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간 시인
망각에서 되살아난 백석의 詩香
생애 및 연보(1912.7.1~1996.7.7)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백석은 본명이 기행(夔行)이며 백석은 필명이다.
1918년 김소월을 배출한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 고보를 졸업한 후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도쿄의 아오야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귀국하여 1934년 조선일보에 입사 「여성」지의 편집을 맡은 이듬해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여 등단했다.
이어 그는 등단 1년 만에 왕성한 시작(詩作) 활동의 결과 첫 시집 「사슴」울 출간했으며 김기림 ․ 안석영 ․ 함대훈 등 11인의 발기인으로부터 문학적 천재성과 열정적 시 정신을 평가 받았다.
백석은 그해 조선일보에서 나와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여고에 재직하면서 수많은 시편들을 발표하면서 창작에 열중했으나 문학 활동을 하는데 교사직과 지방이 걸림돌이 되었는지 재직 2년 만에 다시 서울로 옮겨와 「여성」지의 편집에 잠시 관계하다가 1939년 만주로 건너가 6년여 동안 거주하면서 가난한 생계유지를 위해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말단세관업무, 소작인 생활 등 여러 차례 직장과 직업을 바꿔가며 이국에서의 고달픈 삶을 이겨나갔다.
그가 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 정주로 돌아오기까지 계속 만주에 머물러 있었는데 1940년 단 한번 짧은 귀국시기가 있었다. 이유는 그가 번역한 토마스 하디의 장편소설 「테스」의 마지막 교정을 위해서 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백석은 1935년 「정주성」을 시작으로 1947년 「적막강산」과 48년 「남신의주 박시 봉방」에 이르는 100편 남짓한 시를 발표한 이후 한국시단에서 자취를 감추는 비극을 맞고 말았다.
암흑기의 식민지 시대하에서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빼어난 모국어를 구사하며 홀로 고독한 시세계를 걸어야 했던 그의 견결한 시정신이 실로 반세기만에 재발굴되어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는 것은 문학사적으로나 개인사적으로 크나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시는 대체로 현실에 눈뜨지 못한 유년시절의 전통적 생활과 풍요롭고 화목하게 느껴졌던 기억들을 추억과 회상을 통해 자아상실의 회복을 동경한 시풍과 끝없는 유랑과 표류, 방황을 거치면서 터득한 식민지 치하의 피폐한 민중의 삶을 예리하게 표출하였으며 빼앗긴 조국과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공동체의 복원을 위해 다채로운 방언과 구수한 향토적 토속어를 구사하여 대단한 서정성과 친근감을 갖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다음은 백석이 발표한 시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을 연대 별로 감상평가해 보기로 한다.
1930년대
山턱 원두막은 뷔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조을은 문허진 城터 같다
반딧불이 난다 파란 魂들 같다
어데서 말있는 듯이 크다란 山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를 난다
헐리다 남은 城門이
한울빛 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定州城-
한때는 북방의 오랑캐를 지키며 영화와 위엄이 도사렸을 정주성이다. 그러나 지금은 폐허가 된 성의 자취뿐. 주위에는 잡초와 논밭들이 어둠 속에서 을씨년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초라한 원두막엔 아주까리 등불만 희미하다. 무너진 성터의 한낮은 잠자리의 놀이터다. 지난날 위세 당당했을 시절의 성문에는 위풍있는 장졸들이 드나들었을 것이지만 지금의 허물어진 성문 사이로는 늙은 청배장수나 드나들 뿐이다.
과거와 현재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인생의 무상함과 권력의 흥망성쇠까지 시사해 주는 작품으로 짧은 연마다 산촌의 정경과 시어들이 대단한 감칠맛을 더해주고 있다.
흙꽃나는 이른 봄의 무연한 벌을
輕便鐵道가 노새의 맘을 먹고 지나간다
멀리 바다가 뵈이는
假停車場도 없는 벌판에서
車는 머물고
젊은 새악시 둘이 나린다
-曠原-
협궤열차가 지나다니는 시골이지만 간이역도 없는 벽촌이다.
이런 소박한 시골 풍경을 구수한 흙냄새가 물씬 풍기도록 평안도 사투리를 섞어 그렸다. 마치 한 폭의 사실적 산촌 풍경화나 민속화를 감상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할 정도의 담백한 서정성이 돋보이는 시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10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여승-
식민지 시대 일제의 우리 민족에 대한 무차별 수탈정책은 가난을 가중시켜 마침내는 가족의 해체까지 이르게 했다.
이 비극적 여인도 온갖 역경을 이겨내려고 옥수수장사까지 하며 삶을 이어가려 했으나 평안도 깊은 산골 금광으로 돈벌러 간 남편은 1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그 사이 어린 딸도 죽고 말았으니......
하는 수 없이 여인이 택한 길은 입산하여 머리를 깎고 불자(佛者)가 되는 일. 삭발로 변해가는 여인의 긴 머리카락이 지난날 괴로운 삶을 말해 주듯 눈물방울처럼 발밑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는 여인의 심정을 독자들은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구마산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중간 생략---------------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 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여가며
녕 낮은집 담 낮은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사람을 생각한다
-통영-
화자는 아름다운 항구도시 통영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산기슭의 낡은 사당 앞 돌층계에
앉아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온갖 생각을 하고 있다.
