楞伽禪과 僧稠禪과 定學
박 건주(전남대 종교문화연구소)
I. 서 언
남북조 이래 대체로 北朝에서는 禪定行을 위주로 하는 定學이 성행하였고, 南朝는 敎學을 위주로 하는 義學 또는 講學이 성행하여 소위 ‘南義北禪’으로 칭해졌다. 그렇다면 달마선법으로서의 능가선은 어디에 해당하는 것이고, 양자와 각기 다르다면 어떠한 면에서 구분되는 것일까. 『속고승전』의 저자 道宣(596-667)이 남북조말 이래 禪法의 二大 軌로서 僧稠(481-561)와 달마를 들면서, 이 양맥을 소위 義學 또 講學ㆍ講徒에 대비하여 들고 있는 것에 의하면 달마 계열은 義學 보다는 禪定의 實修의 면이 더 두드러진 것 같다. 또한 僧副가 달마로부터 선법을 전수받은 후 이를 궁행하여 定學의 宗이 되었다 하였으며(『속고승전』권16 習禪初), 달마선법이 壁觀으로 칭해지고 있고(同 권20, 論贊), 혜가가■■十方의 모든 부처님 가운데 만약 한 분이라도 坐禪에 의하지 아니하고 成佛한 분이 있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능가사자기』혜가章)하여, 坐禪의 功을 크게 강조하고 있는 것 등에 의하면 달마 계열이 義學 보다는 定學에 가깝다 하겠고, 달마의 系脈이 후일 禪宗으로 칭해지게 된 한 요인도 여기에 있다 하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달마가■■敎에 의지하여 宗을 깨달음(藉敎悟宗)’을 강조하였으며, 註釋書 『楞伽要義』1권을 저술한 바 있고(『능가사자기』달마章), 거의 모든 교법을 망라 회통하며 心地법문을 開示한 『능가경』을 전하면서 이 경에 의지하여 수행 전법할 것을 부촉하였으며, 혜가를 계승한 楞伽師들이 각기『능가경』을 注疏하였고, 『능가사자기』에 수록된 초기 조사들의 짤막한 법문과 어록에 보통 10종 내외의 경론이 인용되고 있는 사실들에 의하면 달마의 선법을 간단하게 남북조 이래의 定學의 범주로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道宣은『속고승전』권제20 習禪篇의 論贊에서 당시 定士(定學의 집단)들이 義門을 거의 무시해버리거나 세간의 定에 탐착하면서 眞空을 익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풍조를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閑寂한 곳에서 修禪 내지 觀行의 실천을 궁행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이러한 행이 없이 講學에만 열중하는 집단도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道宣이 비록 僧稠와 달마 계열의 장단점을 비교하여 말하고는 있으나 그는 이 두 계열을 귀감으로서 칭양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 양맥이 모두 修禪의 진실한 실천자였다는데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달마선도 禪法의 二大 軌로 칭해진 것이겠으나 修禪을 실천하는 면에서는 공통인데도 불구하고 여타의 定學과 구분되고 있는 것은 여타의 定學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속고승전』권제16僧可(慧可傳)에 의하면 혜가는 北齊의 수도 鄴에서 定學의 徒衆 천명을 지도하고 있던 道恒선사로부터 큰 박해를 받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도 달마선이 여타의 定學과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초기 선종의 이러한 이중적인 면이 『능가종』으로써 교학에 무게를 둔 부류와 실천에 무게를 둔 <동산법문>의 부류로 구분되는 乖離를 낳게 되었는데 <동산법문>의 習禪체험을 중시하는 특성이 매우 新鮮한 기풍으로 환영받아 달마선의 주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으나, 육조 이전의 초기 선종기에는 이렇게 엄밀히 두 부류로 구분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전자의 경우도『능가경』을 注疏한 외에는 두타행과 습선행을 위주로 하여 후자와 다를 바 없고, 후자도 『능가사자기』에 수록된 그들의 짤막한 어록이 거의 모두 여러 경전ㆍ인용문으로 채워져 있어 교학을 도외시 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달마의 선법은 義學 계열은 아니면서 義學의 면이 없는 것이 아니고, 定學 계열에 가까우면서 여타의 계열과는 엄밀히 구분되고 있다. 그렇다면 달마선(능가선)이 여타의 定學과 어떠한 면에서 구분되는 것일까. 水野弘元은 선종성립 이전의 중국선법의 주요 경향에 대해 요략하길, 소승선, 대승선, 대소승의 선을 종합 止揚한 것 등이 있었고, 禪과 敎의 면에서 보면 禪法을 단지 이론적 학문적으로 설명 주해한 것, 學解를 주로 하고 禪觀은 보조적으로 행한 것, 교학과 선정수습을 동등하게 중시한 것, 교학보다 선정에 무게를 둔 것, 學解를 배척하고 선법만을 행한 것, 習禪을 주로 하지만 산림에 은거한 두타난야의 행, 신통기적을 드러내어 구세제민의 實을 올리는 것 등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달마선은 어디에 해당되는 것일까. 이러한 견해에 유사한 여러 연구들이 있고, 외면적 양상의 이해를 위해서는 일면 도움이 된다 하겠으나 본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외면적 양상의 문제가 아니라 實修의 차원에서 능가선과 僧稠禪이 여타의 定學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이다. 성행하던 기존의 여타 定學 대신에 달마선이 선종이 되고, 선법의 종주가 된 배경도 그 선법의 차이가 먼저 규명되어야 제대로 밝혀질 수 있다. 일찍이 天台 智顗대사가 소승 대승의 거의 모든 선법을 정리 체계화 한 바 있고, 위진남북조기 定學의 선법도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지만 그 내용이 방대한 까닭에 여기에서는 각 선법의 내용을 세밀히 열거하며 대비할 수 없다. 본고에서는 능가선과 僧稠의 선법 및 定學의 三者 대비를 통하여 각 선법의 성격과 상호 관련성 문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Ⅱ. 능가선과 僧稠禪 및 定學의 성격 문제
