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대통령 선거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진 선거’
1956년 5월 15일 제3대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는 1953년 3년간의 전쟁이
정전협정을 통해 막을 내렸지만, 간간히 총격전은 우발적으로 지속되는 가운데
국내사정은 민주주의가 실종되고 전쟁복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치러졌다.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듯 “민주당”쪽에선 “신익희”씨가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들고 나와 “서민”들에게 크게 어필을 했는데..당황한
“자유당”쪽에선 ‘갈아봤자, 더 못 산다!’는 구호와,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더 잘 먹는다는
구호까지 들고 나왔다.
(이 말은 사실 부정행위와 부패정치를 해본 놈이 더 잘 한 다로 이해하면 정답인데,
”자유당“이나 현 세태에선 자주 사용 됐다.) 야당인 민주당과 여당인
자유당 사이에 불꽃 튀는 경합 속에 ”다 그놈이 그놈이여!“등
”민주당의 인기를 깍어 희석하려 안간 힘을 썼는데,
지금도 이 말은 흔히 사용 되고 있다. 특히 “새누리당”쪽에서
전매특허로 사용하고 있었다. "다 , 그놈이 그놈이여."
그러니까 골치아프게 고르지말고 걍 "새누리" 찍어 !
신익희 후보가 불행히도 유세도중 열차 안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급서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민주당“은 일시에 ”초상집‘이 됐고, “자유당은
”이승만“을 ”하늘이 낸 대통령이라고 치켜세우고 선거에 돌입 했지만,
정작 선거의 승패는 “이기붕(李起鵬)”과 “장면(張勉)”의 부통령 선거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었다.
“민주당”도 대통령 선거는 접고 “부통령선거에 ”올인“하게 됐다.
관권 개입과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치러진 선거 결과,
이승만 대통령이 50%가 넘는 득표율로 당선되었지만,
부통령 후보에는 민주당의
”장면(張勉)“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것은 설령,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나이 많은 대통령의 유고 시
부통령이 대통령 직을 승계하도록 규정한 헌법으로 인해
81세의 대통령을 모신 자유당은 큰 충격이 었다.
사실 그들은 ”이승만“의 그늘아래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친일파“들로서 늙은
”이승만“으로선 불안하기 짝이 없어 ”후계“로 ”이기붕(李起鵬)을 내 세웠지만
“이기붕”의 건강만큼이나 이 또한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또, “이기붕”의 妻 “박 마리아”의 치맛바람은 여성계는 물론,
政界를 흔들고도 남았고 그의 큰아들 “이강석(李康錫)”은 “이승만‘의
양아들이라 칭하고 ”황태자“행세를 톡톡히 했다.
“이강석”은 미국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미국에서 도 과거 “이승만”처럼 “황태자”행세를 했고,
당시 금발의 미녀 육체파배우 “킴 노박”에게
“프로로즈”를 했다가 거절당하므로 써 국가적 망신을 샀다.
그러나 “이강석”은 아버지 “이기붕”과 어머니 “박 마리아”하곤 완전 다른,
정직하고 곧은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1960년 4,19가 일어나자 모든 것을
체념한 “이강석”은 일가족, “이기붕, 박 마리아, 동생 이강욱”을 모아놓고
권총으로 사살 후 자신도 목숨을 끊은걸 로 보아
몹시 강직했던 것 같다.
또 다른 충격은 진보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曺奉岩)의
200만 표가 넘는 득표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낙승이 예상되었지만,
서울에서 이승만의 득표율은 투표자의 3분의1밖에 되지 않았고,
대구·진주·울산·진해에서는 조봉암이 이승만보다 많은 득표를 했다.
또한 경북에서 신익희의 지지표로 추측되는 무효표와 조봉암의 득표를
합친 표의 수가 이승만의 득표수를 앞질렀다.
진보당은 아직 창당도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진보당이 창당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갈 경우 4년 후의 선거 결과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자유당”폭력배들이 “조봉암”운동원들을 구타하고 벽보를 훼손 하는 등,
온갖 만행을 다 저질렀음에도 많은 득표를 한 것은 민심이 이반 됐다는
증거 이므로 부정선거 외에는 이길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내무부 장관”최인규 가 부정선거로 조작을 한 선거였다. 개표장에는 원칙대로
각 후보 진영에서 개표 참관인이 참석하게 되어 있는데, 참관인을 폭행하여
개표장이 아닌 병원으로 실려 가니, “조봉암”선생의 개표 참관인들은
모두 겁을 먹고 큰 선거구에서 참관을 하지 못했다.
