 사람은 719년에 중국으로 갔다.
불공은 720년 낙양 광복사(廣福寺)에서 비구계를 받은 금강지와 경전을 번역했다. 금강지 사후에 불공은 자바로 돌아와 경전을 수집하고 중국으로 돌아가 번역하였다. 불공의 2천명의 제자 중에 신라의 혜초(惠超), 혜과(惠果, 746-805) 등 6명이 뛰어났다.
혜초는 704(또는 700)년에 신라에서 태어나 719년 16세에 당으로 건너가 광주(廣州)에서 금강지의 제자가 되었고 스승의 권유로 723년 20세에 광주를 떠나 자바, 수마트라를 경유하여 인도로 갔다. 30세 무렵 육로로 돌아와 금강지와 밀교 경전을 연구하고 번역하였다. 금강지 타계 뒤 773년 10월부터 장안 대흥선사에서 불공에게 대교왕경 강의를 받다가 774년 불공 입적 후 그의 유언에 따라 6대 제자 중 두 번째 제자가 되었다. 780년 4월 15일에 오대산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들어가 5월 5일까지 20일간 대교왕경의 구역본을 얻어 다시 필수(筆受)하였다. 그리고 그해 이곳에서 입적하였다.(정수일 역주, 왕오천축국전) 재작년 여름에 신라문화동인회 따라 오대산 대탑원사 주변의 사찰들을 가보았다.
중국인 혜과의 제자 중에 자바 사람 비앙헝(Bianghung)과 일본 진언종(眞言宗)의 개창조인 홍법대사(弘法大師) 구카이(空海)가 있다. 일본 진언종과 자바의 불교가 유사성이 있고 두 지역의 불교미술에도 닮은 점이 있다. 이러한 구법, 전법 승려들의 활발한 교류와 활동으로 자바에는 9세기말까지 탄트라 수행을 통하여 불성을 깨닫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의 금강승 불교가 성행하였다.
수마트라의 주요 지역에서 불교는 더 오래 지속되었다. 인도 벵갈 지역의 대승불교 스승인 아티샤(Atisa, 982-1054)는 1013년에 스승과 함께 수행을 위하여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로 여행하였다. 아티샤는 이곳에서 20년 동안 머문 뒤에 56세(1038년)에 티벹으로 돌아가 연등길상지(燃燈吉祥智, Dipankara Srijnana)로 불리며 죽기 전(1054년)까지 티벹불교에 헌신하였다.
아티샤는 동인도 사호를 왕국의 왕자 출신으로 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불교의 현교와 밀교를 두루 섭렵하여 명성이 높았다. 비구 라마 시라 승원의 장로로 있다가 서(西) 티벹 코르레왕의 초청으로 1042년 가리 지방에서 티벹불교의 쇄신운동에 앞장섰다. 후계자 드룸톤(1004-1064)과 카담파종(宗)이라는 종파를 창설하고, 정통파 티벹불교의 부흥에 힘썼다. 그는 티벹불교의 요체로서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을 역설하였다. 이 책은 인도불교의 정통교리를 전하는 현, 밀 양교의 근본이념을 중시하고 있다(존믹식, 보로부두르, P.24-25, 역주11).
티벹 밀교(the Sarva Durgati Parisodhana, Elimination of all Evil Rebirths)는 일반 티벹 불교와는 상당히 다른 요소가 발견되는데, 고대 인도네시아의 불교와 수행의 측면에서 일부 유사한 점이 있다.(존 믹식, 보로부두르)
자바의 불교 사원들은 대부분 750-850년에 세워졌다. 보로부두르 대탑에서 사방 감실의 불상은 금강계 만다라에서 비로자나불을 둘러싸는 동의 아촉불, 남의 보생불, 서의 아미타불, 북의 불공성취불과 상응한다. 카라와 마카라가 사방의 문을 지키는 대탑 하단 외곽의 수문신 배치는 태장계 만다라의 것과 유사하다. 대탑 갤러리의 부조는 밀교의 4단계 수행법과 일치한다. 보로부두르를 밀교 수행의 공간으로 조성된 입체 만다라로 해석할 수 있는 역사적이고 기능적인 근거들이다.
짠디 세우는 만다라의 규범에 따라 중앙에 비로자나불과 4방불을 위한 궁전이 있고 외곽에 240개의 금강계 만다라의 천불을 봉안하였다. 짠디 믄듯의 삼존불은 비로자나불과 관음보살과 금강수보살이다. 짠디 플라오산과 짠디 사리도 만다라의 개념으로 건설되었다.
보로부두르의 기단부는 욕계, 5단의 방형 테라스는 색계, 3단의 원형 테라스는 무색계를 표현한 것이고 밀교 순례자와 수행자는 욕계에서 색계를 거쳐 무색계에 이르고 마침내 정상의 불탑으로 상징되는 장엄한 불계에 들어가 만다라를 완성하였다.
자바인들이 산기슭에 계단식으로 테라스를 만들고 맨 위의 테라스에 멕시코 마야문명의 피라밋 모양을 닮은 제단을 만들어 조상신의 사당으로 삼았다. 이러한 조상신을 모시는 피라밋 모양으로 건축하는 기술과 문화가 보로부두르에 적용되었을 것이다.
2020년 3월 30일 오늘 새벽 5시 22분께 므라피 화산이 분화하여 화산재가 6킬로미터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뉴스의 사진을 보니 화산재가 날려 시가지가 온통 회색이고 스쿠터는 헤드라이트를 켰다. 가이드 유디에게 카톡으로 연락하니 괜찮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의 120여 개 화산 중에서 가장 위험한 므라피 화산의 분화로 1994년에 60명, 2006년에 2명, 2010년에 350명이 숨지고, 약 35만 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928년경 중부 자바 왕조의 문명은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11-15세기로 추정되는 중국 도자기와 동전이 보로부두르에서 출토되었고, 14세기 자바의 시(詩)에 ‘보로부두르는 폐쇄되어도 순례자의 발길은 이어졌다’고 하였다. 화산재가 쌓이고 나무가 자라고 있지만 토층에 의하여 보로부두르는 비바람으로부터 보호되고 있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영국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였고, 영국인 자바 총독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Thomas Stamford Raffles, 1811-1816 재임)가 1814년 코르넬리우스(H.C. Cornelius)를 보내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지만 대탑은 빠르게 약화되고 손상을 입었다. 앙리 무오(Henri Mouhot, 1826-1861)의 앙코르와트 도착 47년 전에 발견했던 보로부두르는 유럽인들에게 동남아시아에서 발견된 최고수준의 문명이었다.
인도네시아 국립 박물관의 청동 코끼리상을 선물했던 시암의 출라룽콘왕이 1896년에 자바를 방문했을 때 식민지정부는 수레 8대 분량의 조각품 반출을 허용했다. 회랑의 부조 30점, 불상 5점, 사자상 2점, 괴물상 1점, 계단과 문의 카라, 북서쪽 수백 미터 지점의 북킷다지 언덕에서 발견된 수문신 드와라파라(dvarapala) 등이 포함된다.
식민지정부가 유적 보호를 위한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공병대 장교 데오돌 반 얼프를 임명하였다. 그는 1907년부터 복원 작업에 착수하였지만 배수 처리를 하지 못해 유적이 심하게 손상을 입었다. 1971년에 인도네시아 고고학회장 석모노(R. Seokmono)박사 주도로 복구 프로젝트 콘퍼런스가 열렸다. 내진, 배수를 위한 공사에 백만여 개의 석재를 들어내어 17만개 석재를 보수하고 일부는 대체했다. 1983년에 복원 프로젝트는 완료됐고 수하르토 대통령은 차우릴 안워(Chauril Anwar)의 시구를 인용하며 보로부두르가 앞으로도 천 년을 보존되기를 기원했다. 해마다 열리던 불교도의 베삭(Vaisaka-붓다의 탄생 축제) 축제는 복구 기간 이후 허락되지 못하고 있다.
이상은 존 믹식(John Miksic)의 책, "보로부두르"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이제 우리는 가종수 교수의 책, "보로부두르"를 길라잡이 삼아서 1층 테라스로 내려가야 한다. 1층 테라스의 제1 회랑에서 주벽은 상하 2단으로 새겨진 120면의 부조가 순례자의 오른쪽으로 펼쳐진다. 상단에는 붓다의 탄생부터 초전법륜까지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주벽 하단과 왼쪽 난간 내벽의 부조 그림들은 자타카와 비유담을 들려주며, 난간 밖에는 수호신들이 새겨져 있다.
해가 오르고 사람들이 몰려왔다. 수학여행을 온 히잡을 쓴 여학생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시계방향으로 탑돌이를 하며 번뇌를 제거하고 마음을 정화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부처님 세계로 올라간다. 계림 선생님이 부조로 새겨진 그림들을 하나씩 설명한다. 관유 회장님도 아이패드를 켜고 도상을 일행에게 설명해 준다.
마야부인이 출산을 위해 친정인 데바다하(천비성)로 가는 장면
억겁의 세월 동안 생로병사의 수레바퀴를 돌며 몸을 던져 진리를 구하고 중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보살이 마침내 호명보살이 되어 도솔천 내원궁에서 설법하다가 남섬부주 카필라국 마야부인 태속으로 들어간다. 천인들이 지상으로 하강하여 독각(獨覺)에게 보살의 강생을 알리고 카필라성에는 향기로운 꽃이 만발한다. 6개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가 마야부인의 꿈속에서 몸속으로 들어오고 출산을 위해 친정 데바다하(天臂城)로 2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간다. 사천왕이 이끌고 말을 탄 마부가 등을 돌려 마야부인을 염려하듯이 본다. 궁녀들이 따른다. 구도와 조각이 뛰어나다.
