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감정의 기원과 그 본성에 관하여
서론
지금까지 감정(정서)과 인간생활에 관하여 기술해 온 대다수의 사람들은 보편적인 자연법칙에 따르는 자연의 사물을 고찰의 대상으로 하지 않고, 마치 자연 밖에 있는 사물에 관하여 논술해 온 것처럼 생각된다. (112쪽)
[주] 스피노자는 감정(affectus)이란 개념을 과거의 뜻이 아닌 혁신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 개념의 근저에는 그의 모든 철학체계와 존재론이 잠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감정은 인간과 자연과 신과 불가분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180쪽)
그러나 감정의 본성과 그 힘에 관하여, 또 감정을 제어할 때 정신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하여 명확하게 밝혀낸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아무도 없다. 물론 고명한 데카르트는 정신이 정신 자신의 활동을 할 때 절대적인 지배력을 지니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여러 감정을 그 제1원인에 의해서 설명하려 했으며, 동시에 정신이 감정에 관해 절대적인 지배권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려 했던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의견으로는, 데카르트는 오로지 그의 위대한 정신적 통찰력만을 보여 주는 데 그쳤다. (112-113쪽)
[주] 데카르트는 그의 [정념론]에서 인간 감정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하여 그의 명민한 상상력을 보였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감정분석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데카르트와는 상이한 분석을 시도했다. (180쪽)
자연 안에서 생겨나는 것 가운데 자연 자체의 결함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자연은 언제나 같은 자연이며, 또한 자연의 힘과 그 활동하는 힘은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이 그것에 따라 생겨나며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에로 변화하는, 자연의 여러 법칙과 여러 규칙은 어디서나 항상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물이건 그 사물의 본성을 인식하는 양식도 동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인식도 역시 보편적인 자연법칙과 규칙에 따라야 한다. 따라서 증오하거나 분노하거나 질투하는 감정도 그 자체로 고찰한다면, 감정 이외의 다른 개물과 같이 자연의 필연성과 힘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로써 감정은 인식되어야 할 확실한 원인을 전제로 하고, 다만 우리가 관상만으로도 기쁨을 느끼는 대상인 다른 사물의 특질처럼, 우리들의 인식에 유용한 일정 특질을 갖추고 있다. (113쪽)
[주] 자연의 힘은 단순한 물리적인 힘과 달리 인간의 덕과 재능의 근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이 힘은 가치, 재능, 덕 등으로 해석된다. 실로 제4부에서는 덕과 힘을 동일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180쪽)
* 德 = 得으로 본 한비자의 관점(德者 得身也 , 한비자 해로1)과 통할 수 있음. (박희택)
* 중요한 것은 유비의 자(현덕·玄德)에 들어 있는 덕(德)이란 개념이다. 사실 이 개념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한비자는 “덕(德)은 득(得)이다”라고 규정했다. 덕은 단순히 도덕적 품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얻는 대상은 ‘사람’이다. 통치자의 덕은 탁월한 신하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고, 스승의 덕은 탁월한 제자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덕은 무력이나 재력과는 다른 능력이다. 무력이나 재력으로는 몸을 잡아둘 수 있을 뿐, 마음을 얻기는 어렵다. 하지만 덕은 마음까지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덕(德)이라는 글자는 ‘얻을 득(得)’과 ‘마음 심(心)’이 합쳐진 형상이다. (강신주)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91218/24921597/1
정의
1. 내가 충분한(타당한) 원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결과가 그 원인만으로 명백하게 파악될 수 있는 원인을 의미한다. 반대로 불충분한 원인 혹은 부분적인 원인은 그 결과가 단지 그 원인만으로 파악될 수 없는 원인을 뜻한다.
2. 스스로 행한다(작용한다, 능동)고 함은, 무엇이 우리의 내부에서나 외부에서 일어날 때 우리가 그것에 관한 충분한 원인일 경우이다. 다시 말하면 (앞 정의에 따라) 우리의 본성에 의해서 명료하고 판연하게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우리의 내부에서나 외부에서 생겨날 경우이다. 반대로 다른 것에 의해서 행해짐(작용됨, 수동)은 우리가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한 그 무엇이, 우리의 내부에서 혹은 우리의 본성에서 생겨나는 경우이다.