道宣이 僧稠(481-561)와 달마의 선법을 대비하여 설명하고, 아울러 定學과 義學의 풍조와 문제점을 지적한 『속고승전』의 관련 내용은 본 과제의 해명에 매우 소중한 기본 자료이다. 그런데 北齊 文宣帝로부터 거국적 귀의와 존경을 받았던 僧稠의 영향력은 당시 불교계에 매우 컸을 것이지만 그가 이때 저술한 禪要의 書 『止觀法』2권이 失傳되어 그의 선법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자료는 『속고승전』의 단편적인 몇 구절과 후술하는 신출의 돈황문서 외에는 현재 없는 셈이다. 더구나 후자는 그 진위가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어 의거하는데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그의 선법을 그 師承관계에 의해 道明禪師로부터 安般十六特勝의 소승선, 佛陀禪師와 그 제자 道房으로부터 대승선을 받아 加味하였을 것이라거나, 달마의 선법은 대승선, 僧稠의 선법은 소승선으로 간략히 논단하는 정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속고승전』에 전하는 그의 修學 履歷은 간단치가 않아서 쉽게 소승이나 대승의 어느 한 쪽으로 논단하기 어렵다. 僧稠도 일찍이 대승교학을 연찬한 바가 있고, 그가 궁행하였다는 『열반경』聖行品의 四念處觀도 소승법뿐 아니라 無住․無得의 大乘深義에 의한 四念處觀도 설해져 있는 까닭에 그의 선법을 오직 소승에 한한 것으로만 단정하기도 어렵다. 그 이전에 그는 佛陀(跋陀)의 수제자였던 道房으로부터 止觀을 배워 이를 실천하였으나 定을 얻지 못하고, 나중에 泰山에서 온 어느 異僧으로부터■■반드시 繫緣(凝念)하되 무엇을 구하려 하거나 이루려 함이 없이 해야 한다(要必繫緣 無求不遂)’는 가르침을 받고 이대로 행하여 定을 얻은 바 있다. 그런데 柳田聖山은 이 구절을 해석하길■■요는 반드시 繫緣하면 모두 성취되지 않음이 없다’로 하였다. 字句上으로는 이러한 해석도 가능하지만, 이미 스승으로부터 止觀을 수학한 그가 繫緣의 중요성을 몰랐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止觀이든 무엇이든 불교 수행은 일단 繫緣으로부터 시작된다. 繫緣이란 마음을 대상에 集注하는 專念 내지 凝念의 행을 말한다. 단지 어떠한 대상에 전념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여러 차별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天台의 여러 止觀법문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이미 이러한 행을 僧稠도 선정을 성취하기 위해 매진해왔을 것이기 때문에 이를 몰랐을 리는 없다. 여기에서 異人이 전해준 가르침의 요지는 곧 繫緣하되■■無求不遂’해야 한다는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無求不遂(무엇을 구하거나 이루려 함이 없음)는 대승의 三解脫(空․無相․無願) 가운데 無願行에 해당한다. 주지하다시피 三解脫(三三昧)은 이미 소승경전에서부터 나오는 법문인데 대승에서는 이를 심화시켜 要義로 삼고 있다. 이를테면 부처님 당시의 수제자들 가운데서도 목련존자 같은 上首제자는 不覺不觀의 행에 의하여 일주일 만에 성취하고 있다. 목련존자의 不覺不觀은 삼해탈의 법문 그대로이다. 삼해탈의 뜻을 아는지라 繫緣이되 그 대상이 얻을 바 없는 것임을 이미 了知하고 그 뜻에 응념하는 것이니 어떠한 대상에 향하여 집중하는 행과는 전혀 다르다. 이 삼해탈의 뜻을 모르면 어떠한 선정이나 경지를 얻고자 함이 있게 되고, 대상에 향하여 억지로 선정을 作하게 되어 성취하지 못하고, 오히려 여러 병폐에 시달리게 되기 쉽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본래 三解脫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나중에 무턱대고 專念만 하면 성취되는 것으로 아는 풍조가 이어져 이를 시정하기 위해 三解脫의 뜻을 더욱 넓고 깊게 해설하여 일체의 법상을 얻을 바 없고, 無所有임을 강하게 일깨우기 위해 大乘의 운동이 펼쳐진 일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초기 선종의 법문도 이러한 면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돈황출토 선종문헌 S2503의 『大乘無生方便門』의 중간 부분에 『讚禪門詩一首』가 있는데 그 가운데■■欲昇彼岸無學道하건대, 一切都緣에 草(莫)計心하라!’의 구절이 있다.■■일체 어떠한 경계에 처해서나 항상 분별하지 말라(莫計心)’는 곧 ■■要必繫緣에 無求不遂하라!’와 상통하는 뜻이다.■■一切都緣’은 곧■■一切都繫緣’이다. 일방적인 專念行으로 성취하지 못하면 그 원인을 자신이 그 행에 온전히 매진하지 못한 때문으로 돌리고 그 근본 원인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無願無求의 행이 되어야 억지 수행을 떠나 定이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인데 당시의 僧稠는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억지를 부린 까닭에 定을 얻지 못하다가 마침 태산에서 온 異人의 가르침으로 자신이 미처 놓치고 있었던 要處를 알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가르침으로 定을 얻은 후 『열반경』의 사념처법을 거쳐 十六特勝觀을 닦아 종종 며칠 이상의 선정에 들곤 하였는데 이렇게 여러 단계의 定이 연이어 성취된 것은 無求無遂에 바탕한 修禪이 된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無求의 행법은 달마대사의 四行 가운데 無所求行과 상통하고, 달마의 理入 법문에서도 無願無求가 전제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僧稠의 선법을 단순히 소승선으로만 볼 수도 없다. 또한 그가 행한 바 있는 十六特勝觀은 호흡의 入出을 관하는 행법으로 身口意 三行 가운데 身行 가운데 들어가고, 그 내용은 『대안반수의경』․『잡아함경』권29․『증일아함경』권2․『성실론』권14․『좌선삼매경』권상․『유가사지론』권27 등에 ‘十六行’의 이름으로 나오지만 ‘十六特勝’이라는 명칭으로 나오는 것은 축법호가 번역한 『수행도지경』이 처음이다. 따라서 僧稠에게 이 법을 가르친 趙州 障供山의 道明선사는 이 『수행도지경』에 의거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淨影寺 慧遠(523~592)의 『大乘義章』권16에는 ‘特勝’이라 한 뜻을 설명하길, 이 관행이 不淨觀보다 뛰어나고, (1)破息勝 (2)新結勝 (3)寬廣勝 (4)微細勝 (5)堅固勝 (6)調停勝 (7)所生勝 (8)所異勝의 8가지 뛰어남이 있는 까닭이라 하였다. 