룸비니숲에서 아이를 낳는 마야부인과 태어나자 연꽃이 바치는 일곱 걸음을 걸으며 탄생 게송을 외치는 장면
비람강생(毘藍降生)
룸비니 동산에서 무우수(無憂樹, Asoka Tree) 가지를 잡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다. 태자는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외친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진리를 깨달은 존귀한 존재이니, 이 진리로 삼계 중생의 모든 괴로움 내 마땅히 평안하게 하리라!(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우주와 마음의 존재법칙인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진리를 깨닫고 삼계의 뭇 생명이 생로병사의 수레바퀴에서 해탈하는 가르침을 펴게 될 아기 부처의 선언이다. 아시타 선인인 태자를 보고 슬퍼한다. 자신은 늙어서 태자가 붓다가 된 뒤의 설법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태자가 염부수 아래에서 명상하는 장면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원형. 출가후 핍팔라나무(보리수) 아래서 성도한다.
태자의 출가를 막기 위해 만든 3개의 별궁, 거울을 보며 화장하는 궁녀의 모습이 보인다.
태자가 사문(沙門, 출가 수행자)을 만나는 장면
사문유관(四門遊觀)
태자가 애마 칸타카를 타고 카필라바스투 성을 나가 출가 수행자의 길로 나가는 가장 극적인 장면
사천왕이 칸타카의 발밑을 연꽃으로 받치고 있다. 마부 찬나카가 말꼬리에 매달려 따라가는 모습.
양산을 받치고 있는 제석천과 범천이 길을 열고 있고, 말 뒤에는 많은 천인이 날고 있다.
유성출가(踰城出家)
태자는 정반왕이 여는 농경제에 참가하여 약육강식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고 염부수 아래에서 명상을 한다. 궁궐을 새긴 패널에는 거울을 보고 화장하는 궁녀의 모습이 있고, 태자는 동문을 나가 노인을 보고, 남문을 나가 병자를 만나고, 서문 밖에서 시신을 본다. 북문을 나가 숲속에서 사문을 만나고서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깨닫고 출가 수행자의 길로 나아갈 것을 결심한다. 태자가 애마 칸타카를 타고 성을 넘어 출가하고 사천왕이 연꽃으로 말발굽을 떠받치며 마부 찬나카가 말꼬리에 매달려서 태자를 수행한다. 제석천과 범천이 양산을 펴고 길을 열고 천인들이 하늘을 날며 따른다. 성 밖에서 태자는 찬나카에게 5욕에서 일어나는 고통에서 벗어날 것을 설한다. 태자는 칼로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제석천이 양손으로 접시를 받쳐 들고 있다.
정거천(淨居天)에게 받은 가사를 입은 보살은 아라다카라마와 문답하고 마가다국 왕사성에서 빔비사라왕을 만나며, 왕은 영축산 바위굴에서 고행하는 보살을 찾는다. 보살은 고통의 근본이 되는 5근(根)을 청정하게 하여 지족(知足)의 길을 설법한다. 루드라카 라마푸트라 선인을 방문하여 문답하고, 가야산 기슭의 나이란자라강(尼連禪河) 가의 전정각산(前正覺山) 바위굴에서 5명의 도반들과 고행한다. 6년 고행의 시간을 2면의 패널로 표현하고 있다. 우루빌라 마을의 촌장의 딸 수자타가 유미죽(乳米粥)을 공양한다. 보살 뒤에 야자열매를 따고 수호신 사자가 새겨져 있으며 카라, 마카라 장식을 한 불탑과 사원이 상세하다. 4개의 발을 가진 부뚜막 위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5명의 여자가 유미죽을 만들고 한 여자가 주걱을 들고 솥 안을 살피고 다른 1명이 대나무 통을 들고 입김을 불어 화력을 돋운다. 지금도 자바의 시골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한다. 보로부두르 조성 당시의 자바의 풍경과 생활 모습을 보여준다.
우루벨라마을의 촌장 딸 수자타가 수행자 고타마 싯달타 보살에게 유미죽을 공양 올리는 장면
보살이 네이란자라강에서 목욕하는 장면
라호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행상은 전정각산에서 보살이 욕망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얼마나 처절한 고행을 감행했는지를 너무나도 리얼하게 보여준다. 알맞게 줄을 조율한 거문고처럼 고행도 쾌락도 아닌 중도의 수행으로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음을 안 보살은 나이란자라 강에 와서 목욕하고 수자타 아가씨로부터 유미죽 공양을 받고서 몸을 추스르고 심기일전하여 강변의 핍팔라나무 아래에 길상초를 깔고 앉아 정각을 이룰 때까지 일어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2002년 불혹의 나이에 아내와 함께 간 첫 해외여행이 교사불자회원들이 법륜스님 따라 간 인도의 부처님 발자취이었다. 카스트에도 들지 못하고 간디가 신의 자식들, ‘하리잔’이라고 부른 비참한 신분의 사람들을 위하여 한국불자들이 짓고 후원하여 마을 사람들이 운영하는 수자타 아카데미 건물 증축공사의 현장 감독으로 왔던 설 거사님이 떼강도의 총격을 받고 즉사하였다. 순례단이 장작더미에 시신을 올리고 다비를 치르고 어린 학생들이 배우는 교실에서 불안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에 야자수 밑으로 난 흙투성이 길을 걸어서 바위투성이의 전정각산을 올랐다. 붓다가 뼈만 앙상하도록 고행을 하던 유영굴(留影窟)이 기슭에 있었다. 전정각산 능선을 걸으며 주변의 녹색 융단이 깔린 평원과 은하수처럼 굽이쳐 흐르는 네이란자라강 줄기를 굽어보았다. 붓다가 먹었다던 대추야자나무가 자라는 산기슭에서 붓다가 깔고 앉아 성도를 하였다는 갈대풀, 쿠사가 자라는 네이란자라강으로 갔다. 붓다가 목욕을 한 강은 건기라서 강바닥은 깨끗하고 부드러운 모래알로 가득 차 있었다. 아내와 나는 바지자락을 걷어 올리고 새맑은 물이 모래알 위로 졸졸 흐르는 강을 건너서 마하보디대탑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고 우람한 보리수가 그늘을 드리우는 금강보좌 자리로 나아갔다.
보살의 얼굴은 통통하고 두광마저 빛난다. 천상계의 여인이 보살이 몸을 씻는 강물에 천상의 여인들은 꽃과 향을 뿌리고, 강물의 신 나가는 기쁨에 겨워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다. 보살의 머리 위에 새겨진 하늘여인의 비상하는 역동적인 자세와 산호 뿌리 같은 손가락과 발가락, 미소를 머금은 복스러운 얼굴은 여행을 오기 전에 마르첼로와 아니타 트란치니가 촬영한 사진을 보고 매혹됐던 장면이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로부두르의 1,460면의 부조 그림 중에 내가 단연 첫 번째로 사랑하는 86째 장면이다.
연꽃 위에 끓어 앉아 향로를 들고 영락을 휘날리며 하늘을 나는 성덕대왕신종의 하늘 여인이나 공후를 타고 생황을 불며 구름을 타고 천계를 비상하는 상원사 동종과 동시대에 조성한 보로부두르의 이 비천상은 인체의 아름다움을 너무나도 아름답게 조각해 냈다. 안산암 돌에 새긴 부조가 붓으로 종이에 그린 그림보다 더 섬세하여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올림픽에 나가 10점 만점을 얻은 루마니아의 체조 선수 코마네치의 동작이나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의 두루미처럼 우아한 자세를 떠오르게 한다. 하늘여인의 얼굴은 연애시절 눈에 콩깍지가 씌운 내가 보았던 화장한 아내의 복스러운 얼굴을 닮았다. 여행하고 와서 이 장면을 촬영한 화소가 많은 필름을 일행에게 구했지만 결국 얻지 못하고 아내가 촬영한 것으로 인화하였다.
한글대장경의 방광대장엄경 제18품 왕니련하품(往尼泥連河品)에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보살이 목욕할 때에 백 천의 하늘들은 하늘의 향과 꽃을 뿌리는지라 강안에 두루 찼으며, 보살이 목욕을 끝내자 다투어 이 물을 떠 가지고 하늘 궁전으로 돌아갔고, 깎인 수염과 머리카락은 선생(善生)이 얻어다 탑을 세워 공양하였느니라.”
네이란자라강에서 보살이 목욕하는 장면 아래에는 몇 개의 돛과 노와 부판(浮板, Outrigger)이 달린 배를 타고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항해하는 사람들과 꽃이 핀 나무와 야자수 아래에서 사람들에게 보시를 하는 두 명의 귀족과 용마루에 새가 앉아 있는 고상(高床) 가옥이 새겨져 있다.
몸체에 날개처럼 달린 부력 강화 장치인 부판(浮板, Outrigger, 인도네시어로 Bangka)이 달린 무역선은 태평양과 인도양을 누비며 문명 전파의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부판은 지금도 폴리네시아,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타는 카누에 붙어 있다. 사고전서(四庫全書) 무경총요(武經總要) 해골(海鶻) 조항에는 전투용 선박 해골선에 날개처럼 달린 부판(浮板)이라는 장치가 험난한 파도에 배가 전복되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라는 설명이 나온다. 부판은 말레이어로 뻬라후(Perahu(Proa)), 하와이어로 와아(Wa’a), 타히티어로 바아(Va’a), 마오이어로 와까 아마(Waka ama)라고 한다.