3. 감정(정서)이란 신체의 활동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거나 혹은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양(변체=변화상태)이며, 동시에 그런 변양(자극상태)의 관념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만일 우리가 이런 변양의 어느 충분한 원인일 수 있다면, 이 경우 나는 감정을 능동으로 해석하고, 그 이외의 경우에는 수동으로 해석한다. (113-114쪽)
[주] '스스로 행한다(작용한다)'고 하는 말은 '타자에 의해 작용됨'과 같이 스피노자 감정론의 기본개념이다. 이때 전자는 자율적인 것이요, 후자는 타율적인 것을 뜻한다. 이들 두 개념의 구별은 주객문제가 아니라, 인간 행위의 자유문제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인지 혹은 없는 것인지, 또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관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바꾸어 말하면 그 행위의 충분한 원인인지 불충분한 원인인지의 문제이다. (180-181쪽)
[주] 일반적으로 감정은 정신의 수동상태, 즉 정신의 타율적 상태로 간주되지만, 스피노자는 정신의 자율적 상태에서도 감정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감정을 정신의 타율적 작용인 수동적 감정과 구별했다. 따라서 감정은 다만 인간존재의 소극적인 측면을 나타낼 뿐 아니라, 적극적인 측면 즉 인간의 자유로운 자기실현을 나타내기도 한다. (181쪽)
공준
1. 인간의 신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극될 수 있다. 그런 자극으로 말미암아 신체의 활동력은 증대되기도 하고 감소되기도 한다. 또한 신체의 활동력은 증대도 감소도 되지 않는 별개의 양식에 의해서도 자극을 받을 수 있다. 이 공준 - 혹은 공리는 제2부 정리13에 뒤따르는 공준1과 보조정리5와 7에 근거하고 있다.
2. 인간의 신체는 다종다양한 변화를 받아들인다. 게다가 그것은 대사의 인상 혹은 흔적을(이것에 관해서는 제2부 공준5를 볼 것) 지닐 수 있으며, 따라서 사물의 상(像)을 지닐 수 있다. 사물의 상에 관해서는 제2부 정리17의 주해를 참조할 것. (114쪽)
정리
정리1. 우리들의 정신은 어느 때는 스스로 작용[行]하고 어느 때는 작용을 받는다. 즉 정신은 충분한(타당한) 관념을 갖는 경우에 필연적으로 작용하고, 불충분한(타당하지 못한) 관념을 갖는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작용받는다. (114쪽)
증명 : 우리들의 정신은 (이 부의 정의2에 의해) 충분한 관념을 형성하는 한 필연적으로 스스로 작용한다. 이것이 증명의 첫째 요인이다. (...) 그러므로 (이 부의 정의2에 의해) 정신은 불충분한 관념을 갖는 한 불가불 타자에 의해 작용된다. 이것이 증명의 둘째 요인이다. (115쪽)
계 : 정신은 보다 많은 불충분한 관념을 가질수록 더 많이 다른 것에 의해 작용되고, 반대로 보다 많은 충분한 관념을 지닐수록 더 많이 스스로 작용한다. (115쪽)
정리2. 신체에는 정신의 사색활동을 결정하는 능력이 없다. 그리고 정신에도 신체의 운동과 정지 또는 다른 무엇을 (그런 것이 있다면) 결정하는 능력이 없다. (115쪽)
증명 : 사색활동의 모든 양태는 사유하는 경우의 신, 그 이외의 다른 속성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는 신을 원인으로 한다(제2부 정리6에 의해). 따라서 정신의 사색활동을 결정하는 것은 사유의 양태이며 연장의 양태는 아니다. 즉 (제2부 정의1에 의해) 그것은 신체가 아니다. 이것이 증명되어야 할 첫째 요인이다. (...) 물체의 운동과 정지는, 사유의 양태인 정신에서 (제2부 정리11에 의해) 생겨날 수 없다. 이것이 둘째 요인이다. (115-116쪽)
주해 : 정신과 신체는 동일한 것이며, 그것이 어느 때는 사유의 속성 밑에서, 어느 때는 연장의 속성 밑에서 파악된다. 그러므로 자연은 어느 경우엔 이 속성 밑에서, 또 어느 경우엔 저 속성 밑에서 파악되지만, 사물의 질서 또는 결합은 하나뿐이다. 따라서 우리들 신체의 능동 및 수동의 질서는 본래 정신의 능동 및 수동의 질서와 동시에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가 제2부 정리12의 증명에서 사용했던 설명의 방법으로 명백히 밝혀진다. (116쪽)
그런데 정신이 어떤 방법으로 신체를 움직이게 하는지에 관하여 우리가 알건 모르건 간에, 인간 정신에 사유의 힘이 없다면 신체가 움직이지 않음은 경험적으로 명백하다고 그들은 주장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즉 이야기나 침묵 또는 이와 유사한 여러 가지를 하게끔 하는 힘이 오직 정신 안에 내재하고 있음은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명백하며, 따라서 이런 사실은 정신의 명령에 의존한다고 그들은 확신하며 주장한다.