定學의 체계는 소위 五門禪(五停心觀, 五度觀門)에 거의 포괄되는데 경전에 따라 그 내용이 약간 달라서 구마라습 역의 『좌선삼매경』은 不淨觀․자비관․인연관․數息觀․염불관이라 하고, 불타발다라 역의 『달마다라선경』은 염불관을 간략히 설하고는 있지만 수식관․不淨觀․界分別觀․자비관․인연관의 五門禪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수식관과 不淨觀이 定學의 兩大 선법이고, 十六特勝法은 이 數息觀을 넓게 펼쳐 설한 법문이다. 그런데 天台智顗의 선법 체계에 의하면 十六特勝은 不淨觀과 阿那波那門(安般行 : 觀出入息)및 心門의 3종 선문 가운데 阿那波那門에 속한 행법이고, 世間禪門(凡夫禪門)과 出世間禪門(二乘禪門) 및 出世間上上禪門 (菩薩禪門) 중에서는 소승의 世間禪門에 들어간다. 『마하지관』 권9상의 十六特勝觀 해설에 의하면 각 단계 마다 定樂의 受에 따른 愛味가 있고, 特勝이 아닌 十六勝行의 범부는 이를 취착하는데서 벗어나기 어렵지만 이 特勝法에는 觀慧가 있어 그 단계에서의 愛味를 捨하고 그 윗 단계의 定으로 진취하여 無色定의 최상인 非想非非想에 이르고 그 愛味도 버리게 되니 이 때의 선을 淨禪이라 칭한다고 하였다. 智顗는 禪門이 비록 無量하지만 요략하면 十門이라 하고, 수준이 높고 더 높은 경지에 오르게 되는 순서대로 (一) 根本四禪。(二) 十六特勝, (三)通明, (四)九想, (五)八背捨, (六)大不淨, (七)慈心, (八)因緣, (九)念佛, (十)神通 등의 선법을 들어 해설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十六特勝은 두 번째에 해당하며, 세 번째인 通明禪에서 滅受想定과 팔해탈 및 三明六通을 갖추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同書에 통명선이 세밀하게 관찰함에 비해 十六特勝은 總觀 즉 전체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라 하였고, 『釋禪波羅蜜次第法門』卷第一之下에 十六特勝은 欲界定에서 非想非非想處定에까지 이르고, 통명선은 욕계정에서 멸진정에까지 이른다고 하였으니 十六特勝이 비록 觀慧를 갖추고 있으나 그 관행이 거칠고 세밀하지 못해서 이 행 만으로는 멸진정에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호흡을 관하는 十六特勝法이 二乘의 出世間禪門과 대승보살의 出世間上上禪門의 행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六妙法門』의 六法(數․隨․止․觀․還․淨)에서 호흡에 의지하여 행하는 數와 隨의 二法도 어떠한 지혜에 통달하여 행하느냐에 따라 바로 대승의 최상승선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육묘법문』第十證相六妙門 단계에서의 數는 능히 一念心에서 不可說微塵世界諸佛菩薩聲聞緣覺의 諸心行과 무량법문을 數하는 행이고, 隨는 능히 一念心에서 법계의 모든 사업에 隨順하는 행이다. 息의 無常・苦・空・無我를 觀하는 十六特勝行에 三十七助道品을 배합하여 행함으로써 적멸해탈에 이르는 출세간선문이 된다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중국 초기 선법의 지표가 된 安世高 譯의 『大安般守意經』, 竺法護 譯의 『修行道地經』 내지 鳩摩羅什과 佛陀跋陀羅 等이 역한 여러 禪經에 설명되어 있다. 출세간선문을 넘어 出世間上上禪門을 행함은 息의 空寂함에도 머무름 없고, 空도 不可得임을 證한 慧로 중생을 化度하는 행이다. 즉 理와 事의 간격이 사라지는 행이다. 즉 十六特勝의 觀息行에도 어느 觀慧로 행하느냐에 따라 대승보살의 禪門이 될 수가 있다. 그래서 僧稠가 이 때 행한 十六特勝이 어느 단계에 해당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그가 이미 無求不遂의 뜻을 了知하고 행한 것이라면 菩薩禪門(出世間上上禪門)으로서의 十六特勝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속고승전』의 僧稠傳에 의하면 그는 『止觀法』二卷을 저술한 바 있으나 失傳되었다. 한편 돈황출토 선종문헌 가운데 <P3559>의 『傳法寶紀』에 이어 筆寫된 『稠禪師意(大乘安心入道法)』․『大乘心行論』․『稠禪師藥方療有漏』 및 <S4597> ․ <P3490>의 『稠禪師解虎贊』등 稠禪師의 이름으로 전하는 선법과 행적의 자료가 있다. 이 가운데 『稠禪師解虎贊』에서의 稠禪師는 『續高僧傳』권16 僧稠傳에 싸우는 두 호랑이를 석장으로 화해시켰다는 기사가 있는 까닭에 僧稠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禪法을 전하고 있는 나머지 자료에서의 稠禪師도 僧稠인가에 대해서는 不明이고, 여러 異見이 있다. 그 이유는 그 선법의 내용이 소승 禪數의 大家로 전해진 僧稠의 禪이 아니라 오히려 달마선에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篠原壽雄은 그 선법의 내용으로 보아 北宗禪 계통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고, 이에 대해 冉雲華는 후대의 남종 북종 구분에 의해서 이해하여서는 안 되며,, 자료 가운데「五亭(停)十八境」이 보이는 것에 의하면 북종선의 산물로 보기에는 토론의 여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後人이 僧稠를 假託하여 지은 것이라 하면서도 僧稠와 전혀 관계없는 假託은 아니라고 하였다. 특히 『稠禪師意 ; 問大乘安心入道之法』은 僧稠의 高足인 僧邕 一派의 所傳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柳田聖山은 僧稠의 설인지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종경록』97에 『大乘心行論』의 한 문단과 거의 같은 글이 僧稠 선법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돈황의 자료가 전해지던 시대에는 그러한 선법이 僧稠禪의 기본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고 하였다. 또 그는 僧稠일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 자료의 선법을 보면 온전히 달마선 그대로 이다. 看心의 행도 있어 북종선 계통이라고 보는 것은 앞에 발표한 필자의 여러 글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잘못이다. 看心은 남북종을 불문하고 행법의 기초이고 출발점이다. 또 「五亭(停)十八境」의 소승선법 一句가 있으나(『稠禪師意』) 이는 문답상에서 질문자가 僧稠에게 질문한 내용이지 이 법문에서 僧稠가 설하고자 하는 선법이 아니다. 