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산(長安山) 기행문
( 2005. 2. 13 )
글/ 이 승 형
1. 들어가는 말
여태 돌아다니는 것 밖에 해본 것이 없는 사람.
이젠 어디론가 가는 것도 싫증이 날만도 한 사람
돌아다니는 것에 대한 향수가 아직도 남아있는 사람.
역마살 있다는 소리를 즐겨듣던 그 사람.
한평생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지니고
가보지 않은 곳으로 여행을 계획하고
가보려고 노력하며 살고있는 그 사람.
가까이 사는 혹자(或者)는 광인이라고 지나친 표현까지도 사용하지만
본인 스스로는 새로운 세계를 구석구석 누비려는 '나그네' 라 칭한다.
'가보지 못한 곳을 가보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 그것이 어찌 죄가 되리요!'
그 사람은 오늘도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목마름으로
그 사람으로선 새로운 곳,
장안산을 향하여 달려가 본다.
그 사람에게 장안산은 장안이란 이름이
공교롭게도 예전에 중국을 자주 다니며 중국 장안에서
그 사람이 보고 느꼈던 추억을 되살아나게 하였다.
그리고 옛 추억을 더듬거리며 '장안산 기행문' 이란 이름 하에
고이지 않은 샘에서 또다시 황토물 퍼내는 어리석음을 행하고 있다.
글이란 샘물과 같다.
옹달샘에서 밝은 생각들이 퐁퐁 솟아오르듯
샘은 항상 샘물이 고여서
자연스레 샘물이 흘러 넘쳐야 한다
고이지 않은 샘에서
고이지도 않은 황토물을 퍼내고 있는 그 사람
그리 심한 갈증도 없이 샘 밑바닥을 긁고있는 사람
오늘도 고이지도 않은 샘물을 퍼내고 있다.
2. 장안산(長安)을 생각하며
오늘 나그네가 올랐던 산은 장안산 (1237m) 이라고 한다.
장안이란 이름을 대하고 보니
중국의 역사도시 장안과도 통한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중국의 장안이 눈앞에 떠오른다.
중국의 진시황제가 최초로 전국을 통일하고 수도로 정한 곳이 장안(長安).
실크로드의 출발지이면서 오랜 중국역사에서 제일 자주
단골메뉴처럼 서울로 낙점되던 도시가 , 장안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수많은 역사 유적이 남아 있고,
진시황의 아방궁이 있고.
양귀비와 당 현종이 나라 망하는 줄도 모르고
러브스토리를 펼치던 로맨스의 현장, 화청지도 장안에 있다.
늙어 죽고싶지 않아서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호령하던 진시황도
그곳에 큰 무덤을 남기고 스치고 지나간 도시
그의 무덤 옆 땅속에서 발굴된 어마어마한 병마용 토구들
아직 발굴 아니 된 무수한 유적 덕분에
중국 역사 중 13개 왕조의 수도로 사용된
역사도시 장안(長安)은 요즈음도 하루에
수십만 명의 전세계 관광객을 그 곳 장안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당나라 때 장안은 신라인은 물론 서역과 서양인들까지 들락거리는 국제도시였다
동서양 문물들이 잘 어우러진 아주 맛있는 범벅 도시였다.
'서양의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고 서양인 그네들끼리 이야기 할 때에
동양에서는 모든 길은 실크로드를 통하여 장안으로 집결된다고 하였다.
지금은 장안이란 이름도 서안( 西安 Xian 시안 )으로 변경되어서
장안이란 이름자체는 사라졌지만
진시황과 양귀비의 혼이 서려있는 고도 장안은
누구나 한번은 꼭 가보고 싶은 도시이리라 생각한다.
장안산으로 향하는 산행버스에서 너무 엉뚱한 생각에 빠지다가
지난날 그 사람이 여행업에 몸담으며 자주 갔던 장안을 되새김질도 해본다.
잡념도 잠시 버스는 대진고속도로에 진입해 전라도 땅에 들어서 있다.
7080음악이 그 사람의 기분을 업그레이드 시킨다.
아침을 달리는 분위기 있고 센스있는 기사의 선곡 7080음악이다.
모두 조용히 7080음악을 감상하였다.
그러나 어느새 그는 혼자서 그 음악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아무도 따라하지도 않는데 혼자서 비 맞은 중처럼 가사를 흥얼거린다.
