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제 논의를 했던 이 이야기를 보면 남자는 자신의 사념들에 대해서 그다지 인식을 하고
있지 못하다. 다만 허기를 채우고 난 뒤에야 겨우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갑자기
어딘가에서 마실 것이 나타났을 때, 남자는 놀라면서 이러다 귀신들이 나타나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사념과 그에게 일어난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전혀 보지
못했다. 이 이야기를 보면, 모든 사념은 한 순간의 지체도 없이 즉각적으로 실제화되어 나타난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우리의 삶에서는 사념과 실제화 사이에 하루나
일주일, 혹은 한 달에서 1년 또는 그 이상의 시간 차이가 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우리의 사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 연관성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과거에 어떤 사념을 만들어냈었는지 잊어버렸다
하더라도, 이제 우리가 사념과 사건이 원인과 결과로 묶여져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념이
얼마나 강력한 최면적 효과와 결과물인지 알게 되리라.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만들어진 사념이 땅
속에 묻혀 있는 물건인 것처럼 꺼내어 실제화되지 못하도록 현재에 폐기처분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의 사념을 지켜보기 시작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
실제화되는 것을 기다릴 수 있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사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개 모든 사념이란 “나는 복권에 당첨되고 싶다.”와 같이 감정적 힘이라곤 없는, 습관적인 생각
들의 나열에 불과하다. 사념 중에는 내면 깊은 곳에서 기인한, 감정과 연관되어 있고 트라우마와
연관된 것들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사념들에 관한 우리의 인식력은 그다지 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또한,
사념 중에는 우리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마인드를 운용하는데서
기인한 것들도 있다. 마치 수학적 문제를 풀 때가 그러하다.
우리 자신의 사념과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 ‘이것이 곧 나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태도를 갖게 될 때 즉 자신의 사념과 사건이라는 결과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태도를 취하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불행과 고통에 대해서 주변의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게 된다.
구르지예프의 가르침 중에는 ‘제 4의 길’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것은 내적 탐구를 위해서 일상을
버리고 사원으로 들어가거나 산 속으로 숨어들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지금 현재 우리의 일상, 그것
자체로 우리의 내적 탐구와 성장을 위해 완벽한 배움의 상황이 조성되어 있다. 만일 현재 내 삶이
이렇거나 저런 모습이라면 그건 바로 우리가 사념으로 만들어낸 모습이 그러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내 삶의 주변이 펼쳐져 있는 모양새가 바로 우리의 내적 세계가 물질화된 형태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해서 깨어있는, 관조의 상태를 유지하고, 습관의 벽을 깨기 위해서 갈등 struggling
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오쇼 변형의 타롯 중 "마인드"와 관련된 내용은 <변형의 춤-구르지예프 무브먼트> 섹션에 올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