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한달걷기 5일차 10코스
화순 금모래 해수욕장에서 하모해안까지 새로운 길동무 쌤 두 분과 함께 출발.
어제 저녁에 발 볼 넓은 트레킹화를 새로 샀어요. 원래 트레킹화는 한 칫수 크게 신으라 하여 235를 신었었지요. 그동안 하루종일 걸을 일이 없었어서 235사이즈의 트레킹화도 충분히 신을 만 했는데, 아무래도 발이 자꾸 부어서 꽉 끼는지라 결국 새로 사기로 했습니다. 덕분에 오늘은 새 신을 신고 뛰어 볼까 폴짝~
벌써 꽃 양귀비가 피었어요
뒤돌아본 금모래 해변
길을 재촉해 봅니다. 갈 길이 멀어요. 15킬로를 걸어야 하니.
황우치 해변 도착. 오늘은 바람이 장난 아닙니다. 바다도 거칠고 그 바람에 모래가 날려 얼굴을 때립니다. 그 작은 모래알이 볼을 때리는데, 콕콕 박히는 듯 하여 제법 아픕니다. 오늘 10코스는 제주의 역사를 만나는 길이라 했는데, 그 역사가 순탄치 않아 그런가 보다고 혼자 생각합니다
10년 전 처음 제주올레와 연을 맺고 전국의 걷는 길 관련 사람들이 서명숙 이사장님 뒤를 따라 이 길을 걸었습니다. 그 때 앞서 가신 발자국 뒤로 제 발자국을 새기며 저도 이 길을 따라가겠노라 꿈을 꾼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 한달걷기 식구들과 그 길에 또 발자국을 남깁니다. 우리 발자국을 따라 또 다른 사람들이 제주올레 완주의 꿈을 품을까요?
화산암 지대를 지나면 또 해변이 펼쳐집니다
산방산에 올라 우리가 지나 온 길을 되짚어 봅니다. 박수기정 월라봉 화순항 황우치 해변 그리고 바람과 발자국
같이 걷던 최 쌤이 산방산을 바라보며 어린왕자에 나오는 '코끼리 삼킨 보아뱀' 모양이라 하네요. 감수성 만렙입니다. 저는 웅장하다고만 생각했지 한 번도 그런 생각 못해 봤어요.
사계 바닷가가 격하게 반깁니다. 여긴 바람이 더 거셉니다.
모래가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고 걸음도 휘청휘청. 그만큼 바람이 세차게 붑니다.
바닷가 바위 색이 다른 것과 다릅니다. 이게 바위가 아니고 모래와 자갈이 섞여 굳은 거라 합니다
올레 리본이 바람을 제대로 맞았네요. 멀리 송악산이 보입니다 여기부터 마음이 자꾸 먹먹해지기 시작했어요.
길가 울타리에 노란 리본을 묶어 두었는데, 제주로 오다가 사고를 만난 아이들을 기리는 거였지요. '노란 기억길' 깃발이 거센 바람에 올이 다 풀리고 이리저리 휘둘립니다. 그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옵니다. 제 둘째가 그 또래였거든요. 그 아이들 부모님 속이 저리 해지고 뒤집혀 사는 게 사는 게 아닐텐데 싶었거든요
그 길 끝에 송악산이 있습니다.
송악산엔 일제강점기 때 진지로 사용했던 동굴이 많답니다. 어제 월라봉도 그랬는데. 송악산 옆 셋알 오름엔 미로 형태의 동굴이 있다고 합니다. 이따 가게 될 알뜨르 비행장과 연계한 진지라서 엄청 크고 깊고 넓은 동굴. 안타깝게 문이 굳게 잠겨 들어 가 보진 못했습니다. 다시 송악산으로
송악산 둘레를 한 바퀴 돌아 나옵니다. 도는 내내 거센 바람 소리가 역사의 슬픈 곡소리로 들리는 듯
멀리 가파도와 그 뒤 마라도가 보입니다. 5월 1일 한달걷기 중간 쉬는 날 장 쌤과 가볼까 합니다
송악산을 빠져나와 건너편 셋알 오름으로 오릅니다. 알 모양의 오름 세 개가 붙어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게 동알 서쪽에 있는 게 섯알, 가운데가 셋알 오름이랍니다. 제주에서는 둘째를 '셋'이라 하는데 가운데 있는 게 두번째 오름이라 셋알 오름.
