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과 토담이 아름다운 남사예담촌은 고즈넉한 담장 너머로 한옥의 단아
함과 시골 사람들의 넉넉한 정이 넘쳐나는 700년역사의 전통마을이다. 구
불구불한 곡선이 아름다운 돌담길에 들어서면 마을 역사와 함께한 고목들
이 옛 정취를 더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남사마을의 돌담길은 약 3.2㎞로 골
목마다 저마다의 특징을 자랑한다. 남사마을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
을연합회’가 ‘아름다운 마을 1호’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 추석을 맞아 남사마을 골목길을 둘러보며 골목에서 포즈를 취한 두류봉.
▲ 남사마을 하씨고택 <매화집>에는 대문이 항상 열려있어 그냥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 남사마을 <매화집> 하씨고택의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마당의 매화가 먼저 눈에 띤다.
진양하씨(晉陽河氏)는 진주하씨(晉州河氏)라고도 하는데,《진양하씨대동
보(晉陽河氏大同譜)》를 보면 고려시대부터 성족(盛族)이었다. 그러나 입
증할 문헌(文獻)이 없다. 시조에 대해서도 분명한 기록이 없고, 다만 조선
문종(文宗)때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선생이 편찬한《신미보(辛未譜)》
서문에 따르면, 본향 진주(晉州)는 지리산(智異山)을 등지고, 남강(南江)이
흘러들어 신령한 기운이 배어들어 인재가 많이 태어난다. 삼한시대에는 소
국인 고순시국(古淳是國)이 있던 곳으로,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이었고, 신
라 문무왕 때에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렀으며, 신문왕이
청주(菁州)로 고쳤다가 경덕왕 16년(757년)에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
를 실시하면서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를 두었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재위 1009~1031)대에 은열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장군이 도적들의 난리
를 토벌하고 평정한 공로로 진주목(晉州牧)으로 승격 하여 그 이름이 오늘
에 이르며, 토성(土姓)으로 삼한시대부터 내려오는 씨족 넷이 있으니, 바로
하(河)、강(姜)、정(鄭)、소(蘇)이고, 나머지는 잡성(雜姓)과 서민들이다.
▲ 원정공(元正公)의 증손(曾孫)인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선생이 심은 나무
文孝公敬齋先生手植枾木
▲ 사양정사(泗陽精舍)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다
▲ 사양정사(泗陽精舍)를 정면 비스듬한 위치로 촬영 - 이 집 마당에도 나무가 심어져 있다.
▲ 정면에서 바로 바라보고 촬영한 사양정사(泗陽精舍)의 모습이다.
사양정사(泗陽精舍)는 한말의 유학자 계재(溪齋) 정제용(鄭濟鎔 :1865~1907)의
아들 정덕영(鄭德永: 1885~1956)과 장손 정종화(鄭鍾和)가 남사로 이전한 후 선
친을 추모하기 위하여 마련한 정사(精舍)로 1920년대에 지었다. 정제용(鄭濟鎔)
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선생의 후손으로 연일정씨(延日鄭氏)
이며, 한말의 유학자인 후산(后山) 허유(許愈)와 유림을 대표하여 파리장서(巴里
長書)를 작성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생이다.
▲ 사양정사(泗陽精舍)의 유명한 솟을대문 모습
▲ 泗陽精舍 현판은 근대명필 성당(惺堂)김돈희(金敦熙 : 1871∼1937)선생 글씨
사양정사(泗陽精舍)란 ‘泗水’남쪽의 학문을 연마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의 ‘사수(泗水)’는 공자(孔子)의 고향인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에 있는
강 이름인데, 공자를 흠모하는 뜻으로 남사마을 뒤에 있는 개울을 ‘사수(泗數)’
라 부르고, 정사가 개울의 남쪽에 있어 사양정사라 이름하였던 것이다. 건립이
후 주로 자손을 교육하고 문객을 맞아 교유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 사양정사(泗陽精舍)의 대청 정면 문위에 존도재(尊道斉)라는 당호가 있다
▲ 尊道란 尊德性而道問學 에서 첫 글자인 尊과 而 다음의 道 에서 따왔다
이 尊道란 말은 <中庸> 第27章 四句에 나오는 어휘로 아래와 같다.
故 君子 尊德性而道問學 (고 군자 존덕성이도문학)
그러므로 군자는 덕의 천성을 높여서 배움과 물음을 인도하게 할 것이다.
