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EDRA(페드라,1962년)
감독 ; 줄 다신(Jules Dassin)
음악 ;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
주연 ;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 안소니 퍼킨스(Anthony Perkins)
영화 ‘페드라’는 그리스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그리스신화에는 여러 가지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신들의 사랑, 영웅의 사랑, 지순한 사랑, 사련(邪戀)의 비극 등, 모두가 인생의 깊이를 더해주는 사랑이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수많은 연인들 중에서도 가장 뜨겁게 사랑을 불태운 연인은 페드라와 알렉시스가 아닐까. 금단의 사랑을 했으니 말이다.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딸인 페드라(Faidra)는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Theseus)의 후처가 되었는데, 전처의 아들 히폴리투스(Hippolytus)에게 연정을 품는다. 그러나 히폴리투스는 순결한 처녀신 아르테미스를 사랑하여 다른 여인들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가 사랑을 받아 주지 않자 페드라는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자식들의 장래를 망쳐 놓을 것이 두려워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을 한다.
아버지 테세우스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은 히폴리투스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 않은 채 전차를 몰고 해변을 달리다가 바다에서 갑자기 나타난 괴물을 보고 말이 놀라는 바람에 전차에서 떨어져 죽는다. 이는 테세우스가 포세이돈에게 아들을 죽여 달라고 빌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인가. 그러나 고대의 비극시인들은 결코 페드라를 악녀로 그리지 않았다. 비극의 원인은 히폴리투스의 연인인 아프로디테의 노여움이었다고 설명한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연정을 품어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는 이야기는 페드라 콤플렉스라는 정신분석 용어로 남게 되었다. 또 이 이야기를 소재로 많은 예술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토스》를 비롯하여 프랑스의 극작가 라신의 《페드르》등이 있다.
영화 페드라의 아이디어를 감독 줄스 다신에게 준 사람은 그리스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말가리타 리베라키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이나 왕을 등장시켜 비극을 꾸며냈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대상이 없으므로 새로운 강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야 했다. 그래서 왕에 견줄만한 권력을 갖고 있는 해운왕을 통해서 페드라를 탄생시켰다.
그리스 해운업계에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한 타노스 크릴리는 선박왕 집안의 30대 초반의 딸인 페드라(Melina Mercouri분)와 정략적인 재혼을 한다. 그녀에게는 다섯 살짜리 아들과 24살 난 의붓아들 알렉시스(Anthony Perkins 분)가 있었다. 알렉시스는 런던에서 경제학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재혼을 싫어해 그리스로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다. 타노스는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페드라를 런던으로 보낸다. 그러나 런던 박물관에서 알렉시스를 처음 보는 순간, 페드라는 그를 사랑하게 되고 순진한 알렉시스도 이 사랑을 받아들인다. 결국 두 사람은 밤비가 내리는 파리에서 열렬한 사랑을 나누게 되고, 그리고 이 비극적인 불륜의 사랑으로 번민은 시작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는 알렉시스에게 귀국 선물로 스포츠카를 사주고, 처형의 딸인 엘시와 강제 결혼을 시키자, 페드라는 질투와 절망 끝에 남편에게 알렉시스를 사랑하고 있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이에 분노한 아버지는 알렉시스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구타를 한다. 집으로 돌아온 알렉시스는 스포츠카를 세워놓고 흐르는 수돗물에 상처 난 얼굴을 씻는다. 이때 흐르는 Love Theme은 파리에서의 정사장면 등 여러번 반복이 되었지만 이 장면에서는 특히 더 구슬프고 애절하게 들린다.
알렉시스의 상처투성이 얼굴에다 자기얼굴을 갖다 대면서 날 데려가 달라고 사정을 하는 페드라, 그러나 알렉시스는 다시는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거칠게 차를 몰고 사라진다. 잠시 후, 침실에서 평소 아끼던 잠옷으로 갈아입은 페드라가 수면제를 복용하고 다시는 깰 수 없는 깊은 잠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같은 시간 알렉시스는 지중해의 바닷가 도로를 질주하며 미친 사람처럼 큰소리로 절규를 한다. 차안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장엄한 바흐의 음악과 함께.......
“Go! Go! Go! That's My Girl........너만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지. 음악이 듣고 싶어? 그래, 듣고 싶겠지. 추방당한 자의 음악을 들려주지. 우린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호송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야. 오! 존 세바스찬 바흐여! 라라라, 라라 라라라, 잘 있어라! 바다여. 그녀는 날 사랑했었어. 옛날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라라 라라라, 라라 라라라, 오! 바흐여! 어디에 계신가요? 모두다 당신 음악에 미쳐있어요. 나도 그리스에서 당신을 듣고 있지요. 아버지를 죽이러 온 이 그리스. 페드라! 페드라! 페드라!...........
이 기막힌 장면에서 흐르는 바흐의 “Toccata and Fugue in F major, BMW 540“는 영화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음악과 함께 좁은 길을 고속질주 하던 알렉시스의 "My Girl"은 앞서오는 트럭을 피하려다가 그만 절벽으로 추락한다(마치 이륜마차를 몰다 바다의 괴물에 놀라 절벽으로 추락하는 히폴리투스처럼). 한편, 타노스는 그 시간에 “SS 페드라”호 사고의 사망자 명단을 몰려든 유족들 앞에서 한 명 한 명 발표를 하면서 이 비극의 막은 내리게 된다.
TV 드라마에 삽입이 되면서 유명해졌던, “기차는 8시에 떠나네”(To Traino Feygei Stis Ochto)의 작곡가 Mikis Theodorakis는 “Never On Sunday"로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은 Manos Hadjidakis와 함께 현대 그리스음악계의 아주 큰 기둥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이 영화에 이어 1964년 그리스 전통악기인 부주키(Bouzouki)의 매우 독특한 사운드로 “Zorba, The Greek"의 주제곡을 만들었으나 당시 군사정권하에서 좌익성향이라는 이유로 옥고를 치렀으며, 그의 음악들은 모두 금지곡이 되었다. 오늘날까지 약40여 편의 영화음악들을 만든 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테마곡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기념하는 오페라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이 영화를 만든 Jules Dassin은 같은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블랙 코미디형식으로 만든 전작 “Never On Sunday"와는 분위기가 180도 다른 파리에서의 정사장면을 포함하여(빗물이 흐르는 창을 통해 들여다보는 형식으로 찍은 명장면) 여러 장면에서 무척이나 예술적인 영상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지중해의 풍경도 또한 일품인데 절제된 줄거리 전개나 개성이 강한 음악하며, 1980년대부터 작품 활동을 중단한 Jules Dassin과 그의 부인 Melina Mercouri 모두에게 생애 최고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에서는 1967년 “죽어도 좋아”(비록 일본인이 지었지만)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으며, 1996년 “페드라”라는 이름으로 재개봉되기도 했다. 페드라 신화는 원래 그리스에 남아있는 벽화로부터 후세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기원전부터 연극으로 공연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오이디푸스 신화에 버금가는 서양 연극의 좋은 소재가 되고 있다. 한편 이 신화를 근거로 1880년 프랑스 화가 카바넬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