조봉암의 200만 표가 넘는 득표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뒤따랐다.
조봉암의 지지자들은 “민주당의 유석”조병옥“과 낭산 ”김준연“이 ”조봉암“을
지지하느니 이승만을 지지하는 편이 낫다고 하면서 진보당의 표를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에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졌다’고 주장했다.그것은 개표장에
진보당 개표원이 "자유당원"의 폭력으로 공석이라 민주당에서
지켜주지 않으면 멀쩡한 표도 무효표 처리가 되어
득표가 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3·15 부정선거로 인해 61년 교수형에 처해진 최인규 전 내무부 장관은
56년 선거에서 엄청난 부정이 자행되었으며,
부정이 없었다면 조봉암이 승리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그는 3·15 부정선거가 기획된 것은 부통령 선거 때문이 아니라 조봉암의
선전 때문이었다고 했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한국사회 내부에서 자본주의와
이승만 정부에 대한 염증이 표출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물론 조봉암의 기호가 1번이었기 때문에 많은 득표가 가능했으며,
조봉암에 대한 지지표의 대부분은 신익희에 대한 추모 표라는 주장도 일리는
있으나 그것은 “자유당”이나 “민주당”의 “아전인수”식 분석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낙선 한 “조봉암”선생을 “이승만”추종자들은
1958년, 정치적 걸림돌이라 하여 진보당의 조봉암 당수를 간첩 혐의로 투옥 후
사형시키기에 이릅니다. 그것은 “조봉암선생의 ”약력“에도 기록 됐듯이
공산계열의 운동과 ‘공산주의”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신 분입니다.
선생은 크고 작은 투옥생활을 통해 “공산주의의
허구를 깨닫게 됐고 ,
남과 북의 취약점을 누구보다 더 잘 앎으로 ”평화통일“론을 내 놨지만....
오로지 북진통일 주장만이 팽배했던 대한민국에서 이승만 쪽의 악랄한
극렬주의자들(친일파들)은 “조봉암”선생을 빨갱이를 두둔하는 “꼭두각시”라고
맹비난하며 그를 “빨갱이”로 몰아 사법살인을 자행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조봉암 선생을 북한의 꼭두각시로 보는 이는 한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를 어지럽게 하는 위인들은 대부분 이들을 본받은
“친일파”와 그 추종자의 후예들입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1950년대 말 이승만의 최대 정적이었습니다.
1956년에 치러진 3대 대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 선생은
유효표의 30%가 넘는 216만표를 득표했습니다. 당시 이승만과 자유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선거풍토에서 30%는 엄청난 이변이었습니다.
“조봉암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조봉암의 등장으로 이승만의 장기집권이 위협받자,
이승만 정부는 죽산 조봉암 선생과 진보당이 ‘평화통일론’을 주장해 대한민국의
국시인 북진통일을 위배했으며, 북한이 밀파한 간첩과 접선해 ‘폭력혁명을
기도’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상식적으로 “평화”통일을 외치는
평화세력이 “폭력”혁명을 기도하였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은설득력이 없었느데
바로 이때 지축을 흔드는 간첩 " 양명산 사건이 터 졌다 ,
사건의 핵심은 죽산의 경력을 이용, 죽산이 북으로 부터 "양명산" 을 통해
"공작금을 받아 정치자금으로 사용했으며 , "북의' 지령대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
그러나 양명산은 법정에서 진술을 여러 번 번복하여 ,
검찰들을 당혹케 했으며 ,
" 죽산의 변호를 맡은 변호인단은 양명산이 관제(官製 ) 빨갱이 라는 것을
밝혀냈는데 , 양명산 은 " 양 이섭 으로 " 미정보국 (HID)
공작원 이라는 사실도 밝혀내기도 했다 .
이 사건은 최초의 " 관제빨갱이 " 사건 이 었다 .
후에 이 사건이 본보기가 되어 군사독재정권 에선
자주 사용하는 " 메뉴'가 되기 도 했다 .
사법부가 반세기 만에 ‘사법살인’을 인정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는 20일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한
죽산(竹山) 조봉암(1898~1959)에 대한 재심에서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전원일치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따라 진보당을 창당한 조봉암은
사형 집행 52년 만에 간첩 누명을 벗게 됐다.
조작된 관제 간첩 단 사건은 그 뿌리를 진보당 에 두고 있습니다.
