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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급 잠수함(정식 명칭 Type 629)은 소련에서 줄루급 잠수함의 후속으로 개발되었다.
매우 특이하게도 2,000톤급짜리에 불과한 체급인데 탄도미사일 발사용 디젤 잠수함(SSB)으로 개발되었다.
더불어 소련이 개발한 마지막 SSB이기도 하다.
잠수함 발사용 탄도 미사일(SLBM)인 R-11, 21을 3개의 수직발사관에 한발씩 탑재하는데,
체급에 걸맞지 않는 길고 굵은 탄도미사일용 수직발사관을 장비하기 위해 선체 중앙의 사령탑 공간 대부분을 희생하면서까지 탑재한
매우 독창적인 구조를 지녔다
1968년 2월 말 소련 태평양함대 제15잠수함전단 소속 골프2급 K-129 잠수함이
이른 아침 모항인 캄차카반도의 최남단 페트로파브로프스크(Petropavlovsk)를 빠져나갔다.
캄차카반도 아래쪽 태평양 공해상 정찰을 위해서였다.
이 잠수함은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SS-N-5-SERB)을 3발 실었고 최신 암호체계로 무장해 있었다.
표면상 모든 것이 순조로웠지만 약 1주일 뒤 K-129가 레이더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소련 태평양함대뿐 아니라 전군에 비상이 걸렸다.
이때만 해도 미국은 아무 것도 모르는 ‘감감무소식’ 상태.
그러던 중 태평양에 배치된 미 해군 수중음향감시부대(SOSUS)가 태평양 해저에서 대형 폭발이 2차례 발생했음을 탐지했다.
미군은 잠수함 내 폭발사고로 판단했다. 이때가 3월 8일, 폭발지점은 하와이 북서방 1560마일로 추정됐다.
미국 본토에 핵공격이 가능한 지점이었다.
미국은 시치미를 떼고 소리 소문 없이 움직였다.
모든 레이더기지와 감청 기지를 동원한 결과 폭발이 감지된 지 사흘 뒤인 3월 11일쯤 소련잠수함이 침몰했음을 알아냈다.
소련 태평양사령부 등이 사력을 다해 잠수함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음도 확인했다. 미국은 살금살금 뒤만 밟았다.
소련은 태평양 전역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그러나 약 2개월 뒤 소련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수색을 포기한 것이다.
미 해군은 샌드달러(Sand dollar)라는 작전에 돌입했다. 특수 해저수색장비를 갖춘 잠수함 해리버트를 동원했다.
해리버트는 태평양의 3100km² 넓이를 차근차근 수색했다. 5월 말 어느 날 해리버트가 K-129의 잔해를 찾아내고 수중카메라로 확인까지 마쳤다.
소련이 2개월간 이 잡듯이 뒤지고도 허탕을 쳤지만 해리버트는 3주 만에 해냈다.
북위 40도1분, 동경 179도9분, 태평양 해저 5km 지점이었다.
이 지점은 K-129의 작전 구역이 아니어서 아직도 그 원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 뒤 해리버트는 약 2개월간 해저 밑바닥에 무인조종 촬영장비를 내려보내 잠수함 잔해사진 2만2000장을 찍었다.
해리버트가 보내 온 사진은 반파되기는 했지만 잠수함의 중요 기능이 그대로 노출돼 있었던 것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입수해야 할 고급정보들이었다. 문제는 그 보물들이 바닷속 5000m에 가라앉아 있었고비록 반파됐어도 무게가 1700t, 길이는 40m라는 것이다. 당시 미국이 가장 깊은 바닷속에서 선박을 인양한 것은 245피트, 채 80m 깊이도 안 됐다.
이건 해저 5000m, 60배나 더 깊은 바닷속이었다. 까딱하다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눈앞의 보물을 놓칠 판이었다.
CIA는 무조건 인양하기로 했다. ‘정보가치만 있다면 아무리 크고, 아무리 무겁고, 아무리 깊은 곳에 있더라도 달랑 들어올리면 된다’는 식이었다.
1968년은 린든 존슨 대통령의 재임 마지막 해였다.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해가 바뀌어 1969년 1월 20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취임한 뒤 인양작업을 추진하게 된다. ‘정보가치만 있다면 달랑 들어올리겠다’는 그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1968년 말과 1969년 초 CIA와 국방부 관리들은 내부적으로만 인양 가능성을 논의했다.
