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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스크랩 인간게놈 프로젝트, 인간유전자의 조작, 현생인류의 증발
에뜨랑제 추천 0 조회 73 08.03.12 19: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간게놈 프로젝트, 인간유전자의 조작, 현생인류의 증발

                                                                이필렬

1

과학의 역사에서 20세기는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의 등장과 함께 시작했다. 현대물리학의 핵심 내용을 구성하는 이 두 이론은 인과론과 시공간의 절대성에 기초한 고전물리학의 타당성에 의문을 던짐으로써 물리학을 뒤흔들어놓았다. 이와 더불어 17세기 근대과학의 확립으로 선형적 인과관계와 연속적이고 규칙적인 시간의 흐름 같은 개념에 익숙해져 있던 유럽인의 관념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20세기 초의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이 유럽인의 정신세계에 상당한 충격을 던졌다 해도 그것이 일반인들의 일상생활까지 뒤흔들어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를 해석하는 도구의 하나로서 정신세계에 변화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물리학 이론으로서 추상적인 사변과 계산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대물리학 연구가 이차대전 때 원자폭탄을 낳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잿더미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해도, 원자탄조차도 그 파괴적 능력을 직접 체험한 일본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영역의 것이었다. 그것은 일상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적으로 국가의 통제를 받는 것이었고, 가공할 파괴력 때문에 이차대전 후에는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가 현대물리학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했고 그 영향 아래 있었다면, 과학사에서 21세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의 완결과 이에 힘입은 ‘새로운’ 생명공학의 급속한 부상과 함께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새로운’ 생명공학이란 유전공학, 생식공학, 생식유전학 등을 포괄하는 것이다. 21세기는 적어도 그 전반기 동안은 ‘새로운’ 생명공학의 영향에 의해 깊게 각인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생명공학이 가져올 충격의 정도는 20세기 초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이 정신세계에 일으켰던 변화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엄청날 것이다. 생명공학은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생명을 거리낌없이 조작함으로써 생명의 본질에 관한 관념의 세계를 뒤흔들고 일상의 세계까지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뒤흔들어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공학은 맑스와 엥겔스의 유명한 말을 빌어 표현하면 “모든 단단하게 확립되어 있는 것을 해체하고(증발시키고)”, “모든 성스러운 것을 비속하게 만든다.” 부르주아지와 자본주의가 전통적인 수공업적 산업과 그에 기초한 제도와 관념들을 쓸어버렸듯이, 현대 생명공학은 지금까지는 종이라는 테두리 속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던 생물종을 모호한 것으로 ‘해체’해버리고, 생물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외경에 가까운 관념을 철저하게 속된 것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서 생명의 존엄, 인간의 존엄과 권리에 대한 우리의 판단기준을 아주 모호하게 만들고 말기 때문이다. 맑스는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때까지 단단한 것의 ‘해체’(증발)가 끊임없이 새롭게 일어난다고 말했지만, 생명공학에서는 아마 인간이 수백살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될 때까지 낡은 생명을 ‘해체’하고 새로운 생명을 ‘합성’하는 일이 끊임없이 벌어질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일은 인공생명의 열광적인 찬양자 한스 모라벡이나 이들의 비판자 빌 조이가 주장하듯 기계가 세상의 주인이 될 때까지 계속될지 모른다.


