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융통성 없이 자신이 세운 일방적인 제도, 주의 , 방침에 다른 사람들을 어거지로 끼워 맞추려는 아집, 편견, 횡포등을 비유하는 관용구가 된다. |
우리나라의 금융은 1950년대의 개발금융시대(한국은행 설립, 증권거래소 개장)를 시작으로 경제개발 5개년정책수립등의 정책금융시대를 거처 금융자율화, 금융개방화시대를 거치고 2000년대 금융선진화시대 이후의 오늘을 맞이하고 있다.
필자의 어린시절 시장에 가면 은행직원들이 띠를 두르고 시장상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한푼이라도 더 많은 자금을 끌어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불과 20년전만 하더라도 자동차보험을 가입시키기 위해 보험설계사는 수기로 작성해야 하는 서류뭉치와 그 자리에서 직접 요율(자동차보험료를 결정하는 기준)을 계산기로 두드려가면서 고객들에게 돈을 받아오곤 했었다. 증권회사의 각 매장에는 당일 거래중인 상장사들의 현황판이 쉴새없이 깜박이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현황판 앞에 모여 그날 객장에 고수라도 나타나면 그사람의 한마디라도 듣기 위해 우르르 몰려들어 귀를 쫑긋 세우는 전경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주식을 매입하더라도 예전에 주던 유가증권은 이제 받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전산화가 되었고, 코드화되고 암호화 되어 있다.
(증권위에 붙여진 한 아이의 사진. 부모가 이 증권을 샀을때의 마음이 고스란히 보인다)
은행은 이제 내가 필요로 할때 ‘찾아가는 곳’이 되었고, 보험 역시 사인하라고 하는 빈칸에 이름과 서명을 여러군데 퍼즐맞추기 하다 보면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단 60년의 변화안에서, 금융은 <필요한 것>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바뀌었고, 금융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용할 수 없는 자격이 되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에 상당히 불편함을 초래하거나 아예 삶 자체의 영위가 불가능해 지는 경우에까지 이르렀다. 사람을 위해 존재했던 금융이 사람을 금융의 휘하에 넣어놓고 자신들의 잣대에 맞춰 순응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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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도 많이 바뀌었다.
옛날 저축을 하는 사람들의 제1의 선택요건은 소위 군청색 투피스를 말끔하게 입은 ‘은행아가씨’. 물론 그때도 은행의 문턱은 높았지만 그래도 은행과 거래하는 기분보다는 사람과 거래하는 기분이 더 들었던 시대였다.
지금 사람들은 은행거래를 할때 사람보다 ‘기계’와 대하는 것을 더 편해한다. 어디의 친절한 은행아가씨를 믿어 의심치 않던 것에서, 금융사이트를 통해 각 은행의 이자율를 비교해 어느곳이 0.1%라도 높은 이자를 주는 곳인가, 어떤 카드가 수수료가 제일 저렴한가가 곧 ‘좋은 은행’의 요건이 되었다.
‘바이(BUY) 코리아’, 지금하고 비교도 안될만큼 펀드열풍이 불었던 그 시절. 99년 당시 3개월만에 당시 돈으로 12조원을 모았고 이는 당시 시총의 5%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미래에셋이 펀드열풍으로 당시 현대증권의 2배에 달하는 28조 가량의 펀드를 모금했을때도 이는 시총의 2.76%에 불과한 금액이었으니 그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상상이 될것이다.
바이코리아가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객장으로 몰리게 한 이유는 광고의 힘이 컸다. 그들은 광고에 ‘항공모함’과 ‘태극기’를 과감히 실었다. 항공모함의 의미는 ‘자신들의 펀드는 항공모함, 다른 펀드는 조각배’라는 의미였고, 태극기는 말그대로 ‘대한민국을 사라’는 애국심을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이 두가지 전략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고 애국심에 고취된 수많은 사람들이 당시 닷컴등의 IT활황에 동반하여 펀드붐을 이끌어내었다.