악정을 하는 정계왕(頂髻王)에게 추방당한 이익(利益) 대신이 바다를 건너 도달한 신대륙에서 사람들에게 보시를 하고 이익지(利益地)에서 화려한 이익성을 건설하는 이야기가 표현되어 있다. 마치 대서양을 건너간 콤롬부스나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인디언을 만나는 장면을 표현한 것 같다. 인도와 스리랑카, 중국을 연결하는 자바와 수마트라의 1,300년 전 무역선과 가옥과 상인과 왕과 귀족과 주민들과 상인들과 승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법현(法顯, 334-420)은 이런 범본(梵本)을 얻은 다음 (스리랑카에서) 무역상인의 큰 범선에 올랐는데, 그 배에는 선원들과 상인 등이 200여 명이 타고 있었다. ... 태풍을 만나게 되어 큰 배에 바닷물이 들어차자 상인들은 서로 작은 배로 옮겨 타려고 하였는데, 작은 배에 먼저 탄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옮겨 탈 것을 두려워하여 연결된 밧줄을 끊어 버렸다. ... 법현 또한 군지(君墀)와 조관(澡罐) 및 기타 물건들은 바다로 던져 버렸지만, 다만 상인들이 경전(經典) 및 불상(佛像) 등을 바다로 던져 버릴 것을 두려워하여 오직 한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고 중국의 스님들(漢地罘僧)께도 빌었다. ”나는 멀리 인도에까지 와서 불법을 구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위신력(威神力)으로 배가 잘 흘러가서 목적지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이와 같이 태풍 속에서 밤낮으로 13일을 달려서 한 섬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배의 물이 새는 곳을 수리하고서 계속 항해하였다. 이 해협에는 도적이 많아 그들과 만나게 되면 무사할 수가 없었다. 대해는 어디까지인지 끝이 없이 넓고 넓어 동서를 분간할 수가 없어서 오직 해와 달과 별자리를 보면서 나아갈 뿐이다. ...
90일 정도 되어서 야바제(耶婆提-자바)라는 나라에 이르렀다. 이 나라는 외도 브라만이 흥성하여 불법(佛法)은 말할 것이 없다.
이 나라에 5개월 머물다가 다른 상선에 올랐다. 아주 큰 배에는 역시 200여 명의 상인들이 타고 있었는데, 50일 분의 식량을 준비하였다. 4월 16일에 이 나라를 출발하였다. 법현은 배 위에서 하안거에 들어간 셈이다. 배는 동북쪽으로 광저우(廣州)를 향해 나아갔다.
1개월이 지나 야고(夜鼓) 소리가 2경을 알렸을 때 검은 바람과 폭우가 쏟아져 사람들이 모두 공포에 떨었다. 법현은 이때 관세음보살과 중국의 스님들을 생각하였는데, 존엄한 신들의 가피력으로 날이 밝게 되었다.
그런데 브라만들이 의논하기를 “이 배에 저 사문이 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리하게 이런 큰 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저 비구를 뭍에다 내려놓아야만 한다. 우리들이 한 사람을 위하여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있는가?”고 하였다. 그러나 법현의 단월(檀越-후원 신도)이 “당신들이 만약 이 사문(沙門)을 내려놓겠다면, 나도 함께 내려놓으시오. 아니면 나를 죽이시오. 당신들이 이 사문을 꼭 내려놓겠다면 나는 중국에 도착하면 국왕에게 당신들을 고발할 것이오. 중국의 제왕은 불법을 받들고 승려들을 공경한다고 하니 말이오.”라고 말하였다. 이에 여러 상인들은 고개를 숙이고 감히 대꾸를 하지 못했다.‘(김규현 역주, <<불국기>> <귀국항로>)
몽골의 침략 전쟁으로 산하가 일곱 번이나 불타고 문화유산이 부서지고 겨레가 뿌리를 지키기 어려웠던 시대에 보각국사(普覺國師)는 대장경에 들어 있는 의정(義淨, 635-713) 스님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을 열람하고 인도 나란다 대학에 유학 간 아리나발마 등의 신라 스님들과 고구려의 현유(玄遊) 스님 이름을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었다. 그 조항 이름을 <천축으로 돌아간 여러 스님들(歸竺諸師)>이라고 한 것이 흥미롭다.
얼마나 많은 신라 스님들이 천축국 나란다 대학으로 유학 갔는지 그곳에서 고향 계림 땅을 그리워하며 세상을 떠나거나 많은 스님들이 당에서 신라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인도인들은 신라를 ‘꼬꼬닭(矩矩吒, 雞) 예설라(䃜說羅, 貴)’라고 불렀으며, 신라인들이 닭의 신을 받드는 까닭에 그 깃털을 꽂아서 관을 장식한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일연(一然) 스님이 붙인 찬시를 읽자니 오늘을 사는 나의 가슴에도 잔잔한 감동이 밀려온다. 동아시아의 구법승들은 험난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걷고, 파미르 고원을 넘으며, 히말라야의 설산준령을 올랐다. 태평양과 인도양의 구만 리 거친 파도를 폭풍우 속에서 헤쳐 나아갔다. 여기 자바섬과 수마트라섬에서 쉬었다가 부처님의 나라, 천축국으로 진리를 찾아 떠난 우리 선조들의 신심과 외로움과 열정에 느꺼움을 이길 수가 없다.
天竺天遙萬疊山
하늘 끝 머나먼 천축 가는 길 만 첩 산을
可憐遊士力登攀
애써 오른 가련한 유사(遊士)들이여
幾回月送孤帆去
달은 외로운 배를 몇 번이나 떠나보냈건만
未見雲隨一杖還
구름 따라 한 분도 돌아옴을 보지 못하였구나
수하항마(樹下降魔)
마왕 파순의 군대가 화살을 퍼붓지만 패잔병이 되어 물러나고 딸들이 섹시한 춤으로 보리수 아래의 보살을 유혹한다. 보살은 마왕 파순으로 비유되는 내면의 온갖 욕구의 유혹을 굴복시키고 마침내 위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오른손 검지로 땅을 가리키고 대지의 신은 지축을 흔들며 보살의 성도를 증명한다.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어 마침내 부처가 된다. 구름을 탄 천인들과 보관을 쓴 사람들이 보살의 성도를 기뻐한다. 여인들이 연꽃을 바치며 싯달타 태자의 깨달음을 기뻐하고 예배한다.
나이란자라강 가의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룬 장면
성도 후 천신들이 석가모니불에게 설법을 청하는 장면
석가모니불이 녹야원(사르나트)에서 첫 설법하는 장면, 녹원전법(鹿苑轉法)
설법인을 한 붓다에게 상인이 유미죽 공양을 올린다. 다섯 비구가 있는 녹야원에 가는 붓다 옆에 빔비사라왕과 바히데히왕비가 서 있다. 카라가 새겨진 고대 자바의 짠디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녹야원에서 콘단냐 등 다섯 브라만을 만났고, 삭발하고 가사를 입은 다섯 비구들과 보살들과 천인들에게 사성제, 팔정도를 설법한다. 생사의 고통을 무한하게 반복하는 윤회에서 해탈하는 위대한 길을 가르친다. 붓다가 처음으로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 붓다, 붓다의 진리, 상가(수행공동체)라는 3보가 생기고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불교가 탄생하였다.
30억년 지구 생명체의 역사에서 탄생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400만년의 장대한 진화의 여정에서 처음으로 우주와 인간의 존재법칙이 발견되었다.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해탈하는 완전한 자유와 행복의 길을 붓다가 비로소 설파한다. 케두 평원의 므라피 화산 너머에서 솟아오른 아침 해가 붓다의 얼굴을 비춘다. 그리고 보로부드르의 불전도 120면은 여기서 끝났다.
열반하여 다시 윤회하는 삼계에 태어나지 않는 붓다를 그리워한 불자들은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부터 열반지 쿠시나가라까지의 8대 성지를 순례하며 붓다의 체취를 느끼고 신심을 키우며 해탈의 길로 나아가려는 발원을 하였다. 머나먼 천축국으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얼마나 많은 구법순례승들이 갔던가. 시공간적으로 멀고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살았던 옛 사람들은 붓다의 일생을 그림과 조각으로 새겼다. 무불상 시대의 부처님 발자국, 법륜, 보리수, 불탑 조각이나 간다라와 마투라의 불상, 불국사와 석굴암의 불보살상, 보로부두르의 부조로 새긴 불전도, 법주사의 팔상전 목탑, 보경사 팔상전, 통도사 영산전의 팔상도 이 모두가 부처님을 지극히 그리워하며 해탈의 길로 나아갔던 옛사람들이 남긴 것이다.
왕궁을 떠나 천계 킨나리 궁으로 돌아가는 선녀 마노하라
마노하라와 재회한 것을 축하하는 천계의 킨나리 궁전의 연회에서 수다나 왕자가 자바의 전통 음악인 가믈란 음악 연주에 맞추어 추는 자바의 궁중 무용인 레공(Regong)댄스를 감상하는 장면
불전도 아래에 새겨진 아바다나(Avadanas, 비유경) 비유담 중에는 마노하라 이야기가 있다. 우리나라의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를 많이 닮았다. 보름달이 뜬 밤에 마노하라가 천상에서 연꽃 핀 연못에 목욕하러 왔다가 사냥꾼에게 사로잡힌다. 수다나 왕자는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마노하라를 구출하고 아내로 맞이한다. 수다나가 반란군을 진압하러 간 사이에 브라만이 죽이려 하자 왕비에게 머리장식을 돌려받아 수다나는 그 힘으로 하늘로 올라 가버린다. 수다나는 선인에게 받은 반지를 들고 7년 7개월 7일 동안 찾다가 아내가 사는 천계의 킨나리 궁전에 도착한다. 수다나가 물독에 넣어둔 반지를 보고 마노하라는 수다나가 왔음을 알아보고 재회한다. 드루마왕은 시험을 통과한 수다나를 사위로 인정하고 흥겨운 궁중 연회를 베푼다.
