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가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은 역사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주장되었다. 드라마 <추노>에서도 소현세자가 독살되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세자가 송태하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신은 혼미하고 몸은 천근 같네. 이 서찰이 그대에게 무사히 전달된다 해도 그 때쯤이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듯싶네. …… 무거운 짐을 떠넘기고 먼저 가네. 친구!” 라고 말하는 부분이 그 한 예이다. 그렇다면 과연 소현세자는 정말로 독살되었을까?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이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의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끌려갔다. 8년 동안의 볼모생활에서 벗어나 1645년(인조23) 2월 1일 마침내 심양을 떠나 조선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한양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4월 26일, 며칠 전 발병한 학질이 위중해져 정오경에 사망하고 만다. 건강했던 세자가 갑자기 학질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로 인해 세상에 세자 독살설이 퍼지게 되었다.
소현세자의 독살설을 뒷받침하는 강한 정황 증거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록』 기록에 따르면 소현세자의 학질은 1645년 4월 23일 발병하여 사흘 만인 26일에는 급사할 만큼 악화되었다. 게다가 사망한 이후 약물에 중독된 듯 한 증상까지 나타났다는 점에서 독살의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인조실록』 권46, 23년 6월 27일조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 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이는 어머니 인열왕후의 서제가 세자의 염습에 직접 참여하여 목격한 것을 전한 것이니만큼 독살설에 더욱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누가 소현세자의 죽음을 원하였는가? 아버지 인조는 청나라에서 자신을 폐하고 친청파인 소현세자를 왕위에 올릴까 항상 두려워하였다. 실제로 세자는 청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심양에서 이미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어, 인조의 권위를 위협하기에 충분하였다. 인조와 세자의 갈등 관계는 1644년(인조 22) 2월 세자빈의 아버지 강석기의 장례 참여문제로 절정에 이른다. 장인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세자 내외가 청나라의 허가를 얻어 임시로 귀국하였으나, 인조의 반대로 끝내 참석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8년 만에 귀국한 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처부모도 찾아뵙지 못한 채 심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귀로에 세자는 인조의 명 없이 독단으로 평양에서 선비들의 글짓기를 시험하고, 친히 무재들의 활쏘기를 시험하였다. 후에 당시 선발된 진사 김연 등이 급제를 내려줄 것을 상소하는 일이 발생한다. 상소를 접한 승정원의 여러 신하들은 세자가 임금의 명도 없이 과거를 치른 일이 임금의 마음에 거슬릴까 염려하여 이를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8월 29일). 게다가 그 사이 3월 21일에는 심기원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였고 여기에서 세자 추대설이 등장하였으니, 인조는 더욱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세자에게 침술을 시술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이형익을 처벌하지 않은 점이라든지, 세자의 상례를 지나치게 소략하게 치루었다는 점 또한 의문을 증폭시킬 만하다. 이렇게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여러 가지 정황들은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추측에 무게를 싣는다.
그러나 『실록』 외에 『승정원일기』나 『심양일기』 등을 참조하면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즉 『승정원일기』 등의 기사는 세자가 귀국하기 전부터 이미 건강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귀국 전후로 세자의 병과 관련된 기사가 여러 번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실록』에서와 같이 건강하던 세자가 갑자기 급사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의 죽음을 병사로 보는 주장을 살펴보자.
「소현세자 병증과 치료에 대한 연구」에서 김종덕은 『심양일기』와 『을유동궁일기』 등의 기록을 통해 세자의 병력을 날짜별로 분석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세자가 청나라로 끌려간 이후 고초로 인해 산증을 얻어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울화병이 있는 상태에서 한기와 접촉하여 산증이 재발하였고, 귀국 후 의원이 이를 학질로 잘못 진단하고 치료하는 바람에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신명호 교수는 『승정원일기』를 근거로 소현세자의 독살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소현세자는 1월 9일에 심양에 도착하였고, 그의 병세가 조선에 알려진 것은 1월 10일이었으므로 병세를 기록한 보고서는 1월 9일 이전에 작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곧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심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들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세자의 병세가 수행 의원의 실력으로는 고칠 수 없었을 정도로 심각했음도 뜻한다. 2월 18일 귀국 이후에도 세자의 질병과 치료에 관한 내용이 『승정원일기』에 적지 않게 실려 있다. 이것은 세자의 질병, 죽음과 관련하여 실록의 기사가 전부가 아님을 반증한다.”
이러한 주장을 종합해 보면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할 충분한 동기는 있었으나 세자의 병세가 이미 심각하여 실제로 독살을 감행할 필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소현세자의 죽음을 명백하게 독살이라고 단정지을 만한 구체적인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소현세자는 건강이 안 좋은 상태로 계속해서 치료를 받아오던 중에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 사인은 의료사고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참고문헌
이성무, 『조선당쟁사1』, 동방미디어, 2000.
이성무, 『조선왕조사』, 동방미디어, 1998.
신명호, 「『조선왕조실록』역사문화콘텐츠소스북 편찬을 위한 주제선정 및 시안개발 자문 결과보고서」, 2008.
김종덕,「소현세자 병증과 치료에 대한 연구」, 『규장각』 제31집, 2007.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KBS드라마'추노'공식홈페이지(드라마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