지금 사람들은 장기투자, 가치투자라는 말에 중독이 되어있다. 그 이유는 ‘안전하기 때문’이란다. 장기로 투자하면 좋을것 같고, 자신이 투기자가 되어버린 듯한 멍에(?)도 뗄수 있고, 또 안전하기 때문에. 그러나 안전하기 때문에 투자(위험을 감수하여 이득을 취한다)한다는 말 자체가 얼마나 오류투성이의 말인가. 그러한 오류로 자신을 한껏 포장해두고선 정작 시도한 장기투자에서 지금과 같은 불안장세가 닥치면 얼마나 일희일비하고 있는가.
사람들 역시 이제 돈에 대해서만큼은 무서우리만치 냉정하며, 자기중심적이고, 투자라는 미명하에 다른이의 불행에 관심을 두지 않을만큼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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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기주의적 이율배반은 주변에 엄청나게 만연해 있다.
능력도 안되는데 빚을 내어가며 명품을 사야만 하는 여성에게 많은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할것이다. 하지만 여성에게 있어 외모를 포함한 시각적 요소가 주는 파급효과를 무시할수도 없다. 20대~60대에 이르는 모든 남성들이 여성의 외모를 제1의 호감도로 두면서도 그러한 투자(성형, 명품)에 대해선 사치라며 손가락질을 한다. 타인의 입장에선 그것이 사치일수도 있지만 정작 자신, 가족의 입장에선 완전히 다를 수도 있는 이야기들.
삼수를 하고 있던 학생이 이번 수능시험장에 3분을 늦는 바람에 결국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기사가 나왔지만, 그 기사에 글을 남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수나 했으면서도 부족했던 그의 준비성’을 나무랐다.
‘사랑과 전쟁’이라는 이혼을 주제로 한 에피소드를 다룬 TV프로그램에선 매회 전주의 에피소드를 주제로 ‘과연 이 둘은 결혼을 유지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 대한 설문을 진행한다. 주제가 어떤것이든 그안에 미처 담지 못한 둘만의 상황이 어떠하든 간에 거의 대부분의 시청자 의견은 [헤어지는 쪽이 좋다]로 판결이 난다.
아폴로도스신화집에 나오는 다마스테스라는 연쇄 살인자가 있는데 그의 별명은 프로크루스테스. ‘늘이는 자, 두드려서 펴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을 해치는 방식 때문에 붙여진 별명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다가 자신의 쇠침대에 눕힌 뒤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길면 톱으로 잘라버리고, 침대보다 작으면 망치로 때려 억지로 침대길이에 맞춰 늘려 죽였기 때문이었다. |
금융정체성을 가지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잘못된 자기 기준과 잣대로 상대를 평가하는 것.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놓이고 사정없이 톱질이나 망치질을 하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 확립이라 생각하는 건 엄청난 착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바로 당신의 가정, 당신의 내면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누군가에게 종신보험은 ‘보장성보험’이 될수도, ‘저축성보험’이 될수도, 상속과 증여의 수단이 될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주식은 투기의 대상이 되기도, 꿈을 싣는 나무가 되어주기도, 비즈니스의 일환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투자’를 목적으로 돈을 빌리지만 다른 누군가는 ‘살아남기 위해’돈을 빌려야 한다. 아이러니한건 전자건 후자건 제3자의 입장에선 다 손가락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자산의 60%를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는 이를 ‘굉장히 도전적인 사람’으로 평가할수도, 또는 ‘투기에 미쳐 너무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평가할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수도 없이 아내 몰래 주식투자를 하는 남편들을 보아왔다. 반대로 남편 몰래 챙겨둔 비자금으로 주식투자를 하는 아내도 숱하게 보아왔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투자를 하는 이유에 대해 그들은 한결같은 대답을 한다. ‘(상대가)나를 이해해 주지 못해서’.
보험을 벌써 5번째 갈아탄 A씨에게 물었다. “아니 대체 왜 이렇게?” A씨의 답변이 걸작이다. “바로 당신처럼 지금껏 내가 만난 5명의 설계사들이 물어봤기 때문에!!!” 하하하;;
일반인들이 주식투자를 통해 큰 실패를 하게 되는 대다수의, 정말로 대다수의 케이스.