지금도 연주되는 인도네시아의 전통 음악인 가믈란을 악사들이 연주하고 무희들은 자바의 궁중 무용 레공 댄스를 춘다. 마노하라 이야기는 삼계의 중생은 예나 제나 성욕을 탐하고 사랑과 배신과 복수를 하며 악업의 고통을 받으며 살아온 모습을 자각하게 한다. 인간의 역사는 오욕칠정의 대하소설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자타카(Jatakas, 본생담) 중에는 매에게 쫓기는 비둘기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살을 베어준 시비왕 이야기가 나온다. 큰 거울에 왕의 살과 비둘기의 무게를 달고 있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의 내용을 새겨놓은 것 같았다. 보경사 석탑에 새겨진 자물쇠처럼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새겨진 저울이 1,300년 전에 자바 사람들이 사용한 저울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3개의 작은 액자로 나누어 토끼, 원숭이, 자칼, 수달과 수염이 나고 지팡이를 짚은 브라만을 새겨놓았다. 남전대장경 제30권에 실려 있는 토끼본생담을 새긴 부조가 보인다. 토끼, 원숭이, 자칼, 수달이 친구로 살았는데, 토끼는 항상 보시하며, 계율을 지키고 포살(참회와 반성)하라고 권한다. 포살날 걸인으로 변장한 제석천이 브라만으로 변장하여 나타나자 수달은 물고기, 자칼은 도마뱀, 원숭이는 망고 열매를 보시하지만 토끼는 모닥불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몸을 보시하고자 하였다. 제석천이 신통력으로 토끼의 몸을 상하지 않게 하며, 그 참된 보시행에 감격하고 보름달에 토끼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거북이, 물고기 떼, 상어가 있는 파도치는 바다에 어린이들이 돛단배를 띄우고 항해하고 바닷가에 상륙하여 엉겨서 논다. 어린이들의 모습이 마치 이중섭의 그림 같다. 연꽃과 고니, 사람 얼굴의 사자, 오리 한 쌍과 바위굴 속의 사자 두 마리, 코끼리, 동자 등의 생동감 나는 부조를 보니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의 수미단이 떠오른다.
부조 그림의 테두리에는 빈틈없이 연꽃무늬, 덩굴문양 등의 모티프가 아로새겨져 있다. 항아리에서 좌우로 대칭되게 뻗어나온 꽃이 있는 만병(滿甁)은 영기(靈氣)가 화생(化生)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고대 인도에서 발생한 만병은 수덕사의 고려시대 대웅전 벽화나 조선후기의 불화나 민화에도 나타난다. 일향(一鄕) 강우방 선생은 만병, 영기문 등 고대인의 세계관과 미술을 해석하는 언어를 확보했다.
1층 테라스의 회랑을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고 카라와 마카라가 새겨진 문을 지나 2층 테라스로 올라갔다. 왼쪽 난간의 부조는 비유담과 본생담의 토픽들이고 오른쪽 주벽부터는 화엄경 입법계품의 수다나(善財童子) 구도행각이 3층 테라스까지 새겨져 있다. 4층 테라스 회랑에는 보현행원찬의 10게송에 부합하는 부조 외에는 화엄경 입법계품의 내용들이다. 보로부두르 1,460면의 부조 중에서 460면이 선재동자의 구도행각을 표현했고, 보현행원품의 10게송 부조는 72면이다. 수다나의 구도행각은 460면 중 126면이고, 334면은 수다나가 도솔천에 도착한 뒤에 일어난 문수와 보현보살과의 만남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1.460면 중에서 최고의 장면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따르겠다고 맹세하는 마지막 장면이라고 한다. 입법계품의 추상적인 언어를 조각가들이 그림으로 구체적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부조에는 입법계품에는 나타나지 않는 수다나의 많은 동반자들이 등장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수월관음도에는 선재동자가 동자로 나타난다.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지닌 청년 수다나를 화엄경이 한문으로 번역되면서 선재동자로 번역하였고, 그림에도 중국의 어린 아이로 번안되어 그려졌다. 수다나의 이름 ‘선재(善財)’는 문수보살이 예언한대로 태어날 때 부모의 집에 기적처럼 수많은 재물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부조에서 수다나는 건장한 청년으로 머리에는 높은 관을 쓰고 있다. 걷거나 가마를 타거나, 마차, 코끼리 등을 타고 선지식을 찾아 구도행을 하지만 경전에는 없고 자바인들이 추가한 것이다.
청년 수다나가 53명의 선지식을 만나 깨달음의 길을 묻는 무대는 주로 남인도이지만 후반부에는 중인도가 된다. 문수(2회), 정취, 관음, 미륵, 보현 5보살, 5비구와 1비구니, 1시바신, 10여신, 1천신의 딸, 4동자, 2동녀, 3무역상, 2향료상, 1금세공사, 4우바이, 2왕, 4장자, 1드라비다인, 1유녀, 1선두(船頭, 선장), 1브라만, 1출가외도, 1출가 전 야소다라, 1마야부인, 1브라만 이렇게 수다나가 만나는 53명의 선지식에는 무역상, 선장, 금세공사, 향료상, 장자는 무역과 상공업에 종사한 사람들이다. 브라만교(힌두교)의 자연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무역과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카스트를 부정한 신흥종교인 대승불교를 후원했음을 보여준다. 동자와 동녀, 유녀, 드라비다인, 여자는 사회적 약자들로 인도 전통의 브라만교(힌두교)의 카스트를 부정한 인문주의 정신의 신흥 종교로 인간 평등을 말하는 불교에 민중이 널리 귀의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보살, 우바이, 비구, 비구니, 마야부인, 야소다라 아가씨는 대승불교 교단이 확립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시바신, 천신의 딸, 브라만, 출가외도, 여신은 불교와 힌두교가 경쟁과 교류를 하며 공존한 인도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2명의 왕은 종교의 성장과 왕권의 확립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선지식을 찾아가는 수다나 청년이 되어 부조들을 보지만 그 내용을 알 수 없고 바삐 지나가니 그야말로 주마간산이다.
난간에는 불탑의 좌우에서 불탑을 경배하는 인물이 보이고 하늘에는 꽃을 든 천인이 좌우에 있다.(Ⅱ-B-43) 불탑의 왼쪽에서 경배하는 사람은 수다나이고, 오른쪽에서 경배하는 동녀의 모습을 한 인물은 부동(不動, Acala) 우바이이다. 부동 우바이는 긴 머리카락을 뒷머리에 머리핀으로 묶어 올렸고 어깨와 등 위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정례(頂禮)를 하는 부동 우바이의 손바닥이 위로 향하여 불탑을 떠받들고 있다. 이런 절하는 자세는 오늘날의 한국 불자들이 하는 자세와 완벽하게 같다. 티베트불교에서는 같은 오체투지를 하지만 다리와 팔을 뻗고 두 손을 합장하여 위로 향한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정례를 하지만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들지는 않는다. 같은 정례를 하면서 손바닥이 위와 아래를 향하는 차이는 무엇 때문일까? 부처를 신격화한 대승불교와 과거 6불이 나타나고 인간으로서 생사윤회에서 해탈하여 45년 동안 사람들에게 설법한 석가모니불이 주불인 테라와다불교의 불신관(佛身觀)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고분벽화에는 사자좌에 앉은 부처 앞에 절하는 남녀 인물이 나타난다. 엎드려 절하지만 상체와 엉덩이가 자연스럽게 들려 있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지는 않고 있다. 보로부두르와 오늘날의 한국에서는 상체와 엉덩이를 바닥과 접은 다리에 밀착한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는 왼발을 오른발 위에 올려 겹치지만 보로부두르에는 발가락을 붙이고 발꿈치를 들었다.
불탑은 방형 기단, 복련과 앙련의 연화좌, 타원형의 탑신, 사각형 노반과 기둥 모양의 상륜부, 탑 둘레의 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로부두르의 원형테라스와 정상, 난간 위의 탑의 상륜부도 모두 이 장면에 나타난 불탑의 상륜부와 모양이 같다. 보로부두르를 설계하고 조성하던 시기의 인도의 불탑이었을 것이다. 타원형의 탑신 둘레를 매듭과 꽃으로 장엄하였는데 한국의 불탑 상륜부의 복발과 모양이 같다. 인도불탑의 원형이 동아시아 불탑에는 상륜부로 보존된 것이다. 가운데 탑의 좌우에 복발모양의 탑신에 한국불탑의 상륜부에 나타나는 사각형 노반, 앙화와 보륜 모양의 부분이 보인다. 앙화 위에 보륜이 5개이고 보륜 위에는 티베트불교 불탑의 상륜부 끝의 초승달과 해를 올려놓은 것과 닮은 부분이 보인다.
