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하', 팬들에게는 참으로 가슴 설레는 이름이었다. 남자인 필자가 봐도 호감이 가는 멋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도 속절없이 세상을 등졌단다. 최근 장자연, 최진실, 최진영 등 유난히도 많은 연예인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기사를 계속 접했지만 유독 그의 선택에 대해서는 쉽사리 고개가 끄덕여 지지 않는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죽음이 쉽게 납득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가 죽음을 선택하기 전 밟았던 마지막 여정이 다른 사람들과는 사뭇 달랐기에 수긍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은 선택을 했을까.
본인의 나약함을 책망하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 죽음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도록 흘러버린 전 지구적 세태를 탓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보다는 그가 국내 복귀를 앞두고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 새롭게 시작한 많은 사업이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 등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를 최우선시하는 우리 사회의 풍토에서 근본적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살아남아야 하는 것만을 가르칠 뿐, 그것의 폐해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성찰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자신의 또 다른 단면은 애써 외면한 채, 경쟁에서 이긴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개인적 특권만을 바라도록 강요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는 우리의 자화상 아닐까. 이런 강요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아가는 우리에게서 마지막을 고뇌하는 '그'의 모습을 읽어내기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사실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건들은 비일비재하다. 삼성에서 퇴사했더니 맞선이 딱 끊어졌다는 기사에서도, 강남지역 부동산 값이 요동치는 것도, 그리고 유명인이 대마초 사건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결국은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증의 하나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기어이 이겨야만 속이 시원한 듯 여기는 세태는 달리 이해할 방법이 없는 듯 보인다. 우리는 축구나 야구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에게조차 기어코 이겨야 한다는 의미를 얹어 '전사'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경쟁에서 살아남기'가 사회의 기본 패러다임이 된 것이 필자의 책임은 아니지만, 그것에 당당히 맞서기는커녕 그와 같은 사회병리 현상을 조장한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남는다. 그뿐만 아니라 필자가 맡은 과목이 그와 같은 경쟁적 생존이 아니라 인간다움에 대한 고전적 고민을 전달하는 윤리과목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윤리 교과서에서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와 맹자가 도덕성 회복을 통해 사회 혼란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강변한 것, 성리학이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하여, 학문의 목표를 좋은 직장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회복을 최우선 목표로 제시한 것, 노자나 장자가 인위적 사회제도의 허울에서 벗어나 무위자연의 삶의 태도를 이야기한 것,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참된 삶을 위해 영혼의 수련을 강조한 것 등.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바람직한 삶에 대한 이야기이며, 경쟁에서 살아남기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친 경쟁이 화(禍)를 불러왔다는 것을 강한 어조로 고발하고 있다.
물론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중요하다. 경쟁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이 시대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경쟁해야 하며 또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곧 사람다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경쟁에서 졌다고 사람답지 못하다는 생각도 옳지 않다. 이겨야만 한다는 생각에 이기지 못한 사람과는 인간으로 마주하지 않으려는 심보는 오히려 스스로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인간다움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킬 뿐이다. 이 사회가 또 다른 '박용하'의 등장을 우려해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경쟁에서의 소외가 아니라 인간다움으로부터의 소외를 고민해야 한다. 모든 사회가 생존에 대한 경쟁보다 인간다움에 대한 소망을 우선하는 가치로 인정할 때라야 비로소 '그들'의 행진은 멈출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고민도 없이,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기만 하는 것은 감정의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난 몇 년간 같은 슬픔을 몇 번이고 되뇌고 있지 않은가. 더는 누군가의 죽음이 그저 한갓 놀라운 일로 치부되는 것도, 그렇다고 안타까운 슬픔으로만 덧입혀지는 것도 온당하지 않다. 오늘도 무수히 많은 교실에서 땀 흘리며 고군분투하는 경쟁에 내몰린 학생들일지언정 그와 같은 무심한 선택을 하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2010.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