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갈이나무의 돌멩이
남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싱그럽다. 이맘 때면 소녀적 생활이 그리워 홀로 되신 아버지를 자주 찾아 뵌다.
친정에는 여태 내방이 비어 있지만, 나는 거실을 즐겨 쓴다. 거실에서 잠을 자야만 아버지의 건강상태를 쉬 확인 할 수 있기에. 숨 소리가 어떤지 기침은 어떠한지. 여명이 채 열리기도 전, 집 안팎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의 소리다. 밤 사이 안녕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숨을 토해낸다. 아버지는 매사에 깔끔하시다. 엄마가 편찮은 뒤로 밥이며, 빨래, 청소를 척척해내셨다. 주부 9단 뺨친다. 당신이 부엌에 들어간다는 것은 예전에는 상상 못했으리라.
봄바람은 땅 구멍에서 일어나고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춤을 춘다. 따사로운 봄햇살이 아까워 아버지를 모시고 성지곡 수원지 백년숲길을 산책한다. 아버지는 쭉쭉 뻗은 삼나무를 보시며
"거참, 나무들 잘 생겼네. 너그 엄마 산소 뒷산에 심으면 좋겠어. 삼나무나 편백은 숲이 좋아 너그 엄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제격이겠제?" 여러 차례 되뇌신다.
길섶 웅덩이에는 유영하는 한쌍의 청둥오리가 연신 수면 위를 쪼아댄다.
"웅덩이가 깊어야 물고기가 많을 끼고, 먹이가 넉넉할 터인데." 청둥오리 배 고플까 걱정하는 아버지. 한 낱 미물에 기울이는 애정이 이럴진데, 슬하에 자식에께는 오죽했을까. 코끝이 찡하다.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 팔을 걸고 숲속 테크길을 산책한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삼나무·편백의 사열을 받는 형국이라 어께가 으쓱하다. 간간이 흰색을 발해야 할 푸조나무가 회색빛이다. 아버지는 나무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신다. 나무가 탈이 난 모양이다.
"병든 나무는 잘라삐야 다른 나무에 전염이 안될 텐데. " 매사를 허투로 보지 않은 데서 아버지의 깊은 경륜을 읽을 수 있겠다.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서로 부딪쳐 탄생한 연리지 앞에 섰다.
"저건 이갈이 방패로 사용한데이. 서로 부딪혀 삐걱거리면 나무 사이에 돌맹이를 끼워 소리를 없앤다."고. 아버지는 생물학 박사도 아니신데...
"우리 아가, 이 갈지 않게 해주이소." 기원하면 신기하게도 이를 갈지 않았다고 한다. 조상들의 슬기로운 처방이 새삼 경이롭다. 나무도 서로 부딪히면 아파서 소래내 듯, 사람도 마찬가질 터. 피부끼리 오래 비비면 물집이 생기고 진물이 날 터이다. 돌멩이로 틈을 만들어 나무의 마찰을 줄이는 것 처럼 인간 관계도 일정한 간격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아버지는 엄마 생전, 연리지에 돌멩이같이 부부 관계도 지혜롭게 설정했으리라. 마찰음이 하릴없이 높아지는 세상이다. 알력을 완충하는 돌멩이의 진면목을 닮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