뱃길을 따라 서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가기도 하고 풍성한 해산물이 건져 올려져 한껏 입맛을 돋구기도 하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바다로 뛰쳐나가고 싶은 정겨운 항구의 풍경들을 직접 바라보기도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평화스럽고 풍요로운 곳의 어느 한 집에는 반드시 화자가 애타게 기다리는 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북관(北關)에 앓어 누어서
어늬 아츰 의원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늬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드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띄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 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고향-
화자는 지금 그리운 고향과 가족을 떠나 정처없이 유랑하는 나그네 신세다. 이런 상황에서 병을 얻게 되어 의원을 만났는데 그 의원은 바로 고향분이며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하다.
관운장 같은 안정된 턱수염에 부처님같은 인자한 모습을 대하고 보니 불현듯 고향과 가족 생각이 끓어 오른다.
이를테면 필자는 이 시에서 화자의 향수나 망향을 통해 빼앗긴 조국에서 숨어 다니는 한 지사(志士)의 뜻도 담고 있다 하겠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고향, 보고싶어도 만나 볼 수 없는 가족들. 이는 광복과 해방의 날을 꿈꾸며 와신상담하는 깨어있는 한 민중의 염원이 깃들어 있기도 한 것이다.
1940년대
아득한 넷 날에 나는 떠났다
夫餘를 肅愼을 渤海를 女眞을 遼를 金을
興安眞 을 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던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는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는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dis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넷 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나의 胎盤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북방에서 <鄭玄雄에게>-
이 시는 필자의 자전적 고해성사를 토로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조국과 고향을 떠난 지난날이 어찌나 힘들고 괴로운지 백년 천년도 넘는 세월로 착각된다. 나름대로 꿈을 안고 고향(조국)을 떠날 때 사람들은 물론 산짐승과 물고기 초목들까지도 말렸건만 이들의 융숭한 송별연과 울부짖음을 뒤로한채 북방으로 떠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화자는 고향을 떠나올 때의 굳은 결심은 게으름과 안이한 나날로 뒤바뀌고 오히려 철면피가 되어 비굴하게 까지 전락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화자의 정신 타락이나 변질이 아니라 뜻을 이룰 수 없는 자탄의 절규가 내면에 숨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실향의 짧지 않은 세월을 화자는 또 아득한 옛날 백년 천년을 살아온 것으로 착각한다.
그런 시간들이 모두가 허송세월로 여겨져 화자는 다시 그리던 고향땅을 찾았으나 일가친척, 산천초목은 모두 변해버려 늙고 초라해진 화자의 심금을 비통속으로 몰아넣는다. 참으로 빼앗긴 조국 백성의 암담하고 피폐한 정황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오이밭에 벌배채 통이지는 때는
산에 오면 산소리
벌로 오면 벌소리
산에 오면
큰솔밭에 뻐꾸기 소리
잔솔밭에 덜거기 소리
벌로 오면
논두렁에 물닭의 소리
갈밭에 갈새 소리
산으로 오면 산이 들썩 산소리 속에 나홀로
벌로 오면 벌이 들썩 벌소리 속에 나홀로
定州東林 구십여리 긴긴 하로길에
산에 오면 산소리 벌에 오면 벌소리
적막강산에 나는 있노라
-적막강산-
90여리나 되는 먼 산길 들길을 하염없이 혼자 걷는 나그네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산에 다가가면 뻐꾸기나 꿩의 소리가 들려와 산은 산대로 들은 들대로 그 지니고 있는 바가 풍요롭고 평화스럽지만 정처 없는 나그네에게는 풍요속의 빈곤감이나 소요속의 고독감 같은 일종의 소외의식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경관들이 자신의 마음과 같은 황량한 적막감만을 느끼게 할 뿐이다.
1950년대
골 안에 이른 봄을 알린다 하지 말라
푸른 하늘에 비낀 실구름이여
눈녹이는 큰길가 버들강아지여
돌배나무 가지에 자지러진 양진이 소리여
골 안엔 이미 이른 봄이 들었더라
산기슭 부식토 끄는 곡괭이 날에
개울섶 참버들 찌는 낫자루에
양지쪽 밭에서 첫 운전하는 뜨락또르 소리에
골 안엔 그보다도 앞서 이른 봄이 들었더라
감자 정당 40톤, 아마 정당 3톤
관리위원회에 나붙은 생산계획 수’자우에
작물별 경지 분당 작업반장 회의의
밤새도록 밝은 전등 불’빛에
아, 그보다도 앞서 지난해 가을
알곡을 분배받던 기쁨속에, 감사속에
그 때 그 가슴 치밀던 중산의 결의 속에도
붉은 마음들 붉게 핀 이 골 안에선
이른 봄의 드는 때를 가르기 어려웁더라
이 골안 사람들의 그 붉은 마음들은
언제나 이른 봄의 결의로, 긴장으로 일터에 나서나니
(이른 봄 「1959.6 조선문학」)
이제부터 백석은 북한체제하에서 시를 쓰게 된다.
