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일요일에 친구들과 광안역에서 만나서 뒷산인 황령산 둘레길을 걸었다.
광안역에서 빠져 나와 황령산쪽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예전에는 오래된 허룸한 주택들이 많았는데 언제 확 밀어 버렸는지
허허벌판이 돼 있고 길가에는 공사판 가림막을 쳐 놓고 있었다. 주택조합을 결성하여 고층 아파트를 짓기 위한 기초작업중이었다.
둘러쳐진 가림막을 지나 가파른 길을 조금 올라가니 둘레길이 나왔다. 둘레길을 따라 한참 걸어가니 편백숲이 나왔다. 편백숲에는 동네 사람들이 많이 나와 그늘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두어시간 걷고난 다음 문현동 뒷산부근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나무 숲 가지 사이로 아랫 동네 아파트가 띄엄띄엄 보이니 마치 소풍 나온 기분이었다. 먼저 막걸리부터 한 잔 부어 '고시레'를 한 후 한 모금 마시니 더운 날씨에 땀을 흘린 후라 갈증이 나던 차에 시원한 막걸리가 들어가니 무아지경에 신선놀음인지 분간키 어려웠다. 식사를 마친후 왔던 방향과는 반대쪽으로 길을 따라 걸었다. 당초 목표는 연산동 물만골로 내려갈 예정이었으나 도중에서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전포동쪽으로 하산하게 되어 결국은 전포역에서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전포동이란 이름의 유래를 보면 밭전자에 포구포자가 합쳐진 말로 밭과 포구가 붙은 마을이란 뜻이다. 예전에는 바닷물이 서면 깊숙이까지 들어왔었고 해마다 여름에 홍수가 지면 동천으로 토사가 바닷가로 쓸려 내려와 밭을 일구었다고 한다. 동천이란 내 이름도 자성대 동쪽으로 흐르는 냇가란 뜻이다. 좀 더 상세한 내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포동(田浦洞)은 서면의 동천이 지금 범일동과 문현동 사이로 흘러 바다로 들고 있다. 그러나 먼 옛날로 올라 갈수록 동천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자리는 서면의 북쪽인 육지쪽으로 올라온 자리였다. 말하자면 바다가 지금의 서면의 육지 깊숙이 들어서 있었는데 홍수 때면 서면 주위의 산에서 쏟아지는 물이 토사를 실어내려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들어 갔다. 그렇게 메워진 자리가 갯가가 되고 논밭이 돼 간 것이다. 그 논밭으로는 벼와 보리, 채소들이 재배되었다. 지금은 전포동의 평지는 시가지가 돼 있지만 그때는 갯가의 밭인 밭개였다. 그 밭개가 밭 전(田) 갯 포(浦)의 전포리가 된 것이다. 이 지역의 고로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전포동(田浦洞)의 노막리 또 농막리까지 조수가 들어 배가 많이 정박하였다고 한다. 1949년 전포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70년 인구 증가로 전포1동은 전포1,3동으로 분동되었고, 1975년 전포2동은 전포2,4동으로 분동하였다. 1998년 전포2, 4동을 전포2동으로 통합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농막마을, 밭개마을, 부산의용촌, 오수골마을이 있었다.]
우리가 한자 문화권이라서 그런지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중국에는 비슷한 지명들이 많다. 마치 미국의 지명이 영국을 본받은 것처럼 정신이나 육체나 뿌리없이 자란 나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내가 태어난 곳은 진양인데 진주로 흡수되어 지금은 진주시로 바뀌었다. 몇년전 중국으로 관광을 갔더니 중국에도 진주라는 도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배를 탈 때 송출선원으로 제일 먼저 탔던 배가 선명이 '아시아 모모'였는데 벌크선이었다. 미국에서 목재칩을 싣고 일본 시즈오카현에 있는 '다고노우라(田子 浦)'항에 입항했다. 그곳에 펄프공장이 있어 바닷물 수면위로는 공장페수에서 흘러나오는 거품들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이따이 이따이'병처럼 환경오염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역을 하는 동안 가까운 요시하라 시내에 나가서 쇼핑도 하고 집으로 전화도 하였다.
나는 점심식사후 부둣가를 산보하다가 어떤 오피스 걸을 만났다. 사무실에서 잠시 나와서 바람을 쐬던 참이었다. 나는 당시 일본어를 공부하기 위해 박성원이 지은 일본어책을 공부하고 있던 참이었다. 일본어 회화 몇마디를 손바닥에 적어 외우고 있던 참이어서 다짜고짜로 그녀에게 다가가서 손바닥에 적힌 글을 보고 말을 붙였다. 그랬더니 그녀는 의외로 친절하게 말을 잘 받아주었다. 일본말을 잘 몰랐으므로 영어를 섞어가며 의사 소통을 하였고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다음날 그녀 덕분에 후지산 인근에 있는 호수옆의 관광지에도 놀러 가고 자기 집에도 초대를 받아 저녁식사도 하게 됐다. 지금은 다 늙어서 꼬부랑 할머니가 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