그런데 첫째 문제점에 관해서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겠다. 만일 반대로 신체가 활발하지 못할 경우 정신이 사유하는 데 적합하지 않음을 경험이 가르쳐 주지 않느냐고 묻는다. 왜냐하면 신체가 잠에 빠져 있을 때, 정신도 동시에 신체와 함께 무의식 상태에 머물어 깨어 있을 때와는 달리 활발하게 작용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 다음으로 둘째 문제점에 관해서 살펴보자. 만일 침묵과 잡담을 마음대로 하는 힘이 균등하게 사람들에게 구비되어 있다면 인간사가 훨씬 잘 풀릴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말하는 욕구에 대하여 거의 무저항이며 자신의 충동을 제어하는 힘도 거의 없음을, 경험은 우리들에게 남김없이 가르쳐 주고 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적당하게 욕구하는 행위에만 자유가 있다고 믿는다. (117-118쪽)
[주] 인간의 신체는 그 자신의 법칙에 따라 활동하고, 각성하고 있는 의식도 그 신체의 활동을 어떻게 할 수 없다. 스피노자는 이런 경험적 사실을 중시하여 심신병행설(심신평행론)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181쪽)
사람들이 자유라고 확신하는 근거는, 그들이 자신의 행위를 의식하지만 그 행위의 결정원인에 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정신의 여러 결정은 충동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신체의 상태가 다양함에 따라, 그만큼 정신의 결정에도 변화가 많다는 사실을 경험이 명백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119쪽)
[주]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는 자각된 결의가 아니라, 의식이 미치지 않는 그 무엇에 의해서 제약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행위는 알지만 행위의 원인은 모른다. 그것은 인간의식을 초월한 것이므로 인간의식의 차원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자유도 의식의 세계와 그것을 초월한 세계의 관계 밑에서 설명되었다. (181쪽)
이상의 결론으로 의심없이 자명한 사실이 밝혀졌다. 정신의 결정 즉 충동과 신체의 결정은 본성상 동시에 일어나고 혹은 오히려 동일물이다. 그 동일물이 사유의 속성 밑에서 관찰되고 설명될 때, 우리는 이를 결의(decretum)라 부른다. 또 그것이 연장의 속성 밑에서 관찰되고 운동과 정지의 법칙에서 연역될 때, 우리는 이를 결정(determinatio)이라 부른다. 이것은 곧 다시 논할 때 명백하게 밝혀질 것이다. (119쪽)
정리3. 정신의 능동은 오로지 충분한(타당한) 관념에서 생겨나며, 반대로 정신의 수동은 불충분한(타당하지 않은) 관념에만 의존한다.
증명 : 정신이 불충분한 관념을 갖는 경우 정신의 작용은 당연히 수동적이다(이 부의 정리1에 의해). 따라서 정신의 능동은 오로지 충분한 관념에서 생겨나며, 정신이 불충분한 관념을 가질 때에만 정신의 작용은 수동적이다. (120쪽)
[주] '정신은 관념을 갖는다'고 하는 스피노자의 표현은 정신의 작용 혹은 정신의 사색활동을 의미한다. 관념은 본디 정신의 작용 그 자체를 의미한다. (181쪽)
정리4. 어떤 사물도 외부로부터의 원인이 없다면 파괴되지 않는다. (120쪽)
* [범망경] 제2권에 나오는 '사자신중충(師子身中虫, 獅子身中蟲)'과 통함. (박희택)
정리5. 사물은 한쪽이 다른 쪽을 파괴할 수 있는 관계에 놓여 있는 경우에 한해 대립적 본성을 갖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와 같은 것은 동일한 주체 내에서 양립할 수 없다. (121쪽)
정리6. 각 사물은 그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는 한, 자신의 존재 안에 남아 있으려고 한다.
