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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소리>에서는 제종철추모사업회와 공동으로 제종철 평전 연재를 시작합니다. 평전 연재는 매주 월,수,금 3회 연재될 예정입니다. 연재할 내용은 평전 전 부분이 아니라 주요 대목을 발췌해서 실을 예정입니다. 제종철 평전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db.voiceofpeople.org%2Fnews%2Fupload%2F15086jejong3.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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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벗 고 제종철 동지 ⓒ 서양화가 김성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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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만장한 시대의 격동에 정면으로 맞섰다가 불꽃같이 산화해간 한 젊은이의 순결하고 치열한 생애를 상투적인 어떤 말로 담아낼 수 있을까? 강물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시류에 안주하지 않고 참된 운명을 개척해온 한 인간의 강인한 삶의 궤적을 일상의 어떤 필설로 전할 수 있을까? 제종철은 혁명가였다. 밤하늘의 불꽃처럼 찬란하게 어두운 시대를 밝히며 한 순간 타오르다 사라져간 그의 한생을 달리 표현할 말을 우리는 찾지 못했다. 그의 삶은 철두철미 혁명가로서 자신을 키우고 단련하고 완성해간 삶이었다. 35년의 짧은 생을 그는 자신 위해 살지 않았고, 한 순간도 자기 잇속과 안락을 추구하지 않았고, 자기 식솔을 챙기지도 않았다.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이던 1980년대 학창시절부터 21세기로 접어든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꽃이라 할 청년의 시기를 그는 오로지 조국과 민중을 위한 한 길에 모두 쏟아 붓고 자신의 평소 지론대로 ‘짧고 굵게’ 생을 마감했다. 살아가는 동안 그는 누구에게도 해를 미치거나 나쁜 기억을 남긴 적 없는 드문 인간 유형에 속한다. 같은 운동권이건 아니건, 나이가 많건 적건 관계없이 그를 만난 적이 있고 기억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를 칭찬하기에 바쁘다. 살면서 그 누구와 다투거나 부딪치는 일이 없었을 리가 없다. 원칙과 도리에 벗어나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증오하고 치열하게 비판했던 사람이 그였다. 그러나 사람관계에서 빚어지는 그 모든 불화와 대립갈등을 너그럽고 뒤끝 없는 타고난 호걸풍과 독특한 인간적인 매력으로 녹여내는 재주가 그에게는 있었던 것같다. 그래서 제종철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그의 이력에는 남다를 것이 없었다. 1969년 경남 진주 출생, 진주 중.고등학교 졸업. 1987년 한국외국어대학교 폴란드어과 입학,총학생회 기획부장, 한총련 연사위원장. 경원대 대학원 수학. 군 복무 대신으로 4년 간 병역특례병 근무. 의정부에서 청년회, 노동조합, 진보정당 활동. 여중생 경기북부대책위원회 사무처장. 여중생 범국민대책위원회 상황실 부실장. 2003년 11월 의정부역 철로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기까지 그가 살아온 표면상의 경력은 운동권 내에서 지극히 평범한 축에 속한다. 그 흔한 회장 자리, 대표 자리 하나 제대로 맡아본 적이 없는 이른바 조연급 인물에 불과해 보였다. 겉 보기에 늘상 동네 아저씨같이 수더분하고 범상하던 그 모습 속에 범상치 않은 무엇이 숨어 있었던가? 그의 진면목이 세상 사람들에게 최초로 알려진 것은 묘하게도 그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삶이 끝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삶의 새로운 면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종철의 장례식은 평범한 인물의 장례식이라고는 보기 어렵게 구름같이 모여든 수많은 각계각층 명망인사들의 애도와 눈물 속에 장중하고 격조 높게 진행되었다. 동지들이 손수 만든 꽃상여가 그의 투쟁하는 삶의 현장이었던 의정부 미군기지 앞과 의정부 역전을 거쳐 그의 시신을 운구했고, 상여소리와 형형색색의 만장들, 수십명의 풍물대, 500명 넘는 추모객들의 행렬이 장례대열을 이루어 의정부 시가를 행진했다. 거기에는 만약의 사태를 우려한 적지 않은 기동경찰대의 동행과 과잉보호(?)가 따라붙어 한때 장례대열과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민중의 벗 고 제종철 동지 여중생범대위장’ 그것이 그의 장례식의 명칭이었다. 장례의 절차와 격식과 내용은 그의 가족들을 비롯, 평소에 그와 같이 했던 동지들과 친지들로 구성된 장례위원회에서 마련했다. 장례의 규모만큼 장례비용도 적지 않았지만, 그것도 같은 방식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누워 있는 마석 모란공원에 그를 묻을 때 가족 대표로 나선 그의 형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네가 그저 사회에 자그마한 좋은 일이나 하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까 네가 참으로 큰일을 했던 사람이었구나...