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수[虎宿]백호(白虎)의 성수(星宿)로서 즉 서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 호수매치[胡首埋置]국경을 침범하였다가 잡혀 참수된 호인의 머리를 한성부(漢城府)가 호인이 왕래할 때 지나는 길가에 묻어두어 징계가 되게 하는 것.
♣ 호수면낭[皓首當年未免郞]한(漢) 나라 풍당(馮唐)이 흰머리가 되도록 낮은 관직인 낭관으로 있다가 문제(文帝)가 마침 낭서(郞署)를 지나다가 그와 문답하여 보고 그의 인재를 알아준 일이 있다.
♣ 호수한사[皓首漢駟]젊은 나이에 사신(使臣)으로 호국(胡國)에 들어가 억류생활을 하다가 19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보니 머리가 이미 하얗게 변했다는 한(漢) 나라 소무(蘇武)의 고사로 사람의 불우(不遇)를 뜻한다.
♣ 호숭[呼嵩]한 무제(漢武帝)가 숭산(嵩山)에 올랐더니, 신하들이 말하기를, “산이 만세(萬歲)를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하였다. 여기서는 곧 만세를 부른다는 말이다.
♣ 호승[胡僧]서역(西域)에서 온 중을 말한다.
♣ 호승[胡繩]향기로운 풀 이름.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에 자기 자신을 깨끗하고 향기롭게 가꾼다는 뜻으로, “계수나무를 들어 난초 꿰달고, 호승으로 노끈을 길게길게 꼬리.[矯菌桂以紉蘭兮 索胡繩之纚纚]”하였음.
♣ 호승[胡僧]호승은 인도의 중이란 뜻이다.
♣ 호시[楛矢]호시는 호목(楛木)으로 만든 화살인데, 주 무왕(周武王) 때에 숙신씨(肅愼氏)가 이 화살을 조공했다는 데서, 즉 사방 오랑캐들이 중국에 귀순하여 조공함을 뜻한다. 국어(國語) 노어(魯語)에 “공자가 진(陳) 나라에 있을 때 새매가 진후(陳侯)의 뜨락에 날아와서 죽었는데 돌촉의 싸리나무 화살에 관통된 것이 길이가 한 자가 넘었다. 진후가 사람을 시켜 새매를 가지고 공자에게 가서 물으니 공자가 이르기를 ‘이 새매가 멀리 왔다. 이 화살은 숙신씨(肅愼氏)의 화살이다.’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 호시[怙恃]믿어서 의지하는 것. 자식의 호시는 부모요, 신하의 호시는 임금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육아(蓼莪)에 “아버지가 없으면 누구를 믿으며 어머니가 없으면 누구를 의지하랴!" 하였다.
♣ 호시[虎市]저자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을 하면 믿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韓非子 內儲說》
♣ 호시[弧矢]호시는 상호봉시(桑弧蓬矢)의 준말로, 아들을 낳았음을 뜻함. 옛날에 아들을 낳으면 뽕나무로 만든 활과 쑥대로 만든 화살 여섯 개로 천지(天地)와 사방(四方)을 향하여 한 개씩 쏘았던 데서 온 말인데, 그것은 곧 남아(男兒)가 사방에 웅비(雄飛)하기를 축원하는 뜻에서라고 한다. 《禮記 內則》
♣ 호시석노[楛矢石砮]탱자나무 비슷한 나무로 만든 화살과 돌화살촉이라는 뜻인데, 주 나라 때 동방 민족인 숙신국(肅愼國)에서 공물로 바치던 것이다. 《國語 魯下》
♣ 호시원[弧矢願]호시는 뽕나무로 만든 활과 쑥대로 만든 화살로, 천하를 경략하고자 하는 큰 뜻을 말한다. 옛날에 아들이 태어난 뒤 3일이 지나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서 천지 사방에 활을 쏘아, 남아로 태어났으면 응당 사방을 돌아다닐 뜻을 품어야 함을 표상하였다. 《禮記 內則》
♣ 호시장도[弧矢壯圖]천하를 경략하고자 하는 큰 뜻을 말한다. 고대에 아들이 태어나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서 천지 사방에 활을 쏘아, 남아로 태어났으면 응당 사방을 돌아다닐 뜻을 품어야 함을 표상하였다. 《禮記 內則》
♣ 호시지[弧矢志]호시는 상호봉시(桑弧蓬矢)의 준말로,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을 말한다. 쑥은 어지러움을 막는 풀이고 뽕나무는 모든 나무의 근본이라 하여 상고 때 사내가 태어나면 뽕나무로 만든 활에 쑥대화살 여섯 개를 천지와 동서남북에 쏘아 보내 장부의 뜻이 원대하여 천지 사방에 있음을 표시하였다 한다. 곧 장부의 원대한 포부를 말한다. 《禮記 內則》
♣ 호시탐탐[虎視耽耽]범이 사나운 눈초리로 먹어를 노려본다는 뜻으로 날카로운 눈초리로 형세(形勢)를 노려보는 것을 말함.
♣ 호식내열[虎食內熱]장자(莊子) 달생(達生)에 “옛날 노(魯) 나라의 단표(單豹)라는 사람은 바위굴 속에 살면서 물만 마시어 나이 70세가 되어서도 얼굴이 어린애 같았는데 불행히 호랑이에게 잡아 먹혔고, 장의(張毅)라는 사람은 아무데라도 가리지 않고 두루 다녔는데 나이 40세에 내열병(內熱病 심장에서 열이 나는 병)이 나서 죽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그 뒤떨어진 것을 보충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가 말하기를 ‘안(정신)을 기르는 데만 전적으로 힘쓰지 말고, 밖(몸)을 너무 드러내지도 말아서 안과 밖이 똑같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지인(至人)이 되는 것이다.’고 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호아[虎兒]미불(米芾)의 아들 미우인(米友仁)의 이름이 호아임.
♣ 호아[虎牙]호아(虎牙)는 장군(將軍)의 명호(名號)로, 동한(東漢)의 용장(勇將)인 개연(蓋延)과 요기(姚期)가 각각 호아장군과 호아대장군에 임명된 고사가 전한다.
♣ 호아[胡娥]호아는 흉노(匈奴)의 여자를 이른다.
♣ 호아멱추성[呼兒覓秋聲]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가 가을 기운이 만물을 숙살 조락(肅殺凋落)시키는 데에 느낌이 있어 지은 추성부(秋聲賦)에 “구양자(歐陽子)가 밤에 글을 읽는데 서남쪽에서 쌀쌀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내가 아이를 불러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나가 보라 하였더니, 아이가 들어와 말하기를 ‘별과 달은 밝고 깨끗하고 은하수는 하늘에 있으며, 사방에 인기척은 없는데 소리가 나무 사이에서 났습니다.’고 했다.” 한 데서 온 말로, 즉 가을이 왔음을 비유한 말이다.
♣ 호안[胡眼]불자(佛者)의 눈을 이른다.
♣ 호앙천랑[胡昂天狼]호묘성(胡昴星)과 천랑성(天狼星). 옛날에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이 두 별이 나타나 요기(妖氣)를 부린다고 믿었다.
♣ 호어[濠魚]호수(濠水)에서 사는 피라미로, 한가롭게 노니는 물고기를 말한다. 장자(莊子)가 혜자(惠子)와 호숫가 봇둑 위를 걷다가, “피라미가 나와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군. 피라미는 참 즐거울 거야.” 하니, 혜자가, “자네는 피라미가 아닌데 어떻게 피라미가 즐거울 것이란 것을 아는가?”하자, 장자가,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가?”하니, 혜자가, “나는 자네가 아니라서 본시 자네를 알지 못하네. 자네도 본시 피라미가 아니니 자네가 피라미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네.” 하였다. 《莊子 秋水》
♣ 호언장담[豪言壯談]실지 이상으로 보태어서 허풍쳐 하는 말.
♣ 호연[浩然]맹호연(孟浩然)인데, 당(唐) 나라 양양(襄陽) 사람이다. 시로 명성이 크게 났으며, 왕유(王維)와 함께 왕맹(王孟)으로 불렸다.
♣ 호연지기[浩然之氣]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도 큰 원기(元氣), 도의에 뿌리를 박고 공명 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바 없는 도덕적 용기, 사물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즐거운 마음.
♣ 호연희연[皞然熙然]광대하고 자득한 모양을 말한 것으로, 즉 성왕(聖王)의 정치는 마치 천지의 자연과 같아서, 백성들이 그 태평 성대에 살면서도 전혀 누구의 덕으로 그렇게 사는지조차 모르는 아주 자연스러움을 뜻한다.
♣ 호염읍[胡髥泣]황제(黃帝)가 형산(荊山) 아래서 솥을 주조하고 나자, 용(龍)이 호염(胡髥; 턱수염)을 내려 황제를 맞이하니, 황제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므로, 소신(小臣)들은 함께 올라가지 못하고 떨어뜨린 황제의 궁검(弓劍)과 용의 수염만 안고 통곡했던 데서 온 말로, 역시 임금의 죽음을 비유한 말이다. 《史記 封禪書》
♣ 호오[好惡]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 호오봉[胡五峰]오봉은 송(宋) 나라 학자 호굉(胡宏)의 호.
♣ 호우[湖右]호서(湖西). 곧 충청도(忠淸道).
♣ 호우호마[呼牛呼馬]장자(莊子) 천도(天道)의 “저번에 자네가 나를 소라고 불렀을 때 내 자신도 소라고 생각했고 나를 말이라 불렀을 때 또한 말이라 생각했다.”에서 나온 것으로, 자신에 대한 남들의 실없는 칭찬이나 비방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 호원[胡元]원(元) 나라가 이민족(異民族)에게서 일어났으므로 이렇게 부름.
♣ 호원감목[胡元監牧]원(元) 나라 때에 제주도를 거마(車馬)를 관장하는 방성(房星)의 분야(分野)라 하여 이 곳에 말의 목장(牧場)을 두고 단사관(斷事官)이나 만호(萬戶)를 두어 목축을 주관했던 데서 온 말이다.
♣ 호월[胡越]호(胡)는 북쪽 지방에, 월(越)은 남쪽 지방에 있었으므로 거리가 먼 것을 칭한다. 매우 소원(疏遠)함을 비유한 말이다.
♣ 호월고풍[壺月高風]송(宋) 나라 도학자 이동(李侗)의 높은 인격을 말한다. 송사(宋史) 권428에 “등적(鄧迪)이 일찍이 주송(朱松)에게 말하기를 ‘원중(愿中)은 마치 빙호추월(冰壺秋月)과 같아 한 점 티가 없이 맑게 비치니 우리들이 따라갈 수가 없다.’ 하였다.” 하였다.
♣ 호위[虎闈]호위는 궁성의 호문(虎門)과 같은 말로, 호문의 좌측에 있던 국자감(國子監)의 별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성균관(成均館)을 말하기도 한다.
♣ 호위[虎衛]호위는 왕의 근위병을 가리킨다.
♣ 호위문견[胡威問絹]호위는 진(晉) 나라 호질(胡質)의 아들. 그의 아버지가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을 적에 위가 가서 뵙고 돌아오는데, 비단 한 필을 주므로 위가 꿇어 앉아 “아버님께서 청백하신데 어디서 이 비단을 얻으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질이 “이것은 내 봉급에서 남은 것으로 너의 생활에 보태주는 것이다.” 하자, 위가 그제서야 받았다. 《晉書 卷九十》
♣ 호유[胡荽]향초 이름
♣ 호음[湖陰]조선 시대 문신(文臣)인 정사룡(鄭士龍)의 호이다.
♣ 호의[狐疑]의심(疑心)하여 결정(決定)하지 못함 또 그 사람
♣ 호의[縞衣]자신의 아내를 겸칭(謙稱)한 말. 시경(詩經) 정풍(鄭風) 출기동문(出其東門)에 “흰 저고리 초록 치마가 그래도 나의 사랑이로다[縞衣綦巾 聊樂我員]” 한 데서 온 말이다.
♣ 호자[胡仔]송(宋) 나라 사람. 호는 초계어은(苕溪漁隱).
♣ 호자[瓠子]한 무제(漢武帝) 때 이곳에서 황하수가 터졌다고 한다.
♣ 호자가[瓠子歌]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지은 노래 이름이다. 무제 때 황하수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복양현(濮陽縣)에 있는 호자(瓠子)의 둑을 터뜨리자,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를 시켜서 터진 곳을 메우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에 무제가 사방에 가 봉선(封禪)한 뒤에 친히 이곳으로 와 급인(汲仁)과 곽창(郭昌)으로 하여금 군사 수만 명을 징발하여 메우게 하였는데, 장군(將軍) 이하가 모두 등에 짐을 지고 가 메우면서 기원(淇園)의 대나무를 모두 잘라다가 채워넣어 마침내 공사를 완공하였다. 그러자 무제가 호자가를 짓고는 이곳에다가 선방궁(宣房宮)을 세웠다. 《漢書 卷6 武帝紀》
♣ 호장[壺漿]어진 관원이 지나가면 백성들이 항아리에 미음을 담아 가지고 바치면서 환영한다는 뜻이다.
♣ 호장백일선[壺藏白日仙]한(漢)나라 비장방(費長房)이 여남시(汝南市)의 연리(椽吏)로 있었는데, 시(市)에 한 노인이 병[壺] 하나를 매달아 놓고 약(藥)을 팔다가, 일을 마치고 나면 매양 병 속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하는데, 비장방이 누상(樓上)에서 그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찾아가 절하고 술과 안주를 대접하며, 같이 병 속에 들어가기를 간청하였다. 병 속에 들어가 본즉, 화려한 집과 좋은 음식들이 가득 찼었다.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신선(神仙)인데 허물을 짓고 귀양왔다.” 하였다.
♣ 호저[縞紵]흰 명주띠와 모시옷. 춘추 시대 오(吳) 나라의 계찰(季札)이 정(鄭) 나라의 자산(子産)에게 흰 명주띠를 선사한 데 대하여 그 답례로 자산이 계찰에게 모시옷을 선사한 고사에서 온 말로, 벗 사이의 선물 또는 교의(交誼)의 뜻으로 쓰인다. 《左傳 襄公二十九年》
♣ 호저회[縞紵懷]춘추 시대에 오(吳) 나라 계찰(季札)이 정(鄭) 나라 자산(子産)에게 흰 명주 띠를 선사하고, 자산은 그 답례로 계찰에게 모시옷을 보낸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호전[胡銓]송(宋)의 여릉(廬陵)사람으로 호가 담암(澹菴). 고종(高宗)때 추밀원 편수관(樞密院編修官)으로서 당시 진회(秦檜)가 금(金)과의 화의를 주장하여 금나라 사신이 강남 지방을 조유(詔諭)한다는 명분으로 임안(臨安)에 이르자, 호전이 글을 올려 진회와 손근(孫近) 및 금나라 사신 왕륜(王倫) 세 사람의 목을 베야 한다고 상소했다가 진회의 노여움을 사, 후에는 길양군(吉陽軍)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 후 진회가 죽고 효종(孝宗)이 즉위하여 그를 다시 봉의랑(奉議郞)에 복위시키고 이어 소대(召對)하였음. 《宋史 卷三百七十四》
♣ 호접[蝴蝶]나비.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옛적에 장주(莊周)가 꿈에 범나비가 되었는데, 깨어 보니 바로 장주였다.” 하였음.
♣ 호접공[蝴蝶空]장자(莊子)가 꿈에 나비[蝴蝶]가 되어서 펄펄 날아 다녀 보았는데, 그때에는 자기가 그대로 나비로만 생각하였지 장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꿈을 깨어서 사람이 되고 보니, 자기가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게 되었으나 실상은 나비가 정말인데 사람이 나비 꿈속에서 잠시 화(化)한 것인지, 그렇다면 세상은 그 나비와는 관계없다는 말이다.
♣ 호접몽[胡蝶夢]중국 장자(莊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았다는 고사. 장자는 꿈도 현실도, 삶도 죽음도 구별이 없는 세계를 강조했다. 우리가 보고 생각하는 것도 한낱 만물의 변화상에 불과한 것이다. 곧, 외물과 자아의 구별이 없는 세계를 강조한 말이다.
♣ 호접이망양[蝴蝶已亡羊]호접은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피아(彼我)의 구별을 잊고 놀았다는 데서, 꿈꾼 것을 뜻하고 양(羊)을 잃었다는 것은 옛날 양자(楊子)의 이웃 사람이 양을 잃고 찾으러 나갔으나 갈림길이 많아서 찾지 못하고 말았다는 고사에서, 이미 잃어버린 것을 뜻한다.
♣ 호접지몽[胡蝶之夢]나비의 꿈. 어느 날 장주(莊周,)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꿈에 내가(장주가) 나비가 되어 기분 내키는 대로 유쾌하게 훨훨 날아다니면서 즐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장주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잠을 깨고 보니 틀림없는 나(장주)였다. 꿈이 워낙 생생하다 보니 도대체 내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나비가 꿈속에서 내가 되어 있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나와 나비는 겉보기엔 분명 구별이 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사물(만물)은 서로가 본질적으로 같은 하나의 존재이다. 만물들이 세상에 존재할 때 겉모습이 나(사람)와 나비처럼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은 만물들의 단순한 변화일 뿐이지, 서로가 본질이 다른 절대적인 변화가 아니다. 즉, 이 세상 만물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닌 동일한 본질을 가진 하나의 존재이며, 그 만물들은 각기 변화된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나를 포함한 모든 사물(만물)은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하나이다
♣ 호접진[蝴蝶陣]호접진은 진법(陣法)의 하나로 왜적들이 즐겨 썼다. 임진왜란 중이던 계사년(1593)에 명 나라에서 구원병으로 나왔던 제독(提督) 이여송은 벽제(碧蹄)에서 왜적의 유인에 말려 그만 진흙 속에 빠져 탄 말이 나오지 못했다. 이여송은 몹시 위급하게 되었는데 지휘사(指揮使) 이유승(李有昇)의 구원으로 다행히 탈출하였으나 이유승은 끝내 왜적에게 잡히어 죽고 말았다. 이여송은 그의 사위 왕심(王審)을 불러 보고 크게 통곡하였다. 《再造藩邦志 卷二》
♣ 호정[壺亭]호정(壺亭)은 정두원(鄭斗源)의 호이다.
♣ 호정교[胡釘鉸]남부신서(南部新書)에 의하면, 호생(胡生)이란 자는 만두 만드는 것으로 업을 삼으며 백빈주(白蘋州) 가에서 살았는데, 그 곁에 고분(古墳)이 있어서, 매양 차를 마시게 되면 반드시 한 잔을 올리곤 하였다. 하루는 꿈에 어떤 사람이 말하되, “나의 성은 유(柳)인데, 평생에 시(詩)를 잘하고 차마시기를 즐겼었다. 그대가 차를 나눠 준 은혜 감사하고 있으나 갚을 길이 없으므로 그대에게 시를 가르쳐 주고자 한다.” 하므로, 호생은 능하지 못함을 들어 사양하자 유(柳)는 강권하며, “다만 그대 뜻대로만 하면 된다.” 하여, 호생은 마침내 시를 잘하게 되었다. 그래서 호생의 시체(詩體)를 후인들이 호정교체(胡釘鉸體)라 일렀다 함.
♣ 호조비화[好鳥飛花]이 백의 시에, “좋은 새는 봄을 맞아 뒷동산에서 노래하고, 나는 꽃은 술을 보내어 처마 앞에 춤을 추네[好鳥迎春歌後院 飛花送酒舞前簷].”라고 하였음.
♣ 호주[互足]서로 연관성이 있음.
♣ 호주[壺洲]호주는 선산(仙山)인 방호(方壺)와 영주(瀛洲)를 뜻하는 시어(詩語)이다.
♣ 호주두목[湖州杜牧]당(唐) 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일찍이 호주(湖州)에 가서 친구인 자사(刺史)의 주선으로 10여 세쯤 된 미녀를 만났는데, 이 때 두목이 약속하기를 “지금은 데려갈 수 없으니, 의당 10년 뒤에 내가 호주자사가 되어 오겠다. 그때에 내가 오지 않으면 다른 데로 시집을 가도 좋다.” 하고는 서로 헤어졌다가 14년 뒤에야 호주자사가 되어 가 보니, 그녀는 이미 시집을 가서 두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를 잠시 만나 보고 헤어지면서 이별을 슬퍼하여 지은 시에 “스스로 봄을 찾아간 것이 더디었으니 굳이 슬퍼하며 꽃다운 시절 한할 것 없네 미친 바람이 짙붉은 꽃 모두 떨어뜨리어 푸른 잎 그늘 이루고 열매가 주렁주렁하구나[自是尋春去較遲 不須惆悵恨芳時 狂風吹盡深紅色 綠葉成陰子滿枝]” 한 데서 온 말이다.
♣ 호중[壺中]신선이 사는 세계를 말한다. 동한(東漢) 때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에서 약을 파는 노인이 술단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이상하게 여겨 따라 들어가 보니, 그 안에는 신선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後漢書 方術列傳 費長房》
♣ 호중구화운[壺中九華韻]소식(蘇軾)의 호중구화시(壺中九華詩)의 운을 이르는데, 호중구화시의 자서(自序)에 의하면 “호구(湖口) 사람 이정신(李正臣)이 기이한 돌을 가지고 있는데, 아홉 봉우리가 영롱(玲瓏)하고 마치 격자창 모양으로 생겼으므로, 내가 백 금(百金)을 주고 그것을 사다가 나의 구지석(仇池石)과 짝을 만들고 싶었으나, 마침 남쪽으로 옮겨가게 되어 틈을 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우선 이를 ‘호중구화’라 명명하고 또 시로써 기록하는 바이다.” 하였다. 《蘇東坡集 卷三十八》
♣ 호중멱구환[壺中覓九還]술병 속은 신선 세계를 말하고, 구환단(九還丹)은 아홉 차례 달인 단약(丹藥)으로, 이를 먹으면 신선이 된다고 한다.
♣ 호중세월[壺中歲月]선인(仙人) 호공(壺公)이 병 속에서 별천지(別天地)를 누리고 지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즉 별천지의 뜻으로 쓴 말이다.
♣ 호중일[壺中日]한(漢) 나라 비장방(費長房)이 신선을 따라 병 속에 들어가 본 즉 별천지가 있었다.
