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런 가계(家系)다
밀성박씨 송암공후 세계도
50세 51세 52세 53세 54세
청죽공(손)→야와공(문)→만암공(종립) → 지헌공(이창)→ 창산공(이창)→ 큰 집가계
↓ ⤷의재공(극창)→ 묵당공(극창)→ 작은집 가계
⤷만당공(종익)→
54세 55세 56세 57세
묵당공(세우) → 괴헌공(사고)→추전공(경빈)→ 태허당공(도희)
⤷성암공(필고)→ 송헌공(봉삼)→ 선재당공(도항)
↓ ⤷ 성삼당공(도함)
⤷취헌공(석고)→ 백곡공(경상)→ 회암공(도명)
⤷오암공(도문)
⤷송암공(도묵)→ → →
⤷계암공(도윤)
57세 58세 59세 60세 61 62 63 64 65세
송암공(도묵)→학곡공(형규)→매암공(종우)→ 간송공(경복)→구산공(근진)→은기→현호→경석→태홍
↓ ⤷종호→ 현찬.현칠.춘기.기일. 가계.
↓ ⤷종희→ 형민.현기.봉기.완기. 가계.
↓ ⤷종만→ 근철(육군 대령) 가계.
↓ ⤷종관→ 상호.남걸.상열.태성. 가계.
↓ ⤷종덕→ 길선.중기.정길.재광. 가계.
↓ ⤷종희→ 찬기.현배.상곤.동기. 가계.
↓
⤷양곡공(경규)→ 종일→ 현조.종기.무환.현관.현성.만도. 가계.
⤷종문→ 부기.현준. 가계.
⤷종기→ 호야.무영.(밀양가계)
※ 종우가계→경석.유기.현수.현덕.현무.일기.이기.삼기.종환.현성.
1. 송암공 도묵(松庵公 道默)
송암공은 1786에 나시어 1879년 졸하시니 향년 93세였다.
천학(淺學)인 예천 일기(一基)의 5대조이시다.
아들 두 분을 두셨으니 학곡공 형규(炯奎)와 양곡공 경규(景奎)이다.
우리 모두는 이 어른의 후손들이니 선대부터 이 어른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하여 회(會)를
만드니 송암공후 화수회(松庵公後 花樹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부터 학곡공 가계를 큰집 양곡공 가계를 작은집으로 불리어져 오고 있다.
현재 후손은 큰집 130여명과 작은집 90여명 도합 220여명이다.
송암공은 공신(功臣)의 음덕(蔭德)과 높은 학덕(學德)으로 증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
(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에 추서(追敍)되었다.
송암공은 타고난 재덕(才德)으로 소시(小時)부터 서문(書文)에 독학역행(篤學力行)하여 일가를
이루니 그 학문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덕행(德行)과 행의(行義)가 세상에 알려지니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고 행의는 공신의 후예임을
명심하여 평생 동안 품위를 잃지 않은 몸가짐으로 족친과 형제간 우애를 돈독히 함에 모범이었다.
학덕(學德)은 대를 이었으니 부군의 생시인 一八五六년 손 매암공 종우가 여천문중 유일의 낙육거제
(樂育擧第)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누득외첩(累得嵬捷)하니 온 고을에서 칭송받는 광영으로
가계(家系)를 빛냈다.
서세(逝世) 후에는 증손 간송공 경복도 여천 문중 무이(無二)한 유일취사(遺逸就仕)로 동몽교관
조봉대부로 이어졌으니 부군의 은덕(隱德)이 아닐 수 없겠다.
생시에 받은 실직(實職)이 아니고 사후(死後)에 받은 명예직(名譽職)인 증직(贈職)이므로 반드시
관작 앞에 증자(贈字)를 넣어“증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이라고 써야 올바른 표기이다.
따라서 묘전석물(墓前石物) 또는 제례 시 축.지방 등에 증자(贈字)를 쓰지 않은 표기는 그 분을
비꼬거나 조롱하는 짓이며 그 분에 대한 모독(冒瀆)이라 하겠다.
사실(事實)은 사실 데로 적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비위(妣位)께도 증자를 넣어“증숙부인월성최씨”라고 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선대(先代)들은 왜 엄연한 사실을 사실 데로 쓰지 않았을까.?
선대들이 살던 그 시대적 사회배경의 이해 없이 현대의 평등사회에 사는 우리들의 잣대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그 당시의 양반이 대접받던 사회적 민심 흐름 때문이라 하겠다.