우리는 미처 몰랐구나...미안하다, 종철아.” 장례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심장에 남는 사람’이라고 했다. 세상에 아쉽고 애통하지 않은 죽음이 있겠는가마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상실의 아픔으로 그를 떠나보냈다. 미2사단 사령부가 있는 캠프 레드클라우드 정문 앞에서 노제를 치를 때 그와 함께 도지사선거와 우리땅 미군기지 되찾기 운동을 같이 했던 김준기 선생은 이렇게 그를 추도하며 애통한 눈물을 흘렸다. “살인미군 무죄재판에 항의해서 철야농성을 하며 동두천 미군부대 정문 앞에서 싸우다 전경들 방패에 내 머리가 찢겨졌을 때, 내가 잠시 당황해서 주저앉아 있을 때, 나한테 와서 보살펴주던 네가, 내 손을 붙잡고, 교수님 힘내십시오, 우리 이 싸움을 꼭 이겨야 합니다 하고 나를 격려하며 끝까지 싸우자던 네가, 어떻게 나를 두고 이렇게 먼저 간단 말이냐. 종철아, 이 놈아...” 동두천에서 그와 함께 대통령선거운동과 여중생대책위 활동을 했던 한 지역선배는 그를 이렇게 추모했다. "작년 캠프 케이시 앞에서 미군의 엉터리 군사재판을 규탄하면서 한국 경찰에게 신나게 맞은 날이 있었다. 그 날 이런 싸움 더는 못하겠다던 나이 많이 먹은 나를 다독거린 사람이 종철이였다...이후에 나는 시청 앞에서 수만의 촛불이 일렁거릴 때 차마 부끄러워 그를 쳐다보지 못했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너를 다시 볼 수는 없지만 너의 정신과 마음은 영원할 것이다...제종철 동지, 외로워도 말고 서러워도 말고 힘들어하지도 말라." 고령의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여중생 촛불시위에 일년 내내 개근을 해서 ‘광화문 할아버지’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이관복 선생은 이렇게 추도사를 했다. "제종철 동지, 어찌 그리 먼저 가는가. 나 같은 늙은이를 두고. 가서 효순이와 미선이를 만나거든, 아이들이 슬피 울거든, 위로하고 달래주시게. 위로하면서 전하시게. 우리는 이기고 있다고. 광화문에서 363차 촛불이 계속되고 있다고, 미국이 죗값으로 우리 땅에서 지워져 가고 있다고..." 여중생 촛불시위를 함께 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학생운동, 청년운동, 노동운동, 주민운동, 당운동 등 그가 관여했던 다양한 사업영역에서 만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지위의 높낮이와 연령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한 마음으로 그의 죽음에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 운동권과 좀 거리가 있었던 그의 지인 한 사람도 이런 글로 그를 추모했다. “저에게 참 귀한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역에서 만나, 함께 지역운동을 고민하였고, 그 친구는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을 하였습니다. 자신의 삶보다 미련할 정도로 남과 이웃,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였던 친구. 모든 데모현장에는 그 친구가 있었습니다. 난 그 친구를 보면서, 놀리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데모꾼, 또 데모 준비하려고 바쁘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아라 하면서 놀리기도 하였습니다. 미선이와 효순이가 죽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 유족을 위로하고, 여중생의 죽음을 전국화하고, 촛불시위를 이끌었던 친구. 그 친구는 위대함과 뛰어남보다는 선함과 열정, 따스함이 있었습니다. 난 그 친구의 그 선함과 따스함이 좋았습니다. 그 친구와의 술 한 잔은 휴식과 나눔의 장이었습니다. 21일날 그 친구는 죽었습니다. 죽기 전에도 미2사단 앞에서 촛불시위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 친구를 애도하는 것조차 부끄럽습니다.....살아있는 자의 부족함을 그 친구가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추석때, 여중생이 죽고, 또 한 명의 남자가 미군 차에 깔려죽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집인 진주로 가지 않고 장례식장으로 갔습니다. 몇 푼의 돈을 쥐어준 채, 떠나는 나의 모습을 그 친구는 오히려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배웅했습니다. 주머니가 항상 비어 있어도 행복했던 친구... 제종철! 나 역시 나의 그 친구를 혁명가라 부르렵니다.....” 모란공원에 마련된 그의 마지막 거처를 지키는 검은 돌비석에는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여 이런 비문이 새겨져 있다. 아!제종철 동지여 ! 한 생을 조국과 민중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민족의 참된 일꾼이여 시련의 고비마다 맑은 웃음 지으며 새 길을 개척한 신념과 의리의 투사여 자주민주통일의 그날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환하게 부활하리라! 