그러다보니 산행 버스가 정차한 곳이 장안산 입구가 아니라
논개의 사당이며 주논개의 생가지(生家址) 주차장이었다.
나그네는 재작년 전주 군산 벚꽃 마라톤에 참가할 때 이길로 대구로 돌아오며
지나가는 길에 이미 한번 방문한 장소였다.
우리 산행 버스가 논개 사당에 도착하자마자, 어디선가 홀연히 누가 나타났다.
논개 사당 관리실에서 50대 후반의 중노년 신사분이 양복차림을 하고
우리를 맞으며 어디서 오셨나고 물었다.
우리가 대구에서 장안산 산행을 왔노라 고하니
그분은 친절하게 논개의 일생과 업적을 10여분간
숙달된 조교처럼 설명을 잘도 하셨다.
그분은 논개 가이드를 하기위해 태어난 분이 아니가 싶을 정도로
간단 명료하였다. 논개 가이드님 감사합니다.
( 논개 사당 , 생가지 입구 )
내가 리바이벌 해서 주제넘게 다시 설명 해 본다면
<논개는> 성이 주씨인데 이름이 논개란다.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에서 태어났다.
생가는 다목적 저수지 건설로 수몰되어 이곳 새로 터 닦은
논개사당 한편에 이전하여 잘 복원하여 놓았다고 한다.
논개는 어린나이에 일찍 결혼하여, 즉 1593년(선조 26년) 남편 "최경희" 현감과
2차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였다,
그 전투에 패하여 남편이 죽자, 논개 자신은 목숨을 걸고 왜장을 죽이고자,
가짜 기생이 되어 왜놈 장수들의 "승전연"에 즉 진주 남강 의암 연회에 참석한다.
그기서 "왜장(모곡촌 육조)"을 절벽으로 유인하여
왜장을 안고 訓?牡?의암)에서 함께 뛰어내렸다.
그리하여, "순국한 겨레의 여인" 이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정초의 일요일 아침
아직 세배를 드리지 못한 친지와 이웃어른들
찾아뵙고 인사드리기에 안성맞춤
중전마마의 고와 보이지 않는 눈빛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
더하여 부수적인 미풍양속 행사
이런 저런 것 다 생각하면 하고싶은 일은 언제 할 수 있으리요..
나그네도 사람인 것을 왜 모르는가
오늘 나그네는 가면을 벗어 버리고
자신만을 위한 산행을 감히 결심했다.
주논개 사당을 지나서 무령고개 못미쳐서 산행버스는
눈길의 미끄러짐을 이기지 못하고 회원들을 하차하게 한다.
음력 정월 초닷새 아침 날씨는 포근할 것이다 라는
당초 일기예보와는 달리 차에서 내리니
아침날씨는 너무 카랑카랑하다.
3. 장수군의 장안산을 오르며
전라도에는 "무진장" 이란 말이 있다고 한다.
무주,진안,장수 이 세 고을을
일컬어 부르던 말에서 유래가 되었단다.
오지 중의 오지, 지독히도 산골에 파묻혀 있다고 해서
무진장 이란 말이 '지독하다'라는 의미를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독하게 오지라는 전라도의 무주, 진안, 장수군
그 중에서도 더더욱 오지였던 장수군.
장수군 내에서도 특히 오지중의 오지 장안산 골짜기
무령고개 아래서 눈 덮인 아스팔트 도로에서 산행은 시작된다.
이 고개를 양분하여 백운산과 장안산이 갈라진다고 한다
우리의 산행 예정코스 장수군 계남면( 장안리 ) ~ 무룡고개 ~
장안산정상 (상) 중 하봉 )~어치재~ 법연동~ 덕산리주차장
(총12킬로 5시간소요 예정) 로 예정되어 있었다.
( 팔각정에서 우연히 만난 노총각 그사람, 저위에 서있네요. 논공삼주타운 소장 )
나그네는 오늘따라 선두 그룹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도로에서 비탈길을 잠시 오르니 새로 지은 팔각정이 나타난다.
먼저간 일행이 스치고 지나가는 팔각정.
나그네는 일행의 뒤를 따르지 않고 그곳으로 올라갔다.