<주변에서 (공신력있는 누군가가) 어떤 종목을 추천(경로는 아주 다양)해줬는데 믿고서 했다가 말아먹은 케이스. 선택의 결정을 남에게 미뤄버린 책임은 온데간데 없는 케이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부동산, 특히 수도권에 집중된 부동산 시장의 거품에 대한 우려가 많다. (이는 상위 1%의 부자들 역시 똑같이 느끼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 부동산 거품의 문제는 그간 부정부패한 정부, 기득권층에 있다고 한다. 정말로 그럴까? 피땀흘려 모은 내집의 가격이 내려가는걸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할 대인배가 정말로 그렇게 많을까? 아니 가격이 그렇게 내려가는 것이 맞다면 당신은 피땀흘려 모은 돈을 부동산에 투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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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제들의 논의는 실로 아무 가치도 없는 비판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들은 실제로 자신의 금융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전혀 불필요한 최악의 재료들이다.
논의거리조차도 안되는 한심한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문제 혹은 필자의 답변 어느쪽으로 자신의 생각이 기울었다고 한들 결국 또 다른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또 다른 다리를 늘려 죽이거나 다리를 잘라 죽일 뿐이다.
금융정체성은 ‘이것은 옳아, 저것은 옳지 않아’를 가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에게 필요해, 저것은 필요없어’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올바른 금융정체성은 ‘이것도 옳지만 저것도 옳을 수 있겠다.’, ‘이건 지금 나한테 꼭 필요한 투자이지만 저것도 언젠가는 필요해 질지 몰라’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생명보험은 사망보장(종신)이 강하고 손해보험은 의료비(실손)보장이 강하다. 그렇다면 모르고 종신보험을 가입한 사람은 잘못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앞으로 일어날 위험은 그 확률을 떠나 누구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ETF나 인덱스펀드가 그에 비해 수수료가 높은 액티브펀드에 비해 장기 투자하기 유리할까? 그렇지도 않다. 주식시장의 변동성은 그 평균을 수렴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 변동성에 사람의 생각이 개입된다면, 물론 그 평균마저 하회할지 모르지만 상회를 하더라도 더 크게 상회할수 있기 때문이다. 수수료를 가지고 ‘투자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오류를 범해선 안된다. 부자들이 더 큰 수수료를 물고서라도 랩어카운트에 일임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인플레이션 1000원의 가치변화. 상승률 5%를 기준으로 30년후에 천원의 가치는 겨우 215원에 불과하다. 그래서 연금등의 미래지향적 상품들은 투자가치가 없을거라고들 한다. 우리나라 금융의 역사는 고종 때 처음 세운 은행을 기점으로 따져봐도 백년이 겨우 넘는다. 흙으로 벽을 쌓고 짚으로 지붕을 올리던 시절에서 철근 콘크리트에 백층이 넘은 건물을 세우는 동안 지구 자체의 지각변동이 일어나 변화해온것이 고작 백년이라는 시간인데, 미래의 30년을 단순한 물가상승률로 계산한다는 것도 아이러니지만,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대비’를 투자가치라는 명목하에 결국 지금 아무것도 안하는 것에 대한 합리화를 한다는 것이 더 잘못된 계산 아닐까?
금융, 특히 금융상품에 대해 자신만의 침대의 크기를 재어 늘리거나 줄이게 되면 남는 것은 살이 썩고 피가 굳어 나는 악취뿐이다. 성공과 실패의 여부를 떠나 그렇게 오염된 살점과 악취는 침대 자체를 녹슬게 하고 언젠가 한쪽 귀퉁이를 무너뜨리게 될것이다. 그렇게 무너지기 시작한 침대는 자신의 발등을 찧고 그 상처로 살점과 악취들이 침입해 들어가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당신의 온몸을 썩히고 병들게 할 것이다.
보다 넓게 볼 혜안이 필요한 시기이다. 잘못된 금융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첫댓글 1000원이 30년후 215원이라, 좀 생각해 볼 문제이군요, 글 잘읽고 감니다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