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냐니, 아냐니.., 내가 안 그랬단말요, 안했단 말요.”
여인은 울부짖었다.
우물가에 털썩 주저앉아 헝클어진 머리를 흔들며 우는 여인의 너덜너덜한 적삼 위에 눈은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삶은 살아왔다고 하얗게 눈 덮인 어깨를 거짓의 계절이 그만큼 어둡게 휘감아 내리고, 끓어 나오는 뜨거운 분노에 눈은 녹아 검정치마엔 눈물인 듯 땟국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주변엔 깨진 물 항아리가 뒹굴고, 파편들은 여기저기 흩어지고 동네 아낙들은 성난 염소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40살이 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한 사내는 동네의 여러 집을 돌면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이가 같은 사내, 얼굴도 목소리도 아버지와 비슷한 그가 늘 불쌍해 보였다.
어려서부터 반벙어리였던 그는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아이들을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소리를 질렀다.
차츰 아이들은 그의 성난 눈빛을 무서워하게 되었고 더 이상의 놀리는 일도 없어지면서 아무도 그의 곁에 가까이 가는 아이가 없었다.
언제나 혼자서 외로워 보이는 그는 길을 걸을 때도 끙끙 속으로 신음하듯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사내가 이상해 사람들은 그를 멀리 했다.
나는 그가 가여워 가만히 다가가면 내게 씩 웃어보이곤 했는데, 그것이 사내가 내게 베푸는 유일한 친절이었다.
언젠가부터 마을에 낯선 여인이 나타났다.
당시에는 구걸하는 떠돌이 여인들이 많은 세상이었지만 그녀는 눈에 띄었다.
작은 키에 유난히 굵고 검은 눈썹의 흰 얼굴은 엉성한 새집 같은 새까만 머리를 이고 다녔다.
봄여름 다 가도록 변함없는 흰 적삼과 두꺼운 검정치마는 사람과 옷 사이의 견고한 신뢰감을 주는 듯 그녀는 누더기 속에서 안심했다.
서른을 갓 넘었을 거라 사람들은 수군거렸지만 늘 눈가에 낀 눈곱과 듬성듬성한 누런 앞 이빨과 비굴한 그녀의 말투는 나이가 들어보이게 하는 것이어서 실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말을 할 때면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맹신했는데, 그녀의 피항적인 말투는 오랫동안의 떠돌이 생활에서 얻은 무의식의 안도감을 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차츰 호의를 느끼고 여인은 우리 동네를 자주 찾아와 오래 머물곤 했다.
사내는 동네의 뒤쪽 산기슭의 토담집에 혼자 살고 있었다.
그가 사는 곳은 뒷골 여우가 우는 곳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잘 가지 않았고, 산등성이 그늘에 일찍 식어버린 햇볕만이 잠시 머물다 가는 어둡고 으슥한 곳이었다.
불이 켜있는 것이 좀처럼 보이지 않던 단칸의 초가집 지붕 밑 들창에 언젠가부터 불빛이 보이고 두런두런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뒷산 여우가 구시렁거린다고 했으나 그건 사람의 소리, 남자와 여자의 말소리였다.
사내가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던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뒷산 여우의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인은, 아침마다 물동이를 이고 동네 앞 우물에 내려와 물을 길어갔다.
커다란 항아리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뒤뚱뒤뚱 언덕길을 올라가는 그녀의 걸음은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더 이상 구걸하는 떠돌이의 걸음이 아니었다.
그녀가 내 딛는 보폭은 자신의 걸음 안에서 확고했고, 그동안 세상에서 잃은 것들에 대하여 보상을 받는 확신이었다.
그렇게 여름이 가을이 그들의 토담집을 다녀가고, 좁은 지붕은 하얀 눈으로 겨울 내내 점점 볼록하게 불러갔다.
봄은 오고 토담집에서 마을 아래로 내려오는 골목, 매화꽃 살구꽃 그늘 흘러내리는 길에 갓난아이의 울음이 떠오고 사내의 수줍은 웃음도 실실 흘렀다.
그들이 어떻게 만나서 부부가 되고 아기가 태어났는지 알 수 없었던 어린 나는 집 뒤안 토굴 속에 사는 토끼의 가족을 들여다보며 궁금해 했다.
동네 아이들을 향해 소리 지르던 사내의 무서운 눈빛에서 부드러운 미소로 바뀐 얼굴 위로 다시 한 번 지나가던 계절의 불투명한 기압골의 끝자락 어느 날, 앞 냇가 수양버들이 냇물에 비치던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검붉은 흙탕물 위에 사나운 머리채를 소리소리 흔들던 날 그들의 토담집에서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이들의 돌무덤이 있는 뒷산 떨밭의 못 보던 돌무덤 위에 어스름이 일찍 내려와 마을의 저녁 연기를 모두 삼키고 사람들의 말까지 흡수해버리는 조용한 겨울은 다시 찾아왔다.
뒷산 봉우리에선 돌덩이 같은 침묵이 굴러 내리고 사내와 사람들 사이에는 꿈같은 설움의 비율로 서로를 응시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비밀이 커져갈 때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쌀을 도둑맞는 집들이 있었고, 조금씩 훔쳐간다는 소문이었다.
사람들의 의심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떠돌이 여인에게 쏠렸다.
그녀가 이전부터 쌀을 씹어 먹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잘 띄었던 것이다.
여인의 이빨이 누런 것도 평소 생쌀을 먹으면서 잇몸에 감창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우물에 물을 길러 내려온 그녀를 마을 아낙네들이 다그치던 날 밤 그녀의 울음소리 위로 밤새 눈은 쌓이고, 여인의 울음은 순백의 눈 안으로 가물가물 스며들어갔다.
그 후 동네에서 그녀를 본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사내는 아이를 잃은 여인의 슬픔과 마을 사람들의 의심으로 떠는 분노를 곁에서 다독여줄 수는 없었다.
아내가 사라진 길 눈 위에 찍힌 익숙한 발자국은 그들이 두 해 동안 속해있던 꿈같은 세상으로부터 떠나가기 싫은 듯 한낮이 되어도 녹지 않고, 이해와 현실의 파악의 경계에서 가공되지 않은 사내의 원초적 본능 같은 뜨거운 발자국 아래서도 스러지지 않았다.
앓아누운 사내의 토담집 문을 며칠 후 머슴살이 집 주인이 열었지만 방안엔 그가 없었다.
밤늦도록 뒷산 골짜기에서, 등성이를 넘어가는 큰골에서 들려오던 짐승처럼 울부짖던 소리가 주인 영감을 아침 일찍 그의 집을 찾아오게 한 것이다.
간밤 내내 내리던 눈으로 모든 길은 다 덮이고, 눈 시리도록 하얀 세상의 푸른 하늘에 솔개 한 마리가 떠서 빙빙 돌다 이쪽의 순백의 세상에 울음 하나를 떨어뜨리고 공허한 세상 저쪽으로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다.
-배홍배 산문집 <내마음의 하모니카>에서
*이광수 원작 소설 영화 유정에서 친구의 딸 정임을 정신적으로 사랑하는 최석이 눈 덮인 바이칼 호수의 설야를 헤매며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간다. 아냐니의 벙어리 남편 그 사내도 같은 길을 따라갔을 것이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1번 겨울날의 환상 제4악장의 안단테 루그브레.. 눈보라치는 설원을 애처롭게 느릿 느릿 걸어가는 두 사내의 모습이 오버렙된다.
https://youtu.be/RsNDt-ANjs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