♣ 호중일월[壺中日月]후한 때 신선 호공(壺公)이 시장에서 약장수를 하면서 장이 파하면 그때마다 병 속[壺中]으로 들어가므로, 시연(市掾)으로 있던 비장방(費長房)이 그를 따라 병 속으로 들어가 보니, 거기에 별천지(別天地)가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費長房傳》
♣ 호중장일월[壺中藏日月]선인(仙人) 호공(壺公)의 호로병 속으로 비장방(費長房)이 함께 들어가 보니, 그 안에 일월(日月)이 걸려 있고 신선 세계가 펼쳐져 있더라는 전설이 전한다. 《神仙傳 壺公》
♣ 호중천[壺中天]선경(仙境)을 이르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술사(術士) 비장방(費長房)이 선인(仙人) 호공(壺公)을 따라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서 선경의 즐거움을 한껏 누렸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神仙傳 壺公》
♣ 호중천지[壺中天地]선경(仙境)이나 승경(勝境)을 가리키는 호천(壺天)을 말한다. 동한(東漢) 때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을 관리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시중에 어떤 노인이 약을 팔면서 가게 앞에 술단지[壺] 하나를 걸어 놓고 시장이 파하자 그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비장방이 누각 위에서 그 모습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음 날 그 노인에게 가서 노인과 함께 그 술단지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옥당(玉堂)이 있었으며, 그 안에서 좋은 술과 기름진 안주가 끊임없이 나왔다. 이에 둘이 함께 마시고는 취해서 나왔다. 《後漢書 卷82 方術傳下 費長房》
♣ 호중한[壺中閒]호중(壺中)은 병 속이란 뜻으로, 후한(後漢) 때 선인(仙人) 호공(壺公)이 시장에서 약을 팔다가 장이 파하면 문득 병 속으로 들어가곤 했는데, 이를 본 비장방(費長房)이 한번은 그를 따라 병 속으로 들어가 보니, 거기에 엄연한 별천지(別天地)가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八十二》
♣ 호증[胡曾]당 나라 사람으로 글에 능하였다. 함통(咸通) 연간에는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의 서기(書記)로 있다가 뒤에 고병(高騈)에게 발탁되었는데, 모든 전주(箋奏)가 그의 손에 의하여 지어졌으며 저서로는 영사시(詠史詩)ㆍ안정집(安定集) 등이 있다. 《尙友錄 卷三》
♣ 호지원[胡地怨]한 나라 원제(元帝) 때 궁녀인 왕소군이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황제의 총애를 입지 못하다가 궁중 화가(宮中畫家)의 농간에 의해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가게 되었는데, 흉노의 땅으로 갈 적에 비파를 들고 변방 땅을 지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서 슬퍼한 것을 말한다. 《漢書 卷94下 匈奴傳》
♣ 호창[浩倡]소리가 성대한 모양
♣ 호천[壺天]선경(仙境)이나 승경(勝境)을 말한다. 동한(東漢) 때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을 관리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시중에 어떤 노인이 약을 팔면서 가게 앞에 술단지[壺] 하나를 걸어 놓고 시장이 파하자 그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비장방이 누각 위에서 그 모습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음 날 그 노인에게 가서 노인과 함께 그 술단지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옥당(玉堂)이 있었으며, 그 안에서 좋은 술과 기름진 안주가 끊임없이 나왔다. 이에 둘이 함께 마시고는 취해서 나왔다. 《後漢書 卷82 方術傳下 費長房》
♣ 호천[壺天]호천은 동천(洞天)과 같은데 도가(道家)에서 신선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술이기(述異記)에 “인간의 36개 동천 가운데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은 10개이고 그 나머지 26개는 구미지(九微誌)에 나오기는 하나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 호천망극[昊天罔極]하늘처럼 넓고 커서 다함이 없음. 넓고 큰 부모의 은혜가 하늘과 같이 끝이 없음을 이르는 말
♣ 호천세계장[壺天世界藏]후한(後漢) 때 호공(壺公)이란 선인(仙人)이 시장에서 약(藥)을 팔면서 밤이 되면 병 속으로 들어갔는데, 한번은 시연(市掾) 비장방(費長房)이 그곳을 따라 들어가보니, 완연하게 별천지가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費長房傳》
♣ 호청경[虎聽經]범이 불경 읽는 소리를 듣는다는 뜻인데, 육귀몽(陸龜蒙)의 고원사시(孤園寺詩)에 의하면 “암석 위에는 진리 깨친 사람이요, 창문 앞에는 불경 듣는 범이로다[石上解空人 窓前聽經虎]”하였다.
♣ 호초축팔백곡[胡椒蓄八百斛]당(唐) 나라 원재(元載)의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니, 호초(胡椒)가 8백 곡(斛)이요, 다른 재물도 그와 같을 정도로 많았다.
♣ 호추[胡雛]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安祿山)은 본래 호인(胡人)이었으므로 호추(胡雛)라 하였다.
♣ 호축계[好祝雞]전설에 옛날 낙양(洛陽)의 선인(仙人)이 시향(尸鄕)의 북산 밑에서 백여 년 동안 닭을 기르며 살았는데, 천여 마리의 닭에게 각기 이름을 붙여 주어 부르고 싶은 닭의 이름을 부르면 밖에 돌아다니던 닭이 제이름을 듣고 찾아왔다 한다. 《列仙傳 上》
♣ 호치[皓齒]희고 깨끗한 이. 곧 미인을 뜻하는 말이다.
♣ 호치단순[皓齒丹脣]아름다운 여자의 붉은 입술과 흰 이를 말한다.
♣ 호탁씨[壺涿氏]주(周)시대에 수충(水蟲)제거를 맡았던 사람.
♣ 호탕백구[浩蕩白鷗]두보(杜甫)의 시(詩)에, ‘백구가 호탕한 데 빠지니 만 리에 누가 능히 깃들랴[白鷗沒浩蕩 萬里誰能馴].’ 한 구절이 있다. 이것은 높은 선비가 세속을 멀리 떠나감을 말한 것이다.
♣ 호포[戶布]신역을 지지 않는 양인이 그 대신 국가에 군포(軍布)를 바쳐오던 제도로 하여 파생한 여러 가지 폐단을 막기 위해 새로 시도한 제도. 효종(孝宗)은 그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종래에는 그것을 양인들에게만 부과해오던 것을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일정한 양의 베를 바치게 하였음.
♣ 호포천[虎跑泉]중국 강서성 구강현 남쪽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뒤에 있는 샘. 진(晉)의 혜원(慧遠)이 연사(蓮社)의 여러 현자들과 상방봉(上方峯) 꼭대기에서 놀면서 물길이 너무 멀어 걱정이었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바위 밑을 후벼파서 샘을 만들었다 하여 생긴 이름임. 《淸一統志》
♣ 호표개합[虎豹開闔]병서에 육도(六韜) 삼략(三略)이 있는데 육도는 용도(龍韜)ㆍ호도(虎韜)ㆍ표도(豹韜) 등이다. 열었다 닫았다는 말은 변화개합(變化開闔)한다는 뜻이다.
♣ 호표구관[虎豹九關]임금 곁에 강포한 자들이 있음을 비유한 말. 초사(楚辭) 초혼(招魂)에 “호표들이 천제(天帝)의 궁중문을 지키면서 아랫사람들을 물어 죽인다.[虎豹九關 ▣害下人些]" 한 데서 온 말이다.
♣ 호표도[虎豹韜]강태공(姜太公)의 육도(六韜)ㆍ삼략(三略) 중에 호도(虎韜)ㆍ표도(豹韜)가 있다.
♣ 호표부[虎豹符]고대에 왕이 군대를 이동하고 장수를 파견할 때 이용하는 신물(信物)임. 범의 형태로 구리쇠로 만들며 등에 문자를 새기는데, 이것을 두 쪽으로 나누어 오른쪽은 대궐에 놓아두고 왼쪽은 군사를 거느린 장수나 지방 장관에게 넘겨줬다가 군대를 이동할 때 조정의 사신이 그것을 가져가 서로 맞춰보고 틀림이 없으면 비로소 효력이 발생한다.
♣ 호한부인[呼韓婦人]한(漢)나라 궁녀 왕소군(王昭君)이 흉노(匈奴)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면서 말 위에서 비파를 타서 애절한 심정을 하소연하였다.
♣ 호함[頀咸]호는 탕(湯)의 음악 대호(大頀)이고, 함은 요(堯)의 음악 대함(大咸)인데, 전아한 고대의 음악을 뜻한다.
♣ 호해[湖海]호해(湖海)는 호남(湖南)과 해서(海西)이다. 강호와 같은 말이다.
♣ 호해[壺孩]호해는 단지에서 나온 아이라는 뜻으로, 궤속에서 나온 신라의 탈해왕(脫解王)과 알지(閼智)에 얽힌 설화인 듯하다.
♣ 호해[湖海]호해의 기백이란 광대하고 당당한 호기(豪氣)를 말한다.
♣ 호해고루[湖海高樓]삼국(三國) 시대 위(魏) 나라 진등(陳登)이 당시 위명(威名)이 있었고 또한 오만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그가 죽은 뒤, 허사(許汜)가 유비(劉備)와 함께 천하 사람의 인품을 논할 적에 허사가 “진등은 호기 높은 호해(湖海)의 선비였다. 옛날 내가 난리를 만나 하비(下)에 들러 진등을 찾아보았는데, 그는 나를 손으로 취급하지 않고 오랫동안 얘기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은 큰 와상에 올라가 눕고 나는 아래 작은 와상에 눕게 하더라.”고 말하니, 유비가 말하기를 “그대는 국사(國士)의 명망을 지니고서도 우국 망가(憂國忘家)를 하지 않음으로써 진등이 그대를 싫어했던 것이다. 그러니 무슨 연유로 그대와 얘기를 나누었겠는가. 나같았으면 나는 백척루(百尺樓)에 올라가 눕고 그대는 맨 땅에 눕게 했을 것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三國志 卷七》
♣ 호해기[湖海氣]호협한 기개를 말한다. 후한(後漢) 말 국사(國士)의 칭호를 받았던 허사(許汜)가 진등(陳登)을 찾아가서 소인배나 발언할 말을 하다가 진등에게 무시당해 형편없는 잠자리에서 자고 나와서는 진등에 대해 “호해지사(湖海之士)라서 아직도 호기(豪氣)가 없어지지 않았다.”고 불평한 고사가 있다. 《三國志 魏志 陳登傳》
♣ 호해의[湖海意]세속을 벗어나 은거하고자 하는 뜻을 이름.
♣ 호해조역만[岵峐岨嶧巒]호(岵)는 초목이 있는 산이고 해(峐)는 초목이 없는 산이며, 조(岨)는 돌산 위에 흙이 있는 것이고 역(嶧)은 연결된 산이며, 만(巒)은 산이 작으면서도 높은 것이다.
♣ 호현[弧懸]상고 때의 풍속에 아들을 낳으면 대문 왼쪽에 활 한 개를 걸어두었다는 데서 태어난 날을 가리킨다.
♣ 호형염[虎形鹽]특히 제사에 쓰는 소금으로서, 단단하게 범의 모양으로 만든 소금을 말한다.
♣ 호형호제[呼兄呼弟]서로 형이라 부르고 아우라 부름. 즉, 스스럼없이 형제라 부를 수 있는 아주 절친한 사이.
♣ 호호[好好]기뻐하는 모양, 몹시 좋음, 좋은 사람을 좋아함
♣ 호호[浩浩]넓고 큰 모양, 물이 엄청나게 많이 흐르는 모양, 길이 길게 이어지는 모양, 번쩍이며 빛나는 모양
♣ 호호[扈扈]넓은 마음, 선명한 모양
♣ 호호[滈滈]물이 희게 빛나는 모양
♣ 호호[昈昈]붉은색 무늬가 있는 모양
♣ 호호[戶戶]집집마다
♣ 호호[昊昊]크고 성한 모양
♣ 호호[皓皓]희고 깨끗한 모양.
♣ 호호악악[灝灝噩噩]법언(法言)에 “상서는 호호하며 주서는 악악하니라[商書灝灝甬 周書噩噩甬].” 하였다. 호호(灝灝)는 넓고 휑한 모양, 악악(噩噩)은 엄숙한 모양을 말한다.
♣ 호호정[浩浩亭]함경남도 이원(利原)의 객관(客館) 동쪽에 있는 정자로, 동쪽으로는 바다, 앞에는 평야가 펼쳐져 있다.
♣ 호홀[毫忽]극히 작은 분량(分量)이나 척도(尺度)를 가리킨 말이다.
♣ 호화[狐火]호화는 불을 켜 놓고 여우 울음을 한 것을 말한다. 진(秦) 나라의 폭정(暴政)에 반기를 든 진승(陳勝)은 처음 거사(擧事)할 적에 사람들을 따르게 하기 위하여, ‘진승이 왕이 된다[陳勝王]’는 글을 비단에 쓴 다음 잡아놓은 고기의 뱃속에 넣었으며, 동모자(同謀者) 오광(吳廣)에게 근처의 총사(叢祠)에다가 사람을 시켜 초롱불을 켜놓고 여우의 울음으로 ‘초 나라가 일어나고 진승이 왕이 된다.[大楚興 陳勝王]’고 하게 하였다. 《史記 陳涉世家》
♣ 호화첨춘[護花添春]연산군 때 흥청(興淸)들의 보인(保人)을 호화첨춘(護花添春)이라 하였고, 흥청에게 지공하는 명부를 호화첨춘기(護花添春記)라 했음.
♣ 호후[虎吼]석가모니(釋迦牟尼)의 설교 소리가 마치 호랑이 울음처럼 웅장했다는 것. 즉 사자후(獅子吼)와 같다. 사자가 울면 온갖 짐승이 겁내는 것처럼 염불하는 소리에 뭇 마귀가 숨어 버린다는 비유이다. 《涅槃經》
♣ 호흡분상로[呼吸分霜露]위세가 대단하여 뭇사람에게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함을 비유한 말. 후한 순제(後漢順帝)의 후비인 양 황후(梁皇后)의 오라비 양기(梁冀)가 발호(跋扈)하여 위세가 천하를 진동하였으므로, 그를 일러 “거동은 산해를 돌이키고 호흡은 상로를 변화시켰다[擧動回山海 呼吸變霜露].”고 평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七十八》
♣ 혹도[惑道]혹도는 우주의 진리와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망심(妄心)이다.
♣ 혹도고주혹명차[或棹孤舟或命車]전구(全句)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의 귀절. “혹명건거(或命巾車), 혹도고주(或棹孤舟).”의 ‘건거(巾車)’는 씌우개 있는 수레이나, 농촌의 달구지로 번역한다.
♣ 혹리[酷吏]혹리는 혹독한 아전.
♣ 혹세무민[惑世誣民]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임. 이단의 설로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속임.
♣ 혹약[或躍]용(龍)이 막 용사(用事)할 즈음을 말한 것으로, 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사효(九四爻)에 “혹 뛰거나 못에 있으면 허물이 없으리라[或躍在淵 無咎]” 한 데서 온 말이다.
♣ 혹자의봉사[或自疑封事]한유(韓愈)가 좌천되어 부임하는 도중에 지은 시 가운데 “어쩌면 상소한 내용 때문인 듯도 하나, 상소한 그 자체가 어찌 이유가 될 수 있나.[或自疑上疏 上疏豈其由]”라는 구절이 있다. 《韓昌黎集 卷1 赴江陵途中…》
♣ 혹청혹탁[或淸或濁]굴원의 어부사(漁父詞)에 “창랑의 물이 맑거든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는다.”는 말이 있다.
♣ 혹혹[惑惑]미혹한 모양
♣ 혹혹[掝掝]사리에 어두운 모양
♣ 혼가필[婚嫁畢]후한 때 은사(隱士) 상장(尙長)이 자녀의 혼가(婚嫁)를 다 마친 뒤에 집안 일에서 일체 손을 떼고 동지 금경(禽慶)과 함께 삼산(三山)ㆍ오악(五岳)을 두루 노닐면서 일생을 마쳤던 고사이다. 《嵇康 高士傳》
♣ 혼가필[婚嫁畢]후한 때 은사(隱士) 상장(向長)이 자녀들의 혼사(婚事)를 다 마치고 북해(北海)의 금경(禽慶)과 함께 천하의 명산(名山)을 찾아 나선 뒤로는 그 거취를 아는 이가 없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혼경위[混涇渭]경수(涇水)는 흐리고 위수(渭水)는 맑으므로, 전하여 청탁과 시비의 구별이 없어짐을 비유한 말이다.
♣ 혼돈[混沌]천지가 개벽하기 전 원기(元氣)가 나누어지지 않아 모호하게 한 덩어리로 된 상태를 말한다. 남화경[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보임.
♣ 혼돈개벽[混沌開闢]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뜻으로, 당쟁(黨爭)에 시달린 영조(英祖)가 이 광좌(李光佐)를 다시 기용하면서 ‘오늘 이전의 모든 일은 일체 거론하지 말라. 감히 거론하면 목을 베겠다.’하고, 내세운 탕평(蕩平)의 다른 이름이다.
♣ 혼돈득칠규[混沌得七竅]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에 “남해제(南海帝) 숙(儵)과 북해제(北海帝) 홀(忽)이 중앙제(中央帝) 혼돈(渾沌)의 후한 대우에 보답한다는 뜻에서 ‘사람들은 다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고 하는데 혼돈만이 없으니 한번 시험해 보자.’ 하고, 하루에 구멍 하나씩 뚫어 이렛만에 구멍 일곱을 뚫었는데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하였다.
♣ 혼돈사[混沌死]숙(儵)과 홀(忽)이 혼돈에 구멍을 뚫으니 혼돈이 죽었다는 말이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에 있는데, 소박한 그대로 두지 않고 팔괘를 그은 것을 말한다. 혼돈은 천지가 나뉘어지기 이전의 원기 즉 자연을 상징한 말로서, 이것이 죽었다는 것은 곧 인간의 작위(作爲)와 분별(分別) 따위가 참된 자연을 파괴시켰다고 풍자한 말이다.
♣ 혼돈옹[混沌翁]혼돈은 고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중앙을 담당한 상제 이름이다. 원래는 눈, 귀, 코 등 일곱 구멍이 없었는데, 하루에 한 구멍씩 파 나가자 이레 만에 그만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에 실려 있다.
♣ 혼비백산[魂飛魄散]혼이 날아가고 넋이 흩어짐. 매우 크게 놀라 정신이 없음.
♣ 혼속유하[混俗柳下]유하는 곧 춘추(春秋) 시대 노(魯) 나라의 유하혜(柳下惠)를 가리키는데, 맹자(孟子) 만장하(萬章下)에 “유하혜는 화(和)의 성자(聖者)이다.” 하였다. 여기서 말한 화(和)는 곧 세속과 잘 융화함을 말한다.
♣ 혼야왕[渾邪王]흉노에 속한 왕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우(單于)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무리를 이끌고 한 나라에 투항하였다. 《史記 匈奴傳》
♣ 혼연일치[渾然一致]섞여서 하나를 이룸. 분간할 수 없게 잘 섞여 한 덩어리가 됨. 차별 없이 서로 합치함.
♣ 혼융[渾融]한데 뒤섞다.
♣ 혼적군주유[混迹群侏儒]동방삭처럼 익살을 부리며 도회술(韜晦術)을 발휘할 줄을 모른다는 말인데, “옛날 사람은 깊은 산속에 들어가 세상을 피했지만 나는 조정에 들어와 세상을 피하고 있다.”는 동방삭의 말이 전해 온다. 《史記 卷126》
♣ 혼점[混點]그림을 그리는 법. 잎을 그릴 때 찍는 점을 이름. 장원형(長圓形)의 횡점(橫點)으로 소밀취산(疏密聚散)을 적당하게 찍는 점임.
♣ 혼정[昏定]밤에 잘 때에 부모의 침소에 가서 밤새 안녕하시기를 여쭙는 말.
♣ 혼정신성[昏定晨省]저녁에 잠자리를 살펴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핌. 아침 저녁으로 부모를 극진하게 모시는 도리. 부모의 안부를 물어서 살핌. 곧, 부모님께 효도하는 자식의 올바른 도리를 말함.
♣ 혼첨절강도[魂添浙江濤]절강(浙江)에 조수(潮水)가 가장 세차게 들어오는데 그것은 오자서의 성낸 혼이 그렇게 하는 것이라 한다.
♣ 혼취[混吹]한데 섞여서 피리를 불었다는 말로, 실력도 없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뜻의 일종의 겸사(謙辭)이다. 제 선왕(齊宣王) 때 남곽처사(南郭處士)가 피리를 불지도 못하면서 악공들 속에 끼어 흉내만 내다가 한 사람씩 솜씨를 보이게 하자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韓非子 內儲說上》
♣ 혼탈무[渾脫舞]공손대랑(公孫大娘)은 당(唐) 나라 때 교방(敎坊)의 기녀(妓女)로서 검무(劍舞)를 매우 잘 추었는데, 그가 혼탈무를 출 때에 승(僧) 회소(懷素)는 그 춤을 보고서 초서(草書)의 묘(妙)를 터득했고, 서가인 장욱(張旭) 역시 그 춤을 보고서 초서에 커다란 진보를 가져왔다고 한다.
♣ 혼혼[渾渾]물이 흐르는 모양, 물결이 서로 따르는 모양, 흐려짐, 어지러워짐, 단서가 없음, 큼, 심오하여 알기 어려운 모양
♣ 혼혼[涽涽]생각이 어지러운 모양, 흐린 물, 탁수
♣ 혼혼[昏昏]정신이 가물가물하고 희미함, 어둠침침함, 조는 모양
♣ 혼혼[惛惛]정신이 허리멍덩한 모양, 일에 마음이 팔려 열중하는 모양
♣ 홀[圭]고대에 제후가 조회(朝會)나 회동(會同)때 손에 갖는 도구. 모양이 윗 부분은 둥글고, 아래가 모진 길쭉한 옥(玉).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주던 일종의 지휘권의 상징물.
♣ 홀[笏]수판(手版). 홀은 옛날에 왕과 고관(高官)이 손에 쥐던 작은 판. 천자는 옥으로, 제후(諸侯)는 상아(象牙)로, 대부는 대[竹]로 만들었음. 할 말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홀(笏)에다 썼다.
♣ 홀과소선지주[忽過蘇仙之舟]소동파[蘇仙]의 적벽부(赤壁賦)에, “외로운 학이 나의 배[舟]를 스치고 지나가는데 날개가 수레바퀴와 같다.” 한 구절이 있다.
♣ 홀만상[笏滿牀]당(唐) 나라 때 최림(崔琳)의 문족(門族)이 워낙 창성하여 종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상홀(象笏)이 상탑에 가득했다는 데서 온 말로, 집안에 벼슬아치가 많음을 뜻한다.
♣ 홀현홀몰[忽縣忽沒]문득 나타났다가 문득 사라짐.