앞의 시편들 즉 남쪽이나 기타 지역에서 보여준 천부적 서정과 낭만 그리고 향토애 가득서린 토속어 대신 수치와 계량 그리고 기계적 기능적 삶의 표현이 엿보이고 있다.
이른 봄은 자연의 섭리에 의해 오는 것인데도 이를 부정하고 집단 노동과 그 생산성을 높여 사상적 정신 무장을 이루려는데 더 큰 목적이 있다. 당과 지도자에 충성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순수한 한 시인의 변질된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삼수 삼십 리, 혜산 칠십 리
신파 후창이 삼백 열 리
북두가 산머리에 내려 앉는곳
여기 행길가에 나앚은 공무려인숙
오고가던 길손들 날이 저물면
찾아들어 하루밤을 묵어가누나-
면양 칠백마리 큰 계획안고
군당을 찾아갔던 어느 협동조합 당위원장
근로자 학교의 조직과 지도를 맡아
평양 대학에서 온다는 한 대학생
마을마을의 수력 발전, 화력 발전
발전시설을 조사하는 군인민위원회 일’군
뷹은 편지 받들고 로동속으로 들어가려
신포땅 먼 림산사업소로 가는 작가 ․ ․ ․
제각기 찾아가는 곳 다르고
제각기 서두르는 일 다르나
그러나 그들이 이 집에 이른는 길
그 것은 오직 한 갈래’길- 사회주의 건설의 길
돈주아 고삭아 이끼 덕이 치고
통나무 굴뚝이 두아름이나 되는 이집아
사회주의 높은 봉우리 바라
급한 길 다우치다 길저문 사람들
하루밤 네 품에 쉬여 가나니
아직 채 덩실하니 짓지못한
산골 행길가의 조그마한 려인숙이라
네 스스로 너를 낮추 여기지 말라
참구름 노전 투박한 자리로나마
너 또한 사회주의 건설에 힘바치는 귀한것이니
(공무려인숙 「1959.6 조선문학」)
함경북도 깊은산골, 그 길가에 허술한 여인숙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여인숙은 당원이나 군인, 학생, 노동자, 작가...등 여행자라면 누구나 하루밤을 자야한다.
제각기 가는 길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지만 목적은 오직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것이다.
이렇듯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루밤 포근한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여인숙도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중요한 뒷받침이 되어준다고 의인화한 시다.
삼수갑산 높은 산을 내려
홍원 전진 동해바다에
명태를 푸러 갔다 온 처녀
한달 열흘 일을 잘해
민청상을 받고 온 처녀
삼수갑산에 돌아와 하는 말이-
《삼수갑산 내고향 같은 곳
어디를 가나 다시 없습네
홍원 전진 동태 생선 좋기는 해도
삼수갑산 갓나물만 난 못합네》
그런데 이처녀 아나 모르나
한달 열흘 고향을 난 동안에
조합에선 세톤짜리 화물 자동차도 받아
래일 모레 쌀과 생선 실러 가는 줄
래일 모레 이고장 갓나물 실어 보내는 줄
삼수갑산 심심산골에도
쌀이며 생선 왕왕 실어 보내는
크나큰 그 배려 모를 처녀 아니나
그래도 제고장 갓나물에서
더 좋은 것 없다는 처녀의 마음
삼수갑산 갓나물 같이 향기롭구나-
-갓나물 「1959.6 조선문학」-
삼수갑산 산골처녀가 동해바다 명태잡이 일에 뽑혀 40여일간 열심히 노력하여 큰상까지 받고 돌아와 동해바다 생선과 자기고장 갓나물과 비교하며 그래도 자기고장과 특산품 산나물이 제일이라는 자랑을 하고있다.
그리고 이런 전국의 농산물, 해산물, 임산물이 지도자의 배려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라며 그 은덕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각고장의 산물을 중앙에 실려보내는 마음이 즐겁고 자랑스럽다고 말하고 있다.
아이들 명절날처럼 좋아한다
뜨락이 들썩 술래잡기, 숨박꼭질
회우에 재깔대는 소리, 깨득거리는 소리
어른들 잔치날처럼 흥성거린다
정주문, 큰방문 연송여닫으며 들고나고
정주에, 큰방에 웃음이 터진다
먹고사는 시름없이 행복하며
그 마음들 이대도록 평안하구나
새로운 둥지의 사랑에 취하였으매
그 마음들 이대도록 즐거웁구나
아이들 바구니, 바구니 캐는 달래
다같이 한 부엌으로 들여오고
아낙네들 아끼여 것 헐은 김치
아쉬움 모르고 한식상에 올려 놓는다
왕가마들에 밥은 잦고 국은 끓어
하루일 끝난 사람들은 기다리는데
그 냄새 참으로 구수하고 은근하고 한없이 깊구나
성실한 근로의 자랑속에......