“선재동자가 이와 같이 슬퍼하고 사념할 때에, 그 늘 보살을 따라 쫓으며 깨우치는 여래의 사자인 천신이 허공중에서 말하였다. ... 선남자여, 그대는 안주왕도에 나아감이 가하리니 곧 응당 부동우바이라는 대선지식 봄을 얻으리라. 그 때 선재동자는 그 삼매 지혜의 광명에서 일어나 점차 남행하여 안주성에 이르러서... 부동우바이는 몸이 동녀로서 그의 집 안에서 부모가 수호하고 자신의 친지인 한량없는 사람들에게 묘법을 연설해 주고 있습니다. ... 선재동자는 몸 굽혀 합장하고 정념으로 관찰해서 이 여인을 보니, 그 몸은 자재함이 불가사의하고, 색상과 얼굴모습은 세상에 더불어 같을 자가 없으며, 광명이 통철하여 물건이 장애할 수 없고, 널리 중생을 위해 이익을 지으며, 그 몸의 털구멍에서는 늘 묘한 향기를 내고 ,.. 게송으로 찬탄해 말하였다. 청정한 계를 수호하시고/광대한 인(忍)을 수행하시며/정진해 물러서지 않으시고/광명으로 세간 비추시네 ... 선남자여, 과거세 중에 이구(離垢)라고 이름하는 겁이 있었는데, 붓다의 명호는 수비(脩備)였다. 그 때 전수(電授)라고 이름 하는 국왕이 있었고 오직 외딸이 있었으니, 곧 내 몸이 그였다. 나는 밤에 음악을 폐했을 때 부모와 형제는 다 이미 잠을 자고, 오백 동녀도 역시 다 잠들어서, 나는 망루 위에서 별을 보며 관찰하다가 허공중에서 그 여래께서 마치 보배산왕과 같이 한량없고 가없는 천·용 팔부와 여러 보살 대중들에게 함께 둘러싸인 것을 보았는데, 붓다의 몸에서 널리 큰 광명그물을 놓아 시방에 널리 두루 해서 장애되는 바가 없었고, 붓다 몸의 털구멍에서는 다 묘한 향기를 내어서 내가 이 향을 맡았더니 신체가 유연하므로 마음으로 환희를 내어서 곧 망루 위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열 손가락을 모아 붓다께 엎드려 예배하고, ... 부사의한 자재한 신변을 나타내는데, 그대는 보겠는가? 선재가 말하였다. 예, 제 마음이 보기를 원합니다. 그 때 부동우바이는 용장(龍藏) 사자좌에 앉아 일체법을 구함에 족히 여김 없음으로 장엄된 삼매문 ... 마치 태양이 허공에 출현한 것과 같이 애욕의 진창을 비추어 그로 하여금 마르게 하며, 또 마치 보름달이 허공에 출현한 것과 같이 교화될 수 있는 자로 하여금 마음꽃을 피우게 하고, 또 마치 대지와 같이 널리 다 평등하여 한량없는 중생들이 그 중에 머물면서 일체 선법의 싹을 증장하며 ... 그 때 선재동자는 그의 발에 엎드려 예배하고 한량없는 바퀴를 돌고서 은근히 우러러보며 하직하고 떠났다”( 화엄경 입법계품)
주벽의 부조들을 보다가 내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화려한 전각 속에 젖가슴이 풍만하고 얼굴이 원만하며 초승달 모양의 낮은 관을 쓰고 목걸이 치레와 팔뚝 치레와 팔찌를 하고 허리에 두 줄의 구슬 띠를 두른 여인이다. 방바닥에 앉아 한 다리를 펴고 한 다리는 오므리며, 왼 손은 사타구니를 가리고 오른손을 들어 두 팔을 땅에 짚고 엎드려 묻는 수다나에게 가르침을 베푼다. 수다나가 만나는 26째 선지식으로 험난국(險難國)의 보장엄성(寶莊嚴城)의 시장 북쪽에 사는 유녀(遊女) 바수밀타(婆須蜜多, Vasumirta)이다.
바수밀타가 사는 집은 드넓고 화려하며 보배나무, 보배 해자가 열 겹으로 둘러쌌는데 보배 해자에는 향수가 가득 차고, 보배꽃, 우발라화, 파두마화, 구물두화, 분다리꽃이 물 위를 덮었으며, 궁전과 누각이 곳곳에 늘려 있다. 몸에는 전단향을 바르고 보배방울을 매달아 바람에 흔들리면 소리를 내고, 열 개의 큰 원림으로 조경하였다. 바수밀다의 얼굴은 단정하고 원만하며 피부는 금색이고 눈과 머리카락은 감청색인데 욕계의 인간이나 천인으로는 비할 바가 없다. 음성은 아름답고 묘하여 범천 세상의 누구보다도 뛰어나며 문자와 뜻을 깊이 통달하고 지혜를 얻어서 방편의 문에 들어간다.
바수밀다는 과거 전생에 이름이 선혜(善慧)였는데 고행(高行) 부처가 계시던 때에 묘문성(妙門王城)에 살았다. 장자의 부인으로서 남편과 고행 부처 계시는 곳에 나아가 보전(寶錢) 한 닢을 공양하였더니 문수사리동자가 붓다의 시자가 되었다가 설법을 해주어 무상정등정각을 얻으려는 마음을 내었다고 한다.
자신은 탐욕을 여읜 경계(離貪欲除)의 해탈을 얻었기에 자신의 아름다움이라는 ‘방편(方便)’을 통해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탐욕을 여읜 경계를 얻도록 한다.
자신의 집에 찾아오거나, 보거나, 말하거나, 방에 들어오거나, 몸을 관찰하거나, 얼굴을 보거나, 얼굴 표정을 보거나, 눈 깜박이는 것을 보거나, 입술을 훔치거나, 자신과 사랑을 나누면, 모두가 자신의 이러한 방편을 통하여 탐욕을 여의고 해탈하게 한다고 하였다.
바수밀다는 선재동자에게 그 도시의 남쪽에 있는 선도(善度)라는 도시가 있고, 그곳에 비슬지라(鞞瑟胝羅, Vesthila)라고 하는 거사가 있는데 늘 전단자리불탑에 공양하니 그에게 가서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고 보살도를 닦는지 물으라고 한다.
화엄경 입법계품의 이 내용을 통해 대승불교의 수행자인 보살이 중생의 삶을 살면서 중생 구원을 위하여 온갖 교묘한 방편을 쓰고 희생적인 삶을 살며, 공덕을 닦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연꽃은 진흙에서 피고, 깨달음은 번뇌에서 생기며, 불보살의 해탈과 열반의 행복은 중생의 업과 고통에서 생긴다는 대승불교의 투철한 인식을 보여준다. 힌두교 문화를 받아들여 남녀 간의 성적 교합의 에너지를 깨달음을 얻는 에너지로 사용하는 탄트리즘의 태동을 이런 대목에서 엿볼 수도 있다.
바수밀다는 부처님 당시 바이샬리성에 살던 유녀 암라팔리가, 반열반하지 않는 경계를 이룬 비슬지라 거사는 유마힐거사가 모델이었을 것이다. 암라는 망고나무를 말하고 암라팔리는 ‘망고나무 밑에서 주운 아이’라는 뜻이다. 어떤 장자가 망고나무 밑에 버려진 아이를 데려와 키웠는데 천하의 미인이었다. 바이샬리의 귀족들과 다른 도시국가에서도 암라팔리와 결혼하려고 다투다 전쟁까지 일어날 지경이 됐다. 회의를 거쳐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암라팔리를 유곽의 여자로 만들어버렸다. 부처님의 주치의 지바카가 빔비사라왕과 그녀 사이에 태어난 아이라는 소문이 퍼질 정도로 그녀는 사교계의 여왕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기생이었다.
부처님이 열반의 땅으로 가는 중에 암라팔리의 망고동산에 머물렀다. 암라팔리는 마차로 달려가 부처님께 예배를 하고 법문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내일 아침 공양에 부처님을 초대하였고 부처님은 승낙하였다. 뒤늦게 달려온 바이샬리의 왕공 귀족들이 길 중간에서 암라팔리와 마주쳤고 그녀에게 십만 금을 줄 터이니 초청권을 양보하라고 하였지만 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귀족들이 부처님께 가서 법문을 듣고 다음날 아침 공양에 초대하였지만 부처님은 선약이 있다며 거절했다.
이 이야기는 유녀들을 데리고 유곽을 운영하는 기생이었지만 암라팔리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공경심과 자긍심이 어떠했나를 잘 보여준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법문을 듣고 환희심이 난 그녀는 자신의 망고 동산과 재산을 수행자들을 위한 승단에 기증하였고, 뒷날 그 곳에 큰 사원을 지어 바이샬리의 큰 절이 되었다. (정토회, 부처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정토출판)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시인 백석(白石)이 사랑했던 기생 자야, 김영한 여사가 당대의 권력자들이 드나드는 시가 수천억 원의 요정(料亭) 대원각을 법정(法頂) 스님께 기증하였고 스님은 그녀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과 염주 한 줄을 내린 이야기와 닮았다. 길상화는 죽어 길상사 마당의 한줌 흙으로 돌아갔고, 법정 스님은 돌아가시기 전 이 절에 단 하룻밤만 묵고서 비구 법정으로 입적하시고 생전에 주무셨던 작은 요사 채 화단의 나무 밑에 한줌의 재로 뿌려졌다.
제2회랑 주벽 100-102번 부조(Ⅱ-A-110~102)는 존 믹식의 책을 보고 예습하였기에 수다나가 관세음보살을 만나는 장면임을 알아 볼 수가 있었다. 100-101번 부조는 팔이 네 개인 4비 관음이고, 102번은 6비 관음이다. 몇 해 전에 네팔과 부탄에 가서 보았던 금강승(밀교)의 관음보살상이다. 보로부두르가 힌두교에 대응하여 인도 문화의 주류인 힌두교 문화를 받아들여 발달하였던 밀교 문화의 소산임을 보여준다. 석굴암 11면 관음보살이나 향가 천수대비가로 유명한 분황사의 천수천안관음상도 밀교 문화이다. 힌두교의 신상 중에 브라만의 아내인 강물의 신인 사라스바티(Sarasvati) 여신상은 4비로 두 손에는 악기 비나를 연주하고 오른손에는 염주, 왼손에는 베다 경전을 들고 있다. 학문과 예술의 신이라서 그런지 네팔 카투만두의 학교에는 운동장에 사라스바티여신상이 세워져 있었다. 사라스바티 여신은 불교에 변재천(辯才天)으로 수용되었다.
100번의 4비 관음은 보타낙가산(光明山) 석굴사원의 사자좌에 결가부좌하고 앉아서 왼손에는 연꽃을 들고 오른손바닥을 펴서 자비를 표현하였다. 보살의 머리맡에는 천개가 보이고 석굴 좌우에는 나무 밑에 한 쌍의 사슴이 앉아 있고, 오른쪽 양산 아래의 수다나가 서서 청법을 한다.
101번 부조의 4비 관음은 사원의 사좌좌에 앉아 설법을 하고 보살의 좌우에는 상하 2층에 보살의 설법을 듣는 사람들이 보인다. 오른쪽 아래층의 합장을 한 맨 앞의 인물이 수다나로 보인다. 설법을 듣는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왼쪽 앞의 인물은 손으로 제스처를 취하며 질문을 하고 있는 같다. 보살의 머리 위 좌우의 두 천녀는 보살을 찬탄하는 것 같다.
102번의 6비 관음은 카라와 옥개와 기둥과 연화문 수막새를 닮은 문양이 새겨진 사원에 두 마리 사자가 양쪽에 지키는 사좌좌에 법의가 드리워져 있고 그 위의 연화좌에 관음보살이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다. 머리에는 초승달 모양의 보관을 썼고 육계에는 화불이 있다. 오른손에는 염주, 왼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으며, 오른손 바닥을 펴서 자비를 나타내고 있다. 관음보살의 머리 위 좌우에는 구름을 탄 천인들이 있다.