증명 : 말하자면 개개의 사물은 양태이며, 이 양태에 의거하여 신의 속성은 일정하고 한정된 방식으로 표현된다(제1부 정리25의 계에 의함). 바꾸어 말하면 (제1부 정리34에 의해) 신이 존재하고 활동하는 자신의 힘을 일정하고 한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121쪽)
* '신이 존재하고 활동하는 자신의 힘'은 '코나투스'로 불림. (박희택)
정리7. 각 사물이 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노력은 사물 자체의 실제적인 본질이다. (121쪽)
* 쇼펜하우어의 용어로는 '삶에의 의지'가 되겠으며,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연결됨. (박희택)
정리8. 각 사물이 자신의 존재 안에 지속하고자 하는 노력은 제한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을 포함한다.
증명 :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노력은 자체 안에 제한된 시간을 포함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물은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 괴멸되지 않는다면 현존하는 것과 같은 능력에 의하여 항상 존속하기 때문에 (이 부의 정리4에 의해), 이 노력은 무한정한 시간을 포함하고 있다. (122쪽)
[주] '노력한다'는 스피노자의 말은 일반적인 의미인 어떤 특정한 개인적 의지의 작용을 뜻하지 않는다. 그의 노력이란 말의 뜻은, 각 개인의 개인적 의지 및 선택이라기보다 개체의 본성이며, 마치 아래로 흐르는 것이 물의 본성인 것처럼 개체 자신의 내적 필연의 힘이요, 개체의 존재 근거를 뜻한다. (181쪽)
정리9. 정신은 명료하고 확연한 관념을 갖고 있건, 혼란한 관념을 갖고 있건 자신의 존재 안에 무한정한 시간 동안 지속하려고 한다. 그리고 정신은 자신의 이런 노력을 자각한다. (122쪽)
주해 : 이 노력은 단지 정신에만 관계될 때 의지라고 하며,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될 때 충동이라고 한다. 따라서 충동은 곧 인간의 본질이다. (...) 충동의 본성은 인간에게 자기보존을 하게 만드는 인간의 본질이다. 다음으로 충동과 욕망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차이가 없다. 대체로 욕망은 자신의 충동을 의식하는 한 주로 인간에게 관계된다는 것 뿐이다. 따라서 욕망이란 의식을 동반하는 충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상의 사실들을 총괄해 볼 때, 우리는 사물이 좋다고(선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고, 의도하며, 혹은 충동을 느끼거나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력하고 의지하며 욕구하고 충동을 느끼기 때문에 좋다고(선하다고) 판단한다. (122-123쪽)
정리10. 우리 신체의 존재를 배제하는 관념은 정신 안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런 관념은 오히려 정신과 대립한다.
증명 : 우리 정신의 출발점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부의 정리7에서) 신체의 존재를 긍정하려는 노력이다. (123쪽)
* 스피노자의 신체철학(몸철학)에 관한 언명이며, 이하에서도 이어짐. (박희택)
정리11. 우리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고 감소시키며 촉진하고 억제하는 사물의 관념은, 정신의 사유하는 능력을 증대시키고 감소시키며 촉진하고 억제한다. (123쪽)
주해 : 기쁨이란 정신이 좀더 커다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정신의 수동을 뜻하며, 슬픔이란 정신이 좀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정신의 수동을 뜻한다. 또 즐거운(기쁜) 감정이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할 때, 나는 그것을 쾌감 혹은 상쾌라고 한다. 그리고 슬픔이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할 경우, 나는 그것을 고통 혹은 우울이라고 한다. (...) 욕망에 관해서는 이 부의 정리9의 주해에서 설명했다. 이 세 가지[슬픔, 기쁨(즐거움), 욕망] 이외에 나는 아무런 기초감정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음에서 밝히겠지만, 다른 감정은 위의 세 감정에서 파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23-124쪽)
정리12. 정신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시키는 것을 가능한 한 표상하려 한다. (124-125쪽)
정리13. 정신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억제하는 것을 표상할 때, 가능한 그런 것의 존재를 배제해 주는 사물을 가능한 한 상기하고자 한다.