전국에 산재한 증직된 선조들의 묘소(墓所)들의 비석이나 상석에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관작
앞에 증(贈)를 쓴 경우는 드문 것이 관례(慣例)였으며 우리 여천 문중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정(王政)신분 사회가 민주 평등사회로 바뀐 오늘 우리는 전통을 지키되 수많은 조선의 선유(先儒)
들이 주장했던 바와 같이 이제는 우리들의 선대의 관작 앞에 증(贈)자를 써 드리는 것이 선조에 대한
예의이며 후손의 도리라고 생각된다.
년전(年前) 백양곡에 계시던 송암공 고비(考妣) 묘소를 구영리 선산에 이폄 합부(移窆合祔)시 비석에
늦게나마 두 분께 증(贈)자를 넣어 드리기도 했다. (구영리 송암공 묘소 비석 전면(기액=基額) 참조)
우리 가계의 200여 자손들은 이 할배가 계셨기에 오늘 우리가 있고 이 할배의 학맥(學脈)은 대대로
이어져 오고 있으니 이 할배의 은덕(隱德)임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여천 문중의 모든 자손들이 우리 송암공 가계(家系)를 학통(學統)을 대대로
잘 이은 최고의 가계로 칭송하기도 했다.
특히 작고하신 초계 영곤공께서는 이 할배의 증손이신 간송 경복공에게서 학문을 몸소 배웠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우리 가계를 칭송하기도 했다.
이것은 박사(딸.며느리 포함) 14명. 석사 13명에 서랑(壻郞)으로 5선에 국회 부의장을 지낸 온양
정갑윤(溫陽 鄭甲潤)과 울산시 교육감을 지낸 김해 김상만(金海 金相滿)도 있으니 우리 가계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우리문중의 칭송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하겠다.
음덕(蔭德)= 나라에 공(功)이 있는 선대의 덕행.
공신(功臣)이거나 고관(高官)이었던 선대의 후손에게 나라에서 주던 각종 특혜. 예컨대 현대의
독립 운동가의 유족 또는 후손 에게 포상하는 제도와 유사함.
추서(追敍)= 죽은 후에 관직이나 훈장 따위를 받음.
독학역행(篤學力行)= 학문에 충실하고 힘써 이를 실행 함.
부군(府君)= 직계 선조를 높혀서 이르는 말.
선유(先儒)= 옛날 선비. 옛날의 유학자.
유일취사(遺逸就仕)= 과거가 아닌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섬.
이폄 합부(移窆合祔)= 이장하여 합장함.
은덕(隱德)= 숨은 덕행. 보이지 않은 덕행.
서랑(壻郞)= 사위.
허언(虛言)= 헛 소리. 과장된 말. 거짓 말. 쓸 때 없는 소리.
2. 학곡공 형규와 양곡공 경규
(鶴谷公 炯奎와 楊谷公 景奎)
두 형제분 할배는 아버지 송암공의 가르침으로 학덕이 높고 오래 사신 덕으로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를 받으셨다.
참고로 우리 여천문중에는 8 분의 수직(壽職) 선조가 계신다.
수직이란 조선시대에 신분(身分)에 관계없이 80세 이상 학덕(學德)이 높은 노인들에게 주던 명예직
으로 몇 번(세종.정조.고종.) 행해졌던 것으로서 수계(壽階).수직(壽職) 또는 노인직(老人職)이라 한다.
기로연(耆老宴=노인 잔치)을 베풀고 쌀 2섬을 주었다.
따라서 묘비(墓碑)나 축.지방에는 수직 통정대부 또는 수계 통정대부라고 표기(表記) 함이 고래(古來)
예서(禮書)의 가르침이지만 사후에 받은 증직이 아닌 생시에 받은 것이라는 이유로 대부분 이를
지키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 천학(淺學)의 단견(短見)으로도 생시에 받은 명예직이 였음으로 굳이
받은 관품(官品) 앞에 수직 또는 수계라는 표기를 하지 않아도 크게 나쁠 것이 없다고 사료된다.
3. 매암공 종우(梅岩公 種愚)
학곡공의 일곱 아들 중 맏이이며 초시(初試) 할배라 한다.
1839년에 탄(誕)하여 1899년에 졸(卒)하니 향년 60세 였다.
우리 여천문중 450년 역사에서 유일한 과거 급제 선조이다.
매암공은 할아버지 송암공과 아버지 학곡공의 가르침을 이어 받아 독학력행(篤學力行)하여
17세에 향시(鄕試)인 낙육거제(樂育擧第)에서 장원을 시작으로 누득외첩(累得嵬捷)하였다.
그러나 불행이도 성균관 대과(大科)에서는 수차례 실패했다.
