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逆) 남파랑길(여섯 번째 - 2)
(고흥읍∼순천만, 2023년 8월 26일-27일)
瓦也 정유순
발포리에서 이동하여 발걸음이 멈춘 곳은 고흥군 봉래면 예내리 하반마을(외나로도)에 있는 나로우주(羅老宇宙)센터다. 일반적으로 우주센터는 로켓발사를 위해 넓은 안전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바닷가에 위치한다. 나로우주센터가 있는 고흥군 외나로도는 남쪽을 향해 로켓을 발사할 수 있는 남해안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북쪽은 러시아, 동쪽은 일본, 서쪽은 중국이 있어 남해안이 다른 국가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로켓을 발사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라고 한다.
<나로대교 앞 바다>
나로우주센터(Naro Space Center)는 러시아와의 기술협력으로 건설되었으며, 현대중공업이 인공위성 발사대 공사를 담당했다. 2003년 8월 8일에 나로우주센터 기공식이 있었고, 2007년 6월에 토목·건축공사가 완료되었으며, 2009년 6월에 나로우주센터가 준공됨으로써 우리나라는 세계 13번째 우주센터 보유국이 되었다. 총면적은 506만 5234㎡(160만 평)이며, 시설부지 36만 7342㎡(약 15.5만평)다. 우주체험관을 포함하여 총 3,314억 원이 투자되었다고 한다.
<나로우주센터 로켓 모형>
<나로우주센터 로켓 모형>
그밖에 나로우주센터 인근에 기상관측 데이터를 제공하는 기상관측소가 있고, 제주추적소는 이곳에서 발사한 발사체의 지속적인 추적과 정보수신을 담당하고 있다. 이 외에 로켓전시관, 인공위성전시관, 우주과학전시관, 야외전시장 등으로 이루어진 우주과학관이 있어 나로우주센터의 역할을 이해하고 우주과학에 대한 폭넓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장소로 역할을 한다. 우주과학관은 2011년 4월 4D 돔 영상관 개관과 함께 본격적으로 운영한다.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까지 둘러보고 나로1대교를 건너 나오면 고흥군 포두면 옥강리다. 고흥군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포두면(浦頭面)은 조선시대 흥양현에 속했으나 1895년 포두면으로 분리되었다. 12개 리, 46개 마을이 있다. 동쪽은 해창만(海倉灣)에 면하고, 서쪽은 고흥읍과 풍양면(豊陽面), 남쪽은 도화면(道化面), 북쪽은 점암면(占岩面)과 두원면(豆原面)에 접한다. 내초마을 앞산에서 오도(梧島)를 거쳐 점암면 금사리(錦蛇里)를 연결하는 길이 3,462m의 방조제가 1969년 6월 준공되어 1,560ha의 농경지가 조성되었다.
<옥강리 마을>
옥강리(玉腔里)는 비봉산 앞에 있는 마을로 해창만 입구에 해당된다. 자연마을로는 우산, 내초, 외초, 봉암, 정암이 있다. 우산마을은 옛날 마을 부근에 소를 기른 목장이 있었고 마을 앞이 바다라 하여 우목포(牛牧浦)라 불리던 것이, 1936년 일제강점기 때 마을을 한자화할 때 마을 뒷산이 와우형(臥牛形)이라 하여 우산(牛山)이란 지명으로 바뀌었다. 내초마을은 외초마을과 경계지역의 산모양이 새머리와 같다고 하여 새두라 하였다.
<우산(牛山)>
옛 지도에는 두 마을이 초양(草梁)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초양의 안쪽 마을이라는 뜻에서 안새두라고 불렀다. 후에 이것이 한자화 되어 내초(內草)란 지명이 생겼다. 외초(外草)마을은 반대로 초양(草梁)의 밖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봉암마을은 마을 뒷산 중턱에 벌바위가 있다고 하여 봉암(蜂岩)이라 부르게 되었고, 정암마을은 마을 뒤편에 바위가 많다는 뜻에서 생긴 지명이다.
<상오마을. 오취마을 이정표>
오취리(梧翠里)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마을이다. 옛날에 봉(鳳)이 좋아하는 오동나무가 많고 봉(鳳)이 살았다는 전설에 의하여 오도라고 불렸으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때 오취(梧翠)란 지명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곳에 딸린 섬은 지금도 오도로 부른다. 오도(梧島)는 1996년 해창만 간척공사가 완공되면서 육지와 연결되었고, 동쪽 취도와 다리로 연결된 후 행정구역명으로만 있을 뿐, 도서(島嶼) 관리 대상에서는 제외되었다.