김우문 등 8명의 궁중화가들이 충선왕의 왕비 김씨의 발원으로 1310년에 조성한 고려불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를 몇 해 전에 통도사 성보박물관이 일본에서 대여해와 전시할 때다. 700년 만에 우리 앞에 나타난 가로세로 4미터가 넘는 크기의 대작을 보러 나는 전시 기간 중에 주말마다 통도사로 달려갔다. 보름달이 휘황하게 비추는 밤에 관음보살은 극도로 섬세한 무늬가 짜인 붉은 비단 치마를 입고 속이 다 비치는 너울을 걸치고서 남인도 바닷가의 보타낙가산 바위에 부들을 깔고 오른발은 산호가 있는 바다 물결에 뜬 연꽃을 밟고 왼발은 무릎 위에 올린 반가부좌로 앉아 있다. 머리에 빗을 꽂은 선재동자가 합장하고 보살의 대자대비한 얼굴을 우러러 보며 진리를 설해주기를 청한다. 그 거대한 아름다움에 감격하였다. 진실로 인류최고의 회화였다.
통도사에서 만난 수월관음도를 본 그 감동에야 비길 수 없었지만, 보로부두르에서 자바 사람들이 1,300년 전에 3장의 부조로 이를 데 없이 섬세하게 새긴 수월관음도를 보니 그 잔잔한 감동이 또한 새로웠고 각별하였다. 그 인연에 진실로 감사하였다. 케두 평원에 떠오른 다사로운 아침 햇발이 관음보살의 자애로운 얼굴에 스며들었다.
제2회랑 주벽의 113째 부조(Ⅱ-A-113)의 이름을 존 믹식은 비말라드바자 보살(Vimaladhvaja, 寂光보살)이라고 하지만 가종수는 석가불의 항마성도도로 보고, 또 룸비니숲의 묘덕원만신(妙德圓滿神)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보리수 아래에 결가부좌하고 선정인을 하고 사좌 금강보좌에 앉은 석가불 뒤에는 화염문 신광이 있다. 석가불 왼쪽에는 연꽃을 든 여인과 그 아래에 유미죽 공양을 올리는 수자타 아가씨의 모습이 있다. 석가불의 오른쪽에는 방패와 칼을 들고 공방전을 벌이는 사람들이 상하 두 단에 새겨져 있다. 성도를 방해하다 패주하는 마왕 파순의 무리들로 보인다.
일행은 벌써 보이지를 않고 영자매와 인도네시아의 히잡을 쓴 어린 학생들과 사진을 찍었다. 한정된 시간에 다 볼 수는 없었다. 수다나가 선지식들을 만나는 장면들을 눈으로만 주벽 중심으로 훑고 지나간다.
제2회랑이 끝날 무렵 마침내 수다나가 미륵보살이 머무는 비로자나장엄장(毘盧遮那莊嚴藏) 큰 누각 앞에 도착하여 두 손을 땅에 짚고 끓어 앉아 예배하고 일심으로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공양하기를 원하는 장면(Ⅱ-A-126)이 나타났다. 궁궐은 자바의 전형적인 짠디 건축이다. 천계를 보여주는 천계수(天界樹)가 미륵궁 좌우에 서있고 위에는 구름 위를 나는 천인들이 좌우에 새겨져 있다.
“덕생 및 유덕의 발에 엎드려 예배하고 수없는 바퀴를 돌고서 은근히 우러러보며 하직하고 떠났다.
그 때 선재동자는 선지식의 가르침이 그의 마음을 윤택케 해서 모든 보살행을 바로 새기고 사유하며 해안국(海岸國)으로 항하면서, 스스로 지난 세상에 예경 닦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즉시 힘써 행할 뜻을 일으키고, 다시 지난 세상에 몸과 마음이 부정했음을 기억하고 즉시 오로지 스스로 다스려 청결케 할 뜻을 일으키며, 다시 지난 세상에 모든 악업 지었음을 기억하고 즉시 오로지 스스로 막고 끊을 뜻을 일으키고, 다시 지난 세상에 모든 망상 일으켰음을 기억하고 즉시 늘 바르게 사유할 뜻을 일으키며, 다시 지난 세상에 닦았던 모든 행이 다만 자신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하고 즉시 마음으로 하여금 광대하게 널리 중생에 미치게 할 뜻을 일으키고, ...
삼해탈문(三解脫門)에 들어가지만 성문의 해탈을 취하지 않고, 비록 사성제를 관찰하지만 소승의 성과(聖果)에 머물지 않으며, 비록 매우 깊은 연기를 관찰하지만 구경의 적멸에 머물지 않고, 비록 팔정도를 닦지만 영원히 세간 벗어남을 구하지 않으며, 비록 범부의 지위를 초월했지만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고, 비록 오취온을 관찰하지만 모든 온을 영원히 멸하지 않으며, 비록 네 가지 마에서 뛰어 나왔지만 모든 마를 분별하지 않고, 비록 육입처(六入處)에 집착하지 않지만 육입처를 영원히 멸하지 않으며, 비록 진여에 안주하지만 실제에 떨어지지 않고, 비록 일체 승을 설하지만 대승을 버리지 않는, 이 큰 누각은 이와 같은 등의 일체 모든 공덕에 머무는 분이 머무는 처소이리라. ...
그 때 선재동자는 이러한 등 일체보살의 한량없는 칭양하여 찬탄하는 법으로써 비로자나장엄장 큰 누각 중의 여러 보살들을 찬탄하고 나서, 몸 굽혀 합장하고 공경히 엎드려 예배하고서, 일심으로 미륵보살을 보고 친견하며 공양하기를 원하였더니, 마침내 미륵보살마하살이 다른 곳에서 오는데, ...
그대가 선지식 생각하니/나를 낳음이 부모와 같고/나를 양육함이 유모와 같아/나의 보리분법 증장하며//의사와 같이 병 치료하고/천신과 같이 감로 뿌리며/해와 같이 바른 길 보이고/달과 같이 청정륜(淸淨輪) 굴리며//산과 같이 동요하지 않고/바다와 같이 증감 없으며/뱃사공 같이 건네주므로/ 네 처소에 와 이르렀구나. ......
그 때 선재동자는 합장하고 공경하며 미륵보살마하살에게 거듭 일어서서 말하였다. “대성이시여, 저는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한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아직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고 어떻게 보살도를 닦는지 알지 못합니다. 대성이시여, 일체 여래께서는 존자에게 일생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라는 수기를 주셨는데, 만약 일생에 무상보리를 얻는다면 곧 이미 일체 보살의 머물 곳을 초월하였고, ......
모든 번뇌의 중병을 다스리는 큰 의왕을 지으며, 곧 이미 능히 일체 중생 중에서 가장 뛰어남이 되고,.....
여러 존자들이여, 이 장자의 아들은 저번에 복성에서 문수의 가르침을 받고 전전하여 남행하면서 선지식을 구해 110선지식을 경유하여 마쳤고 그런 뒤에 나의 처소에 와 이르렀는데, 잠시도 일념의 고달파함을 일으킨 적이 없었습니다. ....
큰 상주(商主)가 되어서 모든 중생을 보호하고, 진리의 큰 배가 되어서 제유(諸有-중생)의 바다를 건너며 ....
그대는 이 비로자나장엄장의 큰 누각 안으로 들어가서 널리 두루 관찰하라. 곧 능히 보살행 배우는 것을 헤아려 알고(了知), 배우고 나서는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할 것이다. ......
그러므로 선남자여, 그대는 문수사리의 처소에 가야 하니, 고달파함을 내지 말라. 문수사리가 응당 그대를 위해 일체 공덕을 설하리라. 어째서인가 하면 그대가 먼저 보았던 모든 선지식에게서 보살행을 듣고 해탈의 문에 들며 대원을 만족한 것은 모두가 문수의 위신력이었기 때문이다. 문수사리는 일체처에서 모두 구경을 얻었다. 그 때 선재동자는 그의 발에 엎드려 예배하고 한량없는 바퀴를 돌고서 은근히 우러러보며 하직하고 떠났다.
(김윤수 역주, 대방광불화엄경Ⅶ, 입법계품 P.614-780)
3층 테라스의 제3 회랑으로 카라가 지키는 문을 통과해 올라갔다. 선재동자가 비로자나장엄장 큰 누각을 둘러보고 미륵보살의 설법을 듣고 미륵보살을 하직하고 코끼리를 타고 문수보살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보문국(普門國) 소마나성(蘇摩那城)에서 문수보살을 다시 만난다(Ⅲ-A-11). 문수보살의 위신력으로 선재동자는 소마나성에서 삼매에 들어 마음으로 보현보살을 만난다. 보현보살과 선재동자가 비로자나불을 뵙는 장면이다.(Ⅲ-A-14). 보현보살이 오른손을 내밀어 선재동자의 구법행을 칭찬하는 장면이다.(Ⅲ-A-18). 부조의 장면들을 화엄경 입법계품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 때 문수사리는 이 법을 펴 설해서 보이고, 가르치며,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하여 선재동자로 하여금 아승기 법문을 성취하게 해서, 한량없는 큰 지혜의 광명을 구족하게 하고, 보살의 끝없는 다라니, 끝없는 서원, 끝없는 삼매, 끝없는 신통과 끝없는 지혜를 얻게 하며, 보현행의 도량에 들어가게 하고, 그리고 선재를 자신이 머무는 곳에 둔 채, 문수사리는 다시 거두고 나타나지 않았다.”
“금강장 보리도량의 비로자나여래의 사자좌 앞 일체 보배 연화장 자리 위에서 ...... 선재동자가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켰을 때 자신의 선근의 힘과 일체 여래께서 가피하시는 힘과 보현보살의 같은 선근의 힘으로 말미암아 열 가지 상서로운 모습을 보았다.”
