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책장에는 '무소유'를 설파하고 평생 실천하신 법정 스님의 글이 많다. 한 권 두 권 사 모으다 보니 어느새 책장에 가득하다. 나도 한때는 무소유에 대한 나름의 뜻을 품고 있었나 보다. 내 것보다 함께 나누고 배려하는 모습을 좇으려 노력했었다.
2. 얼마 전 서재 방이 복잡해서 정리를 했다. 책도 그렇거니와 서랍 깊은 곳에는 몇십 년도 더 된 옛날 잡동사니들이 군데군데 숨어있었다. 몇 년 만에 보는 것들이고 어떤 것들은 왜 여기 있는지 기억조차 없었다.
3. 법정은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라고 했다. 작은 물건 하나도 그 애착을 버리지 못하니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고, 지고 살아왔을까. 구석구석에 그 욕심이 켜켜이 들앉았다.
4. 아내와의 관계도 그중 하나다. 총각 때 안개 자욱한 지리산에서 다정하게 손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훗날 환갑이 되면 아내와 두 손 잡고 나도 여기에 오리라 다짐했다.
5. 아내와 모든 것을 함께 할 것을 꿈꾸었다. 하지만, 취미부터 삶의 방식까지 현실은 너무 달랐다. 다른 두 사람을 하나로 묶기 위해 같이 할 수 있는 온갖 취미를 공유하고 가르쳤지만 수 십 년이 지나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6. 환갑에 두 손 잡고 지리산 가는 꿈도 불가능해졌다. 결혼 전 꿈꾸었던 것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이 슬펐다. 좌절했다. 부부는 무엇이든 함께 해야 한다는 집착이 너무 컸던 탓이다. 평생 동안 나를 휘감고 내려놓지 못한 한 생각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던가.
7 해외 생활 수십 년 만에 고국으로 귀국한 친구가 있다. 나이 사십에 물 건너가서 삼십 년 넘게 터전을 일구었다. 얼마 전에야 전 재산을 털어 자신의 집을 짓게 된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일어 나이 더 들면 귀국할 계획이었는데 그전에 몇 년이라도 내 집에서 살아 보려고 했던 것이다.
9. 많은 시간을 들이고 돈이 생길 때마다 한 칸씩 집을 지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홈 스위트홈을 마음껏 누리게 되나 그것도 삼 개월의 짧은 기간으로 막을 내렸다.
10. 그 나라의 내전 상황이 최근 더 복잡해진 탓이었다. 살던 곳까지 전쟁의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고 스위트홈과 농장이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친구네의 생활 터전이 모두 망가졌다.
11. 집은 군데군데 총알 자국으로 곰보가 되었다. 재산 목록 1호인 발전기와 차는 군인들이 몰수해 갔다. 엔간한 살림살이들도 뒤이어 들이닥친 사람들이 모두 가져가 집안은 휑하게 비었다.
12. 살던 곳은 전쟁 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되게 되었고 다른 지방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고 그에 따라 거의 빈손으로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
13. 처음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내가 해줄 수 있는 위로도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위로를 받아야 할 친구가 너무 무덤덤한 것이 나를 더 놀라게 했다.
14. 거꾸로 물었다. 평생 동안 살아온 삶을 송두리째 잃었는데 슬프거나 괴롭거나 원망스러운 마음이 없는지. 어떻게 그렇게 담담할 수 있느냐고.
15. 친구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어차피 몇 년 후면 귀국하기로 하느님과 약속을 했는데 자신의 건강을 고려해서 힘이 더 부치기 전에 앞당겨서 고국 살이를 하는 게 낫겠다는 계시라고 말했다. 다리 힘 남아 있을 때 고국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맞겠다는 것이었다. 없어진 살림살이들도 누군가에게 요긴하게 쓰인다면 굳이 내가 아니드라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16.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도 사람인데 마음 한구석에는 원망의 감정이 조금은 남아있겠지. 그렇지만 말은 그렇게 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내 눈에는 남은 돈으로 마련한 작은 전셋집이 더없이 초라하고 막막해 보였다.
17. 친구 집 근처에 수국꽃이 좋은 데가 있다 해서 보러 갔다. 돌아와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에 정성이 가득했다. 국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쑥국이었다. 태어나서 쑥을 한 번도 캐어 보지 못했다는 친구 아내가 직접 캔 쑥으로 끓인 국이었다.
18. 귀국해서 그동안 해외에서 맛보지 못한 갖가지 우리의 음식 재료들로 한 가지 한 가지씩 만들어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자랑했다.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고국에서의 사소한 생활 하나하나에 행복을 느끼며 감사하고 있었다.
19. 마음을 다 내려놓으니 사는 게 이렇게 가볍고 여유로울 수가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둘 다 그러냐고 물으니 똑같은 대답이었다. 물질적인 것은 타의에 의해 버려진 상태지만 마음속에는 남아있는데 이것을 내려놓으니 이런 행복을 받는 모양이라고 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혼자 중얼거렸다.
20. "그래 맞다. 세상에는 안 좋기만 한 것은 없다지. 네가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면 결과적으로는 잘 된 건지도 모를 일이지." 평생의 삶과 맞바꾼 이 행복이 오래오래 가길 마음속으로 빌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