즉 僧稠가 앞의 답변에서■■마음에서 경계 없음이 바로 定이다(攝心無緣, 卽名爲定)’라 한 것에 대해 질문자가 ■■五亭(停)十八境의 법에서는 사물을 見하여야 定이 되는 것이어서 눈으로는 반드시 色을 보아야 하고, 마음으로는 반드시 경계를 보아야 하는 것인데 어떻게 (경계 없는 것을) 定이라 하는 것입니까?’하니 僧稠가 답하길, ■■경계를 보게 되면 마음이 일어나고, 사물이 동하면 바람이 인다. 바람이 멈추면 경계가 안정되고, 마음이 쉬면 경계가 멸한다. 만약 마음과 경계가 함께 멸하면 바로 자연히 滅定이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僧稠는 不起心에 의한 定의 성취를 말하고 있어 경계에 의지한 五停心의 선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위 자료 『大乘心行論』에서도 「만약 능히 不起念 한다면 바로 妄心의 때가 없게 된다’고 하여 不起心의 선법을 말하고 있다. 소승선법은 일단 마음을 어떠한 法相 등의 경계에 향하거나 집중하는 행이어서 起心이 先行될 수밖에 없다. 반면 대승의 頓法에서는 心이 본래 無心이고 분별함도 없으며, 能所를 떠난 一心이고, 無生임을 了知하고 행하는지라 當處의 卽心에서 마음을 일으킴이 없이 言語道斷이고, 心行處滅이 된다. 즉 僧稠의 답변에서 말한 ‘滅定’이 곧 이것이다. 心이 본래 不起임을 了知함이 있어야 不起心이 자연히 이루어진다. 不起心 하려고 하면 이미 起心이 되어버리니 當處에서 不起心임을 了知하여야 하고, 그렇게 될 때 卽心이 된다. 『육조단경』을 비롯한 남북종의 여러 선종 법문에는 이러한 뜻의 법문이 자주 강조되고 있다. 또 『稠禪師意』에서■■(경론을) 읽으려거든 잠시 그 實意를 보고, 문자를 취하지 말라!’라 하고,■■무릇 安心이란 반드시 항상 본래의 청정심을 보아야 하되, 또한 볼 수 없고, 이와 같이 볼 수 없되 마음이 항상 현전하며, 비록 항상 현전하되 一物도 얻을 바 없다.…’는 바로 달마선에서의 安心과 卽心의 법문 그대로이다. 『大乘心行論』에서는 心外無法을 바탕으로 不作意, 不取捨, ‘當處에서 攀緣하지 않을 뿐’의 선법을 말하고 있고, 理入과 理로부터 用을 일으키는 門의 二門으로 설하고 있어 달마의 二入(理入과 行入) 법문과 그대로 일치하는 법문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또한 一心에 만행을 갖추었다는 것은 마음이 無心이라 守本함이(이 無心인 心本을 守함이) 常定인 까닭에 만행을 갖춘다고 말한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는 초기 선종법문인 『無心論』과 『修心要論』의 無心禪과 守本 법문 그대로이다. 또 육바라밀을 각각 事理를 취하지 않음(보시), 오욕에 물들지 않음(지계), 我所의 성품이 공함(인욕), 自心不可得(정진), 心境不二(선정), 囗囗邊住處(지혜)로 설명하고 있는 것도 『능가사자기』구나발다라삼장의 장에서 설한 육바라밀 해설과 거의 같고, 『육조단경』에서의 그것과도 상통한다. 그리고 菩薩一闡提를 기술한 부분도 『大乘入楞伽經』권2集一切法品에 나오는 菩薩一闡提 법문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다. 또■■반야는 鈍한 까닭에 無功用으로 깊은 선정에 든다.’한 것은 『대반야바라밀다경』권286 初分讚淸淨品35-2에■■일체법의 본성이 鈍한 까닭이니, 이와 같이 청정한 본성은 知함이 없는 것이니라.’라 함과 돈황선종문헌 『二入四行論長卷子』에■■法佛로 修道하고자 하건대 마음을 돌덩이(石頭)와 같이 묵묵히 감각함도 없고, 知함도 없고, 분별함도 없이 하여 일체 어느 때나 등등하게(활기차게) 하되 어리숙한 듯 있으라. 왜 그러한가. 법(존재)이란 覺知함이 없는 까닭이다.’이라 한 법문과 같은 뜻이다. 즉 일체법 내지 心性이 知함 없고, 見함 없으며, 분별함 없음을 了知하는 것이 곧 반야이고, 이를 僧肇는 ‘般若無知’라고 하였는데 하택신회는 이를 인용하여 그의 『顯宗記』에서 ■■般若無知, 運六通而宏四智’라 하였다. 또한 牛頭法隆의 『心銘』에■■心性은 생함이 없는 것인데 어찌 知하고 見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心性不生, 何須知見)’라 함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稠禪師意』에도 일체에 꺼려하거나 피하려고 함이 없는 安心의 법문을 설하고 있어 이 또한 달마선(능가선)과 다름이 없다. 이와 같이 僧稠의 作으로 기술된 『大乘心行論』과 『稠禪師意』(『大乘安心入道法』)가 전하는 禪法은 초기 선종의 달마선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돈황문헌에서의 僧稠의 선법은 『속고승전』에서 달마와 僧稠의 선법을 엄밀히 구분한 사실과 배치되어 버린다. 그런데 『종경록』권97에서는 稠禪師의 법문으로서■■일체의 바깥 경계란 일정한 相(體相, 自相)이 없는 것이어서 是非 生滅이 모두 自心에 말미암은 것일 뿐이다. 만약 自心이 無心하게 된다면 누가 있어 是非함을 꺼려 할 것인가. 能과 所가 모두 없으니 그대로 모든 相이 항상 적멸하다’는 법문을 전하고 있는데, 이 또한『능가경』의 禪旨 그대로이고, 거의 同文이 위 돈황문헌 『大乘心行論』에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종경록』(961)의 저자 永明延壽(904~975)) 시대에는 이 선법이 僧稠의 선법으로 이해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영명연수는 광대한 자료를 섭렵하여 百卷의 『종경록』을 비롯한 60여종의 저술을 한 바 있을 정도로 박식하였고, 여러 禪法을 通觀할 수 있는 선사였다. 그가 『속고승전』이 전하는 달마와 僧稠 선법의 차이와 다른 계열이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속고승전』의 저자 道宣(596-667)은 바로 僧稠의 제자인 智旻의 再傳제자이다. 즉 僧稠…智旻…智首…道宣으로 이어지고 있다. 智旻의 독립된 傳은 없고, 『속고승전』권제22 智首傳에■■(智)旻 또한 禪府의 龍驤이고, 心學의 翹望이니 바로 稠公의 神足이다.’라 하여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智首는 그의 傳에 의하면 거의 律學의 정립에 일생을 바쳤고, 道宣도 그 영향을 받아 律學을 대성하였다. 그러나 道宣이 여러 곳에서 禪法을 通觀하여 깊은 안목으로 정리하고 있고, 달마선에 대해서도 그 禪旨를 명확히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僧稠 이래의 定行 뿐 아니라 각 방면의 敎禪을 두루 깊이 섭렵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道宣이 달마와 僧稠의 선법을 구분하여 각각의 特長과 단점을 要略한 글은 그 신뢰성이 매우 높다 하겠고, 특히 자신의 師祖인 僧稠의 선법을 기술한 내용은 그 신뢰성이 더욱 높다 하겠다.