“선재동자가 이를 얻고 나니, 보현보살이 곧 오른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쓰다듬었고, 이마를 쓰다듬고 나니 선재는 곧 일체 불국토 미진수의 삼매문을 얻었는데.... 그 때 보현보살마하살이 선재에게 말하였다.”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이 두 손에 야자수 잎을 말려 경문을 쓴 패엽경을 들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Ⅲ-A-56) 동시대의 석굴암의 문수보살은 종이를 접은 절첩식(折帖式) 경전을 들고 있는 것과 닮았다.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문화권의 차이를 볼 수 있어서 재미있다. 닥나무나 등나무, 짚 등의 섬유질을 추출하여 만든 종이와 송진 그을음을 원료로 만든 먹은 천년을 가도 변하지 않지만 야자수 잎은 습기와 염분이 많은 지역에서는 빨리 부식할 것이고, 자바섬의 불교 문헌은 비석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 까닭일 것이다. 야자수 잎에다 팔만 사천 가지 법문의 장광설(長廣舌)을 적었음을 화엄경 입법계품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내가 그 여래의 처소에서 이 법문을 듣고 수지하여 독송하며 억념하고 관찰한 것을, 가사 어떤 사람이 큰 바다 분량의 먹과 수미무더기의 붓으로써, 이 보안법문(普眼法門)의 한 품(品) 중의 한 문(門) 한 문 중의 한 법(法), 한 법 중의 한 뜻, 한 뜻 중의 한 문구를 써서 베낀다고 해도 일부분조차 얻지 못하거늘, 어찌 하물며 다할 수 있으리오.”
야자수 잎에 글자를 쓴 잉크는 어떻게 만들고, 어떤 필기구로 패엽경 글씨를 썼는지 궁금하다. 불교문화가 온존한 미얀마나 스리랑카에 가면 비밀을 풀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발리의 뜽아난마을에서 론따르(Lontar) 야자수잎 대신에 대나무 조각에 글과 그림을 새겨서 관광기념품으로 팔고 있었다.
공문을 지나 제4회랑으로 올라갔다. 일행은 보이지를 않고 아내와 나는 일행을 찾지를 못할까 불안하고, 여행 일정에 차질을 줄까 두렵다. 또 주마간산이다. 제4회랑 주벽 전 72면의 부조는 보현행원찬(普賢行願讚, 40권 화엄경의 최후의 시와 팔대보살만다라경의 8대보살 찬양시 1구를 첨가한 1권의 경으로 8세기 중엽 불공(不空)이 한역함. 80권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에 해당.)의 10게송(gatha)과 부합하는 부조를 제외하면, 화엄경 입법계품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부조들에 부처들이 많이 나타난다. 수다나가 보현보살의 행원의 힘으로 우주 시방의 삼세불이 나타난다.
IV-A-6
시방세계의 보살이 삼업청정(三業淸淨)하여 번뇌를 멸진하는 장면(Ⅳ-A-6)에는 상단에 삼존불과 2존의 보살이 있고 하단에는 여러 보살들이 있다. 상단 가운데 부처는 전법륜인이고 불꽃 모양 신광이 새겨져 있다. 그 왼쪽의 부처는 항마촉지인이고 오른쪽 부처는 시무외인이다.상단의 여백에는 꽃과 나무가 새져 있다. 입술이나 머리에 붉은 빛이 배어 있고 백색 몰타르 흔적으로 보이는 백색 물질이 묻어 있다. 난간에는 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 등에 탄 아이가 보이고 그 앞에 수다나가 꿇어앉아 있다(Ⅳ-B-17). 상단에 2불과 4보살이 나란히 있고 하단에 선정인을 하고 삼매에 잠긴 수행자를 비롯하여 10명의 수행자들이 있는 면도 보인다. 난간에는 세 줄기 연꽃을 든 보현보살을 친견하는 수다나가 여러 수행자들과 앉아 있다.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과거의 불도 수행을 가르치는 장면에는 상단에 연화좌에 앉은 9불이 있고 그 오른쪽에 일정(日精)보살, 왼쪽에 월정(月精)보살이 앉아서 합장하고 있다. 아래에는 세 줄기 연꽃이 있는 보현보살이 수다나에게 설법하고 있고, 허리에 큰 칼을 차고 있는 등 수다나의 일행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합장하고 앉아 보현보살의 설법을 경청하고 있다.(Ⅳ-A-53) 월정보살 앞의 연꽃에는 붉은색이 완연하게 남아 있다. 보로부두르의 부조에 채색을 했던 흔적으로 보인다.
9불 중 뒷줄의 4불은 전법륜인을 맺고 있고, 앞줄은 오른쪽부터 여원인, 설법인, 선정인, 시무외인, 항마촉지인을 맺고 있다. 보로부두르 원형 테라스의 탑 안에 모셔진 72존의 비로자나불은 모두 전법륜인이고, 동쪽의 아촉불은 항마촉지인, 남쪽의 보생불은 여원인, 서쪽의 아미타불은 선정인, 북쪽의 불공성취불은 시무외인, 원형 테라스 난간 외벽 감실의 64존의 석가불이 설법인을 맺고 있는 것과 수인과 배치 순서가 일치한다. 보로부두르를 설계자가 근거로 삼은 경전이 화엄경임을 확인하게 해준다. 왜냐하면 화엄경의 주불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고, 석가불은 비로자나불의 화신불이기 때문이다. 보로부두르 설계자는 물론 산스크리트어 화엄경을 근거로 했다. 9불의 한가운데에는 선정인을 맺은 아미타불이 배치되어 있다.
한 면에 모두 10존의 부처가 보인다. 상단에 7존의 좌불, 그 좌우에 각 1존의 입불이 있는데 입불의 발은 하단 중간까지 내려와 있다. 하단에는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불로 보이는 불상이 왼쪽 끝에 있고 가운데 그 오른쪽 3째가 합장을 하고 있는 보현보살이고 보현보살 오른쪽에 수다나가 등장한다. 수다나 등 뒤의 세 송이 연꽃 외에 6송이의 연꽃이 보인다.(Ⅳ-A-54). 보현보살은 물론이고 수다나에게도 두광이 뚜렷이 나타난다. 수다나가 이제 보살의 경지에 다다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륵궁에서 수다나가 보현보살처럼 날 수 있게 해달라는 서원을 하고 경이로운 시선으로 보는 가운데 보현보살이 하늘을 나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미륵궁에 도착하는 두 장면, 보현보살의 비행을 지켜보는 장면, 연꽃을 타고 나는 장면까지 수다나가 4번 등장한다.(Ⅳ-A-60) 이 장면에서 하늘을 비상하는 보현보살의 모습을 확대한 사진을 존 믹식의 책에서 보고 여행 오기 전부터 보로부두르 부조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입법계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선남자여, 그대는 우선 나의 이와 같은 육신을 관찰하라. ... 그 때 선재동자는 또 자기의 몸이 보현의 몸 안에 있으면서 시방 일체의 모든 세계 중에서 중생 교화하는 것도 보았다.”
촬영한 사진을 확대해서 보니 이 면에도 여러 곳에 붉은 칠 흔적이 선연하게 남아 있다. 보로부두르 부조들은 경주 남산의 마애불처럼 채색을 했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제불이 충만한 무량광 무량수 극락정토의 카라가 새겨진 아치형 문의 궁전에 전법륜인을 맺은 아미타불이 가운데에 있고, 그 오른쪽에 보현보살, 왼쪽에 수다나가 합장하고 끓어 앉아 설법을 듣고 있다. 보현보살 머리 위에는 보현보살을 상징하는 3송이 만개한 연꽃과 2송이 연꽃 봉오리가 있다. 궁궐의 좌우 하늘에는 연꽃 받침의 해와 달이 있고, 좌우에 각 4명의 천인들이 구름을 타고 난다. 왼쪽 끝에는 반인반조(半人半鳥)의 음악의 신인 킨나라가 보인다. 여백에는 꽃비가 내리는 것을 표현한 3꽃송이가 있으며, 꽃이 핀 나무와 잎이 무성한 2그루 나무가 있다. 아미타경에서 묘사한 극락세계의 모습일 것이다. 또 화엄경 보현행원품의 마지막 대목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Ⅳ-A-70)
“보현보살마하살은 여래의 뛰어난 공덕을 칭찬하고 나서 모든 보살 및 선재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여래의 공덕은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며,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한다면 나의 공양도 이에 다하겠지만, 허공계 내지 번뇌가 다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이 공양도 또한 다함이 없어서, 순간순간 상속하여 중단 없고 신·어·의 업에 고달파함이 없는 것이다....또 다음 선남자여, 공덕을 따라 기뻐한다고 말한 것은, 있는바 온 법계 허공계의 시방 삼세의 일체 불국토 극미진수의 제불 여래께서.... 이 사람은 목숨이 끝나는 최후 찰나에 임해 일체 모든 근이 모두 다 흩어져 무너지고 일체 친지 권속이 모두 다 버려 떠나며 일체 위세가 모두 다 퇴실하고 재상, 대신, 궁성 안팎의 코끼리 말 수레, 진귀한 보배, 숨은 곳간의 이와 같은 일체가 다시 서로 따름이 없지만, 오직 이 서원왕(誓願王)만은 서로 버려 떠나지 않고 일체 시에 그의 앞을 인도하여 한 찰나 중에 곧 극락세계에 왕생함을 얻으며, 이르고 나면 곧 아미타불과 문수사리보살, 보현보살, 관자재보살, 미륵보살 등을 보는데, 이 모든 보살들이 색상이 단엄하고 공덕이 구족되어 함께 둘러싼 바로서, 그 사람은 스스로 연꽃 가운데 태어나 붓다의 수기 주심을 입고....미래의 겁의 바다를 다하도록 널리 일체 중생을 능히 이익 되게 할 것이다....모두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함을 얻게 할 것이다.”