향시의 합격자를 초시(初試)라 했으니 그래서 속칭 "초시 할배"인 것이다.
낙육재에서 공부를 오랫동안 했는데 학우(學友)들이 공을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한다.
고향으로 돌아 올 때에는 감사(監司=도지사)가 직접 찾아와서, 종이와 붓을 상으로 주기도 했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현 여천 오거리 동북쪽 약 500m 영락원 남쪽 부근에 우리 여천 문중 최초며
최후의 서당인 사우재(四友齋)를 개설하여 유교경전 연구에 전염하여 효경과 칠서(사서삼경)를
주석하고 그 내용을 토를 달아 등초(배껴쓰다)하여 후학들에게 권장하고 교육함을 자기 책무로
삼으니 사람들은 남향(南鄕=남쪽지방 즉 공이 사는 지역)에 선비가 많은 것은 공의 공로라고
하였다. 1897년 관찰사 지석영선생(호 송욱=松郁)이 공의 글을 보고 감탄하여 운고(韻考=책이름)
1책을 상으로 주었다.
1899년 3월10일에 졸하니 문인(門人)들과 사림(士林)들이 그의 덕성(德性)을 흠모하여
치장(治葬)을 위한 계(契)를 만드니 계 이름을 경모(景慕)라 했다.
유고(遺稿)로 3책 6권을 남겼으나 후손들의 관리 부실로 유실되고 말았으니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독학력행(篤學力行) = 열심히 공부하여 이를 실행함.
향시(鄕試) = 조선시대에 각 도별로 보던 과거의 예비시험.
각 도별로 8-10명을 선발 하였으나 다만 서울은 100명을 선발 했는데 이들 합격자를
초시(初試)라하고 초시가 되어야 성균관에서 보던 대과(大科)에 응시 자격을 주던 제도.
대과에서 합격자를 진사(進士)라 했다.
낙육거제(樂育擧第) = 조선시대에 대구에 있던 교육 기관이 낙육재(樂育齋)였다. 여기에서 향시를
보았다. 낙육재에서 과거를 본다하여 낙육거제라 했다.
누득외첩(累得嵬捷) = 여러번 장원을 함.
운고[韻考] : 한자(漢字)의 상성(上聲)・평성(平聲)・거성(去聲)・입성(入聲)을 분류해 놓은 책.
사우재(四友齋) = 우리 여천 문중 유일한 서당의 현판(懸板) 이름 이며 그 현판은 여천 문중 종손인
성주의 증조고이신 해창 용수(海蒼龍洙)공이 쓰셨다.
권학(勸學) = 공부하기를 권장함.
유고(遺稿) = 스스로 쓰서 죽을 때에 남긴 책.
4. 매당공 종호(梅堂公 種昊).
학곡공의 일곱 아들 중 둘째이시고 현찬.현칠의 고조고이시다.
아버지 학곡공에게 글을 배워 학행(學行)이 남달랐고 한다.
고종 때인 1800년대에 나라에 상당한 기여(금품)를 하여 가선대부 공조참판겸 의금부도사
(嘉善大夫 工曹參判兼 義禁府都事)를 교지(敎旨)와 함께 명예직으로 제수(除授)되었다.
그 당시에 우리 여천 문중에는 아홉 분이 명예직을 받은 선조가 계시기도하다.
가선대부는 정2품의 높은 품계이며 공조참판은 지금의 상공부 차관에 해당되며 의금부 도사는
법무부의 국장에 해당되는 높은 관직이다. 참고로 우리 의재공회의 큰집인 괴헌공회에서는 그
때에 받은 두분 선조의 교지(敎旨) 두 장을 파중(괴현공후 화수회) 사무실에 게시(揭示)해 놓고
있기도 하다.
5. 화정공 종일(華亭公 種馹)
공은 아버지 양곡공의 학풍(學風)을 이어 받아 학덕이 높고 나라에 상당한 기여(금품)한 공로로
영릉 참봉(英陵參奉)을 명예직으로 제수(除授=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림)했다.
영릉(英陵)은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제4대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 능묘(陵墓)이름이며
참봉은 능을 관리하는 9품의 미관말직이다.
1800년 후반 고종시 실권자였던 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재건하기 위하여 필요한
국가 재정 확충 방안으로 공명첩(空名帖)을 만들고 원납전(願納錢)을 통해서 전국 백성들의 기부
동참을 독려했다. 이때에 내던 돈을 원납전이라 했다. 공명첩이란 이름을 적어 넣을 공란(空欄)만
남겨두고 미리 인쇄된 교지(敎旨=임금 명의의 임명장)를 말한다.