2

생물종을 서로 구분하기 힘든 모호한 것으로 ‘해체’하는 일은 종들 사이의 유전자를 뒤섞는 일(유전자 이식)에서 시작된다. 전통적 방식의 육종에서는 특별한 형질을 지닌 품종은 오랫동안 한쪽 방향을 향한 교배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었다. 종이 서로 다른 것들은 교배되지 않기 때문에 육종에서는 종이 섞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소와 양, 돼지와 염소, 옥수수와 벼가 서로 섞여서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 이식은 기술적인 장치를 통해서 한 종의 유전자를 기계적으로 뜯어내어 다른 종의 유전자와 섞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종 사이에서도 가능하다. 이 기술이 적용되면 박테리아-식물, 식물-식물, 식물-동물, 동물-동물 등 모든 종들 사이의 분명한 구분이 허물어지고 서로서로 섞여들어가 구분이 모호해지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생물학에서 종 사이의 구분이 항상 명확했던 것은 아니다. 생물종 분류체계의 기초를 놓은 린네조차도 비슷한 종과 종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전자 이식은 이와 같이 유사한 종 사이의 경계가 아니라 유사성이 전혀 없는 종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서 서로 섞는다는 점에서 자연 상태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농작물의 경우 이러한 유전자 이식 기술을 통해서 이미 수많은 품종들이 생겨났는데, 이들 품종에 이식된 유전자는 바이러스에서부터 동물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으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바이러스로부터 유전자를 이식받은 토마토는 병에 강한 품종으로 변신하고, 박테리아의 유전자는 토마토에게 제초제의 독을 이겨내는 성질을 부여한다. 넙치의 얼음방지 유전자는 토마토를 냉해에 강한 것으로 거듭나게 한다. 그밖에도 닭의 유전자를 받은 감자, 파리의 유전자를 이식받은 옥수수, 누에의 유전자를 지닌 감자, 중국 햄스터의 유전자가 이식된 담배, 반딧불의 유전자를 지닌 담배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식물들이 박테리아나 동물, 그리고 다른 식물들과 섞이고 있다.

동물종의 경우에도 이식되는 유전자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식물에서는 유전자 이식이 대부분 작물 생산성의 향상을 꾀하기 위해서 수행되지만, 동물의 경우에는 유전자 이식을 통한 변형이 가축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 외에 질병 연구용이나 인간에게 필요한 단백질 생산용 동물을 만들기 위해서도 이루어진다. 오히려 성장이 빠르거나 몸집이 큰 가축을 만들기 위해서 유전자를 이식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질병을 연구하는 데 사용할 동물이나 단백질 생산용 동물을 만들기 위해서 유전자를 이식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질병 연구용으로 유전자가 이식되거나 제거된 동물로는 이미 생쥐 외에도 도롱뇽, 토끼, 양, 염소, 소, 돼지, 조류, 물고기 등 다양한 것들이 나왔다. 단백질이나 헤모글로빈 등의 의약품용 물질 생산을 위해서는 양, 염소, 돼지, 토끼 같은 것들이 유전자 조작 품종으로 변형되었다. 전세계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복제양 돌리가 태어났을 때를 전후해서 만들어진 트레이시나 폴리 같은 양도 모두 의약품 생산용 유전자 변형 동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동물에서 이식 유전자로는 인간의 유전자가 사용된다. 동물과 인간이 서로 섞여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를 이식받은 동물은 인간 몸에서 생성되는 호르몬을 만들어내거나, 인간에게 적합한 장기를 만들어내는 기계적인 일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인간과 동물의 혼합이 일어나고 있음은 분명하다. 유전자를 이식받지 않더라도 동물과 인간이 서로 섞이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데, 이는 아직 실용화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실험실 수준에서 일어나고 있다. 동물 장기를 인간에게 이식하는 일, 인간 세포의 핵을 핵이 제거된 동물의 난자에 이식하는 일 같은 것이 그것이다. 동물의 혈액을 이용해서 인간의 조직이나 기관을 만드는 일 등도 거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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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나 동물의 유전자 조작으로 빚어지는 모호함은 아직은 시작 단계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래도 동식물계의 질서나 지구 생태계의 질서에 커다란 교란을 가져올 수 있다. 일부 사람들로부터는 양심의 고통이나 윤리적인 책임의식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관념이나 문화 자체를 뒤흔들 정도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이런 혼돈은 유전공학과 생식공학이 인간을 조작하고 인간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데 이용될 때에야 일어난다.