Ⅲ. 僧稠禪과 達摩禪脈
그렇다면 달마선과 동일하게 기술된 돈황문헌에서의 僧稠禪法은 실제의 僧稠禪法과 다른 것일까. 돈황문헌에서의 僧稠가 불타선사의 제자인 僧稠가 아니고 선종에 속한 다른 인물일 가능성도 있겠으나 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이 僧稠외에 선종 인물로서의 僧稠는 여타의 자료에 보이지 않는다. 道宣이 불법의 兩大軌範으로 지칭할 정도로 僧稠는 유명하였고, 在世時에 황제의 존경과 귀의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돈황문헌에서의 稠禪師는 선법의 一大家로서 명망을 드날리던 그 僧稠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선종의 승려들은 僧稠에 대해 친밀감을 지니고 존숭하였던 것 같다. 『능가사자기』의 저자 淨覺은 출가한 후 바로 僧稠가 일찍이 호랑이 싸우는 것을 석장으로 멈추게 하였다는 태행산 영천곡에서 수행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출가하기 수년 전인 701년에 낙양에서 神秀를 만나 그 선법을 전수받고 그 開示에 悟入하여 약간 깨우친 바가 있었다고 하였다. 즉 淨覺의 출가는 神秀의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데 그의 첫 출가생활은 僧稠가 수행에 전념하던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706년 神秀 入寂 後, 그 뒤를 이어 神秀의 同門師弟 玄賾이 帝師가 되어 왔을 때 淨覺은 태행산에 온 지 3년 후인 708년부터 玄賾을 隨從하여 그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720년경의 作으로 추정되는 『능가사자기』가 저술된 곳도 이 곳 태행산 영천곡이었다. 李知非는 『능가사자기』의 저자 淨覺이 저술한 『注般若波羅蜜多心經』의 『略序』에서 僧稠가 열반한 이후 오랫동안 아무도 머물지 않아 영천도 마르고 잣나무가 고목이 되었는데 정각이 이곳에 머무르자 영천에 다시 물이 나오고 잣나무가 다시 무성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淨覺이 이곳에 찾아온 것은 오랫동안 폐허로 있던 곳이었다. 그는 僧稠의 遺風을 사모하여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그 폐허의 遺址에 찾아와 자주 머물고 있다. 그리고 그 전후에 그는 禪宗의 두 宗師 神秀와 玄賾을 隨從하고 있다. 淨覺의 이러한 모습에서 僧稠와 달마계열이 엄밀히 구분되거나 배척되고 있지 아니하고, 거부감 없이 함께 수용 내지 존숭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사실은 곧 僧稠와 神秀의 가르침이 淨覺에게 異質의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양자의 선법이 서로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구분이 안 되는 것으로 인지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더구나 淨覺의 시대에는 이미 行法의 師承관계가 중요한 관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柳田聖山은 僧稠 관련 돈황자료와 淨覺의 예에서 보이는 兩者(達摩系와 僧稠系) 同化의 현상을 해석하길,■■달마를 祖로 하는 초기 선불교가 僧稠를 自派로 끌어들인 것이다. 사람들은 僧稠의 선법을 달마의 『二入四行論』에 근접시키고, 달마의 傳記를 僧稠에 근접시켰다.’라 하고, 또 北周 폐불 후 실제로 단절된 僧稠와 達摩系가 唐에서 再興 운동이 일어났을 때 각각 自派에 좋은 새로운 총합을 시도하였으며, 僧稠의 재평가에는 선불교의 영역을 넘는 것이 있었다 하고, 그 예로 淨覺이 僧稠를 사모하여 태행산에 들어간 것을 들고 있다. 柳田聖山의 이러한 해석은 앞에 제기한 과제를 해명하는데 하나의 가설로서 쉽게 상정될 수 있는 것이다. 선법의 兩大계열이 나중에 달마계로 거의 통일되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달마계에서의 이러한 작업이 실재하였을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다. 주지하다시피 선종이 점차 정토, 화엄, 밀교를 수용 내지 통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보다 먼저 僧稠의 선법을 포용 내지 통합한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그 통합 과정에서 僧稠의 선법을 의도적으로 바꾼 것인가 아니면 僧稠의 선법에 본래 달마의 선법과 융통될 수 있는 소지가 있어서 그 면을 드러내어 두 선법이 하나임을 천명한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속고승전』의 양자 對比에 의하면 전자가 옳은 듯 하지만 앞에서 논급한 바와 같이 僧稠의 선법에 大乘禪의 일면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하면 후자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실 自宗과는 융통되기 어려운 전혀 다른 법문을 自宗과 같은 것으로 改變시키는 일은 일어나기 어렵다. 더욱이 僧稠의 선법은 유명하여 그 내용이나 성격이 이미 公知되어 있는 것이었다. 僧稠의 선법을 천명하면서 명확한 제목없이■■稠禪師意’로 기술을 시작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 句가 뜻하는 것은 僧稠선사가 전하는 진실한 뜻은 바로 이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즉 이 말은 보통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있는 僧稠의 선법과는 달리 실은 僧稠가 진실로 전하고자 하는 뜻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 뒤에 기술되고 있는 법문과 바로 이어지는 『大乘心行論』의 선법이 종래 알려진 僧稠의 선법과는 다른 내용으로 기술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셈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전술한 바와 같이 대승의 深義에 의한 최상승선의 禪旨 그대로이다. 따라서 僧稠 관련 돈황자료가 僧稠의 저술이나 법문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시 선종에서 僧稠의 선법을 이러한 형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재해석이 의도적 왜곡이었는가 아니면 僧稠의 선법에 그러한 사실이 있었는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시 달마와 僧稠의 선법 차이를 자세히 분석하기로 한다. 道宣은 僧稠와 달마의 선법을 다음과 같이 대비하여 논한 바 있다.