그러다 1969년 4월 1일 국방부가 리처드 헬름스(Richard Helms) CIA 국장에게 인양 가능성 등을 검토해 달라는 공문을 보냄으로써 인양작전을 본격화한다.
이른바 ‘프로젝트 아조리안’을 본격 가동한 것이다.
1969년 7월 1일 존 팔랑고스키 CIA 부국장이 내부계획을 수립했고 7월 중순 CIA 내부승인을 받았다.
1969년 8월 8일 마침내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국방부차관, CIA 국장 등이 참여하는 고위위원회와 대통령 재가를 얻어 냈다.
잠수함인양작전기구는 회의를 거듭했고 마침내 인양방법을 3가지로 압축했다.
첫째는 짐승처럼 무지막지한 힘으로 무조건 끌어올리는 것,
둘째는 밸러스트를 이용하는 방법,
셋째는 특수가스등을 이용, 부력을 생성시켜 잠수함을 띄우는 것 등이었다.
어떤 방법을 채택했을까 상상해 보라. 첫 번째 방법이었다.
CIA 비밀문서에는 이 방법을 ‘Brute force’로 표현했다. 글자 그대로 짐승 같은 힘이다.
CIA는 1970년 9월 11일 국방부에 ‘무조건 달랑 들어올리기’에 대해 브리핑했고 10월 30일에는 고위위원회에 이 방법을 설명했다.
“길이 565피트, 폭 106피트의 배를 만들고 그 배 위에 해저 1만6500피트에서 1750t을 들어올릴 수 있는 장비를 장착하겠소”라는 것이
CIA 비밀문서가 전하는 당시 브리핑 내용이다.
그러나 국방부와 군부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반대이유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것이다.
마침내 1971년 8월 4일 프로젝트 아조리안이 생사 갈림길을 맞았다.
이날 국방부 차관은 위험이 증가되고 비용이 늘어나기 때문에 프로젝트 중단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1970년 계획했던 비용이 1년 만에 50%나 늘어났다는 것이다.
갑론을박 끝에 몇 달간 더 계속해 보기로 했고 10월 4일 고위위원회 승인을 얻어 기사회생하면서 11월 16일 인양선 건조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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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양선이 바로 Glomar Explorer 이다. Glomar Challenger와는 이름이 유사한데, 전혀 다른 선박이다.
1973년 9월에 진수하여 1974년 5월 완성된다.
닉슨 대통령은 1974년 6월 7일 인양작전 개시를 승인,
1974년 6월 27일부터 7월 3일까지 닉슨 대통령의 소련 방문 동안 닉슨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 돌아올 때까지 작전이 유보되었다가
닉슨 대통령이 돌아온 다음날, 독립기념일인 1974년 7월 4일에 인양작업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배를 건조할 때처럼 인양작업을 위해 출항할 때도 소련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해저광물 탐사로 목적을 위장했다.
따라서 실제 암호명 PROJECT AZORIAN이 아닌 광물탐사 당시 위장암호였던 PROJECT JENNIFER로 알려져있다.
인양작전이 시작되자 소련 선박이 바로 옆에서 밀착 감시했으며,
인양작업이 한창이던 1974년 7월 18일에는 소련 선박에서 이함한 헬기가 글로머 익스플로러호에 착륙을 시도해
CIA 요원들이 이를 막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를 겪었다.
8월 1일, 마침내 5천m 해저에서 잠수함을 수면으로 부상하는데 성공했고, 8일에 걸쳐 잠수함을 수면에서 배 위로 끌어올린다.
1974년 8월 8일, 휴즈 글로머 익스플로러호는 소련 잠수함 인양에 성공한다.
그렇지만 잠수함체의 2/3는 인양도중 유실되었고, 1/3만 인양되었지만
핵미사일 3기와 소련의 최신 암호체계인 암호발생기 2대등을 획득하는 등 성공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 작전이 비밀 작전이라고는 했지만, 스케일이 너무 큰 바람에 다 알려진터라 소련은 암호를 바꾸었다.
하지만 그 사이의 기간 동안 소련의 통신 보안에 큰 위협이 되었다.
이 외에도 각종 스펙 조사등 미 해군이 소련 해군에 대항할 전술을 짜는 데에도 큰 공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