주해 : 사랑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즐거움)이다, 또 증오는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125쪽)
정리14. 정신이 만일 어느 때 두 개의 감정(정서)에 의해서 동시에 자극받는다면, 정신은 뒤에 그중 어느 하나의 감정에 의해서 자극받았을 때 다른 하나에 의해서도 반드시 다시 자극받게 될 것이다. (126쪽)
정리15. 각 사물은 우연에 의해 기쁨과 슬픔 혹은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계 : 우리는 기쁜 감정 혹은 슬픈 감정상태에서 사물을 관상하는 것만으로, 그 사물은 결코 기쁨과 슬픔의 동력인이 될 수 없는데도 그것을 사랑하고 증오할 수 있다. (126-127쪽)
정리16. 우리는 정신에게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게 하는 대상물과 어떤 것이 유사하다고 표상하는 것만으로, 비록 그것이 감정의 동력인이 아니라 그 대상과 유사점만을 갖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거나 혹은 증오할 것이다. (127쪽)
정리17. 만일 우리에게 언제나 슬픈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또한 항상 우리에게 동일한 크기의 기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어떤 다른 것과 무엇인가 유사하다고 표상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증오함과 동시에 사랑할 것이다. (128쪽)
정리18. 인간은 과거나 미래의 사물의 표상상(表象像)에 의해서도, 현재의 사물의 표상상에서 받는 것과 같은 기쁨과 슬픔의 감정(정서)에 자극받을 수 있다. (129쪽)
주해2 : 희망은 불안정한 기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기쁨은 우리에게 의심스러운 결과를 주는 사물의 미래 혹은 과거의 상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공포란 역시 의심스러운 사물에 관한 상에서 생겨나는 불안정한 슬픔이다. (...) 희망은 안도가 되고, 공포는 절망이 된다. 즉 그것은 우리가 무서워하거나 희망하는 사물의 상에서 생겨나는 기쁨 혹은 슬픔이다. 그리고 환희는 우리들이 그 결과에 관해, 회의적으로 보았던 과거의 사물에 관한 상에서 의심이 사라질 때 생겨나는 기쁨이다. 끝으로 낙담은 환희에 대립되는 슬픔이다. (129-130쪽)
정리19. 자기가 사랑하는 사물이 부정(파괴)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은 슬퍼할 것이요, 반대로 사랑하는 사물이 보존(유지)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은 기뻐할 것이다. (130쪽)
정리20. 자신이 증오하는 사물이 부정(파괴)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은 스스로 기뻐할 것이다. (130쪽)
정리21. 자신이 사랑하는 사물이 기쁨이나 슬픔으로 자극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은, 역시 기쁨과 슬픔으로 자극받을 것이다. 이들 두 감정의 강도로 말하자면, 사랑받는 사물이 받는 자극의 강약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이 받는 자극의 강약도 규정된다. (131쪽)
정리22.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물에 기쁨(즐거움)을 준다고 표상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자극받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 사람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물에 슬픔을 부여한다고 표상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증오로 자극받을 것이다. (131쪽)
정리23. 자신이 증오하는 사물이 슬픔으로 자극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은 스스로 기쁨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증오하는 사물이 기쁜 상태로 자극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은 슬픔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감정은, 자신이 증오하는 대상을 안에서 대립되는 감정의 강약에 따라 그 강약이 규정된다. (132쪽)
정리24.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가 증오하는 사물에 기쁨을 부여한다고 표상되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하여 증오심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우리가 증오하는 사물에 슬픔을 부여한다고 표상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끔 마음이 자극받을 것이다. (133쪽)
정리25.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물에 기쁨을 준다고 표상되는 일체를 긍정하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슬프게 만드는 것으로 표상되는 일체를 부정하려고 노력하다. (133쪽)
정리26. 우리가 증오하는 것을 슬픔으로 자극하면, 우리들이 표상하는 모든 것을 그 증오하는 것에 대하여 긍정하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증오하는 사물에게 기쁨으로 자극하면, 우리가 표상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려고 노력한다. (134쪽)
정리27. 우리와 유사한 것에 대하여 우리가 아무런 감정(정서)도 갖지 않았을 경우, 그것이 무엇인가의 감정에 의해서 자극되는 것을 표상한다면,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유사한 감정에 의해서 자극된다. (134쪽)
정리28. 우리는 기쁨을 촉진하는 것으로 표상되는 모든 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우리는 기쁨에 모순되거나 혹은 슬픔을 가져오리라고 표상되는 모든 것을 멀리하거나 부정(파괴)하려고 노력한다. (136쪽)