혁명가는 시대의 산물이다. 혁명가 제종철도 마찬가지로 시대의 아들이었다. 80년대의 큰 분수령인 6월항쟁의 영마루에서 청년기를 시작하여 급변하는 시대의 요구와 부름에 따라 자기 삶의 행로를 정하고 그 길에 모두 바친 사람이었다. 청년기는 흔히 세계관의 형성기라고 한다. 사람의 인생에서 청년기는 시대추세와 정세변화에 민감하고, 정의감이 강하며, 진리탐구의 열정이 가장 높을 때이다. 그러한 청년기의 출발점에서 6월항쟁같은 역사적인 사건을 겪었던 것은 제종철의 세계관 형성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른바 386세대는 군사독재정권과 맞서 싸우고, 그것을 무너뜨리고, 한국사회 변화의 새로운 길을 열어낸 세대였다. 유신독재에 짓눌려 암울한 청춘을 보냈던 그 직전 세대와 달리 386세대는 왕성한 대중운동과 더불어 청춘시절을 보내며 대중운동의 영향을 가장 폭넓고 크게 받았던 세대였다. ‘아침이슬’ ‘광야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같은 노래는 이 시기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널리 알려진 민중가요들이다. ‘아침이슬’은 실상 70년대부터 불렀던 노래이지만, 80년대에 들어와서 가장 폭넓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80년대 노래처럼 알려졌다. 지금에 와서 이 노래들은 거의 국민가요라고 할 만큼 널리 보급되었다. 한국사회가 그만큼 변화한 것이다. 그 변화를 선도했던 386들은 그러나 6월항쟁 이후 90년대를 거치면서 행보가 어지럽게 갈라졌다. 심지어 극과 극이라고 할 정도로 정반대의 길로 나뉘기도 했다. 해바라기처럼 끊임없이 권력을 좇아 급기야는 지배계급의 심장부나 언저리에 자리잡은 사람들도 있고, 끊임없이 ‘낮은 곳’을 향해 공장이나 농촌, 주민대중 속으로 찾아들어간 사람들도 있다. 제종철은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사회변화에 앞장섰던 주역들이 이렇게 분화하는 현상은 6월항쟁 경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한때 419혁명의 기수였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 보수층의 골수인물로 변신한 무수한 전례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는 419혁명이나 6월항쟁이 미완의 혁명으로 그친 데 따른 불가피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미완의 혁명을 이어서 혁명을 계속 밀고가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고, 이제 그 정도면 됐으니 실속을 챙겨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급격한 사회변화의 시기에는 이른바 “철저한 혁명세력”과 “불철저한 혁명세력”이 갈라지는 것이 우리가 경험해온 역사의 필연이었다. 그 어느 세력이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얻는가에 따라 역사의 양상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80년대로부터 21세기로 가는 변화의 급류 속에서 제종철은 “철저한 혁명세력”의 편에 서고자 했고, 그 길에서 일관되게 살다가 짧은 생을 마쳤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게 했을까? 이것은 단지 제종철 개인이 아니라,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제종철들에게 던져야 할 질문일 수도 있다. 지금 제종철과 같은 길에서 같은 뜻을 가지고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 우리는 왜 이 길을 가는 것인가? 외세에 짓밟혀온 역사, 분단의 굴레, 민중들의 한숨과 고통이 끝날 날 없는 이 땅의 현실이 대강의 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좀 더 복잡하고 세밀하다. 그것만으로는 역사 앞에 마주선 사람의 구체적인 고민과 결단을 해명하기는 어렵다. 똑같은 현실이라도 사람들마다 보고 느끼는 것이 다르고, 대응하는 것이 다른 법이다. 사람을 혁명의 길로 끌어가는 근본요인은 무엇보다 사람의 사상감정에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현실에서 자행되는 부정과 불의에 분노가 없고 적개심이 없는 사람이 어려운 투쟁을 동반하는 혁명에 나설 수 없다. 지금은 지배권력의 언저리에 붙어있는 386세대의 모씨가 순수했던 학창시절의 항소이유서에서 불확실하게 인용해서 유명해진 네크라소프의 시구처럼 “분노할 줄 모르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민중에 대해 고상하고 뜨거운 사랑의 감정이 없는 사람이 민중들과 함께 하는 혁명에 나설 수 없다. 제종철이 혁명의 길에 나섰던 것은 바로 그에게 뜨거운 분노와 사랑의 감정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혁명은 그의 심장의 명령이고 결단이었다. 그가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짚어보면 그 결단의 성격과 의미가 잘 이해될 것이다. 평전은 제종철의 삶의 역정과 생활자세, 활동풍모를 통해 그가 어떤 마음으로 혁명을 결단하고 실천한 사람인가를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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