♣ 홀홀[惚惚]모호한 모양
♣ 홀홀[忽忽]문득, 갑작스레, 황홀한 모양, 소홀해서 일을 돌보지 않는 모양, 문득 떠나가는 모양, 실망한 모양, 헤매는 모양, 도는 모양, 명백하지 않은 모양. , 잊어버리는 모양
♣ 홀홀[囫囫]온전한 모양, 동글동글하고 단단한 모양
♣ 홍간조오객[虹竿釣鼇客]당 나라 이백(李白)을 칭하는 말. 전하여 인품이 호매(豪邁)함을 비유한다. 당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이백이 재상(宰相)을 찾아뵙고 쪽지에다 “바다에서 자라 낚는 나그네.[海上釣鼇客]"라고 써 바쳤다. 재상이 묻기를 “선생은 자라를 낚을 때 낚싯줄을 무엇으로 합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무지개로 낚싯줄을 삼습니다.” 하였다.
♣ 홍개정[洪介亭]개정은 청 나라 홍점전(洪占銓)의 호임.
♣ 홍거절[鴻擧絶]한(漢) 나라 고조(高祖)가 척부인(戚夫人)의 아들을 사랑하여 태자를 바꾸려 하였다가 상산(商山)의 사호(四皓)가 와서 태자를 보호하는 것을 보고 척부인에게 말하기를, “이제는 태자에게 우익(羽翼)이 생겼으니 움직이기 어렵다.” 하고 노래를 부르기를, “기러기가 높이 날았으니 그물을 칠 수 없네.” 하였다.
♣ 홍격기적[鴻隙譏翟]한서(漢書) 권84 적방진전(翟方進傳)에 “적방진이 승상이 되어서 여남(汝南)의 홍격파(鴻隙陂)를 허물도록 아뢰었으므로, 관개(灌漑)와 어별(魚鼈)의 다대한 이익을 받고 있던 고을 사람들이 무척이나 원망하였다.” 하였다.
♣ 홍경[弘景]남북조(南北朝) 시대 양(梁) 나라의 은사. 남제 고제(南齊高帝) 때에 제왕(諸王)의 시독(侍讀)이 되었다가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는데, 양 무제(梁武帝)가 즉위한 뒤에는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하였으므로, 당시에 산중재상(山中宰相)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梁書 卷五十一》
♣ 홍경망[洪景望]경망(景望)은 홍방(洪雱)의 자(字)이다.
♣ 홍경비[弘慶碑]고려 현종(顯宗)이 병부 상서(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을 시켜 절을 짓게 하고 이름을 봉선홍경사라 내리는 동시에 비를 세워 한림학사 최충(崔冲)을 명하여 글을 짓게 하였는데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비만 남았음. 백광훈(白光勳)의 “秋草前朝事 殘碑學士文 千年有流水 落日見歸雲"이라는 시가 있음.
♣ 홍경사[弘慶寺]고려 추숭왕(追崇王) 안종(安宗)의 원당(願堂).
♣ 홍경사비[弘慶寺碑]고려 현종(顯宗)이 직산(稷山) 북쪽 15리 지점에 승려 형긍(逈兢)에게 명하여 사찰을 건립하게 하고, 병부 상서 강민첨(姜民瞻) 등에게 감독을 명하여 2백여 칸의 거찰(巨刹)을 세우게 한 뒤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의 이름을 내렸는데, 그 뒤 절은 없어지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최충(崔冲)이 글을 지은 비석만 남아 있게 되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16 稷山縣》
♣ 홍계통[洪季通]계통(季通)은 홍명형(洪命亨)의 자(字)이다.
♣ 홍곡[鴻鵠]맹자(孟子) 고자(告子) 상편에, “두 사람에게 바둑을 가르치는데, 한 사람은 전심치지(專心致志)하여 혁추(奕秋)의 시키는 것만 듣고, 한 사람은 홍곡(鴻鵠)이 날아온다면 활을 당겨서 쏠 것만 생각한다.” 하였다. 마음에 다른 것을 생각하는 비유.
♣ 홍곡영렴연작기[鴻鵠寧嬚燕雀欺]훌륭한 사람은 못난 사람의 업신여김을 개의치 않음을 비유한 말. 연작은 제비나 참새 따위의 작은 새이며 홍곡(鴻鵠)은 큰 새이다. 옛날 진승(陳勝)은 자기의 뜻을 몰라주는 사람에게 “연작이 어떻게 홍곡의 뜻을 알겠는가?[燕雀安知鴻鵠之志哉]" 하였다. 《漢書 卷三十一 陳勝傳》
♣ 홍관일[虹貫日]이른바 백홍관일(白虹貫日)의 흉조(凶兆)를 말한다. 흰 무지개는 병란(兵亂)을 상징하고 해는 임금 즉 국가를 상징한다.
♣ 홍교[虹橋]홍교는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다리로 이 지역은 옛날 초(楚) 나라의 땅이었다.
♣ 홍교[虹橋]홍교는 무지개 모양처럼 굽은 다리. 또는 무지개 다리로 신선들이 다니는 다리이다.
♣ 홍군[紅裙]붉은 치마, 즉 기녀(妓女)를 지칭하는 말이다.
♣ 홍기[紅旗]작전용 군기(軍旗)를 말한다.
♣ 홍노[洪爐]큰 용광로로, 만물을 생성하는 본원(本源)을 말한다.
♣ 홍농도하[弘農渡河]태수가 선정을 하여 호랑이가 강을 건너 피해감. 진(晉)의 유곤(劉琨)이 홍농 태수(弘農太守)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호랑이가 새끼를 업고 그를 피해 황하를 건너갔다고 함. 《淵鑑類函》
♣ 홍니[紅泥]붉은 찰흙. 한(漢)나라 때 황제가 내리는 조서는 붉은 찰흙으로 봉함을 하였다 하여 흔히 왕이 내리는 글을 뜻한다.
♣ 홍니[鴻泥]홍니는 설리홍조(雪裏鴻爪)의 약칭인데 행종(行蹤)이 정처 없이 우연히 서로 만난 것을 이름. 소식의 화자유민지회구시(和子由澠池懷舊詩)에 “人生到處知何事 應是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라 하였음.
♣ 홍당[哄堂]어사대의 관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한꺼번에 떠들썩하게 웃는 것을 말한다.
♣ 홍대[紅帶]고려 때 4품 이상의 문관(文官)이 띠던 띠로 정대를 말한다.
♣ 홍도[鴻都]홍도는 한(漢) 나라 때의 문명(門名)인데, 영제(靈帝) 때에 그 안에 학궁을 설치하고 제생(諸生)을 모집하였는바, 척독(尺牘)ㆍ사부(詞賦) 등을 가지고 천여 명이나 시험을 보았고, 홍도문 학사(鴻都門學士)를 두어 학문을 숭상하게 되었다 한다. 《後漢書 靈帝紀》
♣ 홍도설니[鴻蹈雪泥]생각없이 우연히 지나쳐 온 과거의 행적을 말한다. 소동파(蘇東坡)의 시 ‘화자유민지회구(和子由澠池懷舊)’에 “지나온 인생길 뭐와 비슷하다 할까, 눈 밭 위의 기러기 발자국 같다 하리. 눈 위에 우연히 흔적을 남겼을 뿐, 기러기 다시 날면 동으로 갈지 서로 갈지.[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 홍라[紅羅]명 나라의 별칭.
♣ 홍라기성[紅羅記姓]무관(武官)이 되었음을 뜻함. 송(宋) 나라 때 악비(岳飛)가 장군이 되어 역적 이성(李成)을 토벌할 적에 붉은 비단으로 기치(旗幟)를 삼고 그 위에다 자기의 성인 악(岳) 자를 수놓아가지고 출전했던 데서 온 말이다. 《宋史 卷三百六十五》
♣ 홍려[鴻臚]홍려는 중국 조정의 조하(朝賀)나 경조(慶弔)의 의식 때 그 의식의 진행을 맡은 관직이다.
♣ 홍려시[鴻臚寺]홍려시는 외교를 맡은 직책이다.
♣ 홍련녹수막중빈[紅蓮綠水幕中賓]남제(南齊) 유고지(庾杲之)가 왕검(王儉)의 위군 장사(衛軍長史)가 되었을 때 당시에 왕검의 막부를 연화지(蓮花池)에 비겼으므로, 안륙후(安陸侯) 소면(蕭沔)이 이를 찬미하여 말하기를 “유경행이 녹수에 떠서 부용에 기대고 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가.[庾景行 汎綠水 依芙蓉 何其麗也]”라고 했던 고사가 있다. 경행(景行)은 유고지의 자(字)이다.
♣ 홍련막[紅蓮幕]막부(幕府)를 말한다. 남사(南史) 제49권 유고지전(庾杲之傳)에, “왕검(王儉)이 유고지를 위장군장사(衛將軍長史)로 삼으니, 안륙후(安陸侯) 소면(蕭緬)이 왕검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말하기를, ‘막부의 원료(元僚)는 참으로 선발하기가 어려운데 유경행(庾景行)이 푸른 물에 떠다니다가 부용꽃에 의지하게 되었으니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왕검의 막부를 연화지(蓮花池)라고 하였으므로 소면이 글을 보내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하였는데, 후대에는 홍련막을 막부의 미칭으로 쓰게 되었다.
♣ 홍련막리빈[紅蓮幕裏賓]훌륭한 상부(相府)의 막료(幕僚)를 비유한 말로, 전하여 일반적으로 대신의 막료의 뜻으로 쓰임. 진(晉) 나라 때 재상 왕검(王儉)이 유고지(庾杲之)를 장사(長史)로 삼자, 소면(蕭緬)이 왕검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성부(盛府)의 원료(元僚)는 실로 선발하기 어려운데, 유고지의 인품은 마치 ‘푸른 물에 떠서 연꽃에 의지한 것[泛綠水依芙蓉]’ 같으니, 어찌 그리도 화려한가.”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왕검의 상부를 연화지(蓮花池)라 하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南史 庾杲之傳》
♣ 홍렬[鴻烈]서명. 홍렬훈(鴻烈訓)의 약인데, 즉 회남자(淮南子)임.
♣ 홍로[洪爐]큰 용광로로, 만물을 생성하는 본원(本源)을 말한다.
♣ 홍로[鴻臚]각종 의식(儀式)을 관장하는 아문인 통례원(通禮院)의 이칭.
♣ 홍로[洪鑪]홍로는 큰 용광로로,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지금 천지(天地)를 큰 용광로로 생각하고 조물주를 훌륭한 야금(冶金)쟁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디로 가든 안 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홍로점설[紅爐點雪]홀로상일점설(紅爐上一點雪)의 준말. 뜨거운 불길 위에 한 점 눈을 뿌리면 순식간에 녹듯이 사욕이나 의혹이 일시에 꺼져 없어지고 마음이 탁 트여 맑음을 일컫는 말이다. 크나큰 일에 작은 힘이 조금도 보람이 없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 홍록현[紅綠眩]대단히 취하여 물건의 빛깔을 잘 구별하지 못하게 됨을 이름. 소식(蘇軾)의 시에 “나는 취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어 홍록의 빛 아른거림만 느끼었네[我醉都不知 但覺紅綠眩]”하였다.
♣ 홍루[紅淚]여인의 눈물을 가리킨다.
♣ 홍류적[鴻留迹]정처없이 떠도는 인생의 허무한 자취를 말한다. 소식(蘇軾)의 “떠도는 인생살이 무엇과 같다 할꼬, 눈 위에 찍힌 기러기의 발자국. 우연히 발톱 자욱 남겨 놓고는, 날아가면 어찌 다시 동서남북 따지리요.[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라는 시구에서 나온 것이다. 《蘇東坡詩集 卷3 和子由澠池懷舊》
♣ 홍류화저[虹流華渚]세자가 태어남을 상상하는 것이다. 온자승순묘비(溫子昇舜廟碑)에 “무지개 기운 신령을 내려 요씨의 터에 성인이 탄생되었다.”는 말이 있음.
♣ 홍릉담[紅綾餤]당(唐) 나라 희종(僖宗)이 바야흐로 떡을 먹다가 그때 진사(進士)들이 곡강(曲江)에서 문희연(聞喜宴)을 한다는 말을 듣고 어주(御廚)에 명하여 사람 수효대로 각기 홍릉병담(紅綾餠餤)을 하사했다.
♣ 홍릉병[紅綾餠]붉은 비단으로 겉을 싼 맛좋은 떡의 일종으로 중국의 왕이나 고관 귀족의 집안에서 주로 먹었다.
♣ 홍린약빙[紅鱗躍氷]효성이 지극함을 말한다. 진서(晉書) 권49에 “왕상은 효도가 극진하였는데, 어머니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다고 하므로 강에 가서 옷을 벗고 얼음 깨고 고기를 잡으려 하자, 잉어 두 마리가 얼음 위로 뛰어나왔다.” 하였다.
♣ 홍매[洪邁]송 나라 반양(鄱陽) 사람으로 자는 경로(景盧), 호는 용재(容齋)이다. 경(經)ㆍ사(史)ㆍ백가(百家)와 의학ㆍ복서ㆍ천문ㆍ산술 등 서적을 두루 읽었으며 효종(孝宗) 때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가 되었다.
♣ 홍면숙[洪勉叔]면숙(勉叔)은 홍무적(洪茂績)의 자(字)이다.
♣ 홍명익[鴻冥弋]벼슬을 우습게 보는 고사(高士)의 비유이다. 가물가물 나는 기러기를 활 쏘는 사람이 어찌 잡으랴. 《法言》
♣ 홍모[鴻毛]기러기 털로, 아주 가벼운 것을 뜻한다.
♣ 홍모척[鴻毛擲]기러기털을 집어던졌다는 것은 더없이 귀중한 목숨을 사물 가운데 가장 가볍다는 기러기털처럼 여겨 미련없이 버렸다는 것이다.
♣ 홍몽[鴻濛]우주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있어 온 천지의 원기, 혹은 그와 같은 혼돈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서, 끝없이 펼쳐진 바다나 하늘을 뜻하기도 한다.
♣ 홍무[洪武]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 홍무체[洪武體]홍무는 명 나라 태조의 연호로, 그때 새로 나온 서체라는 뜻이다.
♣ 홍범[洪範]서경(書經)의 편명. 홍(洪)은 대(大), 범(範)은 법(法)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큰 법이라는 뜻. 기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진술한 것인데, 모두 9조목으로 되어 있어 홍범구주(洪範九疇)라 칭한다.
♣ 홍범구주[洪範九疇]홍범은 서경(書經)의 편명(篇名)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법이란 뜻이며, 구주는 아홉 가지 무리란 뜻으로 옛날 우(禹)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에 낙수(洛水)에서 거북이가 나왔는데 그 등에 1에서 9까지의 점이 그려져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이것을 보고 홍범 구주를 만들었다 하는데, 첫번째는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ㆍ토(土)의 오행(五行)이고, 두 번째는 모(貌)ㆍ언(言)ㆍ시(視)ㆍ청(廳)ㆍ사(思)의 오사(五事)이며, 세 번째는 식(食)ㆍ화(貨)ㆍ사(祀)ㆍ사공(司空)ㆍ사도(司徒)ㆍ사구(司寇)ㆍ빈(賓)ㆍ사(師)의 팔정(八政)이고, 네 번째는 세(歲)ㆍ월(月)ㆍ일(日)ㆍ성신(星辰)ㆍ역수(曆數)의 오기(五紀)이며, 다섯 번째는 황극(皇極)이고, 여섯 번째는 정직(正直)ㆍ강극(剛克)ㆍ유극(柔克)의 삼덕(三德)이며, 일곱 번째는 우(雨)ㆍ제(霽)ㆍ몽(蒙)ㆍ역(驛)ㆍ극(克)ㆍ정(貞)ㆍ회(悔)의 계의(稽疑)이고, 여덟 번째는 우(雨)ㆍ양(暘)ㆍ욱(燠)ㆍ한(寒)ㆍ풍(風)ㆍ시(時)의 서징(庶徵)이며, 아홉 번째는 수(壽)ㆍ부(富)ㆍ강녕(康寧)ㆍ유호덕(攸好德)ㆍ고종명(考終命)의 오복(五福)과 흉단절(凶短折)ㆍ병(病)ㆍ우(憂)ㆍ빈(貧)ㆍ악(惡)ㆍ약(弱)의 육극(六極)이다.
♣ 홍범수[洪範數]서경(書經) 홍범의 아홉 조항의 수를 말하는데, 그 아홉 조항은 곧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오복(五福)이다.
♣ 홍벽천구[弘璧天球]홍벽(弘璧)과 천구(天球)는 다 아주 귀중한 보옥(寶玉) 이름인데, 즉 그런 귀중한 보옥처럼 소중하게 여겨진다는 뜻이다.
♣ 홍보[鴻寶]홍보는 한(韓) 나라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베개 속에 비장(祕藏)했다는 도술서(道術書), 즉 홍보원비서(鴻寶苑祕書)를 말한다. 이 책에는 신선이 귀신을 시켜 금단(金丹)을 만드는 방술이 적혀 있다고 한다.
♣ 홍부[紅腐]오래되어서 붉게 썩은 곡식을 말한다. 한서(漢書) 가연지전(賈捐之傳)에 “태창의 곡식이 붉게 썩어서 먹을 수 없다.” 한 말이 있다.
♣ 홍불자[洪佛子]송 나라 선화 연간에 홍호가 쌀을 풀어 6만 5천 사람을 살리매 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손을 이마에 얹으며 불자라고 불렀다. 만년에,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되, “경의 뜻이 임금을 잊지 않거늘 어찌 짐을 버리고 가는가.” 하였다.
♣ 홍비명명[鴻飛冥冥]기러기가 까마득하게 난다는 말은, 높이 초월하거나 멀리 가는 사람에게 비유하여 쓰는 말. 양자(揚子)의 법언(法言)에, “기러기가 아득아득 날아가니 활 쏘는 사람이 어찌 잡을소냐[鴻飛冥冥 弋人何簒焉].” 한 것에 보이는데, 즉 어지러운 세상을 미리 보고 벼슬자리를 떠나는 것을 비유함.
♣ 홍비명원음[虹飛明遠飮]한 나라 때 무지개가 내려와 궁중의 샘물을 다 마시는 바람에 물이 고갈되었다는 고사가 전하는데, 이런 현상은 재해(災害)가 앞으로 없어지는 상서(祥瑞)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漢書 武五子 燕刺王旦傳》
♣ 홍비준저[鴻飛遵渚]얼마 후에는 조정으로 돌아가게 될 것임을 뜻함. 시경(詩經) 빈풍(幽風) 구역(九罭)에 “기러기는 날아서 물가를 따르나니 공이 돌아갈 곳이 없으랴[鴻飛遵渚 公歸無所]”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주공(周公)이 동산(東山)에 가 있을 적에, 동인(東人)들이 주공이 곧 그 곳을 떠나 조정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서로 주공을 그리워하여 부른 노래다.
♣ 홍사미[虹沙彌]무지개 사미란 말로, 고려 때 미천한 소생으로서 중이 된 왕자, 즉 소군(小君)을 가리킴. 무지개는 한 끝은 땅에 닿고, 한 끝은 하늘에 닿기 때문에 소군은 왕자이기는 하나 어미가 천함을 비유한 것이다. 사미(沙彌)는 출가(出家)하여 십계(十戒)를 받은 남자를 말한다.
♣ 홍사신[洪士信]사신은 홍여순(洪汝諄)의 자(字)이다.
♣ 홍삼[紅衫]오난설(吳蘭雪)의 시화(詩話)에 “홍삼배화(紅袗拜花)"가 있으므로 그를 가리킴.
♣ 홍상[紅裳]아름다운 여자
♣ 홍설[紅雪]복숭아꽃을 표현한 말.
♣ 홍섬[洪暹]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문장에 능하고 경서(經書)에 밝았음. 저서에는 인재집(忍齋集)ㆍ인재잡록(忍齋雜錄)이 있음. 의정(議政)까지 되었으며 82세의 나이로 죽었다.
♣ 홍성민[洪聖民]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으로 찬성까지 되었으며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 홍속[紅粟]오래 저장한 나머지 썩어서 붉게 변한 미곡이다. 보통 시에서는 풍부한 물자를 표현할 때 사용한다.
♣ 홍속[紅粟]큰 창고에 듬뿍 쌓여 빨갛게 썩어 가는 곡물을 말한다.
♣ 홍수[紅袖]송(宋) 나라 때 위야(魏野)가 구준(寇準)과 함께 어느 절에 가 놀면서 똑같이 시를 써 붙여 놓았다가, 뒤에 다시 함께 그 절을 찾아가 보니, 구준의 시는 푸른 깁으로 잘 싸서 보관하고 있고, 자신의 시는 먼지가 잔뜩 낀 채 그대로 있으므로, 그들을 따라갔던 관기(官妓)가 붉은 소매로 그 먼지를 털어 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홍숙경[洪叔京]숙경은 홍호(洪鎬)의 자(字)이다.
♣ 홍술[洪術]고려 초기의 의성부(義城府)의 성주(城主)인 김홍술(金洪術)을 가리키는데, 왕 태조(王太祖) 12년에 견훤(甄萱)의 군대가 의성에 쳐들어와 김홍술이 전사하자, 왕 태조가 울면서 자신의 팔을 잃었다고 애통해 했다 한다.
♣ 홍시[鴻視]공자(孔子)가 위령공(衛靈公)과 이야기하는데, 위령공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날아가는 기러기를 쳐다보므로 공자는 곧 위(衛)나라를 떠나서 다른 나라로 갔다.
♣ 홍아[紅牙]붉은 향나무로 만든 악기로, 악곡의 장단을 조절하기 위해 치는 널판지이다.
♣ 홍안선왕[鴻鴈宣王]시전(詩傳)에 있는 홍안(鴻雁)장은 주나라 선왕(宣王)이 국가를 중흥시킨 업적을 찬양한 시이다.
♣ 홍안소년[紅顔少年]나이가 젊고 얼굴이 곱게 생긴 남자.
♣ 홍안택중음[鴻雁澤中吟]유민(流民)이 배고파 우는 참상을 기러기 소리에 비긴 것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홍안(鴻雁)에 “기러기 날아와 못 가운데 모였다……기러기 날아와 슬피 울어대네……" 하였는데 집전(集傳)에는 “유민이 기러기의 슬피 우는 모습을 자신의 처지에 비겨서 이 시를 만든 것이다.” 하였다.
♣ 홍애[洪崖]서산(西山)에 있는 큰 절벽을 말하는데, 여기에 은거했던 상고(上古)의 선인(仙人) 홍애 선생(洪崖先生)이 일컫기도 한다.
♣ 홍애견박[洪崖肩拍]홍애는 옛날 신선(神仙)의 이름인데, 문선(文選) 곽박유선시(郭璞遊仙詩)에 “왼손으로 부구(浮丘)의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 홍애(洪崖)의 어깨를 친다.” 하였다.