3불 3보살의 장면, 보현보살과 수다나, 연꽃을 공양 올리는 인물과 무량수궁의 아미타불, 불공성취불과 아촉불이 등장하는 장면, 석가불이 서 있고, 그 왼쪽 상단에 비로자나불과 2아촉불, 그 오른쪽 상단에 비로자나불과 2아미타불이 있다. 하단에는 보현보살과 향로를 공양 올리는 수다나가 보인다.
제4회랑의 난간에는 불탑공양(Ⅳ-B-7), 두 마리 말이 끄는 4바퀴의 지붕 있는 마차를 어린이가 말 위에 타고 끌고, 수다나가 끓어 앉아 누군가에게 길을 묻는 듯 한 장면(Ⅳ-B-17), 수다나가 병자들에게 약을 보시하는 장면(Ⅳ-B-19), 아이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가는 장면(Ⅳ-B-20), 수다나가 일정보살, 월정보살, 여러 보살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보현보살을 찾아 떠나는 장면(Ⅳ-B-66) 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보로부두르의 부조에는 인도의 고대 수행자들이 쓰던 요가파타가 보인다. 보로부두르에서 처음 보는 요가파타는 허리와 한 무릎을 연결하는 끈이다. 어릴 때 어른들이 허리가 아파서 양팔로 두 무릎을 감싸고 손을 깍지 끼고 앉아 있었다. 보로부두르에는 전각 안에서 결가부좌를 풀고 편안히 앉아 있는 보살들이 주로 착용하는 일상생활의 도구이다. 보로부두르에 나타나는 요가파타는 의자 없이 앉았을 때 허리가 아픈 것을 막고 두 팔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도구이다.
보로부두르의 사방 난간의 외벽 감실에는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부처님이 성도한 인도 마하보디사원의 대탑과 닮았다. 보로부두르의 사방 외벽은 삼단으로 돌출된 벽면에 5곳의 모서리가 있다. 모서리의 감실에 봉안된 불상은 좌우로 90도 돌아간 방향을 보고 있다. 남면 벽의 모서리 감실 불상은 동서로 향하고 있다. 동서남북 방위가 중첩된 중중무진(重重無盡)의 화엄연기의 세계에 있는 부처를 표현한 것일까?
제4회랑을 나서며 내가 마지막으로 촬영한 난간의 부조에는 큼지막한 꽃이 활짝 피어 가지마다 가득 피어나 있는 천계수 밑에 보관을 쓴 여덟 명의 보살들이 열 지어 앉아 있는데 그 얼굴 표정이 너무나도 흐뭇하고 정답고 복스럽고 원만하여 그들의 숨소리마저 들릴 듯하다. 천삼백 년 전에 돌에 새긴 보살들이 금방이라도 벽에서 걸어 나올 것만 같다. 꿈꾸는 듯, 미소 짓는 듯, 고요히 명상하는 듯, 생각에 잠긴 듯 한 얼굴 표정이 도무지 인간이 새긴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이토록 아름답고 불가사의한 조각을 남긴 자바의 예술가들은 모두가 마음이 맑고 순수한 청년 수다나의 분신일 것이다. 욕계 중생의 오욕락의 삶을 보여주는 기단부의 부조에서 불보살과 인간과 축생들이 혼재한 색계, 불타와 수다나의 구도행을 표현한 네모난 회랑길을 따라 순례한 사람들은 어느새 마음이 맑고 지혜로우며 자비희사(慈悲喜捨) 4무량심(無量心)으로 충만해진다.
회랑을 돌며 고개를 들고 보았다. 머리 위의 감실마다 앉아계신 부처님의 얼굴이 아침 햇살에 또렷하게 나타났다. 고요하고 평화롭고 온화하고 청초한 부처님의 자애로운 얼굴이 내 마음의 필름에 찍혔다. 이제 둥글고 원만한 불보살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 때 보현보살마하살은 여래의 뛰어난 공덕을 칭찬하고 나서 모든 보살 및 선재에게 말하였다. ...... 이 광대하고 가장 뛰어난 공양이, ......온 법계 허공계의 시방 삼세의 일체 불국토, 극미진수의 제불 여래께서 처음 발심해서부터, 일체지를 위해 부지런히 복무더기를 닦고 신명을 아끼지 않으며 불가설불가설 불국토 극미진수의 겁을 지나도록... 그 때 보현보살마하살이 여래 앞에서 이 보현의 광대한 서원왕의 청정한 게송을 설하고 나니 선재동자는 용약함이 한량없었고, 일체 보살은 다 크게 환희했으며, 여래께서는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그 때 세존께서 여러 성자인 보살마하살들과 더불어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해탈 경계의 뛰어난 법문을 연설하실 때, ...... 붓다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다 크게 환희하여 믿고 받아서 받들어 행하였다.“(김윤수 역주, 화엄경 보현행원품)
네 번째 마지막 공문을 지나서 5층 테라스로 올라갔다. 아내와 나만 남고 일행은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같이 다니던 영자매도 보이지 않고 미영샘도 없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했던가. 보이는 사람이라곤 히잡을 쓴 인도네시아 여학생들과 검은 피부의 남학생과 모자를 쓴 남자들뿐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보로부두르 대탑을 다 둘러보지 않을 소냐. 아내는 선재동자가 되어 나를 앞서서 초연히 독보를 한다. 성철스님의 출가시가 생각난다.
彌天大業紅爐雪 하늘에 넘치는 큰일도 붉은 화롯불에 한 점 눈송이요,
跨海雄基赫日露 바다를 덮는 큰 터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誰人甘死片時夢 그 누가 잠깐의 꿈속의 세상에 살다 달게 죽어가랴.
超然獨步萬古眞 만고의 진리 향해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오른쪽 원단에 32기의 종형 불탑이 둘러 서 있다. 합장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한 바퀴를 돌고 원단에 올라 두 번 째 원단의 24기의 불탑을 보며 오른쪽으로 또 한 바퀴 돈다. 불탑의 마름모꼴 작은 창들 사이로 전법륜인을 맺은 비로자나불의 얼굴이 언뜻언뜻 보인다. 서북쪽 불탑 속의 상반신을 드러낸 부처님의 평화롭고 고요하고 온화하신 얼굴을 바라본다. 불탑의 석재를 연결하는 나비 모양의 촉을 끼웠던 구멍이 완연하게 보인다. 세 번 째 원단으로 올라 오른쪽의 웅장한 4각 받침에 8각 기둥의 상륜부를 가진 대탑과 왼쪽의 16기의 작은 불탑 사이로 한 바퀴 돈다.
둥근 달이 서천에 떠 있는 새벽에 와서 동녘 하늘에 떠오른 아침 해가 비추는 부처님과 보살님들의 얼굴을 보았다. 화엄경 입법계품의 게송이 내 가슴에 떠오른다.
“비유하면 맑은 달이 허공에 있어/ 세간 중생 늘고 주는 것 보게 하고/ 일체의 강과 못에 영상 나투니/ 모든 별이 광명색 빼앗기듯이/ ...... 비유하면 맑은 해가 천광 놓으면/본처에서 부동하되 시방 비추듯/ 붓다 해의 광명 또한 이와 같아서/ 가고 옴 없이 세상 어둠 없애네.”
그리고 일행을 찾아서 마음이 바빠지고 몸은 허둥댄다. 부처님의 세계에서 아내와 나는 어리석음과 탐욕과 성냄으로 들끓는 욕계 중생이 사는 지상으로 허겁지겁 하강하였다. 들어온 입구에 일행이 기다리고 있겠거니 여기고 관리인에게 물으니 새벽에 들어오며 가슴에 붙인 보로부두르 일출 입장권을 보더니 마노하라 레스토랑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출구로 가라고 한다. 나가고 들어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 출구 낮은 비탈길을 바삐 걸어 내려갔다. 길이 오른쪽으로 꺾이는 지점의 그늘 밑에 관유회장님이 벤치에 앉아 기다리다가 우리를 불렀다. 얼마나 반가운지 지옥에서 지장보살을 만난 것만 같았다.
회장님도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일행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행이 보로부두르 대탑 둘레 어느 나무그늘 밑에 모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에게 가방을 맡기고 무릎이 불편한 회장님을 대신하여 다시 출구 길을 거꾸로 올라서 보로부두르를 서쪽에서 출발하여 북쪽, 동쪽, 남쪽으로 감아 돌며 일행을 찾았지만 그림자도 없었다.
그 와중에 촬영하지 못한 보로부두르의 전체 모습을 사방에서 카메라에 담았다. 나중에 보니 기단부 남서쪽 모서리에 노출된 4면의 부조 중에서 3면이 촬영되어 있었다. 불행 중에 생긴 행운이었다. 그래도 욕계 중생의 모습을 새긴 4면을 가까이서 촬영하지 못하고 보로부두르의 전체 모습을 완전하게 잡지 못해 아쉽다.
일행을 찾지 못하고 다시 출구로 와서 기다리고 계시던 회장님과 아내를 만나서 함께 코끼리 놀이터를 지나 사람들의 행렬에 섞여서 정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새벽에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가 마노하라 레스토랑 입구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정문 쪽으로 걷다가 회장님이 레스토랑 쪽으로 발걸음을 되돌렸다.
누각처럼 사방이 트인 넓은 레스토랑의 2층에 올라가니 사람들은 느긋하게 아침밥을 들고 있었다. 목이 말라 오렌지 주스를 두 잔이나 들이켰다. 가이드 유디가 보로부두르 기념 스카프 한 장을 회장님께 선물하였다. 회장님은 고맙게도 그것을 다시 아내에게 주었다. 보로부두르는 하루아침에 자신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 나처럼 비루한 중생은 한 끼 밥을 먹는 동안에 결단코 성불 할 수가 없었다. 보로부두르가 곁에 있어도 보로부두르가 그리웠다. 아침밥을 먹고서 일층으로 내려와 벽에 걸린 보로부두르 사진 2장을 다시 내 카메라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