인간에 대한 조작은 체외수정으로 시험관 아기가 탄생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전통적인 가족관계나 인간관계도 조금씩 흔들려서 ‘증발’하기 시작했고, 도덕적.윤리적 판단기준도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여기에 체세포 복제기술이나 배아 줄기세포 배양기술, 수정란이나 인체에서의 유전자 조작기술이 가세하면서 그 추세가 강화되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기술로 불임부부와 동성부부가 아이를 얻고, 처녀와 총각이 아기를 만들고, 불치의 유전병이 치료되고, 인간의 수명이 크게 늘어나면 오랫동안 이어져오던 인간 육체의 변형이나 사회관계의 ‘해체’, 보편적 기준의 ‘모호해짐’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인간의 조작에 이용되는 기술로는 이미 시행되고 있는 인간 배아의 조작과 유전자 치료, 앞으로 시행될 것으로 보이는 인간 복제와 착상전 배아의 유전적 조작 등이 있다. 유전자 치료는 유전병이 어떤 특정한 유전자의 결함에 의한 것임이 판명되었을 때 인체에 정상 유전자를 주입해서 결함 유전자를 정상 유전자로 대치하거나, 대치까지는 못하더라도 정상 기능을 발휘하는 유전자를 통해서 신체 기능을 정상으로 만들려는 시술법이다. 그 중에는 성공한 것도 있지만 실패한 것도 있는데, 아직까지는 성공률이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나 유전공학의 찬양자들은 유전자 치료기술의 발달로 성공률이 크게 높아질 것이고, 그때가 되면 대부분의 유전병은 치유될 것으로 전망한다.

유전자 치료는 인간의 발생이 끝난 다음에 또는 탄생 후에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이다. 이때는 모든 세포에 결함 유전자가 들어있기 때문에 이들 세포를 모두 정상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되돌려 놓기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들 유전병을 가진 사람이 자식을 낳을 경우 자식에게 유전병이 계승되는 것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 말하자면 발생이 끝난 상태에서의 유전자 치료는 여전히 불완전한 치료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좀더 나은 그리고 좀더 완벽한 ‘치유’방법을 끊임없이 찾아왔던 현대의학이 이렇게 불완전한 유전자 치료에 만족할 리는 없다. 생명공학자들은 흠이 있다면 이런 흠을 없애는 방법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어디서 이 방법을 찾을수 있겠는가? 발생이 종결된 다음의 치료가 불완전한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면 발생 이전의 단계에서 치료를 시도하면 될 것이다. 다시말해서 유전자 조작을 발생이 시작되기 전의 수정란이나 초기 배아상태에서 수행하면, 예를들어 이 시기에 그 속의 결함 유전자를 정상의 것으로 대치하면, 세포가 분열함에 따라 모든 세포 속에 정상의 유전자가 들어가게 된다. 그 결과 유전병은 완벽하게 치료되는 것이다.

초기 배아 단계에서 유전병 치료를 위해 유전자를 조작하는 일이 이루어지려면 아직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와 유사한 일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다. 아기를 밴 여자들이 유전적인 기형아를 낳지 않기 위해 또는 자기가 원하는 성을 가진 아이를 낳기 위해 받는, ‘양수검사’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산전 유전자검사로 이미 일상적인 것이 되었는데, 이 검사에는 그 과정에서 초래될 수 있는 태아손상 위험과 유전적 결함을 지닌 태아의 낙태라는 께름칙한 문제가 항상 따라다닌다. ‘완벽’을 좇는 현대의학에서는 이 또한 해소되어야 할 문제임이 분명한데, 생명공학에서는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착상 전의 초기배아 상태에서 유전자 검사를 함으로써, 즉 착상전 유전자진단에서 찾아냈다. 착상전 유전자진단에서는 체외수정으로 생성된 초기배아로부터 세포를 떼어내어 핵 속의 염색체에 담겨있는 유전자의 결함여부를 검사한다. 그 결과 배아가 유전적인 결함을 지닌 것으로 나오면 배아는 폐기되지만, 결함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면 배아가 자궁에 주입되어 태아로 자라나게 된다.

착상전 진단법이 보편화되면 유전병은 아기의 탄생 이전에 차단되기 때문에, 살아가는 동안 유전자 변이로 인한 병에 걸리는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전자 치료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렇게 착상전 유전자진단을 통해 배아가 유전적인 결함이 있을 때는 폐기하고 결함이 없을 때만 발생하도록 하는 것도 생명공학 기술이 인간 생명의 형성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이것 또한 현대 생명공학으로서는 만족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여전히 결함의 유무에 따른 소극적인 선택만이 이루어지고 있지 치료라고 볼 수 있는 적극적인 시술은 없기 때문이다.