정리29. 사람들이 기뻐할 것이라고 표상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스스로 행하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사람들이 싫어할 것으로 표상되는 모든 것을, 우리는 행하기를 거부(혐오)한다. (137쪽)
정리30.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고 표상하는 어떤 일을 한다면, 그는 기쁨으로 말미암아 자극되어 있으며 자기 자신을 기쁨의 원인으로 자각할 것이다. 즉 그는 자기 자신을 기쁨으로 고찰할 것이다. 반대로 그가 타인에게 슬픔을 준다고 표상하는 어떤 일을 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슬픈 것으로 고찰할 것이다. (137쪽)
정리31. 만약 우리 자신이 사랑하고 욕구하며 증오하는 것을 어떤 사람이 사랑하고 욕구하며 증오한다고 표상한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더욱 강하게 사랑하고 욕구하며 증오할 것이다. 또 거꾸로 만일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어떤 사람이 혐오하거나 혹은 반대를 (우리가 미워하는 것을 그가 사랑함을) 표상한다면, 우리는 마음의 동요를 느낄 것이다. (138쪽)
계 :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타인도 사랑하고, 증오하는 것을 타인도 증오하게끔 가능한 한 노력한다. 이런 사실로부터 그 유명한 시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들이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품는 동시에 두려워한다. / 타인이 버린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리석기 한이 없도다." (139쪽)
[주] 이 시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 BC 43~AD 17?)의 [사랑] 2권 19의 제4구와 제5구를 거꾸로 인용한 것이다. (181쪽)
* 로마 제국의 3대 시인은 베르길리우스(BC 70~19), 호라티우스(BC 65~8), 오비디우스(BC 43~AD 17?)임. (박희택)
정리32. 만일 어떤 사람이 무엇을 오로지 혼자서 소유하며 기뻐한다고 표상한다면, 우리는 그가 그것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139쪽)
정리33. 우리는 자신과 유사한 것을 사랑할 때,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려고 가능한 한 노력한다. (140쪽)
정리34. 사랑받는 것이 우리를 향해 자극되어 있다고 표상하는 그런 감정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더 큰 명예를 느낄 것이다. (140쪽)
정리35. 만일 자기로부터 사랑받는 대상이 다른 사람과도 애정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것도 자신이 독점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거나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표상한다면,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 자체에 대한 증오를 느끼고 또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질투심을 느낄 것이다(그림3 참조). (141쪽)
주해 : 사랑받는 것에 대한 이와 같은 시기심과 결합되어 있는 증오를 우리는 질투(시기)라고 한다. 따라서 이 질투는 사랑과 미움이 함께 작용하는 데서 생겨나며, 이것은 그가 질투하는 다른 사람의 관념을 동반하는 마음의 동요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이 미움(증오)의 강도는 기쁨의 강도에 비례한다. (142쪽)
* 정리35는 삼각관계를 말함. (박희택)
정리36. 언젠가 자신이 즐거웠던 것을 상기하는 사람은, 처음 그가 즐겼던 때와 같은 조건 아래에서 그것을 누리려고 한다. (143쪽)
정리37. 슬픔이나 기쁨에서, 혹은 증오나 사랑에서 생겨나는 욕망은, 그것에 대한 감정(동요)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커진다. (143쪽)
정리38.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증오하여 결국 사랑이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때 사랑과 증오의 원인이 동일하다면, 그는 그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을 경우보다 더 큰 증오를 느낄 것이며, 이 증오는 이전의 사랑이 더 큼에 따라 그만큼 더 클 것이다. (144쪽)
정리39.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에게 더 커다란 화가 닥쳐올 염려가 있다면 그렇지 않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같은 법칙에 따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을 베풀려고 할 것이다. (145쪽)
주해 : 내가 여기서 말하는 선은 모든 종류의 기쁨이요, 더 나아가 기쁨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며, 특히 모든 종류의 희망을 중족시켜 주는 것이다. 반대로 해악은 모든 종류의 슬픔이며, 특히 희망의 충족을 방해하는 것이다. (...) 하고 싶은 것을 욕구하지 않거나, 또는 하고 싶지 않을 것을 욕구하려는 감정을 우리는 겁이라고 한다. 따라서 겁은 일종의 공포이다. 즉 그것은 사람이 미래에 예상되는 해악을 감소시키려고 하는 데서 생겨나는 공포이다(이 부의 정리28을 볼 것). 이때 만일 두려워하는 그 해악이 치욕이라면, 사람들은 그 겁을 수치라고 한다. 끝으로 만일 미래에 닥쳐올 해악을 피하려는 욕망이 별개의 해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억제되고, 그 결과 자기의 의욕하는 바를 알지 못하게 되었을 때, 특히 그 두 해악이 매우 크다면 그런 두려움을 우리는 공황(당황)이라 한다. (145-146쪽)
정리40. 자기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증오받을 아무런 근거 없이 증오받는다고 표상한다면, 오히려 자신을 증오하는 그 사람을 미워한다. (146쪽)
계1 :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증오한다고 표상하는 사람은,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느낀다.