밭갈던 아바이, 감자심던 어버이
최뚝에 송아지와 놀던 어린것들
그리고 탁아소에서 돌아온 갓난것들도
둘레둘레 둘려놓인 공동 식탁우에
한없이 아름다운 공산주의의 노을이 비낀다
-공동식탁 「1959.6 조선문학」-
공산주의 사회의 절대 이념인 공동집단 생활제도를 잘드러내고 있다.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고 소유가 금지된 제도하에서 철저히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원칙만을 지켜야 할 뿐이다.
한마을 사람들이 저녁이 되면 집단 농장이나 탁아소, 공장이나 광산에서 돌아와 공동식당의 식탁에 둘러앉아 가족들끼리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갖는 식사시간이다. 그러나 백석도 이제는 지난날의 순수한 목가적 시인이 아니다.
많은 향수어린 독자들의 기억에 그의 질박하고 토속적인 서정성이 현저히 희석된 대신 작위적이고 사실적인 무의미한 언어들로 채워지고 있을 뿐이며 더욱이 북한체제를 찬양하고 마화시키는 도구로서의 역할로 변모해 버렸다.
이 먼 타관에 온 낯설은 손을
이른 새벽부터 집으로 청하는 이웃이 있도다
어린것의 첫 생일이니
어린 것 위해 축복 베풀려는 이웃이 있도다
이깔나무 대들보 굵기도 한 집엔
정주에, 큰방에, 아이 어른-이웃들이 그득히들 모였는데
주인은 감자국수 눌러, 토장국에 말고
콩나물 갓김치를 얹어 대접을 한다
내 들으니 이 집 주인은 고아로 자라난 사람
이 집 안주인 또한 고아로 자라난 사람
오직 당과 조국의 품안에서
당과 조국을 어버이로 하고 자라난 사람들
그들의 목숨도 사랑도 그리고 생활도
당과 조국에서 받은 것이어라
그리고 그들의 귀한 한점 혈육도
당과 조국에서 받은 것이어라
이 아침. 감자국수를 누르고, 콩나물 메워
이웃사람들을 대접하는 이집 주인들의 마음에
이 아침 콩나물을 놓은 감자국수를 마주하며
이 집 주인들의 대접을 받는 이웃 사람들의 마음에
가득히 차오르는 것은 어린아이에 대한 간절한 축복
그리고 당과 조국의 은혜에 대한 한량없는 감사
나도 이 아침 축복받는 어린 것을 바라보며
당과 조국의 은혜 속에 태어난 이 어린 생명이
당과 조국의 은혜 속에 길고 탈 없는
한평생을 누리기와
그 한생명이 당과 조국을 기쁘게 하는
한평생이 되기를 비노라
-축복「1959. 6. 조선문학」-
이 시에서 화자는 먼 곳에서 온 나그네다. 그런데도 아기의 첫 돌을 맞은 낯선 농가에서 축복의 초대를 받은 것이다. 집주인 부부는 고아로 자라난 가난한 농민이다. 이런 상황에서 금쪽같은 혈육을 얻었으니 마을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일 일이다.
음식은 비록 감자국수와 콩나물, 갓김치 같은 것이나 이 집사정이나 농촌의 현실 등을 비추어 볼 때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 축복들은 모두가 당과 조국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강조를 화자는 거듭하고 있는데 여기서 화자는 당연히 필자일 것이며 그렇다면 백석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진실과 문학성을 외면한 채 체제 속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미 돼지 뜰의 큰 구유들에
벼겨, 그리고 감자 막걸리
새끼 돼지들의 구유에
만문한 삼베 절음에, 껍질 벗긴 삶은 감자
그리고 보리 길금에 삭인 감자 감주
이 나라 돼지들 겨웁도록 복되구나
이 좋은 먹이들 구유에 가득히들 받아
하늘아래 첫 종축기지로 오니
내 마음 참으로 흐뭇도 하구나
눈’길이 모자라는, 아득히 넓은 사료전에
맥류며, 씰로스용 옥수수
드높은 사료 창고엔 룡마루를 치밀며
싸리’잎 봇나무’잎, 찔괭이’잎, 가죽나무’잎....
풀을 고기로의 당의 어진 뜻
온밭과 고’간과 사람들의 마음에 차고 넘쳐
하늘아래 첫 종축기지로 오니
내마음 참으로 미쁘기도 하구나
흐뭇하고 미쁜 마음 가슴에 설레인다
이 풀밭에 먹고 노는 큰돼지, 작은 돼지
백만이요 천만으로 개마고원에 살찔일 생각하매
당의 웅대하고 현명한 또하나 설계가
조국의 북쪽땅을 복지로 만드는일 생각하매
복수백산 찬바람이 내려치는 여기에
밤으로 낮으로 흐뭇하고 미쁜일 이루어가며
사람들 뜨거운 사랑으로 산다
돼지새끼하나 개에게 물렸다는 말에
지배인도 양돈공도 안타까이 서둔다
그리고 분만앞둔 돼지를 지켜
번식돈 관리공이 사흘밤을 곧장 새운다
이렇든 쓰다듬고 아끼며
당의 뜻 받들고 사는 사람들
하늘아래 첫 종축기지로 오니
마음 참으로 뜨거워 온다
내 그저 축복드린다
하늘아래 첫 종축기지의 주인들에게
기쁨에 찬, 한량없는 축복드린다.