■■승조 선법에서의 懷念處(또는 ‘念處를 懷함’)는 청정하고 모범으로 삼을 것이어서 가히 (그 회념처를) 숭상하는 바 되고, 달마의 선법은 虛를 宗으로 하는지라 玄旨가 幽賾하다. 숭상함이 있게 되니 情事가 쉽게 드러나고,幽賾하니 그 理性(달마선의 理法, 禪旨)에 통하기 어렵다(稠懷念處, 淸範可崇. 摩法虛宗, 玄旨幽賾.可崇則情事易顯,幽賾則理性難通.)’
柳田聖山은 이■■情事易顯’을 이해하길,■■僧稠가 北魏末에서 北齊에 걸쳐 국가권력과 교류한 것은 스스로 좋아서 구한 것이 아니었지만 자주 身命의 위기를 초래한 결과가 되었다. 道宣이 말한 ‘情事가 드러나기 쉽다’란 어쩌면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겠다.’고 하여 이를 정치권 세속권에 가까이 어울리다 보니 쉽게 그 영향과 침해를 받게 되는 면이 있다는 뜻으로 보았다. 그러나 道宣의 이 해설은 어디까지나 달마와 僧稠의 禪法을 對比하여 의론한 것이기 때문에 외적인 활동양태가 비교의 대상으로 언급된 것일 수는 없다.■■숭상함이 있게 되니 情事가 쉽게 드러난다’는 것은 곧 觀行에서의 懷念處를 숭상함이 있어 그것이 곧 情事가 된다는 것이다. 그 懷念處는 四念處의 법이고, 定樂受에 着하게 되는 愛味이다. 이와 같이 소승선 내지 定學은 定樂受에 緣되는 행이라면 『마하지관』권9上에■■法緣是二乘入理觀,無緣是大乘入理觀’이라 한 바와 같이 二乘은 法相에 緣하는 理觀이고, 대승은 어떠한 대상에도 緣함이 없는 理觀이다. 二乘은 空相에 緣하여 이를 愛着하는지라 또한 情事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달마의 선법은 虛宗이라 어떠한 것에 마음을 두거나 作意하여 향함이 있는 관행이 아니다. 여러 前考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달마선의 요체는 心性이 본래 어디에 향하거나 見함도 없고, 분별 사량함도 없음을 了知하고 행하는지라 마음을 어디에 두거나 어떻게 하고자 함이 없는 행이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림이 없고 향함도 없으며 물듦도 없어 壁觀이고 直心이다. 神秀는 입적시에 단지■■屈曲直!’이라 하였는데, 이 말의 뜻은 마음이 대상에 향하거나 물듦이 없이 直心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마음이 대상에 향하거나 물드는 것이 곧 屈曲이다. 거울처럼 향하거나 물듦이 없이 있는 것이 곧 壁觀이고 直心이다. 대승선법에서는 法空과 一切法不可得, 내지 唯心과 心外無法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고귀하게 아껴야 할 懷念處를 따로 두지 않는다. 의지할 바가 없다는 법문은 대승경론 여기저기에 자주 보인다. 그러나 소승 내지 定學에서는 청정하고 규범이 되는 懷念處를 지니고 여기에 전념해야 선정과 지혜가 진전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그 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定樂受와 法相에 애착하게 된다. 이것이 곧■■情事가 쉽게 드러난다’고 한 의미이다. 이와 같이 마음에 무엇을 지니거나 향하려는 마음을 情事로 표현하고, 이를 다 버림을 ‘情盡’이라 한 것은 澄觀의 『화엄경소』 光明覺品第九에■■情盡理現, 卽名作佛者.’라 한데서도 보인다. 한편 달마선의 禪旨는 대승의 深義를 먼저 了知해야 행할 수 있는 것인 반면 소승의 정학은 이를 了知하지 아니하고도 명확히 제시된 행법을 하나하나 밟아 나가면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달마선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할 수 있는 법이 아니다. 따라서■■그 理性(달마선의 理法, 禪旨)에 통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道宣이 이렇게 僧稠의 선법을 情事가 쉽게 드러나기 쉽다고 평하고 있는 것에 의하면, 이 면에서는 僧稠의 선법이 일반 定學과 다를 바 없었다고 이해된다. 北齊의 수도 鄴에서 1천의 徒衆을 이끌고 定學의 王宗으로 칭해지고 있던 道恒은 慧可가■■情事無寄(情事를 붙이지 말라)’라 한 말을 魔語라 하며 비판하였다. 이는 달마선이 일반 定學과 어떻게 다른가를 뚜렷이 對比 내지 입증해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혜가가■■情事無寄’라 한 것은 물론 달마선의 요지를 말한 것이지만, 특히 당시 성행하고 있던 定學 집단의 선법을 염두에 두고 그러한 잘못된 길로 가지 말 것을 당부하는 뜻도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혜가는 鄴都에서 상당한 활동과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같은 지역에서 다른 법을 펴나갈 때 어쩔 수 없이 自宗의 법을 상대방의 법에 대비하여 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한 대승선법에 의해서 보더라도 情事가 쉽게 드러나는 행이 正法으로 성행되고 있는 현실을 慧可는 그대로 방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당시 定學의 선법을 情事에 묶이기 쉬운 것으로 공공연하게 비평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定學의 집단을 이끌고 있던 道恒이 혜가의 이 말에 대해 크게 분노한 것이다. 定學을 이와 같이 情事에 묶이기 쉬운 법으로 아는 경향과 분위기는 이 때 혜가에 의해 창도되고, 그러한 전통이 약 1세기 후의 道宣에게까지 이어져 僧稠의 선법도 그러한 定學의 범주에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慧可가■■情事無寄’라 한 것은 곧 일반 定學계열에서 어떠한 法相을 숭상하여 懷念하거나, 定樂受의 味에 애착하는 행을 비판하여 말한 것이고, 이를 통해 달마선의 요지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道恒은 혜가의 이 말에 대해 魔語라 하며 공격하였다. 