유전공학자들이 유전자를 특정 유전병과 연결시키는 정도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그만 멈추어 선다면, 이 상태에서는 배아선별을 통한 유전병 제거가 최상의 치료일 것이다. 그러나 생명공학자들은 결코 이쯤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이들은 인간의 ‘내부’를 완벽하게 알아낼 목적으로 인간게놈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30억개에 달하는 염기서열을 해독했고, 인간 유전자의 수가 모두 3만개쯤 된다는 것도 알아냈으며, 이제 이들 유전자의 특성을 모두 밝혀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 않은가. 생명공학자들은 이미 비만, 알코올 중독, 특정한 암, 알츠하이머병, 수명, 수면 등 각종 질병이나 생명현상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찾아냈다. 소아 돌연사에 관여하는 유전자까지도 알아냈으니 앞으로 생명공학자들은 거의 모든 유전자의 성질을 밝혀낼 것이다.

그러면 이들이 유전자의 성질을 밝혀낸 다음에 무슨 일을 하려 들까? 역사적으로 볼 때 지식과 기술이 존재할 때 인간은 항상 그것을 적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유혹은 오직 적용대상이 분명하지 않고, 비용이 너무 많이 들 경우에만 억제되었다. 분명한 대상이 존재하고 비용 부담이 너무 크지 않은 경우면 항상 실제에의 적용이 이루어졌다. “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시도”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임신한 여자가 착상전 유전자검사를 통해서 특정한 유전병의 유전자를 지닌 배아만이 아니라 알코올중독이나 비만 유전자를 지닌 배아를 임신하지 않겠다거나 소아 돌연사 유전자를 지닌 배아를 자궁에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우는 일어나지 않을까?

이미 산전 유전자검사의 경우에도 비만이나 알코올중독 같은 유전적 성향을 지닌 배아를 낙태하겠다고 하는 임부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럴 경우 배아선별은 특정 유전병의 배제나 성 선택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각종 유전적 특징을 배제하는 데에도 이용될 것이다. 이 경우 유전적인 선별은 소극적인 최소한의 배제가 아니라 적극적인 유전적 선택으로 넘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미 성을 선별하는 것이 적극적인 선택의 예를 보여주었지만, 특정 유전병이나 성의 차이라는 것은 아기가 태어났을 때부터 누구에게나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고, 그에게 평생동안 수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전병의 배제나 성의 선택은 적극적인 의지가 개입된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떠밀려서 이루어진 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비만이나 알코올 중독은 아기의 탄생시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아기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야 드러날 수 있는 것이고, 자라난 환경에 따라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러한 특징을 배제하는 것은 유전자를 조작하지만 않았을 뿐이지 초보적이긴 하지만 적극적인 아기 ‘디자인’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제 착상전 유전자진단 다음 단계로 생명공학에서 하려고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초기배아를 유전적으로 조작하여 ‘디자인’하는 것이다. 생명공학자들이 이미 소, 양, 돼지, 생쥐 같은 동물을 가지고 많은 실험을 거쳤고 다양한 성공사례도 얻어냈기 때문에, 인간 대상의 배아 유전자 조작을 기술적으로 아주 어려운 것으로 볼 단계는 이미 지나갔다.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에, 언젠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법적.윤리적 장애물이 제거되면 배아 ‘디자인’이 현실이 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초기에는 아주 간단한, 특정한 성질만을 지배하는 유전자에 대해서만 그것을 제거하거나 좀더 나은 것으로 바꾸는 시술이 행해질 것이다. 그리고 체외수정의 경우에도 그랬듯이 기술이 좀더 완숙해지면 배아 속의 인간의 각종 능력과 관계되는 유전자들이 더 나은 것으로 대치되거나 새로운 능력을 주는 유전자들이 주입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물론 여러 생물학자들이 경고하듯이 인간의 성질이 전적으로 유전자에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환경의 지배를 크게 받기 때문에, 배아 유전자 조작의 결과가 ‘디자인’을 완전히 반영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을 확률도 높다. 그러나 배아를 유전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지닌 부모는 대부분 그렇지 않은 부모보다 아기의 성장을 위해서도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줄 것이고, 이는 ‘디자인’된 아이가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갖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렇게 배아의 유전자 ‘디자인’이 시작된 후 수세대가 지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나온 미래 예측은 그것이 유명하다는 미래학자들로부터 나온 것이라 해도 절반도 들어맞지 않았다. 요즈음 세대 간격이 조금 길어졌으므로 한세대를 50년으로 잡으면 수세대는 300년 가까운 기간이 된다. 300년 후에 유전자 ‘디자인’이 초래할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어쩌면 공상과학영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현재의 가능한 기술을 외삽해서(extrapolate) 어느 정도 합리적인 예측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 리 실버라는 미국의 분자생물학자는 외삽법을 이용해서 꽤 설득력이 있는, 그렇지만 아주 섬뜩한 예측을 내놓았다. 그는 300년 후에는 유전적으로 섞일 수 없는, 다시 말해서 서로 생식이 불가능한 다른 인간종이 나타나리라고 예측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유전자를 '디자인'한다고 하면 인간의 23쌍의 염색체를 뒤져서 원치않는 유전자는 개조하거나 제거하고 원하는 유전자를 그 속에 새로 주입하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새로운 유전자가 염색체 속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염색체 속의 아무런 기능도 못하는 부분이 새로 들어온 유전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떨어져나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특정한 기능을 지배하는 부분이 그 과정에서 떨어져나가면 기형의 아기가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 주입을 아무리 조심스럽게 한다고 해도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데, 이 문제를 피하는 길로서 리 실버가 예상하는 기술은 인공으로 염색체쌍을 만들고 그 속에다 원하는 기능의 유전자를 집어넣어서(유전자팩) 핵 속에 주입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디자인’된 사람의 염색체쌍의 수는 23개 아니라 24개가 될 것이고, 이 사람은 23개의 염색체쌍을 지닌 보통 사람과는 들어맞지(compatible) 않기 때문에 이들간에 서로 생식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결국 수세대에 걸친 유전자 ‘디자인’의 누적은 지구상에 서로 다른 인간종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더 오랜 기간 누적되면 리 실버의 예언대로 인간종은 두 종류만이 아니라 더 많은 종류로 분화될지도 모른다.