-하늘아래 첫 종축기지에서「1959. 9 조선문학」-
깊고 깊은 산골 벽촌이려니와 해발도 높은 개마고원. 이곳에 대단위 돼지 종축장이 있다.
사람들도 먹기 어려운 감자, 옥수수, 보리 등이 이의 먹이감이 되고 있는가 하면 사료 창고에는 천장을 뚫고 하늘로 치솟아오를 듯 온갖 나뭇잎과 말린 풀잎들이 쌓여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뿌듯하게 한다.
더구나 새끼돼지나 씨돼지는 특별 관리인이 밤낮으로 관리하는 등 하찮은 동물이라도 정성껏 돌보는 자신들의 사회야말로 복지의 천국이며 축복의 땅이라는 것을 강변하고 있다.
깊은 산’골의 야영 돈사엔
밤이면 불을 켠다
한 5리 되염즉 기다란 돈사
그 두 난 끝 낮은 처마끝에 달아
유리를 대인 기다란 네모 나무 등에
가스불, 불을 켠다
자정도 지난 깊은 밤을
이 불 밑으로 번식돈 관리공이 오고간다.
2년 5산 많은 돼지를 받노라, 키우노라
항시 기쁨에 넘쳐 서두르는
뜨거운 정성이, 굳은 결의가 오고간다.
다산성 번식돈이 밤사이
그칠줄 모르는 숨’소리 사이로
1년 3산의 제2산 종부가 끝난 번식돈의
큰 기대 안겨주는 그 소중한, 고로운 숨’소리 사이로
또 시간 젖에 버릇 붙여놓은 새끼 돼지들의
어미의 젖꼭지를 찾아 덤비는 그 다급한 웨침소리 사이로
그러던 이 관리공의 발’길이 멎는다.
밤’중으로 아니면 날새자 분만할 돼지의
깃자리 보는 그 초조한 부스럭 소리 앞에
그 발’길이 기대에 찬 분만의 자리를 지켜 오래 머문다.
밀기울 누룩의 감자술 만들어 사료에 섞기도 하였다.
류화철 용액으로, 더운물로 몸뚱이를 씻어도 주었다.
그러나 한 번식돈 관리공의 성실한 마음 이것으로 다 못해
이제 이 깊은 밤으로 순산을 기다려 가슴 조이며
분만 앞둔 돼지의 그 높고 잦은 숨’소리에 귀기울여 서누나
밤이 더 깊어가면 골안에 안개는 돌아
돈사 네모등의 가스불’빛도 희미해진다.
그러나 돈사에는 이 불아닌 또하나 불이 있어
언제나 꺼질 줄도 희미해질 줄도 없이 밝은 불
이 불-한 해에 천마리 돼지를 한손으로 받아
사랑하는 나라에 바치려, 사랑하는 당의 바라심을 이루우려
온마음 기울여 일하는 한 젊은 관리공의
당앞에 드리는 맹세로 켜진, 그 붉은 충실한 마음의 불
-돈사의 불「1959. 9 조선문학」-
이 시는 앞의 작품과 동질성을 나타내고 있어 동일 상황을 다른 시각에서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돈사의 처마 끝에 매달린 가스등 불빛과 함께 밤새워 야영하면서 돼지들을 돌보는 젊은 관리사의 분주한 손길과 발길, 그리고 막중한 책임에 대한 사명과 성취감에 빠져 오히려 힘들고 괴로운 현실을 희망과 즐거움으로 승화시켜 당과 지도자에 대한 절대 복종과 충성의 의지가 담겨있다.
1960년대
초저녁 이 산’골에 눈이 내린다.
조용히 조용히 눈이 내린다.
갈매나무 골’배나무 엉클어진 숲사이
무리들이 주저앉은 오솔’길 우에
함박눈 눈이 내린다.
초저녁 호젓도 한 이 외딴 길을
마을의 녀인 하나 걸어간다.
모롱고지 하나 돌아 작업반장네 집
이 집에로 견결이 밤작업에 간다.
모범 농민, 군 대의원, 그리고 어엿한 당원
박순옥 아맹이의 우에 눈이 내린다.
지아비 원쑤를 치는 싸움에 바치고
여덟 자식 고이 길러내는 이 홀어미의 어깨에
늙은 시아비, 늙은 시어미 지성으로 섬기여
그 효성 눈물겨운 이 갸륵한 며느리의 잔등에
눈이 내린다. 함박눈이 내린다.
이 녀인의 마음에도 눈이 내린다.
잔잔하고 고로운 그 마음에
때로는 거센 물결’치는 그 마음에
슬프고 즐거운 지난날의 추억들 우에
타오르는 원쑤에의 증오 우에
또하루 당의 뜻대로 살은 떳떳한 마음 우에
눈이 내린다, 눈이 쌓인다.
다정한 이야기같이 살뜰한 쓰다듬같이
눈이 내린다.