계2 : 만일 어떤 사람이 그때까지 아무런 감정도 갖지 않았던 다른 누군가로부터 증오받고 그로 말미암아 해악을 입었다고 표상한다면, 그는 즉시 동일한 해악으로 그 사람에게 보복하고자 ㅎ나다.
주해 : 증오하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려 하는 노력을 우리는 분노(노여움)라 한다. 반대로 가해진 해악에 보복하려는 노력을 우리는 복수라 한다. (147쪽)
정리41.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런 이유와 근거 없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다고 표상한다면(이런 경우는, 이 부의 정리15의 계와 정리16에 의해 생겨날 수 있다), 그도 그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 (147쪽)
계 :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다고 표상하는 사람은, 증오와 동시에 사랑을 느낄 것이다.
주해 : 만일 미움이 사랑을 능가한다면 그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악을 가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감정을 우리는 잔인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증오의 원인이 없다고 생각될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148쪽)
정리42. 사랑에 의해서든 명예에 기대해서든 어떤 사람에게 은혜(선행)를 베푼 사람은, 만일 그 은혜가 보람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슬픔을 느낄 것이다. (148쪽)
정리43. 증오는 증오의 보복으로 인하여 증대되며 반대로 사랑으로 인하여 제거될 수 있다. (148-149쪽)
* [법구경] 쌍요품(불교성전 4-2)에 “이 세상에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는 풀리지 않고, 원한을 버림으로써 풀린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다”는 말씀이 있음. (박희택)
정리44. 사랑에 의해서 완전히 극복된 증오는 사랑으로 바뀐다. 그때 이 사랑은 증오가 선행되지 않았을 때보다도 한층 더 크다. (149쪽)
정리45. 누군가가 만일 자기와 유사한 타인이 마찬가지로 자기와 유사하며 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증오한다고 표상한다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움을 주는 사람을 증오할 것이다. (150쪽)
정리46.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과 계급이나 민족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계급과 인종이라는 보편적인 명칭 아래에 속하는 그를 원인으로 의식할 만한 기쁨 또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면, 그는 자신에게 자극을 준 그 사람뿐 아니라 그가 속한 계급이나 인종의 모든 것까지도 사랑하거나 증오할 것이다. (150쪽)
정리47. 우리가 증오하는 대상이 파괴되거나 어떤 다른 화를 당하게 된다고 표상하는 데서 생겨나는 기쁨은, 반드시 마음의 슬픔을 동반한다. (150쪽)
정리48. 사랑과 증오, 예를 들면 베드로에 대한 사랑과 증오는, 증오가 포함하는 슬픔 및 사랑이 포함하는 기쁨이 다른 원인의 관념과 결합한다면 사랑과 증오는 소멸된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 두 감정의 유일한 원인이 아님을 우리가 표상할 때 두 감정의 힘은 감소된다. (151쪽)
정리49. 우리가 자유롭다고 표상하는 존재물에 대한 사랑과 증오는, 필연적이라고 표상하는 존재물에 대한 사랑과 증오보다 강해야 된다.
증명 : 만일 그것이 기쁨이나 슬픔의 원인이라고 표상된다면 (이 부의 정리13의 주해에 의해) 바로 그 자체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거나 증오할 것이다. (...) 만일 이 감정의 원인이 된 대상을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한다면 (제1부 정의7에 의해) 우리는 그것이 유일한 원인이 아니고, 그 감정의 원인이 되는 다른 것도 함께 존재한다고 표상할 것이다. (152쪽)
정리50. 모든 존재물은 우연으로 말미암아 희망이나 공포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주해 : 우연으로 희망이나 공포의 원인이 되는 것은 길조 혹은 흉조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런 전조는 그것이 희망이나 공포의 원인인 한, 기쁨이나 슬픔의 원인이기도 하다(희망과 공포의 정의에 의거. 이에 관해서는 이 부의 정리18의 주해2에 명시된 정의를 볼 것). 그리고 그런 경우는 우리는 (이 부의 정리15의 계에 의해) 당연히 그 전조를 사랑하거나 증오한다. 더욱이 우리는 (이 부의 정리28에 의해) 그것을 우리가 희망하는 수단으로 보고 이용하거나, 장애물 혹은 공포의 원인으로 보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152쪽)