기여도에 따라 관직에 차등을 두고 순전히 명예직으로 주었으니 실권(實權)과 녹봉(祿俸=봉급)은
당연히 없었다.
원납전(願納錢)이란 “스스로 원해서 내는 돈”이란 뜻인데 나중에는 강제로 징수하는 경우도 많아
져서 “원망스럽게 내는 돈”이란 뜻의 원납전(怨納錢)으로 백성들의 원망을 싸기도 했다.
6. 간송공 경복(澗松公景復).
간송공은 증조 할아버지 송암공과 할아버지 학곡공의 학풍을 이어 받은 아버지 매암공께
6살 때부터 학우친전(學于親前)하니 재기초월(才器超越)했다.
당시 울산 지방의 향노(鄕老) 이간우(李艮宇)공이 한번 만나 보고서 말하기를 장용묘당지기
(將用廟堂之器)라 칭찬 했다 한다.
아종아호(我從我好) 내가 좋아해서 내가 따르니.
막여선업(莫如先業) 아버지가 남기신 글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업문독학(業文篤學) 글공부를 업으로 하고 학문을 돈독히 하여,
야이계일(夜以繼日) 밤부터 낮까지 쉼없이 면학(글공부)에 힘썼다.
학행이 널리 알려지니 사림(士林)들의 천거(薦擧)로 1904년(고종 8년)동몽교관 조봉대부
(童蒙敎官 朝奉大夫)로 대구 낙육재(樂育齋=지금의 국립대학 격의 교육기관)에서 1910년 한일 합방
때까지(6년간) 국록(國祿)을 받고 교관(敎官)으로 재직하신 우리 여천문중 유일(唯一)의 실직
(實職=실재로 직무에 종사함) 선조이다.
1910년 8월 29일 국치일(國恥日=나라가 치욕을 당한 날=한일합방)을 맞아 자진 퇴임 낙향(落鄕)
하였다. 낙향 후 아버지 매암 종우(梅岩公種愚)공이 개설한 서당(書堂)인 사우재(四友齋)에서
사마온(司馬溫)의 권학시(勸學詩)를 후학들에게 권장하고 인재 양성과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사우란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뜻하는 말이며 네 가지 벗을 이르는 말인데 글 하던 선인(先人)들이
즐겨 쓰던 말이다. 글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벗 즉 종이.붓.먹.벼루(紙筆墨硯=지필묵연)를
이르는 말이다. 또한 선비의 올곧은 지조를 비유하여 사군자(四君子) 즉 매란국죽(梅蘭菊竹)을
일컷기도 한다. 매란국죽이란 글자 그대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이르는 말이다.
또한 청죽공 묘소에 비석을 세울 때에 묵지 인수(默止 仁洙=진관의 증조고)공과 함께 경주 안강의
양동 마을까지 100여리 길을 걸어서 당시의 유명한 학자 소암 이매구(小庵 李邁久) 선생의 글
(청죽공 묘소의 비문)을 받아 오기도했다. 참고로 비문의 글씨(묘소 뒷쪽에 물려둔 옛비)는 해우
종호(海愚種浩=고 영환의 증조고)공이 쓰셨다.
1934년 8월8일 졸하시니 향년 73세 이고 따라서 사우재도 문을 닫게 되었다.
폐당(閉堂) 당시 우리 문중 최종 학동(學童)으로는 작고하신 신천(新川)근식공과 초계(椒溪)
영곤공과 친손 부곡 순기(順基)공이었다.
유고(遺稿) 2책 4권을 남겼으나 안타깝게도 전해지지 못했다.
사우재는 우리 여천문중 유일한 최초 최후의 서당(書堂)이었다.
또한 배위(配位)이신 영인(令人) 고령김씨는
조년구순 와기불능 주야시측 분익제예지물 불사인자담 인리 함칭효경 자관시상
(祖年九旬 臥起不能 晝夜侍側 糞溺除穢之物 不使人自擔 隣里 咸稱孝敬 自官施賞).
시할아버지(학곡공)의 년치(年齒)가 9순에 자력으로 눕고 일어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주야로 곁에서 시중을 다하고 분변(糞便)으로 더러워진 것들을 남에게 시키지 않고 손수 감당하였다.
이웃과 마을 사람 모두가 그녀의 효경(孝敬=효도와 공경)을 칭송하니 군(郡)으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다.
학우친전(學于親前) = 직접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다.
재기초월(才器超越) = 재주가 어떤 한계나 표준을 뛰어 넘다.
향노(鄕老)= 학덕이 높고 그 지방에 널리 알려진 나이 많은 선비.