4

인간이 서로 생식이 안되는 많은 종류로 분화된다는 예측이 섬뜩하게 느껴진다면, 인간의 수명이 유전공학 덕분에 수백년으로 늘어난다는 예측은 어떤 충격을 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종이 서로 다른 너댓 종류로 분화하리라는 이야기를 접하면 상당한 전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수백년 동안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도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을까”하는 기대심리를 가질 사람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수백년까지 연장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수명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논란거리다. 이들 중에서 수명을 늘릴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육신은 쓰면 쓸수록 닳아 없어지는 기계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기능이 중단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들이 인간 수명에 부과하는 최대 한계는 120년 정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고 닳아 없어질 육체를 가지고 산다는 생각을 숙명론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유전공학의 기술을 가지고 수명을 수백년 이상으로 늘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수상 토니 블레어의 유전공학 자문을 맡고 있는 존 해리스는 인간이 1200살까지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텔로머라제를 이용해서 염색체 끝부분을 늘리는 데 성공한 미국의 라이트라는 유전공학자는 앞으로 20년 후면 수명을 우리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풍부한 영양공급과 질병 치료 중심의 수명연장 방식으로는 120세라는 한계치를 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세포와 염색체 수준에서의 조작으로 수명연장을 하게 된다면, 한 사람이 살 수 있는 기간이 120년을 껑충 뛰어넘게 될지 모른다. 수명 연구자들은 어떤 생물종의 생존을 위해서는 그 종의 어떤 개체가 영원히 존재하는 것보다는 그 개체가 후손을 남길 때까지 사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은 충분한 수의 자손을 낳고 그 자손이 완전히 성장할 때 쯤이면 죽는 것이다.

동물들이 이렇게 자손을 남기고 죽는 것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슬프게 받아들이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인간의 경우에는, 현대에 들어와서 더욱 더 죽음을 대단히 슬픈 것, 가능한 한 오랫동안 회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든 생명 연장을 위한 기술을 일단은 좋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얼마 있으면 죽을 급성 백혈병 환자를 균이 전혀 없는 무균실에 집어넣고 산소를 공급하면서 얼마간이라도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환자를 위한 최상의 처치로 받아들여진다. 의사들 중에서 이러한 처치가 옳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심장병을 앓는 사람에게 사고로 ‘뇌사’상태가 된 사람으로부터 심장을 떼어내서 이식해주는 것은 의사와 보호자로선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되었다. 그리고 장기 제공자나 그 보호자는 아주 선한 일을 한 것으로 찬양받는다. 