1958년 죽산 조봉암 선생 체포 1개월 만에 진보당은 전격적으로 등록 취소되어
해산 당했으며, 조봉암 선생에 대한 재판은 채 2년이 되지 않아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결국 1959년 7월 31일, 진보당 당수 조봉암 선생은
형장의 이슬로 산화했습니다. 4.19 혁명을 불과 몇 개월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물론 진보당과 조봉암 선생에 대한
모든 혐의는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공산당 을 청산하고
초대 농림부 장관 에 취임하다
조봉암선생의 약력은 아래와 같다
농지 개혁법 , 양곡매입 법 ,은
일본인의 농지수탈과 富農의 행패로 혹사당한
소작인과 빈농들에겐 희망의 법이요 ,
광명의 빛으로 떠올랐다 .죽산의 진보적 농정은
국민의 상당한 신뢰로 자연스럽게 "이승만의 오만과
독선적인 독재를 비판하게 됐고 ,
1952년 전쟁의 와중에 치뤄진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아주 근소한 차로 낙선됐다 .
그러나 이때부터 죽산은 "이승만의 킬러 "로 부상 , 이들을 불안과 초조로
얼어붙게 했다 . 그후 1956년 다시금 제3대 대통령선거에 진보당 당수로
출마 하므로 써 " 수구와 보수 일변도 의 정국에 "진보의" 기치를
내 걸음으로써 한국 憲政史에 새 지평을 열었다 .
그러나 이승만 에겐, 이때의 불안한 승리가
1960년도 의 제4대 대통령 선거가 큰 부담 이오 ,
위기로 또다시 부상했다 . 이즈음, “이승만”의 생일 때는 3월인가?
몹시 추울 때 인데, 학생들을 동원시켜 “이승만 대통령” 83회 탄생기념“이란
팻말을 들고 서울시내 곳곳마다 가두에 학생들을 배치,
”이승만“이 ”롤스로이스“차를 타고 손을 흔들고 지날 때 함성을 지르며
”뺀드“가 울려 퍼지고 태극기와 탄생기념 팻말을 들고 축하를 했다.
그리고 그날은 휴교를 했다. 완전 ”임금이요,“ 왕”이었다.
북한만 “우상숭배”를 한 것으로 알면 오산이다.
이승만도 우상숭배를 강요했다.
다만, 국민 축하라는 말로 희석 했을 뿐....
분명한 사실은 우리 역사에서 있었던 수많은 “종북공세”는 거의 대부분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솝우화에 양치기 소년도 거짓말을 세 번 하면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종북 거짓말은 세 번, 네 번도
아니고 무려 70년 가까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는 문제가
생길 때 마다 국민은 그걸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역사적으로 본 1950년 국민보도연맹 사건
우리 역사는 학계에선 20만명, 최대 100만명의 무고한 양민을 잔혹하게 학살한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8년 제주 4.3 항쟁과 여순항쟁 관련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반공단체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 12월, 한시적 법안으로 국가보안법을 만들면서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 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익세력은 보도연맹 실적을 위해,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까지 마구 가입시키면서
보도연맹원은 무더기로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원의 수를 채우기 위해 비료와 밀가루 등을 미끼로
보도연맹 가입을 유도하였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린다고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1950년 초에 보도연맹의
회원 수는 이미 30만 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글을 모르는 일반 농민들과 심지어는 10대 중 고등학생들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들은 “빨갱이” 누명을 벗으려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였지만
6.25 전쟁이 터지자 도리어 “확실한 빨갱이”로 몰려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집단학살 당하였습니다. 6.25 전쟁에서 한-미가 패퇴를 거듭하자 두려움에 질린
나머지 무고한 양민들을 무리로 학살하는 반인륜적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승만 정권의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깡패들이 최대 100만 명까지로 추정되는
집단학살을 자행한 배경은 “보도 연맹원들이 정말로 종북 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억울하게 학살당한 보도연맹원들이
무죄임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오늘날 최대 100만명에 달하는 “보도연맹원”의 피해자들이 종북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을 죽일 때는 “빨갱이일지도 모른다”며
마구 죽였는데,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나오니 모두가
무고한 양민이었던 것입니다. 종북사냥의 실상은 무고한 양민에 대한
잔혹한 학살이었습니다. 잔혹한 국가범죄였습니다.
냉전적 사고방식 의 산물
이때는 제 1야당인 민주당의 " 대통령후보 " 신익희 가 유세도중 열차안 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급서"하여 야당 대통령후보는 진보당의 " 죽산 조봉암 선생으로
단일화 됐을 때 의 일이었다 . 그러나 민주당의 " 조병옥 , " 김준연 '은
"이승만의 장기독재집권은 용인할 지언 정 ,
" 죽산 조봉암은 지원 할 수 없다는 냉전적 사고방식 속에 죽산 조봉암은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제거 되는 음모가 실현 되도록 방관 했다는 사실이다 .