♣ 홍애자[洪厓子]보통 홍애 선생(洪厓先生)으로 불리는 상고(上古)의 선인(仙人)이다. 위숙경(衛叔卿)이 몇 사람과 장기를 두었는데, 그 아들 도세(度世)가 “아까 장기를 둔 분은 누구입니까?”하고 묻자, 바로 홍애 선생이었다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神仙傳 二 衛叔卿》
♣ 홍애자[洪厓子]홍애선생(洪崖先生)이라고도 하는 상고의 선인(仙人)을 가리킨다.
♣ 홍약[紅藥]사조(謝眺)가 중서성(中書省)에서 지은 중서성입직시(中書省入直詩)에, “붉은 작약꽃은 뜰에서 펄럭인다.[紅藥當階翻]”는 구(句)가 있다. 당 나라 때 중서성이 궁문의 서쪽에 있었다.
♣ 홍연[弘演]홍연은 춘추 시대 위 의공(衛懿公)의 충신인데, 그가 타국에 사신 간 동안에 적인(狄人)이 쳐들어와서 위 의공을 죽이어 그의 살을 다 먹어 버리고 간(肝)만을 남겨 놓았으므로, 홍연이 돌아와서는 의공의 간을 향해 복명을 한 다음, 자기의 배를 갈라 뱃속의 것들을 모두 꺼내고 임금의 간을 자기 뱃속에 넣고 죽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呂氏春秋 卷十一 忠廉》
♣ 홍연대소[哄然大笑]입을 크게 벌리고 떠들썩하게 껄껄 웃는 큰 웃음
♣ 홍엽제시[紅葉題詩]당 희종(唐僖宗) 때 우우(于祐)가 어구(御溝)에서 시(詩)가 적힌 붉은 나뭇잎 하나를 주웠는데, 그 시에 “흐르는 물은 어이 그리 급한고, 깊은 궁중은 종일토록 한가롭네. 다정히도 붉은 잎새 작별하나니, 인간이 있는 곳으로 잘 가거라.[流水何太急 深官盡日閒 殷勤謝紅葉 好去到人間]" 하였으므로, 우우 역시 붉은 나뭇잎에다 “일찍이 나뭇잎에 깊은 원망 쓴 것을 보았나니, 나뭇잎에 시 써서 누구에게 부쳤던고?[曾聞葉上題紅怨 葉上題詩寄阿誰]"라는 시를 써서 다시 어구에 흘려 보낸 결과, 이 시는 당시 궁녀(宮女)였던 한 부인(韓夫人)이 주웠다. 그런데 뒤에 희종이 궁녀들을 풀어 시집을 보내게 되자, 공교롭게 우우와 한 부인이 서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홍우[紅雨]붉은 꽃잎이 비처럼 떨어지는 것을 형용한 표현.
♣ 홍우점[鴻羽漸]기러기가 날 때 서서히 상승하듯이 벼슬이 점점 올라감을 말한다. 홍점(鴻漸).
♣ 홍우정[洪宇定]홍우정은 조선조 선조~효종 연간의 지사(志士)로 자는 정이(靜而), 호는 두곡(杜谷). 조정에서 누차 벼슬에 임명했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영남 문수산(文殊山)에 은거, 생애를 마침. 저서에는 두곡집(杜谷集)이 있음.
♣ 홍운[紅雲]제왕을 상징한 것. 하늘의 옥황상제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홍색 구름이 감싸고 있다고 함. 《翼聖記》
♣ 홍운봉일상[紅雲捧日上]황제의 궁궐을 가리킨다. 선인(仙人)이 사는 곳에는 늘 붉은 구름이 에워싸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侍臣鵠立通明殿 一朶紅雲捧玉皇”이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6 上元侍飮樓上三首呈同列》
♣ 홍운전[紅雲殿]옥황상제의 궁궐로, 늘 붉은 구름으로 에워싸여 있다고 한다.
♣ 홍운전각[紅雲殿閣]황제의 궁성(宮城)을 가리킨다. 선인(仙人)이 사는 곳에는 늘 붉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 홍원로[洪元老]원로는 홍명구(洪命耈)의 자(字)이다.
♣ 홍유보불[弘儒黼黻]홍유는 신라의 명유(名儒) 설총. 보불은 관복(官服)에 수놓은 무늬인데 곧 훌륭한 예악문물(禮樂文物)을 가리킨다.
♣ 홍유손[洪裕孫]자는 여경(餘慶), 호는 소총(篠叢). 조선조 세조가 찬위(簒位)하자 세속의 영화를 버리고 남효온(南孝溫)ㆍ이총(李摠) 등과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 노장(老莊)을 토론하며 시주(詩酒)로 세일을 보내어 청담파(淸談派)로 일컬어졌음.
♣ 홍유효법곤[鴻猷效法坤]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상(上)에 “지혜는 높이는 것이요, 예법은 낮추는 것이니, 높이는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요, 낮추는 것은 땅을 본뜬 것이다.[知崇禮卑 崇效天 卑法地]”라는 말이 나온다.
♣ 홍의[紅衣]천주교(天主敎)를 말한 것. 홍의주교(紅衣主敎).
♣ 홍이상[洪二相]홍언박(洪彦博)을 가리킨다.
♣ 홍이포[紅夷砲]성능이 우수한 대포를 말한다. 홍이(紅夷)는 안남(安南)의 서쪽에 있는 나라로 대포를 잘 만들었다.
♣ 홍익인간[弘益人間]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 국조(國祖) 단군의 건국이념으로 고조선개국 이래 우리나라 정치, 교육의 기본정신임.
♣ 홍일점[紅一點]본래는 푸른 잎 가운데 오직 한 송이 붉은 꽃이 피어 있는 것, 혹은 여럿 속에서 오직 하나 특별한 것을 가리킴. 오늘날에는 많은 남자들 사이에 단 한 사람뿐인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임.
♣ 홍자[紅紫]홍색(紅色)과 자색(紫色)의 꽃을 말한다.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간색(間色)인 보랏빛이 정색(正色)인 적색(赤色)의 지위를 침범하는 것이 보기 싫고, 음란한 정(鄭) 나라 노래가 아악(雅樂)을 어지럽히는 것이 밉다.”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 ‘홍자탈주(紅紫奪朱)’라는 성어(成語)가 나오게 되었다.
♣ 홍장[紅粧]홍장은 주로 어여쁜 여인을 뜻하는 말이다.
♣ 홍점[鴻漸]“기러기가 점점 나아간다[鴻漸].”는 말이 주역(周易)에 있으며, 벼슬이 아래로부터 위로 차츰 올라감을 비유하였다.
♣ 홍점[鴻漸]당 나라 육우(陸羽)의 자인데 상저옹(桑苧翁)이라 자호하였다. 태상시 태축(太常寺太祝)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두문 저서(杜門著書)하였는데 세상에 전하는 것은 오직 다경(茶經) 3권뿐임.
♣ 홍점반[鴻漸磐]높은 경지에 도달했음을 비유한 말. 주역(周易) 점괘(漸卦)에 “기러기가 점차 물가로 날아간다. 기러기가 점차 반석 위로 날아간다. 기러기가 점차 육지로 날아간다.[鴻漸于干 鴻漸于磐 鴻漸于陸]”하여 점차로 진취하는 기상을 논한 데서 온 말이다.
♣ 홍정[紅丁]버섯의 별칭이다.
♣ 홍정[紅亭]붉게 장식한 요정(料亭), 즉 기생집을 말한다.
♣ 홍정[紅旌]붉은 깃발.
♣ 홍제원[洪濟院]조선 시대에 중국 사신(使臣)이 서울로 올 때 성(城)안에 들어오기 전에 묵던 공관(公館)으로, 지금의 서울 홍제동에 있었다.
♣ 홍준저[鴻遵渚]사명(使命)을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감을 뜻함. 주공(周公)이 일찍이 동쪽 지방을 다스리러 가 있을 적에 그 곳 백성들이 주공을 만나보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러기가 물가를 따르듯이 주공도 의당 조정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여 노래하기를 “기러기는 날아서 물가를 따르나니 공이 돌아갈 곳이 없으랴 너에게서는 이틀 밤만 묵을 것이다[鴻飛遵渚 公無所歸 於女信處]” 한 데서 온 말이다. 《詩經 豳風 九罭》
♣ 홍중실[洪仲實]중실은 홍세영(洪世英)의 자이다.
♣ 홍진라착편[紅塵懶着鞭]벼슬을 재촉하는 조정의 소명(召命)이 정말 지겹다는 말이다.
♣ 홍질발[紅叱撥]홍질발은 당 현종(唐玄宗) 때 대완국(大宛國)에서 공물(貢物)로 진상한 천하 명마(名馬)의 이름이다.
♣ 홍추[鴻樞]추밀원(樞密院)을 말한 것.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요직을 말한다. 추신(樞臣). 홍(鴻)은 아칭(雅稱).
♣ 홍탕[弘湯]공손홍과 장탕.
♣ 홍택방[洪澤芳]택방(澤芳)은 홍영(洪霙)의 자(字)이다.
♣ 홍평보[洪平甫]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홍간(洪侃). 평보는 자이고, 첨의사인(僉議舍人)으로 있다가 동래 현령(縣令)으로 폄(貶)되어 왔으며 재임중 세상을 떠났다.
♣ 홍포[紅袍]조정 고위 관원이 입는 붉은색 조복(朝服)을 말한다.
♣ 홍한[紅汗]유사(遺事)에 “귀비가 매년 여름철에는 얇은 비단옷을 입고 시녀들을 시켜 부채질을 하여도 그 열(熱)이 해소되지 않고 땀이 나는데 붉고 매끄러운 가운데 향내가 많아, 혹 수건에 씻으면 그 빛깔이 홍도화(紅桃花)와 같았다.” 하였다. 또 현종유록(玄宗遺錄)에 “귀비가 마외역(馬嵬驛)에서 목매어 죽었을 때 고역사(高力士)가 목맨 비단을 가져왔는데 눈물 자국이 다 담혈색(淡血色)과 같았다.” 하였다.
♣ 홍홍[泓泓]물이 깊은 모양, 물이 맑은 모양
♣ 홍화[弘化]홍화는 서경(書經) 주관(周官)에 “소사(少師)ㆍ소부(少傅)ㆍ소보(少保)는 삼고(三孤)이니, 삼공의 다음 관원으로서 교화를 넓혀야 한다.[貳公弘化]” 한 데서 온 말로, 즉 삼공의 다음 벼슬인 찬성(贊成)에 해당하는 말이다.
♣ 홍화보[洪和輔]홍화보는 자는 경협(景協)인데 영조 때 파주 목사(坡州牧使)ㆍ동부승지ㆍ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 홍희[洪熙]명 나라 인종(仁宗)의 연호로, 1년 만에 인종이 죽었다.
♣ 화각[畫角]옛날 군중(軍中)에서 사용했던 뿔피리.
♣ 화간[禾竿]정월 대보름날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수수깡으로 벼이삭 조이삭의 모양을 만들어 다는 것.
♣ 화간[花間]화간은 후촉(後蜀)의 조숭조(趙崇祚)가 편(編)한 화간집(花間集)의 준말로, 내용은 곧 당(唐) 나라 말기 여러 명가(名家)들의 사(詞)인데, 진진손(陳振孫)은 이를 전사(塡詞)의 시조(始祖)라고 하였다.
♣ 화개[華蓋]화개는 임금이나 고관이 사용하는 호화로운 일산이나 귀족이 타는 수레의 덮개를 말하는데, 흔히 존귀한 사람의 행차를 말할 때 인용된다.
♣ 화개성[華蓋星]대제성(大帝星) 위의 아홉 개의 별로 마치 천제(天帝)의 자리를 덮어 주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晉書 天文志上》
♣ 화견[禾絹]황제를 가리킨다. 남사(南史) 송기 하(宋紀下) 명제(明帝)에, “중서사인(中書舍人) 호모호(胡母顥)가 전권(專權)을 행하여 아뢰면 허락받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이르기를, ‘화견이 눈을 가리고 승낙을 하니 호모(胡母)가 큰 주머니를 벌리고 있다.’ 하였다.” 하였는데, 화견은 상(上)을 가리키는 것이다.
♣ 화경[花卿]당(唐)의 맹장(猛將) 화경정(花敬定)을 이른다.
♣ 화경[華鯨]화는 종(鐘), 경은 동목(橦木)으로, 곧 종과 장대를 말한다.
♣ 화계두노장[花溪杜老莊]사천성(四川省) 성도시(成都市) 서쪽 교외의 금강(錦江) 지류인 완화계(浣花溪)에 두보(杜甫)의 ‘완화초당(浣花草堂)’이 있었다.
♣ 화곤[華袞]옛날 왕공(王公) 귀족(貴族)이 입던 화려한 의복인데 영총(榮寵)을 말한다. 서언고사장예류(書言故事獎譽類)에 “남이 포창해 줌을 사례하니 영광이 화곤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전하여 화곤은 제왕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 화곤부월정노사[華袞鈇鉞正魯史]화곤은 고관이 입는 화려한 예복(禮服)이고, 부월(鈇鉞)은 형벌에 쓰는 작두와 도끼로, 역사서에서 포폄(褒貶)을 가해 기리고 내치는 것을 말하며, 노사(魯史)는 노 나라의 역사로 춘추(春秋)를 말한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저술하면서 포폄의 뜻을 붙여서 저술하였다.
♣ 화공[畫栱]건물의 대들보를 받치는 기둥 위에 있는 방형(方形)의 나무인 두공에 단청(丹靑)을 베푼 것을 말한다.
♣ 화공[化工]화공은 천공(天工) 즉 조물(造物)과 같은 기막힌 기예의 소유자를 뜻한다.
♣ 화관[華館]중국 사신이 머무는 관소.
♣ 화광[和光]노자(老子)에, “그 빛을 혼동하게 하며 그 먼지를 같이한다[和光同塵].”는 말이 있는데, 세상과 화합하여 다른 체하지 않음을 뜻한다.
♣ 화광동진[和光同塵]화광(和光)은 빛을 늦추는 일이고, 동진(同塵)은 속세의 티끌에 같이 한다는 뜻. 자기의 지혜를 자랑함 없이 오히려 그 지혜를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에 동화함을 말한다. 부처⋅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지혜와 본색을 감추고 모습을 바꾸어 인간계에 나타남.
♣ 화괴[花魁]매화(梅花)의 별칭인데, 또는 난초[蘭]와 연꽃[藕花]의 별칭으로 쓰기도 한다.
♣ 화교[和嶠]화교는 사람 이름. 도량이 좁다는 뜻으로 인용한 것이다. 진서(晉書) 권 45 화교전(卷四十五 和嶠傳)에 “화교가 태감(太監) 순욱(荀勗)의 사람됨을 비루하게 여겨 한수레에 같이 타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 화교애전[和嶠愛錢]화교는 진 혜제(晉惠帝) 때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이른 명신(名臣)이었으나, 재산이 매우 많아 왕자(王者)와 견줄 만하였는데도 성품이 지극히 인색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특히 두예(杜預)는 그를 일러, 돈을 탐하는 버릇[錢癖]이 있다고까지 하였다. 《晉書 卷四十五》
♣ 화교자촉[和嶠刺促]화교는 진 무제(晉武帝) 때의 대신으로 매우 임금의 총애를 받았는데, 반악(潘岳)이 당시에 산도(山濤)ㆍ왕제(王濟)ㆍ배해(裵楷)ㆍ화교 등이 임금의 총애받는 것을 그르게 여겨, 각도(閣道)에다 요(謠)를 만들어 쓰기를 “왕제는 말의 가슴걸이와 같고, 배해는 말의 꼬리 끈과 같으며, 화교는 너무 바빠서 쉬지를 못한다.[王濟鞅 裵楷緧 和嶠刺促不得休]”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五十五》
♣ 화교전[和嶠錢]화교는 진 혜제(晉惠帝) 때에 벼슬이 태자태부에 이르렀고 가산(家産)도 대단히 풍부하였으나, 그는 성품이 매우 인색하였으므로, 두예(杜預)가 “화교는 돈에 대한 탐벽이 있다[有錢癖嶠].”고 한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四十五》
♣ 화국수[華國手]한림원(翰林院)이나 사관(史館)에 벼슬하여 제고(制誥)나 외교(外交)에 관한 문장(文章)을 짓는 것을 나라를 빛내는[華國] 문장이라 이른다.
♣ 화궁[花宮]불사(佛寺)를 일컫는 말이다.
♣ 화극[畫戟]당(唐) 나라 때 3품 이상 고위 관원의 저택 문 앞에 세워 두었던 채색(彩色)한 목창(木槍)으로 고관의 집을 뜻한다.
♣ 화금[火金]옛날 불씨를 만들던 도구, ‘부시’
♣ 화기염염경조벽[火旂焰焰驚趙壁]붉은 깃발은 한(漢) 나라는 적색(赤色)을 숭상했으므로 곧 한 나라 기를 가리킨다. 한신은 진여를 맞아 싸울 적에 거짓 패하여 달아나면서 미리 군사들에게 조 나라 군사들이 추격해 오는 틈을 타서 한 나라의 붉은 깃발을 꽂도록 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발견한 조 나라 군사들은 크게 놀라 도망쳤으므로 한신은 쉽게 승리하였다. 《漢書 韓信傳》
♣ 화누역경[火耨力耕]’역(力)’은 ‘도(刀)’의 잘못임. 삼국유사(三國遺事) 엄장광덕전(嚴莊廣德傳)에 “대종역경(大種力耕)"이라 한 것도 “화종도경(火種刀耕)"의 잘못임.
♣ 화담[花潭]서경덕(徐敬德)의 호이자, 개성 박연폭포 아래에 있던 못 이름.
♣ 화당[華堂]관원의 역소(役所)를 가리킨다.
♣ 화당[畫堂]화당은 단청한 큰 집.
♣ 화당전위[畫堂傳位]황제가 죽고 황태자가 제위(帝位)에 오르게 된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 성제(成帝)가 갑관 화당(甲館畫堂)에서 태어나 적황손(適皇孫)이 된 고사에서 유래하여 이후 화당을 황태자의 전고(典故)로 쓰게 되었다. 《漢書 元后傳》
♣ 화덕[火德]염제 신농씨(炎帝神農氏)가 화덕(火德)으로 왕(王)하였음.
♣ 화덕[和德]천지 음양의 조화.
♣ 화도박수[鞾刀帕首]무인(武人)의 상복(常服)임.
♣ 화도편[和陶篇]진(晉) 나라 도잠(陶潛)의 시에 화운(和韻)한 시편(詩篇)을 말한다.
♣ 화두[話頭]종사(宗師)가 어떤 법을 말하여 후배를 지도하는 것이 마치 훌륭한 장인(匠人)이 재료를 마음대로 다루어 좋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이, 선(禪)을 참구할 때에는 종사로부터 크게 의문되는 한 법을 받아 일념으로 그 의문을 참구하여 심지(心地)를 깨닫게 하는 공부의 한 방법이다.
♣ 화령[和寧]화령은 함경도 영흥(永興)의 고호이다.
♣ 화록[畫鹿]정홈(鄭弘)이 어느 날 자기 수레 뒤에 백록(白鹿)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주부(主簿)에게 묻자 “삼공(三公)의 수레에는 다 사슴을 그렸는데 지금 백록이 뒤를 따르니 명공(明公)은 반드시 재상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한 고사이다. 한서(漢書)
♣ 화록점상[畵鹿占祥]재상이 될 상서. “정홍(鄭弘)이 임회(臨淮) 태수가 되어 행차하는데 두 사슴이 수레를 따라 오는지라, 주부(注簿) 황국(黃國)이 절하며 하례하되, 듣건대 삼공(三公)의 수레에는 사슴을 그린다 하오니, 명부(明府)께서 마땅히 재상이 되리이다.” 하였다. 홍이 과연 태위(太尉)가 되었다.
♣ 화룡[火龍]더운 기운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양. 왕곡(王轂)의 고열행(苦熱行)에, “축융이 남으로 와 화룡을 매질하니, 화기가 이글이글 하늘을 불사르네.[祝融南來鞭火龍 火旗焰焰燒天紅]" 하였음.
♣ 화룡점정[畵龍點睛]용을 그릴 때 마지막으로 눈동자에 점을 찍어 완성시킴. 곧, 사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하여 일을 끝냄. 남양(梁)나라 장승요(張僧繇)가 용을 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점 찍으니 용이 살아 움직여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
♣ 화룡지사백제월[火龍之祀白帝月]화룡은 간지(干支)로 병진(丙辰)을 뜻하고 백제(白帝)는 가을을 맡은 신(神)이므로, 즉 1616년인 병진년 가을을 가리키는데, 이때에 광해군(光海君)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기 위해 김제남(金悌男)을 추형(追刑)하였고, 참신(讒臣)정조(鄭造) 등은 광해군의 비행을 적극 도우면서 선량한 조신(朝臣)들을 많이 처벌하였다.
♣ 화류[花柳]화가 유항(花街柳巷)의 준말. 기생 또는 유곽(遊廓)을 말함.
♣ 화류[驊騮]화류는 대추 빛깔의 준마(駿馬)로 주 목왕(周穆王)이 타고서 서왕모(西王母)를 만나러 갔다는 팔준마(八駿馬)의 하나이다.
♣ 화륜[火輪]화륜은 해를 가리킨다.
♣ 화리[花梨]종려나무[棕櫚]이다.
♣ 화림[花林]화림은 안음(安陰)의 고호이다.
♣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꽃이 열흘 동안 붉은 것은 없음. 한번 성하면 반드시 쇠퇴함. 부귀영화(富貴榮華)가 오래가지 못함을 비유
♣ 화문[花門]거연해(居延海)에서 북쪽으로 3백 리 되는 곳에 있는 산 이름으로, 당 나라 초기에 보루를 설치하고서 오랑캐의 침입을 막았는데, 천보(天寶) 연간에 회흘(回紇)에게 점령당하였다. 뒤에는 이로 인해 회흘의 대칭(代稱)으로 쓰이게 되었다.
♣ 화미구미[畫眉求媚]한(漢) 나라 장창(張敞)은 위의(威儀)가 너무도 부족하여 그 아내에게 잘 보이려고 항상 아내의 눈썹을 그려 주었다. 《漢書 張敞傳》
♣ 화미장경윤[畫眉張京尹]한(漢) 나라 선제(宣帝) 때 경조윤(京兆尹)을 지낸 장창(張敞)을 이름이니, 평양(平陽) 사람으로 자는 자고(子高)이다. 벼슬에 있을 때마다 치적이 많았으며 일찍이 그의 아내를 위해 눈썹을 그린 일이 있었다. 《漢書 卷七十六 張敞傳》
♣ 화반[火伴]화반(伙伴)이라고도 쓰는데 동반(同伴)을 일컬음.