팔각정 전망대에 올라가니 먼저 한 회원이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다.
반가워서 둘은 인사를 나누고, 함께 산을 오르며 말동무가 되었다.
그는 마흔 두 살의 노총각 이란다.
누가 이 노총각, 총각 딱지 떼어 주실분 없습니까?.
차마 그 총각이 싫어 할까봐 차마 이름은 밝힐 수가 없구나.
그러나 단 근무처가 논공삼주 아파트란 것은 밝혀 둡니다요.
서로 이야기 가운데 알게된 또 다른 사실은
둘이 같은 대학의 동문이 되더군요.
혈연 학연 지연 때문에 대한민국이 발전이 안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대학 후배라서 금새 친해졌고 반가워서 올림말을 살짝 내렸습니다.
중턱쯤에서는 진주 어느 산악회 등반대장이라는 노신사와 말벗이 되었다.
산을 오르며 비상식량 건빵 몇 조각 그분에게 드리니
산에 대해 박식한 그분은 장안산 주위의 산세와 주변 산이름을
우리에게 한보따리 선물하였습니다.
산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는 나그네에게 아주 좋은 일이었지만
그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차곡 차곡 정리없이 담아서 미안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등산하며 메모지 하기란 그랬으니까요?
방위 감각도 없이 그냥 혼자 마음속 추측해서
이산 저산을 멋대로 이름지어 부를 때가 좋았다는 객기가지 부려보며
그 고마운 산행대장님 원망까지 떠올려 본다.
나그네 마음속 상상의 자유를 앗아가 버리는 일이로구나
그래도 올라가며 계속 본인의 산에 대한 설명은 이어진다.
이쪽은 장안산 정상, 길건너 저쪽은 백운산.
저기는 우리나라의 등줄기라 할 수 있는 백두대간
저기 산능선들이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다.
여기는 장수 저기는 함양땅 저쪽이 북쪽
그리고 저기 무룡고개에서 시작해서 호남정맥인지 동맥인지
내가 별로 들어보지 못한 용어도 들려준다.
저기 저쪽은 남덕유산,
남덕유산은 뒤쪽은 안보이지만 덕유산이 숨어있고,
저 멀리 구름에 가린 커다란 덩어리가 지리산
좌측이 지리산 무슨봉 우측이 천왕봉인가 천황봉.....
그리고 저기 저긴 전라도 팔공산
하며 선물을 주신다.
대장님 감사합니다 . 덕분에 귀동냥 많이 했습니다.
장안산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장안산은 다른산들 모습은 보기도 좋고 이름 있는 산들이 다 보이는데
진실로 그 자신 장안산은 자세히 올려다보아도 특별한 멋진 건 보이지 않았다
오직 오름길의 산죽 군락들이 눈덮인 등산로 양쪽에서 사열하며
우리 일행을 열중쉬엇 자세로 반긴다.
( 양쪽에서 열중쉬엇 자세로 도열한 산죽들의 근엄한 모습 )
( 군락을 이룬 산죽들과 뒤편 장안산 정상이 너무 조화롭게 어울어져 멋이있죠! )
12시 반경 장안산 정상에 오르니 눈에 덮여있다
꼭대기엔 헬기가 내려도 좋을 듯 넓게 자리를 마련해 두었고
다른 산악회에서 정상의 눈위에서 도시락을 펼치고 있었다.
정상에서 그 등산대장님과 작별을 고한다.
우리 청솔은 정상에서 민생고 해결을 할까 하다가
좀더 내려가서 좋은 장소를 물색하기로 하고 하산을 서두른다.
도시락 먹을 마땅한 장소가 없다.
우리는 45도 이상 경사진 산비탈에서 식사를 한다.
배는 고프고 좋은 장소는 빨리 나오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먹어야 산다.
먹기 위해 산다.
간혹 어떤이는 반대로 살기 위해 먹는다는 이도 있다.
그런 건 사유의 자유며, 자기 자신만이 하는 상상의 자유다.
( 장안산 정상에서 나그네도 한판 )
등산로에만 눈이 쌓여 있다.
등산로 이외엔 그다지 눈이 없다.
그런데 유독 등산객이 다니는 길에는 눈이 녹지 않았다.
녹지 않은 얼음 위에 살짝 녹은 눈과 진흙 덕분에
산을 내려가면서 오늘따라 엉덩방아를 자주 찧었다.