수명연장이 무조건 좋은 일로 받아들여지는 문화적 토양은 유전자 조작이라는 수단도 마땅히 사용할 만한 것으로 만든다. 유전자 조작을 통한 수명 연장 연구는 생쥐 같은 실험동물을 대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유전공학자들은 먼저 수명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규명하고, 이들 유전자를 조작함으로써 수명을 조절하려 한다. 여기서 어려운 문제는 수명 조절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수가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그 수는 대략 7000개 정도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것을 모두 조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생쥐의 경우 몇 개의 유전자만을 조작해서 수명을 크게 늘리는 데 성공한 사례가 있는데, 이 사례를 보면 유전자 조작을 통한 수명연장이 아주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맞춤아기’를 만들려는 부모가 위험을 무릅쓰고 유전자 몇 개를 조작해서 수명 연장 ‘디자인’을 하고 이렇게 태어난 아기가 아무 탈 없이 자라게 된다면, 이 기술이 보편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수명연장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더 고무적인 일이 있다. 이것은 텔로미어를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텔로미어는 염색체 끝에 붙어 있으면서 세포분열 때마다 점점 짧아져서 어느 한계에 달하면 더 이상 세포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작용을 한다. 모든 체세포는 텔로미어의 지배를 받고 있고, 텔로미어가 짧아져서 분열을 더 이상 하지 못하면 죽고 만다. 그리고 세포들의 죽음은 결국 인간 개체의 최후를 가져온다. 그러나 텔로미어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예외적인 세포들이 있다. 생식세포와 암세포가 그것이다. 이것들의 경우에는 텔로머라제라는 효소가 세포분열이 일어나면서 짧아진 텔로미어를 계속 복구시켜준다. 이에 따라 이들 세포는 죽지않고 끝없이 분열하게 된다. 암세포의 경우에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신체 자체가 암으로 파괴되어 종말을 맞을 때까지. 그렇다면 염색체 끝의 이 텔로미어를 복구시키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미국의 텔로미어 연구자인 라이트는 그렇다고 말한다. 텔로머라제를 이용해서 생식세포나 암세포의 경우와 같이 짧아진 텔로미어를 계속 복구해주면 수명을 끝없이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수명연장은 사회문화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연금이나 사회보장 비용을 둘러싼 세대간의 갈등 같은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많이 나타나겠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아이들이 거의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점과 출산과 사망이 전체주의적으로 통제 되리라는 점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후손을 남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손자가 커갈 때쯤이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자의 손자의 손자가 태어났을 때에도 죽지않고 살 수 있다면 후손을 남기는 것, 아이를 낳는 것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어떤 사회, 어떤 문화 속에서 살아가게 될까?