위안같이, 동정같이, 고무같이
눈이 내린다.
이 호젓한 밤’길에 눈이 내린다.
녀인의 발’자국을 그리며 지우며
뜨거워 뜨거운 이 녀인의 가슴속
가지가지 생각의 자국을 그리며 지우며
푹푹 내리며 쌓인다. 그 어느 크나큰 은총도
홀어미를 불러 낮에도 즐겁게
홀어미를 불러 이밤도 즐겁게
더욱 큰 행복으로 가자고, 어서 가자고
뒤에서 밀고 앞에서 당기는 당의 은총이
밤길 우에
이 길을 걷는 한 녀인의 우에
눈이 내린다.
눈이 내려 쌓인다.
은총이 내린다.
은총이 내려 쌓인다.
-눈「1960. 3 조선문학」-
함박눈이 내리는 고요하고 평화스런 산촌의 밤이다.
우리네 환경 같으면 온가족이 오순도순 TV앞에 모여 저녁 식사를 하거나 아기자기한 대화를 나눌 시간이다.
그런데도 북한 산촌에 사는 이 여인은 하루종일 노동도 모자라 또 눈발을 헤치고 눈밭을 걸어 야간 작업장으로 간다.
열성 당원이며, 군 대의원에 모범 농민이기도 한 이 여인은 가정에서도 웃어른과 자식들을 지성으로 섬기는 효부 열녀인 것이다.
지칠 줄도 모르고, 고통 또한 모르는 이 여인은 북한 체제가 열망하는 A플러스 학점의 모범 주부인 것이다. 또한 이 주부 역시 길고 오랜 체제에 잘 길들여져 있어 모든 것이 행복으로만 느껴지고 당의 은총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렇듯 철저하게 대중화 집단 의식으로 무장된 북한 사회의 가정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를 독자들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는 남쪽 집 처자의 시집 가는 길
산우 아마밭 머리에 바래 보냈더니
오늘은 동쪽 집 처자의 시집 가는 길
산아래 감자밭둑에 바래 보내누나
해’볕 따사롭고 바람 고요로웁고
이 골짝 저 골짝 진달래 산살구꽃은 곱고
이 숲속 저 숲속 뻐꾸기 매’비둘기 새소리 구성지고
동쪽 집 처자는 높은 산을 몇이라도 넘어
먼먼 보천 땅으로 간다는데
보천 땅은 뒤’재우에서도 백두산이 보인다는 곳
사람들 동쪽 집 처자를 바래보낸다
먼 밭 가까운 밭에 옹기종기 일어서
호미들어 가래들어 그의 앞날을 축복한다.
말하자면 이 어린 처자는 그들의 전우
전우의 앞날이 빛나기를 빈다
하루에 감자밭 천평을 매제끼는 솜씨-
이 솜씨 칭찬하는 마음도 이 축복에 따르고
추운날 산우에 우등불 잘도 놓던 마음씨-
이 마음씨 감사하는 마음도 이 축복에 따르누나
동쪽 집 처자는 산’길을 굽이굽이
뒤를 돌아보며 돌아보며 발’길 무거이 간다
가지가지 산천의 정이 사람들의 사랑이
멀리의 쓴 눈물 삼키게 하매
그 작은 붉은 마음 바쳐 온 싸움의 터-
저 골짜기 발전소가, 이 비탈의 작잠장이
다하지 못한 충성을 붙들어 놓지 않으매
동쪽 집 처자는 고개를 넘어 사라진다
그러나 그 깔깔대는 웃음소리 허공에 들리누나
그러나 그 흘린 땀냄새 땅 우에 풍기누나
어제는 남쪽 집 처자를 산우에
오늘은 동쪽 집 처자를 산아래
말하자면 이 어린 전우들을 딴 진지로 보내는 것은
마음 얼마큼 서운한 일이나
그러나 얼마나 즐겁고 미쁜 일인가
그러나 얼마나 거룩하고 숭엄한 일인가!
-전별「1960. 3 조선문학」-
한 마을에서 두 처녀가 시집을 간다. 마을 사람들이 동구 밖 삼밭과 감자밭 머리까지 나와 애틋한 마중을 한다.
우리의 심정은 이 새색시들이 평화로운 가정을 꾸며 행복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무엇보다 단순한 노동력의 이동이나 마치 전장에 나서는 전사의 모습을 보는 듯한 마음과 바램으로 두 처녀를 떠나보내는 것이다.
어느 마을로 시집을 가든 자기네 마을에서 하루에 감자밭 천평을 거뜬히 매제끼던 솜씨를 그곳에서도 발휘해 줄 것을 기대하며 호미, 가래를 하늘높이 치켜들며 환호하고 있다.
특히 이 시에서 백두산이 바라다 보이는 보천 땅으로 시집가는 처녀를 부각시킨 것은 김일성 주석의 전적지로 이름난 곳이므로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혁명의 거리로
혁명의 노래가 흐른다.
혁명은 청춘,
청춘의 거리로
청춘의 대오가 흐른다.