♣ 화발치진[華髮緇塵]화발은 백발을 뜻함이고, 치진은 풍진(風塵)에 분주하여 의복이 검어짐을 말한다. 사조(謝朓) 수왕진안시(酬王晉安詩)에 “누가 경락(京洛)에 오래 머물면서 흰옷을 치진에 더럽히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
♣ 화벽[和璧]옛날 초(楚) 나라 사람 화씨(和氏)가 초산(楚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가지고 여왕(厲王)에게 바치니, 여왕은 돌을 가지고 거짓말을 한다고 그의 왼발 발꿈치를 잘라버렸고, 그 후 또 무왕(武王)에게 바치니, 무왕 역시 거짓말을 한다고 그의 오른발 발꿈치를 잘라버렸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그후에 마침내 문왕(文王)에게 바치니, 문왕은 옥인(玉人)을 시켜 그 박옥을 다듬게 하여 보물을 얻자, 마침내 화씨벽(和氏璧)이라 불렀다 하였다.
♣ 화병[畫餠]능력이 없음을 비유한 말. 위 문제(魏文帝)의 조서에 “허명(虛名)만 있는 사람은 마치 땅바닥에 그려 놓은 떡을 먹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였다.
♣ 화보[花譜]사철 동안 피는 꽃을 시절순으로 그린 책.
♣ 화복동문[禍福同門]화와 복은 모두 자신이 불러들인다. 화복유기(禍福由己), 화복무문(禍福無門)
♣ 화복무문[禍福無門]“화와 복은 들어오는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부르는 대로 온다[禍福無門 惟人所召].”는 옛말이 있다.
♣ 화복무문화불단행[禍福無門禍不單行]화(禍)와 복(福)이 들어오는 정해진 문이 없으며, 화는 한 번만 행해지지 않는다.
♣ 화봉[華封]요(堯) 임금 때에 화봉(華封) 사람이 요 임금에게 ‘수(壽)ㆍ부(富)ㆍ다남자(多男子)’의 세 가지 일로 축수했다는 화봉삼축(華封三祝)의 준말로, 곧 임금에게 축수하는 것을 뜻한다. 《莊子 天地》
♣ 화봉삼축[華封三祝]옛날 화(華)의 봉인(封人)이 요(堯)를 두고 수(壽)ㆍ부(富)ㆍ다남자(多男子)를 축원했다는 고사. 《莊子 天地》
♣ 화봉인[華封人]화(華) 땅의 봉인이란 뜻인데, 요(堯) 임금이 화 땅을 시찰나갔을 때 그 봉인이 요임금에게 수(壽)ㆍ부(富)ㆍ다남자(多男子) 세 가지로 축원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天地》
♣ 화불단행[禍不單行]불행은 홀로 가지 않음. 불행은 종종 하나로 그치지 않고 여러 개가 잇달아 한꺼번에 옴
♣ 화사[畫蛇]화사첨족(畫蛇添足)의 준말로, 뱀은 본디 발이 없는데 발을 그린다는 뜻으로서 즉 소용없는 일을 비유한 말이다.
♣ 화사착족[畫蛇着足]옛 사람이 술 한 잔을 놓고는 각각 뱀을 그려서 먼저 그리는 사람이 그 술을 마시기로 하였는데 한 사람이 먼저 그려서 다시 뱀의 발을 그렸다. 나중 그린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먼저 그렸어도 발이 있는 것은 뱀이 아니다.” 하고는 술을 빼앗아 먹었다. 《戰國策》
♣ 화사첨족[畫蛇添足]뱀의 발. 뱀을 그리는데 실물에는 없는 발까지 더하여 그림. 쓸데없는 짓. 안 해도 될 쓸데없는 일을 덧붙여 하다가 도리어 일을 그르침
♣ 화산[花山]강화부(江華府) 남쪽 5리쯤에 위치한 산으로 곧 강화를 가리킨다.
♣ 화산[花山]고종(高宗) 때 옮겨 도읍했던 강도(江都)의 주산(主山).
♣ 화산[華山]삼각산(三角山)을 이름인데, 진(秦)ㆍ한(漢)의 수도(首都) 장안(長安) 뒷산 근처의 산인 화산에 견준 것이다.
♣ 화산[花山]안동(安東)의 옛 이름이다.
♣ 화산[華山]화산은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상(商)을 정벌한 뒤에 전쟁이 끝났다는 뜻에서 말을 방목하였던 곳이다.
♣ 화산[崋山]화산은 중국의 오악(五嶽) 가운데 하나임.
♣ 화산기[華山畿]악부(樂府) 가곡(歌曲)의 한 가지이다. 송 소제(宋少帝) 때에 한 선비가 화산기로부터 운양(雲陽)을 가다가 여관에서 약 18~19세쯤 된 여인을 보고는 좋아하였으나 어찌할 수가 없어 마침내 심질(心疾)을 얻어 죽게 되자, 자기 모친에게 유언하기를 “나를 장사지낼 적에 화산을 경유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모친이 그의 말대로 관(棺)을 싣고 화산을 들러 그 여인의 문앞에 이르자, 말이 더 이상 가지 않으려고 마구 버티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목욕하고 단장한 다음, 문을 나와서 노래하기를 “화산기여, 그대는 이미 나를 위해 죽었으니, 혼자 살아서 누구를 위해 이 몸 바치랴. 예뻐할 때처럼 좋아한다면, 관목이 나를 위해 열려다오[華山畿 君旣爲儂死 獨活爲誰施 歡若見憐時 棺木爲儂開]”하니, 관목이 과연 열리자 그 여인이 관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죽으므로, 마침내 그 선비와 합장하여 이를 신녀총(神女冢)이라 부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화삼변[禾三變]벼가 세 번 변함. 회남자(淮南子)에, “부자(夫子; 孔子)는 벼가 세 번 변하는 것을 보고서 탄식하며 하는 말이, ‘여우가 죽을 적에는 언덕으로 머리를 향하는데, 나는 벼에로 머리를 향하련다.’ 하였다.” 했다. 이는 도(道)가 행해지지 않아서 귀여(歸歟)의 탄식을 내보인 것이다. 벼란 것이 싹이 나서 그 싹이 빼어나 열매를 맺으니, 무릇 세 번을 변해 고개가 드리워 그 뿌리로 향하는 때문이다.
♣ 화삼월[火三月]진 나라 궁궐 아방궁(阿房宮)이 얼마나 굉장하였던지 항우가 거기에 불을 질렀더니 불이 석 달이 되도록 꺼지기 않았다 한다.
♣ 화삽[畫翣]관(棺)을 치장하는 것인데 그 모양이 부채와 같다. 상여가 나갈 때에 수레를 가리고 곽(槨)에 넣을 때에는 널을 가리는 것이다. 《禮記 檀弓上》
♣ 화삽[畫翣]상여의 양쪽에 세우고 가는 제구(祭具)이다. 원래는 깃으로 만들었으나 후세에 네모진 화포(畫布)에 다섯 자 길이의 자루를 달고 깃털로 장식하였다. 《禮記 喪大記》
♣ 화상치[畵象治]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에 “옛날에는 백성들이 순박하므로 죄인의 옷에 오형(五刑)의 형상을 그려 입게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서로 경계하게 하였다.” 했다.
♣ 화서[華胥]화서는 열자(列子) 황제(黃帝)에 “옛날 황제(黃帝)가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근심하고 있었는데, 낮잠을 자다가 꿈에 화서 나라에 가서 그 나라가 아주 태평하게 다스려지는 것을 구경했다.”는 고사이다.
♣ 화서국[華胥國]전설에 나오는 이상국(理想國)으로, 엄주(弇州)의 서쪽, 태주(台州)의 북쪽에 있다고 하는 나라인데, 일찍이 황제(黃帝)가 꿈에 가보았다는 평화스러운 나라. 열자(列子) 황제(黃帝)에 “황제가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걱정하다가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화서국에 갔다. 그 나라에는 관장(官長)이 없어도 다스려지고, 백성들은 생사에 대해 기뻐하거나 슬퍼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살고 있었다.” 하였다.
♣ 화서지몽[華胥之夢]황제(黃帝)가 낮잠을 자다가 꿈에 화서국(華胥國)에 가서 그 나라가 잘 다스려진 것을 보았다는 고사에서, 길몽(吉夢) 또는 그냥 꿈의 뜻으로도 쓰인다.
♣ 화서풍일[華胥風日]태평시대의 뜻. 열자(列子) 황제(黃帝)에 “황제씨가 낮잠을 자던 중 꿈속에 화서의 나라에서 놀았는데, 그 나라는 임금도 없이 자연스럽게 살았고 백성들도 욕심이 없었다. 꿈을 깬 후 깨달음이 있어 천하를 잘 다스렸다.” 하였음.
♣ 화석[華席]번화한 자리
♣ 화석[花石]이율곡(李栗谷)의 화석정(花石亭)을 가리킨다.
♣ 화석정[花石亭]본디 지돈녕(知敦寧)으로 시호가 강평(康平)인 이명신(李明晨)의 별장인데, 그가 죽은 뒤에 여기가 황폐해졌다가 그의 손자인 이의석(李宜碩)에 이르러 다시 그 자리에 중건(重建)되었다.
♣ 화성[火城]당 나라 때 원단(元旦)이나 동지(冬至)가 되면 크게 조회를 열어 촛불을 수백 개 베풀었는데, 이를 화성(火城)이라 했음. 《唐國史補》
♣ 화성[化城]법화(法華) 제 칠유(七喩)의 하나. 여러 사람이 보배 있는 곳을 찾아가다가 길이 험악하여 사람들이 피로해하므로, 그때에 길잡이가 한 계교를 내어 신통력으로써 임시로 큰 성(城)을 나타내어 여기가 보배 있는 곳이라 하자, 여러 사람이 대단히 기뻐하여 이 성에서 쉬었다. 길잡이는 여러 사람의 피로가 풀림을 보고는 이 화성을 없애버리고, 다시 참으로 보배 있는 곳에 이르게 하였다 한다. 그래서 이 화성을 방편교(方便敎)의 깨달음에, 참으로 보배 있는 곳을 진실교(眞實敎)의 깨달음에 비유한다. 불사(佛寺)의 별칭.
♣ 화성[畫省]상서성(尙書省)을 말한다. 상서성 안에 호분(胡粉)으로 벽을 바르고 옛날 현인과 열사를 그려놓았기 때문에 화성이라 한다.
♣ 화성[華省]청직(淸職)의 관청을 가리키는 말이다. 맡은 직무가 임금과 밀접하고 존귀한 관서.
♣ 화성[花城]하양(河陽)의 옛 이름이다.
♣ 화성[火城]횃불로 성(城)을 에워싸서 성을 수비하는 것을 이름. 양(梁) 나라 때 양간(羊侃)이 후경군(侯景軍)의 핍박을 받았을 때 성(城) 주위에 횃불을 많이 던져 화성을 만들어서 적의 진로를 차단했던 데서 온 말이다.
♣ 화성부[華城府]지금의 경기도 수원(水原).
♣ 화성함향[畫省含香]시종신이 있는 관아를 말한다. 옛날 상서랑(尙書郞)이 임금에게 아뢸 때에는 입 냄새를 없애기 위하여 계설향(鷄舌香)을 입에 머금었다 한다. 《通典 職官 4》
♣ 화성흘연[化城屹然]법화도사(法華道師)가 험한 길 가운데서 변화(變化)를 부려 한 성(城)을 만들어 피로한 대중(大衆)들을 그 안에 들어가서 쉬게 하였다. 《法華經》
♣ 화속전[火粟田]나무를 베어 버리고 밭을 개간하여 한 해만 경작하고 묵혀 버리는 전지를 일컬음.
♣ 화수[火樹]등불의 빛이 성한 것을 말함.
♣ 화수[火樹]영산홍의 꽃이 불같이 붉은 것을 비유한 것임. 백거이의 시에 “火樹風來飜絳焰 瓊枝日出晒紅紗"라 하였음.
♣ 화수[火宿]화수는 심수(心宿)라 부르며 28수(宿) 중 동방 창룡칠수(蒼龍七宿)의 하나이다.
♣ 화숙[和叔]화숙은 박순(朴淳)의 자(字)이다.
♣ 화숭[華嵩]중국 오악(五嶽)의 하나인 화산(華山)과 숭산(嵩山)으로 높은 산의 대명사가 되었다.
♣ 화승[華勝]머리를 꾸미는 꽃 모양의 장식물.
♣ 화승[花勝]화승은 부인의 머리에 꽂는 채색 조화(造花)를 말한다.
♣ 화승상투[花勝相投]중국에서 정월 7일 인일(人日)에 일곱 가지 채소국을 먹고 채단(綵緞)을 오려서[翦綵] 머리 장식[花勝]을 만들어 서로 선물하고 머리에 꽂고 다니며 높은 언덕에 올라가 시를 읊는 풍속이 있었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이것은 전설적인 선녀 서왕모(西王母)가 머리에 꽂고 있던 대승(戴勝)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장수(長壽)와 행복을 비는 뜻이 담겨 있다.” 하였다.
♣ 화시[華始]한(漢) 나라 때의 음악 이름. 음률을 만물의 영화(英華)의 시작에 비긴 것이다.
♣ 화시감온포[花時甘縕袍]꽃피는 계절에 아직도 솜옷을 좋아한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권7 유우(遺遇)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시구이다.
♣ 화식[火食]속세에 사는 사람. 화식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함은 신선 같다는 얘기이다. 《王直方詩話》
♣ 화식전[貨殖傳]사기(史記) 열전(列傳)의 하나로서 이 글은 모두 재물을 불리는 일에 관해서 기술한 것이다.
♣ 화신풍[花信風]소한(小寒)에서부터 곡우(穀雨)까지 모두 8개 절기인데 그것을 날짜로 따져보면 1백 20일이며, 매 5일이 하나의 철이 되어 모두 24철이 되고 철마다 한 종류의 꽃 소식이 서로 응한다 하여 이것을 이십사번화신풍(二十四番花信風)이라 부른다. 이것은 시기에 맞춰 차례로 피어나는 봄철의 꽃에 의해 흘러가는 세월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봄바람 속에 이십사번 꽃 가운데 한 번의 꽃이 또 피었다는 것이다.
♣ 화씨[和氏]화씨벽(和氏璧) 고사의 주인공인 변화(卞和)를 말한다.
♣ 화씨박[和氏璞]춘추 시대 초(楚) 나라 변화(卞和)가 산중에서 얻은 옥박(玉璞)을 말하는데, 이것이 천하에 뛰어난 보옥(寶玉)이었으므로, 여기서는 훌륭한 인품에 비유한 것이다.
♣ 화씨벽[和氏璧]초(楚) 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 초(楚) 나라 여왕(厲王)에게 올리니, 여왕이 옥공(玉工)을 시켜 감정하게 하였다. 옥공이 돌이라고 하니 임금이 속였다고 하여 좌족(左足)을 베어 버렸다. 여왕이 죽고 무왕(武王)이 즉위하자 또 박옥을 올리니, 무왕이 옥공을 시켜 감정하게 하였는데 또 돌이라고 하매 그 우족(右足)을 베어버렸다. 그후 무왕이 죽고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가 박옥을 안고 형산 아래에서 통곡하니, 문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 연유를 물었다. 변화가 말하기를 “보옥을 돌이라 하고 정직한 선비를 간사한 자라고 하니, 그것이 슬퍼서 그런다.” 하였다. 왕이 마침내 옥공을 시켜 박옥을 쪼개보니 과연 진귀한 보옥이 나오므로 드디어 화씨벽(和氏璧)이라 이름하였다. 《韓非子 和氏》
♣ 화씨성[和氏城]전국 시대 조(趙) 나라가 화씨벽(和氏璧)이란 보옥을 얻었는데, 진(秦) 나라가 15개의 성과 바꾸자고 했다.
♣ 화씨양[華氏羊]춘추 때에 송(宋) 나라 화원(華元)이 양(羊)을 잡아 여러 사람을 대접하였는데, 그 어자(御者) 양침(羊斟)은 얻어먹지 못하여 불평을 품었다가, 그 뒤에 송 나라와 정(鄭) 나라가 싸울 때에 양침이, “전일에 양을 잡아 대접할 때는 당신의 마음대로 하였지마는, 오늘 전쟁에 수레를 모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 하고는 화원의 탄 수레를 몰고 정 나라 군중으로 달려들어갔으므로 화원이 패하였다.
♣ 화씨지박[和氏之璞]화씨는 변화(卞和)인데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이다. 변화가 옥덩이 하나를 발견하여 전후로 초 나라 여왕(厲王)과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모두 기만의 죄로 몰려 양쪽의 발꿈치가 잘렸다. 문왕(文王) 때에 이르러 변화가 또 옥덩이를 안고 형산(荊山) 밑에서 통곡하자 문왕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 옥덩이를 쪼개어 가공한 결과 보옥(寶玉)을 얻었는데 이를 화씨벽(和氏璧)이라고 일컬었다. 《韓非子 和氏》
♣ 화씨지벽[和氏之璧]천하에서 가장 이름난 옥. 초(楚) 나라의 변화(卞和)가 형산(刑山)에서 얻은 유명한 구슬. 조(趙)에서 그것을 얻었으며, 진(秦) 나라에 가져갔다가 오롯이 돌려왔다.
♣ 화악[華嶽]중국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오악(五嶽)의 하나.
♣ 화악[龢樂]화악은 오음(五音)을 가지고 악곡(樂曲)을 조율시키는 것을 말한 것으로, 국어(國語) 주어(周語)에 “오성으로 악을 고르고 율로써 오성을 균평하게 한다.[聲以龢樂 律以平聲]" 한 데서 온 말이다.
♣ 화악루[花萼樓]당 나라 양황제(讓皇帝)가 흥경궁(興慶宮) 서남쪽에 다락을 짓고 화악상휘지루(花萼相輝之樓)라 제액(題額)하였다. 제왕(諸王)들이 풍류를 아뢰면 반드시 곧 불러 다락에 오르라 하여 같은 탑(榻)에 앉아 즐기며 황금과 비단을 하사한 고사가 전한다. 화악(花萼)이란 이름은 대개 시경(詩經)에 있는 상체의 꽃[常棣之華]의 뜻을 취한 것인데 상체꽃은 형제의 우애(友愛)에 비유한 것이다. 《舊唐書 讓皇帝憲傳》
♣ 화양[華陽]은자(隱者)가 사는 곳을 가리킴. 양(梁)의 도홍경(陶弘景)이 구곡산(句曲山)에 숨어살며 자호를 화양은거(華陽隱居)라고 하고, 무제(武帝)가 예를 갖추어 맞이하려했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음. 《梁書 陶弘景傳》
♣ 화양건[華陽巾]은자(隱者)가 쓰는 두건. 신선전(神仙傳)에 이런 기록이 있다. “경조(京兆)사람인 위절(韋節)이 화산(華山)의 남쪽 기슭에 은거하면서 호를 하양자(華陽子)라고 하였으며, 그가 쓰고 다니는 두건을 화양건이라고 하였다.”
♣ 화양귀마[華陽歸馬]화양은 화산(華山)의 남쪽. 주(周) 무왕(武王)이 주(紂)를 치는 전쟁을 끝낸 뒤에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말[馬]을 화산(華山)에 돌려보내고 군수 물자를 나르던 소는 도림(桃林)의 들에 놓았다 한다. 《書經 武成》
♣ 화양동[華陽洞]화양동은 도가(道家) 삼십육동천(三十六洞天)의 제 8동으로 모군(茅君)이 다스리는 신선들이 산다는 곳이다.
♣ 화양은거[華陽隱居]산중에 은거하면서도 매양 국사를 자문받았던 양(梁) 나라 때의 도홍경(陶弘景)을 힐난하는 말이다. 도홍경은 은사(隱士)로서 자호가 화양은거(華陽隱居)이며, 일찍이 제 고제(齊高帝) 때에 제왕시독(諸王侍讀)을 지냈고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하였다. 그는 특히 음양(陰陽)ㆍ오행(五行)ㆍ선술(仙術)ㆍ의술(醫術) 등에 뛰어났는데, 양 무제(梁武帝) 때에는 모든 국가의 대사(大事)를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으므로 당시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南史 卷七十六 隱逸下》
♣ 화어소장[禍於蕭墻]소장은 병풍으로 가까운 데에서 화란이 싹튼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계씨(季氏)에, “나는 계손(季孫)의 걱정이 전유(顓臾)에게 있지 않고 소장(蕭墻) 안에 있을까 걱정이다.” 하였다.
♣ 화엄누각풍[華嚴樓閣風]경각간에 이루어진 것을 말함.
♣ 화엽난겸여각치[花葉難兼如角齒]뾰족한 뿔이 달린 짐승은 예리한 이빨이 없듯이 꽃이 아름다운 초목은 대체로 잎이 곱지 않다는 것이다.
♣ 화영[華英]예쁜 꽃.
♣ 화예부인[花蕊夫人]오대(五代) 후촉주(後蜀主)인 맹창(孟昶)의 부인인데, 문장에 능하여 궁사(宮詞) 1백 수(首)를 지었다. 후촉이 망한 후에도 항상 후촉을 잊지 않고 맹창의 초상에 제사하였다.
♣ 화옥[華屋]화옥은 화려한 집으로 영화로운 삶을 뜻함.
♣ 화옥산구[華屋山丘]흥망성쇠와 인생의 무상함을 뜻하는 말이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조식(曹植)의 공후인(箜葔引)의 “살아서 화려한 집 거처하더니, 쓸쓸히 산 언덕으로 돌아갔구나.[生在華屋處 零落歸山丘]”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 화옹[禾翁]호가 화곡(禾谷)인 정사호(鄭賜湖)를 말함.
♣ 화완포[火浣布]남방에서 난다고 하는 베 이름으로, 세탁할 때 불 속에다 넣으면 베는 빨갛게 되고 때는 베 빛으로 되는데, 끄집어내어 털면 하얗게 된다고 한다.
♣ 화왕[花王]모란을 가리킨다.
♣ 화왕풍간서[花王諷諫書]화왕이 풍간한 글. 설총이 장미꽃과 할미꽃의 이야기로 임금에게 풍간한 화왕계(花王戒)를 가리킴.
♣ 화요[花妖]유사(遺事)에 “처음에 목작약(木芍藥)이 있어 어느 날 갑자기 한 가지에 두 송이가 피었는데, 아침에는 짙붉고 한낮에는 짙푸르고 해질 무렵에는 노랗고 밤중에는 희어, 낮과 밤으로 그 향기롭고 고움도 각기 달랐다. 임금이 ‘이는 꽃나무의 요정(妖精)이니 의아해할 바가 아니다.’ 했다.” 하였다.