▲ 泗陽精舍의 난간다리가 닭발처럼 휘었다고 계자(鷄子)난간이라고 부른다
기둥에 따라 모두 8개의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그 중 2개만 해설을 붙이면
松林隙地築茅堂 - 송림극지축모당
水性山心轉渺茫 - 수성산심전묘망
솔숲 속 빈터에 초당을 짓고 나니
물 같은 본성, 산 같은 마음 점점 아득해 지네.
사양정사(泗陽精舍)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서 천장이 높고 부재
가 튼실하며 치목이 정교할 뿐 아니라 다락과 벽장 등 수납공간을 풍부하게 설치하
였으며, 또한 당시로서는 새로운 건축 재료인 유리를 사용하여 근대기 한옥의 변화
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4칸의 광을 넣어, 7칸의 장대한 규모로 구성한 대문채에
는 충절을 상징하는 홍살 넣은 솟을대문을 달아 사양정사의 품격과 풍부한 경제력
을 나타내었다.
▲ 진양하씨(晉陽河氏)의 고가(古家)의 앞마당과 뜰안의 모습을 한 컷으로
▲ 진양하씨(晉陽河氏)의 고가(古家)의 앞마당을 메인 포커스로 한 컷
▲ 진양하씨(晉陽河氏)의 고가(古家)의 본채를 메인 포커스로 한 컷
진주하씨(晉州河氏) 집안은 오랜 성씨 중의 하나로 선비집안이었으나, 세계
(世系)의 전해짐이 없고, 크게 3계파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고려 현종(顯宗)
때 좌사시랑(左司侍郞)을 역임하고 사후에 평장사(平章事)로 추증된 하공진
(河拱辰)을 시조로 하는 시랑공파(侍郞公波)、고려 정종(定宗)과 문종(文宗)
에 걸쳐 사직(司直)을 역임한 하진(河珍)을 시조로 하는 사직공파(司直公波)
와 고려조에서 주부(主簿)를 지낸 하성(河成)을 시조로 하는 단계공파(丹溪
公波)이다. 본관을 진양(晉陽)으로 하게된 것은 고려 충렬왕대(忠烈王代) 하
즙(河楫)이 누대로 선조들이 당시의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지역에 거
주하였다고 보고 그 지명을 딴 것에서 유래한다.
▲ 진양하씨(晉陽河氏)의 고가(古家)에 매화나무를 포커스로 하여 근접촬영
▲ 남사마을 예담촌에서 볼 수 있는 오래 된 매화나무가 꽃을 피운 모습
▲ 남사마을 예담촌에는 오래 된 매화나무에도 제철에는 활짝 꽃을 피운다.
사직공파(司直公派) 하진(河珍)의 후손은 2대 영상(永尙) → 3대 맹공(孟恭)
→ 4대 원경(元慶) → 5대 백부(白富) → 6대 의(義) → 7대 보(保) → 8대
직의(直漪) → 9대 즙(楫)으로 이어지는데, 9대 하즙(河楫)이후 명문세가(名
門勢家)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정공(元正公) 즙(楫)에 이어, 고헌공(苦軒
公) 윤원(允源), 봉산군(鳳山君) 유종(有宗), 목옹공(木翁公) 자종(自宗), 군사
공(郡事公) 계종(啓宗) 등이 출사하여 큰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다. 특히 자종
(自宗)의 아들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은 1430년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된
후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대사헌(大司憲) 우참찬(右參贊) 좌찬성(左讚
成) 등을 두루 역임하고,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을 거쳐서 세종 31년
(1449)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기 때문에 명문벌족(名門閥族)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 기상을 자랑하던 원정매(元正梅)가 시름시 름 앓다가 꽃이 피지 않았다
▲ 2009년을 마지막으로 원정매(元正梅)가 꽃을 피우지 않아 손자목을 접목하였다
▲ 손자목이 태어난지 몇년이 지나고 이제는 꽤 많은 꽃을 피우고 있다
하즙(河楫)의 아버지는 하직의(河直漪)이다.《고려열조등과록(高麗列朝登科
錄)》에 하직의(河直漪)는 하즙(河楫)의 부(父)이면서, 하윤원(河允源)의 조부
로 소개되어 있다. 휘(諱)는 직의(直漪), 시호는 정승공(政丞公)으로 시조 사직
공(司直公) 하진(河珍)의 8세손이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하보(河保)
의 자로 1129년(高麗 忠烈王庚寅) 중진사시(中進士試) 무과(武科)에 급제한후
1306년 조현대부사순위정용호군(朝顯大夫司巡衛情勇護軍)이 되었다. 자금어
대(紫金魚袋)를 하사받고 대광보국승록대부 문하부도첨의정승(門下部都僉議
政丞)이 증직되었다.