도항은 자신들의 觀行이 情事에 묶인 것으로 비판된 것에 대해 이를 납득하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그냥 법에 의해 행하는 觀行인데 어찌 이를 情事 云云 하는가 하는 심정으로 격분하게 된 것일 수가 있다. 사실 대승의 禪旨를 아직 제대로 맛보지 못하였다면 定學의 行禪에 대해 情事 云云 하는 비판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다. 달마선법에 의하면 見聞覺知가 모두 妄이다. 心性이 본래 空寂하고, 一心이어서 어디로 향하거나 見하거나 知함이 없는 것인데 마음이 어디에 향하거나 보고 듣고, 분별함이 있다면 이는 당연히 妄이고 망령에 의한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 그러하고 있기 때문이다. 業習과 천지의 여러 神들이 영향하여 그러한 妄이 일어난 것일 뿐이다. 단지 妄을 妄이라고 알 때는 見聞覺知가 향함이 없고, 오염됨이 없으며, 흔들림이 없는 見聞覺知가 되어 見함 없이 見하고, 知함 없이 知함이 되며, 有無中道의 佛境界가 된다.■■情事를 붙이지 말라’란 곧 마음을 어디에도 향하거나 두지 말라는 말이다. 즉 心性 그대로 懷念할 바가 없다. 分別知는 情이 개재된다. 거울은 더러운 것과 아름다운 것을 앞에 놓아도 평등하게 비출 뿐 情에 의해 한 쪽만 비추는 일이 없다. 이를 知함이 없다고 한다. 情에 의해 일어나는 상념에서도 심성은 거울과 같아 좋은 상념이든 나쁜 상념이든 차별 없이 드러낸다. 심성은 본래 情을 떠났기 때문이다. 『기신론』의■■心體離念’과 『단경』등에서의 無念도 이 뜻이다. 그래서 그 심성대로 情을 붙이지 말라고 한 것이다. 무슨 수행을 한다고 하면 자칫 마음을 특별히 어디에 두거나 향하려 한다. 거기에는 이미 마음이 어디로 끌려가는 情事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달마선의 요체는 絶觀․不思․無作意․無念․不行이고, 어디에 의거할 바가 없는 행이다. 단지 대승선법 내지 달마선에서도 道信의 『入道安心要方便法門』에서 보는 바와 같이 功用이 있는 행과 加行의 방편행이 있고, 이 단계에서는 專念의 相續行이 있게 되지만, 絶觀․不思․無作意․無念․不行의 義가 自心에서 구현되도록 하는 행이고, 그 義가 ‘不可得’, ‘一心’의 義인지라 情事에 묶이지 않게 된다. 能所를 떠난 一心인지라 마음이 어디에 따로 향할 곳이 없고, 마음을 어떻게 한다고 함도 있을 수 없다. 그 뜻을 뚜렷이 了知하였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분별 떠난 不動의 心地에 頓入할 수 있다. 그래서■■頓絶百非’이고,■■言語道斷’이며,■■心行處滅’이 된다.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함이 없어서 無心이라 하나 그러한 無心한 마음이 없지 않다. 돈황의 선종 문헌 『無心論』은 곧 이를 설하고 있다. 그러한 無心한 마음의 뜻을 항상 구현되게 이어나가는 행이 곧 守心의 행이다. 이와 같이 自心이 곧 無心인 뜻을 了知하고 행하는 선법인 까닭에 情事가 붙지 않는 행이 된다. 여러 대승경전에서는 아라한이 열반락에 머물러 있는 것을 그 맛에 醉하여 있다고 표현하며 이를 크게 경계하는 한편 대승의 本旨를 그와 대비하여 크게 드러내고 있다. 無爲를 성취한 아라한의 열반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定學의 여러 행들이야 말할 나위 없다. 한편 道恒이 혜가를 공격하게 된 데는 鄴都에서 定學으로 천명의 徒衆을 이끌고 있던 자신의 집단이 크게 위협받게 되는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道恒이 자신의 제자들을 혜가에게 보내어 비판하고 꾸짖게 했으나 오히려 그 제자들이 가기만 하면 혜가의 가르침을 듣고 그 제자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道宣이 당시 定學의 일반적인 풍조를 비판하여■■마음 일으켜 청정을 念하니 어찌 진실에 證會할 수 있을 것인가?(生心念淨 豈得會眞)’라 하였다. 마음을 일으킴 자체가 이미 一心과 無生․不可得 ․ 無分別․不動․無念의 義에 어긋나고, 청정을 念함은 여기에 이미 청정에 대한 情事가 깃들어 있다. 僧稠의 선법이■■情事를 쉽게 드러낼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은 그의 선법이 비록 定學의 규범이 될 수 있는 것이나 대승의 입장에서 볼 때 아직 起心의 행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起心은 곧 청정ㆍ禪定ㆍ法相 등에 끌리고 애착하는 情에 의한 것이니 情事이다. 대승의 교의가 이미 광범하게 유포된 가운데서도 그 深義의 禪旨에 의하지 못하고, 情事의 觀行에 치우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능가선과 僧稠禪 및 定學의 三者의 선법에 대한 이상의 사실 이해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해 이어지는 結言에서 그 해명을 위한 하나의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Ⅳ. 結 言
道宣은 僧稠의 선법을 일반 定學과는 달리 선법의 모범으로 칭송하고 있고,■■情事에 흐르기 쉽다’는 표현으로 情事에 치우친 행을 위주로 하는 일반 定學과 對比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道宣의 달마선과 僧稠禪의 對比는 情事에 흐를 경향이 있는가의 有無로 요약될 수 있다. 한편 초기선종 법문에서 絶觀 내지 無念・不思의 선법을 강조하고, 혜가가■■情事無寄’를 설한 것은 같은 뜻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또한 혜가의 말은 당시 定學에 對比하여 그 잘못을 드러내어 비판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와 같이 三者의 선법이 情事를 기준으로 구분되는 것이라면 돈황자료에서의 달마선과 僧肇禪의 일치는 잘못된 것일까. 