장용묘당지기(將用廟堂之器) = 장차 중앙 요직에 나아갈만한 인재 를 큰 그릇에 비유해서 이르는 말.
묘당(廟堂) = 국정을 론(論)하는 자리.
사림(士林) = 지방에 거주하는 학덕이 높은 선비들.
천거(薦擧) = 사림(士林) 또는 지방관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아감.
동몽교관(童蒙敎官) = 각지방에 있던 국립대학 성격의 학교 교수.
종 9품으로 900일 이상 근무하면 종 6품으로 승격됨. 원래는 6개월이 임기였으나 신임에
따라 연임도 가능한데 간 송공은 자진퇴임 할 때까지 6년을 재직 하셨으니 대단한 신임을
받은 것으로 추증된다.
조봉대부 (朝奉大夫) = 종 4품 관작.
7. 구산공 근진(龜山公 根震).
구산공은 우리 여천 문중 및 우리 가계의 마지막 선비였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일제(日帝)는 한일합방 후 전국의 행정구역을 도. 군. 읍. 면.리로 개편하고 호적부와 전국을
측량하여 지적부를 만들었다.
울산군 대현면이 새로 생겨났다.
대현(大峴)이란 말은 큰 고개라는 뜻인데 그 곳이 바로 여천 고개였다. 대현면 내에서 가장 큰
고개는 여천 고개였으며 그 고개가 있는 여천 마을이 대현면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면민 중에 가장 많은 인구와 성씨가 여천(밀양)박씨 였으니 초대 면장(面長)역시 여천박씨
중에서 선임했는데, 당시에 송암공,학곡공. 매암공, 간송공으로 이어진 학풍(學風)을 전수하여
학행(學行)과 덕망이 가장 높았던 구산공 근진(根震)이었다.
아울러 우리 문중 재실인 청죽재를 임시 대현면 청사로 임대(징발) 사용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후 장생포가 신흥 도시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대현면 청사는
장생포로 옮겨졌고 구산공은 물러났다.
또한 배위(配位)이신 달성서씨는 성행완순유여사지풍인리교훈녀하효즉서부인운
(性行婉順有女史之風隣里敎訓女何效則徐夫人云) 성품과 행동이 완순하여 여사의 풍모를 지녔으니
이웃마을 사람들이 딸을 키울 때에 어찌하면 서씨 부인처럼 가르칠 수 있을까 했다 한다.
그 후로도 송암공의 학맥(學脈)은 구산공의 외아들이신 가암공 은기(佳岩公銀基)로 이어 졌으며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다.
가암공 은기는 선대의 한학(漢學)에 통달하였으며 부산상고의 신학문을 공부하여 금융조합
이사. 초대 울산 축협장을 지내기도 했다.
또한 다전 가족 묘소 61기 중 5-6기의 상석에는 공(公)이 손수 쓴 글씨가 남아 있기도 하다.
2021년 초추지제(初秋之際) 五代孫 禮泉一基근서(謹書)
(2021년 7월에 5대손 예천 일기가 삼가 쓰다)
첫댓글 임생 族孫 졸필 읽어 주어 고맙고 좋은 댓글 더더욱 고맙구나.
그런데 내가 PC 다루는 것이 부족하여 그만 지워져 버렸구나.
대단히 미안하지만 원래 내용 그대로 다시 한번 올려 주기 부탁한다.
옛자취가 보존이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이렇게 정리해서 알려주시니 후대에 좋은자료가 될것 같습니다...
태호 족손(族孫) 졸필(拙筆) 읽어주어 고맙구나.
이런 구닥다리 글을 쓰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일 듯하구나.
지난 역사를 알아야 미래가 있는법.
빈약한 내용이지만 참고가 되길 바란다.
많은 자료를 찾아
이렇게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松庵公 道默 의 가계 자랑 스럽고 부럽습니다.
梅岩公의 우리만의 서당 四友齋 가 있었다는 사실도
또 大峴이란 지역도 우리 門의 주거지 여천 고개였다는
처음 알았습니다.
여천문의 역사이며 울산 지역의 귀중한 자료 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임생 족손 과찬(過讚)댓글 고맙다. 다만 글 중.
➀ 만당공은 만암공으로,
➁ 梅庵公의 庵은 岩으로,
➂ 四友齊의 齊는 齋로.
➃ 우리文의 文은 門으로 수정함이
좋을 듯하구나.
@禮泉(道默62世) 댓글 작성후
재 확인 않고 올려서 죄송 합니다.
바로 수정 하였습니다.
死後 贈職의 "贈" 자의 의미도 늦게나마
알게 되어 다행이며
고쳐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