▲ 2014년에 새 가지가 자라나 꽃을 피운 모습이다
▲ 이렇게 자라다가 나중에 원정매의 본래 둥치만큼 커져 많은 꽃을 피우겠지
▲ 새로운 가지가 자라나 꽃을 피우는 모습이 해마다 다르다
하즙(河楫)은 자(字)가 득제(得濟) 또는 득삼(得渗)이고, 호(號)는 송헌(松軒),
시호(諡號)는 원정(元正)인데, 고려25대 충렬왕(忠烈王)때인 1303년 진주의
니구산(尼丘山)아래 여사촌(餘沙村)에서 사직공(司直公) 하진(河珍)의 9세손
으로 태어났다. 고려27대 충숙왕(忠肅王)때인 1321년에 판도좌랑(判圖佐郞)
이 되고 삼사(三司)의 판관(判官)을 역임하였으며. 1324년 21세에 진사(進士)
를 거쳐 문과의 갑과에 급제하였다. 1347년 원(元)나라 황제가 고려의 조정
에 정치관(整治官)을 두어 우리의 내정을 간섭할 때. 여기에 빌붙은 간신(奸
臣)과 더불어 나라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해치는 무리들을 조사하여 다스리도
록 하는 왕명이 있어 이때에 좌승지(左承旨) 김영돈(金永旽)과 계림군공(鷄林
郡公) 왕후(王煦) 등에게 여러 도의 안렴사(安廉使)를 겸하게 하여 토지의 수
탈과 기타 민원을 조사시켜 억울함을 면하게 할 때 하즙(河楫)은 사헌부(司憲
府) 대관(臺官)의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
▲ 새로운 가지가 자라나 제철에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이는 원정매(元正梅)
▲ 새로운 가지가 자라나 제철에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이는 원정매(元正梅)
▲ 새끼 손자 가지가 빨리 자라나 원목만큼 커야지 - 원정매(元正梅)
이때 기자오(奇子敖)의 딸이 원나라 순제(元順帝)의 제2왕비가 되어 왕자를
낳자, 고국의 기씨 일파가 안하무인의 권세를 누렸다. 기왕후의 사촌동생인
기삼만(奇三萬)이 행악(行惡)하고, 백성의 토지를 함부로 빼앗은 행패를 하
즙(河楫)이 밝혀내어 매질하고 감옥에 가두어 죽게 되자, 원제(元帝)가 대로
(大怒)하여 직성사인(直省舍人) 승가노(僧家奴)를 보내어 이때 심한 핍박을
받았다.
▲ 2016년 제철에는 새로 돋은 가지가 원목만큼 커졌다 - 원정매(元正梅)
▲ 올해는 원정매(元正梅)의 새로운 가지가 높이 자라 많은 꽃을 피웠다.
하즙(河楫)이 서해도(西海道) 안렴사(按廉使)로 있을 때 아들인 윤원(允源)도
교주도(交州道) 안렴사가 되었다. 벼슬이 경주부윤(慶州府尹)을 거쳐, 찬성사
(贊成事)에 이르러서 진천군(晋川君)으로 봉해졌고,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에 이르렀다. 원정(元正)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第30卷慶尙道晋州牧人物≫
▲ 봉오리가 아름다운 원정매(元正梅)의 새로운 가지에서 돋아난 꽃송이<1>
▲ 봉오리가 아름다운 원정매(元正梅)의 새로운 가지에서 돋아난 꽃송이<2>
▲ 봉오리가 아름다운 원정매(元正梅)의 새로운 가지에서 돋아난 꽃송이<3>
▲ 봉오리가 아름다운 원정매(元正梅)의 새로운 가지에서 돋아난 꽃송이<4>
하즙(河楫)은 고성이씨(固城李氏) 이우(李瑀)의 딸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
사이에 1남 2녀를 두어, 외아들 윤원(允源)이 있다. 장녀는 진주강씨 은열공
파 강수명(姜壽明)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진주강씨 박사공파 강시(姜蓍)에게
출가하였다. 강수명(姜壽明)은 조선 태종 때에 개성유수(開成留守)를 지냈는
데, 사헌부감찰을 지낸 원직(元直)과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한 원량(元
亮)의 두 아들을 두었다. 진주시 명석면 우수리 산162번지에 있는 강수명(姜
壽明)과 그의 부인이 묻힌 묘지는 조선왕조무덤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어 1977년12월28일 경남기념물 제43호 진양우수리방형고분군(晉陽雨水
里芳形古墳群)으로 지정되었다.