산능선 아래 양지 바른 곳에는 영양갱 녹은 것 같기도 하고
얼핏보면 팥죽같은 진흙이 녹아서 일행의 등산화를 적셨다.
하산길엔 아이젠을 채우지 않고 내려온다.
양기를 발에다 모으고 내려오다보니 중봉인지 하봉인지 어치재는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어느덧 우리 버스가 산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지점까지 단숨에 내려와 버렸다.
산 기슭에 아주 멋있게 단장한 묘가 몇기 있었다.
풍수지리 음양오행설은 모르지만 양지바른 그 산소는 명당이라고 결론짓고 싶었다
그 명당 산소 앞에서 우리 일행은 잘 자란 잔디를 양탄자 삼아 하늘을 본다.
모든 속세의 근심걱정은 "뚝"이다.
더 할 수 없이 파아란 정초 하늘을 산에서 보라.
그것도 폭신한 양탄자를 깔고 누워서 한번 보시라.
돌맹이 하나 주워서 던지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질 듯한 하늘
물감으로 그려도 얼룩지지 않게 똑같이 그렇게 그리기도 어려운 듯한 하늘색 !
무엇이 행복이리요.
나그네는 오늘도 산을 오르다.
지친몸을 폭신한 양탄자 같은 잔듸에 눕는다
누워서 하늘을 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살아 숨쉬고 있음이 너무 행복합니다.
장안산 산행을 마무리하고 덕산리 주차장에 당도하니
우리 양총무와 먼서 하산한 일행이 술과 어묵으로 반긴다.
주량이라야 고작 소주 반병인 나그네
소주 두어 잔에 따뜻한 국물
오늘도 기분은 "띵하오"라 말하고 싶다.
곡차도 한잔하였고 기분도 좋고, 후미 일행을 기다리는 시간
여유가 있었다.
덕산리 아래 폐교를 보러 나섰다.
그러나 산행지도에 나타나있던 덕산분교는 폐교된지도 오래란다,
물을 가둘 제방 용림제 제방건설이 한창이었는데 지금은
물에 잠길 지역안의 모든 것들이 철거되고 있다고한다.
호수에 잠길 수몰지역의 계곡과 폐교와 집들을 잠시 생각해본다.
4. 마무리 하면서
아직 고이지 않은 물속을 남겨두고 버스는 공사장 도로를 달려간다.
작은 산등성이에 근처에 수몰지구 집들이 새로 이주하여
최신식 멋쟁이 집으로 웃고있었다.
먼후일 이곳을 찿는 이들은
맑은 호수를 낀 주변경관에 모두 즐거워 하리라.
그러나 간혹 자꾸만 사라져가는 옛것에 대한 아쉬움 향수도
가슴 한켠에는 남아있으리라 생각한다.
전라도 땅 오지 장수군에 있는 장안산은 비록 현재 군립공원에 불과하지만
중국 長安처럼 보다 많은 관광객이 찿아 오도록
무진장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직 고이지 않은 댐이지만 머지않아 그 호수는
장안산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을 가슴에 가득 담고
오래도록 마르지 않는 맑은 청정 인심 세상에 전파되리라 믿어본다.
오늘도 나그네는
고이지 않는 샘에서 황토물을 퍼내며
흔들리는 버스에서 미풍양속을 즐긴다.
동가숙 서가식 하며 이리 저리 돌아다니던 옛시절의 나그네
참외골 똘뱅이 소장으로 탈바꿈 한지도 삼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어디론가 여행을 떠날 때면 추억에 사로잡혀
오바(over) 하는것은 아닌가 뒤 돌아본다.
감사합니다.
2005년 2월 14일
( 발렌타인 데이인지 국적없는 무슨날 ? )
참외골 똘뱅이 소장 이 승 형
첫댓글 선배님! 기행문을 읽고 있는데 제 어깨가 들썩입니다 . 아마 선배님의 청년 같은 혈기와 긴박한 글솜씨에 녹아듬이 아닐런지요. 선배님이 하시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 거침없이 하시니 선배님이야 말로 진정 자유인이십니다. 시원한 겨울산행 곳곳에 풍경과 철학을 받아안고 갑니다. 늘 푸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