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유식의 무주
유식 공부의 궁극적 목적은 4종 열반의 증득이다.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본래자성청정열반은 본래 갖추어진 진여본성(眞如本性)을 가리키고, 나머지 3종은 수행을 통하여 증득(證得)하는 열반이다.
유식에서는 이러한 열반을 증득하는 것을 전의(轉依)라고 부른다. 전의란 허망한 변계소집(遍計所執)인 염법(染法)과 진실한 원성실성(圓成實性)인 정법(淨法)이 의지하는 의타기(依他起)를 전환시켜서 두 가지 염법을 버리고 두 가지 정법을 얻는 것이다. 즉 전의란 버릴 것을 버림으로써 얻을 것을 얻는 전환인데, 염법(변계소집)을 정법(원성실성)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버릴 것은 두 가지 염법(染法)인데, 곧 아뢰야식에 있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다. 번뇌장이란 아상(我相)에 집착하는 것이고, 소지장이란 법상(法相)에 집착하는 것으로서, 아상과 법상이 적멸한 열반을 얻는데 장애가 되므로 이렇게 부른다. 번뇌장을 전환하면 번뇌로부터의 해탈인 대열반을 얻고, 소지장을 전환하면 미혹을 끊고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다.
4종 열반 가운데, 둘째 유여의열반이 번뇌장에서 벗어난 진여(眞如)이고, 넷째 무주처열반이 소지장에서 벗어난 진여이다. 첫째 본래자성청정열반은 모든 법상(法相)의 청정한 본성인 진여이고, 셋째 무여의열반은 유여의열반에서 아직 남아 있는 미세번뇌인 생사의 고통을 소멸한 것을 말한다. 일체중생에게는 모두 본래자성청정열반이 갖추어져 있으며, 성문․연각의 이승(二乘)은 앞의 세 열반을 얻을 수 있으나, 오직 세존(世尊)만이 4가지 열반을 모두 갖춘다고 하여, 넷째 무주처열반을 최고의 열반으로 간주하고 있다.
오직 부처만이 얻는다고 하는 최고의 열반인 무주처열반은 법상(法相)에의 집착인 소지장을 소멸한 열반이다.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는 무주처열반을 설명하기를 “소지장을 벗어난 진여인데, 대비(大悲)와 반야(般若)가 늘 도우고 있다. 이 때문에 생사(生死)에도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不住生死涅槃] 이락유정(利樂有情: 중생에게 이익과 즐거움을 주는 보살)이 영원토록 (대비와 반야를) 사용(使用)하지만 늘 고요하다. 그러므로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라 하고 있다.
무주처열반의 본질은 대비(大悲)와 반야(般若)라는 것인데, 반야는 생사에도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고, 대비는 중생을 이익되고 즐겁게 하는 것이다. 대비와 반야는 소지장을 벗어난 진여(眞如)의 두 가지 특징을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반야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반야는 곧 생사와 열반의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무주처(無住處)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적어도 무주처열반이라는 이름으로 보건데 대비 보다는 반야가 보다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비(大悲)도 무주상(無住相)의 반야에서만 실현되는 것이다. 유식에서도 ‘무주(無住)’가 최상의 깨달음인 무상보리(無上菩提)의 본질임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미륵(彌勒)이 지은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서는 무주(無住)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무엇을 일러 반연 없고 머묾 없음[無攀無住]이라 하는가? 이른바 모든 애착이 영원히 없어지고 욕망을 떠난 적멸의 열반과 멸진정(滅盡定)이다. 까닭이 무엇인가? 반연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번뇌에 얽히는 것이고, 머문다는 것은 번뇌에 빠져들어 잠드는 것이다. 그곳에서 이 둘 모두가 없으면 반연 없고 머묾 없음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열반에는 반연도 없고 머묾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 상(想)을 일러 반연이라 하고, 수(受)를 일러 머문다고 한다. 만약 이곳에서 둘이 모두 없다면 그곳은 반연도 없고 머묾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멸상수정(滅想受定)에는 반연도 없고 머묾도 없음을 밝힌다.”
여기에서 머문다[住]는 것은 번뇌에 빠져들어 지혜가 잠드는 것 혹은 수(受)를 가리키고, 반연한다[攀]는 것은 번뇌에 얽혀 매이는 것 혹은 상(想)을 가리킨다. 『유가사지론』의 이론적 맥락에서 부여된 독특한 뜻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