♣ 화요입벽도[花妖入壁逃]화요는 화월(花月)의 요귀(妖鬼)인데, 기생 따위들이 가까이하지 못하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육훈(陸勳) 집이지(集異志)에 “무삼사(武三思)가 첩을 두었는데 얼굴이 절색이어서 사대부들이 모두 그를 방문하여 구경하였다. 어느 날 양공(梁公) 적인걸(狄仁傑)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그의 첩이 도망가버려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삼사가 사방으로 수색해 보니, 벽틈에 숨어서 ‘나는 화월의 요귀인데, 하늘이 나를 보내어 당신을 모시고 이야기도 하고 웃으면서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양공은 일세의 정대(正大)한 사람이므로, 내가 볼 수 없습니다.’ 했다.” 하였다.
♣ 화용[華容]미인(美人)
♣ 화용월태[花容月態]꽃같은 얼굴과 달같은 자태. 아름다운 여자의 고운 얼굴과 자태를 이르는 말.
♣ 화우[火牛]등에다가 용 무늬를 그려 넣고, 양쪽 뿔에다가 병기를 매달고, 꼬리에 기름 먹인 섶을 매단 다음, 여기에 불을 붙여서 적진으로 돌진하게 하는 소를 말한다. 전국 시대 때 연(燕) 나라가 제(齊) 나라를 쳐들어와 제 나라의 모든 성이 함락되고 즉묵성(卽墨城)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그때 전단(田單)이 즉묵성에 있으면서 이 화우를 이용해 한밤중에 연 나라 군사를 쳐 승리를 거둔 뒤, 그 승세를 타고 삽시간에 제 나라의 72성을 수복하여 거의 망해 가던 제 나라를 재건하였다. 그리고는 당시 거(莒) 땅으로 피해 있던 양왕(襄王)을 맞이하여 임치(臨淄)로 들어갔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 화우[花雨]부처가 설법을 할 때 제천에서 꽃비가 쏟아져 내렸다는 불경의 기록을 인용하여, 불문(佛門)의 신령스러운 자취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쓰이게 되었다.
♣ 화우지계[火牛之計]쇠뿔에 칼을 잡아매고 꼬리에 기름 바른 갈대 다발을 매단 다음 그 소떼를 적진으로 내모는 전술.
♣ 화운[火雲]여름에 더운 기운을 머금은 붉은 구름.
♣ 화웅[畫熊]수레의 식(軾)을 곰의 형상으로 꾸민 화려한 수레를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여복지 상(輿服志上)에 “삼공(三公)과 열후(列侯)는 녹교(鹿較)ㆍ웅식(熊軾)에 검은 깃발을 단 수레를 탑승한다.”고 하였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中丞問俗畫熊頻 愛弟傳書綵鷁新”이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8 奉送蜀州柏二別駕 將中丞命 赴江陵 起居衛尙書太夫人 因示從弟行軍司馬位》
♣ 화웅권학[和熊勸學]어머니가 자식 교육에 정성을 들인 것을 비유한 말. 당(唐) 나라 때 유중영(柳仲郢)의 모친 한씨(韓氏)가 곰의 쓸개를 수종(數種)의 약재와 섞어 환(丸)을 지어서 공부하는 여러 자식들에게 주었던 데서 온 말이다.
♣ 화원[花園]고려 최영(崔瑩)이 송도(松都)의 화원(花園)에서 이성계(李成桂)에게 잡혔다.
♣ 화원[華元]춘추 시대 송(宋) 나라 우사(右師)로서, 어느날 염소를 잡아서 그 부하 군사를 먹이는데, 그 어자(御者) 양짐(羊斟)이 참여하지 못하였다. 급기야 싸우는데 양짐이 말하기를, “지난날 염소는 그대 마음대로 했으니, 오늘날 일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 하였음. 《左傳 宣公 二年》
♣ 화원귀[華元歸]화원(華元)은 춘추 시대 송(宋) 나라 장군으로, 침입해 온 정(鄭) 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던 중에, 앙심을 품은 마부가 수레를 몰고 적진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포로로 잡혔다가 다시 도망쳐 돌아온 고사가 있다. 《史記 卷38 宋微子世家》
♣ 화월[花月]아름다운 기첩(妓妾)을 비유함. 당(唐) 나라 때 무삼사(武三思)에게 소아(素娥)라는 기첩이 있어 천하의 절색(絶色)이었으므로, 당시 사대부들이 모두 가서 구경을 하는지라, 적인걸(狄仁傑) 역시 따라가 보았더니, 그녀가 나오지 않고 벽 틈에 숨어서 말하기를 “나는 화월(花月)의 요괴(妖怪)로 상제(上帝)의 명을 받고 공(公; 무삼사를 가리킴)의 마음을 방탕하게 만들려고 내려왔는데, 적공(狄公)은 한 시대의 정인(正人)이므로 내가 만나볼 수 없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화유[火維]남방(南方)을 말한다. 남방은 화(火)에 속한다.
♣ 화유[火維]남방화(南方火)에 해당한다 하여 형산(衡山)을 달리 이른 말인데, 한유(韓愈)의 알형악묘시(謁衡嶽廟詩)에 “화유의 땅은 거칠어서 요괴가 많기에 하늘이 귀신의 힘 빌어 웅을 지키게 하였네[火維地荒足妖怪 天假神柄司其雄]”하였다.
♣ 화음[華陰]후한(後漢) 장해(張楷)가 화음산(華陰山)에 숨어살며 도술(道術)을 부려 사방 5리(里)에 안개를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後漢書 卷36 張楷傳》
♣ 화의[化衣]이교(李嶠)의 상전원시(想田園詩)에 “벼슬 따라 이곳저곳 괴롭기만 하구나, 풍진 속에 옷 바꿔 입은 지가 오래로군.[游宦勞牽網 風塵久化衣]" 한 시가 있다.
♣ 화이부동[和而不同]군자는 사람들과 친화하되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는다. 곧 대인관계에 있어 중용의 덕을 지켜, 다른 사람과의 친화를 도모하되 편당(偏黨)을 짓지 않는 태도.
♣ 화익[畫鷁]화익는 배 앞에 그려 붙인 수조(水鳥)의 상(像). 익은 잘 나는 물새인데 수신(水神)을 제압한다고 한다.
♣ 화익선[畫鷁船]익(鷁)이라는 물새의 형상을 선수(船首)에 새긴 배. 이 새는 풍파를 잘 견디어 내므로 이 새를 장식한다고 한다. 《淮南 本經訓》
♣ 화일[化日]만물(萬物)을 화생(化生)시킨다는 뜻에서 늦은 봄의 일기를 이른 말이다.
♣ 화일[畫一]한(漢)나라 초대(初代) 승상(丞相) 소하(蕭何)가 죽은 뒤에, 후임으로 조참(曹參)이 들어 와서 소하가 제정한 법을 그대로 준수하니, 백성들이 좋아하여 노래하기를, “소하가 법을 제정한 것을 획일(畫一)한 것 같은데, 조참은 그것을 잘 지키네.” 하였다.
♣ 화자[華子]화자는 화양 은거(華陽隱居)ㆍ화양 진인(華陽眞人)이라 자호한 양(梁) 나라 때의 은사 도홍경(陶弘景)을 이르는데, 그가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할 적에 양 무제(梁武帝)가 나라에 대사(大事)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산중의 재상이라고 일컬었다. 《梁書 卷五十一》
♣ 화자발[和子鉢]중국 오대시대에 화웅(和凝)이라는 사람이 주시관으로 있을 때에 범질(范質)이라는 사람의 성적이 매우 좋아서 당연히 장원으로 뽑힐 사람인데도, 전에 자기가 13번으로 합격하였지만 지금 세상에 이름이 높은 것을 생각하고 이 범질도 13번으로 합격시키고 나의 의발(衣鉢)을 이 사람에게 전한다고 말하였다는 고사.
♣ 화잠[華簪]현달(顯達)한 고관이 쓰는 화려한 머리 장식이다.
♣ 화재어호한[禍在魚狐閒]진(秦)나라의 수졸(戍卒)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킬 때에 군사의 마음을 선동하기 위한 술책으로 비단에다, “진승이 왕이 된다.”고 글을 써서 물고기 뱃속에 넣어 사람을 시켜서 그 물고기를 팔게 하였고, 또 밤에 오광이 숲속의 신사(神祠)에 몰래 들어가서 여우의 소리로, “진승이 왕이 된다.”고 울었다.
♣ 화저[花猪]돼지를 말함. 소식(蘇軾)의 시에 “五日一見花猪肉 十日一遇黃鷄粥"이라고 한 구가 있음.
♣ 화전[花甎]꽃무늬를 놓아 만든 벽돌. 한림원(翰林院)에 화전을 깔았으므로 한림원을 말한다. 당(唐) 나라 한림원이 있는 북청(北廳) 앞의 섬돌을 꽃벽돌로 장식하였는데, 겨울에는 해 그림자가 꽃벽돌의 다섯 번째 계단에 이르렀을 때 한림학사들이 입직(入直)했다 한다. 한림지(翰林志)에 “북청(北廳) 앞뜰에 화전(花甎)을 깐 길이 있다" 하였다.
♣ 화전[花甎]당(唐) 나라 때 대궐 북청(北廳) 앞에 꽃무늬의 벽돌길이 있었는데, 겨울철이면 해그림자가 다섯 벽돌에 이를 때가 바로 입직(入直)하는 시각이었으나, 한림학사(翰林學士) 이정(李程)은 천성이 게을러 항상 늦게 와서 해그림자가 여덟 벽돌을 지나서야 도착함으로써 당시에 모두 그를 팔전학사(八甎學士)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131 李程列傳》
♣ 화전원부진[火傳不盡]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활활 타는 장작불, 화력(火力)이 다해 가도, 그 불씨 남아 있어 꺼질 줄을 모른다.[指窮於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라고 하였다.
♣ 화전유염[華牋濡染]화전은 종이를 가리킨다. 곧 종이에다 내 글을 쓰겠다는 말이다.
♣ 화접시[化蝶翅]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다. 마음에 흐뭇하여 주(周)인 줄을 몰랐더니, 문득 깨고나니 장주였다. 《莊子》
♣ 화접유룡[化蝶猶龍]장자(莊子)와 노자(老子), 화접은 장자가 “꿈에 나비[蝴蝶]가 되었다.” 한 말을 인용한 것이며, 유룡은 공자가 노자를 “용과 같다.[猶龍]" 한 것을 인용하여 한 말이다.
♣ 화정[和靖]어려서 고아가 되어 빈한한 생활을 하며 학문에 힘을 쏟으면서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채 서호(西湖)에서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살았던 송(宋) 나라 임포(林逋)의 시호(諡號)이다. 그는 항주(抗州)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살면서 20년 동안 속세를 나가지 않았고, 매화를 심고 학(鶴)을 기르면서 일생을 마쳤다.
♣ 화정림[和靖林]화정은 송(宋) 나라 임포(林逋)의 시호(諡號)로,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해 살았다. 서화를 잘 그리고 시를 잘 지었으며, 장가도 들지 않고 자식도 없이 매화나무를 심고 학을 기르면서 지냈으므로 세상에서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하였다. 《宋史 卷457 隱逸列傳 林逋》
♣ 화정사녹[和靖辭祿]화정은 송(宋) 나라 윤돈(尹焞)의 호이다. 윤돈은 정이(程頤)의 문인(門人)으로, 여러 차례 천거를 받았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宋史 卷428 道學列傳 尹焞》
♣ 화정재월선[華亭載月船]진(晉) 나라 육기(陸機)는 화정에 살면서 학(鶴) 우는 소리를 듣곤 하였는데, 뒤에 참소를 입어 죽게 되자 “화정의 학 우는 소리를 어찌 다시 들을 수 있으랴.” 하였다. 《晉書 卷五十四 陸機傳》
♣ 화정지학[華亭之鶴]부귀영화로 인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경우로서, 진(晉) 나라 육기(陸機)가 일개 나그네로 성도왕 영(成都王穎)에 의해 갑자기 후장군 하북대도독(後將軍河北大都督)에 오름으로써 시기하는 자들의 참소를 입고 수감되었는데, 그가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탄식하기를 “내가 옛날에 듣던 화정의 학 울음소리를 어찌 다시 들을 수 있으랴.”고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陸機傳》
♣ 화정택[和靖宅]화정(和靖)은 송(宋) 나라의 은군자(隱君子) 임포(林逋)의 시호이다. 임포가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처자(妻子)도 없이 매화와 학만을 좋아하였으므로 당시에 사람들이 “梅妻鶴子”라고 하였다 한다. 《世說新語補 棲逸》
♣ 화정학[華亭鶴]화정은 상해(上海)의 옛 이름이다. 진(晉) 나라 때에 육기(陸機)라는 사람이 서울에 와서 버슬하다가 생명을 잃게 되었는데 죽을 때에, “아, 고향 화정의 학 우는 소리를 어찌 다시 들을 수 있겠는가.” 하고 탄식하였다 한다.
♣ 화정학려[華亭鶴唳]화정(華亭)의 학소리는 장한과 동시의 사람인 육기(陸機)가 오(吳)나라에서 왔다가 잡혀 죽으며, “화정의 학(鶴) 우는 소리를 언제나 다시 들으랴.” 하였다.
♣ 화제[花蹄]꽃모양 같은 마소의 발굽.
♣ 화제[火齊]불을 알맞게 땜.
♣ 화제[火帝]오방(五方) 천제(天帝)의 하나인 염제(炎帝)로 여름을 맡은 신(神)인 적제(赤帝)를 가리킨다. 남방과 여름과 불을 담당한다고 한다. 불은 방위로는 남쪽이고 사시(四時)로는 여름이며 색깔은 적색이다.
♣ 화제[火齊]화제주(火齊珠)의 준말로 보주(寶珠)의 일종이다. 자주색이 찬란한 옥으로 가볍기가 운모(雲母)와 비슷하다고 한다.
♣ 화조[花朝]음력 2월 12일이 모든 꽃의 생일(生日)이라 하여 그 날을 화조(花朝)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는 15일을 화조라고 한다고 함. 《提要錄》
♣ 화조[火棗]화조는 안기생(安期生)이 먹던 오이 크기의 대추를 말하는데, 그 과일을 먹으면 우화(羽化)하여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한다. 《史記 封禪書. 漢武內傳》
♣ 화조절[花朝節]음력 이월 십오일은 백화(百花)의 생일이라 하여 화조절이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몽량록(夢梁錄)의 이월망(二月望)에 보인다. 어떤 책은 이월 십이일, 혹은 이월 이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화종구생[禍從口生]재앙은 입에서 나온다.
♣ 화주[火珠]상투를 짠 뒤에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물건. 산호(珊瑚) 따위로 만드는 동곳을 이름.
♣ 화주[和州]영흥(永興)의 고려 초 이래의 이름. 현종(顯宗) 9년 화주 방어사(防禦使) 본영을 두었고, 고종(高宗) 때 이곳을 지키던 장수가 반란하여 원(元) 나라에 붙었는데, 공민왕(恭愍王) 5년에 군사를 보내어 수복하였다.
♣ 화주선학거[華柱仙鶴去]요동(遼東)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도(道)를 배워서 학이 되었다. 나중에 요동에 돌아와 성문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으니, 어떤 소년이 활을 들어 쏘려 하기에, 날아가면서 말하기를, “새야 새야 정령위야,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인제야 돌아왔구나. 성곽은 옛날 같다만 사람은 다르구나. 어째서 신선을 안 배우고 무덤들만 총총한고.” 했다 한다.
♣ 화중인[畫中人]운대(雲臺)나 기린각(麒麟閣)과 같은 공신각(功臣閣)에 화상(畫像)으로 그려져 안치되리라는 것이다.
♣ 화중지병[畵中之餠]그림 속의 떡. 탐이 나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사물. 곧, 그저 바라만 보았지 소용이 없음. 또는 실속 없는 일을 비유
♣ 화지고침[畫紙敲針]두보의 시에, “늙은 아내는 종이를 그어 바둑판을 만들고 어린 자식은 바늘을 두드려 낚시를 만든다.”는 구절이 있다.
♣ 화창[華倉]화창은 옛날의 명의(名醫)인 창공(倉公)과 화타(華陀)를 합칭한 말이다.
♣ 화처[花妻]천인(賤人)이 본처 이외에 딴 여자를 얻은 것을 이르는 말. 첩이라고 감히 부를 수 없어서 붙여진 이름.
♣ 화청궁[華淸宮]당(唐)의 궁전 이름. 여산(驪山)의 온천(溫泉) 지대에 있는 궁전으로 처음에는 탕천궁(湯泉宮)이라 하였다가 현종(玄宗) 때에 와서 화청궁(華淸宮)으로 이름을 고치고 온천은 화청지라 하고, 그 곳에 행행하여 잔치를 베풀고 양귀비와 즐겼음. 《唐書 玄宗紀》
♣ 화청지[華淸池]화청지는 섬서성(陝西省)에 있던 당(唐) 나라 화청궁(華淸宮)의 온천 욕지(浴池)인데, 양 귀비(楊貴妃)가 여기에서 목욕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 나온다. 안사(安史)의 난에 당 현종(唐玄宗)이 촉(蜀) 땅으로 피난갈 때, 군사들의 원성(怨聲)에 어쩔 수 없이 양귀비를 마외(馬嵬)에서 죽게 하고는 거기에 묻어 주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76 楊貴妃傳》
♣ 화초[華貂]궁중의 담비가죽.
♣ 화초주맹[花草主盟]모란을 화중왕(花中王)이라 한다.
♣ 화촉[華燭]결혼을 상징하는 붉은 색 양초를 일컫는 고사성어.
♣ 화총[花驄]푸른 털과 흰 털이 뒤섞인 얼룩말로, 곧 썰매를 가리키는데, 당 현종(唐玄宗)이 타고 다닌 준마 이름이 바로 옥화총(玉花驄)이었다고 한다.
♣ 화축[華祝]화축은 화봉삼축(華封三祝)의 준말로, 당요(唐堯) 때 화(華) 땅에 봉해진 사람이 요임금에게 장수하고[壽] 부유하고[富] 아들을 많이 낳기[多男子]를 축원하였다는 데서 임금에게 다복하기를 축원한다는 용어로 쓰인다. 《莊子 天地》
♣ 화태수신재초방[禍胎須信在椒房]옛날 한 나라 때에 황후 있는 궁중의 내전(內殿)을 호초(胡椒)로 방 바람벽을 발랐으므로 황후 있는 내전을 초방이라 한다. 여기서는 안녹산이 문제가 아니라 궁중 안에 있는 양귀비가 문제라는 말이다.
♣ 화택[火宅]불교 용어로, 번뇌(煩腦)가 많은 속세를 이르는 말이다. 법화경(法華經) 비유품(譬喩品)에 “편안치 못한 이 삼계, 불타는 집과 같도다.[三界無安 猶如火宅]" 하였다.
♣ 화택[火澤]주역 64 괘 중의 하나인데, 상리하태(上離下兌) 즉 상괘(上卦)와 하괘(下卦)가 위로 치솟는 불과 아래로 스며드는 늪으로 되어 있어 서로 어긋나는 상황을 상징함.
♣ 화택천대[火宅泉臺]이승과 저승이라는 말이다. 화택(火宅)은 삼계화택(三界火宅)의 준말로 고통이 가득한 이 세상을 뜻한다.《法華經 譬喩品》 천대(泉臺)는 땅속의 묘혈(墓穴)을 가리킨다.
♣ 화토필[花吐筆]송(宋) 나라 강엄(江淹)이 일찍이 뛰어난 문장으로 유명하였으나, 꿈속에서 곽박(郭璞)에게 오색붓을 돌려준 뒤로는 재주가 상실되었다 한다.
♣ 화판[花判]당 나라 때 중서사인(中書舍人)들의 오화판사(五花判事)를 말한다.
♣ 화포[和炮]’포화(飽和)’와 같은 뜻임. 당 나라 양숙(梁肅)의 하소이상손사군인군시(賀蘇二常孫使君隣郡詩)에 “民樂其敎 且飽其和"가 있음.’炮’는 ‘飽’와 통용함.
♣ 화표[華表]옛날 교량이나 궁전, 능묘(陵墓) 등에 세운 거대한 돌기둥이다. 요동(遼東)사람 정령위(丁令威)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술을 배우고, 죽어 학이 되어 고향인 요동으로 날아와서 성문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搜神後記》
♣ 화표주[華表柱]무덤 앞에 있는 망주석으로, 요동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학이 되어 날아와서 앉았던 곳이다. 한 나라 때 요동 사람 정령위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 그 뒤에 학이 되어 요동에 돌아와 화표주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오늘에야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들이 아니로세. 어찌 신선 아니 배워 무덤이 총총하뇨.” 하였다. 《搜神後記》
♣ 화표중래학[華表重來鶴]정령위(丁令威)는 원래 요동 사람이었는데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다가 뒤에 학으로 변하여 자기 고국 요동으로 날아가서 그곳 성문 화표주(華表柱) 위에 앉았었다. 《搜神後記》
♣ 화표지주[華表之柱]요동(遼東)의 정령위(丁令威)가 신선이 되어 갔다가 뒤에 학으로 변하여 고향에 돌아와서 화표(華表)의 기둥에 앉았다.
♣ 화표천년학[華表千年鶴]정령위(丁令威)의 고사를 말한다. 무덤 앞에 있는 망주석으로, 요동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학이 되어 날아와서 앉았던 곳이다. 한나라 때 요동 사람 정령위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 그 뒤에 학이 되어 요동에 돌아와 화표주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오늘에야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들이 아니로세. 어찌 신선 아니 배워 무덤이 총총하뇨.” 하였다. 《搜神後記》
♣ 화표학[華表鶴]화표의 학(鶴)이란 곧 한(漢) 나라 때 요동(遼東)의 정령위(丁令威)란 사람이 영허산(靈虛山)에서 선술(仙術)을 배워 학으로 변하여 자기 고향에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앉았었다는 이야기가 도잠(陶潛)의 수신후기(搜神後記) 권1에 전한다.
♣ 화하도[花下倒]대단히 취한 것을 이름.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에 “석양은 현산의 서쪽으로 지려 하는데 흰 두건 거꾸로 쓰고 꽃 아래서 방황하네[落日欲沒峴山西 倒著接▣花下迷]” 한 데서 온 말이다. 《李太白集 卷六》
♣ 화학[化鶴]화학은 학으로 변한 사람. 한(漢) 나라 때 요동에 사는 정령위(丁令威)가 도술을 배워 신선이 되었는데 천년이 지난 뒤에 학으로 변하여 그의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搜神後記 卷一》
♣ 화헌[華軒]높은 벼슬아치가 타는 수레를 말한다. 초헌(招軒).