흙 묻은 배낭에 담긴 충성이,
검붉은 얼굴에 빛나는 영예가,
높은 발구름에 울리는 투지가,
오색 기’발에 나붓기는 긍지가...
흐른다, 흐른다,
혁명의 거리로, 청춘의 거리로,
혁명의 거리로 흐르는 청춘들은
탑을 세우려 멀리서 왔구나,
혁명의 거리에 하늘 높이
탑 하나 장하게 세우려 왔구나.
이 높은 탑을 우러러
천만의 가슴 속마다 탑은 서리니
천만의 가슴 속에
천만의 탑을 세우려 왔구나, 청춘들이여.
진리의 승리를 믿어
조국 광복의 거룩한 길에서
때도 없이, 곳도 없이,
주저와 남김은 더욱 없이
바쳐질 대로 바쳐진 고귀한 사람들의
청춘이여, 사람이여, 꿈이여, 목숨이여,
이 탑 속에 살으리라,
만년 세월이 다 가도록
천만의 가슴 속 탑들에도 살으리라.
혁명의 거리에 솟는 탑이여,
이 탑을 불러 인민 영웅의 탑이란다,
조국 강산에 향기로운 이름 남기고
천만 겨레의 사랑 속에 영생하는
그 사람들의 이름으로 부르고 부를
인민 영웅의 탑이란다,
영웅들의 이름, 가슴에 그리며, 따르며,
그들 위해 높은 탑을 세우려 온 청춘들이여,
영웅들의 청춘에
그대들의 청춘은 잇닿았으니,
영웅들의 력사에
그대들의 력사는 잇닿았으니,
청춘의 대오여,
그대들 오늘 이 영웅들 따라
영웅들 부르던 노래 높이 부르며
영웅들의 발걸음에 발을 맞추며
나아가누나, 그들이 가던 길로,
그들이 목숨 바쳐 닦아 놓은 길로,
혁명의 거리로 흐르는 청춘들이여,
한 탑을 세워
천만의 탑을 세우려 온 청춘들이여!
-탑이 서는 거리「1961. 12 조선문학」-
자산 땅에 농사 짓는 아주머니시여
동해 어느 곳의 선장 아바이시여
먼 국경 거리의 판매원 동무시여,
나와 자리를 나란이 또 마주한 이들이시여,
우리 다 같이 손’벽을 칩시다
우리 소리 높이 손’벽을 칠 때가 또 왔으니,
우리 손’벽을 치는 것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기쁨이 솟구칠 때,
우리들의 영예가 못내 자랑스러울 때,
우리 손’벽을 치는 것은
우리들의 승리를 스스로 축하할 때
우리들의 마음 속에 타오르는 뜻이 있을 때
우리 손’벽을 칩시다
적으나 크나 우리 시방
또 하나 자랑스러운 영예 지니였으니,
또 하나 가슴에 넘치는 기쁨 얻었으니,
나와 자리를 나란이 또 마주한 이들이시여,
우리 같이 먼 길을 오는 기나긴 동안
우리 서로 다정하게 지나는 이 차 안에서
한때의 거처를 알뜰히 거두었으매,
길에 나서 가질 마을도, 지킬 범절도
하나같이 소홀히 하지 않았으매
어여쁜 렬차원-처녀 우리의 차’간에 승리의 기’발 걸어주고
엄격한 차장 동무 우리의 승리를 기뻐 축하하여
이제 우리들은 려행의 승리자로 되였사외다.
우리 이 승리를 위해 또 손’벽을 높이 칩시다.
우리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손’벽 쳐 왔습니까
그 많은 우리들의 기뿜과 승리가 있을 때마다,
그 많은 우리들의 영예와 결의가 있을 때마다,
우리들의 손’벽 소리에
우리의 찬란한 력사는 이루어지고,
우리들의 손’벽 소리에
우리의 혁명은 큰 걸음을 내짚습니다.
한 번도 헛되이 울린 적 없는 손’벽을
한 번도 소홀히 울린 적 없는 손’벽을
오늘은 이 차 안의 조그만 승리 위해
조그만 영예 위해 우리 높이 울립시다.
우리 자리를 나란이 또 마주한 이들이시여,
우리의 손’벽을 높이 칩시다.
우리들의 가슴 속 높은 고동을 따라.
-손’벽을 침은「1961. 12 조선문학」-
쉰 세 번째 배로 왔노라 하였다.
그대의 서투른 모국의 말,
그로 하여 더욱 따사롭게 그대를 껴안누나,
조국의 품이, 그대의 해쓱한 얼굴,
섬나라 풍토 사나왔음이리니
그로 하여 더욱 자애로 차 바라보누나,
조국의 눈이,
이제는 차창에 기대여 잠들었구나,
그 기억 속 설레여 잘 줄 모르던
출항의 동라 소리도, 동해의 푸른 물결도
조국 산천을 가리우던 눈’시울의 이슬도,
그러나 잠 못 들리라,
조국에 대한 사무치던 사모는,
심장에 끓어 넘치던 민족의 피는,
이 한 밤이 다 가도
천만 밤이 가고 또 가도,
아니, 잠 속에서도 사무치리라, 끓으리라
눈 감아, 이미 숨’소리 높은 사람아,
조국의 품은 구원이구나 자유구나,
행복이구나, 삶이구나,
이 품을 위해서는 좋으리라
열 동해를 모진 바람 속에 건너도.
