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주의 신학이 필요하다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 말이 맞는가? 맞다. 정확히 맞다. 그런데 이 의미를 잘 알아야한다. 이것은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행위를 포함할 때 믿음이라 말한다. 행위만은 믿음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행위를 제외하는 것으로 생각하니 문제가 생긴다. 믿음이란 지·정·의가 함께 할 때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세 요소 중 하나가 없거나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이단이라 말한다. 그런데 행위가 제외된 믿음을 말하면서 마치 정통 신학을 말하는 것처럼 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깨우치는 것이 바로 경건주의 신학이다.
“경건주의 신학과 신학자들”(카터 린드버그 편집 CLC 간행)이라는 책을 토론하였다. 일반독자들이 읽기에는 무리가 있는 두께와 내용이지만 목회자는 꼭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이다. 경건주의는 종교개혁(16세기)과 신학적동요(자유주의 발현, 19세기) 사이의 폭넓은 신학적 신앙적 성향으로 17-18세기의 주된 신학이다. 종교개혁을 말하고자 한다면 경건주의까지 말해야한다. 경건주의는 종교개혁과 짝을 이루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구원에 있어 칭의적인 문제를 주로 다루었다면 경건주의는 성화적인 측면을 주로 다룬다. 구원은 칭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칭의·성화·영화까지 함께 말해야 한다. 이 중에 하나만 말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다. 그러니 종교개혁을 말하기 위해서는 경건주의까지 함께 짝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경건주의가 출현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종교개혁 교회들이 기독교적인 삶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보며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건주의 자체에서는 경건주의를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경건주의 폭은 의외로 포괄적이다. 영국 청교도주의를 포함하여, 네덜란드에서의 개혁주의 그리고 독일에서의 경건주의 운동과 경건주의에 속하는 모라비안에 영향을 받은 감리교와 각성운동까지 경건주의에 포함시킨다. 그러기에 사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경건주의 신학 위에 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경건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경건주의를 모르고, 따르지도 않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다.
경건주의자들은 말씀을 배우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한 삶을 영위하는 자들이다. 이 당시에 구원에 관하여 기록된 자료들을 보면 성화가 없는 칭의는 없다고 강조한다. 말로는(고백주의) 구원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구원이 없는 유사그리스도인인지 어떤 사람인지 처절하게 외치고 있다. 성화의 핵심은 자기부인이다. 자기가 죽어야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어설픈 칭의 이론으로 성화를 무시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어설픈 신학은 어설픈 삶을 만들어 내어, 그 삶이 세상 사람들과 다름이 없어 교회가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된 서글픈 시대를 본다. 그래서 경건주의 신학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설교를 아무리 하여도 바뀌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고민이 많은가? 그렇다면 경건주의를 더 공부하라. 루터를 포함한 종교개혁주의자들이 고민한 것이 바로 그 문제였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이 경건주의였다. 그 해담 중의 하나가 묵상이다. “묵상하면서 보낸 한 시간이 천개의 설교보다 더 가치가 있다”(제임스 어셔)는 말은 삶을 강조하며, 그러기 위해 말씀을 듣고 묵상할 것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말씀을 듣기만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을 실현하여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설교를 한 번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묵상하도록 설교원고를 주보에 싣고, 새벽예배 설교도 매일 홈페이지에 올리고 있다. 묵상하라고. 말씀을 살아내라고.
경건주의를 알고 있는가? 난 이 책을 통해 경건주의에 대해 새로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해 일정부분 해답을 얻었다. 한국교회가 아름답게 되기 위해 경건주의가 한국교회에 꽃피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교회의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모든 교단이 경건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왜 경건을 가르치지 않고 칭의만 주야장천 말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비윤리에 대한 합리화는 아닐까? 합리화로 자신의 죄를 숨기려하지 말고,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교회여! 경건주의를 알아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믿음을 회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