“조봉암”선생이 가신 후 우연인지,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조병옥”이 나왔고, “자유당”엔 기력도 없는
“이승만”이 또 출마했는데, 이때 소문엔 “종신 대통령제”를
만든다는 소문도 무성 했다,
하지만 , “조병옥”에겐 지병이 있어 선거 전에 미국으로 가서 “위 수술”로
위장병을 고치리라 호언을 하고 미국으로 떠났지만......
그도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엇갈린 나라의 운명,
“조병옥”과 “김준연이 냉전적 사고를 조금만 수정을 했다면.....
조봉암 선생은 건재 하여 정권 교체를 했을 텐데.
이때 유행했던 노래가 영화 ”유정천리“의 주제가에 가사를 바꿔 부른 노래가
온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다. ♪♬ 가-련다 , 떠나련다. ♩♪ 해공선생 뒤를
따라 , 조박사도 떠나갔네! ♬♪ <중략> "자유당"엔 꽃이피고 ♪♬
민주당엔 비가 오네 ♩♪♬
죽산 선생 의 마지막 말씀과 새
1958년 1월3일 부터 1959년 7월31일 까지 죽산 선생은 약 1년6개월을
서울형무소에서 보내셨다 .그러나 " 죽산 선생은 재판결과에, 판결은 잘됐다 .
無罪가 아닐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나는 萬사람을 살리는 理念이었고 ,
李博士( 이승만) 는 自身 1인만 잘사는 理念이었다 .
理念과 理念이 대립 할 때는 한쪽이 없어져야 勝利가 있는 것이다 .
그래야 中渡派의 마음이 便安해 지는 것이다 .
政治를 하자면 그만한 覺悟는 해야 한다 . 라는 말로
오래전부터 죽음을 초월한 자위로 죽음을 예비하고 있었다고 한 다 .
더욱 슬픈 일은 서울형무소에서 재판을 기다릴 때
매일 날아와 슬피 우는 새에게 먹다 남은 밥알을 줬는데 죽산 선생이
사형을 당하기 직전까지 날아와 아름다운 목소리로 슬피 울었다고 한다 .
수형인들은 신기하여 , 이 새를 " 조봉암 '새 " 라고 불렀는데 죽산 선생이 사형을
당하자 어디로 갔는지 찾아오지도 않고 울음소리도 듣지 못했다 한 다 .
수형 인들은 그새는 억울한 " 조봉암 선생의 영혼과 함께 날아갔다고
굳게 믿고 그새와 죽산 선생을 회상했다 . 고 전한다 . 그러나 아직도
"죽산" 선생을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 헌정사에 깊이 관여했으며 ,
이시대에 오직 한분만 생존해 계신 살아있는 "양심"
" 강원룡" 목사님의 회고록을 보면 ,
6.25가 터지자 정부수뇌들은 "혼비백산 " 걸음아 날 살려라 "모두 도망쳤지만 ,
죽산 선생은 텅 빈 국회에 들어가 중요 " 기밀문서 "를 자신의 차에 싣느라
부인을 태우지 못해 결국 부인을 그곳에서 죽게 만들 었 답니다 .
만약, 죽산 선생이 빨갱이 었다면 ,
그 "기밀문서를 빨갱이한테 넘겼겠지요 .
" 빨갱이"가 아닙니다 .
그리고 멋있게 죽었습니다 .
사형집행관이 "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습니까 ? 묻자 ,
일체의 변명이나 자신의 관한 말은 않고 ,
" 술 한 잔 달라 ! 며 마시고 사형을 당 하 셨답니다
이승만은 진보적 인물을 이렇게 누명을 씌워 죽인 것입니다 .
6.25전쟁으로 적군에게 희생당한 전사자 수와
“보도연맹, 거창양민학살사건, 노근리 학살사건. 금정굴 사건,
제주 4.3사건, 여순 반란사건, 방위군사건 등 빨갱이로 몰려 죽은 사람의
수효와 어느 쪽이 많을까요?
개국 이래 이런 잔악한 “살인마(殺人魔)”는 기록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국부(國父)로 옹립 한다면 우리의 근현대사는 동족상잔의 비극과
사상의 “이데올로기”를 빙자한 살육의 한 가운데 선 살인마(殺人魔)가
국부(國父)가 된다는 사실이 역사적 부끄러운 치욕으로 치부되고
“글로벌”시대에 외국인도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실소를 금할 수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