♣ 화현[花縣]현(縣)의 소재지를 아름답게 일컫는 말이다. 진(晉) 나라 하양 영(河陽令) 반악(潘岳)이 고을 안에 온통 도리(桃李)를 심었으므로 ‘하양일현화(河陽一縣花)’라는 말이 생겨났던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白氏六帖 卷21》
♣ 화협훈[華協勛]순(舜)임금의 일명은 중화(重華). 요(堯)임금의 일명은 방훈(放勛)이다.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중화가 제에게 협화하였다[重華協予帝].” 하였다.
♣ 화형[花形]화형은 풍수설에서 산수(山水)의 발맥(發脈).
♣ 화호각곡[畫虎刻鵠]흉내를 내다가 제대로 안 됨. 후한(後漢) 마원(馬援)이 자기 조카 엄(嚴)과 돈(敦)에게, 용백고(龍伯高)를 배우다가 제대로 안 되더라도 이는 고니를 새기다가 제대로 안 되면 그래도 집오리 정도는 될 수 있는 격이어서 괜찮지만, 두계량(杜季良)을 배우려다 제대로 안 되는 날이면 이는 범을 그리려다가 되레 개를 그리는 꼴이 되어 안 된다고 하였음. 《後漢書 馬援傳》
♣ 화호로[畫葫蘆]모방해 본뜬다는 말. 송(宋) 나라 도곡(陶穀)의 문한(文翰)이 당대의 으뜸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철거하니 태조가 웃어 이르되, “듣건대 한림의 제서(制書) 초학이 다 전의 사람들의 옛 초본을 검사하여 사구(詞句)만 바꾼 것이라 하니, 이는 소위 본[樣]대로 호로박을 그린 것이다.” 하니 도곡이 시를 짓되, “우스워라, 한림 도학사는 해마다 본[樣]대로 호로박만 그리누나.” 하였다.
♣ 화호불성반위구자[畵虎不成反爲狗子]범을 그리다가 잘못하여 강아지가 됐다는 말.
♣ 화호불성호[畫虎不成虎]학문과 기예의 성취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마원(馬援)이 조카인 엄돈(嚴敦)을 훈계하면서, “고니를 그리다 보면 오리와 비슷하게라도 되겠지만, 호랑이를 잘못 그리면 거꾸로 개처럼 되기 십상이다.[刻鵠不成尙類鶩 畫虎不成反類狗]”라고 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馬援傳》
♣ 화호유구[畵虎類狗]서툰 솜씨로 어려운 일을 하려다 도리어 잘못되는 것, 결과가 목적과 어긋난다는 뜻의 고사성어.
♣ 화홍옥백[花紅玉白]두목(杜牧)의 송이군옥시(送李群玉詩)에 “玉白花紅三百首 五陵誰唱與春風"의 글귀가 있음.
♣ 화후[火候]도가(道家)에서 단약(丹藥)을 소련(燒煉)할 적에 불의 열도(熱度)를 조절하는 것을 이르는데, 전하여 단약 고는 것을 가리킨다. 참동계의 주에, “옛날부터 단서(丹書)가 있어 화후(火侯)의 공용(功用)을 나타냈는데, 이것을 화기(火記)라 이른다.” 하였음.
♣ 화훈[華勛]요순(堯舜)처럼 훌륭한 임금. 요(堯)는 공[勛]이 크다 하여 방훈(放勛), 순(舜)은 요의 뒤를 이어 거듭 밝았다 하여 중화(重華)라 한 데서 온 말.
♣ 화희[和熹]한나라 장제(章帝)의 황후인 등씨(鄧氏)이니, 그는 그 아들인 화제(和帝)가 일찍 죽고 그 아들이 어린데 섭정이 되어 잘 운영해 갔었다.
♣ 확[臛]고깃국인데 나물이 들어간 것을 羹이라 하고 나물이 들어가지 않은 것을 臛이라 한
♣ 확금자불견인[攫金者不見人]돈을 움켜쥔 자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 명예나 이욕에 미혹된 사람은 도리를 저버리거나 눈앞의 위험도 돌보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 확삭옹[矍鑠翁]늙은 나이에도 젊은이처럼 원기가 왕성하여 용맹스러운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확삭은 용맹스런 모양. 후한(後漢) 때의 복파장군(伏波將軍)이었던 마원(馬援)은 나이가 많았는데도 당시 무릉(武陵)의 만족(蠻族)들이 강성하여 토벌할 만한 자가 없자, 자신이 출정(出征)할 것을 자원하였다. 광무제(光武帝)는 나이 많은 것을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자,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무용을 과시하는데 매우 늠름하였다. 광무제가 보고는 감탄하며 “확삭하도다. 이 노인이여[矍鑠哉是翁也]" 하고는 마침내 마원을 보내어 평정하였다. 《後漢書 馬援傳》
♣ 확상[矍相]확상은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의 성 안 궐리(闕里)의 서쪽에 있는 지명으로, 공자가 이곳에서 활쏘기를 하였다고 한다.
♣ 확상사[矍相射]확상은 지명인데, 공자(孔子)가 일찍이 문인들과 함께 확상의 채마밭에서 대사례(大射禮)를 행했던 데서 온 말이다. 《禮射義》
♣ 확상의[矍相儀]확상은 중국 산동성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지명. 확상포(矍相圃)라 함. 공자가 이 곳에서 활쏘기를 하였음. 《禮記 射義》
♣ 확상포[矍相圃]공자가 제자들과 활쏘기를 익혔다는 곳으로 산동(山東) 곡부현(曲阜縣) 궐리(闕里) 서쪽에 있는 지명이다. 《禮記 射義》
♣ 확호불발[確乎不拔]매우 든든하여 흔들리지 아니함.
♣ 확확[廓廓]공허한 모양
♣ 환[環]빙 둘려 끊어지지 않은 고리.
♣ 환각주인지[喚却主人知]주희(朱熹)가 이르기를, “서암(瑞巖)의 중[僧]은 매일 항상 스스로 자신에게 묻기를 ‘주인옹(主人翁)은 성성(惺惺)하는가?’ 하고, 또 스스로 답하기를, ‘성성하노라.’고 하였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心經 卷一》
♣ 환갑[還甲]61세. 태어난 해의 갑(甲)이 다시 돌아옴(還). 회갑(回甲), 화갑(華甲)
♣ 환결[環玦]옛적에 신하가 죄를 얻어 쫓겨나면 국경에서 임금의 명령을 기다린다. 임금이 환(環)을 주면 돌아오라[還]는 것이요, 틈이 벌어진 결(玦)을 주면 영영 오지 말라[訣]는 것이다.
♣ 환골[換骨]탈태환골(奪胎換骨)의 준말. 뼈대를 바꿔 끼고 태(胎)를 바꿔 쓴다는 뜻으로, 옛사람이 지은 시문(詩文)의 취지를 취하여 어구(語句)나 결구(結構)만을 바꾸는 것.
♣ 환골법[換骨法]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신선술(神仙術)의 하나로서, 금단(金丹)을 삼켜 범골(凡骨)을 선골(仙骨)로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 환골탈태[換骨奪胎]뼈대를 바꾸고 태를 탈바꿈함. 얼굴이나 용모가 변하여 전보다 더 아름답게 됨. 옛 사람이 지은 시문의 뜻과 어구를 자기 것으로 소화한 뒤, 그것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시문을 지음. 남의 문장을 본떴으나 그 형식을 바꿈.
♣ 환과고독[鰥寡孤獨]홀아비⋅과부⋅고아⋅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사람.
♣ 환궁[還宮]환궁(還宮)은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오성과 육률과 십이율관은 돌아가면서 서로 궁이 된다.[五聲六律十二管還相爲宮]"고 한데서 온 말이다.
♣ 환궤[闤闠]환은 시원(市垣)이고 궤는 시(市) 밖의 문이다. 좌사(左思) 위도부(魏都賦)에 “設闤闠以襟帶"라 하였음.
♣ 환규[桓圭]환규는 육서(六瑞)의 하나로 공작(公爵)이 갖는 9촌(寸)의 홀(笏)을 말한다.
♣ 환기조[喚起鳥]지빠귀 과(科)에 속하는 새로, 밤 오경(五更)부터 날이 샐 때까지 운다고 한다.
♣ 환난상구[患難相救]근심과 재앙을 서로 구하여 줌.
♣ 환노훈[換爐熏]오래도록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눔을 뜻한다.
♣ 환도적신장[宦途積薪場]벼슬길. 장작을 쌓는 데 있어 나중에 쌓는 것을 위에 올려놓듯이 나중에 벼슬한 자가 선배보다 중용되고 선배는 항상 미관 말직에 있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한(漢)나라 급암(汲黯)이 무제(武帝)에게 말하기를, “폐하의 사람 쓰는 것은 섶 쌓는 것과 같아서 뒤에 온 놈이 위에 있습니다.” 하였다.
♣ 환동약[還童藥]나이는 늙었어도 얼굴이 동자(童子)같이 된다는 약을 말한다.
♣ 환득환실[患得患失]물건을 얻기 전에는 그것을 얻으려고 걱정하고, 얻은 후에는 잃지 않으려고 걱정한다.
♣ 환로적신[宦路積薪]나무를 쌓는 데 있어 나중에 쌓는 것을 위에 올려놓듯이, 나중에 벼슬한 자가 먼저 벼슬한 사람보다 중용되어 먼저 벼슬한 사람은 항상 미관 말직에 있음을 한탄한 것인데, 한(漢) 나라 때 급암(汲黯)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폐하께서 뭇 신하들을 쓰는 것은 마치 나무를 쌓는 것과 같아서 나중에 벼슬한 자가 윗자리에 있게 됩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汲黯傳》
♣ 환륜[奐輪]진(晉) 나라 문자(文子)의 집이 완공되었을 때, 대부인 장로(張老)가 그 으리으리한 규모를 보고는 “아름답다 높고 크며, 멋있다 없는 게 없네.[美哉輪焉 美哉奐焉]”라고 노래하였다. 《禮記 檀弓下》
♣ 환목어[還目魚]동해 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이른바 ‘도루묵’. 한문으로는 목어(木魚) 혹은 환맥어(還麥魚)라고 한다.
♣ 환문[桓文]춘추 시대에 패제후(霸諸侯)였던 제(齊) 나라 환공(桓公)과 진(晉) 나라 문공(文公)을 말한다.
♣ 환방[圜方]둥글고 모난 것.
♣ 환백[歡伯]환백은 기쁨을 가져다 주는 어른이라는 뜻으로, 술의 별칭이다. 역림(易林) 감지태(坎之兌)에 “걱정을 없애 주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술을 환백이라고 한다.[酒爲歡伯 除憂來樂]”하였다.
♣ 환부작신[換腐作新]낡은 것을 바꾸어 새 것으로 만듦.
♣ 환비[桓碑]나무를 깎아 석비(石碑)처럼 만들어 묘혈(墓穴)의 네 구석에 세워서 하관(下棺)을 하도록 만든 장치를 말한다.
♣ 환서위박[喚鼠爲璞]옛날 정(鄭) 나라 사람이 마른 쥐[乾鼠]를 박옥[璞]이라면서 주(周) 나라 사람에게 팔려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환선[紈扇]한 성제(漢成帝)의 후궁 반첩여(班婕妤)가 총애를 받다가 뒤에 조비연(趙飛燕)에게 밀려나서 원행가(怨行歌)를 짓기를 “새로 재단한 제(齊) 나라 비단이, 희고 깨끗하기 눈과 같구나. 재봉하여 합환선을 만드니, 둥글기가 보름달 같네. ……부채를 상자 속에 버려두고, 은혜가 중도에 끊어질까 걱정일세.” 한 데서 온 말이다.
♣ 환선원[紈扇怨]부채가 여름에는 쓰이다가 가을이 오면 버려지는 것인데, 이것을 젊은 시절에 남자의 사랑을 받다가 나이들면 버림받는 여자에게 비유한 것이다.
♣ 환속[還俗]승려가 되었다가 다시 본가(本家)로 돌아오는 것을 말함. 송서(宋書)에, “사문(沙門) 혜휴(惠休)가 문장을 잘하므로, 세조(世祖)는 명하여 그로 하여금 환속하게 했다. 본래 성(姓)은 탕(湯)이었다.” 하였음.
♣ 환속절교인[還屬絶交人]혜강이 산도(山濤)에게 아들 혜소(嵇紹)의 일을 부탁한 것을 말한다. 혜강이 일찍이 산거원(山巨源)에게 여산거원절교서(與山巨源絶交書)를 보냈었는데, 형장(刑場)에서 아들 혜소에게 말하기를 “거원이 있으니, 네가 고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巨源在 汝不孤矣]”라고 하였다. 산도는 그 뒤에 과연 혜소를 천거하여 비서승(祕書丞)으로 삼았다. 《晉書 嵇康傳ㆍ蒙求 中 嵇紹不孤》
♣ 환신[幻身]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영상과 같은 것이 사람의 몸이라는 불교의 용어(用語).
♣ 환심수초부[還尋遂初賦]원래 뜻했던 은거 생활로 되돌아간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손작(孫綽)이 천태산(天台山) 자락인 적성산(赤城山)에 푯말을 세우고 은거 생활을 즐기면서 ‘수초부(遂初賦)’를 지었는데, 뒤에 벼슬하다가 환온(桓溫)의 뜻을 거슬려 반대 상소를 올리자, 환온이 불쾌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수초부대로 살려 하지 않고 남의 국가에 대한 일을 간섭하는가.[何不尋君遂初賦 知人家國事邪]”라고 했던 고사가 전해 온다. 《晉書 孫綽傳》 참고로 손작의 ‘천태산부(天台山賦)’에 “赤城霞起而建標”라는 시구가 있다.
♣ 환아경[換鵝經]진(晉) 나라 때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거위를 매우 좋아하여, 도사(道士)의 집에 거위가 있음을 보고는 그것을 갖고 싶어하자, 그 도사가 “도덕경(道德經)을 써 주면 거위를 주겠노라.”고 하니, 왕희지가 마침내 도덕경을 써 주고 그 거위를 가져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환아서[換鵞書]진(晉) 나라의 왕희지(王羲之)가 평소 거위를 사랑하였는데, 하루는 산음 도사(山陰道士)에게 거위가 많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서 글씨를 써 주고 거위를 둥우리 째 가져왔다는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 환어[鰥魚]물고기의 이름인데, 이 물고기는 근심이 많아서 밤잠을 못 잔다고 한다.
♣ 환영[桓榮]후한 패군(沛郡) 용항(龍亢) 사람으로 자는 춘경(春卿)이다. 상서(尙書)에 조예가 깊어 수백 명의 문생을 가르쳤으며, 광무제(光武帝) 때 태자소부(太子少傅)와 태상(太常)을 지내고 명제(明帝) 때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 환영실유손[桓榮實有孫]후한 때 환언(桓焉)이 조부 영(榮)과 아버지 욱(郁)의 학행(學行)을 잘 계승했음을 말한다.
♣ 환위[環衛]대궐을 지키는 군사. 금위(禁衛)와 같다.
♣ 환유북산래[歡侑北山萊]주인과 손님이 흥겹게 음식을 서로 권한다는 것. 시경(詩經) 小雅 南山有臺에 “남산에는 삿갓풀 북산에는 명아주풀[南山有臺 北山有萊]"에서 나온 것임.
♣ 환이[桓伊]진(晉) 나라 사람. 음악을 잘하고 악기를 잘 다루었는데, 왕휘지(王徽之)가 청계(淸溪) 곁에다 배를 대놓고 있을 때 그 언덕 위를 환이(桓伊)가 지나가고 있었다. 왕휘지가 사람을 시켜 그에게 한 곡조 들려줄 것을 부탁하자, 이 때 환이는 이미 현귀(顯貴)한 신분이었지만 상대가 휘지인 것을 알고 수레에서 내려 세 곡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들 둘은 서로 생판 모르는 사이였으나 음악을 끝내고는 둘 사이에 한 마디 대화도 없이 그냥 수레에 올라 유연히 가버렸다. 《晉書 卷八十一》
♣ 환이[桓伊]진(晉)나라 초국(譙國) 질현(銍縣)사람으로, 젓대를 잘 불어 당시에 강좌(江左)에서 으뜸이었다 한다.
♣ 환이[桓伊]환이는 진(晉) 나라 사람으로 음악에 뛰어나서 강좌(江左)의 일인자로 일컬어졌는데, 그가 일찍이 청계(淸溪)를 지날 적에 왕휘지(王徽之)가 본디 지면(知面)도 아닌 처지에 사람을 시켜 그에게 한 곡조 연주해 주기를 청하자, 그는 선뜻 수레에서 내려와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젓대 세 곡조를 연주하고는 바로 수레를 타고 가버렸다고 한다. 《晉書 卷八十一》
♣ 환이[桓彝]환이는 진(晉)의 충신으로 자는 무륜(茂倫)인데 천성이 활달하고 조감(藻鑑)이 있었다. 반적(反賊) 소준(蘇峻)을 공격하다가 힘이 다했으나 끝내 항복하지 않고 살해를 당하였다. 《晉書 桓彝傳》
♣ 환이무쟁[桓伊撫箏]충신을 알아줄 이 없음을 한탄한 말이다. 진(晉) 나라 명장 환이가 임금 앞에서 쟁(箏)을 타면서 원시(怨詩)를 노래하기를 “임금 되기도 쉽지 않거니와, 신하가 되기는 참으로 어렵네. 충신한 일은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의심받는 걱정만 있다오[爲君旣不易 爲臣良獨難 忠信事不顯 乃有見疑患].”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八十一》
♣ 환저기[環滁記]송(宋) 나라 구양영숙(歐陽永叔) 즉 구양수(歐陽修)가 지은 ‘취옹정기(醉翁亭記)’를 말한다. 그 글 첫머리에 “저주(滁州)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모두가 산뿐이다.[環滁皆山也]”라고 했기 때문이다.
♣ 환정[宦情]벼슬살이를 하고싶은 욕망.
♣ 환제산여수[環滁山與水]제주는 중국에 있는 고을 이름인데, 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의 취옹정기(醉翁亭記)에 “제주를 빙 둘러싼 것은 모두 산이다.[環滁皆山也]”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 환주[環柱]진시황(秦始皇)이 연(燕) 나라에서 보낸 자객(刺客) 형가(荊軻)의 칼에 쫓기어, 궁중에서 기둥을 돌며 피하던 고사를 인용하여 비유하였다.
♣ 환중[環中]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있는 곳. 즉 시비(是非)를 초월한 절대의 경지를 말함. 《莊子 齊物論》
♣ 환중[環中]환중은 공허한 곳으로 시비를 초월한 절대적인 경지를 말하는데 장자(莊子)의 “피와 차를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을 도추(道樞)라고 한다. 문의 지도리는 환중을 얻어야 무궁한 것에 응할 수 있으니 시란 하나의 무궁한 것이며 비 또한 하나의 무궁한 것이다.[彼是莫得基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而應無窮 是一無窮 非亦一窮]"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莊子 庚桑楚ㆍ齊物論》
♣ 환천[還賤]공사천(公私賤)으로서 천역(賤役)을 면하였던 자를 천역으로 돌려보내는 것.
♣ 환천[環穿]왔다갔다하다.
♣ 환체[換遞]벼슬아치가 서로 교환됨으로 해서 체직되는 일.
♣ 환추[豢芻]곡식을 먹는 동물과 풀을 먹고 사는 동물로 맛있는 고기.
♣ 환한[孚渙汗]임금의 조서(詔書)나 칙명(勅命)의 반포를 비유한 말. 땀은 한번 나오면 다시 들어가지 못하듯이, 조서나 칙명도 한번 반포하면 다시 거두지 못하고 반드시 시행해야 하므로 이른 말이다.
♣ 환해[宦海]관계(官界)를 바다에 비유하여 환해(宦海)라고 부르는데, 관직에 있는 것은 험한 바다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풍파(風波)가 많아 승침(升沈)이 무상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다.
♣ 환형[還衡]수레멍에를 돌리다.
♣ 환호도강[懽虎渡江]후한 때 유곤(劉昆)이 강릉 태수(江陵太守)로 있을 적에 그의 인정(仁政)에 감화된 나머지 평소 호환(虎患)이 극심했던 그 고을에서 마침내 범들이 모두 새끼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멀리 가 버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七十九》
♣ 환호작약[歡呼雀躍]기뻐서 소리치며 날뜀
♣ 환혼[還魂]원래는 죽은 사람이 다시 소생하는 것을 말하는데, 과거시험에서 첫 심사에 낙제했다가 재차 심사에서 합격된 것을 말하기도 한다.
♣ 환환[洹洹]물이 흐르는 모양, 성한 모양
♣ 환환[桓桓]굳센 모양, 용맹스러운 모양
♣ 환환[歡歡]기뻐하는 모양
♣ 환환[渙渙]물이 성하게 흐르는 모양, 광택이 있는 모양
♣ 환환[奐奐]빛남, 밝은 모양
♣ 환환[丸丸]순하고 곧음
♣ 활계회종리지서[活計會從ꝃ地鼠]두더지는 땅을 마치 쟁기질하듯 뒤지는 것이므로, 전하여 농사지어 먹고사는 데에 비유한 말이다.
♣ 활락도[豁落圖]몸을 수양하는 방법이 적혀 있는 도서(道書)를 말함.
♣ 활연[豁然]문득, 갑자기.
♣ 활인원[活人院]전에 벼슬하던 문사(文士)로서 승문원(承文院)에 들어와 학관(學官)이 되었다가 이로 말미암아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된 사람이 많으므로, 사람을 다시 살리는 곳이라 하여 승문원의 별명이 된 말이다.
♣ 활활[滑滑]진흙이 미끄러운 모양
♣ 활활[活活]“활활”은 틀린 독음, 올바른 독음과 뜻은 “괄괄; 물이 기운차게 흐르는 소리, 미끄러운 것, 진창을 걷는 일”임.
♣ 황[簧]피리 등의 악기의 얇은 떨림판, 즉 리드(reed)이다. 혀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보통 갈대로 만든다.
♣ 황각[黃閣]한대(漢代)에 승상(丞相)이 나라 일을 보던 곳을 황각이라 불렀는데, 그곳 문을 누런 색으로 칠했었기 때문이다. 당(唐) 나라 때에는 문하성(門下省)도 황각이라 불렀다. 자각(雌閣)이라고도 하는 것은 옛날엔 노란 칠을 흔히 자황(雌黃)으로써 했기 때문이다.
♣ 황각조갱[黃閣調羹]의정부(議政府)에서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황각은 의정부의 별칭이고, 국을 끓인다는 것은 재상이 국가의 일을 다스리는 것을 비유한 말로, 서경(書經) 열명 하(說命下)에, “만약 국을 끓일 경우에는 너를 소금과 매실로 삼겠다.” 하였다.