돌아 온 사람아,
의탁하라 그대의 감격도 피곤도
새벽 가까운 시각에 수도 향해 달리는 렬차에.
그대의 하루 밤의 운명 앞에는
이제 곧 찬란한 새 날의 해돋이가 마주하리리.
돌아 온 젊은 사람아
의탁하라 그대의 운명을,
위대한 력사의 시각을 달리는
조국의 크나큰 운명의 렬차에.
이 차는 머지 않아 닿으리라,
금’빛 해’볕 철철 넘치는 속에
이 나라 온 겨레가
이 누리의 모든 친근한 사람들이
공산주의 승리에 환호 울리는 곳에.
게시는 하늘과 땅에 삶의 기쁨 넘치고
인생의 향기 거리와 마을에 가득히 풍기리니,
이 아침을 향하여 길 바쁜 조국이
그 품에 그대의 안식을 안아 기쁘리라.
-돌아 온 사람「1961. 12 조선문학」-
백석은 내용이 각각 다른 세 편의 시를 동시에 발표했다.
「탑이 서는 거리」는 북한 전 지역에서 평양으로 몰려 온 청년 학생들이「인민 영웅의 탑」이라 불리우는 건축물을 건립하는 과정을 그렸다. 혁명의 거리 평양 도심의 한 복판에 세워지는 거대한 탑은 그야말로 북한 사회의 자랑이며, 주체 사상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건설 현장에 참여하는 자체만으로도 일생 일대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청년 학생들의 의욕이야말로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친대도 어떤 후회나 여한이 없는 것이다. 마치 영웅의 탑을 건설하는 자신들도 영웅이 된 듯한 기분을 안고 있을 것이기에.
두 번째 시「손’벽을 침은」은 북한의 모든 농민, 노동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열차를 타고 멀리 일본 땅에서 만경봉호를 타고 영구 귀국하는 재일 조총련 동포들을 맞이하기 위해 청진으로 가는 환영 인파의 정경을 그리고 있다.
열차 안 사람들은 한결같이 먼 타국에서 오는 동포들에게 승리의 기쁨을 안겨 주려는 환영 일색으로 들떠있다.
이런 축제 분위기를 어찌 차장이나 여승무원도 공감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들은 많은 여행자들에게 꽃다발과 깃발을 목에 걸어 주며 함께 손뼉을 치고 즐거워하고 있다.
마지막 작품「돌아온 사람」은 쉰 세 번째로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땅을 밟는 재일 조총련 동포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수십년간 낯선 땅에서 고향을 그리며 눈물과 한숨, 고통의 나날을 지냈을 동포들이 이제 그리던 조국의 품에 안겼으니 앞으로는 조국을 믿고 청춘도 운명도 안심하고 맡기고 의지하라고 역설하고 있으며, 그러므로써 그들의 앞날은 크게 안식을 얻어 새로운 희망과 위대한 역사가 창조된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상으로 우리 시단과 독자들로부터 망각의 시인으로 자리매김되었던 백석의 시세계와 활동 상황을 남북한을 통해 조명해 보았다. 그러나 필자가 백석의 북한에서의 문학 활동을 조명하는 과정에서 그가 90년대 중반에 사망했는데도 그의 시 작품은 60년대 중반 이후에는 발견할 수 없어 큰 아쉬움과 함께 그의 사생활이 몹시 궁금해지기도 한다.
백석은 북한에서의 활동이 알려지지 않은 이전의 작품에서 이미 그의 문학성과 천재성이 입증되었지만 극히 제한적인 환경에서 양산된 시 작품들이 새롭게 소개되므로써 그에 대한 진가가 한층 평가되고 연구되기를 바란다.
특히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본고에 소개된 시 중 1950년대 이전의 시는 독자들이 흔히 접할 수 있는 작품이어서 전문, 또는 중간생략 등으로 소개했으나 1950년대 이후의 시는 모두 북한에서 발표된 것이기에 아직까지 독자들이 감상못한 작품이므로 장시의 경우라도 전문을 소개했다.
백석은 시작(詩作) 외에 아동 문학에도 매우 조예가 깊어 여러 편의 평론이 발표되었으며, 러시아 문학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많은 시와 소설을 번역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수필과 문학 평론 등 많은 문학 장르를 섭렵했는데 그의 시 이외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기회가 주어지면 따로 발표할 예정이다.
끝으로 백석이 북한 출신임에도 필자가 월북시인으로 상정한 것은 필자가 ‘북으로 간 시인, 박팔양․ 이용악․ 박세영․ 조벽암․ 조령출․ 안막․ 임화․ 오장환 등의 시리즈 시론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백석도 이 범주에 포함한 것이며 또한 그가 젊은 시절 많은 시작활동과 직장생활을 남쪽의 조선일보사와 「여성」잡지에서 했기 때문에 별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월북시인으로 지칭한 것에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