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나의 여행
이른 아침 선교사님의 글 『그대, 나의 얼굴』을 봉독하면서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는다. 오후에 공항에 가게 되어 한껏 게으름을 피우고파 늘어지기도 했지만, 오늘은 마법의 비행기를 타고 성지순례를 가는 날이라 가벼운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알마 수녀님과 베네딕도 신부님의 동행으로 일본 나가사키로 성지순례 갔다.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하니 현지 소속 가이드 수녀님과 일본인 운전기사가 마중 나왔다. 히라도 란푸로 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 어둠이 해를 가렸다. 나가사키시에 있는 식당에서 유명한 짬뽕을 먹었다.
호텔에 도착한 후 로비에 비치된 유카타 옷을 골라 담아서 잠을 자기 위해서 배정된 다다미방으로 갔다. 룸메이트와 유카타 옷을 갈아입고 웃으며 추억의 사진을 찍었다. 5층에 있는 대온천장으로 손잡고 걸어갔다. 먼저 와서 온천욕을 하는 일행이 찬물을 뿌려 환호성을 질렀다. 온천의 흰빛연기에 부끄러움도 잊고 시간의 조류에 따라 흘러나오는 물에 몸을 맡기며 여유를 부렸다. 새로운 분위기에 젖어 있으니 내가 제대로 길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 행복했다. 노천탕을 번갈아 오가며 매끄러운 물로 여독을 풀었다. 온천 문화가 있는 일본인들이 잠옷처럼 생긴 옷을 입고 엘리베이트도 타고 다니는 것이 인상적이다. 퇴행성 관절염으로 무릎이 아팠던 것이 싹 가신 듯 했다. 침실로 돌아와서 따뜻한 차 한잔을 나누면서 갈증을 채웠다. 친구의 “잘 자요” 한 마디에 꿈나라로 갔다.
이튿날, 소토메에 있는 시쓰마을로 갔다. 굽이굽이 산자락의 숲길을 따라갔다. 유명한 하우스 덴보스 호텔 앞을 지날 때 가이드가 입장료만 40만 원을 받는다는 네델란드의 ‘숲속의 집’을 가리켰다. 한국의 청소년들이 여행 와서 이 숙소에서 묵는다고 자랑한다.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산자락에 있는 굴뚝 세 개 암호(돌아, 돌아, 돌아)가 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출발할 때 쓰였다. 일본이 경제적인 불황에 직면해 있었고,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전개된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되었다. 전쟁이 한국에 피해를 주었던 것을 잠시 잊고 일본이 세계정세에 힘겨루기로 살아남기 위하여 공격하며 군사작전을 지휘하던 곳에 서 있다. 맞바람이 세차게 부는 바다 위의 다리를 건너는데 영화 「콰이강의 다리」 촬영지라고 했다. 지금은 관광지로 관광객이 많이 온다고도 했다.
다음 코스는 시쓰 성당과 드로 신부 기념관을 갔다. 드로 신부가 활동했던 시쓰 마을은 성직자 배출이 100명이었다. 까리타스 수녀원에서 교육받고 방학을 하면 집에 오고 그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성직자가 된다고 한다. 드로 신부는 건축업을 배워서 시쓰 성당을 직접 지었다. 맞은편 창문과 바람을 통하게 하여 맞바람을 불도록 했다. 에어컨이 필요 없으며 해풍을 견디기 위해 천장을 낮게 했다. 못질이 거의 없다. 어떤 목수를 키워서 그 건축가는 화려한 성당을 지어서 신부님이 두 개의 성당을 지은 셈이다. 마을 사람들의 궁핍한 생활을 밀경작법을 가르쳐 주어서 도왔다. 국수 만드는 기술을 보급하였고 마카로니도 만들었다. 1800년대 나가사키 항구에 외국인의 배를 가장 먼저 입항 허가해 준 곳으로 유명한 나가사키 짬뽕이 있다. 시츠(시쓰) 마을이 유네스코 문화재에 등록되어 있다. 엔도 수사쿠 문학관을 방문했다. 순례 오기 전에 『깊은 강』을 읽고 갔는데 노벨상에 근접한 일본의 대문호의 작가를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문학관을 둘러보니 『침묵』 등 저서가 너무 많아 놀랐다. 문학관 앞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베네딕도 신부님이 일행에게 아이스크림을 샀다.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옷에 많이 흘려서 일본인 점원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일본말이 빨리 안 나와서 배꼽을 잡고 한바탕 웃었다.