정리51. 서로 다른 인간은 동일한 대상에 의하여 서로 다른 방법으로 느끼질 수 있으며(자극될 수 있으며), 동일한 인간도 동일한 대상에 의하여 서로 다른 때에 다른 방식으로 느껴질(자극될) 수 있다. (153쪽)
정리52. 우리가 이전에 다른 대상물들과 동시에 보았던 어떤 대상, 또는 다른 많은 것과의 공통점 이외에 아무런 특징도 갖지 않는 것으로 표상되는 대상은, 어떤 개별성을 갖는다고 표상하는 대상에 대해서만큼 계속해서 고찰할 수 없을 것이다. (154쪽)
정리53. 정신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활동력을 잘 생각할 때 스스로 기뻐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력을 좀더 분명하게 표상하면 할수록 정신의 기쁨은 더욱 커진다. (156쪽)
* 기초 감정 세 가지 중 '기쁨'에 관한 언명임. (박희택)
정리54. 정신은 자기 자신의 활동 능력을 긍정(정립)하는 것만을 표상하려고 노력한다. (157쪽)
* 기초 감정 세 가지 중 '욕망'에 관한 언명임. (박희택)
정리55. 정신은 자기의 무력함을 표상할 때, 바로 그 때문에 슬픔을 느낀다. (157쪽)
* 기초 감정 세 가지 중 '슬픔'에 관한 언명임. (박희택)
정리56. 기쁨 · 슬픔 · 욕망 및 이들로부터 형성된 마음의 동요와 같은 또는 이들로부터 파생된 사랑 · 증오 · 희망 · 공포 등의 모든 감정은, 우리를 자극하는 대상의 종류만큼이나 많이 존재한다.
증명 : 기쁨과 슬픔, 그리고 여기서 형성되거나 파생되는 감정은 (이 부의 정리11의 주해에 의해) 수동감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불충분한 관념을 갖는 한 (이 부의 정리1에 의해) 필연적으로 작용을 받는다. 그리고 그와 같은 불충분한 관념을 갖는다는 이유만으로 (이 부의 정리3에 의해) 우리는 작용을 받는다. (...) 그런데 욕망은 각 개인의 본질, 혹은 본성 그 자체이다. 다만 이것은 각 개개인은 주어진 상태에 따라 어떤 행동을 하게끔 결정되어 있다고 간주될 경우에 한한다(이 부의 정리9의 주해를 볼 것). (159쪽)
정리57. 어떤 개인의 감정도 다른 개인의 감정과 결코 일치할 수 없다. 그 차이는 한 인간의 본질이 다른 인간의 본질과 얼마나 다른가에 따라 그만큼 커진다. (160쪽)
정리58. 수동적인 기쁨이나 욕망 이외에, 스스로 자유롭게 활동함으로써(능동적으로) 우리에게 관계하는 기쁨과 욕망의 감정이 있다. (162쪽)
정리59. 스스로 자유롭게 활동하는 정신에 관계하는 감정은, 모두 기쁨이나 욕망에 관계하는 감정이다. (162쪽)
증명 : 모든 감정은 욕망이나 기쁨이나 슬픈 감정과 관련되어 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이미 감정의 정의에서 명시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슬픔은 (이 부의 정리11과 그 주해에 의해) 정신의 인식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억제한다. 따라서 정신이 슬퍼하는 한 인식력 즉 정신의 활동력은 (이 부의 정리1에 의해) 감소되거나 억제된다. 그러므로 어떤 슬픈 감정도 스스로 활동하는 정신에 귀속할 수 없으며, 다만 기쁨과 욕망의 감정만이 (앞 정리에 의해) 스스로 활동하는 정신에 관계된다. 이로써 이 정리는 증명되었다. (162-163쪽)
주해 : 지적 인식을 하는 경우의 정신에 귀속되는 감정에서 생겨나는 모든 활동을 나는 정신력(지력)이라고 한다. 이 정신력은 용기와 관용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용기를 개인이 다만 이성의 명령에 따라 각자의 존재 안에 남아 있으려고 노력하는 욕망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와 달리 관용은 개인이 다만 이성의 명령에 따라서 타인을 돕고, 그 사람과 우정의 유대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욕망으로 이해한다. (...) 이로써 나는 세 개의 기본적인 감정, 즉 욕망 · 기쁨 · 슬픔이라는 세 개의 감정을 결부함으로써 생겨나는 가장 중요한 감정과 마음의 동요에 관해서 설명하고, 또 그것을 제1원인에 따라 밝힌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까지 알아 보았듯이 우리는 대단히 다양한 방법으로 외적 원인에 의해서 부단히 자극되고, 회오리바람에 소용돌이치는 파도처럼 운명과 죽음을 알지 못하면서 흔들리고 있다. (1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