♣ 황간[黃幹]황간은 주희(朱熹)의 사위이며 고제(高弟)로서 호는 면재(勉齋)이다. 주희가 일찍이 예서(禮書)를 편찬하였다가 상례(喪禮)ㆍ제례(祭禮) 두 편을 황간에게 맡겨 이를 완성하게 하였으며, 임종시에 그에게 도통(道統)을 전했다. 《宋史 卷四百三十》
♣ 황감[黃甘]황감은 황감(黃柑)과 같은 것으로 밀감임.
♣ 황감동정[黃柑洞庭]감자[柑]는 동정(洞庭)에서 나는 것이 유명하다.
♣ 황감저작[黃甘抵鵲]중원(中原)에서는 귀중히 여기는 것을 변방에서는 천히 여긴다는 뜻으로 곤산(昆山)의 곁에서는 옥이 흔한 때문에 옥박(玉璞)을 까마귀나 까치에게 던져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황갑[黃甲]과거(科擧)의 갑과(甲科)에 급제한 사람을 이름. 갑과 급제자의 명단(名單)은 특히 황지(黃紙)에 썼던 데서 온 말이다.
♣ 황강[黃崗]일명 황강(黃岡)으로, 유배지(流配地)를 뜻하는 말이다. 송(宋) 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5년(1082) 즉 ‘적벽부(赤壁賦)’를 짓게 된 임술년(壬戌年)에 소동파(蘇東坡)가 그곳으로 귀양을 갔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 황강[黃岡]황주(黃州)의 별칭이다.
♣ 황강고사[黃崗故事]송(宋) 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연간에 소동파(蘇東坡)가 황강(黃崗)에 귀양갔을 때 그의 아우 자유(子由)도 균주(筠州)로 좌천되어 내려왔으므로 오랜만에 해후하여 함께 노닌 고사가 있는데, 소동파의 ‘감구시(感舊詩)’ 서문에 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蘇東坡詩集 卷33》
♣ 황강유편[黃崗遺篇]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를 가리킨다. 황주(黃州)에 유배된 그가 송(宋) 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5년(1082) 즉 임술년에 양세창(楊世昌)과 함께 적벽(赤壁)에서 두 차례 뱃놀이를 하고 나서 그 감회를 전(前)ㆍ후(後)의 두 적벽부로 써내었다. 황강(黃崗)은 보통 황강(黃岡)이라고 하는데 바로 황주(黃州)를 뜻한다.
♣ 황강적[黃岡跡]황강은 호북성(湖北省) 황강산(黃岡山) 동쪽에 있는 황니판(黃泥坂)을 말한 것으로,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에 “두 손이 나를 따라 황니의 판을 지났다.[二客從予 過黃泥之坂]"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황거[黃裾]수령(守令)이 행차할 때 앞을 인도하며 갈도(喝道)하는 졸노(卒奴)배.
♣ 황건적[黃巾賊]후한(後漢) 때 장각(張角) 등을 말한다.
♣ 황견[黃絹]아름다운 시문(詩文)을 가리킨다. 삼국 시대 때 위(魏) 나라의 무제(武帝)가 양수(楊脩)와 함께 조아비(曹娥碑) 아래를 지나다가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양수에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양수가 안다고 하자, 무제가 “경은 내가 알아낼 때까지 말하지 말라.” 하였다. 30리를 더 가서 무제가 알아내었다고 하면서 양수에게 딴 종이에 뜻을 쓰게 하였다. 양수가 쓰기를, “황견(黃絹)은 색사(色絲)로 절(絶) 자이고, 유부는 소녀(少女)로 묘(妙) 자이고, 외손은 여자(女子)로 호(好) 자이고, 제구는 수신(受辛)으로 사(辭) 자이니, 절묘호사(絶妙好辭)입니다.” 하였는데, 무제가 쓴 것도 양수와 같았다. 《世說新語 捷語》
♣ 황견묘[黃絹妙]절(絶)의 파자(破子) 은어(隱語)로, 조조(曹操)가 일찍 조아비(曹娥碑) 아래를 지나는데 양수(陽修)가 좇았다. 비 등에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舊)란 8자가 쓰여 있거늘, 양수가 풀이하되, “황견(黃絹)은 색실이니 글자로 절(絶)자, 유부(幼婦)는 젊은 여자이니 글자로 묘(妙)자, 외손(外孫)은 딸의 아들이니 글자로 호(好)자, 제구(제舊)는 쓴 것을 받는 그릇이니 글자로 사(辭)자이니 이른바 절묘호사(絶妙好辭)란 말이다.” 하였다.
♣ 황견유부[黃絹幼婦]‘절묘(絶妙)’라는 두 글자의 은어(隱語)로, 아름다운 시문(詩文)을 가리킨다. 삼국 시대 때 위(魏) 나라의 무제(武帝)가 양수(楊脩)와 함께 조아비(曹娥碑) 아래를 지나다가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양수에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양수가 안다고 하자, 무제가 “경은 내가 알아 낼 때까지 말하지 말라.” 하였다. 30리를 더 가서 무제가 알아 내었다고 하면서 양수에게 딴 종이에 뜻을 쓰게 하였다. 양수가 말하기를, “황견(黃絹)은 색사(色絲)로 절(絶) 자이고, 유부는 소녀(少女)로 묘(妙) 자이고, 외손은 여자(女子)로 호(好) 자이고, 제구는 수신(受辛)으로 사(辭) 자이니, 절묘호사(絶妙好辭)입니다.” 하였는데, 무제가 쓴 것도 양수와 같았다. 그러자 무제가 “나의 재주가 경에게 못 미치는 것이 30리이다.” 하였다. 《世說新語 捷語》
♣ 황계[璜溪]반계(磻溪)의 이칭. 태공 망(太公望)이 이곳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황옥(璜玉)을 얻었기 때문에 이렇게 일컫는다.
♣ 황계[荒鷄]삼경(三更) 이전, 즉 새벽이 되기도 전에 우는 닭으로, 그 소리는 보통 악성(惡聲)이라고 하여 불길한 조짐으로 받아들여졌다.
♣ 황계[黃鷄]진(晋)나라 조적(祖逖)이 밤에 유곤(劉琨)과 같이 자다가, 황계(荒雞)의 소리를 듣고 발로 유곤을 차서 일으키고 춤을 추면서, “이것은 나쁜 소리가 아니다. 황계는 새벽이 되기 전에 일찍 우는 닭을 말하는데 황계가 울면 난리가 난다.” 하였으니, 이는 조적이 한 번 시세를 타서 공명을 세울 큰 뜻이 있는 것이었다.
♣ 황계백일세쟁영[黃雞白日歲崢嶸]백거이(白居易)의 시(詩)에, “황계는 새벽을 재촉하고, 백일은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재촉한다.[黃鷄催曉丑時鳴 白日催年酉時沒]”하였다.
♣ 황계백일최[黃鷄白日催]백거이(白居易)의 ‘취가(醉歌)’에 나오는 “누런 닭은 새벽을 재촉하여 오전 두 시에 울고, 하얀 해는 해를 재촉하여 오후 여섯 시에 진다.[黃鷄催曉丑時鳴 白日催年酉時沒]”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白樂天詩後集 卷1》
♣ 황고산[黃孤山]황고산은 조선조 중종 때의 명필로 이름은 기로(耆老), 자는 태수(鮐叟), 본관은 덕산(德山), 고산은 그의 호다. 특히 초서를 잘 썼다.
♣ 황고집[黃固執]황고집은 평양인(平壤人) 황순승(黃順承)의 별명으로, 성품이 아주 강직하여 그 당시 사람들이 황고집이라 하였다. 어느 명절날[節日] 새벽에 말을 타고 성묘(省墓)하러 가다가 평양 보통문 밖에서 도적을 만나자 말[馬]을 주면서 “의복은 제사를 지내야 하므로 주지 못하겠다.” 하니, 도적이 황 고집인 줄을 알고 즉시 말을 돌려주고 달아났다고 한다. 《松岳集》
♣ 황곡[黃鵠]고니의 일종으로 한 번 날면 천리를 간다 한다.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황색을 띤 대조(大鳥)의 이름인데, 전하여 대재(大才)가 있는 사람에 비유한다.
♣ 황곡가[黃鵠歌]한 무제 때 강동왕(江東王) 건(建)의 딸 세군(細君)을 공주로 삼아 오손국(烏孫國)의 곤막(昆莫)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곤막이 늙은 데다 언어도 통하지 않자 공주가 비수(悲愁)에 젖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원컨대 황곡이 되어 고향에 돌아갔으면.[願爲黃鵠兮歸故鄕]”이라 하였다 한다. 《漢書 西域傳下 烏孫國》
♣ 황공로[黃公壚]진(晉) 나라 왕융(王戎)이 혜강(嵇康)과 완적(阮籍) 등과 청담(淸淡)을 하며 술을 먹었던 주점 이름이다. 세설(世說)에 “왕융(王戎)이 황공의 주로(酒壚)를 지나면서 객에게 이르기를 ‘내가 옛날에는 혜숙야(嵇叔夜)ㆍ완사종(阮嗣宗)과 함께 이 술집에서 실컷 취하며 즐겼는데, 이 두 사람이 죽은 뒤로는 이곳이 비록 가까우나 까마득하기가 산하(山河)가 막힌 것 같이 여겨진다.’고 하였다”. 하였다.
♣ 황공비략[黃公祕略]병법(兵法)에 능통했다는 말이다.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에게서 태공 병법(太公兵法)을 전수받아 한 고조(漢高祖)의 작전을 도왔던 고사가 있다. 《漢書 張良傳》
♣ 황공주로[黃公酒壚]죽림칠현(竹林七賢)인 왕융(王戎)과 혜강(嵆康), 완적(阮籍) 등이 질탕하게 마셔대던 술집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를 회상할 때 흔히 비유하는 표현이다. 혜강과 완적이 죽은 뒤 왕융이 상서령(尙書令) 신분으로 이곳을 지나가다가 옛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관직에 매인 자신의 처지를 탄식한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傷逝》
♣ 황과[皇荂]옛날 가곡 이름. 《莊子 天地》
♣ 황관[黃冠]농부의 관. 도사(道士)가 쓰는 관. 전하여 도사를 지칭하기도 함.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농부는 황관을 쓰는데, 황관은 풀로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 황관귀경호[黃冠歸鏡湖]황관은 도사(道士)의 관인데, 당(唐) 나라 때 하지장(賀知章)이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도사가 되어 임금으로부터 경호(鏡湖) 한 굽이를 하사받아 그 곳으로 가서 은거했던 데서 온 말이다. 《唐書 卷一百九十六》
♣ 황구소아[黃口小兒]어린 아이라는 뜻. 참새 새끼의 황색 주둥이(黃口)에서 연유한 말.
♣ 황구아[黃口兒]참새의 새끼를 말한다.
♣ 황구요탁[黃口謠啄]악부시집(樂府詩集) 맹호행(猛虎行)에 “배고파도 맹호에게 붙여 먹지 않고 해 저물어도 참새에게 붙여 깃들이지 않는다.” 했는데, 자신의 청렴하지 못함을 이들도 싫어한다는 겸사로 인용한 듯하다.
♣ 황구첨정[黃口簽丁]黃口는 새 새끼처럼 어린아이의 입이 노랗다는 데서 유래한 말로, 어린아이라는 뜻 어린아이를 장정으로 군적(軍籍; 군인 명부)에 올림. 어린아이도 장정으로 군적에 올려 세금을 착취하던 조선말 탐관오리들의 횡포
♣ 황궁[黃宮]도가(道家)의 말로 머리[腦頂]를 이름.
♣ 황권[黃卷]책을 가리킨다. 옛날에 좀이 슬지 않도록 황벽(黃蘗) 나무의 즙을 짜서 서책에 발랐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 황권공부[黃卷工夫]황권은 옛날 좀을 막기 위하여 종이를 황색으로 물들여 책을 만들었으므로 경전(經傳)에 대한 공부를 말한다.
♣ 황권의장정[黃卷擬章程]경서(經書)의 교훈으로 자신의 법도를 삼을 것이라는 뜻이다.
♣ 황극[黃棘]나무 이름. 노란 꽃에 둥근 잎.
♣ 황극[皇極]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규범. 홍범(洪範)에 있는 말인데, “크게 중정(中正)한 도”라는 뜻이다.
♣ 황금대[黃金臺]대(臺) 이름인데, 전국 시대 때 연(燕) 나라 소왕(昭王)이 제(齊) 나라에 원수를 갚고자 천하의 현사(賢士)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역수(易水) 가에 쌓았다는 대(臺)로, 그 위에 황금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지금도 뒷사람이 쌓은 대가 있어 연경팔경(燕京八景)의 하나인 금대석조(金臺夕照)로 유명하다.
♣ 황금압[黃金鴨]누런 향로(香爐)를 이름. 서갱(徐鏗)의 시에, “香烟結霧籠金鴨”이라는 것이 보임.
♣ 황기[黃綺]하황공(夏黃公)과 기리계(綺里季). 진(秦)나라 말기에 상산(商山)에 들어가 숨어살던 이른바 상산사호(商山四皓) 중의 두 사람. 《高士傳》
♣ 황녕[黃寧]도교의 황정경(黃庭經)의 도를 수련하여 이루는 일.
♣ 황노직[黃魯直]황노직은 송(宋) 나라 때의 황정견(黃庭堅)을 말한다. 노직은 그의 자.
♣ 황당[黃堂]태수(太守)가 거처하는 청사(廳舍)를 가리킴. 옛날에 태수 청사의 벽을 자황(雌黃)으로 바른 데서 연유된 것이다. 《吳郡國志》
♣ 황당리[黃堂理]황당은 한(漢) 나라 때 황각(黃閣)을 일컫는 말로 곧 승상부(丞相府)를 말하며, 섭리는 직책을 잘 수행하여 천지(天地)를 조화(調和)한다는 뜻이다.
♣ 황당무계[荒唐無稽]말이나 행동이 허황되고 터무니가 없음
♣ 황대[璜臺]은의 마지막 왕 주가 쓰던 술 연못.
♣ 황대과[黃臺瓜]당나라 무후(武后)가 자기의 아들을 자꾸 죽이므로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황대 밑에 외를 심었더니 셋 따고 나중에는 넝쿨만 안고 돌아오네.” 하였다.
♣ 황대권만[黃臺捲蔓]황대(黃臺)는 언덕 이름. 당(唐)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태자 홍(弘)을 독살하고 차자인 현(賢)을 태자로 봉했는데, 이때 현이 고종(高宗)을 곁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감히 상(上)에게 말하지는 못하고 깊은 걱정에 빠진 나머지 황대고사(黃臺苽辭)라는 노래를 지어 악공으로 하여금 그를 늘 노래하게 하여 상과 후(后)가 느끼고 깨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 가사 내용이, 익은 외를 하나 둘 다 따고 나면 끝에 가서는 덩굴을 걷어 안고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되어 있음. 《唐書 建寧王倓傳》
♣ 황도[黃圖]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황도(黃圖)가 나오는데, 삼보궁관(三輔宮觀)ㆍ능묘(陵廟)ㆍ명당(明堂)ㆍ벽옹(辟雍)ㆍ교전(郊田) 등을 기록하였다.
♣ 황도[黃道]태양(太陽)이 운행하는 궤도(軌道). 천구(天球)의 황도(黃道)는 양 옆으로 각각 8도로서 도합 16도인데 그 구간을 황도대(黃道帶)라 한다. 해와 달과 주요 행성이 이 길로 운행된다고 함.
♣ 황도[黃道]해와 달이 다니는 길. 전(轉)하여 제왕이 다니는 길을 말하기도 한다. 진서(晉書) 제12권 천문지(天文志)에, “해에는 중도(中道)가 있고 달에는 구행(九行)이 있는데, 중도란 것은 황도(黃道)이며, 광도(光道)라고도 한다.” 하였다.
♣ 황도[皇圖]황도는 제왕(帝王)이 통치하는 판도(版圖)이다.
♣ 황도[黃道]황제의 의범(儀範)을 말한다.
♣ 황도일[黃道日]황도일은 음양도(陰陽道)의 측면에서 일을 거행하기에 가장 좋은 길일(吉日)을 말한다.
♣ 황독[黃獨]황독은 토란의 이명(異名). 옛날 형악사(衡岳寺)의 중 명찬선사(明瓚禪師)가 성품이 게을러 음식 찌꺼기를 먹는다 하므로 이필(李泌)이 이상하게 여겨 찾아가 보니, 화롯불에 토란을 굽고 있었다 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동곡현가(同谷縣歌)에 “황독은 싹이 돋지 않았는데 산에는 눈이 마구 퍼붓고[黃獨無苗山雪盛], 짧은 옷은 자주 당겨도 정강이를 못 가린다.[短衣數挽不掩脛]"하였다.
♣ 황두랑[黃頭郞]오행(五行)의 생극(生克)으로 보아 토극수(土克水)라 하여 토(土)는 황색(黃色)이므로 옛날에 배를 관리하는 벼슬아치들을 모두 누른 모자를 쓰게 하고 이름하여 황두랑(黃頭郞)이라고 하였음. 《漢書 鄧通傳》
♣ 황량[黃粱]인간 세상의 영욕(榮辱)이 한바탕 꿈처럼 부질없는 것을 가리킨다. 한단(邯鄲)의 노생(盧生)이 객사(客舍)에서 여동빈(呂洞賓)을 만나 자기의 곤궁한 신세를 한탄하였더니, 여옹이 베개 하나를 주며, “이것을 베고 누우면 뜻대로 되리라.” 하였다. 노생은 베개를 베고 누웠더니 모든 것이 소원대로 되어, 부귀공명(富貴功名)을 80년간 누리다가 깨고 보니 한바탕의 꿈이었는데, 여관 주인이 짓던 메조[黃粱] 밥이 채 익지도 않은 짧은 동안이었다 한다. 《枕中記》
♣ 황량몽[黃粱夢]황량몽은 곧 한단몽(邯鄲夢)과 같은 말이다. 황량은 누른 기장. 당 덕종(唐德宗) 때 심기제(枕旣濟)가 우언(寓言)으로 지은 침중기(枕中記)에서 나온 말로서, 인생의 부귀영화는 허무하다는 뜻으로 인용된다. 침중기에 의하면, 당 현종(唐玄宗) 7년에 매우 가난한 노생(盧生)이란 젊은이가 한단(邯鄲)의 객사에서 여옹(呂翁)이란 도사를 만나 그가 준 요술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그 베개 속으로 들어가 자기가 평소에 동경하던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꿈을 깨보니, 객사의 주인이 짓고 있던 기장밥이 아직 익지 않았다고 하였다.
♣ 황량미숙[黃梁未熟]당 나라의 침중기(沈中記)란 소설에 노생(盧生)이 한단(邯鄲) 여숙에서 도사(道士) 여옹(呂翁)을 만나 그가 주는 베개를 베고 꿈을 꾸어 출장입상(出將入相), 자손이 모두 영달(榮達), 80년의 호화를 누리다가 문득 깨니, 여숙 주인이 짓던 누른 조밥이 아직 익지 않았다.
♣ 황량불과편시증[黃粱不過片時蒸]부귀 공명이 덧없음을 비유한 말. 당(唐) 나라 때 노생(盧生)이라는 사람이 도사(道士) 여옹(呂翁)의 베개를 베고 잠을 잤는데, 좁쌀밥 한 번 짓는 동안에 온갓 부귀공명을 누린 꿈을 꾸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황량숙[黃粱熟]인간 세상의 부귀공명이 덧없음을 비유한 말. 당(唐) 나라 때 노생(盧生)이란 자가 도사(道士) 여옹(呂翁)의 베개를 빌어 잠을 잤더니, 메조밥을 한 번 짓는 동안에 부귀 공명을 다 누린 꿈을 꾸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 황량일취몽[黃粱一炊夢]당(唐) 나라의 도사(道士) 여옹(呂翁)이 기장밥을 짓는 동안, 곤궁함을 탄식하는 노생(盧生)을 위해 부귀 공명을 누리는 꿈을 꾸게 해 주었던 고사로서, 인생의 영화(榮華)라는 것도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의미이다. 한단지몽(邯鄲之夢)이라고도 한다. 《沈旣濟 枕中記》
♣ 황량지몽[黃粱之夢]당(唐) 나라 때 노생(盧生)이란 사람이 도사 여옹(呂翁)의 베개를 빌어 잠을 잤더니, 메조밥을 한 번 짓는 동안에 부귀공명을 다 누린 꿈을 꾸었다는 고사로, 즉 부귀공명이 덧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 황려[黃驪]경기도 여주(驪州)의 고호. 여강(驪江)에서 누른 말과 검정 말이 나왔다 하여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 한다.
♣ 황로[黃壚]죽림 칠현(竹林七賢)들이 모여서 노닐던 황공주로(黃公酒壚)로, 보통 세상을 떠난 벗을 추억할 때 쓰는 표현이다. 《世說新語 傷逝》
♣ 황로태반시교친[黃壚太半是交親]벗들 대부분이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왕융(王戎)이 혜강(嵇康) 완적(阮籍) 등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함께 노닐다가, 그들이 죽고 난 뒤에 생전에 어울려서 술을 마셨던 황공(黃公)의 주점[黃壚]을 지나면서 옛 추억에 잠겼던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傷逝》
♣ 황록[隍鹿]세상의 일은 진위(眞僞)가 서로 뒤섞여 있는 가운데 마치 환영(幻影)이나 꿈을 꾼 것처럼 득실(得失)이 무상(無常)한 것을 뜻하는 말이다. 정(鄭) 나라 때 어떤 사람이 나무를 하다가 사슴을 잡아 해자[隍]에 감춰두고 기뻐하며 돌아왔는데, 얼마 후에 감춰둔 곳을 깜박 잊어 그 일이 꿈 속에서 일어난 일이거니 생각하고 중얼거리며 돌아오는 것을 다른 사람이 듣고, 그곳을 찾아가 보니 사슴이 있었다. 집으로 가져 와서 그의 아내에게 그 내력을 얘기하고는 “내가 사슴을 얻었으니 그 사람은 참 꿈을 꾼 것이다.” 하니, 그 아내가, “당신이 실제로 그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라 꿈 속에서 만난 것이며, 이제 사슴을 얻었으니 당신이 참 꿈을 꾸었소.” 하였다. 그날 밤에 사슴을 잃은 나무꾼이 정말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따라 사슴을 가져 간 사람을 찾아내어 송사를 일으켰더니, 재판관이 그 사슴을 각각 반분하도록 하였으며, 뒷날 정군(鄭君)이 이 얘기를 듣고, “그 재판관도 꿈 속에서 그 사슴을 반분하라 한 것이 아니냐.” 하였다는 고사(故事). 《列子 周穆王》