<오취리 상오마을>
오취리는 자연마을로 상오, 신오, 오취, 달성이 있다. 신오마을은 원래는 상오마을에 속했으나, 본동과 떨어져 있는 관계로 행정 등에 불편함이 있다는 주민의 뜻에 따라 1995년12월 29일 분동되어 마을 명을 신오라 정하였다. 달성마을은 1925년에 형성된 마을로, 마을 형성 당시에는 넉섬 또는 달도라고 불리던 것이, ‘후에 뜻을 모아 성공할 마을’이라는 뜻의 달성(達城)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오취리 마을>
상오마을 남새밭 가장자리에는 아주까리가 바람에 산들거린다. 아주까리는 대극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로 피마자(蓖麻子)라고도 한다. 온대지방에서는 한해살이풀이지만 열대지방에서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옛 여인들이 집에서 화장을 할 때 머릿기름으로 동백기름과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아주까리기름은 옥소가(沃素價)가 82∼90 정도의 불건성유(不乾性油)에 속한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 아주까리의 약용 용도가 기록되어 있다.
<아주까리(피마자)>
상오마을에서 약 700m쯤 가면 별나로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체험과 휴양마을로 고흥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마을이다. 다도해를 감싸 안은 듯한 형태로 거북이 모양의 섬마을이다. 다랭이밭과 바다가 어우러진 수려한 경관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창만 간척지 조성으로 대규모 농지와 갯벌을 보유하고 있어 광활한 바다와 갯벌을 활용한 풍부한 체험거리를 만끽할 수 있다. 펜션숙박과 갯벌체험 패키지로 인기가 좋다고 한다.
<별나로 체험.휴양마을 펜션>
해창만 방조제 도로인 팔영로를 따라가면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가 나온다. 영남면(影南面)은 1966년 점암면 양사리(楊蛇里)에 양사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8 1986년 4월 산내면(山內面)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4월 이름이 영남면으로 변경되었다. 4개 리(里) 11개의 마을이 속해있으며 고흥군에서 가장 인구가 적다. 동·남·북쪽은 남해의 여자만(汝自灣)이 있고, 서쪽은 점암면(占岩面)이다. 북부에는 고흥반도 최고봉인 팔영산(八影山)이 있다.
<금사리 이름없는 솔섬>
금사리(金蛇里) 농촌지역이며, 자연마을로는 사도, 능정, 만호마을이 있다. 사도(蛇渡)는 이 지형이 ‘뱀이 마치 개구리를 잡기 위해 바다로 건너가는 형국’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앞바다에는 개구리를 닮은 와도(蛙島)라는 섬이 있다. 금사리에 주요 유적지로는 1491년(성종 22) 10월에 축성된 첨절제사진성(僉節制使鎭城)인 사도진성(蛇渡鎭城)이 있다.
<금사리 능정마을>
능정(陵亭)은 조선 초기 1486년(성종11) 사도진성이 설치될 때부터 사도첨사영에서 오리 쯤 떨어진 곳에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관원들이 왕래하면서 이 정자나무 아래서 쉬어 갔다 하여 오리정으로 불렸다가 임진왜란 후 지세가 능(陵)을 닮아 오리정을 개칭하여 능정(陵亭)이라 불렀다. 만호(萬戶)는 1960년 초에 마을을 지나가던 스님이 산세와 지세를 보고 앞으로 만호(萬戶)가 살 수 있는 큰 마을이 형성될 것이라고 예언하여 유래한 지명이다.
<금사리 능정마을>
사도진(蛇渡鎭)은 해창만(海倉灣) 어귀를 지키는 수군의 해안 방위기지로, 종3품 무관직인 첨절제사(僉節制使, 첨사)가 배치되었다. 조선전기에는 사도진에 수군진성을 축조하여 왜적을 방어하였다. 조선후기에 사도진은 섬에 정배된 유배(流配) 인을 감독하고, 선박 건조용 재목을 벌목하여 전라좌수영에 상납하는 일을 맡았으며, 전라도 흥양현 소속 내나로도와 외나로도의 송전(松田)을 관리하였다.
<사도마을>
사도진성은 둘레 1,440척(436m), 높이 15척(4.5m)의 규모로 완공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회령포·달량·마도·여도·녹도·발포·돌산포의 7개 만호성(萬戶城)을 거느리는 전라도 최대의 수영(水營)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도첨사 김완(金完)이 사도함대를 이끌고 사천·당포·한산도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며, <난중일기>에 충무공 이순신이 이곳에 들러 군기를 점검하고 장병을 독려한 기록이 있다. 1895년(고종 32)에 폐진 되었다.
<사도진성 안내도>
나로우주센터를 보고 돌아 나오면서 지금까지 내내 팔영산을 길잡이 삼아 걸어왔다. 팔영산(八影山)은 고흥군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중앙의 성주봉을 비롯해 유영봉·팔응봉·월출봉·천주봉 등 8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세가 험하고 기암괴석이 많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대마도까지 볼 수 있고, 눈앞에 펼쳐지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절경이 일품이다. 원래 팔전산(八顚山)이었는데, 중국 위왕(魏王)의 세숫물에 8개의 봉우리가 비쳐 그 산세를 중국에까지 떨쳤다는 전설이 전해지면서부터 팔영산이라 불렀다.
<오취리에서 본 팔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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