그 길에 선 사람들
거기 서면 저 멀리 한라산 박수기정 월라봉 산방산, 형제바위까지 우리가 걸어 온 길이 있습니다. 과거를 지나 현재진행형인 우리 인생처럼
셋알 오름의 고사포 진지. 가운데 포를 두고 포탄 넣어두던 구멍이 8개, 거제 지심도에서 보던 걸 제주에서도 보네요. 전쟁 막바지 최후의 보루였을 한반도 남쪽의 상황은, 미군의 원자폭탄으로 종전이 조금만 늦었어도 제주 영토와 민족이 초토화 되었을 거라 하십니다.
고려나 조선시대도 그리 순탄치 않았을 제주 사람들의 삶은 일제강점기에 고된 수난을 겪고 연이어 4·3사건과 전쟁을 앞두고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참혹해집니다
육지에서 보도연맹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갈 때 제주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몰살을 당했답니다. 보도연맹으로 죽은 사람들은 아직 그 자리를 기리지 못하고, 유해도 수습을 못하고 있습니다.
작년이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통영은 해병대가 통영상륙작전을 펼치면서 북한군의 거제를 통한 부산침투를 저지한 곳입니다. 2019년에 상륙작전 관련 채록을 했었는데, 그 때 보도연맹에 관한 채록도 일부 나왔습니다. 줄줄이 엮어 배에 태워 바다로 나가 발로 밀어 수장시킨 곳과 산에 끌고 가 총살한 정확한 위치까지 기억하시는 분이 계셨으나, 그에 대한 어떤 사후조치는 아직 못하는 실정입니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두고두고 사람들 가슴에 한이 됩니다.
추모비가 있네요. 잠시 애도의 인사를 드립니다.
조금 걸어나오면 알뜨르 비행장입니다. 일본 전투기 격납고가 아직 그대로 있고 활주로였던 곳은 너른 벌판으로 그냥 바람 한가운데 있습니다. 관제탑과 지하벙커 등의 유적이 그대로 있는 역사의 현장을 지납니다. 오늘 길이 어제 만큼 신나지 않은 이유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아리랑 만큼이나 구슬픕니다.
활주로 옆에 있는 밭 가득 노란 꽃이 피었습니다. 유채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아래 양배추가 있습니다. 제 때 수확하지 않아 꽃대가 올라오고 저리 꽃을 피웠습니다. 주인이 찾지않는 밭도 슬픕니다. 무슨 사연일까요?
걷다보니 어느새 하모해변입니다. 하멜이 표류해 온 곳이라네요.
오늘도 잘 걸었습니다
오늘 처음 신은 새 신발이 흙 모래 바람에 더 이상 새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제 발에 익어가는 중입니다. 우리가 지나온 길도 또 앞으로 지나가게 될 길도 익어가겠죠?
10년 전 처음 꿈꿨던 제주올레를 지금 걸어내고 있는 것처럼.
오늘 제주올레는 들떴던 어제까지와는 또 다른 의미로 제게 다가옵니다.
오늘 아침은 달걀후라이를 곁들여 먹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변화발전하는 조식ㅋ
점심은 야들야들 돔베고기와 고소한 자리돔 새끼 튀김. 작아서 먹기 미안했으나 이미 식탁에 올랐으니 뼈째 우적우적 씹어 먹으며 칼슘 보충
올레셰프의 오늘 저녁 특식은 돼지불고기와 황태뭇국. 피로가 싹 풀리는 정성 가득한 집밥. 늘 고맙습니다.
5일을 걸었습니다. 5일 근무하면 토·일은 쉬는데 우리는 쉼 없이 또 걸어야 하니, 내일부터는 마음의 끈을 좀 더 조여 매 보렵니다. 올레에 적응해 가는 괜찮음과 괜찮지 않음의 경계에서 괜찮은 쪽으로 한 발이라도 더 가 있을 겁니다. 끝나는 그 날까지 그래 보렵니다.
한달걷기 식구들 모두 응원합니다.
*오늘 저녁에도 완주의 벽에 서신 분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