셋째 날, 운젠(雲仙)계곡 지옥의 온천 두 곳을 갔다. 유황이 운율에 맞춰 끓어 오르며 은빛 연기가 구름 같았다. 저만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너는 어디에서 나와 조우하는가?’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이 생각났다. 천주교 박해 시절에 (화형) 마른 장작더미를 머리 위에 얹으며 몸은 뜨거운 온천물에 담갔다 뺐다 배교背敎 하라고 영주가 하였다. 그들은 숯덩이를 머리 위에 얹고 순교하였다. 전국 금지령을 내렸을 때 영주가 바뀌어 막달레나외 50명이 체포되어 감옥에 갔는데 “손가락을 몇 개 자를까” 묻고, 이들 중에 우치 부리 세 아들은 “성체는 지극히 찬미 받으소서” 하며 배교를 거절하고 굴곡의 삶으로 나카우라 줄리아노 신부가 되어 돌아왔다. 거성, 별장성, 하기성 장소에는 이십 팔만 천명의 무명 순교자가 있다. 1800년대 소신 학교 소년 4명이 교황청(로마)에 갔다. 아카에 시치아 교황이 준 귀족들의 옷을 받은 소년이 귀국할 때 천황께 선물로 바이올린을 가져와서 음악을 들려주었다. 천황은 이들에게 관직을 주었지만 사양하고 예수님의 수난 하늘과 그것을 기리며 살았다.
시마바라 순교자 기념 성당으로 갔다. 나가사키에서 순교한 26 성인 400주년과 시마바라 난을 기념으로 돔 형태의 성당이 1997년 건축되었다. 성당 마당에는 1613년 아리마와 운젠에서 순교한 자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신자들은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에 성을 지었다. 7년 기근이 들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해서 세금을 물지 못하고 신자들은 순교자가 되어 끝이 났다. 그 후 사람들의 노력으로 성을 완성하여 보존되고 있다.
마지막 날, 오우라 성당을 갔다. 사람들이 150년(7대) 신앙생활을 가지고 있었다. 6년간 유배 생활을 하다가 돌아왔다. 신자들은 이를 여행이라 했고 1925년 성당이 재축성 되었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로 성당이 무너지고 성모님의 눈이 날아갔다. 전쟁으로 살아난 성모님은 오우라 성당 안 제대 위에 모셔져 있다. 현재 1,200명의 신자가 있으며 유배로 인한 8,500명은 돌아가셨다. 평화 공원에도 갔다.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어 이만 사천 명이 사망하였으며, 폭탄이 투하된 지점은 헨스를 만들어 보존하고 있다. “원자 폭탄은 인간이 만든 재앙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말을 하고 있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나가사키 의과대학 방사선 과를 전공하여 원폭투하로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스스로는 방사선치료를 목적으로 의사 생활을 하였다. 방사선이 폐에 많이 침범해서 망가져 죽었다. 고질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여 『아버지의 목소리』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일행은 나가이 다카시 기념 문학관에 방문했다. 맞은편 건물 방사선 연구실에서 의사들이 아직도 방사선 연구에 몰입하고 있다.
성지순례는 민간 외교 사절이라고 가이드 수녀님께서 말한다. 일본인을 무조건 미워만 하고 살아서 안 된다고 하신다. 나는 우리나라의 이미지와 국가 브랜드를 높이며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다. 외교 관계를 증진 시키고 국제사회에 영향력을 높이는 외교활동 등을 하며 작가이기도 한 수녀님은 30년째 일본에 거주하시며 봉사를 하신다.
성경학교에 다닐 때 30분 일찍 가서 수녀님과 반장들 모임에 참석하였다. 공지사항을 반원들에게 전달하고 반원들이 결석이 있으면 왜 안 나왔는지 파악하여 수녀님께 보고하였다. 반원들과 나눔을 통해 영성 생활을 하도록 도왔다. 삶을 수필로 적어서 묵상 나눔을 했다. 때로는 직장 생활로 숙제를 못 해온 분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소재로 하루 있었던 일을 소통하며 어우러져 신약성경반을 통독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한다. 수녀님의 재능기부를 재의 받았다. 올해는 입학생이 적어 봉사하지 않기로 결론 내었다. 가성비價性比 괜찮은 신앙심이 깊으면 좋겠다.
공자는 ‘배우고 익히며 벗을 만나는 것이 기쁘지 아니한가?’ 했다. 누구나 꿈꾸는 아름다운 삶, 매주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고 산다. 진짜 행복은 무엇일까 생각에 잠기면, 어느새 엄마의 젖내를 킁킁거렸다. 성지순례로 엄마의 품처럼 따뜻함을 느낀 나는 참이 되었다. 졸업 후 부활절을 지내는 첫해이다. 태양이 뜨는 쪽이 east이므로 새 희망이 솟아오른다는 east day 선물을 받았다. 살다 보니 내 삶에 일곱 빛깔 기분 좋은 무지개가 생겼다. 북쪽 동쪽 서쪽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며 무지개처럼 조화로운 관계의 중요성을 생각했다, 100세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나는 은혜로움으로 가득했으면 하고 기도했다. 성지순례 후에 푸근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날 쿵곽쿵곽 내 발자국 소리와 아이의 소탈한 인사 소리에 하루가 접히고 있었다.
첫댓글 오로지 육선생님을 위한 성지순례였네요. 기쁨이 가득하니 성지순례하는 동안 만나는 모든 분들이 좋아 보였고, 돌아와 만나는 가족들도 더 없이 반갑고요.
이번 성지 순례는 그 어느 때보다 기쁘고 의미 있는 행사였네요. 100세 시대 필수품인 넉넉한 마음 잘 키워가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