우리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죽음을 ‘치유’할 수 있게 되거나 노화를 가능한 한 천천히 진행되도록 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백년 동안 생명을 유지한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일까? 그 결과 중의 하나는 생명의 탄생에 대한 무관심 또는 생명의 탄생이 지닌 신비스러운 감정의 상실일 것이다. 인간이 영원히 산다면 탄생은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다. 탄생이란 사멸의 또 다른 면이다. 죽음이 있어야만 탄생이 신비스럽고 경탄할 만한 일이 된다. 우리가 아기라는 한 생명의 탄생을 기뻐하고, 아기가 커가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고, 또 그 가운데에서 생명의 신비와 귀중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모두 언젠가는 사멸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멸하기 때문에 탄생이 소중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신비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유럽과 같이 노화된 세계에서 출산율이 점점 낮아지는 이유는 그들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에 도취되어 아기를 키우는 것을 귀찮아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오래 살 수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새 생명의 탄생에 대한 무관심의 증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멸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 세계는 청년은 없고 노년만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거기에는 노인들의 오래된 경험만 있지 아이들이나 청년들의 새로운 시작, 진정한 창조란 없다. 그곳은 청년들의 참신한 시도가 살아남기 어려운 세계이다.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면서 온갖 사물을 호기심을 가지고 대하고, 새로운 것을 대할 때 놀라고 멈추고 다시 시도하고, 기발한 생각을 가지고 사물을 대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노인의 오래된 경험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알고있는 것, 새로울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세계가 바로 죽음이 정복된 세계이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는 죽을 수 없도록 ‘저주받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현대어를 사용해서 이야기하면 이들은 죽음을 가져오는 유전자를 세포 속에 지니지 않은 채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죽을 운명을 가진 사람들 속에 섞여서 살아가는데, 죽어야 하는 사람들이 삶의 온갖 즐거움을 누리면서 생기발랄하게 살아가는 반면에, 영원히 살도록 운명지워진 이들은 아무런 자극도 받지 못하고 내일에 대한 두근거림도 없이 하루 하루를 보낼 뿐이다. <걸리버여행기>에서 이들 영생자들은 삶에 수반하게 마련인 희노애락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면서 “영원히 살도록 저주받은 인생”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스위프트는 이때 이미 과학기술의 발달로 나타날 수 있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우리가 수백년을 살 수 있게 되면 바로 걸리버 여행기의 죽을 수 없도록 저주받은 사람들처럼 아무 생기도 없이 생명의 탄생에 대한 경탄도 없이 살아가게 될지 모른다.

또 한가지 결과는 죽는 사람이 없어짐으로써 초래되는 인구 폭발을 조절하기 위해 출산을 조절하고 죽음까지도 인위적으로 도입해야 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오직 전지구를 통제할 수 있는 전체주의 정부에서나 할 수 있을 텐데, 영국의 노화연구자인 영국의 톰 커크우드는 22세기에 인간이 죽음을 정복한 사회를 이렇게 서술한다. 죽음이 정복된 초기에 사람들은 여기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끝없는 자기애를 개발해서 무한한 삶에 적응하게 된다. 이들은 남자건 여자건 혼자 살고 가끔 만나기만 할 뿐이다. 부부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가족도 완전히 해체된다. 한 남자는 어쩌다 죽을 때까지 많은 여자를, 한 여자는 많은 남자를 만났다 헤어지는 일을 되풀이한다. 생식은 엄격하게 통제된다. 유전자 형에 따라 한명에서 세명까지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할당받는데, 할당받은 아기를 모두 낳으면 이 사람은 그 자리에서 40년이 지난 다음에 안락사하도록 작용하는 약품을 주입받게 된다. 물론 아기를 낳지 않는 사람은 혼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아기를 낳으면 죽어야만 이유는 분명하다. 인구조절을 위해서인 것이다.


인간게놈 프로젝트의 완성과 유전자의 해독 작업에 기초한 생명공학은 인간의 육체와 인간관계의 ‘증발’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방향으로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21세기에 이 방향으로의 변화는 빠른 속도로 일어날 것이다. 오래 살고 싶은 사람들, 자신의 아이가 뛰어난 능력을 갖기를 바라는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경제적.사회적 힘을 가진 사람들은 이 변화를 환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변화를 원치 않는 사람들, 원한다 해도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까? 두 부류 사이의 심각한 갈등과 충돌, ‘증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찬반진영의 대립과 혼란 등등 앞으로 벌어질 온갖 사태를 상정할 수 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이 빗나갈 수는 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인간게놈 프로젝트의 완성과 생명공학이 인류를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뇌사란 사실 의사들이 장기이식을 합법적으로 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다. 뇌사판정을 받은 사람도 육체는 보통사람과 다름없는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람을 죽은 것과 같은 상태로 보는 것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서양 이원론의 산물이다. 생명공학자들은 뇌사자로부터 공급되는 장기가 크게 부족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돼지를 유전적으로 조작해서 장기를 얻으려 한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는 배아로부터 줄기세포를 분리해서 필요한 장기를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이들 생명공학자들이 동물이나 줄기세포로부터 장기를 얻으려는 이유가 뇌사자를 죽여야만 하는 데서 오는 윤리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기부족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뇌사자를 죽은 상태로 보기 때문에 뇌사자의 가슴을 갈라서 심장을 꺼내는 것을 단순한 시술로만 생각하지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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