僧肇가 일찍이 대승경전을 섭렵하였고,■■不求不遂’의 가르침을 그 禪旨로 삼았고, 神秀와 현색의 제자 淨覺이 神秀의 가르침을 받고 출가한 후 곧바로 僧稠가 머물러 수행하였던 영천곡에 찾아가 자주 머무른 사실 등을 고려한다면 달마선과 상통되는 것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이후 그가 닦고 있는 『열반경』의 사념처법과 소승 선법의 주축이 되는 十六特勝法도 대승선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僧稠의 (진실한) 뜻’으로 題하여 기술한 것은 그의 여러 수행전력이나 行化가 비록 일반 定學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기 쉬우나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道宣은 僧稠의 三傳제자로 直系이고, 달마선의 禪旨를 여러 곳에서 명쾌하게 요략하고 있어 그가 양자의 선법을 구분한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사항은 한 개인의 선법이나 行化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숙 되어감에 따라 달라지고, 동일 시점에서도 어떠한 대상에게 行化한 것인가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달마선은 교와 선 양면에서 원숙되어야 행해질 수 있다. 僧稠가 출가 후 초기에 수행하였던 일련의 선법이나 어느 특정인에게 권하였던 선법의 내용만으로 그가 修證한 선법 전체라고 논단하여서는 안 된다. 그의 修證이 원숙된 후의 行化가 짧은 기간이고, 소수에게 몇 번의 대화만으로 그 가르침이 설해졌다면 道宣이 이를 몰랐을 가능성도 있다. 道宣의 僧稠禪 해설과 이해는 일반으로 알려진 僧稠禪 그것이었다고 한다면 돈황선종문헌에서의 僧稠禪은 선종의 系脈을 통하여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僧稠의 晩年의 성취가 그의 초기나 중기의 제자들 보다는 같은 차원의 법맥에게 쉽게 통해지고 전해질 수 있는 일이다. 淨覺이 神秀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전해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禪法과 그 修證의 성격상 兩 記事의 차이를 總和와 同化 내지 自宗의 확대를 위한 선종의 의도적인 조작으로 논단하기에는 많은 문제가 따른다. 이상의 문제는 달마선이 선법의 宗이 된 사실과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요컨대 僧稠禪은 처음에는 道宣의 기술과 같이 달마선과 구분되는 것이었지만 그 후 어느 땐가 僧稠의 성취가 원숙해짐에 따라 달마선과 상통하게 되어 달마선맥에 그 사실과 그의 법문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 글은 본 주제에 대한 일단의 가능성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고, 상당 부분은 미해결의 장으로 남겨두지 않을 수 없다.
주제어 楞伽禪 Lanka-zen, 僧稠 Seng-chou, 定學 the school of practice for Samadhi, 義學 the school of study of doctrine, 十六特勝法 sixteen particular outstanding practice for Samādhi, 道宣 Dao-xuan, 『大乘心行論』Dacheng-xinxing-lun, 情事 attracting affairs for object
Lanka-zen and Sengchou-zen and the school of practice for Samādhi
Park, keon-joo
According to the interpretation of Dao-xuan(道宣) Lanka-zen(Dar ma-zen) is not the school of study of doctrine(義學), also is different from the school of practice for Samādhi(定學). At the same time Lanka-zen has these both faces. Sengchou has became known to the representative of Hinayana-zen, however his practice ways, so-called four awakenings of mindfulness(四念處) in Nirvana Sūtra, sixteen particular outstanding practices for Samādhi(十六特勝法), shamatha-vipashyanā(止觀) are possible to be practiced by the way of Mahāyāna. Besides the zen doctrine of dun-huang(敦煌) documents such as Dacheng-xinxing-lun(『大乘心行論』) written that the author is Seng-chou(僧稠) are in accord with Lanka-zen(Dar ma-zen) or Mahāyāna-zen. As regarding these points, although Dao-xuan distinguished Sengchou-zen from Darma-zen, it is possible that both zen doctrines have a thread of connection. How can elucidate the problem of discrepancy in both documents? This thesis would suggest one opinion as follows. Lanka-zen can be distinguished from other zen ways in aspect of that that is not attracted by object. In the primary stage Sengchou had practiced Hinayana-zen, and next time in proportion to progress, in the end he became to realize ultimate Mahāyāna-zen. Therefore his zen doctrine became to communicate with Lanka-zen and the members of that. Also this fact seems to have hand down the school of zen. but I wonder, not to have hand down the other school. The documents of zen-school from dun-huang speak for this f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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