▲원정공 송헌 하선생 유적비(元正公 松軒 河先生 遺蹟碑)
▲ 조선태종(太宗)때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낸 강수명(姜壽明)과 부인의 묘소
둘째사위 진주강씨 박사공파 강시(姜蓍 :1339~1400)는 1357년 19살에
성균관시험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대관서승을 배수 받은 이후 진공좌
랑과 광흥창사를 거쳐, 안동대도호부사가 되었다가 진산군(晉山君)에 봉해
지고, 중대광으로 좌우위상호군으로 정승자리에 올라갔다. 시호는 공목공
(恭穆公)으로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내리 능촌(陵村)의 민통선 안
에 있다. 공목공(恭穆公) 강시(姜蓍)는 하즙(河楫)의 딸과 결혼하여 남사마을
맞은편 골짜기에 살았고, 회백(淮伯)、회중(淮仲)、회순(淮順)、회숙(淮淑)、
회계(淮季)의 다섯아들을 낳았는데, 5형제가 모두 명석하고 뛰어나 벼슬길에
나아가 그 이름을 높이 빛내게 되어, 그들이 태어난 골짜기를 “남사들 오룡골
(五龍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단성면 남사리 오룡골에는 진주강씨 박사공파의 봉양사(鳳陽祠)가 있다. 음 3월15일
파조 고려국자박사인 강계용(姜啓庸)이하 6세손 공목공 강시(姜蓍)와 배위진양하씨 및
여러 신위를 모시고 춘삼월 햇살 맑은 날 춘향제(春享祭)를 지낸다. 춘향제 참가헌관들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내리 능촌 민통선 안에 있는 공목공(恭穆公) 강시(姜蓍) 묘단
하즙(河楫)이 태어나서 자란 그의 집 고택앞뜰에는 그가 직접 심은 매화인 원
정매(元正梅)가 있다. 이 원정매 앞에는 원정공이 이 매화를 칭송하면서 지은
영매시(詠梅詩)가 각인된 조그만 비석이 놓여있다.
▲ 원정매(元正梅) 앞에 세워진 원정공(元正公) 하즙(河楫)선생의 영매시비(詠梅詩碑)
《元正公 詠梅詩》
舍北曾栽獨樹梅 사북증재독수매
臘天芳艶爲吾開 랍천방염위오개
明窓讀易焚香坐 명창독역분향좌
未有塵埃一點來 미유진애일점래
집 앞에 일찍 심은 한 그루 매화
섣달의 찬 겨울에도 아리따운 꽃망울 - 나를 위해 피었네!
밝은 창에 글 읽으며 향 피우고 앉았으니
한 점 티끌도 오는 것이 없더라.
▲「원정구려(元正旧廬)」라고 쓴 대원군의 친필편액이 걸려 있다
고택에는 ‘크고 양지바르게 지은 옛집’이란 뜻의 「분양고가(汾陽古家)」라는 편
액과 「원정구려(元正旧廬)」 라는 대원군의 친필편액이 남아있다. 집 남쪽 국도
건너 언덕자락에는 원정공(元正公) 하즙(河楫)선생을 기리는<원정공 송헌 하선생
유적비(元正公 松軒 河先生 遺蹟碑)>가 세워져 있다. 하즙(河楫)의 묘소는 진주시
상대동 산46번지에 있고, (配位) 고성이씨의 묘소는 진주시 명석면 외율리 밤
실에 있다.
▲「원정구려(元正旧廬)」라고 쓴 대원군의 친필편액이 걸려 있다
▲남사마을은 문중 성씨별로 집안의 조상을 내세우거나 칭송한 비석이 많다
▲남사마을은 거의 모든 가옥들이 나무로 둘러사여 있어 꽃이 아름답다
▲ 원정공(元正公)이「영매시(詠梅詩)」를 쓰고 노래하였듯이 고매(古梅)가 많다
▲ 원정공(元正公)이「영매시(詠梅詩)」를 쓰고 노래하였듯이 고매(古梅)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